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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치료 1』
기독교세계관과 치유 윤리
김 경 호 교수님
김 민 홍 (21254501)
2021, 5, 18
제 1 부 의료는 가치중립적인가?
1장 세계관과 의료
신발이 발에게 명령하는 세상
군에 입대하면 군인들이 지급받은 군화가 잘 맞지 않아 낑낑대면 구대장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군화가 잘 맞지 않는 군인들은 발을 군화에 맞춰라!”
이처럼 우리는 본질과 수단이 뒤바뀐 채로 사는데 익숙해져 버린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목적이 되어야 할 생명과 수단이어야 할 의술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가치체계 속에서 오늘날의 의료에 만연된 증상들을 보면 중병을 앓고 있음에 틀림없다.
2. 세계관의 변화 없는 복음화
전 세계에 수십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나라 미국에서 의사가 생명을 죽이는 낙태를 ‘로 대 웨이드‘ 사건의 대법원 판결을 통해 합법화하였고, 합법적으로 의사의 손에 의해 죽어가는 태아의 수는 해마다 1백만 명을 넘는다.
청교도들이 성경에 손을 얹고 성경적 세계관으로 시작한 나라에서 이런 대량 학살을 권리로서 합법화하는 동안 기독교적 세계관은 어떤 영향을 줄 수도 없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의료의 방향과 의술의 모습도 필연적으로 그 시대 세계관의 반영이다. 오늘날 의료는 영적, 도덕적으로 자기 결정적 존재인 인간을 단순히 유물론적 인간관에 근거한 의료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빌라도처럼 손만 씻으면(마 27:24)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3. 원론을 배제한 각론
이 책의 목적은 생명윤리 논의에서 어느덧 밀려나 버린 본질, 즉 생명에 대한 원칙들을 회복시키는데 기여하려 함이다.
오늘날 이루어지는 의료윤리의 각론에 대한 토론은 원리를 떠나 어떤 상황에서나 가능한 기술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부 기독교인이나 기독의료인들도 이런 문제의 논의를 하나님의 생명 창조 원리에서 시작하지 않고 세속적 기술이나 가치관의 기초 위에서, 특히 상황을 최우선시하여 극단적 상황이 본질인 원리를 결정하게 하는 논의에 휘말려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의학의 발달에 따라 의료윤리에는 늘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의료에 반영하는 세계관의 차이가 의학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옷을 입고 반복되어 등장할 따름이다.
4. 원론이 되는 절대가치가 있다
따라서 저자는 성경적 세계관으로 의료를 수행하고자 할 때 필요한 전제들을 확실히 하려고 한다.
즉 의료와 관련하여 절대가치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자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 대상은 ‘생명’과 ‘가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생명과 가정(결혼)은 이 세상의 피조계에서 가장 귀한 가치를 지니도록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시거나 제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낙태의 편의를 위해, 태아 연구의 편의를 위해 “원시선이 나타나기 전 14일까지의 배아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정의를 과학이라는 옷을 입혀 만들어 내기도 하고, 의사들이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폐기될’ 냉동배아라는 말도 서슴치 않고 사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에이즈의 만연뿐 아니라 가정의 파괴와 왜곡을 가져오는 동생애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오히려 이를 비정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체세포를 복제하는 형태의 최첨단기술로 아기를 만들어 주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첨단의료의 힘을 빌려 절대가치라고 할 수 있는 생명과 가정의 모습을 왜곡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5. 의료의 멜로드라마화 : 상황과 황금(배금주의)이 원리를 지배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의료의 멜로드라마화’는 외형적으로는 생명가치를 존중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단순히 드라마로 그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객관성을 상실한 안목을 갖도록 하거나 원리에 무감각해진 체 의료 문제를 바라보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는 어떤 특수 상황에서의 목적 달성은 위해 이에 앞서는 윤리적인 원리나 절대가치를 무시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고, 더 나아가 무슨 기술이 되었든지 기술의 발전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힘이 있다.
일반인들은 멜로드라마 그 배후에 얼마나 많은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도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연구자들의 호기심과 부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인지 잘 알수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인도주의적으로 호소할만한 예외적인 멜로드라마를 기점으로 논의를 시작하여 감정에 호소하는 인도주의자들의 전술에 휘말리게 된 결과이다.
감정에 호소된 멜로드라마는 결국 이성적으로도 절대가치와 절대원리들을 포기하도록 탈감각시켜 버리는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사실 더 무서운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속애서 이를 몰아가는 배후 세력이다. 즉 맘몬을 숭배하여 황금을 좇는 배금주의(또는 상업주의)인 것이다. 생명공학 사업을 21세기의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여기고 있으며, 정부으 적극적 지원 아래 아직 효율성이 입증되지도 않는 ‘DNA 칩’과 같은 바이오 벤처 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고 있다.
메스컴을 통해 접하는 ‘바이오 벤처 산업의 육성’이라는 제목의 뉴스들은 여기에 오로지 경쟁적인 상업성만 남아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게 한다. 이처럼 원리를 조용히 변형시키는 의료의 멜로드라마화와 변형된 원리를 응용하여 실행시키는 배금주의는 둘도 없는 동지이다.
6. “중립은 없다. 너희는 생명을 무엇이라고 믿느냐?” : 의료윤리의 전제를 위한 궁극적 질문
의료윤리는 윤리학자들 사이에 응용규범윤리학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오늘날 의료는 가히 이론규범윤리학을 앞서 가고 있어 수시로 예기치 못한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윤리학자들을 당황시키고 있으며 대부분 이런 이슈는 첨단의료의 발달과 연관된 문제이다.
따라서 아직 문제 인식도 못하고 있는 이론규범윤리학이 의료에 응용원리를 제공하기보다는 역으로 의료가 이론규범윤리학에 자신의 행위를 뒷받침할 이론적 응용규범윤리학적 정당화를 요구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그러나 중립은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택은 의료의 영역에서 어떤 믿음을 가질 것인가에 달려 있다. 생명은 무엇이며 인간의 인간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제가 곧 선택의 기본틀이 되는 것이다.
생명윤리는 그 논의가 어떤 것이든 궁극적으로 생명의 기원, 생명의 시작, 생명의 질, 그리고 생명의 종말의네 영역에 속한 이슈들에 대해 우리의 믿음이 무엇이라고 답하며 어디로 인도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더 좁혀서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생명을 무엇이라고 믿느냐“에 달려 있다.
이 책이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말은 의료가 지켜야 할 절대가치와 원리가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이 전제의 근거를 성경에 두고 성경적 세계관의 원리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7. 그래도 회색 지대는 있다
오직 성경의 권위를 믿고 그 원리에 충실하여도, 풀기 어려운 문제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난해한 의료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문제들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반영해 준다.
윤리적이면서도 의료 효과나 영향에 대해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이 있는 의료인들은 비의료인인 윤리학자들보다 더 심각한 난관에 봉착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67세의 노인이 불치의 백혈병을 앓고 있다. 문제는 환자의 정신 연령이 두세 살 정도 수준이어서 자신이 화학 요법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환자 스스로 치료 여부를 결정할 수 없을 때 고통이 수반되는 치료를 시행하는 것은 윤리적인가?”라는 논의에 대해 의료인과 비의료인인 윤리학자의 입장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인의 윤리적 고민은 비의료인인 윤리학자들 보다 광범위하게 고민이 깊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의료윤리에서의 회식 지대는 더 넓어질 수 있다.
그런데도 저자는 성경의 원리에서 출발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유한성으로 인해 해결하지 못한 회색 지대 때문에 우리의 책임을 물으시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나 명확하게 제시된 원리를 무시한 체 시행한 우리의 의료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사례 연구 : 베이비 엠 이야기
1986년 메리라는 여인은 윌리엄과 엘리자베스 스턴 부부와 계약을 맺었다. 아내의 문제로 아이가 없던 이 부부는 남편 윌리엄의 정자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의 난자를 이용해 시험과 아기를 시도하고, 제 3의 여인인 메리의 자궁을 빌려서 아이를 낳기로 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낳고 나자 메리는 아이를 양도하는 것을 거부했다. 누가 진짜 부모일까?
2장 의료는 가치중립적인가?
‘의학(의술)이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는 전제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의료나 의료인이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심리분석에서 감정이입이나 가치체계에 영향력을 주는 일을 배제해야 하고 상담자가 자신의 가치간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전제와 ‘환자의 자율권’ 보장이라는 전제에 의해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 장에서는 의학과 의술의 가치중립성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바람직한지에 대해 재고해 보고자 한다.
의료의 중립성 여부
1) 역사적 고찰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의사는 BC 3000년경에 살았던 이집트의 임호테프로 사람 들은 그를 신으로 숭배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질병을 악령이 든 것으로 간주해 제사장이 주문과 마법으로 악령의 쫓아냄으로써 치료를 했다.
이런 전통은 그대 그리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BC 1200년경의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치유의 기적을 행한 의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신전에 환자가 오면 최면술과 약으로 잠을 재운 뒤 환자가 꿈에 아스플레피오스를 만나면 치료가 된다고 믿었다.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의 종교적 의술의 영향으로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를 로마의 신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로마 또한 마술, 미신 등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이때까지도 의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이 교과서로 쓰이는 등 철학과 심리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대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중세에는 일반 의술과 종교적 치유가 공존하고 있었는데, 종교적인 기적에 의한 치유와 의술에 의한 치유가 구별 없이 시행되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치유에 더 관심을 가졌다. 한편 영국의 성직자들은 내과의사와 외과의사의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중세 후기에는 이런 형태의 치료 신전이 많이 세워졌고, 교회에서 순례자들이나 노인, 나환자 등의 만성병 환자를 위해 세운 병원에서는 의사는 아니지만 수도승이나 성직자들이 의료를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대교에서는 탈무드에서 건강과 위생, 의료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얻었으며 중세 때까지도 상당수의 랍비들이 의사를 겸했다.
초기 근대 유럽에서는 마법사가 의료를 행하는 일이 흔히 있었으므로 환자들은 의사를 찾기 전에 마법사를 찾아가는 일이 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 혁명을 거쳐 종교의 입지가 줄어든 현대에 이르러서도 일부 도시 지역을 제외하고는 과학적 의술의 혜택을 받고 사는 인구보다 미신과 주술적 요소가 뒤섞인 의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도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옛날부터 질병의 원인이나 진단 그리고 치료에 귀신이나 샤머니즘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1898년부터 1905년까지 의료 선교사로 일했던 잉골드 선교사의 일기에 의하면 당시 우리나라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귀신에 대한 믿음과 자연숭배사상이 민간인들의 질병에 대한 이해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영향은 한국에 아직까지 남아 있어 질병 치료를 위해 굿과 같은 무속 종교 의식행위를 하는 것을 최근까지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현대의학으로부터 도움을 구할 수 없을 때 종교적 치유 행위에 몸을 맡기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며, 심지어는 모든 질병에 대해 현대의학의 도움을 거부하고 종교적 치유에만 매달리는 광신적인 경우도 있다. 한국에 있는 수많은 기도원들이 종교적인 목적뿐 아니라 치유를 베푸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2) 첨단의학의 종교성과 뉴에이지 의학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첨단의학은 과학기술의 힘을 전능한 신으로 삼아 인간의 미래를 보장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종교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를 맹신하는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세력이 되었다.
한편 이런 과학 만능주의적 첨단의학은 나름대로 장벽에 부딪히게 되는데, 질병 위주의 치료의학의 발달은 의료비의 악순환적 증가를 불러왔고, 한편으로 건강을 염려하는 건강한 사람들을 양산하였다.
이 틈새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등장한 것이 소위 대체의학이다. 특히 그 극단인 뉴에이지 의학은 인간을 분석하여 부품으로 나누어 피료를 시도하는 현대의학의 맹점을 이용하여 전인 치유라는 기치를 들고 일어났으며, 그 배후에 동양 종교적 신비주의를 둠으로써 그 자체가 종교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뉴에이지 운동은 때로는 기독교적 용어로 치장하고 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사상은 힌두교적 범신론과 불교적 윤회설 그리고 진화론적 과학주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뉴에이지 의학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동안 서양의학의 발달이 급진전을 이루면서 인간을 기계의 부속처럼 분석하고 연구하였지만 뉴에이지 의학에서는 ‘전인 치유’라는 기치를 들어 일반인들뿐 아니라 기독교적 세계관이 부재한 의사들의 호응까지도 살 만하였다.
둘째는 현대의학이 질병과 생활방식에 관련된 병이나 만성적인 질환에 대해 문제 해결이 여의치 못하자 불안감이 팽배해진 사이에 건강과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온갖 시도들이 유행하면서 대체의학으로 발전하거나 뉴에이지 의학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뉴에이지 의학은 질병을 단순히 에너지(기)의 불균형으로 이해함으로써 감염성 질환이나 암의 치료 등 현대의 난치성 질환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어렵게 하였다.
3) 성경과 의료의 연관성
성경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육체적 건강이나 의료에 대해 지침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은 아니지만 성경안에는 종교와 의료의 밀접한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수행한 치료에서는 이방 종교의 주술적인 요소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인 성결을 유지하기 위한 틀로 주어진 율법은 많은 의료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부가적으로 위생이나 질병 예방에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성결에 대한 임무를 의학적 입장에서 보면, 질병의 진단과 치료에 관심을 두되 격리와 치유 여부를 확인함으로써 전염병의 만연을 방지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신약을 살펴보면 의료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깊은 연관성을 띠고 있으며, 이것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치유의 기적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경을 통해 보여주는 의료도 종교성과 연관되어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방 나라의 의료도 이방 종교의 가치관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약에서의 치유 개념은 죄 사함의 개념과 함께 사용되기도 할 만큼 깊은 종교적 연관성의 틀 안에서 표현되었다.
이와같이 인류 의료 역사의 시작에서 오늘날의 의료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의료는 육체뿐 아니라 영혼을 지닌 종교적 존재로서 전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의료와 종교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서두의 ‘의술은 가치중립적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면 의술은 가치중립적이기보다는 유가치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사회의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종교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2. 의료의 유가치성
1) 의학(의술)은 가치중립적인가?
갈수록 기술의존적이 되어가는 의술을 포함하여 최근 생명공학이나 유전자 조작의 발달 속도를 감안한다면 ‘기술이 가치중립적인가?’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인간에게 주어진 심각한 질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기술 그 자체는 중립적이며 따라서 선 또는 악으로 평가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기술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가치화 활동의 산물이며 따라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라고 하여 기술 자체도 중립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그 후 냉전 체제에서 대형 과학기술의 발달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정부의 엄청난 연구비를 지원 받아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과학기술이 사회적, 정치적, 국가적 영향을 배제한 채 중립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기업들의 지원으로 발달한 분야들 중 생명과학 분야는 생명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돈벌이라는 의도를 포장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의학적 연구 영역은 인도주의라는 포장을 쉽게 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어서 기술 자체에 대한 가치에 대해 별다른 시비 없이 중립성을 보장받는 분위기이다.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 이상 의술이 가치중립적이며 그 안에 세계관이나 종교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기술이 가치중립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기술의 유가치성을 무시하고 기술에 자율성을 주었으며 결국 오늘날 인간이 기술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대가를 치르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2) 의사와 의사의 의료 행위는 중립적이어야 하는가?
의학이 과학의 중립성에 힘입어 가치중립성을 보장받았다면 오늘날 의료는 ‘심리분석의 가치중립성’과 ‘환자의 자율권’이라는 두 축에 힘입어 가치중립성을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의료인은 환자에 대해 무비판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의료인들은 환자와의 관계 속에서 의료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기 때문이다. 의료는 계속적으로 환자 자신의 가치체계에 의해 형성된 환자의 생활방식을 판단하고 교정해야만 하도록 되어 있다.
만약 의사가 자신의 가치체계로 환자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환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면 아마도 의료인은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환자와의 관계 자체를 형성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메마른 의료 정보를 제공해 준 뒤 환자가 결정하는 대로 해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환자를 대하는 입장에서 감정이입이나 동정심을 중시함으로써 가치체계뿐 아니라 감정에 의한 교감까지도 오히려 필요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의사가 중립성을 지키고 사생활 침해를 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의료 행위에서 가치를 표현하지 않을 때, 그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 될 것이다.
기독의료인은 의료의 중립성을 위해 의료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가치관과 믿음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을 확신하고, 의료의 중립성이나 환자의 자율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의료를 통해 우리의 사랑이 올바른 지식과 통찰력에 근거하여 진실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하나님 앞에 허물이 없도록 의의 열매 맺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3장 새로운 세계관 도입이 의료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 로마를 중심으로
세계관이 의료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면 좀 더 구체적인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새로운 세계관의 도입이 과연 의료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피지배국가인 이스라엘에서 시작한 예수의 복음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종교로서 로마의 힘 앞에서는 무력하고 미미한 존재였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가 아무리 미약한 상태로 로마제국의 도입되었다 할지라도 진정한 종교로서의 기능을 했다며 의료의 영역에도 어떤 영향을 미친 흔적을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 시대의 영향을 미쳤는지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것 같다. 로마는 매우 복합적인 의료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의학은 그리스 의학의 깊은 영향 아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교도들의 제사장에 의한 주술적인 의료가 뒤섞여 있었다.
당신 의료는 주로 특권층 귀족이나 군인들에게만 제공되었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던 사회였다. 기독교 원리들이 과연 의료 영역에도 해당되는지 추적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를 추적하기 위해 첫째는 학문으로서의 의료에 대해 초대 기독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둘째 실천적 차원에서 진료 행위로서의 의료 행위나 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셋째 의료윤리 영역에서 초대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시대의 의료에 영향을 미쳤는가? 이제 이 세 가지에 대해 논의하려고 한다.
의학에 대한 영향 : 주술에서 과학으로
로마 의학은 그리스의 의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의 의료는 무당이나 종교적 치유자, 민간 치유자 그리고 의사들이 뒤섞여서 경쟁하고 있었다. 로마 의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의 의사들이 처음으로 로마 사회에서 의료를 행한 것은 그리스의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가 로마에 소개되면서 부터이다.
그리스의 의사들은 고대 로마의 이방종교에 의한 주술적 의료 혼합되면서 로마의 의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켈수스와 갈레누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와 같은 배결으로 볼 때 로마 의학이 당시 만연되어 있던 스토아 철학의 영향 아래 있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콘스탄티누스의 회심(AD 313년) 이후, 바실리우스는 학문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을 처음으로 정리하였다. 바실리우스는 비록 당시의 의학이 그리스 철학의 산물임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의료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며 이를 기독교적 전통으로 수용하게 된다. 이로써 바실리우스는 기독교와 당시의 의료 사이에 다리는 놓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로마 의학을 수용할 때 매우 ㅅ신중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요컨대 로마 시대에 극한한다면 의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기독교적 세계관이 어떤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초대 기독교가 학문적 차원에서 당시 로마 의학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막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회심 이후 바실리우스에 의해 기독교의 학문에 미친 영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 후 의학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주도적 영향력은 문예부흥 이전까지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의료의 동기에 대한 영향 : 미신적 주술에서 자비의 동기로
로마 제국의 새로운 종교가 된 기독교의 교인들이 당면하게 된 문제는 만연하고 있는 이방 종교의 주술적인 행위였다. 의료에서도 그리스의 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가 로마에 그대로 수용되어 모든 정복지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세워졌다. 이 신전을 중심으로 주술과 종교 행위가 뒤섞인 의료가 퍼지고 시행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리스뿐 아니라 로마에서도 질병은 초자연적 권력에 의한 저주라는 믿음이 만연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방 종교의 제사장들이 의료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상당수의 기독교인들도 이방 종교의 주술적 의료에 빠져 있었다.
한편 로마는 계속적인 정복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전상자가 병에 걸린 군인들을 위해 ‘발레쿠디나리아’ 라는 병원을 발전시켰다. 이와 같은 이방 종교의 주술적 의료와 귀족 및 군인 중심의 의료의 와중에 기독교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당시의 초대 기독교는 이방 신을 섬기고 그 제사장이 의료를 수행하는 이방 전통을 수용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의료에 있어서 초대교회 기독교인의 역할에 대해 스카보로는 “공공기관에서 병자를 돌보는 일의 기원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의 교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라고 확고하에 서술하였다
비록 로마 제국이 훌륭한 군병원을 가지고 있었고 기독교인들에 의한 양질의 의료가 제공되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누스의 회심 이전까지는 일반 시민을 위한 병원이 없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콘스탄티누스의 회심 이후 초기 기독교 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의료 부문에서 가장 큰 변화는 병자들을 위한 병원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의료 제공에 자유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공헌은 바실리우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정기적인 진료를 제공하는 공공병원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바실리우스는 의료를 기독교적 전통으로 확립하면서 의료를 예수님의 이적 치유와 기능적으로 동등한 것이라고 했다.
바실리우스의 본보기를 따라 비숫한 병원들이 계속 세워졌으며 의료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하는 전통은 중세까지 이어져 살레르모에 역사상 처음으로 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수도원은 이 전통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십자군 전쟁도 병원의 발전을 가속화시킨다.
이와 같이 초대 기독교인들은 주로 주술적인 의료와 전쟁 수행을 위해 제공된 로마 공공의료의 비효율성 속에서도 의료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나타냄으로써 로마 의료에 주요한 한 획을 긋고 있다.
3. 의료 윤리에 대한 영향 : 생명 경시 풍조에서 생명 존중으로
2천 년 전에 초개 기독교인들이 직면했던 윤리적인 문제들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볼 수 있다. 즉 낙태와 영아 유기, 안락사 등과 같은 문제였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매우 수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유대-기독교인들은 물론 ‘살인하지 말라’(출 20:13)는 명령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이와 같은 이슈들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특히 고아를 돌보는 일은 기독교가 시작되면서 로마 사회에 영향을 준 가장 아름다운 열매가 되었다.
흥미로운 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회심한 지 얼마 후(AD 320년경) 영아 살해를 금지하는 두 개의 법안을 공포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방 로마 사회라는 강력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소수였던 기독교인들이 이루어낸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로마 시대의 생명 경시 풍조 속에서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중시하고 박해 속에서도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 이교도들에게도 본을 보임으로써 살아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자유화 이후 이와 같은 힘이 약화된 사실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맺는 말 : 세계관 –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
로마 시대의 의료를 살펴본 결과 오늘날의 세속적 의료와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의료가 종교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나 의료의 혜택이 소수에게 국한되는 점 등은 당시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고 낙태와 영아 유기가 기득권자들의 편의를 위해 시행되는 점도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이방 종교의 세계관 아래 있던 로마라는 막강한 제국에서 이제 막 태어나 미약할 뿐 아니라 박해로 생존마저 위협받던 기독교라는 세계관은 초대 기독교인에게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 행위와 이와 연관된 윤리적 행동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도록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였고, 로마 시대 의료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슬러 올라간 사실은 세계관이 진실하게 실천되었을 때 나타나는 영향을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서두에서 제기한 “초대 기독교는 이방 전통이 지배하던 대로마 제국의 의료에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연구를 통해 확인하고자 했던바 “당대의 세계관이 동시대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가 의술에도 적용되었는가?”에 대해 명백한 대답을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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