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생명동산 본관 지붕이 잔디로 되어있다. 건봉사 헛간 지붕이 잔디로 된 것을 보았는데, 저렇게 큰 건물 여러 채를 잔디로 덮은 모습은 처음 본다. 일이 끝난 시간이라 본관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숙소 건물로 올라갔다. T자형 2층 건물이다. 집 뒤는 소나무 숲이 빽빽하다. 정성헌 이사장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우선 좀 씻으라며 방을 정해준다. 방이 여러 개다. 청년 둘이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자원봉사자라고 했다.
샤워를 마치고 밥상 앞에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나와 함께 도착한 유네스코 교육연수팀장 엄정민씨와 그녀의 초등학생 딸도 오늘 저녁 손님이다. 상치와 쑥갓이 바구니에 담겼고, 김치와 된장 그리고 나물국이 나왔다. 밥은 먹을 만큼 덜어먹으면 된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저녁을 먹고 나서 차 한 잔 마시며 정이사장과 얘기를 나누었다.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은 DMG일원의 생태계와 역사, 문화를 올바르게 보전하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자는 취지로 세워진 교육기관이라고 했다. 이곳 연구마을은 12만 4천 평방미터에 조성되었고, 지뢰 생태공원이 민통선 우안 습지 백만 평방미터에 조성됐다. 그리고 생명연구동산은 서화면 가전리 민통선구역 30만 평방미터에 조성이 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1998년 당시 인제군수가 제안했다. 민통선 이북 내금강에 농사를 지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농사보다는 평화와 민족 인류에 이로운 일을 만들어 보자는 쪽으로 수정되었다. 2006년에 착공하여 2009년에 준공했다. 준공 이후,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작년에는 6천 명도 넘은 사람이 이곳을 다녀갔다. 해외에서도 왔다.
1946년생인 그는, 8년 전 위암수술을 받았다. 생명을 자연에 맡긴다고 했다. 아픈 사람이 스스로 건강법을 준수하고 교육하니 사람들이 믿고 따라와 주어 3천명 이상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3천명? 사실이라면 대단한 치료효과다. 암이란 게 완치가 어렵다는데 줄여서 천 명만 완치가 되었다해도 대단한 성과가 아닐까.
비누와 치약을 만들어 쓴다고 했다. 북한에서 옥수수를 대량으로 심는 모습을 보는데, 그 쪽 토질은 감자를 많이 심어야 한다며 안타까워한다. 한봉 벌통 한 통에 6만원 하던 게 올해는 50만원으로 뛰었단다. 벌이 멸종이 되면 생태계가 문제가 된다.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화제가 끝이 없다. 이렇게 반 발자국씩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한 곳으로 발전해간다.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걸어오는 길에 좀 불편하다 느꼈는데 여러 군데 물집이 보인다. 실을 바늘에 꿰어 물집 잡힌 곳을 통과하게 하여 그대로 두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낫는다. 그렇지 않고 물집을 터트리면 그 자리가 쓰리고 아프기 마련이다.
밤이 깊었다. 오늘도 만만치 않게 걸었다.
** 넷째 날 (5월 5일- 맑음) - 인제 원통에서 출발, 천도리 이장과 함께 펀치보올 방문
아침 5시 30분 기상. 정성헌 이사장과 함께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담한 공연장도 있고, 솔라시스템도 갖춰 있다. 5행 동산에는 사람의 건강과 치유에 필요한 각종 약초와 농작물이 심어져 있다. 비닐하우스에는 묘목이 자라고 있다.
남묘호랑교 신자 일본인 한 사람이 이곳에 머물며 조선전쟁 희생자를 위해 참회기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한국말 배워 오라고 연세어학당에 보냈다고 한다. 그가 거처하는 방을 가 보았다. 벽에 뜻을 알 수 없는 그림이 붙어있다. 아침 식사까지 잘 대접 받았다.
서울에 사는 경춘이 아우가 가족과 함께 속초에 일이 있어 가는 길에 들리겠다며 이곳까지 찾아왔다. 차를 타고 함께 원통까지 나왔다. 8시 40분, 어제 멈췄던 원통 성당에서 출발한다. 아침에 차를 타고 나왔던 그 길을 거슬러 다시 올라간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원통이 한 눈에 보인다. 내려가는 길 왼쪽 작은 길에 “누구나 하기 실은 일? 그러나 누군가 꼭 해야할 일? 우리가 하겠습니다,”는 말 쓴 파란색 베너가 길가에 서있다.
을지부대 앞을 지난다. 사격훈련을 하고 있는지 총소리가 요란하다. 부대 근처 밭에서는 농부들이 옥수수 모종을 심고 있다. ‘산불조심은 산과의 약속’ 베너가 곳곳에 붙어있다. ‘신병교육대 퇴소식을 환영합니다. - 달빛소리마을 주민일동- ’이라는 베너도 보인다.
부부가 밭일을 하고 있는데 엉덩이에 뭐가 붙어있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덜렁거린다. 뭘까 자세히 보니 앉을 때 사용하는 이동식 의자다. 재미있다. 옛날 앉아서 논 밭일을 할 때 저런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필요하면 만들어지게 되는 모양이다
월학 초등학교 앞 정류소에 간이 도서관이 있다. 책이 몇 권 세워져 있는데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책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제4 땅굴, 을지전망대, 양구전쟁기념관 가는 표지판이 서있다.
모빌홈을 싣고 가는 자동차가 보인다. 미국에서는 흔히 보는 광경이지만 한국에서 이동식 집을 싣고 가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제 한국에도 모빌홈이 주거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노인 부부가 밭갈이 작업을 하고 있다. 옥수수를 심으려는 중이란다. 쉴 참 인성 싶어나도 발
걸음을 멈췄다. 나이를 물으니 올해 일흔둘이라 했다.
쌀값은 그대로인데 공산품이랑 전기세가 많이 올라 살기가 힘이 든다고 한숨이다. 전에는 심
야전기가 쌌는데, 요새는 많이 올랐고, 기름 값도 올라서 춥게 지낸다며 죽는 것은 서민들뿐이
라고 또 한숨이다. 쌀 한 가마에 18만원 정도인데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60대
미만은 밀가루 입맛 들여 쌀을 먹으려 하지 않으니 쌀값이 오르겠냐며 나름대로 진단을 하신
다. 자식들 일곱 남매가 팔도에 흩어져 산다고 했다.
에프티에이(FTA) 얘기를 꺼내자 "미국이 자기들 유리하게만 하려고 해서 문제야, 정치를 잘해야 해“ 목소리를 높힌다. 정치, 경제 막히는 게 없는 분이다. “이번 도지사 선거에 최문순 뽑은 거 잘한 거여, 옛날에는 여당 말뚝만 박아도 되얐는디 요즘은 안 그래. 그리고 이 지역이 옛날 그 시절에도 김대중이 뽑았던 곳이에요. 국회 문턱에도 못가보고 5.16 나서 그냥 말았지만...”
그랬다. 노인의 말대로 김대중은 인제군에서 두 번 낙선했다. 세 번 만에 당선이 되었지만 5.16 군사 혁명으로 허사가 되었다. 김택근씨가 쓴 ‘김대중 평전’ 내용 중, 인제군 선거에서 두 번 낙선한 부분을 소개한다.
“김대중은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 민주당 후보로 목포에서 출마하고 싶었지만 현역인 정중섭이 버티고 있었다. 결국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기로 했다. 당시에는 '지역 감정‘이라는 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해 볼 만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군인들은 자유당 학정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다. 자유당 정권의 실상을 제대로 알린다면 승산은 충분하다고 여겼다.
출마하려면 후보 등록을 해야 했다. 후보 등록에는 주민 100명 이상의 추천이 있어야 했다. 중복 추천은 허용되지 않았다. 김대중은 넉넉하게 130명의 추천을 받아 인제 군청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을 마쳤다. 거리에 벽보를 부치고 현수막을 내걸었다 .
그런데 다음 날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등록이 무효 처리되었다는 통보가 왔다. 김대중과 자유당 후보를 중복 추천한 사람이 무려 70명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공작이었다. 군청 공무원과 경찰이 추천서를 일일이 들춰보고 김대중을 추천한 주민들을 찾아가 자유당 후보도 추천토록 했다. 다시 추천을 받아야 했다.
등록 마감까지는 하루가 남아 있었다. 주민들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추천을 부탁했다. 그런데 어느 집이건 추천서에 찍을 인감도장이 없었다. 이장들이 비료배급에 필요하다며 몽땅 걷어가 버렸다. 할 수 없이 "김대중 후보를 추천한다. 김 후보 측이 도장을 새겨 날인해도 무방하다"는 문서를 만들어 손도장을 찍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도장을 새길 수가 없었다. 어느 도장방에 들러도 고개를 저었다. 경찰들이 이미 손을 썼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장을 새겨야 했다. 가장 손쉽게 도장을 새길 수 있는 재료를 찾아야 했다. 바로 호박 꼭지였다. 운동원들과 함께 묵은 호박을 구해서 호박에 이름을 새겼다. 바로 한국 선거 운동사에 기록된 '호박 도장'이었다.
후보 등록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선거를 치르려면 서울에서 준비할 것이 많았다. 그런데 다시 등록이 취소됐다는 연락이 왔다. '호박 도장'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곧바로 지프차에 올랐다. 마음이 급하니 길은 더 험하고 멀었다. 차가 두 번이나 뒤집혔다. 차체가 형편없이 구겨졌지만 다행히 엔진은 꺼지지 않았다. 오후 늦게 군청 선거관리위원회에 도착했다.
마침 김대중을 빼고 기호 추첨을 시작할 참이었다. 김대중은 멈추라고 고함을 질렀다. 상처투성이의 젊은이가 포효하니 장내가 일순 조용했다.
그러자 기호 추첨을 하러 나와 있던 자유당 후보가 소리쳤다.
"저 놈을 끌어내라."
경찰들이 달려들어 김대중을 붙잡았다. 김대중은 책상 다리를 붙들고 버텼다. 그걸 놓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끝내 문밖으로 던져진 김대중은 누운 채로 하늘을 보았다.
마냥 서러웠다. '부정하고 무도한 집단에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꺾여서야 되겠는가. 저 남쪽 끝에서 가장 먼 인제로 올라와 이렇게 버려져야 하는가.'
그날 일은 '후보 등록 방해 사건'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선거가 끝나고 김대중은 자유당 당선자를 고소했다. 이듬해 재판에서 승소했다. 다시 보궐 선거에 나갔다.
그러나 관권 부정 선거는 여전했다. 자유당 후보는 경찰서장 출신이었다. 모든 조직을 동원하여 김대중을 옭아맸다. 전라도 출신의 연설꾼을 동원하여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또 뜨내기 외지인을 추방하자며 선동했다. 결정적인 것은 군부대 내의 투표 부정이었다. 부대 책임자들이 투표용지를 일일이 검색했다. 사실상 공개 투표였다.
김대중은 또 질 수 밖에 없었다. 김대중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검하며 희망을 품었지만 당시 접경 지역에서 야당 후보로 당선되기란 불가능했다. 사실상 낙선하러 먼 길을 떠난 것이었다. 김대중은 "해볼 만하다"고 했지만 누구나 바보짓으로 여겼다. 김대중은 자금도 부족했다. 운동원들에게 겨우 설렁탕이나 자장면을 먹였고, 주먹밥을 싸들고 유세를 다녔다. 삼륜차에 마이크를 달고 마을을 찾아 나섰다. 산이 깊어 해가 일찍 지면 달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왔다. 인제의 노인들은 지금도 그때 김대중의 처량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여당 측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유세장에 주민들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김대중은 "내 유세를 들어준 민간인은 고작해야 62명"이라고 말했다. 오죽 청중이 모이지 않았으면 이토록 헤아렸을 것인가. 그래도 김대중은 포기하지 않았다. 텅 빈 유세장에서 하늘에 대고 연설을 했다.
이 때 선거 운동을 도왔던 정치인 김상현은 김대중이 큰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제 선거' 때문이라며 이렇게 평했다.
"사람들은 이기는 것만 하는데 김대중은 지는 싸움을 스스로 선택했거든. 두 번 세 번, 계속 떨어졌지만 국민들은 김대중을 알게 되었어. 전투는 백번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겨야하지. 이것이 전략가야. 그런 면에서 뛰어난 전략가였어."
1954년 목포, 1958년 인제, 1959년 다시 인제. 세 번을 연거푸 떨어졌다. 김대중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쌀이 떨어졌지만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사람 만나기가 무서웠다. 사람을 피해 무작정 버스를 탔고, 가다보면 또 마땅히 내릴 곳이 없었다. 청년 사업가로 그간에 쌓인 부와 명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랬다. 그랬던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제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평가는 역사가 내린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
‘용늪 전통막국수’ 간판이 보인다. 춘천 막국수 집이다.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한 다음 사람들이 국수를 먹는 모습을 가만히 살펴본다. 두 명씩 세 명씩 둘러 앉아 왁자하니 떠들며 국수를 먹는 모습이 정겹다. 백석이 쓴, ‘국수’라는 시가 생각난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데, 국수는 동네사람들 전부를 흥성흥성 들뜬 기분으로 모이게 하는 음식, 하얗게 쌓인 눈과 그보다 더 새하얀 국수틀과 칭하니 익은 동치미와 텁텁한 꿈 모두를 몰고 오는 음식, 두리반에 둘러 앉아 흰 국수가락보다 더 길게 고생스러웠던 얘기며 국수 한 그릇을 지미기 위해 모인 이들의 냄새와 그 살뜰함으로 가득한 음식이라고도 했다.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고 했다.
이윽고 내 앞에도 왕사발에 담긴 막국수 한 대접이 나왔다. 두리반에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수는 없지만 먼 길 걸어 온 나그네에게 무슨 음식인들 맛이 없겠는가. 얼큰하게 매운 양념에다 비벼 내온 막국수 한 그릇을 눈 깜작할 새 비웠다. 값은 5천원이다.
춘천 막국수는 임진왜란 이조, 인조 시대 즐겨먹던 음식으로 강원도 춘천지방에서 긴 겨울밤 밤참으로 즐겨먹던 음식이다. 복잡한 조리과정 없이 간단히 해먹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막국수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메밀이 재료다. 태백산맥 지역의 메일이 좋아 자연스럽게 강원도에 메밀음식이 발달한 모양이다.
백석의 시를 다시 보면, “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 ...수육을 삶은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르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이 나온다. 동치미국에 말아서 먹기도 했지만, 추운 지방이라 산꿩이랑 수육을 삶은 물에 국수를 삶아 먹기도 했던 모양이다. 지방에 따라 메밀국수를 먹는 방법이 조금씩 달랐다. 후세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통해 음식 풍속을 짐작할 수 있다.
내 고향 전라도 지방에도 메밀을 심었다. 척박한 땅에 잘 자라 산비탈 새로 개간한 밭에 주로 심었다. 메밀묵을 많이 만들어 먹었다. 메밀국수는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즐겨 먹었다. 가격이 싸기도 했지만 양도 많아, 뜨건 국물에 말아주는 메밀국수 한 그릇이면 배가 불렀다. ‘청운모밀’집이 인기였다. 당시 광주의 청춘들에게 제일극장 골목 모퉁이 ‘영하당’ 식당과 ‘청운모밀’은 추억의 집으로 기억되어 있다.
개간. 산에 나무를 베어내거나 돌멩이를 주워낸 다음 밭으로 만드는 일이다. 개간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중학을 졸업했는데 아버지가 병석에 높게 되자 진학을 못하고 시골 고향마을에 들어가 농사를 짓게 되었다.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는 영산강 끝자락에 위치한 깜깜한 벽촌이었다. 영암읍에서 시오리를 걸어 내 고향마을 장사리에 이르면, 육지는 끊기고, 마을과 산은 강에 갇혔다. 물이 들고 날 때마다 강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되었다가 뻘등을 드러내는 두 얼굴이 되었다.
물려받은 천수답 몇 마지가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우리집 식구 식량도 부족할 판이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강이 바라보이는 산비탈을 일구어 밭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돌을 주워내고 곡괭이로 나무뿌리를 파냈다. 그리고 삽이나 괭이로 일일이 땅을 파 엎었다. 어머니도 나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몸과 연장이 따로 놀았다. 중학을 갓 졸업한 어리고 서툰 농사꾼. 손은 부르트고 지게질 때문에 등짝이 퍼렇게 멍이 들었다.
겨울철 내내 그렇게 했더니 200평 정도의 밭이 만들어졌다. 시뻘건 황토밭이었지만 내 땅을 만들었다는 기쁨이 컸다. 거름을 져다 붓고 메밀씨를 뿌렸다.
메밀꽃이 환하게 핀 날 밤의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달빛 아래 소금을 뿌려놓은 듯 눈이 부시던 메밀밭, 밀물이 되어 출렁이는 파도의 골을 타고 달빛이 잘게 잘게 부숴지던 그 아름답던 풍경을. 그 저녁, 나는 강물 따라 어디론가 한 없이 흘러가고 싶었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어디서 한 숨 자고가면 딱 좋겠다. 비득 고개를 넘어간다. 길 양 옆으로 커다란 시멘트 덩어리를 만들어 올려놓았다. 건들면 금방 넘어질 것만 같다. 유사시 탱크 저지용이라 했다.
서화면 천도리 앞을 지난다. 잘 만들어진 냇가 산책길에 젊은 엄마와 초등학생 아들이 손을 잡고 걸어간다. 아들 녀석이 나를 보더니 “어, 엊그제 티비에 나온 그 아저씨다!” 아는 체를 한다. 아주머니가 “힘들지 않으세요” 인사를 건넨다. KBS 뉴스를 본 모양이다. 메스콤의 영향력이 대단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린이 날이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기억도 가물가물 까마득한 먼 옛날이 되어버렸지만, 나도 저렇게 어머니 손을 잡고 깡총거리던 날이 있었다. 어머니. 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한 친구가 생각난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윈 친구다. 해질 녁,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따라 함께 놀던 친구들이 하나씩 집으로 들어가면, 녀석의 얼굴에 그늘이 내렸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녀석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어린 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 후, 어른이 된 다음 정채봉 시인이 쓴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이라는 시를 읽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 아니 아니 아니 아니 /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 단 5분 /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 원이 없겠다 //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 젖가슴을 만지고 /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 엄마! /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 숨겨놓은 세상사 중 / 딱 한 가지 /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 엉엉 울겠다”
엄마 얼굴도 모르고 자라난 시인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 시를 읽고 나서, 어릴 적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그 친구의 손을 붙잡고 ‘우리 집에 함께 가서 밥묵자’ 는 말을 왜 하지 못했을까 늦은 후회를 했다.
서화 초등학교 앞에 도착했다. 어제 만났던 천도리 이장 장근세씨가 기다리고 있다. 정부로부터 민통선 야산 8천 평을 임대하여 농사를 하고 있는데, 농장에 함께 가보시겠냐고 묻는다. 예정에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트럭을 타고 출발했다. 산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올라가는데 소나무 한 그루가 누워있다. 작년 겨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나무란다. 조금 더 걸어가니 냇가 바위가 쪼개져 서너 발쯤 아래로 밀려나 있다. 지난 홍수 때 냇물을 휘돌아가는 물이 바위를 저렇게 쪼개어 옮겨 놓았단다. 자연의 위력이다.
30분쯤 올라가니 철망이 보인다. 플라스틱이 입혀진 그물철망이다. 철망을 치는 것만 해도 만만찮은 돈이 들었겠다. 4년 전 열 명이서 시작했는데, 모두 손을 들을 들어버려 지금 혼자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더덕, 곰치, 장뇌삼, 고사리, 도라지, 제비꽃 등을 심어 놓았다. 제비꽃은 항암성분이 있다고 했다. 삐쭉 삐쭉 싹이 올라오는 것도 있고 제법 굵게 자란 놈도 있다. 장뇌삼 한 뿌리를 캐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아주 작지만 신기하게도 삼 모양을 띄고 있다. 이놈이 한 뼘쯤 자라려면 몇 년을 공들여 관리해야 한다. 벌통도 놓여있다.
농장을 둘러보고 나서, 양구군 해안면 펀치볼을 다녀오자고 한다. 내일 해안면 쪽으로 걸어 갈 것이지만 제4땅굴과 을지전망대는 걸어서는 갈 수 없는 곳이니 차로 오늘 다녀오자는 얘기다. 바쁜 시간을 내어 나그네를 배려해 주고 있다.
자동차로 가니 금방이다. 옛날 해안면에 뱀이 엄청 많아서 주민들이 고생을 했는데 어느 스님의 말씀을 따라 해안면의 한자를 바다 해(海)자에서 돼지 해(亥)자로 고쳐 쓴 다음부터 편하게 살게 되었다고 장선생이 얘기해 준다. 세상에는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다.
제4 땅굴 앞에 개 동상이 서있다. 충견 헌트의 동상이다. 땅굴 수색작전 당시 부대원을 대신해 산화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설명되어있다. 전시관에는 땅굴이 발견되기까지의 이야기와 6.25로 인한 피해 상황, 그리고 당시의 빛바랜 문서들이 전시되어있다.
시간에 쫒겨 을지전망대를 향해 바삐 달렸다. 구불구불 산등성이를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헌병이 검문을 하고 있다. 스무 살쯤 보이는 어린 녀석들이다.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이 고지에서 근무를 서려면 많이 힘들겠다. 높은 곳에서 해안면을 내려다보니 과연 펀치볼 형상이다.
펀치볼. 6.25때 외국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전쟁 당시 미군 비행사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주먹으로 쳐서 움푹 패인 모습이라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다. 피아간 5천명 가까운 사상자를 낸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여의도의 여섯 배가 넘는 면적이다.
전망대에 서서 남쪽과 북쪽을 번갈아 내려다본다. 눈 아래 아스라이 펼쳐지는 산천. 철조망을 경계로 둘로 뚜렸이 나누어져 있다. 저 땅은 원래 하나였다.
북녘을 바라보는 초병의 눈매가 매섭다. 저렇게 서로 눈에 핏발을 세우고 살아온 지 60년이 지났다. 얼마나 긴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하는가. 그래서 시인은 말했다.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고.
“이별이 너무 길다. / 슬픔이 너무 길다. /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올 /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 이별이 너무 길다. / 슬픔이 너무 길다. /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 연인아”
문병란 시인이 쓴 ‘직녀에게’ 전문이다.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에게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 회갑이 됐다.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말을 탈 때 딛고 오르는 돌)을 놓고 다시 만나야 한다.
인제군 서화면 천도4리 장근세 이장님. 그는 올해 마흔일곱 살이다. 학사장교 출신이다. 중위로 제대했는데 유치원 교사이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대학 1학년 딸과 중3 아들이 있다. 천도리에서 ‘페리카나’ 닭 튀김집을 아내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어둑 무렵 가게로 돌아왔다.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넉넉한 인상이다. 닭튀김을 바구니 그득하게 담아온다. 맥주도 몇 병 함께 내왔다.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 전에는 장사가 괜찮았는데 요즈음 많이 힘들어졌다고 한다. 살아가는 거야 그럭저럭 문제가 없지만 아이들 교육비가 부담이라고 했다. 딸아이가 제 몫 이상을 해주고 있어 어렵지만 힘든지 모르고 살아간다고 자랑한다. 나도 덩달아 축하해 주었다. 사람들은 마누라와 아이들 자랑하는 것을 반 푼이니 온 푼이니 경계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칭찬은 많을수록 좋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던가.
이장 수당이 얼마쯤 되냐고 묻자 민방위 대장 수당 포함하여 월 20만원정도란다. 달러로 치면 2백불 정도다. 이 마을은 90가구 340명 주민이 사는데 노인들이 많다고 했다. 어느 시골이건 젊은이들은 대부분 도시로 나가고 노인들이 동네를 지킨다.
마을을 둘러보니 큰 수퍼마켙도 보이고 식당도 여럿이다. ‘목화장’ 이라는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오늘 장선생 덕에 편하게 좋은 구경 많이 했다.
<2011년 9월 30일자 미주한국일보 기사를 보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