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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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윤휴의 홍범관 연구
김 성 윤*
머리말
1. 주희와 채침의 홍범관(洪範觀)
1) 주희의 ‘대중(大中)’설 비판과 의리홍범학(義理洪範學)의 정착
2) 서전(書傳)에 나타난 주․채 홍범설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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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은나라 삼현(三賢) 중의 한 사람이었던 기자(箕子)를 찿아가 이륜(彛倫)을 묻자 기자가 그에게 전했다고 하는 홍범구주(洪範九疇)는, 일반적으로 성인상전(聖人相傳)의 경세대법(經世大法)으로 이해되면서 선진유학(先秦儒學) 정치철학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한(漢) 공안국(孔安國)의 주석 이후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고, 조선에서도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홍범의 구주에는 경세(經世)와 관련된 여러 요소들이 광범히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주(各疇) 상호간에도 고도의 논리적 연관이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홍범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자의 경세론을 보다 종합적이고 근원적인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즉 홍범설은 경학․성리학설과 구체적 정책론의 접점에 위치하며, 정치사상의 경학적(經學的) 근거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조선후기 탕평정치가 바로 이 홍범구주를 이론적 모델로 하고 있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 시기의 홍범설의 추이를 살핀 적이 있다.1) 홍범구주가 영․정조대에 탕평의 이념으로까지 되고 있었던 데에서 보듯이, ‘홍범학(洪範學)’2)은 조선 정치사상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주요 영역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를 통해 볼 때, 조선의 홍범 연구로 최초로 보이는 것은 권근(權近, 1351~1409)의 서천견록(書淺見錄)이다.3) 그의 홍범 연구는 그의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과 입학도설(入學圖說)이 조선 경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대략 같아 보인다. 즉 주희․채침설의 대의를 간략하면서도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어 조선 홍범학설사에서 초유(初有)의 정론(定論)으로서의 의의가 크다. 이후 15세기에는 연구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다가 16세기 초엽에 이순(李純)이 채침(蔡沈)의 유명한 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을 주해한 홍범황극내편보해(洪範皇極內篇補解)라는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이는 홍범의 수리를 다룬 것으로 홍범구주 전반을 대상으로 해석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이 외에 이황(李滉)이나 이덕홍(李德洪)․김장생(金長生) 등의 주석이 있으나 매우 지엽적인 것이어서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조선의 홍범 연구는 17세기에 들어와 단연 활기를 띄면서 많은 연구성과가 나타났는데, 그 본격적인 연구의 효시를 이루는 것이 윤휴(尹鑴, 1617~1680, 白湖)와 우여무(禹汝楙, 1591~1657, 涑川)이다. 우여무의 홍범연구 3부작(洪範羽翼, 洪範衍義, 箕範)이 완성된 것이 1650년경이고 윤휴의 홍범설은 1642년에 초본이 완성되었으므로 양인의 홍범 연구는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인은 연구과정에서 서로 견해를 참조할 만한 계제가 아니었던 것을 판단되며 그 영향도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휘일(李徽逸)․이현일(李玄逸)의 홍범연의(洪範衍義)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 우여무의 홍범설에 대한 연구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후 홍범연구상의 여러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윤휴의 홍범설을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윤휴의 홍범 연구는 주희(朱熹)나 채침(蔡沈)의 견해와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일관되어 있어 독자적인 홍범학으로서의 이론적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그의 성리학설과 경세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사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윤휴 경학(經學)의 성격에 대하여 반주자학적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므로 주희와 채침의 홍범설을 먼저 소개하면서 논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1. 주희와 채침의 홍범관(洪範觀)
1) 주희의 ‘대중(大中)’설 비판과 의리홍범학(義理洪範學)의 정착
주희의 홍범 연구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점은 한(漢) 공안국 이래 황극(皇極)을 대중(大中 : 皇〓大, 極〓中)으로 주석하던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의 유명한 「황극변(皇極辨)」은 바로 이를 다룬 것이다.4)
주희에 의하면, 대중설을 따를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제5주 황극 장구의 경문부터 그 뜻이 잘 통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경문의 ‘황건기유극(皇建其有極)’은 황을 대, 극을 중으로 바꾸면 ‘대건기유중(大建其有中)’이 되고, ‘시인사기유황지극(時人斯其惟皇之極)’은 ‘시인사기유대지중(時人斯其惟大之中)’이 되며 심지어 ‘유황작극(惟皇作極)’도 ‘유대작중(惟大作中)’으로 된다.5) 이러면 뜻이 매우 모호해진다. 따라서 황(皇)은 반드시 군(君)으로, 극(極)은 인군(人君)이 위에서 세우는 하나의 의표(儀表)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할 때 ‘북극(北極)’이 ‘북중(北中)’으로 되지 않고, ‘옥극(屋極)’이 ‘옥중(屋中)’이 되지 않아 그 뜻이 살게 된다고 한다.6) 주희의 대중설 비판의 요점은, 극(極)은 중(中) 그 자체가 아니라 ‘재중지표준(在中之標準)’이라는 데에 있다.7)
둘째 이와 같이 해석해야만 황극을 전후한 나머지 팔주(八疇)의 대의가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된다. 그렇지 않고 황극을 대중으로 보게 되면 황극을 제외한 나머지 팔주의 주체가 없어져 인군(人君)이 준행(遵行)해야 할 법(法)이란 뜻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나머지 팔주의 내적 연관 내지 통일성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8)
셋째 황극을 대중으로 새기면 기타 여러 경문 장구의 뜻이 내용적으로 통하지 않아 체제를 잡기 어려워진다.
넷째 황극을 대중으로 볼 경우 제2주인 오사(五事)와 뜻이 통하지 않는다.9) 주희는 이를 매우 중요한 문제로 보고 있는데, 그는 임금의 건극(建極)에서 극의 내용을 ‘천하의 절덕(絶德)’ 내지 인륜의 극처(極處)로 보고 있기 때문에 오사로 수신하는 것이 황극을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주희의 대중설 비판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주희는 선유들이 홍범의 뜻을 깊이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군(人君)이 수신입도(修身立道)하는 근본을 살피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또 대중설은 중(中) 자체에 대한 이해부터 정확하지 못했는데, 본문에 관대한 말이 많은 것으로 해서 중을 모호․구차하고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뜻으로 잘못 이해하여 그것이 과(過)․불급(不及)이 없이 지정지당(至精至當)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한다. 따라서 황극에 대해서도 엄밀(嚴密)한 체(體)에 힘쓰지 않고 아량에만 힘을 기울여 그 폐단이 인군으로 하여금 수신하여 입정(立政)함을 알지 못하게 하여 결국 시비가 전도되고 현부(賢否)가 혼란스럽게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0) 주희가 이해한 대중설의 오류은, 결국 함호구차(含糊苟且)․불분시비(不分是非)․불변흑백(不辨黑白)함에 있었다.11)
사실 황극을 대중으로 주석한 것은 훈고적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며, 주희가 황극의 표준 내지 건극(建極)이 대중지도(大中之道)에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한 것도 아니다. 다만 방동미(方東美)의 지적처럼 한유(漢儒)들은 대중이 무엇인지, 왜 그것이 구주(九疇)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범주가 되는지를 충분히 설명해 내지 못했다.12) 홍범학의 출발로 평가할 수 있는 공안국의 홍범 주석을 살펴보면, 상수학적(象數學的) 해석이 거의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참위(讖緯)나 황로학(黃老學) 그리고 도가(道家)의 영향도 발견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의 홍범설은 흔히 ‘대의를 밝히되 장구를 일삼지 않았다’는 훈고학의 모습에 가장 접근해 있어 훈고홍범학의 한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주희의 대중설 비판은 훈고학적 홍범 해석이 갖는 의리적 불충분에 촛점이 두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주희의 대중설 비판은 이후 그와 제자들의 홍범연구에서 상수적 해석의 측면이 훈고홍범학에서 보다 더 강화된 면은 있지만, 홍범의 의리적 측면을 고도로 철리화한 점에서 의리홍범학의 강화․정착으로 평가할 수 있다.
2) 서전(書傳)에 나타난 주․채 홍범설의 특징
채침의 주석이 주희의 견해와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일찍부터 있어 왔지만 양설(兩說)의 동이(同異)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채침의 서집전(書集傳)을 기본 주석을 삼고 그 외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집성한 서전(書傳)을 저본으로 양설의 공통적인 특징을 지적하는 데에 그치고자 한다.
먼저 홍범의 연원과 관련하여 주희와 채침은 우 임금이 치수할 때 신구(神龜)가 낙서를 지고 나왔다는 ‘낙출서지설(洛出書之說)’과 우 임금이 이를 본받아 홍범구주를 서술했다는 홍범 낙서연원설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주역에서 그 단초가 나타나고 한(漢) 공안국에 의해 더 구체화되었는데,13) 이러한 견해를 부정하는 시각도 없지 않았지만14) 채침과 주희는 이를 인정한 것이다.15) 사실 한역(漢易)의 구수(九數)․십수설(十數說)이 주희에 이르러 도십서구적(圖十書九的) 하락상수론(河洛象數論)과 도상(圖象)으로 정착한 점16)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다음으로 홍범구주 전체 대의(大義)와 구주 차서(次序)의 의미에 대한 견해를 보자. 이는 홍범에 대한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기자가 홍범편의 모두(冒頭)에서 구주의 명칭을 설명한 단락(初一曰 五行~次九曰 嚮用五福 威用六極 : 소위 ‘65字’)에 대한 주석에서 그 견해가 피력되어 있다. 주희는 이 단락이 낙서의 본문(本文)이라는 한유(漢儒)의 설을 부인하고, 낙서는 본래 문자가 없고 수(數) 밖에 없는데, 이 65자는 우가 차서를 정하고 구주로 범주화한 것이라고 보았다.17)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대강목(大綱目)’으로써 천하의 대사(大事)가 이에 크게 갖추어져 있다고 강조하였다.18) 또 그는 구주의 차서(次序)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홍범이란 낙서의 위(位)와 수(數)에 기본을 두고 있는데 1은 수(水)의 생수(生數)이자 기(氣)의 시작이므로 홍범의 1은 오행이 되며, 오행은 서로 교운(交運)하여 만물을 화생하므로 인사(人事)의 시작이 된다. 따라서 2위(位)는 곤(坤)에 위치하고 수(數)는 화(火)의 생수(生數)이자 기(氣)가 드러난〔著〕 것이므로 오사가 된다. 이와 같이 주희는 구주의 차서를 오기(五氣)의 진행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희가 설명하는 각주의 위(位)와 수(數), 그리고 각주의 대의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주희의 구주 차서와 대의 이해
疇名 |
位 |
數 |
氣的 進行 |
疇의 大義 |
1 五行 |
子 |
水之生數 |
氣之始 |
陽變陰合 交運而化生萬物則 爲人事之始 |
2 五事 |
坤 |
火之生數 |
氣之著 |
五氣運行 人之稟形 賦色妙合 而凝修身踐形之道立矣 |
3 八政 |
卯 |
木之生數 |
氣之益著 |
立經陳紀 創法立度 擧而措之天下矣 |
4 五紀 |
巽 |
金之生數 |
氣著益久 |
察數觀象 治曆明時 仰以觀於天文矣 |
5 皇極 |
中央 |
八數之中 |
土之沖氣 |
人君居至尊之位 立至理之準…所以總攝萬類也 |
6 三德 |
乾 |
水之成數 |
氣合而成形 |
臨機制變 隨事制宜 且盡其變於人矣 |
7 稽疑 |
西 |
火之成數 |
氣合而形已著 |
嫌疑猶豫且決之人謀鬼謀 而盡其變於幽明矣 |
8 庶徵 |
艮 |
木之成數 |
氣合而形益著 |
往來相盪 屈伸相感 而得失休咎之應定矣 |
9 福極 |
午 |
金之成數 |
氣合而著已久 |
悠久得失…通行天下矣 其事廣大悉備 |
주희는 구주의 상호관계를 해석함에 있어 일의 순서로는 1 오행부터 순차적으로 설명하였지만, 그러나 그 주체인 황극을 위주로 해서는 음양으로 설명하고 있다.19) 또 황극을 위주로 보았을 때 전사주(前四疇)〔1~4疇〕는 황극의 본(本)이 되고, 후사주(後四疇)〔6~9疇〕는 황극의 징험(徵驗)이 된다고 한다. 이는 양자를 체용(體用)의 관계로 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채침은 위 경문 65자를 구주의 강(綱)이라 하면서, 천인상응(天人相應)의 관점에서 구주 상호간의 관계를 설명하였다.20) 채침의 홍범에 대한 천인감응적(天人感應的) 해석은 그다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고는 보이지 않으나, 이러한 체계화는 주희의 입론에서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다. 앞서 보았듯이 주희의 구주차서론은 각주가 매우 순차적으로 연결되는 직선적인 논리구조를 보이고 있었다. 채침이 이러한 견해를 따르지 않고 1주2주, 3주4주, 5주6주, 7주8주를 각각 연결하고 9주에서 천인상응을 종합한 것은 그의 상수학적(象數學的) 이해가 투영된 데에 연유한다. 또 그는 주희의 전사주․후사주를 체용으로 구분하는 것을 수용하여 전사주는 이로써 황극을 세우는 것이고, 후사주는 이로써 황극을 행하는 것이라 하였다.
다음으로 주희와 채침의 구주 자체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이들의 홍범 이해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희․채침의 홍범설의 첫번째 특징은 이들의 홍범 해석이 철저한 수신적(修身的)․예치적(禮治的) 경세관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먼저 제5주인 황극에 대한 해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주희는 황극 일장(一章)이 구주의 본(本)이라고 강조하고, 황극의 극을 북극(北極)이나 옥극(屋極), 그리고 예기(禮記)에서 말한 민극(民極)이나 시경(詩經)의 사방지극(四方之極)의 극과 같으며,21) 극의 내용을 지선(至善)이라 해석하였다. 채침도 이를 수용하여 황(皇)〓군(君), 건(建)〓입(立)으로 주석하고, 극은 북극의 극과 같은데 ‘지극지의(至極之義)’요 ‘표준지명(標準之名)’이라 하였다. 따라서 건극(建極)은 극이 중앙에 세워져〔中立〕 사방이 그 올바름〔正〕을 취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인군이 인륜의 지극함을 다하여 부자(父子)를 말하면 그 친함을 다하여〔極〕 천하의 부자된 자가 이에서 준칙을 취하며, 부부․형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일체의 언동(言動)과 일에 그 의리의 당연함을 다하는 것이라 한다.
채침은 또한 경문의 “염시오복 용부석궐서민 유시궐서민 우여극 석여보극(歛時五福 用敷錫厥庶民 惟時厥庶民 于汝極 錫汝保極)”이란 구절과 관련하여, 극(極)이 복(福)의 본(本)이 되고 복은 극의 효(效)라 전제하고, 극이 세워지는 것〔建極〕이 곧 복이 모이는 것이라 해석하였다. 따라서 그 복을 백성에게 ‘내린다’〔敷錫〕의 구체적 의미 역시 백성들이 모두 군덕(君德〓皇極)에 감화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또한 주희의 견해22)와 동일하다. 채침은 다음 단락에서 나오는 “불협우극 불나우구(不恊于極 不罹于咎)”에 대한 해석에서 이를 각각 ‘미합어선(未合於善)’과 ‘불함어악(不陷於惡)’으로 해석하여 황극의 극을 선악적 개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군주의 건극을 의리론적 측면에서 논리화함으로써 나온 당연한 결과이지만, 의리의 판별이 쉽지 않거나 임금의 의리가 신민(臣民)의 의리관과 상충할 때 과연 군주 혹은 황극의 주도성을 얼마만큼 인정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이론적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제3주인 팔정은 구주 중 정치제도적 측면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민용(民用)과 가장 직결되는 주이다. 채침이 ‘농용팔정(農用八政)’의 농(農)을 ‘후생(厚生)’으로 주석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팔정에 관한 주희의 견해는 집주(集註)에 나타나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볼 때 다른 주에 비해 팔정에 대한 주석이 매우 간략한 편인데, 이것이 오히려 채침과 주희의 홍범설의 한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주자학의 수신적 경세관의 반영으로 생각된다. 채침이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司徒)를 ‘소이성기성야(所以成其性也)’라 주석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등 조선의 실학자들이 홍범 중 특히 팔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23)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또한 병(兵)이 팔정 가운데 제일 뒤에 위치하는 것에 대해 채침이 병(兵)은 성인에 있어서 부득이한 것이므로 말(末)에 위치하였다고 해석한 것도 예치론(禮治論)의 입장을 보여준다. 팔정의 순서는 보통 민용(民用)의 완급 순서라든가, 아니면 사(師)가 7번째의 빈(賓)과 함께 외치(外治)에 속하기 때문에 뒤에 두었다는 해석이 많다.
이들의 홍범 해석에서 나타나는 두번째 특징은 왕권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군신공치적(君臣共治的) 입장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탕평(蕩平)’의 출전으로 유명한 제5주 황극의 소위 14구(“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는 실은 황극의 대의가 집약된 중요한 부분으로, 많은 홍범연구자들이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채침은 주희의 견해와 같이 본문의 ‘편(偏)․피(陂)․호(好)․오(惡)’를 모두 자기의 사(私)가 마음〔心〕에 생겨난 것이고, 그 다음의 ‘편(偏)․당(黨)․반(反)․측(側)’은 자기의 사(私)가 일〔事〕에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또 본문의 ‘준의(遵義)․준도(遵道)․준로(遵路)’는 회극(會極)이고, ‘탕탕(蕩蕩)․평평(平平)․정직(正直)’은 귀극(歸極)으로 보았다. 이 역시 주희설과 동일하다. 그런데 주희는 이 장(章)의 주체를 임금이 아닌 신민(臣民)으로 보았다. 천하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사로움을 따르지 않고 임금의 교화에 따라 지극(至極)의 표준에 회귀(會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 것이다.24) 그러니까 본문의‘무편무피(無偏無陂)․무유작호(無有作好)․무유작오(無有作惡)․무편무당(無偏無黨)․무당무편(無黨無偏)․무반무측(無反無側)’ 뿐만 아니라 ‘준(遵)’의 주체를 신민으로 본 것이다. 주희가 ‘무편무피(無偏無陂)․무반무측(無反無側)’에 중(中)의 뜻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것은 다만 ‘무사의(無私意)’일 뿐이라고 대답한 것도 이를 군주보다는 신민의 일로써 이해했기 때문인 측면이 있다. 채침도 시체(詩體)로 되어 있는 이 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음영(吟詠)케 하여 그 올바른 성정(性情)을 얻게 하여 자신도 모르게 회극․귀극케 하는 것이라 하였으므로 역시 그 주체를 임금보다는 신민에 두고 있다. 채침은 본 장구의 공용(功用)이 이처럼 심절(深切)한데, 그것은 주례 「태사(大師)」에서 육시(六詩)로 가르친 것과 동일하나 그보다 더욱 긴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이 장의 해석에서 채침설은 주희설과 일치하는데, 이들은 종래 임금의 수신의 요체로 파악되어 오던 것을 신민의 수심(修心)의 한 지표로 돌려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론적 의미가 있다.25) 채침 자신이 이상과 같은 주석을 한 다음 마지막에 ‘후세에 이러한 뜻이 전해지지 않아 황극의 도가 천하에 밝아지지 못했다’라고 한 것은 주희와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재강조한 것으로, 그 내용은 왕권중심의 정치논리를 군신공치의 논리로 바꾼 것이다. 즉 신(臣)의 입장에서 황극을 해석한 것이다.
다음 단락의 경문(“曰皇極之敷言 是彛是訓 于帝其訓”)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나타난다. ‘황극의 부언(敷言)이 이훈(彛訓)이 되는 것이니 곧 천훈(天訓)이다’라고 해석되는 이 구에 대하여 주희는 ‘인군이 몸소 입극(立極)하여 아래에 포명(布命)하면 그 상(常)이 되고 교(敎)가 되는 소이가 모두 하늘의 이치이니 상제(上帝)의 강충(降衷)과 다르지 않다’라고 해석하였다.26) 채침은 ‘인군이 극(極)의 이치로써 반복 추연(推衍)하여 하는 말은 곧 천하의 상리(常理)이자 천하의 대훈(大訓)이니 군훈(君訓)이 아니라 천훈(天訓)이다. 말이 하늘에 순(純)한 즉 하늘의 말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희․채침 모두 군훈(君訓)과 천훈(天訓)을 논리적으로 동질화시키는 과정에서 그 가치적 동질성, 즉 상리(常理)를 매개시키고 있다. 곧 왕명의 신성성(神聖性)의 근거를 천리에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군주론에 입각한 경문 해석은 제6주 삼덕에 나타나는 경문의 해석에서 그 성격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삼덕의 두번째․세번째 단락에 올라 있는 본문(“惟辟作福 惟辟作威 惟辟玉食 臣無有作福作威玉食 臣之有作福作威玉食 其害于而家 凶于而國 人用側頗僻 民用僭忒”)이란 구절에 대해 채침은 극히 소략하게 주석하였고, 또 주희의 견해는 전혀 인용된 바가 없다. 이는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임금만이 복(福)과 위엄(威嚴)을 내리고 옥식(玉食)을 받을 수 있으며, 신하가 이러한 권능을 행사하면 국가가 흉하게 된다는 경문의 내용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이 세가지(作福․作威․玉食)를 천자의 본연의 권능으로 인정하여, 대권귀일(大權歸一)을 황극의 용(用)인 삼덕을 사용할 수 있는 기초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27) 이러한 논리는 임금이 삼덕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적실(的失)했느냐의 여부를 떠나 권병의 하이(下移)를 더 중차대한 문제로 생각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따라서 이 단락에 대한 이해에는 군주권이 절대적인 것이냐 아니면 조건적인 것이냐 하는 정치의식의 분기(分岐)를 야기할 수 있는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민감한 사안이라 할 수 있겠는데, 군주통수권의 근거를 천리와 상정(常情), 군신공유(君臣共有)의 보편적 덕목에서 찿는 주희와 채침은 군주절대화의 논리를 내포할 수 있는 이 구절에 대한 해명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주희와 채침의 태도는 조선에 와서 정조대 노론벽파의 영수인 김종수(金鍾秀)의 형으로 벽파계의 산림(山林)으로 대우받은 김종후(金鍾厚, 1721~1780, 木庵)에게서조차 비판을 받았다.28)
이상으로 주희와 채침의 홍범설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홍범에 대한 양인의 견해는 작은 주석의 문제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대의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하였고, 제왕의 경세대법(經世大法)인 홍범을 철저히 수신군주론(修身君主論)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따라서 황극의 극(極)도 수신상의 극처(極處)로 이해하여, 임금은 이를 통해 만인의 모범 내지 표준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극의 구체적 내용은 결국 성리학적 의리일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굳이 제왕에게만 국한되는 경세적 법도가 아니라 보편적 천리로서 만인 공유의 당연지칙(當然之則)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의리명변(義理明辨)이 전제되지 않는 군주상(君主像)이 배제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홍범관은 군주의 전제성과 절대성을 약화시키는 소지가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2. 윤휴의 홍범 연구
윤휴의 홍범 연구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는 홍범경전통의(洪範經傳通義)(백호전서 권41)가 대표적이고, 이 외에 유명한 그의 독서기(讀書記)중 「독상서(讀尙書)」 「홍범」(권41)과 「우칙낙서작범도(禹則洛書作範圖)」 「기자서주지도(箕子序疇之圖)」 「우서이륜지도(禹敍彛倫之圖)」의 도해(圖解, 권35), 그리고 허목(許穆)이 윤휴에게 보낸 「답요전홍범중용고정지실서(答堯典洪範中庸考定之失書)」(기언 원집 「학(學)」)가 참조된다. 또 윤휴의 「공고직장도설(公孤職掌圖說)」중 「군국축민지도(君國畜民之道)」(권28)에서 홍범을 언급한 대목이 있다. 이 중 홍범경전통의는 그의 나이 26세 때인 인조 20년(1642)에 저술되었는데, 그 후 20년이 지난 현종 3년(1662)에 이를 다시 수정하려고 했으나 그간에 견해가 달라진 것이 없었다고 하면서 약간 내용을 덧붙이는 데 그치고 있으므로29) 이것이 윤휴 홍범학의 만년 정론(定論)임이 분명하다. 그의 홍범 연구는 크게 보아 홍범에 대한 의리학적 해석과 상수학적 해석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제왕 심법(心法)으로서의 체계화
윤휴의 홍범 연구는 그 서명 홍범경전통의에서 보듯이 홍범을 하나의 경(經)과 전(傳)의 합집(合輯)으로 크게 평가하고, 제1주에서 제9주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대의만을 통론하고 있고 각주(各疇)에 대한 세목별 주해는 빠져 있다. 윤휴가 상세한 기존 연구에 만족하지 않고 자설(自說)을 상재(上梓)한 것은, 오히려 이전의 연구가 홍범의 전체를 관통하는 대의에 소홀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홍범구주에 대한 先儒의 학설에 상수의 근원을 탐구하고 성인의 은미한 뜻을 밝히려는 것이 진실로 상세하고도 구비되었다고 할 만하다. 성인이 구주의 순서를 정한 본뜻은 조화를 주재하고 善治를 내는 강령을 파악하는 것이고, 구주의 뜻을 쓰는 것인즉 비록 이미 경문에 보이지만 고금에 이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여기에 지극히 뜻을 두지 않으니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자 한다.30)
여기서 윤휴가 홍범을 이해하는 데 있어 주안점을 두고자 한 것이 ‘구주의 뜻을 쓰는 것’임이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윤휴는 채침의 해석으로 보면 ‘홍범에는 일은 있으나 법(法)이 없어서 성인이 도(道)를 넓히는 뜻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31) 이리하여 윤휴는 구주의 세목보다 “초일왈오행(初一曰五行), 차이왈경용오사(次二曰敬用五事), 차삼왈농용팔정(次三曰農用八政)”등과 같이 1 오행을 제외한 각주(各疇) 앞에 붙어 있는 ‘용(用)’의 용례에 더 촛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는 홍범 초두에 있는 “초일왈오행(初一曰五行)~차구왈향용오복위용육극(次九曰嚮用五福威用六極)”의 65자에 ‘천지의 본수(本數)와 성인의 미의(微意)가 여기에 모여서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32)고 한다. 즉 그는 1 오행에서 9 오복육극이 아홉가지에 천하의 일이 구비되어 있으나, 이를 운용하는 도는 ‘용’의 용례로 나타나는 경(敬)․농(農)․협(恊)․건(建)․예(乂)․명(明)․염(念)․향(嚮)․위(威)에 있다고 보았다. 이는 홍범을 철저히 8주(제1주인 오행은 용(用)을 말하지 않음)를 운용하는 인군(人君)의 심법(心法)으로 일관하여 이해했기 때문이다. 윤휴는 이에 대해 ‘(제1주 오행을 제외한) 나머지 팔주에 대해 용을 말한 것은 인사(人事)가 유위(有爲)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다.33) 그의 실천적 경학관의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그의 말대로 구주의 차서(次序)를 정한 뜻과 천리와 인사가 합쳐진 구주의 대경대법(大經大法)이 일관되는 심법으로 정립된다.
그러면 각주 앞에 있는 용(用)의 용례에 대한 해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제2주인 경용오사(敬用五事)에서의 경(敬)을 윤휴는 ‘천명을 두려워하고 인사를 닦는 것이며, 이 몸을 주재하고〔오사 중 모(貌) 언(言) 시(視) 청(聽)에 해당한다원주〕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오사 중 사(思)에 해당한다〕’으로 해석하였다. 채침은 경(敬)을 ‘소이성신야(所以誠身也)’로 주석하였다. 크게 보아 차이가 없으나 특히 사(思)를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본 것은, 채침이 사(思)를 단순히 이목구비(耳目口鼻)의 감수기능(感受機能)의 종합이란 측면에서 이해하고 주희가 감수기능의 주재(主宰)로서 사(思)의 기능을 강조했던 것34)과 비교할 때 심법에 더 강조점을 두고 이해한 특색이 나타난다.
다음으로 제3주인 농용팔정(農用八政)의 농(農)을 윤휴는 ‘이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왕정을 행하는 것’이라 하고, 이 마음이란 바로 역(易)에서 말한 ‘천지지덕(天地之德)’과 맹자(孟子)에서 말한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 하였다. 또 그는 ‘선왕이 경(敬)으로 보존하고 정(政)으로 행하는 바가 오직 ‘이 마음’일 뿐이다’35)라고 하고 있으므로 위의 오사의 사(思)에서 말한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에서의 이 마음도 역시 ‘천지지덕(天地之德)’과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다. 농(農)에 대한 윤휴의 이러한 해석은, 채침이 이를 ‘소이후생야(所以厚生也)’로 주석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결국 윤휴가 오사의 경(敬)과 팔정의 농(農)에 대한 채침의 주석을 비판한 요점은, 경과 농이 채침이 설명하듯이 하나의 조목인 것이 아니라 심법이라는 데에 있다. 이 역시 홍범을 제왕의 심법으로 관통해 이해하는 그의 시각이 크게 반영된 결과이다.
윤휴는 이러한 일관된 시각으로 구주의 대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늘에 근본하고 땅에 의지하여 음양의 유행이 順하지 않음이 없고〔1 오행필자. 이하 같음〕, 자신을 닦기를 敬으로 하여 一身의 云爲가 바르지 않음이 없으며〔2 오사〕, 백성에게 임하기를 仁으로 하여 道化가 행하고〔3 팔정〕, 하늘을 받들기를 順으로 하여 民敍가 베풀어지고〔4 오기〕, 道를 체득하기를 庸으로 하여 標準이 中에 서고〔5 황극〕, 세상을 다스리기를 權으로 하여 威福이 위에서 운행되며〔6 삼덕〕, 의혹을 변별하기를 智로써 하여 시비가 정해지고〔7 계의〕, 간특함을 닦기를 誠으로 하여 得失이 드러나며〔8 서징〕, 明命을 공경하여 높이며 天憲을 두려워하고 삼가서 길흉이 쌓인 바와 凶孼이 가득한 바에 빠지지 않게 된다면〔9 복극〕, 참으로 천자가 백성의 부모가 되고 천하의 왕이 되어 大法을 행하고 常倫을 펼쳐서 陰祐를 參贊하고 민생을 좌우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우 임금에게 내려준 이치이고 우 임금이 구주의 순서를 정한 뜻이니, 기자가 무왕에게 진술한 뜻이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36)
이처럼 제왕의 심법으로 일관하여 홍범을 이해한 윤휴에 있어, 심법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앞서 ‘천지지덕(天地之德)’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후술하듯이 요(堯)․순(舜)․우(禹)․탕(湯)과 같은 성군의 심법과 결부시키기도 하지만, 이것은 제왕 일신에 촛점을 두어 표현한 것이고 천인상통(天人相通)의 상경(常經)으로 말하면 그것은 곧 오상(五常)이다. 윤휴에 있어 ‘홍범은 바로 이 오상(五常)을 펼쳐 말한 것’37)이다. 그는 이러한 도(道五常)가 제2주 오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홍범 전체가 오상의 구현이란 점에서 내적 연관을 이루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상이) 하늘에 근본하는 것은 오행이고, 마음에 갖춘 것은 오사이고, 일용에 행하는 것은 팔정이고, 확연히 천지에 짝하는 것은 오기이고, 미루어 사해에 표준이 되는 것은 황극이고, 治者가 이를 다스리나 亂者는 이를 어지럽히는 것은 삼덕이고, 그윽함이 귀신에 참여하는 것은 계의이고, 조화가 四時에 운행하는 것은 서징이고, 吉者는 이에 순하여 복을 받고 凶者는 이를 어겨서 화를 입는 것은 복극이니, 오행에 근원하고, 오사에 싣고, 팔정에 행하고, 오기에 달하고, 황극에 합하고, 삼덕에 헤아리고, 계의에 변별하고, 서징에 징험하고, 복극에 궁구한다.…이것이 ‘紀綱’이 되는 것이니 곧 ‘彛倫’인 것이다.…이것을 주는 것은 하늘이고 이것을 돕는 것은 임금이다.38)
윤휴는 홍범에 하늘이 베푼 오상이 생략되고 열거되지 않았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같은 맥락으로 홍범의 구주 차서가 일관하고 있다고 한다. 기자가 무왕에게 고할 때 이에 대해 상세하지 않았던 것은, 기자가 다만 그 강령이 되는 조목을 베풀어 말함으로써 이미 그 나머지 뜻을 충분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채침은 경문의 ‘이륜’을 공안국과 같이 상리(常理 : 秉彛․人倫)로 주석한 반면, 구주 자체를 가리킨다고 본 것은 주희이다. 윤휴가 이를 비판하여 ‘홍범이라는 것은 이륜을 펴는 대법(大法)이지 이른바 ‘이륜’ 그 자체는 아니다’고 강변한 것도 바로 이를 지적한 것이다. 이 점이 윤휴의 홍범해석의 최대 관점이자 주희․채침설 비판의 핵심인데, 조선 홍범 연구사상 초유의 독창적 견해이다. 주자도 황극이 심법이라는 점을 지적하였으나39) 구주 전체가 심법이라고 본 윤휴와는 큰 차이가 있다. 윤휴의 이러한 홍범〓심법설은 이후 황경원(黃景源, 1709~1787, 江漢遺老)에서 더욱 강화된 형태로 나타남을 보게 되는 데서40) 그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윤휴의 홍범에 대한 심법적 체계화는 그 논변이 대단히 명쾌하여 채침설의 입론(立論)을 능가하는 면이 있다. 물론 의리의 내용과 구주 자체에 대한 이해에서는 주희․채침의 견해와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경문 자체에 대한 통관(通貫)만으로 이러한 논리적 구성을 도출해 낸 윤휴의 안목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격조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예견(銳見)은 홍범을 단순한 훈고적 대상이나 사변적 계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강한 실천적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주희․채침의 홍범설이 종래의 훈고학을 의리학(義理學)으로 발전시켰다면, 윤휴는 이를 다시 실천학(實踐學)으로 발전시켰다.
다음으로 윤휴 홍범설에서 주목되는 점은, 그가 홍범의 주체를 군주로 철저히 이해했다는 점이다. 물론 주희나 채침에 있어서도 홍범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군주이며, 제5주인 황극이 구주의 중심이다. 그러나 구주의 중심인 황극을 세우기 위한 전제로 그들은 오사를 매우 중시했고, 주희가 「황극변」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도 이 점이다. 그러나 윤휴는 황극을 세우는 요체를 황극장 자체에서 논구하고 있다. 그가 중요하게 취급한 황극의 경문은 첫째 단락인 “① 황건기유극(皇建其有極) ② 염시오복 용부석궐서민(歛時五福 用敷錫厥庶民) ③ 유시궐서민 우여극(惟時厥庶民 于汝極) ④ 석여보극(錫汝保極)”이었다. 그는 이 단락이 군주가 황극을 세우고 그 기에 바탕하여 정사를 펴 복을 내리고 신민이 귀극(歸極)하는 일을 총론적으로 말한 것으로 보고, 황극의 이하 장구는 모두 ①~④를 각각 부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종래 황극장은 학자들의 이해체계에 따라 장구의 개정이 가장 많은 부분이었는데, 그는 이러한 개작들이 황극장의 ‘입언(立言)의 체제를 깊이 고찰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경문 장구의 개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윤휴는 이 장을 ‘기자가 황극을 세우는 뜻을 거듭 말한 것으로 그 뜻에 순서가 있고 그 말이 정중하고 곡진하고 상세하다’고 하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중용 대학 효경과 표리를 이루며, 시경 주역의 시초〔權輿〕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윤휴는 이 과정에서 군주가 표준이 되는 것에 못지 않게 군주권의 확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그가 황극의 총론으로 이해한 첫째 단락에 주석하기를 ‘제왕이 이미 자신으로써 위에서 표준을 세워 천하의 법칙이 되고 또 작상(爵賞)과 위형(威刑)의 권병(權柄)을 총괄하여 아래로 덕을 펼치면, 천하의 백성들이 제왕이 세운 표준에 가서 따르지 않음이 없어서 서로 더불어 보호하고 지켜서 제왕으로 하여금 길이 천하의 주인이 되게 할 것이다’고 하였다.41) 이러한 인식은 삼덕에 대한 이해에도 이어져 그는 군주가 권병(權柄)을 잡을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는 군주가 권병을 잡지 못하여 일어나는 폐단을 상술하고, ‘임금의 도리는 건강(乾剛)을 위주로 하고 권세와 위복은 윗사람이 잡는 것이라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예용삼덕(乂用三德)이 그러한 것이다’42)고 단언한다. 이는 앞서 본대로 주희와 채침이 삼덕에 보이는 “유벽작복 유벽작위 유벽옥식 신무유작복작위옥식(惟辟作福 惟辟作威 惟辟玉食 臣無有作福作威玉食)”의 구절을 거의 외면했던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주희․채침의 홍범관에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요소가 많았고 군주의 전제성(專制性)과 절대성을 약화시키는 소지가 있었던 것에 비하여 윤휴의 홍범관에서는 군주권이 상대화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음을 보게 된다.
윤휴는 홍범경전통의를 저술한 20년 후에 다시 이를 검토하여 약간의 설(說)을 보충하였는데, ‘구주는 만사(萬事)이고 홍범은 심법이다’는 종래의 관점을 더 강화하여 각주의 용(用)의 용례를 경전에 나타나는 요․순․우․탕 등의 심법과 연결짓고 있다. 이 때 심법의 주체로 인용된 사람은 모두 상고(上古)의 제왕들이다. 이 역시 홍범의 주체를 군주로 보는 종래의 설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오행은 복희(伏羲)․신농(神農)의 제도와, 경용오사(敬用五事)는 요순의 심법과, 건용황극(建用皇極)은 탕 임금의 덕과, 예용삼덕(乂用三德)은 우 임금, 염용서징(念用庶徵)은 주(周) 선왕(宣王)과, 향용오복(嚮用五福)․위용육극(威用六極)은 주(周) 문왕(文王)과 연결지운 다음 ‘천성(千聖)이 전한 바와 백왕(百王)이 행한 바를 모두 족히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43)
마지막으로 윤휴 홍범설에서의 또다른 특징은 그가 경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철저히 ‘이경석경(以經釋經)’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경문의 뜻을 대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서목은 주로 주역과 서경이고, 그 외에 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이 간간히 인용되었다. 인용된 인물은 복희․요․순․우․문왕․무왕․공자․안연 뿐이고, 한송(漢宋)의 학자나 저술은 경문 해석과 관련해서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윤휴는 주희의 견해를 세차례 간단히 거론한 것을 제외하고는 송의 채침이나 김이상(金履祥), 심지어 한의 공안국․동중서(董仲舒) 등 홍범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제유(諸儒)의 연구는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윤휴의 이러한 홍범연구방법은 주자학의 체계에서 성립된 추상적․사변적인 개념과 논리체계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점차 주자학을 중심으로 교조화되어 가던 학문풍토 속에서 실천과 자득(自得)을 강조하던 그의 학문적 자주의식의 발로인 동시에 삼대(三代)의 정치와 도(道)를 자신의 학문적․정치적 모델로 추구해가던 경향이 투영된 결과이다.
2) 수리적(數理的) 해석의 시도
윤휴는 11세가 되던 인조 5년(1627)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보은(報恩) 삼산(三山)의 외가댁으로 피난하여 2년 가량 머물렀다. 이 때 외조부인 김덕민(金德民)에게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배우기를 청하였는데, 외조부가 그 책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뿐더러 어린 아이가 배울 책이 아니라고 하자 윤휴는 외조부의 스승인 대곡(大谷) 성운(成運)이 공부하던 죽헌(竹軒)에서 혼자서 황극경세서를 침독(沈讀)한 지 10여일 만에 이미 전인(前人)이 말하지 않은 뜻을 많이 발명하여 외조부가 논란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다. 탄옹(炭翁) 권시(權諰)가 김덕민에게 와서 이 일을 듣고 윤휴를 만나보기를 청하여 더불어 토론하고 나서는 일어나 절을 하며 “그대는 나의 스승이지 벗이 아니다”라고 하고 교우를 맺고 떠났다 한다.44) 이를 통해서 보면 윤휴는 약관에 이미 상수학적인 기초 소양을 충분히 갖추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때문인지 홍범에 대한 그의 수리적 해석에는 수리론의 일반적 설명을 거의 생략한 채 자득신론(自得新論)을 특유의 간명한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윤휴는 채침의 황극내편을 비판하기를
황극에 數가 있었던 즉(황극내편을 말한다원주) 수를 다하고 일을 점치는 것은 깊었으나 본말을 꿰뚫어 大經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45)
라고 하고 있다. 윤휴의 이러한 비판은 타당하다. 실제 채침의 범수학(範數學)은 홍범 각주의 의미나 구주 상호간의 내적 연관을 수리적으로 해명한 것은 아니고, 제7주인 계의의 일을 상론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이순의 홍범황극내편보해 역시 마찬가지여서 홍범 전체를 대상으로 수리적 해명을 시도한 흔적은 약간 있지만 스스로 정론을 세우지는 못했다. 따라서 윤휴가 홍범 전반에 대해 수리적 해명을 시도한 것은 조선 홍범학상 초유의 일이다.
먼저 윤휴는 홍범과 역(易)의 연관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즉 세상을 다스림에 오직 중도(中道)로서 함과 같은 것(5 황극이 해당됨필자)은 건괘(乾卦) 구오(九五 : 第5位의 陽爻)의 덕이고, 자신을 닦기를 공경으로 함과 같은 것(2 오사가 해당)은 곤괘(坤卦) 육이(六二 : 第2位의 陰爻)의 움직임이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3 팔정은 진괘(震卦), 4 오기는 손괘(巽卦), 6 삼덕은 대축괘(大畜卦), 7 계의는 계사전(繫辭傳) 제11장과 연관짓고 있다.46) 이는 종래 「구주본낙서수도(九疇本洛書數圖)」47)에서 오행감괘(坎卦), 오사곤괘(坤卦), 팔정진괘(震卦), 오기손괘(巽卦), 삼덕건괘(乾卦), 계의태괘(兌卦), 서징간괘(艮卦), 복극리괘(離卦)와 연결짓던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것은 위의 도해가 「문왕팔괘방위도(文王八卦方位圖)」48)에 구주를 직접 대입함으로써 홍범 수리의 외형에 치중한 반면, 윤휴는 홍범이 제왕의 심법이라는 입장에서 구주의 내의를 강조한 데서 말미암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그는 홍범의 수리가 낙서의 수리와 부합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윤휴는 구주의 차서를 표현하는 숫자 1(오행)~9(오복육극)을 합하면 대연지수(大衍之數)인 50이 되고, 오행부터 복극까지 실수(實數)로 합하면 천지지수(天地之數)인 55가 된다49)는 주희의 견해를 인정하였는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즉 구주의 강(綱 : 즉 各疇의 순서를 말하는 1~9)을 합하면 45가 되어 낙서의 본수(本數)로 돌아가고, 그 목(目 : 各疇에 포함된 細目의 가지수)을 다하면 대연지수 50이 된다고 한다.50) 이는 홍범의 기본 원리(綱)은 낙서에서 왔으나 만사(萬事 : 大衍之數)를 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기서 홍범이 내적으로 대연지수를 이룬다는 것은, 대연지수가 하도의 수이므로 홍범과 하도의 내적 통일을 가리킨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러한 홍범과 하도․낙서와의 상통조화(相通調和)에 대해 윤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도가 나오고 낙서가 나옴에 성인이 이를 본받았으니, 성인의 獨智를 드러내고 자연의 成法을 취한 것이 의도적으로 참고하고 고찰하여 반드시 같기를 구함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천지는 두 가지 이치가 없고 성인은 두 가지 마음이 없으니 하도와 홍범의 수는 비록 때의 선후가 있고 일의 출입이 있으나 그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만히 저절로 합하는 것은 그 사이에 人爲와 私智를 개입한 이가 억지로 牽合하고 穿鑿하여 말하지 못할 점이 있다.51)
여기서 윤휴가 홍범을 성인상전(聖人相傳)의 법(法)으로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윤휴는 낙서의 수리를 정사(政事)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낙서의 수는 양은 3이 왼쪽으로 돌고 음은 2가 오른쪽으로 도는데, 양은 1에서 시작하니 1이라는 것은 天位이다. 1에 3을 곱하여 3이 되는 것은 三公이고, 3에 3을 곱하여 9가 되는 것은 九卿이고, 9에 3을 곱하여 27이 되는 것은 27大夫이고, 27에 3을 곱하여 81이 되는 것은 81元士이다.
음은 2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은 兩儀이고, 2배가 되어 4가 되니 四象이고, 또 2배가 되어 8이 되니 八卦이고, 또 2배가 되어 16이 되니 16象이고 또 2배가 되어 32가 되니 32象이 되고, 또 2배가 되어 64가 되니 64卦가 된다. 삼공이 다스리기를 돕고 구경이 직분을 나누어 왕도가 완비되고, 二氣가 흘러 행하고, 팔괘가 서로 움직여 天德이 드러난다.52)
여기서 윤휴는 정사의 주체는 3의 수리(數理)로, 그 공효(功效)는 2의 수리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기수(奇數 : 홀수)는 양수(陽數)이므로 유행〔動〕하며 작용하고, 우수(偶數 : 짝수)는 음수(陰數)이므로 성(性)을 이루고〔靜〕 화형(化形)한다는 ‘양시음화(陽施陰化)’의 일반 수리론을 정사에 적용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윤휴는 주례를 원용하여 삼공육경제(三公六卿制)을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하기 위해 의정부를 복원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상과 같은 상수학적 이해가 그의 정치이론의 한 인식론적 근거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수리적 견지에서 윤휴가 구주를 해석한 것을 살펴보자.
먼저 윤휴는 음양 대응(對應)의 이치로 구주의 상호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양과 음을 각각 통(統)과 기(紀), 체와 용, 경(經)과 권(權), 본과 말으로 배속하고 있다. 즉 1 오행과 2 오사는 천도(天道)의 측면에서 통과 기가 되고, 3 팔정과 4 오기는 왕정의 체용이 되며, 5 황극과 6 삼덕은 군덕(君德)의 경과 권이 된다. 7 계의와 8 서징은 민사의 측면에서 본과 말이 되며, 9 오복육극으로 마친 것은 천인(天人)이 감응하는 도리가 이에 이르러 그 상변(常變)을 다함을 뜻하는 것이라 한다. 이처럼 1주2주, 3주4주, 5주6주, 7주8주를 각각 연결한 것은, 앞서 본 대로 채침이 구주의 상호관계를 정리한 것과 형식적으로는 같다. 그러나 채침은 두개 주의 상응을 천인상응(天人相應)으로 본 반면, 윤휴는 이를 음양상응(陰陽相應)으로 본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양자는 모두 양수(陽數)의 주(疇)를 더 중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채침은 양수가 천수(天數)이고 음수가 지수(地數)인 점에 착안하여 양의 주를 천의(天意)로 음의 주를 인사(人事)로 연결지운 반면, 윤휴는 낙서에서 1․3․7․9의 양수가 정방(正方)에 위치하고 2․4․6․8의 음수가 편방(偏方)에 위치한 것에 착안한 것이다.53) 이를 간단히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윤휴가 본 구주의 음양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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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正) |
음(偏) |
天道 |
1 오행 |
統 |
2 오사 |
紀 |
王政 |
3 팔정 |
體 |
4 오기 |
用 |
君德 |
5 황극 |
經 |
6 삼덕 |
權 |
民事 |
7 계의 |
本 |
8 서징 |
末 |
다음으로 윤휴는 수(數)의 운행에 따라 구주의 상호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즉 오행(1)은 천도의 상(常)이며 팔정(3)은 왕정의 용(用)이다. 복극(9)은 천인(天人)의 교감이며 화복의 정형(正形)이다. 계의(7)는 민신(民神)의 참협(參協)이며 길흉의 조경(兆景)이다. 또 오사(2)는 인성이 천명에 발원하는 것이고, 오기(4)는 천시(天時)가 민용(民用)에 출입하는 것이며, 서징(8)은 정침(精祲)이 서로 부딪치고 기화(氣化)가 변천하는 것이며, 삼덕(6)은 득실이 서로 미루어지고 세도(世道)가 오르내리는 것이라고 한다.54) 여기서 1→3→9→7과 2→4→8→6의 운행은 「홍범구주도(洪範九疇圖)」의 구주배열을 보면 쉽게 이해되는데, 양수는 왼쪽으로 돌고 음수는 오른쪽으로 도는 것에 따른 유행론적(流行論的)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세번째로 윤휴는 위(位)의 대대(對待)관계에 따라 각주간의 상응을 해석하고 있다. 오행(1)과 복극(9)은 음양의 품부와 선악의 보답이 서로 왕래하는 것이고, 팔정(3)과 계의(7)는 백성의 의(義)와 귀신의 모(謀)가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며, 오사(2)와 서징(8)은 휴구(休咎)의 움직임과 요상(妖祥)의 이름이 번갈아 서로 바뀌는 것이며, 오기(4)와 삼덕(6)은 천시(天時)의 변화와 세치(世治)의 변천이 번갈아 서로 경위(經緯)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황극(5)은 이 여덟가지를 총괄하여 사방에 임하여 가운데서 도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55) 윤휴가 홍범해석에서 적용한 음양상응․유행․대대의 방법론은 이후 이형상(李衡祥)이나 서명응(徐命膺) 등의 홍범연구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앞서 윤휴 홍범학의 특징을 심법적 체계화라고 지적하였다. 위에서 본 대로 그가 각주의 앞에 있는 용(用)의 용례를 해석하고, 각주를 주역의 괘와 연결지운 것은 심법적 측면에서는 더 정밀하다고 할 수 있는 반면 자의적 해석의 위험도 적지 않다. 그러면 그의 이해한 각주를 운용하는 심법 자체는 서로간에 어떠한 법칙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입론(立論)작업은 그가 홍범을 심법화한 것의 객관타당성 문제와 직결될 것이다. 구주의 대대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이러한 문제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9와 1은 終始이고, 仁〔3 팔정필자. 이하 같음〕과 智〔7 계의〕는 左右이고, 剛과 柔〔6 삼덕의 剛克․柔克〕는 相濟이고, 誠〔8 서징〕과 敬〔2 오사〕은 相資이다. ‘종시’는 定位이고, ‘좌우’는 相逮이고, ‘상제’는 相咸이고, ‘상자’는 相益이다. 이것은 또한 用이 後天에 기록되고 位가 先天에 합하는 것으로서 그 경위와 표리가 대개 ‘자연의 묘’가 있지 않음이 없으니 천시․사시의 運化와 물리․인사의 終始가 그 가운데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56)
이에서 보면 91, 3(仁)7(智), 8(誠)2(敬)로 구주를 운용하는 심법 상호간의 대대관계가 설명되고 있다. 여기서 1(오행)과 9(복극)는 구주의 근원과 최종목표여서 오행의 도(道)를 체현한 것이 최종적으로 복극을 통해 구현되므로 심법적 측면에서 그것을 시종(始終)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다만 4(오기)6(삼덕)의 대대가 빠지고 6 자체만 강과 유로 대비되고 있다. 윤휴는 4 협용오기(恊用五紀)를 운용하는 법을 ‘하늘을 받들기를 순(順)으로 한다’고 하고 ‘순(順)’을 ‘조화시키는 것〔燮〕’이라고 하였으므로57) 결국 그는 4와 6의 대대관계를 6 삼덕의 강극(剛克)․유극(柔克)을 4 오기를 운용하는 심법으로 조화하는 관계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윤휴는 심법 즉 용(用)의 대대관계가 ‘후천(後天)’ 즉 낙서에 기록되어 있는 ‘자연의 묘〔自然之妙〕’라 하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이것이 자연의 법칙으로까지 의미 부여가 될 수 있을지는 차치하더라도 상수원리를 심법적 측면에서 이해하고자 시도한 이 점은 아마도 홍범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윤휴 홍범학의 최고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며, 그가 홍범을 심법으로 체계화한 작업이 이를 통하여 상수적 근거의 일단이 마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윤휴 범수학(範數學)에 있어서의 황극(5)의 위격(位格)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황극이 5의 수에 있는 것과 관련하여
天德에 元亨利貞의 五德이 있는데 이는 實有의 이치이고, 왕도에 인의예지의 五典이 있는데 이는 無妄의 도리이니, 음양의 변화와 만사의 云爲가 능히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비운 것은 태극이 되고 채운 것은 황극이 되는 것이니, 中에 있으면서 하는 바가 없고 極에 처하여 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58)
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윤휴는 천덕(天德)의 오덕(五德)과 왕도의 오전(五典)을 5의 수리로 일관한 것으로 보고, 그 근원 내지 주체인 태극과 황극을 무위(無爲)와 유위(有爲)로 대비하면서 연결하고 있다. 여기서 황극은 천인상응의 내적 원리를 전제로 하면서 태극성(太極性)을 갖게 된다. 또 ‘하도에 5가 가운데 있는 것은 대연수(大衍數)를 이루는 까닭이고, 낙서에 5가 가운데 있는 것은 대칭이 되는 수를 합하여 15가 되게 하려는 까닭이다’라고 하고 있다.59) 홍범의 수가 중앙의 5를 중심으로 전후좌우로 합이 모두 15가 되는 것은 황극의 수리 5가 있음으로 해서 대대(對待)를 이루는 두개의 주(疇)가 비로소 5의 수리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낙서의 수리론에서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점이다. 그러나 윤휴는 ‘하늘이 우에게 홍범구주를 내려줌으로써 이륜이 펴지게 되었다’는 홍범 경문의 이륜이 곧 오상과 오륜인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대대를 이루는 두개의 주는 황극을 매개로 하여 천(天)에 속하는 오행․오운(五運)․오덕(五德)과 인(人)에 속하는 오전(五典)․오교(五敎)․오상(五常) 간에 이치적 합일과 연속성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륜이 곧 오상이며, 그것은 황극을 통해 구현된다는 것을 수리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또 8주는 가운데에 위치한 황극과 결합하여 모두 5의 수리를 얻게 되기 때문에 황극은 모든 주의 주체가 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윤휴가 황극이 ‘극(極)에 처하여 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다.
이처럼 윤휴에 있어서 황극을 의미하는 군주권은 이륜의 구현과 만사(萬事)〔8주〕실행의 주체로써, 태극과 같은 시원성과 초월성을 갖고 있다. 군주권을 태극에 비정하는 이러한 군주론은 군권(君權) 강화의 이론적 근거로 이후 계승되어 갔고 정조에 이르러서는 정치현장에서 구체화되기에 이르렀다.60) 물론 태극과 황극을 체용관계로 이해하는 시각이 전통적으로 있어왔던 것 같고,61) 원(元)의 신안(新安) 진사개(陳師凱)는 태극과 황극을 무극(無極)과 유극(有極)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62) 조선에서도 19세기 초엽에 이원곤(李源坤, 1776~1845, 靜虛窩)이 황극〓태극설을 표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63) 그러나 주희와 채침의 황극 주석에서는 이를 북극(北極)에는 비유했지만 태극에 비정한 경우는 찿아볼 수 없다. 이는 그들이 천리의 관철이라는 측면에서 황극의 역할을 강하게 의식했지만, 태극의 내재성(內在性)을 강조하여 천리의 구체적․현실적 내용과 그 준행에서 군신이 모두 공감․공유할 수 있는 범위 내로 황극의 역할을 축소하고 태극이 가지는 만리총회적(萬理總會的) 초월성과 절대성의 적용을 외면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주희․채침의 황극론은 지주․사대부의 중심의 사회구조를 천리로 인정한 바탕에서 성립한 군신공치적 정치의식을 천도론과 결합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윤휴의 독창은 아니라 하더라도 군주을 태극에 비정하는 조선의 군주론에서 그는 분명 선구에 속한다. 이러한 그의 군주론이 예송에서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의 논리로 나타났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윤휴가 황극〓태극설을 재강조한 것은 주희류의 군신공치적 정치의식을 뒷받침할 사회구조가 조선에 있어서는 동요하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 西溪)이나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제자인 윤동규(尹東奎, 1695~1773, 邵南)가 주희의 「황극변」을 직접 비판하기에 이른 것도64) 주희의 황극론이 갖는 현실적 적합성에 대한 의문에 그 문제의식이 있다.
맺음말
이상의 고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홍범은 유교 정치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이에 대한 학설은 경세론의 기본적 경향을 체계적으로 표현한다. 한 공안국의 주석 이후 훈고적 홍범학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다가 송의 주희와 채침에 이르러 의리학으로 체계화되는데, 주희가 공안국의 황극(皇極)〓대중(大中)설을 비판한 것이 이러한 변화를 선도하였다. 주희는 황(皇)을 대(大), 극(極)을 중(中)으로 주석하면 먼저 홍범편 경문의 뜻이 잘 통하지 않게 되고 구주 상호간의 구성적 의미도 파악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구주의 주체가 사라짐으로 해서 군주가 수신입도(修身立道)하는 홍범의 본지(本旨)가 부각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은 훈고적 홍범 해석이 갖는 의리적 불충분에 촛점이 있는 것으로, 주희의 제자인 채침은 이러한 스승의 기본 입장을 계승하여 홍범 전편에 대한 주석을 완료함으로써 의리홍범학(義理洪範學)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이들은 상호간에 다소의 견해 차이가 있으나 기본 입장은 동일하였는데, 낙서와 홍범의 연관을 적극 인정하였고 황극이 구주의 중심이 된다고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제2주인 오사를 강조함으로써 수신군주론의 시각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또 정치제도적 요소가 많이 포함된 제3주 팔정에 대해 매우 소략하게 주석하였는데, 이는 이들이 경세에 대한 제도적 접근의 방향에 관심이 적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주자학의 관념적․수신적․예치적 경세관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구주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던 제5주 황극에서 극을 북극(北極)에 비유되는 지극지의(至極之義)․표준지명(標準之名)으로 해석하여 건극(建極)을 인군이 인륜의 지극함을 다하여 천하의 표준이 되는 것으로 선악적․의리론적 측면에서 논리화하였다. 그러나 종래 군주 수신의 요체로 파악되어 오던 ‘무편무피 준왕지의(無偏無陂 遵王之義)’ 이하 황극의 소위 14구(句)를 신민(臣民)의 수심(修心)에 해당되는 구절로 해석함으로써 군신공치론(君臣共治論)의 논리를 강하게 표출하였다. 대신 왕권 신성성의 근거를 군민(君民)의 보편적 가치라 할 상리(常理)에서 구함으로써 군주의 전제권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6 삼덕에서 나타나는 ‘유벽작복(惟辟作福)’등 군주의 전제성을 표현하는 경문에 대해서는 극히 소략하게 주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에서 본격적인 홍범학 연구의 단초를 연 윤휴는 제왕의 심법이라는 실천적 경학관의 입장에서 명쾌하게 홍범의 전체 대의를 체계화하였다. 홍범을 이륜(彛倫)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륜을 펴는 법이라고 본 그는, 구주 자체보다 그 앞에 붙어 있는 ‘용(用)’의 용례에 더 주목하였고, 나아가 요순 등의 상고 제왕의 심법들과 연결지워 해명하였다. 이는 초유의 독창적 견해로 적극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는 또한 홍범의 주체를 철저히 군주로 이해하고, 나아가 군주권을 태극과 연결지워 그 초월성과 주도성을 강조함으로써 주희류의 군신공치적(君臣共治的) 시각과는 큰 차이를 노정하였다. 이러한 군주론은 그의 예론으로 직결되었던 바, 조선후기 두가지 군주론의 길항 속에서 왕권강화론의 이론적 선구의 위치를 점하였다. 연구방법상에서도 윤휴는 경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철저히 ‘이경석경(以經釋經)’의 방법을 채택하였고, 상고 제왕의 행적만 인용․비교함으로써 주자학적 개념과 논리체계를 극복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교조화되던 주자학에 대한 반성이자, 삼대지치(三代之治)의 인시적(因時的) 수용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윤휴는 수리적 측면에서 홍범 전반을 검토하였는데, 홍범과 주역․낙서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였고, 음양상응(陰陽相應)〔正偏相應〕․유행(流行)․대대(對待)관계로 홍범 각주를 해명한 것은 조선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 조선 홍범학사에서 일정한 의의를 갖는다. 또 그는 황극 5의 수리를 오상(五常)․오륜(五倫)의 5의 수리와 연결하여 이륜의 구현이 황극인 군주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논증하고, 황극(군주)과 태극을 유위(有爲)무위(無爲)로 대비시켰다. 아울러 구주를 운용하는 심법 자체도 대대관계에 있는 것으로 논증함으로써 자신이 홍범을 심법으로 체계화하는 데에 있어 상수적 근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가 심법과 상수설을 연결한 것은 홍범학상 매우 특이한 일로 평가할 수 있다.
A Study on the Hung Fan(洪範) thought of Yun Hyu(尹鑴)
Kim, Seong-Yoon
Hung Fan(洪範) in Shu Ching widely recognized as an original trend of Confucian political thought. This is a study on the Hung Fan thought of Yun Hyu, who was known as the leading scholar to start Hung Fan study.
He newly interpreted the philosophical meanings of Hung Fan in the aspect of mind law( a way to use mind: 心法). This meant that he understood Hung Fan in practical aspect and went beyond than that of Chu Hsi and Cha Chim(蔡沈) doctrine. Thus he emphasized in method rather than the contents of nine categories(九疇). He also interpreted in the context of mind law of ancient kings which implies that he regarded the king as the key subject to Hung Fan. He also emphasized the leadership and the superiority of a king by co-relating monarchial right with Ying - Yang. This theory of sovereign differs greatly compared to Chu Hsi and his followers and this intern was the characteristic of Yun Hyu theory of rites.
He consistently stuck to the principle of "interpreting doctrine based on doctrine“, which meant that he tried to overcome the concept and the logical structure of New-Confucianism. He also attempted to examine the overall structure of Hung Fan by adopting the mathematical principle. This was the first attempt in Choson dynasty and it had deep an effect on later schol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