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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문학 논문에 실린 글입니다.
모당공 후손인 홍만조 공에 의해 오늘날 시향을 모시는 안동 신성의 시조 할아버지를 비롯한 2대조 3대조 4대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게 된 자초지종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豊山 洪氏 門中의 家門意識 -洪良浩와 洪敬謨를 중심으로-
이군선*
1. 서론
2. 가문 위상 확립
3. 가문 의식의 표출
4. 결론
【국문초록】
지금은 그래도 많이 퇴색되었지만 어느 정도 행세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늘 조상과 가문을 언급한다. 우리 조상 중에 어떤 분이 있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하여 말하며 은연중에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이러한 가문의식은 한 사람의 행동에 제한을 주기도하고 행동 양식을 결정해주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洪履祥에서 洪重聖까지 풍산 홍씨가 명문으로 위상이 확립되는 과정과 洪良浩와 洪敬謨의 가문의식 표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풍산 홍씨는 고려 때 홍지경에서 시작되었는데 조선에 들어와 모당 홍이상이 문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며 가문의 중흥을 이끌었고 홍영이 가세를 확장하였으며 선조의 부마인 홍주원이 선조의 부마가 되며 가문을 명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홍주원의 아들 중에서는 장남인 홍만용의 자손이 가장 번성하였고, 홍만회의 경우는 홍중성으로 이어져 풍산 홍씨 가문의 문한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였다. 뒤를 이은 홍양호와 홍경모는 조상의 문집을 정리하고 묘지를 찬술하며 가계 관련 기록을 정리하는 것으로 가문의식을 표출하였다. 홍양호와 홍경모의 가문의식 표출 양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가문의식이 위기의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을 부지하고 이를 극복하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문의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그 의미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1. 서론
지금은 그래도 많이 퇴색되었지만 어느 정도 행세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늘 조상과 가문을 언급한다. 우리 조상 중에 어떤 분이 있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하여 말하며 은연중에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족보 역시 마찬가지이다. 거의 대부분의 집안은 족보를 만들고 이를 대물림하여 자기 집안이 그만큼 유서가 있는 가문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가문이 훌륭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자부심은 더 커지고 조상 중에 훌륭한 분이 있으면 그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그런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몸가짐을 조심하게 된다. 이와 같은 가문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가문의식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가문 의식은 한 사람의 행동에 제한을 주기도하고 행동 양식을 결정해주기도 한다. 조상을 생각하고 훌륭한 가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본고에서 살펴보고자하는 풍산 홍씨 역시 마찬가지이다. 풍산 홍씨가 역사에 그 이름을 드러낸 것은 고려 고종 때 洪之慶이 鄕貢으로 문과에 장원을 하면서부터이다. 홍지경에서 시작한 풍산 홍씨는 安東 豊山縣에서 일어나 대대로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다. 3대를 지나 洪演의 아들인 洪龜가 고려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풍산으로 돌아가다 高峰縣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고양시이다. 이후 이들은 慕堂 洪履祥(1549~1615)이 과거를 통해 발신할 때까지 이곳에 세거하게 된다.
고려 이후 풍산 홍씨가 명문으로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대사헌을 지낸 홍이상이 과거를 통해 발신하여 가문이 흥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후 다음 대인 洪霙(1584~1645)이 月沙 李廷龜의 사위가 되고 홍영의 아들인 洪柱元이 선조의 부마가 되며 풍산 홍씨 가문은 더욱 창성하게 되었다. 홍주원은 洪萬容, 洪萬衡, 洪萬熙, 洪萬恢 네 아들을 두었는데 홍만용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조선 후기 정치와 문학 방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洪良浩와 洪敬謨는 홍만회의 자손이다. 여기에서는 홍이상에서 洪重聖까지 풍산 홍씨가 명문으로 위상이 확립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이어 홍양호와 홍경모의 가문의식 표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가문 위상 확립
풍산 홍씨는 고려 고종 때 國學直學을 지낸 洪之慶이 향공으로 문과에 장원하며 역사에 그 이름을 드러내었다. 홍지경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都僉議舍人 知制誥를 지낸 洪侃이고 차남은 樞密使를 지낸 洪備이다. 홍간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朝奉大夫秘書尹으로 치사하였다. 홍간은 시로 성대한 명성이 있어 益齋의 櫟翁稗說 에 “洪平甫(侃)이 시 한 편을 지어 내놓을 적마다 賢愚를 막론하고 모두 즐겨 전한다.”고 하였고, 명나라 사신 朱之蕃은 海東詩選 을 보고 사람들에게 “孤雲 시는 거칠고 약한 듯하고 李仁老와 홍 아무개는 시가 매우 좋다.”고 평하였다. 佔畢齋 金宗直이 靑丘風雅 를 편찬하며 홍간의 시 수십 수를 싣고 “孤鴈行과 懶婦引 두 편은 바로 공 자신의 정황을 읊은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1) 洪侃
홍간은 密直使兼監察大夫와 進賢館大提學 寶文館大提學 春秋館大提學 上護軍事 등의 벼슬을 지낸 洪侑를 낳았다. 홍유는 홍문관 벼슬을 지낸 溟과 寶文閣 大提學을 지낸 演, 그리고 藝文館大提學을 지낸 浚을 낳았다. 그리고 딸 하나를 낳았는데 益齋 李齊賢의 아들인 李瑞種에게 시집갔다. 洪演은 承議校尉 龍騎巡衛司 右領郞將을 지낸 洪龜를 낳았다. 홍귀 이전에는 모두 세거지를 풍산에 두었는데 홍귀가 고려 말에 고양에 물러나 거처하며 이후 고양이 풍산 홍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홍귀는 洪伊, 洪儀, 洪俶을 낳았고, 홍숙은 洪繼宗을 낳았으며 홍계종은 洪禹甸을 낳았는데 홍우전은 자손이 없어 洪儀 대에서 갈라져 손자 대에 이른 洪世敬의 아들 洪脩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홍수는 大司憲을 지낸 洪履祥과 刑曹佐郞을 지낸 洪鸞祥, 그리고 典籍을 지낸 洪鳳祥을 낳았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려 말에 홍귀가 고양으로 은거하면서부터 홍이상에 이르기까지 5대 동안 풍산 홍씨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홍이상에 이르러 과거를 통해 발신하며 명문가로의 기틀을 세우게 된다. 여기에서는 洪履祥, 洪霙, 洪柱元, 洪萬恢, 洪重聖으로 이어지는 洪良浩와 洪敬謨의 직계를 중심으로 윗대에 가문의 위상이 어떻게 확립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92)
(2) 洪履祥
홍지경, 홍간, 홍유, 홍연 대에서 고관에 올라 가문이 번성하였던 풍산홍씨는 홍귀가 고양에 은거하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음으로 인해 그 명맥만 유지할 뿐 이렇다할만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홍이상대에 와서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며 가세의 회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홍이상은 아버지 洪脩와 어머니 聞慶 白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다음은 이정귀가 기술한 홍이상의 초년 모습이다. 공은 莊重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고 거동이 법도에 맞았다. 겨우 이갈이 할 어린 나이에 이미 經史를 통달하였고, 成童의 나이에는 누차 鄕學의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하였으나 뜻이 과거에 있지 않았다. 杏村 閔純이 講席을 열어 후진을 양성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책 상자를 메고 가서 수학하면서 義理를 연구하여 오묘한 경지에 이르니, 諸生들이 감히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승인 행촌도 ‘나보다 낫다.’라고
하였다.
홍이상은 1573년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1578년에는 대정시의 대책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1579년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선조는 그의 대책문을 보고 “지금 장원의 대책을 보니, 체제에 매우 맞다. 근래 科擧의 글이 아니다.[今觀壯元之策, 甚得庭對之體, 非近日科擧之文]”라고 칭찬하였다. 홍이상이 어렸을 때 그의 가정 형편은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李恒福이 지은 묘갈명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선인께서 수년 동안 風疾을 앓는 바람에 집이 점점 쇠락해지므로, 어떤 이가 향리로 돌아가 힘써 농사지어서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하자, 어머니가 이르기를, ‘차마 세 자식으로 하여금 노동복을 입고 田野에서 늙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 더욱 힘써 가르치고 감독하면서 가난을 잊고 글 읽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낮부터 밤까지 계속 글을 읽으며 모자가 한 등불 밑에서 불빛을 나누어 자기의 일을 하다 보니, 글을 講誦하는 소리와 어머니의 베 짜는 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처음의 뜻을 이루어 부진한 가업을 회복시켰으니, 지금 내가 이미 魁科에 급제해서 현달한 관직에 올라 三世를 推恩하여 父祖가 함께 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홍이상의 말을 이항복이 직접 인용한 것으로, 홍이상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부진한 가세를 회복하였다고 하였다. 풍산 홍씨 중흥에 홍이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풍산홍씨 후손들이 한결같이 언급하는 내용이다. 본고의 목적이 홍이상과 관련하여 가문 위상의 정립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고 나머지는 이미 다른 연구가 있으므로 생략한다. 홍이상에 의해 새롭게 대두된 풍산 홍씨는 다음대부터 명문가로 발돋움한다. 이는 후손들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홍이상이 앞길을 터놓았기에 가능하였다. 홍이상은 부인 安東 金氏와의 사이에 모두 6남 3녀를 두었다. 장남 洪霶은 문과에 급제하고 大司諫을 지냈으며, 둘째 洪雴은 문과에 급제하고 監司를 지냈고, 셋째 洪집(雨+集)은 문과에 급제하고 掌令을 지냈고, 넷째 洪霙은 문과에 급제하고 禮曹參判을 지냈다. 다섯째 洪박(雨+溥)은 判官을 지냈고, 여섯째 洪탁(雨+濯)은 부사를 지냈다. (李恒福, 白沙先生集 권3, 「贈資憲大夫吏曹判書洪公墓碣銘」. 先人苦風疾累年 家益旁落 或勸使歸鄕力田以自給則曰 慗使三子襏襫而老於田耶 敎督益力 撥貧佐讀晝以繼夜 則母子一燈 分光執業 講誦之音 與機杼相和 遂克成初志 光復墜緖 今吾旣 捷魁科登顯仕 得推恩三世 父祖與榮焉豊山) 그리고 장녀는 參奉 李敬裕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持平 趙公淑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는 禮曹正郞 許啓에게 출가하였다. 이 중에서 넷째 영의 후손들이 가장 번성하였다.
4)홍이상에 대하여 이항복이 묘갈명을 쓰고 이정귀가 신도비문을 쓴 사실과 홍이상의 넷째 아들인 홍영이 월사 이정귀의 사위가 된 것을 보아도당대 사인들 사이에서 홍이상의 중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풍산 홍씨가문에 있어 홍이상은 ‘가문의 중흥’을 이끌어 낸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있다.
(3) 洪霙
홍이상이 중흥을 이끈 풍산 홍씨는 洪霙(1584~1645)에게 이어져 더욱창성하게 된다. 홍영은 아버지 홍이상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605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2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李景奭은 홍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공은 이름난 公卿의 子甥이요, 형제 4인도 모두 특출한 자질을 발휘하여문과에 급제하는 등 가문의 명성이 대단하였다. 그럼에도 공은 사람됨이 곧고 신실한 데다 온화하고 후덕하여 자신을 내세우면서 교만하게 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도 黨派를 분별하여 따지지 않고 자신의 好惡에 따라 취사선택을 하면서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격의 없이 지냈으며, 남의 非違 사실을 보면 간혹 면전에서 배척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을 다시 마음속에 담아 두는 법이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의 장점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도, 바로 이 점 때문에 자신을 높이 내세우는 자들에게 중히 여김을 받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홍영의 형제 중 네 명이 문과에 급제하는 등 자신의 대에서 가문의 명성이 자자하였지만 홍영은 이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더욱이 큰 아들 홍주원이 선조의 부마가 되면서부터는 더욱 겸손하고 근신하는 자세를 유지한다. 자신은 월사 이정귀의 사위가 되었고 아들은 부마가 되었지만 언제나 몸가짐을 조심하였던 것이다.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된 뒤로부터는 더욱 겸손하고 근신하는 자세를 독실하게 견지하면서 이를 빙자하여 이익을 보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 儀賓府에서 비록 풍족하게 물품을 공급하며 대접해 주려고도 하였지만, 日用하는 것 이외에는 옛날과 다름없이 家計를 淸苦하고 儉朴하게 꾸려 나가곤 하였다. 홍영은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는 그다지 현달한 관직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풍산 홍씨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부친 홍이상에 버금간다고 할수 있다. 홍영의 자손이 조선 후기 정치와 문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홍영은 월사 이정귀의 딸인 부인과의 사이에 5남 4녀를 두었다. 장남 洪柱元은 貞明公主에게 장가들어 永安尉에 봉해졌고, 다음 洪柱後와 洪柱臣은 모두 진사이며, 다음은 洪柱韓과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참의를 지낸 洪柱國이다. 맏사위는 文學 李俊耈이고, 다음은 현감 李時術이고, 다음은 李恒鎭과 尹階인데 모두 士人이다. 이 중에서 장남 홍주원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조선 후기 정치와 문학 방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많았다. 홍영의 문장으로는 풍산세고에 「一架亭次朴汾西瀰韻」 한 편의 시만 전하고 있다. 홍영은 李景奭과 李植에 의해 묘갈명과 묘표가 지어졌다. 홍영은 풍산 홍씨 가문의 위상과 관련하여 홍이상 대에서 이룩한 가문의 위상을 바탕으로 인척 관계를 통하여 가세를 확장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4) 洪柱元
홍이상이 중흥을 이끌었고 홍영이 과거에 급제하고 인척관계를 통하여 가세를 확장하였다면 無何堂 洪柱元은 선조의 부마로 풍산 홍씨 가문을 명실상부한 명문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공은 돌아가신 대사헌 모당공의 손자이고 돌아가신 좌의정 월사 이 문충공의 외손이다. 또한 그의 덕과 재주와 문장은 장차 예원에서 비상하여 마땅히 경연에 출입하고도 남음이 있고 조정에서 원대한 계책을 내어도 넉넉하였을 텐데 다만 나라의 법제에 묶여 그 재주와 덕과 문장이 하나도 베풀어 진 바가 없었으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도 마땅하다고 하겠다. 尤庵 宋時烈은 홍주원이 덕과 재주와 문장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는데 부마라는 법제에 묶여 그의 능력을 하나도 쓰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여겼다. 홍주원의 문장력은 대체로 당대에도 인정하고 있었던 듯하다. 홍주원은 월사 이정귀와 北渚 金瑬에게 수학하였는데 이정귀가 ‘문형전수연’을 전해주겠다고 한 일화에서도 그의 문장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을 통해 정위를 회복하자 딸 정명공주를 위해 부마를 선택하였는데 이때 홍주원이 선택되었고 이 때문에 그의 재주는 쓰일 곳이 없게 되었다. 홍주원은 부마가 되어서도 대대로 청한했던 가풍을 이어 하루아침에 부귀해지고 높아졌으나 늘 겸손함으로 몸가짐을 하여 평소에 먹었던 마음을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文谷金壽恒은 그런 홍주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깨끗하게 방 하나를 쓸어 놓고 문학을 즐기며 연경에서 얻은 바의 예물들은 모두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돌아올 때에는 전대가 씻은 듯하였다. 평소 당시 조정을 지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조가에서 빠뜨린 것이 있다는 소리를 들음에 미쳐서는 문득 저녁을 마칠 때까지 기뻐하지 않았으며 그 지위가 아닌 곳에 처했다고 해서 종국을 근심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갑오년의 소에서 알 수 있다. 공의 문장은 월사 이공의 가법에서 얻은 것으로 자유(楊惲)가 사마천에 대해서와 같다. 시를 지음에 사정을 곡진히 그렸고 풍격과 격조가 겸하여 아름다워 매양 한 편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많이 회자하였다. 유고 약간권이 있어 집에 전해온다. 묵적은 풍격과 법도가 뛰어났으니 그 재주가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홍주원은 정명공주에게 장가들어 문과에 장원하고 판서를 지낸 洪萬容, 문과와 중시에서 급제한 洪萬衡, 공조 정랑을 지낸 洪萬熙와 진사로 판결사를 지낸 洪萬恢 네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인 만용의 자손들이 가장 번창하였다. 홍만용의 경우 洪重箕-洪錫輔-洪象漢으로 이어지는 계통은 洪樂性을 비롯하여 洪樂命 洪義謨 洪奭周 그리고 正祖의 부마인 永明尉 洪顯周 沆瀣 洪吉周 등 정치와 문예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한 인물들을 배출하였고 洪重箕-洪鉉輔로 이어지는 계통은 洪鳳漢, 洪麟漢을 비롯하여 洪樂仁, 洪樂信, 洪樂任 등이 문과 출신으로 고관을 지낸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막내인 홍만회는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홍양호와 홍경모의 직계로 다음에 이어 살펴보기로 한다.이렇게 보았을 때 홍주원은 홍이상-홍영 대에서 일군 가문을 명문으로 안착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5) 洪重聖
芸窩 洪重聖(1668~1735)은 아버지 判決事 洪萬恢(1643~1709)와 어머니 領議政 洪瑞鳳의 손녀이고 監司 洪命一의 따님인 南陽 洪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홍중성의 행장에 의하면 약관의 나이에 비범한 문학적 재능을 보여 명성이 자자했고 주위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신중하였고 총명하였으며 문사를 좋아하였다. 9세에 시를 지었는데 “대해의 물에 뜨지 않고 어찌 천지의 장엄함을 알리오.[不泛大海水, 安知天地壯]”라고 하니 식자들이 훌륭한 그릇이 될 것이라고칭찬하였다. 열여섯에 象村 申欽의 증손인 虛齋 申曅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신엽은 홍중성의 시재를 인정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주었다.
내 홍생의 고체시를 읽어 보니 我讀洪生古體詩
맑은 바람이 입안에 생겨나는 듯하다. 淸飈颯颯生牙頰
천구를 타듯 기이한 음향이 일고 鏗如天球發奇響
명구처럼 재빠르고 날랜 발을 펼치네. 矯如名駒展逸足
澹宕하며 고결하기는 짝 할이 적고 澹宕高潔世寡儔
진위 이하에는 이런 시가 없네. 晉魏以下無此音
지음은 누구인가 낙송자요 知音者誰洛誦子
유수와 고산은 백아의 거문고라네. 流水高山伯牙琴10)
洛誦子는 바로 三淵 金昌翕의 호이다. 장인과 김창흡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시재가 뛰어났지만 홍중성은 몇 차례 문과에 실패하고 40을 넘긴 나이에 음직으로 출사하였다. 김창흡과의 관계는 조선 후기 문단을 주도하던 農巖 金昌協 형제와 그 주위에 있던 문인들과 교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홍중성의 강한 문예적 취향은 상당 부분이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后溪 趙裕壽(1663~1741), 槎川 李秉淵(1671~1751), 滄浪 洪世泰(1653~1725) 등과도 교유하였다. 이 세 사람 역시 삼연을 중심으로 왕래하던 문인들이었다. 홍중성 이들 외에도 김시보(1658~1734), 崑崙 崔昌大(1669~1720), 陶谷 李宜顯(1669~1745), 槎川의 동생 李秉成(1675~1735), 晩霞 尹游(1674~ 1737)와 그 막내 白下 尹淳(1680~1741), 鶴巖 趙文命(1680~1732), 申靖夏(1680~1715), 南有容(1698~ 1773) 등과 교유하였는데 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당대 문예계에서 이름을 떨치던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문장을 지음에는 육경을 근본으로 하고 팔지의 시법을 법도로 하여 악부와 가행은 조금도 일삼지 않았다. 중년에는 개원 천보로 준적을 삼아 곤륜최창대, 사천 이병연, 후계 조유수, 창랑 홍세태와 같은 당세 명류들이 다투어 교분을 정하였고 시사를 결성하였으니 풍류와 한묵이 일세를 비추었다.사천이 매양 시에 성당의 풍모가 있는 자는 오직 공 한사람일 뿐이라고 칭찬하였다.
홍양호는 사천 이병연의 입을 빌어 시재에 뛰어났음을 밝히고 있다. 홍중성의 이러한 문예적 취향은 향후 홍양호와 홍경모에게 이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홍중성은 비록 문과에 급제하여 고관으로 가문을 빛내지는 못했지만 풍산 홍씨 가문에서 ‘문한의 확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있다. 홍중성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洪鎭輔로 영의정 沈壽賢의 딸에게 장가들어 洪良浩와 洪挺漢을 낳았고 繼配 尹氏에게서 판서를 지낸 洪明浩를 낳았다.
3. 가문 의식의 표출
1) 홍양호의 경우
耳溪 洪良浩는 1724년 4월 26일 서울 薰陶坊 泥峴 四宜堂에서 홍진보와 淸松 沈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2살과 13살 때 조부와 부친을 잇달아 여의고 홍양호의 집안은 급격히 기울게 된다. 가세가 어려워진 홍양호는 서울의 四宜堂을 잠시 남에게 넘겼다가 과거에 급제하며 다시 찾게 된다. 홍양호의 외가는 少論의 명문이었고 정치적 영향도 대단하였다. 홍양호의 외조부는 領議政을 지낸 沈壽賢(1663~1736)이고 외숙은 樗村 沈錥이다. 심수현은 충후함과 높은 덕으로 일컬어졌고 심육은 霞谷 鄭齊斗(1649~1736)의 수제자로 少論 强硬派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대단한 명망이 있었다. 홍양호의 학문적 근원이 저촌 심육에게 있음은 鄭元容(1783~1873)의 「判中樞府事兼吏曹判書洪公良浩墓誌銘」에서 볼 수 있다. 홍양호 또한 자신이 찬한 「太史氏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沈錥과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열 살 때 고아가 되어 외가에서 양육되었다. 백구 저촌 심선생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선생이 그 자질이 훌륭해 가르칠만하다고 하여 고인의 위기지학으로 가르쳤다. 나는 속으로 기뻐하여 마음을 오로지 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위의 글처럼 홍양호는 외가의 학풍과 학문적 분위기를 이어받게 된다. 그러나 홍양호의 외가는 乙亥獄事가 일어나며 거의 滅門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와 아울러 홍양호의 신변도 매우 불안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李天輔(1698~1761)가 홍양호의 문학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극력 주장하고 영조도 홍양호의 博學을 높이 사주어 이 위기를 모면했다. 홍양호는 正祖 즉위 후 洪國榮이 세도를 행하자 鏡興으로 나갔다가 중앙 정계가 정조의 친정체제로 바뀌자 내직으로 돌아와 1794년 10월 耆老所에 들어가고 바로 12월에 2차 燕行에 임하게 된다. 홍양호는 두 차례 연행을 하게 되는데, 1차 연행을 통하여 선진 문물을 흡수하여 자신의 사고를 한층 새롭게 하는 한편, 戴衢亨과 같은 淸의 학자들과 만나 교유하며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중국 인사에게 묻기도 했으며, 중국 학계의 동향도 아울러 파악하였다. 1차 燕行에 비하여 2차 연행의 성과가 더욱 컸는데 다름 아닌 淸의 禮部尙書 紀昀과의 만남이다. 이들의 만남은 이후 대대로 이어져 손자인 冠巖 洪敬謨에 이르러 ‘三世神交’의 두터운 교분을 쌓게되었다.
홍양호는 筆法에 있어서도 상당한 성취를 보여 홍경모에게 글쓰기 교본으로 「筆苑眞訣」을 써 주었을 정도였다. 홍경모의 글 여러 곳에 보이는 글씨에 대한 평가는 매우 자세한데 이는 모두 홍양호로부터 배운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홍양호는 금석문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古碑를 발굴하는 한편 이러한 것들을 拓本으로 남겨 훗날 홍경모가 이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1) 문집의 정리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연달아 여읜 홍양호는 과거에 급제하여 옛 가문의 위상을 되찾게 되자 모든 일은 자신의대에서 처리하고자 하였다. 그 첫 번째로 한 일이 덕수 이씨 소유의 우이동에 있는 홍만회의 묘 터를 풍산 홍씨의 소유로 한 것이다. 우이동 홍만회의 무덤은 홍만회의 사위였던 醉村 李㙫의 말에 의해 묘를 쓰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집이 살아있을 적에 문서를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묘사가 불편하고 후손들이 멀어지면 분쟁의 단서가 될까 염려한 홍양호가 이집의 장손인 李溵에게 요구하여 저동에 있던 풍산 홍씨 소유의 땅과 바꾸고 우이동을 풍산 홍씨의 소유로 하였다.13) 이렇게 자신의 가문에 대하여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던 홍양호는 조고인 운와 홍중성의 문집을 정리하여 간행한다. 양호가 열두 살 되던 해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다음 해 아버지께서 세상을 버리셨다. 또 동당의 존속으로 가르쳐 줄만한 분이 없어 가정( 洪良浩, 耳溪集 권13, 「牛耳墓山記」. 홍양호는 「우이묘산기」에 우이동을 얻게 된내력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사의 행함에 막연히 살펴 알 수 없었다. 조금 장성함에 미쳐 비로소 선배장로들을 인하여 할아버지 일의 본말을 듣게 되었다. …(중략)… 사천옹이 일찍이 양호에게 일러 “우리들 중 시가 성당에 가까운 자는 오직 네 할아버지일 뿐이니 전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양호가 이에 옛 상자를 뒤져 유고를 점검해보니 초년의 작품은 모두 없어져 계를 맺었던 선배들의 옛 집에서 두루 구하여 짧은 글과 끊어진 편폭을 얻어 모아 약간 권을 만들어 사천옹에게 나아가 질정하니 시가 모두 네 편이었고 문과 잡저가 두 편이었다. …(중략)… 소자도 또한 장차 늙어가니 오래되어 없어질까 염려하였다. 아우 명호가 마침 서군에 수령으로 있어 활자로 인행하고 보고
들은 것이 미친 바를 삼가 기록하니 후대의 보는 자는 그 시대를 논할 수있을 것이다.14)홍양호의 기록에 의하면 이병연의 권고로 芸窩遺稿 를 정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양호는 홍중성이 평소 저술을 좋아하지 않아 많은 편수를 남기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겼다. 그래서 홍중성과 교유했던 인물들에게 주고받은 시문을 모으고 남아있는 유고와 합하여 이병연에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홍명호가 안악 군수로 나가있던 1784년에 활자로 간행하였다. 이는 자신의 시대에 정리하지 않으면 후대에 일실될 것을 염려하였고 윗대의 기록을 후손에게 남겨주려는 의식의 소신이라 할 수 있다. 홍양호는 또한 풍산 홍씨의 중흥을 이끈 홍이상의 문집에도 발문을 썼다. 홍이상 문집의 간행 여부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홍양호가 이에 관여했던 것은 사실이다. 홍양호는 발문에서 먼저 모당에 대하여 “한 시대의 명공 석학과 말머리와 걸음을 나란히 하여 높은 반열에서 우뚝이 빼어나 아무도 앞서는 자가 없었다. 연세와 작위가 모두 높았으며 덕스러운 말에 흠이 없어 당시 태산북두와 같은 명망을 받았다. 후세에 묘정에 배향되어 우뚝이 중흥조의 명신이 되었고 자손들도 번창하여 높은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고 복록의 성대함도 비할 바가 드물었다.”고 평가하였다. 후손된 입 장에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무한한 존모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이어 저술한 것이 많지 않음과 그마저도 흩어져 인멸될까 염려하여 후손들이 도모하여 홍이상의 유작을 모으는 과정에 대하여 기술하였다.여러 손자들이 서로 도모하여 “지금 우리 선조의 덕과 아름다움이 이미 드러났고 표창되어 유감이 없게 되었으나 오직 문장만은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어 끝내 아름다운 말과 성대한 자취가 흩어져 인멸되게 된다면 감히 훌륭한 후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집에 전해오던 시문 각 한 편을 교정하여 世系와 年譜를 붙이고 祭文과 挽詞, 言行錄과 碑誌로 이었다. 그리고 증손 만퇴당 및 7대손 낙순이 모은 것에서 유사를 채록하여 합하여 세 권을 이루고 기궐씨에게 맡겼다. 慕堂遺稿 의 간행 여부에 대한 것은 기존 연구가 있으므로 가문의식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언론과 행적이 모두 쪼가리 글과 찢어진 편지에 실려 있어 상고하고 본받을 만하다. 모든 우리 선조의 후손들은 대체로 행할 바가 집에 있을 때나 나라에 있을 때에 공경하고 삼가 우리 선조의 아름다운 범절을 실추시키지 말면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시경에 이르길 “네 조상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덕을 닦을 지어다.”라고 하였고 또 “모든 주나라의 선비도 드러나지 않을까 또한 대대로 하리로다.”고 하였으니 어찌 서로 권면하지 않겠는가? 홍양호는 홍이상의 언론과 행적을 모당유고 를 통해 고찰하고 국가와 집안에서 언제나 공경하고 삼가 선조의 아름다운 범절을 실추시키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그 덕을 잘닦고, 그렇게 덕을 잘 닦아야 대대로 선조의 아름다움에 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가문의식이 지니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훌륭한 조상을 생각하고 욕되지 않게 처신하고자 노력한다면 조상의 아름다운 행적을 이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묘지명 찬술
홍양호에게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가문에 대한 기록은 묘지명에 있다. 홍양호는 시조의 묘에서부터 부친 홍진보 형제, 그리고 일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26편의 묘지를 기록하였다.이는 주로 洪之慶 洪侃 洪侑 洪演 洪龜 洪俶 洪繼宗 洪禹甸 洪儀 洪哲孫 洪世敬 洪脩로 이어지는 직계에 대한 묘지이다.
홍양호는 먼저 풍산 홍씨의 시조인 홍지경의 묘지에서 자신의 가계 윗대에 대한 기술을 함에 있어 홍지경과 함께 홍간, 홍유, 홍연을 언급하고 홍이상을 특기하고 있다. 홍이상 대에 이르러 비로소 창성하여 동방의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풍산 홍씨 시조를 모신 곳이다. 시조의 휘는 지경으로 고려 고종 29년 임인년에 향공으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니 실로 宋 理宗 淳祐 2년이다. 부인은 순천 김씨로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都僉議舍人을 지낸 侃으로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으며 호는 洪崖이다. 막내는 樞密使를 지낸 備이다. 舍人은 密直使三館大提學을 지낸 侑를 낳았고 密直은寶文閣大提學을 지낸 演을 낳았는데 대대로 安東의 豐山縣 豐南面 申城浦에 살아 인하여 여기에 장사지냈다. 寶文은 郞將을 지낸 龜를 낳았는데 高陽으로 옮겨 살았다. 고려가 끝나자 여려 대를 벼슬하지 않다가 5대손 大司憲을 지낸 履祥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창성하여 동방의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다.
이어 무덤을 찾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는 풍산에 있는 묘소 전반에 나타나는 기술 양상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묘소를 확인하는 기록을 남긴 이유는 처음에 잘 보존해야지 나중에 시간이 흘러 확인하고자한다면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묘소 확인 과정에서 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묘지의 중간에 묘지를 고칠 때의 이적을 기록하여 시조묘의 신성성을 드러내었다.
시조묘의 봉분을 고칠 때 밤이 비로소 새려고 하였는데 광토가 갑자기 솟아 일어나 구덩이를 넘치고 구슬처럼 이슬이 맺혔다. 막 흙을 덮고 나자 비가 갑자기 내리고 무지개가 무덤 왼쪽에서 얼마동안 있다가 사라지니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이는 홍양호의 시조에 대한 자긍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풍산 홍씨시조묘 확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숭정 기사년에 대사헌의 아들 霶이 영남 안절사가 되어 4대의 묘를 성묘하고 봉분을 보수하고 비석을 세웠다. 후에 전란을 겪고 자손들이 먼 지방에 흩어져 살아 무덤이 토인에게 몰래 점유당하였다. 기축년에 후손 萬朝가 이어 영남 안찰사가 되어 먼저 선영을 찾아 속현 임하에서 보문의 묘소만 확인하였으나 밀직 이상 3대의 묘역은 소재가 자세치 않아 수곡에 비석을 세워 전하는 말에 따라 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영종 병인년에 사람중에 가리켜 알리는 자가 있어 후손인 중헌과 길보 산보가 이어 신성포에 나아가 오산의 작은 언덕에서 부서진 비편의 기록을 얻어 이에 기록을 살펴 건좌를 열어 징험해보니 시조의 묘였고, 그 아래 술좌는 밀직의 묘이고 또 그 아래 해좌의 것은 순천 김씨의 묘였다. 그 동쪽 성조동 진좌의 것은
홍애의 묘로 아울러 분봉을 고치고 묘표를 세웠으며 묘전을 두어 해마다 한 번 제사를 지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묘를 찾고 봉분을 고치고 묘비를 세우는 상황을 하나하나 기록해 두고 후손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아아. 무릇 세상의 성을 얻은 자들에게 시조가 있지 않은 경우는 없지만 그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은 모두 한미하고 먼 대에서 일어나 어디로부터 왔는지 자세치 않은 것이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우리 시조와 같은 경우에도 관직이 이미 현달하였고 홍애를 자식으로 두었지만 그 뒤 양 대에 걸쳐 이어서 관각에 들어갔으니 위연히 성하다 이를 만하다. 그러나 그 선대는 고찰할 바가 없으니 아마도 세상이 바뀌는 즈음에 족보가 전함을 잃어서 그런 것인가 보다. 안동 사람들 중어 어떤 이는 국학 이상의 무덤이 모처와 모처에 있다고 하는데 분명하게 징험할 수 없으니 후손된 자들이 어찌 개연히 길이 탄식하지 않겠는가? 삼가 언덕과 무덤이 없어졌다 드러난 시말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묻어 백대의 후예로 하여금 우리 시조의 무덤
임을 알게 하노라.
홍양호의 경우 비록 당색을 달리하였지만 洪象漢의 묘지명을 지으며 ‘從兄’이라 표하며 풍산 홍씨 가문임을 밝히고 있다. 다음에 살펴볼 홍경모도 같은 나이의 洪奭周를 ‘族姪’이라 부르며 같은 풍산 홍씨 후손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점을 보면 이들은 당파와 관계없이 이들은 같은 풍산 홍씨라는 의식을 공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홍양호의 이러한 선조에 대하여 묘지를 쓰는 작업은 홍경모에게 이어져 풍산 홍씨 세장지의 정리로 나타난다.
2) 홍경모의 경우
홍경모는 1774년 11월 17일 아버지 洪樂源과 어머니 李存遠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薰陶坊 泥峴의 四宜堂 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홍낙원은 홍경모가 세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조부인 耳溪 洪良浩에 의해 양육하게 되었다. 1794년에 홍양호가 기사에 들어가자 홍양호를 모시고 耆社諸臣의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이 해에 홍양호가 중국으로 사신 가자 벽제까지 전송을 하였다. 1795년에는 惠慶宮의 周甲宴에 同姓親으로 참석하였다. 스물아홉 되던 1802년 정월 15일에 아버지의 역할과 스승의 역할을 하던 홍양호가 타계하였다. 홍양호는 홍경모의 생애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고 홍경모가 평생 잊지 못하며 흠모한 인물이다. 홍양호가 타계하자 홍경모는 가문을 이어갈 중책이 자기에게 있음을 자각한다. 홍경모는 홍양호 사후 홍양호의 문집을 정리하여 간행하는 한편 「四宜堂志」 저술과 함께 홍양호의 手澤이 묻어있는 작품들에 대하여 題跋을 달고 정리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1805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홍경모는 4년이 지
난 1809년 丙科 제7인으로 大科에 급제하여 12월에 假注書가 된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비교적 큰 부침이 없이 관직에 종사하였다. 연행을 통하여 중국을 유람하고 紀昀의 손자인 紀樹蕤와 삼대를 잇는 교유를 하였고 1834년에 다시 進賀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2차 연행에서 아들 翼周가 북경에서 급사하였는데 이는 100년도 안 되는 시간에 5代에 걸쳐 3명이 죽은 것이라고 하며 그 슬픔을 토로하였다. 홍양호의 아버지인 洪鎭輔가 1736년 39세의 나이로 요절한 뒤, 홍경모의 아버지인 洪樂源이 1776년 24세로, 또 홍경모의 아들인 翼周가 1834년 나이 39에 죽었으니 실로 100년이 안 되는 사이에 대를 걸러 세 사람이 죽은 것이다. 이후 1840년에 이조판서에 오르고 1843년에 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851년 1월 24일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는데 경기도 양주의 산내리에 묘를 썼다. 홍경모는 자신의 일생을 冠巖紀年 이라는 연보에 남기고 있다. 홍경모의 후배로 홍경모의 神道碑를 쓴 鄭元容은 관암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여러 책을 두루 섭렵하여 문장이 贍雅하며 겸하여 글씨를 잘 쓰는 기예가 있었다. 역내에 있던 산수의 名勝과 城隍 古蹟과 樓臺 靈區를 나그네로서 여행하고 고을살이했던 자취가 거의 두루 미쳤으며 편액에 題詠한 것이 모두 찬란하게 빛이 났다. 공무에서 물러나면 도서를 곁에 두고 籤軸을 앞에 두었다. 그리고 疏箋箚錄하기를 피곤하게 여기지 않고 즐겼으니 布衣之士 때처럼 부지런하게 과정을 세워 힘써 절로 높은 지위의 귀한 신분임을잊었다. 공은 만년에 높은 지위까지 올랐다고 여겨 쉴 것을 생각하여 물러나 동곽의 밖에 小屋을 세웠다. 꽃․대나무․거문고․서적으로 즐거움을 삼고 스스로 명을 짓기를 “지키기를 요약되게 하여 나서지 않아 후회함이 없게 하며 선량하고 너그럽게 하여 올곧아서 변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에 대해 傳神한 것이었다.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산 관람이었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사랑하는 아들마저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홍경모의 일생은 개인적으로 보아 꼭 행복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가문의 위기로 느껴졌을 이러한 행로가 그로 하여금 가문에 대한 생각을 더 확고하게 하였고 그 결과 가문의식의 표출과 관련한 저작들을 남기게 한 동력으로 보인다.
(1) 가계 관련 기록의 정리
홍경모는 「豊山洪氏世葬誌」 「豊山洪氏遺址記」 「豊山洪氏世乘凡例」 「世乘按論」 「三家小譜序」 등을 남겨 가계와 관련된 기록들을 정리하는 한편, 풍산 홍씨 가문의 유구함을 말하고 자손들이 이를 잘 계승해 나갈 것을 언급하였다.
홍경모는 순조 10년 경오(1810년) 9월 18일 太白山史庫 폭쇄의 명을 받고 태백산사고의 서적에 대한 폭쇄를 마친 다음 돌아오는 길에 안동의 풍산 홍씨 구지를 찾아보고 「豊山洪氏遺址記」를 남겼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조부인 홍양호의 묘지를 그 근거로 삼고 있다. 홍경모가 申城의 선조 무덤을 찾았을 때는 이미 홍양호의 묘지를 통해 모든 사실을 확인한 후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번성한 자기 가문이건만 그 시초가 된 곳이 황폐하게 변하여 조상이 살던 옛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경험한 홍경모는 풍산 홍씨의 가문의 내력과 관련된 사실들을 홍양호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풍산홍씨세장지」이고, 「풍산홍씨세승」의 편찬으로 이어진다. 다음은 「풍산홍씨세장지」의 기록이다.
안동의 4대, 고양의 10대 13묘소, 풍덕의 1대, 동교의 1대, 진천의 2대, 천안의 2대는 모두 길지와 명혈로 진천에 자리 잡은 것은 문헌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홍경모가 여기에서 말한 안동의 4대는 洪之慶 洪侃(?~1304) 洪侑 洪演이다. 홍경모의 시조인 홍지경이 처음 풍산에 거처를 정하였다가 만년에 현의 남쪽 신성포 탑평촌으로 옮겼으며, 홍간과 홍유, 홍연 3대가 그대로 살며 관향으로 삼았으며 모두 신성과 성조동, 임하현에 장사를 지냈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홍경모의 조상으로 고양에 자리를 잡은 것은 洪龜로부터 시작된다. 이어 洪俶 洪繼宗 洪禹甸 洪儀 洪哲孫 洪世敬 洪脩 洪履祥(1549~1615) 洪霙(1584~1645)까지 이곳에 묘를 쓰게 된다.
풍덕은 선조의 따님인 정명공주에게 장가간 洪柱元(1606~1672)이 묻힌 곳이고, 동교는 洪萬恢(1643~1709)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바로 우이동이다. 진천에는 洪重聖(1668~1735)과 洪鎭輔(1698~1736) 2대가 묻혀 있으며, 천안의 2대는 洪良浩(1724~1802)와 洪樂源(1753~1776)이다.
홍경모는 세월이 흘러 살던 곳을 떠나면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소홀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는 점을 풍산에 있는 시조부터 4대의 묘역을 찾는 과정과 그 어려움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수많은 세월이 지난뒤에 역시 조상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생기게 될 것에 대비하여 이렇게 조상들의 묘의 위치에 대하여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이를 잘 이어나가기를 당부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홍양호가 묘지를 기록하며 한 말과 같다.
풍산 홍씨 유지와 세장지에 대한 정리를 마친 홍경모는 1821년 「풍산홍씨세승」을 편찬하고 「세승안론」에서 다시 한 번 가문의 내력과 내용의 고증이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기록해 놓았다.
홍경모의 기록에 의하면 풍산 홍씨세승 은 繼序圖․八高祖圖․年表, 姓貫, 世諱, 配位, 第宅, 年譜, 愼終錄, 挽誄, 墓所, 狀德錄, 敍述, 配位世譜, 子孫譜, 分派圖 등 14조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홍씨는 상조 국학직학공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겨우 21~2대이고 우리 집은 17대이다. 17대의 사실과 행적을 모으고 겸하여 찬성공 본생가3대를 덧붙여 모아 한 책을 만들고 풍산 홍씨세승이라고 이름하였다. 이를 보면 풍산 홍씨세승 은 홍경모의 직계에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풍산 홍씨세장지」에서도 보았듯이 홍경모는 직계 조상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나머지 풍산 홍씨 가계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였다. 여기에서도 17대의 사적이라고 해서 홍지경에서 자신까지의 세대 수만 말하고 이때까지의 인물에 대해 기록하여 세승을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풍산 홍씨 세승범례」는 모두 56조로 이루어졌으며 「世乘按論」은 姓貫,豊山縣, 始祖配位姓氏, 第宅, 始祖墓誌, 始祖墓所, 始祖配位墓所, 始祖配位先系, 舍人公第宅, 宣祖己巳刊行洪崖集, 舍人公墓所, 配位墓所, 密直使公墓所, 大提學公配位姓貫, 配位墓所, 郎將公第宅, 承旨公配位考諱, 贊成公年譜, 文敬公第宅, 文懿公第宅, 參判公第宅 등 21조항에 대하여 고증해놓았다. 이는 가계에 대하여 후손들에게 최대한 자세하게 남겨주고자 하는 홍경모의 고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긴 것은 물론 홍경모의 남다른 기록정신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가문이 어려울수록 선대의 훌륭한 업적을 남겨 이를 잘 계승해 나가고자 하는 즉 위기를 조상의 훌륭함에 기대어 넘기고자 하는 의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계에 대한 사항은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가문의식의 발로에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三代四耆 광영의 기록
耆社는 국가에서 희년을 맞이한 공경들에게 베푸는 은전이다. 홍경모는 헌종 계묘년(1843)에 70세로 耆老所에 들어간다. 기로소는 나이와, 지위,문과 급제라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홍경모의 집안은 조부 이계로부터 3대에 걸쳐 네 명이 기사에 들어간다. 홍경모는 이 특별한 사실에 대해 문과, 지위, 수명을 얻는 것 외에 또 한 가지의 어려움이라고 표현하였다. 정종 계축년에 신의 조부 문헌공 모(홍양호)로부터 종조부 효헌공 모(홍명호), 계부 문목공 모(홍희준) 및 신 홍경모가 지위도 있고 연치도 있어 차례로 뒤를 이어 기사에 들어가 3대에 4명의 기신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기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고 또한 신의 가문의 영광으로 후대에 자랑할만한 것이다. 마침내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위에는 세 성조의 호를 기록하고 다음으로 신의 가문의 네 명의 기신의 관작과 성, 이름을 기록하였다. 아래에 일문 중의 다섯 기신을 붙이고 「사기경회력」이라고 하였다.
정조 17년 12월에 영의정이던 洪樂性과 蔡濟恭, 洪良浩 등 14명이 기로소에 들어가는데 이때에 홍경모는 조부를 따라 궁궐에 들어가 그 절차를 구경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종조인 孝憲公 洪明浩(1736~1819)가 13년 뒤인 순종 을축년(1805)에 기로소에 들어가고 계부인 文穆公 洪羲俊(1761~1841)이 1830년에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까지 한 가문을 통틀어 4명의 기신이 나오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인데 3대에 네 명의 기신이 나왔으니 매우 큰 광영이었을 것이다. 홍경모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四耆慶會曆」을 지었다. 예로부터 대대로 공경의 가문에서 형제와 부자, 조손과 숙질이 이어 기사에 들어간 경우는 많은데 형제이거나 부자이거나 조손과 숙질간일 뿐이다. 형제와 부자, 조손과 숙질이 나란히 한 가문에서 차례로 뒤를 따라 기사에들어간 경우는 오직 우리 집안뿐이다. 이는 기사가 만들어진 이후 처음 있는 것이니 또한 어려운 일 중의 더욱 어려운 일이다.
기사지 를 편찬할 정도로 기로소에 대해 해박했던 홍경모가 이렇게 곳곳에 3대에 걸쳐 네 명이 기사에 들어간 사실을 대서특필하는 것은 그 만큼 감격스런 일이었기도 하지만 자신의 가문에서만이 이러한 사실이 있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바로 가문의식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정종 계축년에 왕고 문헌공이 고례에 따라 기사에 들어갔다. 이때 족대부인 判敦寧 洪秀輔 공이 임자년에 종숙인 영의정 홍낙성 공이 정미년에 선후로 기사에 들어가 한 가문에 세 명의 기신이 있게 되니 당시 사람들이 성대하게 일컬었다. 세집의 자제들이 모두 날을 아끼는 정성으로 돌아가며 수연을 베풀어 장차 경사에 걸맞게 하고 영광을 기록하고자 하였다. 이 해의 늦봄 어느 날에 의정공 집에서 먼저 모이고 다음으로 우리 집에서 모이고 다음으로 판돈녕공의 집에서 모였는데 일이 조정에 알려져 상이 내부의 음악을 하사하여 총애하였다.
홍양호가 기로소에 들어가니 풍산 홍씨로 기사에 들어간 인물이 셋이었다.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돌아가며 잔치를 벌였던 모양인데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궁중의 음악을 하사받는 영광까지 얻었다. 왕실의 인척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겠지만 한 가문에서 한꺼번에 셋씩이나 기로소에 든다는 것은 그리 많지는 않은 일이었다. 홍경모는 이 사실을 「一門三耆慶壽宴帖序」에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이 세대가 지나고서는 홍낙성의 집안과 홍수보의 집안에서는 기로소에 들어가는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자는 이해에 겨우 약관으로 채색 옷을 입고 여러 부형의 뒤를 따라 술잔을 받들어 축수를 한 것이 또렷하게 어제 일 같은데 지금 오십여 년이 되었다. 오십여 년 사이에 두 집안의 후손들이 번갈아 경상이 되었지만 나
이가 이르지 못하여 다시는 이어 기사에 들어간 자가 없다. 오직 우리 집만이 문헌공의 뒤를 이어 기사에 들어간 것이 소자에 이르기까지 세 명이니 하늘이 우리집안에 두터이 함이 너무 치우친 것은 아닌가? 아. 또한 기이하도다.
홍낙성은 문과에 영의정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가지만, 동생 洪樂命은 문과에 判書를 지냈으며 아들인 洪義謨 역시 문과에 判書를 지냈고 종손인 洪奭周는 문과에 左相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수를 못하여 기사에 들지 못하였다. 洪秀輔의 집안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홍양호의 집안만은 3대에 걸쳐 홍양호, 홍명호, 홍희준, 홍경모 등 네 명의 기신이 나왔다. 이렇게 기사에 들어가 모든 상황에 대하여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긴 홍경모는 후손들에게 이러한 가문의 영광을 잊지 말 것을 부탁한다.
나의 후손들은 네가 나온 바를 더럽히지 말고 또한 이 삼난을 얻은 것을 어려움으로 여기지 말라. 오직 문헌공의 인과 덕을 어려움으로 여긴다면 일가의 안에 나를 이어 기사에 들어갈 사람이 장차 기약이 끝이 없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이 글을 보면 홍경모가 얼마나 홍양호를 흠모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흠모는 후손들에 대한 경계로 이어지고 있다. 후손들이 선조의 뜻을 잘 받들어 이어 나갈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이계에게서 물려받은 구업을 자신의 대에서 실추시키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살펴본 홍경모의 가문에 대한 위기의식이 이에 와서 풀어지게 된 것이다. 훌륭한 조상을 본받으려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문의 영광을 이어나가는 첩경인 것이다. 이것이 홍경모가 그토록 전전긍긍하며 가문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유였던 것이다.
4. 결론
이상으로 풍산 홍씨 가문의 위상 확립 과정과 홍양호, 홍경모의 가문의식 표출 양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고 홍양호와 홍경모의 가문 의식 표출이 지니는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풍산 홍씨 가문 위상의 성립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풍산 홍씨는 고려 때 홍지경이 향공으로 문과에 급제하며 역사에 드러나는데 삼대를 거처 홍귀가 여말의 혼란상을 목격하고 고양으로 은거하였다. 이로부터 5대를 지나 모당 홍이상이 문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며 가문의 중흥을 이끌었고 홍영이 가세를 확장하였으며 선조의 부마인 홍주원이 명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홍주원의 아들 중에서는 장남인 홍만용의 자손이 가장 번성하였고, 홍만회의 경우는 홍중성으로 이어져 풍산 홍씨 가문에 문한의 확대라는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어 홍양호와 홍경모의 가문의식 표출 양상을 문집의 정리와 묘지의 찬술, 그리고 가계 관련 기록의 정리와 삼대사기 광영의 기록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홍양호는 어린 나이에 조부와 부친을 연달아 여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물려받았던 사의당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가 과거에 급제한 뒤 이를 되찾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문의 일과 관련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대에서 처리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홍만회의 묘지 문제를 해결하고 홍중성의 문집을 간행하였으며 모당집 에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대의 묘지를 지어 후손들에게 무덤을 찾게 된 경위를 알게 하였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잘 보존해야지 나중에 시간이 흘러 확인하고자 한다면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한편 홍경모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인 홍양호에게서 양육되었는데 홍양호가 타계하자 가문을 이어갈 중책이 자기에게 있음을 자각하였다. 이에 홍양호의 묘지를 이어 가게 관련 기록들을 정리하였으며 홍양호를 이어 기로소에 들어가자 삼대에 걸쳐 네 명의 기신이 나온 것을 기념하여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홍경모에게 있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은 홍양호에게 물려받은 구업을 잘 이은 것으로 가문에 대한 위기의식이 이에 와서 풀린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홍양호와 홍경모의 가문의식 표출 양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가문의식이 위기의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을 부지하고 이를 극복하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문의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그 의미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투고일 : 11월 25일 심사일 : 12월 10일 심사완료일 : 12월 20일
500 漢文敎育硏究 第43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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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山 洪氏 門中의 家門意識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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