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참마속(泣斬馬謖) - 이야기 고사성어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情)을 버리고 마속[馬謖 : 촉한(蜀漢)의 장수(將帥)]을 밴다는 말로서 삼구시대(220~280) 초기 촉(蜀)나라 건흥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184~234)이 대군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출발했다.
곧 한중(漢中,섬서성 내)을 석권하고 기산(祁山,감숙성 내)으로 진출하여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하지만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 명장 사마의(司馬懿, 179∼251)가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陣)을 제압할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지만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 만큼 군량 수송로 요충지인 가정(街亭,한중 동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촉(蜀)나라의 웅대한 중원(中原) 진출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마는 일이다.
그런데 이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마땅치 않아서 제갈량은 고민했다. 이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지원하고 나섰다.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 보았다. 삼면(三面)이 절벽을 이룬 산이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협로(峽路)를 사수 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욕심을 내어 적을 유인한 후 공격할 요량으로 산위에다 진을쳤다.
하지만 마속의 생각과는 달리 위나라 군사는 산 기슭을 포위만 한 체로 산위로 공격을 해오질 않는다. 그러자 산 위에서는 식수가 끊겼다.
다급해진 마속은 전 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위나라 용장 장합(張郃, ?~231)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마속의 실패로 전군을 한중(漢中,섬서성 내)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돌아왔다.
때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있던 장완(蔣琬, ?~246)이 마속 같은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질 않았다.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요. 그러나 사사로운 정에 끌리어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죄 보다 더 큰 죄가되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없이 처단하여 대의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는 법이요.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멧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