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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의 미술은 몇 번의 개안(開眼)과 작은 변화를 거치며 더욱 깊은 운율과 높은 격조를 건져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생명'의 우물에 두레박을 드리운 채 '색채와 운율'이라는 인양력으로 '기쁨'을 화판에 길어 올리는 것이다. "스스로를 특별한 예술가라거나, 예술을 인생을 걸고 매달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내 자신을 색채로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다. 나는 내 작품을 통해 건강한 나를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나의 체온이며 체취이기를 바라며 나아가서 나의 정신과 내면세계를 더욱 듬뿍 담아내는 나 자신이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최영훈의 작가노트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제3자의 어떠한 주석보다도 그의 회화세계를 이해하는 귀중한 열쇠가 되고 있다. 그 만큼 화가 자신의 겸허하고 꾸밈없는 고백이다. 단순한 고백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예술적 신념이 담겨 있는 것이다. 최영훈은 1947년 1월 광주 동구 남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때 형 진훈과 함께 첫 개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오지호ㆍ임직순ㆍ배동신ㆍ천경자 등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광주 서중ㆍ일고를 거쳐 1965년 조선대학교 미술과에 입학했다. 이때 임직순의 본격적인 지도를 받고 입학 당시 4학년이던 황영성을 만났다. 임직순 교수의 탁월한 지도로 그는 순수한 색채에 대한 깊은 감각을 찾아내게 되고 평생 본인을 대변하는 색채화가로서의 소양을 갖추게 됐다. 그는 탁월한 색채감각으로 60~70년대에는 자연의 대상에 탐닉했다. 이때에 화려한 색채와 자연에 대한 해석의 대상으로 '장미'와 '무등산'을 주로 그렸다. 이때부터 줄곧 그 회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음악이다. 색채의 울림이 배면에 실내악처럼 스며있다. 감수성 어린 운율을 타고서 화면에 강력한 원색은 펼쳐진다. 특히 녹색에 대비되는 적색과 황색 계통의 돌출효과를 겨냥한 그의 조형 어법에는 다분히 표현주의적 격정이 담겨 있다. 그의 청년시절을 대변하는 장미와 무등산은 원색이며, 실내악이며, 순수한 격정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최영훈은 임직순에게 화가로서의 자세를 배웠고 가장 근원적인 색채가 나올 때까지 몰입하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을 거친 뒤 몇 차례의 국전 출품과 76년 전매 대상수상을 마지막으로 모든 공모전을 떠났다. 그는 70년대 후반, 서울 롯데갤러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80년대 이후부터는 해마다 서울에서 작품전을 가졌다. 그 이후로 88년에 서울 강남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93년 풀부라이트 장학금에 의한 뉴욕대학교 연구교수로 가기까지 서울과 광주를 왕복하면서 작품제작에 몰두했다. 이렇게 청년기를 지나면서 그의 소재는 장미와 무등산을 넘어 모든 생명체로 확산됐다. 93년부터 94년까지의 뉴욕대학교 연구교수 생활은 그의 작품에 대한 모든 사고를 변화시켰다. 또다시 개안을 한 것이다.
그는 생명의 본질에 대하여 고뇌했다. 아름다움을 넘어선 곳, 그 심연에 감춰진 생명을 끌어올리고자 끝없이 몰입했다. 그때부터 그는 종래의 색채와 형태를 파괴하면서 터져 나오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틀의 파괴에서 터져 나오는 새로운 빛이 회화와 색채의 본령이었고,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 새로움에 대한 놀람과 '즐거운 전율'이 바로 최영훈의 회화였다. 이때부터 그는 회화는 평면을 벗어난, 보다 드라마틱한 입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미국생활 이후 작품이 진실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귀국 후, 그는 95년부터 97년까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그는 학장 재임기간동안 새로운 미술교육에 대하여 창조적이고 개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교과과정의 변화에 노력했다.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국대학에서 최초로 디자인 특성화 사업단을 만들었으며 교육부 지원으로 디자인 활성화에 총력을 기울여 변화를 꾀했다. 그는 늘 화가로서 누리는 즐거움을 교육자의 성실성으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005년 한국 학술진흥재단 해외 파견교수로 뉴욕대학교에 1년간 근무하게 되고 새로운 생명의 기원에 대한 탐구와 재해석을 위하여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회화의 형태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워졌으며 색채는 더욱 강렬하고 깊어졌다. 외현은 무너지고 내부는 깊고 풍성해져갔다. 그렇게 뉴욕의 연구교수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뒤 그는 더욱 깊고 새로운 생명의 신비로움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또 달라질 것이다. 그림이란 새로움으로 나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본인의 새로운 각성에 의해 다시 내밀한 속도로 나아갈 것이다. 그의 색채관은 이 세계를 '즐거움으로 물들이고 싶다.'는 낙천주의적 욕망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향유하고, 느끼고, 전율하게 함으로써, 작가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예술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남다른 열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엔 사람들이 모인다.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와 뜨거운 인간애가 그를 감싸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의 '즐거움으로 물들이기'는 강렬한 원색의 물방울들을 타고 통주저음처럼 세상 속으로 날아 들어가고 있다. 시인ㆍ문예비평가 ■ 색채ㆍ구도의 명인 최영훈 6 -연재를 마치며 '남도정신'은 살아 숨쉰다 2007년 8월 4일부터 남도의 서양화단 줄기를 타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오지호를 필두로 최영훈까지 총 66회를 연재하는 동안 수많은 질타와 격려를 받았다. 오승윤 화백에 대한 게재는 유족들의 상심으로 인해 1회로만 끝내야만 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연재하는 동안 내내 놀랐던 것은 문화수도를 지향하는 광주의 미술 맥이 전혀 정리되지 않았고 자료도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예향이라는 칭호가 부끄러웠다. 미술뿐만이 아니었다.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정리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과연 문화수도로 정착될 수 있을 것인가, 숙고하고 힘을 모아야한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특히 미술은 난맥상인데다가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워낙 큰 봉우리들이 많아 귀하고 작은 산들은 그늘에 묻히고 눌려 흔적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문화란 무엇인가. 숨 쉬는 역사며 과거와 현재가 주고받으며 달려 나가는 릴레이션이다. 선대로부터 받은 것에 현재를 덧붙여 후손에게 물려줘야만 하는 것이다. 연재하는 동안 정신의 보고들이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현장에 서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건너뛰며 손잡아주지 못한 귀한 정신의 보석들에게는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는 남도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폭넓게 다룰 생각이었으나 남도서양화라는 우물에 정신을 적시는 순간 그 깊고 푸른 맛에 넋을 잃고 다른 곳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남도문화의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리라. 풀 한포기 바람 한 자락에도 남도정신은 살아 숨 쉬고 있다. 눈 씻지 못한 자들의 방심이 이들을 놓치고 있을 뿐이다. 매양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꽃이 피고 물은 흐른다. 보지 않고 귀 기울이지 못한 자들의 죄가 크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
첫댓글 "스스로를 특별한 예술가라거나, 예술을 인생을 걸고 매달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내 자신을 색채로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다. 나는 내 작품을 통해 건강한 나를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나의 체온이며 체취이기를 바라며 나아가서 나의 정신과 내면세계를 더욱 듬뿍 담아내는 나 자신이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작가노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