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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 성서] 에베소서 2:14~19
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15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나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18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국경에 가보셨나? 대체로 나라와 나라 사이에 경계는 강이나 바다, 깊은 산에 있다. 김동환의 시 ‘국경의 밤’에 나오는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巡査)가 왔다 - 갔다 -” 이 시어처럼 엄중함, 긴장감 또한 서려 있다. 그런데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보면 카페 건물과 길가 사이에 줄 하나 그어져 있다. 병마개를 땄는데 그 병마개가 국경을 넘어가는 일이 허다했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알래스카와 러시아를 사이에 둔 베링해협이다. 여기에 3km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섬이 있다. 큰 디오메드섬, 그리고 또 하나는 작은 디오메드섬. 그런데 이 섬들은 국적이 다르다. 큰 섬은 러시아, 작은 섬은 미국령이다. 3km 정도면 대학로 벙커1에서 고려대 정도 사이인데 이 사이에 20시간의 시간차가 발생한다. 작은 디오메드 섬이 밤 11시면 큰 디오메드 섬이 저녁 7시다. 따지고 보면 국경은 사람이 그은 선 하나에 불과함에도.
1953년 7월27일에 그어진 휴전선은 보통 선이 아니다. 사실 휴전선은 그 이름만 보면 지극히 임시방편적이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던가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이름 그대로 62년 동안 유지돼 왔다. 그새 이 선을 그은 두 당사자 중 한 당사자인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무너졌다. 그은 선 위로 절대 왕정을 60년간 꾸려온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은 저 세상 사람이 됐다. 이남 지역 남한의 철권 독재자 박정희는 죽었고,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가 도입됐으며, 두 대통령은 이 선을 넘어 북의 지도자를 두 번이나 만났다. 세월의 힘으로 이 선이 지워지거나 부식돼 사라질 법한데도 여전히 이 선은 국경선 이상의 굵기로 전 세계인에게 명징하게 인식되고 있다. 군사적 대치만이 아니다. 한 민족의 정서와 이념은 남북으로 여전히 양분돼 있고, 남쪽마저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둘로 쪼개져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한국전쟁의 트라우마 탓이 크다. 전쟁을 지시했고 획책한 책임자는 김일성이다. 그 민족사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북한 주민은, 350만여 명의 희생에다,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 시설이 파괴됨으로써 초래된 생존에 따른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오판, 패배의 책임자이건만 그러나 북한 주민은 그 김일성을 지지한다. 이게 그런데 양상이 지나쳤다. 김일성 삼부자에 대해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한다. 이른바 백두혈통이라며 말이다. 정상으로 볼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대구경북 일부가 박정희의 혈통으로써 박근혜 씨를 지지하는 것도 비정상이기는 마찬가지다. 1.4후퇴 이후 미국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북한에 쏟아 부었다. 비보다도 폭탄이 많았다는 말이 있었듯 북은 초토화가 됐다. 이것이 지금 북한을 풍요가 미국식 자본과 닮아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부하는, 거대한 이념 사회로 만든 맥락이다. 개성공단에서 일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을 보면서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도리어 안타깝게 여긴다고 한다. “남쪽 동무들은 왜 이렇게 이기적입니까? 돈만 밝힙니까?” 이런 지적도 서슴없이 한다고 한다.
반대로 남한은 또 어떠한가. 소련 공산군에 의해 생활 터전을 내주고 또 재산까지 내주며 쫓겨 내려온 월남 실향민들이 겪은 분노는 어떤가. 이들은 서북청년회의 이름으로 모여 제주도로 달려간다. 빨갱이와 비슷한 놈들이 설친다는 말만 듣고 집단 행동한 것이다. 그들은, 당시 제주 인구의 1/10이 살상 당했다는 4.3 폭력진압의 핵심 주역이 됐다. 여기에다가 김일성의 야욕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수많은 남한 국민이 숨지고 다치고 헤어지게 만들었다. 남한 또한 공산당 이야기만 나오면 모든 합리적인 토론, 이성적인 대화가 사라져버리고, 죽일 놈 살릴 놈으로 갈리며 치킨게임의 장이 돼 버린다. 그러나 시대는 많이 흘렀다. 5분의 3세기 즉 60년이 지났다. 남북의 전쟁 세대는 점점 인구에서 줄어들고 있다. 그 상흔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전체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간 이산가족상봉, 남북합의서 체결, 남북단일팀 구성, 정주영 소떼 방문,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대의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남북 체제 사이에는 괄목할만한 신뢰관계가 축적됐다. 그럼에도 통일에 다가가기는커녕, 지도자 몇 사람이 농간만 피우면 얼마든지 역사는 1950년대로 돌아가는 취약한 환경이다.
트라우마의 근원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외세다. 한반도의 분단, 또 한민족의 분단은 외세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 소련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분할해 통치했다. 독일과 일본을 무릎 꿇린 뒤 지구촌은 주인이 없어졌다. 이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경쟁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꼭두각시를 내세워서 대리 통치하려고 했다. 이러다보니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 민족지사는 초장부터 배제됐다. 김구 등은 체제와 이념을 불문하고 민족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미국 소련에게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인사들에게 국권을 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우호적인 인사를 앞세운다. 남쪽의 미국은 이승만을, 북쪽의 소련은 김일성을 말이다. 이중 젊은 야심가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장악하려 했다. 그 자신이 장악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해방’이라는 어휘를 썼다. 그렇게 해서 6.25 남침전쟁이 시작됐다. 동북아시아 방어선 이른바 애치슨라인에서 한국과 대만을 뺐던 미국은 아차하며 전쟁에 개입했다. 이렇게 해서 남북, 즉 이승만 김일성 정권이 충돌했지만 외세가 개입해서 세계대전의 성격이 된 한국전쟁이 개전됐다. 전쟁이 끝나고도 미국과 소련 양강이 주도하는 냉전은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됐다. 전쟁까지 치르며 체제가 확실하게 갈린 한반도, 자연스럽게 미소 양강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됐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고 남한이 한중수교가 맺는 등 냉전 체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거대 우방 중 하나는 사라지고, 또 다른 우방은 개방화에 나서면 적대적관계인 남한과 수교까지 맺어버리자 북한은 긴장했다. 이미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었던 북한은 이러다가는 체제마저 무너지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국전쟁 종전 직후부터 검토해오던 핵개발을 본격화한다. 미국 정부는 대대적인 압박에 들어갔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까지 그 분쟁과 갈등은 이어져오고 있다.
그렇다면 반세기 동안 남북한은 그저 미소의 꼭두각시 노릇만 했단 말인가. 아니다. 남북 정상이 그 어느 때보다 친하고 가깝게 지내던 때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남북 정상만 형제처럼 지냈다는 점이다. 바로 박정희 김일성 시대였다. 그 둘은 계속 으르렁댔지만, 물밑에서는 서로의 독재체제 또한 서로의 왕정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해왔던 것이다. 한국의 국민보다도 유신체제의 선포를 북한이 먼저 알게 했다는 점 아시는가. 두 번이나. 게다가 1972년 12월 27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 공포로써 김일성 왕조체제의 출발이 선포되던 그날, 박정희의 남한 역시 영구집권이 요체라 할 수 있는 유신헌법을 공포한다. 그러나 7년도 안 돼 박정희는 부하가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면서 이 야합의 세월은 종식된다. 민족 민중 민주와 무관한 미소 양강체제 속 독재의 적대적 공존은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여기에 무슨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1989년 4월의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실로 대단한 사건이다. 문익환. 그는 영화배우 문성근의 아버지로 대중에게 이해되겠지만, 현대사, 한국 역사를 알면 문익환을 모를 수 없다. 문익환은 김일성에게 먼저 포옹하며 격한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 자체로 충격이었다. 그 이전 문익환이 남한의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점을 들어, 일부에서는 '태생적 종북'인사가 '형제'인 김일성을 만나 '포옹'한 것으로 이해한다. 문익환은 과연 그러할까. 2004년에 나온 ‘문익환 평전’에는 문익환이 아버지대로부터 공산주의자와는 원수지간이었음이 자세히 소개된다. 254페이지를 참고해보면, 문익환에게 북한과 공산주의는 여타 월남자들처럼 증오와 경계의 대상이다. 살던 터전과 재산을 폭력적으로 갈취하려던 날강도에 다름 아니다. 서북청년단원들의 사고 체계와 조금도 다를 이유가 없었다. 그런 그가 김일성과 포옹한 것은,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가 남한에 돌아와서 공안당국에 붙잡힌 뒤, 재판에서 추궁 당했다. “왜 김일성과 포옹했느냐”라고. 그 때 문익환이 책상을 꽝치며 했다는 말이 이거다. “목사가 김일성을 끌어안지 않으면 누가 끌어안느냐!” 그렇다. 문익환은 철천지원수였지만 사랑하라는 명령에 의해 김일성을 안았다.
문익환은 장준하가 사실상 암살당한 이후에 연구실을 박차고 나온다. 한신대학교에서는 문이 쾅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신학자로서 정평이 나 있던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했듯 또 요나에게 했듯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물음을 문익환에게 던졌다. 그를 역사의 현장, 민중이 도탄에 빠지고, 정의가 실종되는 세상으로 파송한 것이다. 그래서 장준하라는 벗을 데려감으로써 그의 눈을 뜨게 했다. 문익환은 박정희와 맞서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 본질인 줄 알았다. 박정희만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온당해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독재에, 또 압축성장의 그늘 밑에서 하류인생으로 낙인 박혀 빛을 잃어 죽어가는 민중에게서 찾았다. 그러나 민중 또한 근원이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보니 민주주의의 부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곁가지였다. 그랬다.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분단, 그것이 병의 근원이었다. 하나님이 드디어 눈을 뜨게 해주셨다.
왜 분단이 이 민족의 몸에 찔린 가시일까. 정치부터 살펴보자. 낡고 부패한 세력은 분단 상황을 집권 연장 수단으로 오용해왔다. 상대를 친북이니 종북이니하며 매도해서 고립시킨다. 또 선거 국면이 불리하게 돌아가니까 판세를 뒤집기 위해 북한과 야합해 휴전선에서 아군을 공격당하게 하기 위한 궁리를 했다는 설도 양산하게 했다. 경제는 또 어떤가. 민생을 위해 챙겨둬야할 국가 예산을 북한과 맞서기 위한 국방비에 과하게 쏟아 붓게 만들었다. 분단에 따른 리스크 때문에, 한국에 투자하려는 외국인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분단 상황을 잘못 관리하면 우리가 경제적으로 가장 크게 의존하는 중국이 우리에게 보복할 위험성마저 농후하다. 기억하시나? 1999년 중국의 값싼 마늘 수입이 급증하면서 국내 마늘산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 우리 정부는 중국 마늘 관세율을 크게 올렸다. 그러자 중국은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의 수입을 잠정 중단한다는 보복조치를 내렸다.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서울경제 기사 요약) 결국 우리는 사실상 백기를 들고 말았다. 사드 잘못도입하면 중국이 우리에게 경제적 보복만이 아니라 군사적 보복까지 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중국이 강자로서의 횡포를 무기로 삼는 것도 못마땅한 일이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이 이러하다.
사회 분야는 또 어떠한가. 수시로 국가를 거대한 병영으로 조성하고 있다.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과 화해를 변증해야 할 강단에서 분단을 정당화하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토설되고 있다. 죽기까지 사랑한 예수의 정신은 이 문제에서만은 논외의 대상이 된. 남한이 이러한데, 체제 유지를 위해 모든 주민을 상시적으로 전쟁에 동원하는 북은 오죽하겠나. 이 분단을 끝장낸다면 즉 휴전을 종전으로 전환해 평화체제를 성사시킨다면 우리는 이성을 해체시키고 광기를 정당화하는 분단의 망령을 “자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
문익환 목사는 이 민족이 겪는 질곡의 원천에 분단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분단을 해체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문익환이 무슨 자격으로? 남한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데모하는 단체의 수장쯤 되는 문익환이, 지가 뭔데 북한 정상과 회담을 갖는가!? 아니었다. 체제를 달리한 남북 구성원 간의 만남과 대화는 분단이라는 괴물의 비수를 찌르는 것이었다. 대화는 무슨 대화, 만나면 싸워야지, 그리고 죽여야지. 이 망령에 대해 보란 듯이 일격을 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인류를 드리웠던 죄와 사망의 어둠을 쫓아냈듯 말이다. 괴물은 문익환에게 자상을 입고 몸부림쳤다. 그러자 남북합의서 체결, 남북공동선수단 구성, 개성공단 및 금강산 관광 개설 나아가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관계는 줄줄이 평화와 신뢰 회복의 일로를 걷게 됐다. 민족끼리 화해협력을 통해 주체적으로 냉전을 끝내자는 뜻이 모아졌다.
그런데 이 무렵, 미국 군수산업체와 연결돼 있는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임기 내내 전쟁을 일으키고 다닌 부시 미국 행정부가 들어섰다. 그는 ‘악의 축’을 거론하며 문익환이 빗장을 허물고 김대중이 기반을 다진 남북화해국면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빨갱이는 나쁜 놈’ 이런 거 말고는 논리, 명분, 정당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수구부패기득권세력의 총아 새누리당이 국면 고비마다 남북화해 무드에 방해를 놓았다. 집권한 이후에는 금강산 관광을 파토 내더니 개성공단마저 폐쇄해버렸다. 여기까지 들으면서 북한은 잘하고 있는데……. 로 이해했다면 오산이다. 그들은 남한의 지각 있는 지도자와 양심들의 지속적이며 적극적인 평화 요구를 묵살하고는 핵개발을 추진했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는 핵개발 추진속도를 다소 늦추긴 했지만. 그들은 러시아, 중국이 없었다면 그런 평화에 역행하는 행보를 보였을까. 결국 남북한은 외세에 국운을 건 1950년대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나님은 외세에 의존하는 민족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우리와 유사한 역사 구조를 지닌 이스라엘에 눈을 돌려보자. 르호보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갈라 차지하던 시대로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외세를 끌어들였다. 북이스라엘은 시리아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남유다를 공격했다. 남유다도 아시리아의 세력을 끌어들여 북이스라엘에 맞섰다. 시리아는 북이스라엘에게, 또 아시리아는 남유다에게 어떤 존재였나. 미국은 이승만 이후로 한국에게 어떤 존재였나를 알면 답은 뻔하다. 보수 개신교 신자들이 미국을 생각하듯 남북이스라엘은 각각 시리아 아시리아를 구원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리아, 아시리아가 그랬고 또한 미국이 그러하듯 이 강대국은 자기 이익대로 움직이는 존재들이었다.
북이스라엘이 시리아를 끌어들여 연합군을 만들고 남유다를 공격한다. 남유다는 망하지는 않았지만 회복불능의 지경이 되며 타격을 입는다. 영토를 빼앗기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다. 남유다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왕국이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성난 민심 때문에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겠다 판단했다. 그래서 남유다 아하즈왕은 아시리아 왕에게 전갈을 보낸다. 그리고 열왕기하 16장 7절에 나와있는대로 "나는 왕의 신하이며 아들입니다. 내가 지금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셔서 나를 그들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한다. 그리고는 왕실 금고에 있는 금은을 있는 대로 다 모아서 아시리아 왕에게 뇌물로 보냈다. 이걸로 모자라나 싶어서 야훼의 전에 있는 금은보화도 보냈다. 상징적이다. 하나님은 개뿔, 우리를 지켜주는 건 아시리아라고 믿은 것이다. 북이스라엘을 두둔하는 시리아를 치고 싶었던 아시리아로서는 이게 웬 떡인가 했다.
결국 어찌됐을까.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망한다. 자, 이 상황에서 남유다는 아마도, 야훼의 전에 있던 예물마저 탈탈 모아다가 바친 것도 있겠다, 또 도움도 줬겠다, 아시리아가 점령한 북이스라엘은 남유다가 챙기가 되는 것일까. 천만에 말씀이다.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영토가 됐다. 당나라군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가 우리 겨레의 땅 만주를 잃은 것처럼. 북한이 스스로 무너지든 누군가의 공격을 받고 무너지든, 그 체제가 무너졌을 때, 북한은 자연스럽게 남한 영토가 될까. 된다고 믿는 게 박근혜 식 ‘통일은 대박’론이다. 그러나 누가 이런 주장에 동의를 하는가. / 아시리아는 찝찝해하는 남유다쪽으로 군사들을 돌진시킨다. 북이스라엘도 잡수신 터에 남유다까지 드시려고 했다. 도의도 양식도 없는 깡패 짓이었건만, 아시리아는 괘념치 않았다. 어떻게 됐나. 남유다는 이집트에게 원병을 청한다.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의 절반을 망하게 해놓고, 또 다시 외세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늦었다. 남유다는 아시리아에게 무릎을 꿇는다.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터져 나온다. 남유다를 향한 준엄하고 격정적인 징계의 메시지였다. 이사야 30장 1~3절까지다. “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식들아, 너희가 나에게 물어보지도 아니하고 일을 꾸미며 내 뜻을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동맹을 맺어 죄 위에 죄를 더하는구나. 나에게 묻지도 아니하고 이집트로 내려가 파라오에게 기대어 몸을 숨기고 이집트의 그늘에 숨으려는 자들아, 파라오에게 보호받으려던 것이 도리어 부끄러움이 되고 이집트의 그늘에 숨으려던 것이 무안하게 되리라”라고 하셨다. 또 7절에서 8절까지. "이집트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나라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종이 구렁이'라 부른다. 자, 어서 가서 말을 판에 새기고 책에 기록하여라. 훗날 영원한 증거로 남게 하여라."
성서에 손을 얹고는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한다고 미국은 하나님의 나라인가. 아니다. 그곳도 욕망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가의 형태를 띤 이익공동체다. 우리의 지존자 또 구원자 되실 분은 오직 정의의 요체이신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이 안 보이니 현실적으로 가장 큰 힘을 가진 존재에 의지한다, 나아가 그 큰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서 일 것이라고 애써 믿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의 표본이다. 나는 이 한반도 역사 위에 가장 강력하게 실존하는 하나님을 본다. 해방 전만해도 한국 개신교인의 70%가 이북에서 거주했다. 그 땅은 하루아침에 기독교가 멸절되다시피 한 땅 야훼 하나님 대신 김일성이라는 한 인물의 종교국가로 타락 했다. 이북 교인 대다수는 결국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힘을 믿은 것이다. 힘을 추종하는 것, 이것은 역사적 맥락이 있다. 이북지역에서는 1907년 “일제에게 먹히는 거, 열강에 침탈당하는 거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네 마음속에 죄나 바라보라고, 그리고 회개해? 눈물 나와! 울어? 우니까 마음속에 번뇌가 사라졌지? 할렐루야!” 이런 맥락의 평양대부흥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들은 교회를 나왔지만, 찬송가 부르고 성경 읽었지만, 믿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힘이었다. 하나님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핵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북한을 손가락질할 수만 있는 이남인가. 우리는 힘은 안 믿는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도 아니다. 힘보다 더한 돈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무수히 크고 광대한 예배당이 수도서울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회정의를 간과한 채 개인의 영혼구원, 속죄의 문제에 치우쳐 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처럼. 돈만 많이 벌면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궁극적 응답을 받은 걸로 오해하게 만든다. 경제면에서 세계 최강국인 미국에게 철저하게 아니 처절하게 굴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억하시나. 줄리언 어산지가 위키리크스라는 이름으로 폭로한 2008년 5월29일자 주한 미국대사관 외교전문. 여기에는 소망교회 은퇴 장로이자 MB의 형인 이상득 당시 국회부의장이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에게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니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내용이 수록됐다. 2006년 7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버시바우에게 전화로 정부가 추진하는 약제비 적정화와 관련해 미국 입장이 관철되도록 “죽도록 싸웠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자기가 속한 나라와 싸웠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원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라는 제목이었는데 훗날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이름을 바꾼 함석헌 선생의 명저에는 외세에 기댔다가 큰 낭패를 본 한반도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당나라라는 큰 나라를 앞세워 통일을 도모한 신라에 의해 북방을 호령한 고구려가 멸망하고 이로써 우리 민족 삶의 기반인 만주를 잃었다. 만주를 잃은 이빨 빠진 호랑이 한민족은 숱하게 거란과 여진족의 공세를 당한다. 고려 윤관, 최영 장군 그리고 조선 효종이 추진한 북벌은 내부의 사대주의자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고 그렇게 해서 이 한민족은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된 비굴한 민족’이 됐다는 지적이다. 그 뒤부터 수세적이며 외세의존적인 나라가 돼 버린 것이다. 고구려 발해의 기백은 어디로 사라지고, 외세의 장난감, 놀이터가 됐는가 하는 탄식이 쏟아져 나올 법하다.
물론 영토 확장을 위해 싸우자, 맞서자 이러는 게 아니다. 그러나 전시작전 통제권 우리는 감당 못한다. 미국이 가져가달라, 개발 안 된 전투기라도 미국이 만드는 거라면 무조건 사겠다, 성능이 검증 안 된 한마디로 불필요한 위험천만한 외국 무기체계 즉 사드, 당장 만들어주시라, 번호표 받고 기다리고 있겠다는, 이건 팬 심인지 노예근성인지 알 수 없을 외세 의존적 태도는 남북이스라엘왕조 시대 때 이미 불신앙으로 결론 난 그릇된 길이다. 게다가 민족끼리 주체적으로 잘해보자, 더 이상 싸우지 말자, 함께 번영하자는 취지의 개성공단을 포기하는 행태는 이 민족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시는 성령의 순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외세에 대한 저급한 의존을 이사야 31장 3절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질타한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그들이 타는 말은 고깃덩이요, 정신이 아니다. 야훼께서 팔을 휘두르시면, 돕던 자도 비틀거리고 도움을 받던 자도 쓰러지리라. 모두 함께 멸망하리라.” 다시 이야기한다. “미국인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그들의 무기는 고철덩어리요, 정신이 아니다. 야훼께서 팔을 휘두르시면, 미국도 비틀거리고 남한도 쓰러지리라. 모두 함께 멸망하리라.” 또 이야기한다. “핵은 물질이요, 신이 아니다. 그들의 무기는 무기일 뿐이요, 정신이 아니다. 야훼께서 팔을 휘두르시면, 핵도 비틀거리고 김일성 왕조도 쓰러지리라. 모두 함께 멸망하리라.”
물론 민족끼리 뭉치고 외세와 대결하자는 논리로 결론을 낸다면 그것은 허울뿐인 북한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 2장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이 책을 바울 사도가 썼는지 바울 사도의 제자가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유대인 비유대인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놀라운 가르침을 역설한 점에서는 바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유대인은 선택받은 백성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된다는 논리를 부정하는 위대한 식견이다. 유대인의 강력한 반발을 부를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주 냉철하게 잘라 말한다. “유대인 당신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생각을 버리시오! 그 생각이 평화를 그르치게 하고 있소!” 오늘 바울이 한반도를 향해 이런 외침을 한다면 우리는 뭐라 말할 것이나. “남북한 사람들 당신들의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정의라는 생각을 버리시오! 그 생각이 평화를 그르치게 하고 있소!”라고 말이다. 문익환의 논리는 한마디로 남한이 북한에게 굴복하자? 천만에 말씀이다. 각자가 주체성을 갖고 주체 대 주체가 만나 민족으로서 주체적인 통일을 일궈내자는 것이다. 그래도 된다. 역사상 최대의 반전이 무엇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이 말씀 앞에 겸허히 선다면 우리는 지난 세기 전쟁과 분단, 반목의 역사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다.
한반도는 우매한 지도자들로 인해 결국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다. 하나님은 이 역사를 통해 골방에 들어앉아 개인의 복락만을 갈구하던 당신의 백성을 끌어내고 계신다. 그리고 광야의 길에 서게 만드셨다. 우리 평화를 위한, 주체성 회복을 위한 새로운 기독교의 내일을 만들어가야 한다.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라고 물을 때에 답을 해야 한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를 써주소서.
하나님,
여기 제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신문 기사 속에 나오는 여러 가지 위기의 징후들을
내 이야기 내 아픔으로 공감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리고 지극히 작은 사람이지만
내가 평화의 도구로 쓰이길 원하오니 써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말씀 붙들며 문익환 목사가 쓴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그의 아들 문성근의 목소리로 듣고, 뒤이어 문익환 목사를 추모하며 만든 류형선 작사 작곡 그대 오르는 언덕을 김원중의 노래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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