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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 5. 15. 20:57
출처 : 서산집(西山 集) 제18권 - 묘갈명(墓碣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년(순조 27)~1899년(고종 36)』
증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성균 생원 야암 선생 김공의 묘갈명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成均生員野庵先生金公墓碣銘-서문 병기)
야암 선생 김공은 휘가 임(㶵)이고 자(字)가 수이(受而)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의성군(義城君) 석(錫)이 수봉(受封)한 조상이다. 그 뒤로 대대로 봉작(封爵)이 이어졌으니, 용비(龍庇)는 태자 첨사(太子詹事), 의(宜)는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태권(台權)은 문예부 좌사윤(文睿府左司尹)을 지냈으니, 모두 고려의 사적에 드러나 있다.
거두(居斗)는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한계(漢啓)는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지내다가, 단종이 손위하자 병이라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다. 3세 뒤 진(璡)은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니 호는 청계(靑溪)이다.
다섯명의 어진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퇴계 선생(退溪) 선생의 고제(高弟)이다. 둘째 수일(守一)은 자여찰방(自如察訪)을 지냈고 호는 구봉(龜峯)이다. 용(涌)을 낳았으니 병조참의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훈(宣武勳)에 책록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운천(雲川)이다.
맑은 명성과 곧은 절의가 당시에 빛났다. 다섯 아들 중 맏이인 시주(是柱)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정랑(正郞) 위(暐)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두었는데, 공이 바로 둘째 아들이다. 좌랑공의 아우는 시건(是楗)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는데 죽계안씨(竹溪安氏) 호군 담(霮)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후사가 없이 일찍 죽었다.
공이 막 태어나자 참판공이 안씨부인에게 그를 아들로 삼도록 명하여, 대여섯 살 때에도 권씨부인의 소생임을 알지 못하였다. 한참 뒤에 알게 되어서도 안씨부인을 어머니로 대함에 더욱 소홀함이 없었다.
처음 글자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 참판공이 저물녘에 배꽃을 바라보다가 공에게 시구(詩句)를 지어 보도록 하였는데, 공이 바로 “배꽃은 하염없이 희네.[梨花依依白]”라고 짓자, 참판공이 크게 놀라며 “‘하염없이 희네[依依白]’ 3글자가 저물녘 경치를 잘 그려내었다.” 라고 하였다.
당시 공의 종형제들이 시례(詩禮)의 학문에 매진하여 훌륭한 문학사(文學士)가 많았는데, 공은 더욱 노력하고 분발하여 시문을 짓는 재능이 풍부하고 빼어나, 참판공이 기이하게 여기며 사랑하여 손수 지은 「십이가(十二歌)」를 글로 써주었다.
14세에 좌랑공의 상을 당해서는 예에 따라 집상(執喪)하였다. 4년이 지나 참판공이 또 돌아가자 공은 정훈(庭訓1)을 잃은 것을 애통해 하였다. 제전(祭奠)을 모시는 여가에도 공부에 더욱 힘써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깊이 공부하고 제자백가에도 널리 통하여, 실질을 만끽하고 배운 것을 발산함에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능숙하였다.
유림(儒林)에 일이 생기면 굳건하게 논지를 지키고 꿋꿋하게 아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32세에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병정(丙丁2) 이후로 산림에 자취를 감춘 것이 거의 4∼5년이었다. 뒷날 비록 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마지못해 과장(科場)에 나아갔지만 공의 본뜻은 아니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이부랑(吏部郞)이 여러번 사람을 보내 뜻을 전했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무자년(1648) 권씨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장례를 치르고 나서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곡하기를 비바람에도 거른 적이 없었다.
신묘년(1651) 안씨부인의 명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안씨부인의 부고가 이르니 공이 크게 슬퍼하여 거의 상례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후로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거처하던 내앞[川前]의 빗골[雨谷] 언덕에 집을 지어 야암(野庵)이라 편액 하고,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 늘그막에 장수(藏修)할 곳으로 삼아 세상일을 사절하고, 오로지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원근의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 배우기를 청하는 자들이 항상 수십명이 되었는데,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세워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노고를 말하자, “내 스스로 이를 즐기니 피곤하지 않소.”라고 하였다. 때때로 좋은 때와 아름다운 절기가 되면 이웃을 초대하고 관동(冠童)들을 모아 막걸리와 산나물로 함께 진솔회(眞率會)를 가지고, 소요 자적하며 마음을 비워 득실에 뜻을 두지 않았다.
병오년(1666) 겨울에 뜻하지 않게 감기에 걸리자 자제들에게 약을 올리지 못하게 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라고 하고 스스로 만사(輓詞) 한 편을 지었다. 그 내용에 말하였다.
행동은 남에게 미치지 못하고 / 行不逮人。
덕망도 남에게 미치지 못하여 / 德不及物。
강호에서 늘그막을 보내면서 / 送老江湖。
해와 달에 덧없이 바래었네 / 灑灑日月。
살아서는 세상에 도움 되지 못하고 / 生無益於世。
죽어서도 후세에 들림이 없으리니 / 死無聞於後。
애오라지 조화에 따라 다하여 돌아가 / 聊乘化而歸盡。
달갑게 초목과 함께 썩으리라 / 甘與草木而同腐。
몇 달 만에 돌아가시니, 이날이 정미년(1667) 4월 3일이다. 태어난 갑진년(1604)으로 부터 64세를 누렸다.
유명(遺命)에 따라 고을 서쪽 임피(林皮) 선영의 서쪽 임좌(壬坐)의 언덕 에 장사 지냈다.
초배위(初配位)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좌의정 정간공(貞簡公) 탁(琢)의 손녀이자 주부(主簿) 윤위(允偉)의 딸이다. 군자의 배필이 되어 덕에 어긋남이 없었으나 공보다 36년 앞서 죽었으며, 묘소는 공과 합폄(合窆)하였다.
계배위(繼配位)는 신천강씨(信川康氏)로, 군수(郡守) 이청(以淸)의 손녀이자 호군(護軍) 계윤(秀胤)의 딸이다. 뒤에 아들 동추공(同樞公)이 귀하게 되자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니, 부인도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 태기(泰基)는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천거되었다가 호군(護軍)으로 승차했고, 이기(履基)는 생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익기(益基)는 호군을 지냈고, 정기(鼎基)는 참의(參議)에 추증되었으니, 정씨 소생이다.
유기(有基)․ 관기(觀基)와 김건(金健)․ 김한국(金翰國)에게 각각 시집간 딸들은 강씨 소생이다. 여남(餘男)으로 여기(汝基)가 있다. 태기의 아들 세흠(世欽)은 교리(校理)인데, 문학과 절의로 세상의 중망을 받았다. 이기의 아들은 창문(昌文)․ 정언을 지낸 창석(昌錫)․ 창호(昌鎬)이고, 딸은 진사 이두정(李斗精)에게 시집갔다.
익기의 아들은 세정(世鋌)․ 한림(翰林)을 지낸 세호(世鎬)이고, 딸은 김진섭(金震燮)․ 최수천(崔壽天)․ 최유(崔愈)에게 각각 시집갔다. 정기의 아들은 세련(世鍊)․ 세진(世鎭)․ 세성(世鋮)․ 세백(世銆)이다. 유기의 아들은 세심(世鐔)․ 세장(世鏱)이고, 딸은 최하진(崔夏鎭)․ 이담(李䨵)에게 각각 시집갔으며, 여남으로는 세찬(世鑽)․ 세질(世鑕)․ 세섬(世銛)․ 세필(世鉍)이 있다.
관기의 아들은 세창(世錩)이고, 딸은 홍위(洪偉)․ 이태섭(李台燮)․ 이동형(李東馨)․ 황재문(黃載文)에게 각각 시집갔다. 김건의 아들은 서린(瑞麟)․ 서룡(瑞龍)․ 서우(瑞雨)․ 서욱(瑞旭)․ 서귀(瑞龜)이고, 딸은 박내상(朴鼐祥)에게 시집갔다. 김한국의 아들은 동적(東迪)이고, 딸은 이수태(李守泰)에게 시집갔다. 여기의 아들은 세확(世鑊)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은 질박하고도 강직하고 방정하였으며, 윤나는 옥처럼 온화하고 우뚝 솟은 산처럼 엄정하였다. 빼어난 재주는 호쾌하고 시원 시원함을 갖추었고 총명함은 남들보다 빼어났다. 일찍이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뜻을 독실하게 하고 학문에 힘썼다.
부모님을 곁에서 모시고 순응하면서 온정수수(溫凊滫瀡3)에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기에, 안씨부인이 일찍이 말하기를 “아이가 내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았다.”라고 하였다.
형제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일찍이 백씨의 병을 돌보면서 탕약을 몸소 달였고, 아우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하루도 왕래를 거른 적이 없었다. 아우가 여러 해 병을 앓자 마음을 다하여 구호하고 약을 쓰며, 밤낮으로 살펴보고 혹 비바람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분가할 때에 스스로 가산을 조금만 취하였고, 고아가 된 조카를 자신의 자식처럼 돌보아 가르치고 길러 자립하게 하였다. 선조를 받듦에는 정일하고 경건을 주로 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전답을 매입하자는 집안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 돈을 내어 어려운 친척을 도왔다. 전곡노『典穀奴(수세를 담당했던 종)』가 이자를 취하는 것을 꾸짖고 그 문서를 불태워 이웃에 혜택을 베풀었다.
그가 친척들과 돈독하며 궁핍한 이를 돌보는 일이 대체로 이런 것들이 많았다. 젊었을 때 예리하고 영발함이 자못 드러났으나, 중년 이후로는 날카로운 성품을 버리고 스스로 화평하도록 힘썼다. 자기를 지키고 남을 대할 때에는 한결 같이 겸손하고 정성스러우며 부드럽고 공손하였다.
애초에 참판공이 임종할 때에 ‘빈궁하여도 의리를 잃지 말고, 영달하여도 도리를 어기지 말라.『궁불실의 달불리도(窮不失義 達不離道)』’라고 한 8글자로 자손들을 면려하였는데, 공은 종신토록 이를 마음에 간직하고 따르면서 잊지 않고 입신(立身)의 종지(宗旨)로 삼았다.
섭렵하지 않은 서적이 없었으나 사서(四書)에 더욱 정통하였다. 문장은 정밀하고 절실하여 이치에 도달하였으며, 시 또한 맑고 고상하여 세상의 속된 맛은 없었다. 청풍자(淸風子4) 정공(鄭公)이 일찍이 “아무개의 시가 적선(謫仙5)에게 얻은 것이 가장 많다.”
라고 칭하였고, 학사(鶴沙6) 김공(金公)은 공이 젊었을 때 논사(論事)한 글을 보고 서찰로 치하하여 “식견과 문장이 또래들 가운데서 출중하다.”라고 하였다. 여러 현인에게서 중망 받음이 이와 같았으나, 일생 동안 겸손으로 감추면서 저술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시문을 지을 때마다 원고를 남겨두지 않아 지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대화(岱華)의 티끌7)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아! 공은 덕의(德義)가 높고 재학(才學)이 풍부하여 사람들은 “조석 간에 현달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우하였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남긴 가르침을 사숙하여 우뚝한 현사들이 많이 나와, 연방(蓮榜)과 계방(桂榜 : 초시와 회시급제)이 교대로 빛나서 고관들로 자리를 가득 메웠으니, ‘선을 쌓은 보답이 그 경사가 자손에까지 미친다.’8)는 말이 끝내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다.
묘도(墓道)에 오래된 비갈이 있는데, 족세(族世)와 생몰연대만 실려 있고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은이의 성명도 지워져 후세에 징험으로 삼을 수 없기에, 후손들이 목재(木齋9)의 묘지(墓誌)와 금옹(錦翁10)의 행장(行狀)으로 나에게 묘갈명을 짓도록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건대 늦게 태어나 들은 것이 없으니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마는 일이 가문의 선조에 관계되는지라 감히 피할 수가 없었다. 삼가 행장과 묘지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내앞 마을에 / 維川有里。
성대한 덕망이 모였으니 / 鬱鬱聚德。
나가서는 충심을 다하고 / 出則忠藎。
들어와서는 본보기가 되었네 / 處爲楷式。
공이 그 자취를 이어받아 / 公繩厥武。
타고난 품성도 빼어나 / 天稟英英。
공경히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 恪受家庭。
도덕과 의리를 실천하였네 / 道義是程。
백가서를 환히 꿰뚫어 / 淹貫百氏。
온축된 것을 더욱 두텁게 하였네 / 益厚其蓄。
일찍부터 유림에서 추앙되었고 / 夙望吾林。
선진들도 인정하였네 / 先進推服。
때를 만나지 못하여 / 乃閼其逢。
산림에 몸을 의탁하였네 / 卷焉林壑。
득실은 마음에 두지 않았고 / 忘懷得喪。
세월 속에 바래어 갔네 / 蕭灑日月。
효도와 우애에 정성을 다하고 / 懇懇孝友。
유학에 부지런히 힘을 다했네 / 亹亹儒術。
스스로 촌스럽다 폄하하며 / 自貶以野。
화려함 거두고 실질에 돈독하니 / 斂華敦實。
감출수록 더욱 드러나 / 闇而愈章。
꾸밈과 바탕이 모두 빛났네1) / 彬彬文質。
적선에 보답이 없겠는가 / 有積不施。
의당 자손에게 경사 있으리 / 宜慶于延。
대대로 맑은 향기 떨치고 / 世揚淸芬。
그 광채 성대히 빛나리니/ 其光有燀。
휘돌아 흐르는 물줄기 / 沄沄者川。
누가 그 근원을 더 깊게 하리오 / 孰濬其源。
나로서는 이를 밝히노니 / 我則昭之。
후손들을 힘쓰게 하노라 / 以勖來昆。
[註解]
1) 정훈(庭訓) : 부모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로, 논어 「계씨(季氏)」에 “일찍이 홀로서 계실 때에 내가 빨리 걸어 뜰을 지나는데 ‘시(詩)
를 배웠느냐?’라고 물으심에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다.’라고 하시므로 물러나 시를 배
웠노라.[嘗獨立 鯉趨而過庭 曰學詩乎 對曰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 병정(丙丁) : 청나라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말한다. 병자년(1636)에 시작하여 이듬해 정축년(1637)에 끝났으므
로 일컫는 말이다.
3) 온정수수(溫凊滫瀡) : ‘온정’은 부모를 섬김에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한다는 동온하정(冬溫夏凊)의 준말이다. ‘수
수’는 자식이 부모에게 음식을 부드럽게 하여 정성으로 대접하는 것으로,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대추․밤․엿․꿀로 달게 하고,
씀바귀․환채․흰 느릅나무․느릅나무의 신선한 것이나 말려 묵힌 것을 뜨물로 삶아 부드럽게 하며, 굳은 기름 묽은 기름으로 고소하게 한
다.
부모나 시부모가 음식을 맛보신 뒤에야 물러간다.[棗栗飴蜜以甘之 菫荁枌楡免薧 滫瀡以滑之 脂膏以膏之 父母舅姑 必嘗之而後
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 청풍자(淸風子) : 정윤목(鄭允穆, 1571∼1629)의 호이다. 자는 목여(穆如), 본관은 청주이다. 정구(鄭逑)·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
다. 15세 전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많은 서책을 읽었고, 시문에 뛰어나 일가의 체격을 이루었다.
1589년에는 사은사의 사행길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다. 1616년 소촌도 찰방(召村道察訪)에 취임하였고, 1618년 통훈대부에 가자(加
資)되었다. 만년에는 용궁(龍宮)의 장야평(長野坪)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청풍자집이 있다.
5) 적선(謫仙) : 천상의 신선이 인간 세상에 귀양 왔다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의 시선(詩仙)인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6) 학사(鶴沙) : 김응조(金應祖, 1587∼167)의 호이다.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 또는 아헌(啞軒),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1613년
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대사간·한성부 우윤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학사 사례문답(四禮問答). 산중록(山中錄). 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7) 대화(岱華)의 티끌 : 대화는 중국의 사악(四嶽)인 대산(岱山)․곽산(霍山)·화산(華山)․항산(恒山)을 가리키는 말로 큰 것을 표현하
니, 여기에서는 많은 양에 비하여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뜻을 말한다.
8) 선을……미친다 : 주역 「곤괘(坤卦) ․ 문언전(文言傳)」에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
시 남은 재앙이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9) 목재(木齋) : 홍여하(洪汝河, 1621∼1678)의 호이다.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 혹은 산택재(山澤齋),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정
경세의 문인이다. 1654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정언을 거쳤고 경연에서 주례를 강학하기도 하였다.
제1차 예송(禮訟) 때 윤휴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려 160년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풀려나 귀향하여 산택재를 짓고 학문 연
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관직에 복귀하여 병조 좌랑·사간을 역임하였다.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목재집이 있다.
10) 금옹(錦翁) : 김학배(金學培, 1628∼1673)의 호이다. 자는 천휴(天休), 본관은 의성이다. 김시온의 문인이다. 1663년 문과에 급제하
여 벼슬이 예조 좌랑에 이르렀다. 1668년 성균관 안에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이 새로 설치되자 교정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금옹집이 있다.
11) 꾸밈과……빛났네[彬彬文質] : 논어 「옹야(雍也)」에 “질(바탕)이 문(꾸밈)을 이기면 촌스럽고, 문이 질을 이기면 사(겉치레만
잘함)하니, 문과 질이 적당히 배합된 뒤에야 군자이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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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成均生員野庵先生金公墓碣銘 幷序
野庵先生金公諱㶵字受而。其先新羅宗姓。義城君諱錫。其受封祖也。其後代襲爵封。諱龍庇太子詹事。諱宜尙書左僕射。諱台權文睿府左司尹。俱著麗乘。諱居斗入我朝。爲工曹典書。諱漢啓副知承文院事。端廟遜位。謝病歸。敎授鄕里。三世諱璡成均生員。贈吏曹判書。號靑溪。有五賢子。俱爲陶山高弟。第二諱守一自如察訪。號龜峯。生諱涌兵曹參議。以壬辰宣武勳。贈吏曹參判。號雲川。淸名直節。震耀當時。五子長諱是柱。魁司馬擢文科。官至兵曹佐郞。娶安東權氏正郞暐女。生四子。公其仲也。佐郞之弟諱是楗贈左承旨。娶竹溪安氏護軍霮女。早歿無嗣。公始生。參判公命安氏子之。五六歲時。猶未知爲權出。久乃知之。顧益母安氏不衰。始學字。參判公日暮對梨花。使作句。公應口對曰。梨花依依白。參判公大驚曰。依依白三字。能畫出暮時景。時公羣從兄弟。詩禮征邁。彬彬多文學士。公尤踔厲奮發。藻思贍逸。參判公奇愛之。手書所製十二歌與之。十四丁佐郞公憂。能執喪如禮。越四歲。參判公又卒。公痛失庭敎。祭奠之暇。劬書益力。沈潛經史。貫穿百氏。飫實噴英。日大以肆。儒林有事。毅然持論。棘棘不阿。人皆敬憚之。三十二陞上庠。丙丁以後。晦跡丘林。殆四五年。後雖以二母故。黽勉場屋。然非其志也。吏部郞有素與公善者。屢遣人致意。公不應。戊子丁權夫人憂。旣葬廬于墓側。晨昏展哭。風雨不廢。辛卯以安夫人命赴解。還至中路。安夫人訃至。公大戚。幾不勝喪。自是不復應擧。就所居川前雨谷之畔。築一室。扁以野庵。鑿池種樹。爲臨老藏修之所。謝絶人事。專以訓誨子弟爲業。遠近學者。聞風請敎者。常數十餘。嚴立課程。晝夜不懈。或言其勞苦。則曰我自樂此。不爲疲也。時値佳辰勝節。招隣里集冠童。濁醪山蔬。相與爲眞率之會。逍遙自適。曠然不以得喪爲意也。丙午冬。偶感疾彌留。不許子弟進藥曰死生命也。撰自挽一章。其辭曰行不逮人。德不及物。送老江湖。灑灑日月。生無益於世。死無聞於後。聊乘化而歸盡。甘與草木而同腐。數月而終。丁未四月三日也。距其生甲辰。享年六十四。葬府西林皮先兆之西負壬原。從遺命也。初配淸州鄭氏。左議政貞簡公琢之孫。主簿允偉女。配君子無違德。先公三十六年卒。墓與公合堋。繼配信川康氏。郡守以淸之孫。護軍秀胤女。後以子同樞公貴。贈大司憲。夫人幷封貞夫人。有男女八人。男泰基薦授掌樂主簿。陞護軍。履基生員同樞,益基護軍,鼎基贈參議鄭氏出。有基,觀基。女金健,金翰國康氏出。餘男一汝基。泰基男世欽校理。以文學名節重於世。履基男昌文,昌錫正言,昌鎬。女李斗精進士。益基男世鋌,世鎬翰林。女金震燮,崔壽天,崔愈。鼎基男世鍊,世鎭,世鋮,世銆。有基男世鐔,世鏱。女崔夏鎭,季䨵。餘男世鑽,世鑕,世銛,世鉍。觀基男世錩。女洪偉,李台燮,李東馨,黃載文。金健男瑞麟,瑞龍,瑞雨,瑞旭,瑞龜。女朴鼐祥。金翰國男東迪。女李守泰。汝基男世鑊。曾玄以下不盡錄。公容貌端正。性質剛方。溫溫如玉潤。栗栗如山起。才格英爽。穎悟絶人。早襲庭訓。篤志力學。事親左右順適。溫凊滫瀡。靡極不用。安氏嘗曰兒能以我心爲心。與兄弟友愛甚篤。嘗侍伯氏疾。湯藥必親。叔弟居間數弓。杖屨來往無虛日。弟抱病屢歲。殫心救藥。晝夜省視。不以風雨或間。析箸。自取羸薄。撫孤姪如己子。敎育而成立之。奉先主於精虔而致其愨。不聽家人買田。而撥其價。以周竆親。責典穀奴取息而焚其券。以惠鄰里。其敦親恤竆。大抵多此類也。少時鋒穎頗露。中歲以後。枿去崖角。務自平和。持己接物。一於謙虛謹愨。恂恂如也。始參判公臨終。以竆不失義達不離道八字。勉戒子孫。公終身服膺。揭爲立身宗旨。於書無不涉獵。而尤精於四子。爲文精切理到。而詩亦淸爽高古。無塵俗韻味。淸風子鄭公嘗稱某之詩。得於謫仙者最多。鶴沙金公得公少時論事之書。以書賀之曰。見識文藻。超出儕輩。其見重於諸賢若是。而一生謙晦。不以著述自居。有作輒不蓄稿。今其所存。直岱華之毫芒耳。嗚呼。以公德義之尊才學之富。人謂朝夕且揚顯矣。而卒落拓不遇。豈非命歟。然而餘敎所淑。蔚有才賢。蓮桂交輝。鞾笏滿床。爲善之報。終有不可誣者如此。墓道舊有碣。只載族世生卒。而不及事行。且沒作者姓名。無以徵信來世。後孫等以木齋之誌,錦翁之狀。屬興洛以銘事。興洛自惟。晩生無聞。何以堪是役。而事係門先。不敢遜避。謹依狀誌。敍次如右。而系以銘。銘曰。
維川有里。鬱鬱聚德。出則忠藎。處爲楷式。公繩厥武。天稟英英。恪受家庭。道義是程。淹貫百氏。益厚其蓄。夙望吾林。
先進推服。乃閼其逢。卷焉林壑。忘懷得喪。蕭灑日月。懇懇孝友。亹亹儒術。自貶以野。斂華敦實。闇而愈章。彬彬文質。
有積不施。宜慶于延。世揚淸芬。其光有燀。沄沄者川。孰濬其源。我則昭之。以勖來昆。<끝>
출처 : 서산집(西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