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자대전 제202권 / 시장(諡狀)
천곡(泉谷) 송공(宋公) 시장
본관(本貫)은 전라도 여산군(礪山郡)이다. 증조부 승은(承殷)은 선략장군(宣略將軍) 충좌위 부사맹(忠佐衛副司猛)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추증받았고, 증조모는 숙인(淑人)을 추증받은 나주 박씨(羅州朴氏)이다.
조부 전(琠)은 진용교위(進勇校尉)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추증받았고, 조모는 숙부인(淑夫人)을 추증받은 화산 전씨(花山全氏)이다. 아버지 복흥(復興)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송화 현감(松禾縣監)을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추증받았으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을 추증받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공(公)의 이름은 상현(象賢)이고 자(字)는 덕구(德求)이며, 스스로 천곡(泉谷)이라 호하였다. 우리나라의 여러 송씨(宋氏)들 중에 오직 여산 송씨가 가장 오래되었고 또 문세(門勢)가 크다. 12대조인 송례(松禮)는 벼슬이 시중(侍中)에까지 이르러 고려 시대의 명신(名臣)이었으나, 선략(宣略) 이후로는 점점 못하다가 송화공(松禾公)에 이르러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여러 대(代)의 묘가 모두 고부군(古阜郡) 천곡산(泉谷山)에 있다.
공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신해년(1551, 명종 6) 1월 8일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남달리 준수하여 10여 세에 경사(經史)를 모두 통달하였으며, 두세 번 읽으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였는데, 시험관이 그의 글을 보고 놀라 감탄하기를, “이 수재(秀才)는 다음에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하였다.
이때부터 함께 사귀는 사람이 모두 당시의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그가 지은 시문은 반드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20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또 6년 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병자년(1576, 선조 9)에 문과(文科)에 뽑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되었으며, 무인년에 저작(著作)에 오르고 기묘년에 박사(博士)에 올랐다.
다시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에 천거되어 제수되었다가 임기가 다 되어서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계미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불러들였는데, 그사이에 호조(戶曹)ㆍ예조(禮曹)ㆍ공조(工曹)의 정랑(正郞)을 역임하고 갑신년에 질정관(質正官)으로 경사(京師)에 갔다왔고, 을유년에 다시 질정관으로 임명되어 두 번째 다녀왔다.
병술년에 또 지평(持平)에서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ㆍ북평사(北評事)로 좌천되었다가 정해년에 다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지평(持平)이 되었다. 무자년에 배천 군수(白川郡守)로 3년간 외직(外職)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ㆍ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과 사재감(司宰監)ㆍ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을 역임하고, 신년에 집의(執義)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대개 이때부터 조정의 논의가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으나 공은 정도(正道)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고, 또 이발(李潑)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내직(內職)에 안정할 수 없어서 내직과 외직을 자주 옮겨 드나들었다. 이발이 패하여 죽은 뒤에도 그 무리들의 노(怒)함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공 역시 당세에 용납되지 못할 줄 스스로 알고 군읍(郡邑)으로만 돌아다니면서 헐뜯음을 피하였다.
그때 마침 병술년 이래로 나라에는 왜인(倭人)들과 틈이 생겨서, 언제 전쟁이 터질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동래(東萊)는 왜적들이 오는 길목인 까닭에 공을 문무가 겸비한 인재라 하여 동래 부사로 임명했으나 실은 선의(善意)에서가 아니었다.
공은 부임하자, 백성을 다스리고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한결같이 진심과 신의로써 하여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모두 부모처럼 받들었다. 그때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이 정산 군수(定山郡守)로 있었는데, 공이 시를 지어 보내, 왜구(倭寇)가 이르면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뜻을 보이므로 선생이 그 충분(忠憤)을 사모하여 그 시를 새겨 현(縣)의 벽에다 걸어 두었다.
다음해 임진년 4월 13일에 왜적이 침범해 와서 14일에는 부산을 함락시켜 첨사(僉使) 정발(鄭撥)을 죽이고, 15일에는 동래부를 공격해 왔다. 이보다 앞서 경상 병사(慶尙兵使) 이각(李珏)이 무리를 거느리고 성(城)으로 들어와서 함께 지킬 계책을 세우더니, 왜적이 매우 많은 것을 보고 도망쳐 나가려 하였다.
공이 의(義)롭지 못함을 들어 꾸짖고 함께 죽을 것을 말하자, 각(珏)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나대로의 진영이 있으니 내가 지켜야 할 곳은 그곳이고, 이 성을 지키는 것은 공의 책임이오.”하고는, 노약자 30명만 데리고 마침내 달아나니,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흔들렸다.
공이 개연(慨然)히 대중에게 맹세하고 성에 올라 방어할 차비를 하니 총탄이 빗발치듯 하였으나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 종[奴] 신여로(申汝櫓)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지키는 신하의 의(義)로써 당연히 죽기를 맹세해야 하지만 너는 늙은 어미가 있으니, 부질없이 죽을 것이 없다. 빨리 도망가거라.”하였다.
이날 적군이 성을 넘어 어지러이 들어오매 공이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급히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남문(南門)에 올라가 손을 맞잡고 의자에 단정히 앉으니, 그 모습이 태산과 같았다. 이윽고 적이 가까이 육박해 왔는데, 적 가운데 평조익(平調益)이란 자가 있었다.
이 자는 일찍이 평조신(平調信)이 통신사(通信使)로 왕래할 때 같이 따라와서 공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공이 자못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이에 조익이 동감해서 평소 공을 위해 은혜를 갚으려 하였던 차에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성(城) 한쪽의 틈 있는 곳을 가리키며 공에게 피하라고 하였다.
공이 응하지 않으므로 그는 공이 알아차리지 못한 줄 알고 다시 옷자락을 손으로 끌었다. 공은 하는 수 없이 의자 아래로 내려와 북쪽을 향해 재배(再拜)하고 나서, 아버지 송화공(松禾公)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외로운 성(城)에는 달무리지듯 적병에 포위되었는데 다른 진영에서는 모두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자고 있으니,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매 아버지와 아들의 은혜는 가벼워집니다.”하고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있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니, 그때에 42세였다.
공은 죽음에 임하여서도 정신과 자세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평소와 같았으며, 아랫사람에게 말하기를, “나의 허리 아래에 콩알만 한 검은 사마귀가 있으니, 내가 죽으면 그것을 증표로 하여 시체를 거두라.”하였다. 얼마 뒤에 적장 평의지(平義智)ㆍ현소(玄蘇) 등이 이르러 서로 공의 충성심에 감탄하고, 공을 해친 적병을 잡아 처형하여 군중에 돌려 경계시켰다.
신여로(申汝櫓)는 공의 말을 듣고 떠났다가 하루 만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공은 임금을 위해 죽으려 하는데, 나는 왜 공을 위해 죽지 않겠는가?”하고는 바로 되돌아와 공의 뒤를 따라 죽었고, 공의 첩(妾) 금섬(金蟾)은 함흥(咸興) 사람인데 적을 꾸짖고 몸을 깨끗이 보존하여 죽었다.
적이 공의 시신과 금섬의 시신을 거두어 동문 밖에 묻어 주고 나무를 세워 표하고 시(詩)를 지어 제사 지내 주었다. 이때부터 남문 위에는 밤마다 빛나는 자기(紫氣)가 곧바로 하늘에 뻗쳐 있어 몇 해 동안 흩어지지 않으니, 적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갑오년 겨울에 경상 병사(慶尙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적장(賊將) 청정(淸正)을 진중에서 만나 그러한 사실들을 모두 듣고 장계를 올리니, 상(上)이 무한히 감탄하고, 특명을 내려 관작(官爵)을 추증(追贈)하고 정려(旌閭)를 세우게 하였으며, 그의 아들 1인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했는데 그 글의 대략에, “바른 기상 외로운 기품, 훌륭한 모습 우뚝하다.
재주는 문무(文武)를 겸하였고, 덕은 충효(忠孝)를 보전하였다. 수양(睢陽)이 포위당했을 때 하란(賀蘭)이 구원하지 않았고, 북군(北軍)이 패할 때 안고경(顔杲卿)의 충분(忠憤)이 격발되었다. 구차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 죽음에 나아감이 영화로워라. 의리를 태산처럼 중하게, 목숨은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여겼으니, 정충(精忠)이 있는 곳에 장한 기운 꺾이지 않았네. 적들이 아직 남았는데 경(卿)의 눈 어이 감겠는가.”하였다.
을미년에 집안사람들이 조정에 청하여 고향에 옮겨 장사하려 했으나 적병들이 아직 변경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이 도신(道臣)에게 하교(下敎)하여, 그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시신을 찾아오게 하여 년 월 일에 청주(淸州) 가포곡(加布谷)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공의 관(棺)이 돌아오자, 백성들이 모두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1백 리 밖까지 추송(追送)하는 이가 수백 명이었고, 적장 청정(淸正) 이하가 모두 말에서 내려 엄숙히 보내었다. 동래부에 매동(邁仝)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공의 제삿날이 되거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음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었고, 뒤에 공의 아우 상인(象仁)의 집에 와서 공의 절사(節死)한 상황을 들려주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고기를 주어도 먹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오늘 우리 공의 아우를 보니 우리 공을 다시 본 듯한데, 어찌 고기를 먹겠습니까.”하였다. 공에게 이씨(李氏) 첩(妾)이 있었는데, 적병에게 잡혀갔으나 역시 굴복하지 않았다. 적도 그가 공의 가속(家屬)임을 알고 더욱 공손하게 대하여, 수절(守節)하고 사는 관백(關白) 가강(家康)의 누이 집에다 거처를 정하여 함께 있도록 하였는데, 홀연 폭풍우가 몰아쳐 벽과 지붕이 모두 무너졌지만 이씨가 있는 곳은 아무렇지 않으니, 적이 매우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마침내 우리나라 사람에게 딸려 돌려보내어 공의 삼년상을 추복(追服)하게 하였다.
을사년에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훤(尹暄)이 공의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 초기에 ‘충렬(忠烈)’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묘에 제사 지내기를, “교활한 오랑캐들이 허(虛)를 찌르니 많은 장수들 풀처럼 쓰러져, 영남(嶺南) 고을에 의사(義士) 하나 없었다. 경(卿)은 수신(守臣)이 되어, 그 뜻이 열렬하나 군대는 1교(校)도 못 되고 성(城)은 텅비었다.
엄숙한 황당(黃堂 태수(太守)의 집무처(執務處))엔 오직 하늘과 땅뿐인데, 관복 갖춰 입고 길이 공수(拱手)할 제 엄연하기 태산과도 같았다. 적병들 숲같이 많았어도, 오히려 모기떼처럼 여겼으니, 옥(玉)이 부수어진들 정광(精光)이야 가시랴.”하였으니, 아, 열성(列聖)의 충신을 숭상하고 보답함이 이에 이르러 다하였다 하겠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신묘년(1651, 효종2)에 윤문거(尹文擧)가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공의 사당이 남문(南門)의 곁에 붙어 있어 너무 시끄럽고, 또 옛날 대략 지은 것이라 소략하여 혼령을 편안하게 모시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여기고 마침내 고을의 선비들과 함께 힘을 모아 내산(萊山)의 남쪽 안락리(安樂里)로 옮겨 세웠는데, 그 규모가 커서 서원(書院)으로 삼았고, 청주(淸州)ㆍ고부(古阜)에서도 선후(先後)하여 제사를 모시니, 사림(士林)에서 높이 받드는 바가 조금도 유감이 없게 되었다.
공의 부인 이씨(李氏)는 충의위(忠義衛) 온(熅)의 딸이고, 승지(承旨) 문건(文楗)의 손녀인데 문건은 기묘 명인(己卯名人)이었다. 2남(男) 1녀(女)를 낳았는데, 장남의 이름은 인급(仁及)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고, 둘째는 효급(孝及)으로 진사(進士)이다.
딸은 현감(縣監) 이창원(李昌源)에게 시집갔으나 자손이 없다. 정랑(正郞)은 아들 근(根)을 낳았는데,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을 지냈고, 진사는 외딸을 두었는데 정복규(鄭復圭)에게 시집갔다. 직장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문병(文炳)ㆍ문전(文烇)ㆍ문정(文烶)ㆍ문수(文燧)이며, 큰딸은 김전(金澱)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김규(金鍷)에게 시집갔다.
공은 덕성이 심후하고 도량이 크고 넓어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앞섰고, 희노(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경전을 깊이 공부하였고 제자(諸子)와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병가(兵家)의 서적도 두루 섭렵하였다. 내행(內行)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어버이가 있으면 비록 추운 겨울이거나 더운 여름일지라도 예를 갖추어 건(巾)이나 띠[帶]를 벗지 아니하고 오직 명령을 받들어 모셨으며, 아우 상인(象仁)과도 우애가 매우 지극하였다.
큰누이가 정자(正字) 장언오(張彦吾)의 아내가 되었다가 일찍 과부가 되므로 여러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공에게 의지하고 살았으나 공이 그를 매우 조심스럽게 섬겨 오래도록 소홀함이 없었으며, 조카들을 자신의 친자식과 다름없이 돌보아 양육(養育)하니 이웃 마을에서까지도 ‘누구나 따를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집을 다스리는데도 법도가 있어, 평소에 성낸 말이나 얼굴빛을 보이지 아니하고 자애로써 두루 거느리므로 집안사람들이 모두 그 위엄을 두려워하고 그 은혜에 감복(感服)하여 숙옹(肅雝 공경스럽고 화목함)의 덕화(德化)가 있었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항상 평온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키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강직으로 대처하고 아첨하지 않았다.
절개를 지켰으며 죽음에 임하여서는 태도가 자연스럽고 뜻이 안한(安閒)하여 아무 일 없는 듯 평소와 같았다. 이는 그 학문이 바르고 수양이 깊어 사물의 경중(輕重)을 분별함이 본래 속마음에 정해져 있음이니, 하루아침에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목숨을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까닭에 미천한 잉첩(媵妾)들까지도 한 사람은 적을 꾸짖고나서 뒤따라 죽고, 또 한 사람은 죽기를 맹세하고 절개를 지켰다. 미천한 종으로서도 의(義)를 지켜 목숨을 버려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덕에 감화되고 의(義)로움에 감동되어 그 이해(利害)의 유혹과 생사(生死)의 두려움마저도 잊게 된 것이다.
또 다스리던 고을의 백성들이 울며 사모하고, 사림(士林)들이 정성을 다해 제사(祭祀)를 모셔 오래도록 잊지 못하며, 포악(暴惡)한 오랑캐들까지도 경복(敬服)할 줄 알아 공의 깨끗함에 감히 무례한 행동을 가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으로 보아 공의,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고 멀리까지 감복시킴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아, 사람이 사는 도리는 인(仁)과 의(義)일 뿐인데, 인(仁)은 부자(父子)간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의(義)는 군신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천명(天命)이고 인성(人性)이기 때문에 고금(古今)이 같고 미개한 오랑캐와 문명한 중국이 다름이 없으니, 자기의 직분을 다해 목숨을 바치는 의로운 이치가 누구에게나 없겠는가. 그러나 다만 평소에 그것을 밝히는 술(術)이 없고 또 수양하는 공(功)이 없으면 이리 쏠리고 저리 쫓기어 세상에 비굴하게 아첨할 뿐이다.
그래서 이해(利害)의 갈림길에 서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낭패(狼狽)하고 당황하며 두렵고 나약해서, 마침내 그 인의(仁義)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윤강(倫綱)의 아름다움을 깨뜨리기 때문에 중국(中國)이 이적(夷狄)에 빠지고 사람이 금수(禽獸)와 같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이 다 이러하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공의 학문(學問)의 본말(本末)을 뒤에 태어난 짧은 학식으로써 헤아릴 수는 없으나,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미루어 보면 그 학문이 세속(世俗)의 장구 문사(章句文辭)만을 일삼아 녹(祿)만을 구하고 세상의 조류와 더불어 따라가는 것과는 다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나아가는 바가 이와 같이 훌륭했던 것이다. 이제 신독재(愼獨齋) 김공(金公)이 어릴 때 일찍이 공에게서 수학(受學)하여 우뚝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이 되었는데, 그 학문이 비록 모두 공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공의 연원(淵源)을 대략 알 수 있다.
이로써 말한다면 집에 있을 때의 훌륭한 행적이 위에 기록한 것뿐만이 아닐 것이며,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섬길 때의 언론(言論)과 풍채(風采)의 훌륭함이 반드시 사관(史官)의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비부(秘府)에 소장되어 있는 사적은 지금 볼 수 없지만, 가승(家乘)의 기록마저 자세하지 않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공의 벗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이 공을 위해 열전(列傳)을 지었다. 그 말이 비록 간략하나 말을 아는 군자는 오히려 징신(徵信)할 것이다. 오성(鰲城) 상공(相公) 이항복(李恒福)은 공을 애모하는 글에서, “외로운 성(城)에 왜적이 달무리 지듯 포위했을 때 담소(談笑)하면서 지휘한 것은 공의 열(烈)이 아니겠는가.
번쩍이는 칼날 아래에 단정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은 것은 공의 절개가 아니겠는가. 남문(南門) 위 자기(紫氣)가 북두성에 뻗친 것은 공의 정신이 아니겠는가.”하였다. 이 말이 세간에 많이 전해 내려오지만 그것만으로 공을 다 형용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의 군자들은 오히려 제사와 증직(贈職)이 늦은 것을 탄식하면서 ‘무엇으로 충성을 권(勸)할 것인가?’라고까지 하였으니, 당시에 공을 대접함이 오히려 소홀했다고 여기게 한다. 그러나 끝내 공으로 하여금 당시의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게 하고, 또 변성(邊城)으로 내쫓겨 큰 절개(節槪)를 세워 우리나라 수백 년 전통의 강상(綱常)을 붙들게 했으니, 이는 하늘이 공(公)을 성취시킨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며, 당시의 공을 미워한 자들의 현명 여부가 어떠했는가를 알 만하니, 공에게야 무슨 유감될 것이 있겠는가.
지난 임진년 가을에 공의 증손(曾孫) 문병(文炳)이 많은 선비의 뜻에 따라 나에게 와서 시장(諡狀)을 청하였다. 나는 그럴 사람이 못 된다고 굳이 사양한 지 4년째가 되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굳게 요청하므로 끝내 사양할 수 없고, 또 생각해 보건대 이제 공이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나 묘 앞의 나무가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는데도 현창(顯彰)하는 비문이 아직 없으니, 세도(世道)의 치란(治亂)을 이로써 상상해 볼 만하다.
따라서 사실을 기록해야 할 글을 머뭇거리고 지어놓지 않으면, 비록 공의 큰 절개야 끝내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평생의 본말(本末)은 갈수록 어두워져 증거할 수 없게 될 것 같기에 그 가장(家狀)과 여러 사람들의 서술(叙述)을 대략 들고, 짧은 이야기 한두 가지를 참고해서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태사씨(太史氏)의 참고가 되도록 하고, 아울러 당세의 군자(君子)들에게 고(告)한다.
숭정(崇禎) 을미년(1655, 효종6) 2월 일(日)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은 삼가 시장(諡狀)을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소동 (역) | 1982
-------------------------------------------------------------------------------------------------------------------------------------------------------
[原文]
泉谷宋公諡狀
本貫。全羅道礪山郡。
曾祖承殷。宣略將軍忠佐衛副司猛。贈通
訓大夫通禮院左通禮。妣贈淑人羅州朴氏。
祖琠。進勇校尉。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妣贈淑夫人花山全氏。
考復興。通訓大夫行松禾縣監。贈嘉善大夫禮曹參判。妣贈貞夫人安東金氏。
公諱象賢。字德求。自號泉谷。我東之宋。各有鄕貫。而惟譜於礪者。最故而大。十二世祖松禮。官至侍中。爲麗氏名臣。自宣略以下稍不顯。至松禾公。績文取第。官至縣監。累世皆葬古阜郡泉谷山。公生于嘉靖辛亥正月初八日。生而秀異。十餘歲。悉通經史。讀不過三遍。終身不忘。十五。魁陞補試。考官見其文驚歎曰。此秀才他日必成大材者也。自是所與游皆一時英俊。所著詩文。必膾炙於人。二十。中進士。又六歲而萬曆丙子。擢文科。補承文院正字。戊寅。陞著作。己卯。陞博士。薦拜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仕滿。出爲鏡城判官。癸未。以司憲府持平召入。間爲戶禮工三曹正郞。甲申。以質正官赴京師。乙酉。復差再赴焉。丙戌。又以持平左遷銀溪道察訪,北評事。丁亥。復入爲持平。戊子。出守白川郡。居三年。遞入爲忠勳府經歷司憲府執義,司諫院司諫。司宰,軍資二監正。辛卯。以執義階通政大夫。爲東萊府使。蓋是時朝論携貳。公持正不撓。又爲李潑所惡。故不能安於朝廷。旋入旋出。潑敗死。其黨怒益甚。公亦自知不容於世。低徊於郡邑。以避其齮齕。適自丙戌以來。國家有倭釁。朝夕有渝盟之勢。而萊是賊路初頭。故託以公有文武兼才。而有是除。實非善意也。公旣至。治民莅職。一以誠信。吏民愛戴。如父母焉。時沙溪金先生守定山。公寄詩以示寇。至必死之志。先生慕其忠憤。刻置縣壁。明年壬辰四月十三日。倭賊犯境。十四日。陷釜山。僉使鄭撥死之。十五日。進逼府城。初。慶尙兵使李珏率衆入城。爲同守計。見賊甚盛。卽欲跳出。公責以義。要與效死。珏曰。吾自有營。是吾信地。而此城之守。是公之責也。只以老弱三十人。與之。卒遁去。軍情大震。公慨然誓衆。登城備禦。飛礮交集。意氣安閒。顧謂從行人申汝櫓曰。我爲守土之臣。義當效死勿去。汝則有老母在。不必浪死。可亟去也。是日。賊踰城闌入。公知事不濟。亟取朝服穿甲上。上南門據胡床。拱手端坐。屹然如山岳焉。旣而賊來逼。有賊名平調益者。曾隨平調信。通信往來。時。得見於公。公待之頗款。調益感之。嘗欲爲公報。及是。指城旁隙地。而目公使避。公不爲應。調益意公不覺。又以手牽衣。則公已下床北向拜矣。拜已。致書于父松禾公曰。孤城月暈。列鎭高枕。君臣義重。父子恩輕。遂還據床遇害。年四十有二歲矣。將死。神氣不亂如平昔。謂其下曰。吾腰下有痣如豆。吾卽死。徵以此收吾屍。俄而賊將平義智,玄蘇等至。相與嘖嘖歎服。引賊之害公者。戮而徇之。申汝櫓旣行。一日謂人曰。公欲死於君。我何獨不死於公乎。乃還與公同死。公妾金蟾。咸興人也。亦罵賊不汚而死。賊收公屍及蟾。瘞於東門之外。立木以表。而爲詩以祭之。自是南門之上。夜夜有紫氣燁燁。直亘于天。數年不散。賊益祇畏之。甲午冬。慶尙兵使金應瑞。見賊將淸正於陣中。俱得其狀。馳啓之。上感歎不已。特命贈官。旌閭。官其子一人。而遣禮官。致祭。其文略曰。正氣孤稟。英姿特立。文武兼才。忠孝全德。睢陽受圍。蘭救不至。北軍將破。顏憤斯激。偸生可羞。就死爲榮。鴻毛泰山。義重命輕。精忠所存。壯氣靡涅。此賊未滅。卿豈瞑目。乙未。家人請於朝。願得返葬于故山。時賊兵猶據邊徼。上下敎于道臣。令其家人。得入賊鎭。尋屍而歸。年月日。葬于淸州加布谷壬坐丙向之原。公櫬之歸也。遺民相率攀號。追送于百里外者幾百人。賊將淸正以下。下馬而肅送焉。府人有邁仝者。遇公諱日及節辰。必盛具以祭之。後抵公之弟象仁。備敍公伏節事。嗚咽不自勝。饋之肉則不食曰。今日見我公之弟。如見我公。寧忍肉爲。公一妾李姓。被掠亦不屈。賊認其爲公之家屬。尤加敬服。館之於關白家康妹守節者。使與居處。忽暴風雨。破沒墻屋。而李所處獨無恙焉。賊甚驚異之。乃付我人以歸之。追服公三年。乙巳。東萊府使尹暄立廟享公。仁祖大王反正之初。賜額曰忠烈。而致祭于墓曰。狡夷擣虛。列障茅靡。嶺七十州。無一義士。卿爲守臣。烈烈其志。衆未一校。城空百雉。肅肅黃堂。上天下地。垂紳長拱。儼若岳峙。白刃林林。視猶蚊蟻。圭壁可碎。精光不死。嗚呼。列聖之所以崇報者。至是而始無遺典矣。崇禎辛卯。尹公文擧守萊府。以公廟宇在南門之側。湫喧逼側。又舊制觕樸。不足以揭虔妥靈。乃與邑之士子。移建於萊山之南安樂里。因大其規模。以爲書院。而淸州,古阜。亦皆先後俎豆之。士林之所以尊奉之擧。又可以無憾矣。公配李氏。忠義衛熅之女。承旨文楗之孫。文楗。己卯名人也。生二男一女。男長仁及。文科禮曹正郞。次孝及。進士。女適縣監李昌源。無后。正郞生一男曰根前。尙瑞院直長。進士有一女。適鄭復圭。直長有四男二女。男曰文炳,文烇,文烶,文燧。女長適金澱。次適金鍷。公德性深厚。度量宏偉。時然後言。喜怒不見。沈潛經傳。淹貫子史。而旁及兵家之流。其內行純篤。親在。雖隆冬盛暑。不脫巾帶。侍立終日。與弟象仁友愛甚至。長姊爲正字張彥悟妻。早寡。携諸孤往依公。公事之甚謹。久而不衰。撫養其孤。無異己出。隣里歎美之。皆以爲不可及。其治家有法。平居無疾言遽色。而慈愛徧洽。家人。畏其威服其恩。有肅雝之化焉。及通仕籍。常恬靜自守。而遇事剛果。不爲脂韋。及其效節也。從容整暇。意思安閒。澹然如無事時。蓋其學之正養之深。魚熊之辨。素定於內。非一朝慷慨殺身者之比也。是以。媵妾之賤也。而或罵賊同死。或矢死全節。少從之微也。而能奮義舍生 。不肯苟免。是皆化於德而感於義。忘其利害之誘死生之怵焉。至其遺氓涕慕。士林精禋。愈久不衰。以及蠻夷之暴悍。亦知敬服。而於公之掃灑。亦不敢以無禮加焉。則公之所以感人深而服人遠者。爲如何哉。噫。生人之道。仁與義而已矣。仁莫大於父子。義莫重於君臣。此實命於天性於人。不以古今而存亡。不以夷夏而嗇豐。則其所在致死之理。人孰無之。唯其平居暇日。旣無明之之術。又無養之之功。群群逐逐。夸毗於世而已。及夫臨利害遇事變。則狼狽蒼黃。畏怯善弱。遂忘其仁義之性。斁其倫綱之懿。故中國而淪於夷狄。人類而入於禽獸者。滔滔皆是也。可勝歎哉。若公者。其爲學本末。後生末學。無得而尋焉。然以其所可見者而推之。則其所以爲學者。異乎世之從事於章句文辭之間。而以爲干祿諧世之資者。章章明矣。故其所就者如此其卓卓。而今愼獨齋金公集。少嘗受學於公。而蔚然爲一世儒宗。則其爲學雖非盡出於公者。而公之淵源。猶可以略識矣。以是而言。則其居家行己之可觀者。固不止如上所記。而其立朝事君言論風采之懿。必書在史官矣。顧以祕府之藏。非今世所可睹者。而其家乘之所錄。不少槩見。甚可歎也。公之友申文貞公欽。爲公立傳。其辭雖略。知言之君子。猶可以徵信矣。其於鰲城李相公恒福哀公之詞。以爲孤城月暈。談笑而指揮者。非公之烈耶。白刃交前。端拱而不動者。非公之節耶。南門紫氣。仰射于斗躔者。非公之精也耶者。世多傳誦。然非所以盡形容者。而一時君子尙歎其賜祭之遲。官庀之靳。而至曰何以勸忠云爾。則當時之所以報公者。猶不能使人無恨也。然必使公困於時人。斥於邊城。以樹大節。用扶我東方數百年綱常。則天之所以成公者。眞不偶然。而當時嫉公者之賢不肖。又可知其如何也。於公何憾也。頃在壬辰之秋。公之曾孫文炳。以多士之意。來求狀於余。余謝其非人而不敢也。則至今四歲。而歲率一至再至。而強之愈力。余固不得以終辭。而又念今去公沒一甲子有餘矣。墓木已抱而顯刻尙闕焉。則世道之汚隆。因可想見而記實之文。又復因循不爲。則雖其大節之在人者。終不可泯。而其平生本末。則將未免晦昧而無徵。故略據其家狀及諸公敍述。而參以謏聞之一二。第錄如右。以諗于太史氏。並以告當世立言之君子云。崇禎乙未二月日。恩津宋時烈謹狀。<끝>
ⓒ한국문집총간 |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