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商王 여불위 11회
기화(奇貨) 가거(可居)-11
“잘 갖다 두어라. 그리고 너는 대부께 차 한잔을 준비해 올리거라.”
아침이슬은 찬찬히 목합을 정리해 가슴에 안고는 또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대부 조획은 양환옥을 보랴, 아침이슬을 훔쳐보랴 정신이 나간 듯했다. 여불위가 차를 들이라고 할 때는 조획의 마음을 다 읽어버렸다는 뜻이다.
오래지 않아 아침이슬이 찻상을 들고 들어왔다. 그 사이 또 옷을 갈아입었는지 아침이슬은 전혀 다른 맵시를 선보였다. 차에서 향이 나는지, 아침이슬한테서 나는지 대부 조획은 몸을 사르르 떨면서 코를 킁킁거렸다. 물론 아침이슬이 서역에서 들여온 향을 전신에 친 탓이다.
아침이슬은 능숙한 솜씨로 차를 달여 대부 조획에게 한잔 올리는데,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차도 초나라에서 구해온 일품으로 대부 조획으로서는 잘 마셔보지도 못한 귀한 것이다.
차 석잔을 내리 올린 아침이슬은 다구를 챙겨 또 물러났다. 그저 잠시잠깐 슬쩍 보여주고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승기를 잡은 여불위는 벌써 하직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 왕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인연이 닿는다면 대부께 맞는 보옥을 꼭 구해다 드리지요. 또 다른 손님이 양환옥을 보시겠다고 하여 약속을 해둔 터라 오래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순전히 대부 조획을 흥분시키려는 대사일 뿐이다.
“이, 이보시게. 여 대인. 그러면 얼마를 치르면 되겠는가? 5백금이면 되는가?”
“양환옥은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든 경국지색 말희가 노닐던 보옥입니다. 거기에 초나라 최고 미인으로 보옥을 지키게 하니 그 몫까지 쳐야 되지요. 양환옥과 이 미인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니, 만약 거래가 성사된다면 곧 말희와 양환옥을 함께 얻으시는 셈이지요.”
“허, 참.”
대부 조획은 눈을 감고 잠시 셈을 놓았다.
“얼마면 거래에 응하겠는가?”
“아침이슬 저 아이의 값을 치는 건 제가 아무리 장사꾼이라지만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이 미천한 장사꾼에게 노자나 좀 챙겨주시고, 저 아이 부모에게 사례하는 셈치고 계산을 해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그러면… 8백금이면 어떻겠는가?”
여불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물론 아주 감은 건 아니고 실눈을 뜨고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부 조획의 표정을 슬쩍 훔쳐보았다.
8백금이면 만족 대만족이다. 그러나 대부 조획은 거래가 안될까 초조해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면 한번 더 지를 말이 있다.
“고맙습니다. 그 정도면 체면이 서는 값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분에게도 양환옥을 보여드리겠다고 약속을 해놓은 터라 지금 당장 거래하기는 어렵겠고, 그분들을 다 만나본 뒤에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아침이슬, 밖에 있느냐? 오신다는 손님은 기별이 있느냐?”
“예, 대인. 평원군께서는 손님 만나는 일이 바빠서 조금 늦는다는 전갈이 방금 왔사옵니다.”
대부 조획이 깜짝 놀랐다. 뭐, 예상한 대로다. 놀라 자빠지라고 던진 말이니 그렇게 놀라는 게 당연하다. 평원군이 누군가. 조나라 왕도 예의로 모시는 이복동생이자 최고 권력가인 공자 승이다. 식객만 3천명을 거느리면서 조나라 조정에 인재를 공급하고, 전쟁터에 장수까지 공급하는 막강한 인물이다. 대부 조획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하늘같이 까마득한 존재다.
“이보게. 그럼 혹 천금이면 내게 양환옥을 주겠는가?”
商王 여불위 12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 12
“천금이라고요? 저야 드리고 싶지만 평원군께서 굳이 보자고 하시면 그땐 어쩌지요? 이것 참 곤란한데….”
팔 수도 있다는 은근한 말이다.
“여 대인, 보옥이 어디 양환옥 뿐인가? 호안벽도 있다면서?”
“있긴 합니다만 양환옥만 하기가 어렵지요.”
“그 정도는 돼야 우리 왕이 감동할 것이 아닌가. 이 나라 수장고에는 화씨벽까지 있는데, 적어도 양환옥 정도는 돼야 짝을 이룰 수 있는 거라네. 평원군은 어떻게 호안벽으로 달래주시게나. 여 대인이 취급하는 옥이니 호안벽도 대단한 보옥일 것 아닌가?”
“그렇기야 하지요.”
이제 거래를 매듭지을 차례다. 여기서 더 끌면 조 대부는 권세로 밀고나올 것이고, 더 어긋나면 도리어 화를 입을 수도 있다.
“저는 장사꾼입니다. 무슨 물건이든 주인만 찾아주면 제 임무는 끝나는 거지요. 아무래도 양환옥의 주인은 대부이신 것 같습니다. 천하의 평원군이라고 해도 양환옥을 직접 보지 못하셨으니 욕심을 내실 리 없고, 다른 사람이 먼저 사갔다는 데야 무슨 할 말이 있으시겠습니까? 그럼 제발이지 평원군이 저희 집에 오시기 전에 거래를 마쳤으면 합니다.”
“암, 암.”
그 날 두 시진도 못되어 대부 조획은 천금을 들고 나타났고, 양환옥과 아침이슬은 대부의 수레를 타고 바삐 떠나갔다.
여불위는 조 대부를 떠나보낸 뒤 시종하는 무사 두 명만을 데리고 한단성의 저자로 나아가 제물을 구했다. 한편으로 남아 있는 여름무지개와 푸른물결 두 미인을 위해 좋은 향과 화장품을 구했다.
여불위는 큰 거래를 마친 뒤에는 반드시 제물을 구해다 제사를 지내곤 했다. 그가 처음 시작한 게 아니고 아버지 때부터, 아니 훨씬 전부터 가풍으로 내려오는 관습이었다.
여불위는 집으로 돌아와 깨끗한 제단을 차려 좋은 음식을 진설하고 지전(紙錢)을 수북히 쌓은 뒤, 그 한가운데에 오늘 조 대부한테서 받은 천금을 올려놓고 조상신들에게 절했다.
“조상님들, 오늘도 이 거래를 성사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불위는 제사를 마치고 저자거리에서 사온 최고급 향과 화장품을 여름무지개와 푸른물결에게 주고는, 따로 5금씩 내주면서 옷이든 노리개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대로 사라고 허락했다. 이제는 이 두 미인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그새 한단성에 나아가 진나라 인질에 대해 조사를 벌이던 집사가 돌아왔다.
“대인, 그분 이름은 이인(異人)이라고 합니다.”
“이상한 놈이라고? 무슨 이름이 그래? 왜 그렇게 지었대?”
“예? 그런 것까지는 조사를 못했는데요? 본인한테 물어보지 않는 다음에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 사람아, 그런 게 궁금해져야 자네도 대상이 되는 거야. 그거 이리줘 봐.”
여불위는 집사가 뭔가 끄적여 놓은 목간(木簡)을 힐끗거리면서 말하는 걸 보고는 그걸 얼른 빼앗아 들었다. 목간의 내용은 이러했다.
성명은 영이인. 할아버지는 진나라의 소양왕, 아버지는 세자 안국군, 어머니는 하희인데 지금은 쫓겨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름. 세자비는 초나라 출신 화양부인. 형제가 자그마치 스무 명이 넘는데, 어머니가 없다는 이유로 인질로 보낸 듯하다는 것이다.
“아이고, 경쟁자가 스무 명이나 돼? 세자야 장차 왕이 된다치고, 장차 세자비인 화양부인이 낳은 자식을 세손으로 세울 것 아닌가. 그럼 그 거렁뱅이는 천덕꾸러기가 되는 셈이군. 머슴만 한 값어치도 없어. 쯧쯧.”
商王 여불위 13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 13
여불위가 목간을 집어던지자 집사는 그걸 얼른 주워들더니 지나가는 소리로 한마디 흘려냈다.
“화양부인인가 하는 세자비는 초나라 최고 미인이랍니다. 그런데 아직도 공자를 생산하지 못했다네요. 10년이 넘도록 생산을 못하는 걸 보면 아마 석녀인 듯합니다.”
“뭣이? 야, 이놈아,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왜 안 적었어?”
“아, 그 손바닥만한 목간에 몇 자나 적는다고 시시콜콜 다 씁니까? 열 자만 넘어도 먹물이 번진다구요.”
하긴 종이가 발명되려면 아직도 350년쯤 더 있어야 하니(후한 중기) 이때는 나무 조각이나 대나무 조각을 깎아 글을 쓸 때다.
“안 적은 게 또 있느냐?”
“있지요. 그 거렁뱅이는 원래 진나라 인질이라서 왕성에 살아야 하는데, 진나라하고 조나라하고 전쟁을 한 뒤로 왕성에서 쫓겨나 지금은 총대궁(叢臺宮)에 사는데, 말이 궁이지 다 쓰러져 가는 폐가랍니다. 진나라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도 없어 궁벽하기 이를 데 없고요. 지키는 사람은 대부 공손건이라는데, 늘 한가하게 지내고 있지요.”
“흠, 그래?”
여불위는 뭔가 포착한 듯한 표정이다. 맹수가 먹이를 본 것이다.
“너,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내일부터 애들을 붙여서 그 이인인가 하는 거렁뱅이가 하루종일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다 기록해라. 알았어?”
“그건 왜요? 그게 무슨 돈이 된다구요?”
“이놈아, 비단 팔아, 소금 팔아 언제 팔자를 고치느냐? 알아듣지 못하겠으면 시키는 대로나 해.”
여불위는 이튿날에는 변방에서 사들인 명마를 손수 들여다보았다. 북방에서 나는 말은 초나라나 위나라, 제나라에 가면 제값을 받을 수 있다. 말의 종류만 해도 수백종이 되기 때문에 가려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한데, 여불위는 말까지는 집사에게 맡기고 자신의 능력은 옥(玉)과 색(色)에 집중시켜왔다.
말이야 좋은 종마를 구해 교미를 붙이고 자꾸 새끼를 생산하면 값 있는 말을 생산하기 쉽다. 더러 유목민 축제인 나담에 사람을 보내 경주에서 1등 하는 말을 사들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여불위가 주력 품목으로 잡고 있는 옥과 색은 재생산이 불가능하다. 화씨벽은 천하에 단 하나만 존재하지 천년이 가도, 이천년이 가도 똑같은 옥이 나올 수 없다. 색도 그렇다. 서시는 서시 하나지 천년만년이 가도 같은 서시를 구할 수 없다. 그래서 이문이 크다.
‘그런데 왕(王)도 그렇단 말이야. 내가 왜 진작 왕을 물목으로 삼지 못했을까? 저 시원찮은 주나라 난왕 말고도 중원에는 자칭 왕이 일곱이나 되잖는가. 그간 왕 장사를 해 재미본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왕 하나만 잘 밀어도 만금을 버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장사해서 만금을 벌려면 10년이 가도 어렵다. 왕을 판다, 왕을 생산해 판다? 이게 과연 말이 되기는 되는가.’
왜 말이 안되겠는가. 춘추전국시대가 마감되기 전까지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가 무려 52개국이요, 피살된 왕과 제후만 36명이나 된다. 누군가 죽이고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세운 것이다. 왕자나 공자들이 죽은 건 하도 많아서 집계할 시간도 없다. 하물며 장수며 대부 정도의 고관들이 세력 다툼으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 얘기까지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 사이에 누군 출세하고 누군 망한 것이다.
여불위는 이인이란 상품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 한단에 열흘을 더 머물렀다. 그 사이 갖은 정보가 들어왔지만 어떤 것도 상품의 질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여불위의 일꾼들이 하루종일 미행을 한다지만 어느 가게에 들러 술을 먹더라, 시장을 한 바퀴 돌더라, 우물가에서 낮잠을 자더라, 총대궁 군사하고 바둑을 두더라, 뭐 이 따위 시시껄렁한 내용뿐이었다.
商王 여불위 <제14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14)
여불위는 결단을 내렸다.
‘물건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빠르지.’
여불위는 한단성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관상가 한 명을 초빙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 관상을 잘 보셨다가 나중에 말씀해 주시지요.”
그러고는 집사를 시켜 이인에게 바둑을 한판 두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명분은 있었다.
“우리 여 대인이 진나라 서울 함양으로 장사를 떠날 예정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함양에서는 무슨 물건이 인기가 있는지 파악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여, 진나라 사람들이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알려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예물을 갖고 찾아뵙고 바둑이나 한판 두고 싶습니다.”
예상한 대로였다. 외롭고 지쳐 있던 이인은 양책의 대상인이 보잔다는 말에 호기심을 갖고 당장 그러자고 했다.
여불위는 악 소리가 날 만큼 확실한 예물을 준비했다. 이인에게는 환금성이 있는 예물을 넉넉히 준비해 그 가치가 50금이 나가도록 꾸렸고, 또 아부를 할 겸 총대궁을 지키는 대부 공손건에게도 한단 지점에서 사들인 명마 중 서운이라는 가장 좋은 말 한 필을 끌고 갔다.
관상가를 대동한 여불위는 먼저 총대궁에 닿는 대로 공손건을 만났다. 찾아온 연유를 설명하고 예물로 서운 한 마리를 바친다고 하자 공손건은 입을 쩍 벌리며 좋아했다.
“허, 나한테까지 이렇게 좋은 말을 주시다니.”
“무슨 말씀을요. 함양에 가 장사하려면 이 정도 밑천은 들여야지요. 전 장사꾼입니다. 돈을 써야 돈이 벌리거든요.”
서운 한 마리를 받은 공손건은 쾌히 이인하고 만나도록 허락해주었다.
여불위는 이인을 만나 예물을 전하고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저는 한나라 양책 사람 여불위라고 합니다. 열국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고 있습지요. 이번에 한단성에서 장사를 마치면 양책으로 돌아갔다가 공자님의 고국인 진나라 서울 함양에 갈까 합니다. 그런데 함양을 가본 적이 없어 무슨 물건을 준비해 가야 할지, 조언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이인은 여불위가 내놓은 예물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돈에 쪼들리는 이인은 여불위가 내놓은 예물이 환금성이 좋은 물건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도 50금의 가치가 있다는 걸.
이인은 신이 나서 진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주워섬겼다.
“함양 사람들은 좋은 말과 청동검을 아주 좋아합니다. 전쟁이 많다 보니까 그렇지요. 또 책을 아주 좋아합니다. 병법(兵法), 역서(易書), 의약(醫藥) 등에 관련된 책은 굉장히 귀합니다. 그리고 구할 수만 있다면 철검이 있다면 물론 굉장히 비싼 값에 팔 수 있지요. 비단 같은 옷은 왕실에서나 입지 일반 백성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전투하거나 말을 타기 편한 가죽옷이 좋고, 갑옷도 다투어 삽니다. 옥이나 노리개, 화장품 따위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담비나 수달, 여우 모피로 치장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야 화살 한 대라도 쏠 수 있지요.”
철검은 이때 연나라와 초나라 일부에서 생산됐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 일반에 유통되지 못했고 생산국에서도 국가 기밀로 분류되어 철저히 통제되었다. 하지만 이 무렵 북쪽 흉노들은 이미 철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동북의 조선에서도 철검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검은 매우 귀한 무기였다.
이인의 얘기를 듣고 여불위는 다른 점에서 놀랐다. 그런 상품을 마련하는 게 어렵다거나 이문이 많이 나서 그런 게 아니라 함양 사람들이 구하는 게 하나같이 나라를 강하게 하는 것들이란 점이었다.
‘허, 진나라가 강한 이유가 있구나. 사치하지 않고 무기를 구하고, 책을 읽고, 검소하다니.’
商王 여불위 15회
기화(奇貨) 가거(可居)-15
얘기를 두루두루 나눈 여불위는 바둑 한판을 두자고 이인에게 청했다.
“공자께서 지시면 저하고 내일 한판을 더 두시고, 제가 지면 20금을 내겠습니다.”
“허 참, 여 대인은 참 재미있으십니다.”
여불위는 벌써 나이가 서른다섯살이고, 이인은 한참 어린 스무살이다.
바둑판을 앞에 놓고 그래도 진나라 공자인 이인이 먼저 착점했다.
바둑이라면 여불위도 어지간한 경지에 올랐는데, 이인이 두는 게 참으로 재미있었다. 이인은 도무지 싸움에 응하지 않으면서 세력을 형성해나가는 데 주력했다. 여불위는 몇 번이나 싸워보려고 돌을 밀어넣었지만 이인은 그럴 때마다 수가 여유 있는 쪽으로 피해 달아났다. 도무지 마음이 흐트러지는 게 보이지 않았다. 여불위가 잡아낸 돌을 골라 집는 데도 표정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 이놈 봐라. 제법 값이 나가겠는데?’
마치 좋은 옥이나 미인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여불위는 장사꾼의 본능으로 몸을 떨었다.
‘돌을 놓는 걸 보니 수는 짧아도 생각은 아주 정연하다. 꾀를 잘 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놈은 제 이익 때문에 날 배신하지는 않으리라. 그래, 좋은 물건이야. 사둘 만하다.’
여불위는 언변이 좋았다. 장사꾼 재주의 절반은 언변이다. 그런만큼 그는 이인에게 이런저런 열국의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런 반응 저런 반응을 살폈다. 물건에 하자는 없는지, 혹 그가 모르는 가치가 숨어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날 대국을 마치고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여불위는 관상가에게 소감을 물었다.
“어떻습니까, 공손건 대부께서는 장차 진나라 군사를 물리칠 훌륭한 장수가 되시겠지요?”
“여 대인께서 봐달라는 분이 공 대부입니까, 아니면 그 진나라 인질입니까?”
“물론 공 대부지요. 그까짓 진나라 인질이야 장사를 하기 위해 만나는 것뿐이고요.”
여불위는 실은 진나라 인질 이인의 관상을 보기 위해 그를 초빙했으면서도 짐짓 딴청을 피웠다. 양책의 거상 여불위가 진나라 인질 이인의 관상을 보러 다닌다는 소문이 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장사꾼은 사시(斜視)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 속마음을 들켜가지고는 큰 장사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시다면 말씀드리지요. 공 대부는 마음이 여려 환난이라도 닥치면 잘 극복하지 못하실 분입니다. 난세에는 버티기 힘든 분이지요. 그에 비해 여 대인이 함께 바둑을 두신 진나라 인질은 장차 극귀할 상으로….”
“아, 그 거렁뱅이 인질에 대해서야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말하리라는 걸 꿰뚫어보고 하는 말이다.
“아닙니다. 보기 드문 관상으로 저는 왕상(王相)을 보았습니다.”
“왕상은 무슨 왕상입니까, 곧 조나라 왕께서 죽여버릴 텐데요.”
“안그렇습니다. 천하가 그 얼굴에….”
“전 공 대부 관상이 궁금해 선생을 초빙했습니다. 공 대부에 대해서만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사실 공 대부의 아드님들이 탐나서 사돈을 맺고자 합니다만.”
여불위는 수많은 처첩을 거느린 만큼 실제로 딸이 많았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공 대부의 수(壽)가 그리 길지 못한 듯합니다.”
“그래요?”
여불위는 더 묻지 않았다. 수가 길든 짧든 관심도 없다. 그러나.
“수가 짧다, 수가 짧다. 허, 이런.”
여불위는 탄식을 하면서 관상가를 배웅했다.
핵심은 이미 들었다. 이인의 관상이 왕의 상이라잖는가.
관상가가 멀리 사라지자 여불위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됐어!” 하고 소리쳤다. 관상가가 제 명성대로 잘 보았다면, 이인의 품질은 틀림없는 것이다.
商王 여불위 16회
기화(奇貨) 가거(可居)-16
여불위는 그래도 관상가의 판단만을 믿지 않고 자신이 더 나서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기를 열흘, 여불위는 상품에 대한 감별을 마치고 일어섰다.
“공자님, 저는 장사꾼이므로 다른 건 도와드릴 수 없어도 필요하신 재물만큼은 챙겨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편안하게, 몸 성히 계십시오. 반년쯤 지나 다시 한단에 오겠습니다. 그때 좋은 선물을 준비하지요.”
“고맙습니다, 여 대인. 대인을 뵈니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싶습니다. 지난 5년간의 간난신고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와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요? 전 장사꾼입니다. 장사꾼으로서 함양에 가는 데 필요한 정보를 공자님한테서 얻었을 뿐입니다. 공자님께서 알려주신 정보만으로도 저는 경비를 아끼고 대신 큰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여불위는 일단 이인이라는 상품에 눈도장만 찍어두고 일어섰다.
그 사이 양책에서 가져온 남방의 진귀한 물건들을 대부분 팔았고, 조나라에서 사들일 만한 물건은 다 사들였기 때문에 더 머물 시간이 없었다. 그는 수레 수십여 대를 이끌고 한단성을 떠났다. 물론 호안벽과 여름무지개, 푸른물결 두 미인은 도로 수레에 태웠다. 불덩이도 양책으로 데려가 더 다듬어 보려고 특별히 챙겼다. 보옥이든 미인이든 한 나라에 한 개씩, 한 명씩 팔면 그것으로 장사는 끝이다. 더 팔면 값이 떨어져 다음에 장사를 못한다.
‘흠, 뭔가 오고 있어. 질풍처럼 밀려오는 이 운기를 나는 느낄 수가 있어.’
하긴 좋은 옥을 처음 만날 때마다 여불위는 장사 이익을 떠나 옥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즐거웠다. 장사꾼은 자기 자신이 상품에 매력을 느끼고 반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그런 거라면 여불위는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좋은 옥을 보기 위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 적도 있고, 마음에 쏙 드는 미인을 차지하기 위해 빚을 내기도 했다. 하긴 욕심이 있어야 활기가 나는 법이다. 진나라 볼모는 아직 그 가치를 계산할 수는 없지만, 화씨의 두 발이 잘리도록 평범한 돌로 취급당하던 화씨벽이 세공을 하고 나서야 마침내 천하제일의 옥이 되었던 것처럼, 그 이인이라는 진나라 왕손은 잘만 다듬으면 분명 뛰어난 보배가 될 것만 같았다.
한단성을 나서니 흰구름이 두둥실 떠 남쪽 한나라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한단성 장사는 참 잘됐다.’
다른 건 다 그만두고라도 양환옥을 판 것만으로도 장사는 잘한 셈이다. 양환옥이라고 해야 원석값은 10금이었다. 다만 그것을 가공한 옥쟁이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세공사였다. 또 아침이슬만 해도 영성이 아닌 동해 바닷가 회계 출신이기는 하나 그간 두 해가 넘도록 직접 다듬은 끝에 제대로 짝을 찾아준 것이다.
하지만 여불위는 이문이 크게 남은 것으로 희희낙락해하거나 거래를 끝내지 않았다. 그는 조만간 조획 대부의 어엿한 첩이 될 초나라 미인 아침이슬에게 무려 50금어치의 호사품을 선물로 안겨주었다. 따로 50금을 족제비 가죽주머니에 넣어 허리에 채워주기도 했다. 부인이든 첩이든 그 집안 내에서 위치를 튼튼하게 잡아 나중에라도 큰손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여불위는 그렇게 해놓으면 아침이슬이 평생이 가도록 천금어치는 안사겠느냐는 계산을 튕긴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부 조획이 억울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백금을 따로 풀어 한단성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리와 콩, 그리고 옷가지를 나누어 주었다. 수천명이 이 혜택을 입었는데, 다 대부 조획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사재를 털어 나누어주는 것이라고 소문냈다. 물론 알 만한 사람들은 그것이 모두 여불위라는 한나라 장사꾼이 한 일임을 다 알았다. 그래도 대부 조획에게 공덕이 쌓인다. 그렇게 뒷정리까지 했으니 다음에 한단성에 다시 가더라도 여불위는 조 대부의 환영을 받는 것이다. 여불위는 적어도 이 정도의 장사꾼이었다.
商王 여불위 <제17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17)
여불위는 한단의 집사가 모아온 진나라 인질 이인에 대한 정보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고향 양책으로 수레를 달렸다. 전쟁이 그칠 줄 모른다지만 조나라에서 위나라를 거쳐 한나라로 돌아가는 길은 평화롭기만 했다. 복잡한 건 언제나 인간의 마음일 뿐 천하는 여여할 뿐이다. 하긴 왕조가 흥하든 망하든 장강이나 황하가 미동이나 했던가.
한 달여 걸려 본가에 도착하니 거긴 거기대로 새로 들어온 물산이 산 같이 쌓여 있었다. 또 여불위 같이 안목 있는 장사꾼이 조나라에서 무슨 물산을 들여왔나 하여 벌써 큰손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조나라산 모피는 인기가 많아 찾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여불위는 먼저 가묘에 들러 조상들께 엎드리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를 찾아가 절을 올렸다. 그러고는 안부를 물은 뒤 진나라 인질 건을 에둘러 물었다.
“아버지, 평생 얼마나 버셨습니까?”
“천금을 모았지. 그땐 천금이라면 엄청나게 큰돈이었지.”
“아버지, 저는 그 천금을 한단에서 단 한 번의 거래로 벌어들였습니다.”
“그래? 네가 자랑스럽구나.”
“그런데 거래가 끝난 뒤 제 손님을 위해 2백금을 썼습니다.”
“흠. 너는 타고난 장사꾼이구나. 2백금이란 큰돈을 벌기도 힘든데 그걸 눈 딱 감고 다 썼다 이 말이지?”
“예, 아버지. 한단성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과 옷가지를 사서 그 손님 이름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관문을 드나들면서 뜯긴 돈도 많겠지?”
“거쳐야 할 나라가 많다 보니 이번에는 모두 50금을 썼습니다. 약소하지요.”
세금이 없던 시절에 천금을 벌고 세금으로 50금을 낸 셈이다. 그래도 요즘의 부가가치세보다는 싸다. 헛, 이 정도로도 옛날에는 가렴주구라고 하여 혀를 내둘렀는데 세금은 지금이 훨씬 더 가혹하다. 부가세에 유류세에 종합소득세 등등 움직일 때마다 세금이 붙는 게 요즘 세상이다.
“거, 정말 잘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먹고사는 거야 지장이 없지만 대부만 해도 수천 금은 줘야 통하는 세상인데, 우리 재산으로 이 시국에 어디 목숨이나 보전하겠습니까?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잖습니까.”
“그래?”
“진나라는 지금 조나라를 아주 잡아먹으려고 벼르고 있답니다. 진나라 군사는 무섭기가 맹수와 같다니까요. 연(燕), 제(齊), 초(楚)는 숫제 날 잡아 잡수 하고 포기한 듯하고, 우리 3가(趙, 韓, 魏, 3국)만이 국방을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러니 장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나라야 망하건 말건 우리 가문만 튼튼히 지키면 된다.”
“나라가 망하는데 어떻게 우리 가문만 온전할 수 있습니까. 아버님, 지금이라도 나라에서 군사로 나오라고 하면 저도 꼼짝없이 끌려가야 할 판인데요. 군사 안 나가려고 쓴 돈만 백금이 넘습니다. 제가 암만 돈이 많으면 무엇합니까? 전장에 나가 화살 한 방이면 끝이 날 텐데.”
“그러니 목숨을 살 만큼만 벌어놓으면 그래도 안심은 된다.”
“아버님, 그것도 안심하긴 이릅니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돈 뜯기는 것도 지겹고 쥐새끼 같은 것들이 대부랍시고, 장수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도 보기 싫습니다.”
“그럼 네가 나라를 세우거라. 아득한 남방이나 머나먼 북방에.”
“우리 재산으로 어디에 나라를 세웁니까? 10만 군사를 먹여살리려 해도 그 돈이 얼만데요. 가진 돈 다 털어도 나라는 못 세웁니다.”
“그러니 그만한 돈을 벌어 저 북쪽의 흉노를 끌어모아다가 약해빠진 나라 하나를 골라 냅다 치든지.”
商王 여불위 <제17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17)
여불위는 한단의 집사가 모아온 진나라 인질 이인에 대한 정보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고향 양책으로 수레를 달렸다. 전쟁이 그칠 줄 모른다지만 조나라에서 위나라를 거쳐 한나라로 돌아가는 길은 평화롭기만 했다. 복잡한 건 언제나 인간의 마음일 뿐 천하는 여여할 뿐이다. 하긴 왕조가 흥하든 망하든 장강이나 황하가 미동이나 했던가.
한 달여 걸려 본가에 도착하니 거긴 거기대로 새로 들어온 물산이 산 같이 쌓여 있었다. 또 여불위 같이 안목 있는 장사꾼이 조나라에서 무슨 물산을 들여왔나 하여 벌써 큰손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조나라산 모피는 인기가 많아 찾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여불위는 먼저 가묘에 들러 조상들께 엎드리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를 찾아가 절을 올렸다. 그러고는 안부를 물은 뒤 진나라 인질 건을 에둘러 물었다.
“아버지, 평생 얼마나 버셨습니까?”
“천금을 모았지. 그땐 천금이라면 엄청나게 큰돈이었지.”
“아버지, 저는 그 천금을 한단에서 단 한 번의 거래로 벌어들였습니다.”
“그래? 네가 자랑스럽구나.”
“그런데 거래가 끝난 뒤 제 손님을 위해 2백금을 썼습니다.”
“흠. 너는 타고난 장사꾼이구나. 2백금이란 큰돈을 벌기도 힘든데 그걸 눈 딱 감고 다 썼다 이 말이지?”
“예, 아버지. 한단성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과 옷가지를 사서 그 손님 이름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관문을 드나들면서 뜯긴 돈도 많겠지?”
“거쳐야 할 나라가 많다 보니 이번에는 모두 50금을 썼습니다. 약소하지요.”
세금이 없던 시절에 천금을 벌고 세금으로 50금을 낸 셈이다. 그래도 요즘의 부가가치세보다는 싸다. 헛, 이 정도로도 옛날에는 가렴주구라고 하여 혀를 내둘렀는데 세금은 지금이 훨씬 더 가혹하다. 부가세에 유류세에 종합소득세 등등 움직일 때마다 세금이 붙는 게 요즘 세상이다.
“거, 정말 잘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먹고사는 거야 지장이 없지만 대부만 해도 수천 금은 줘야 통하는 세상인데, 우리 재산으로 이 시국에 어디 목숨이나 보전하겠습니까?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잖습니까.”
“그래?”
“진나라는 지금 조나라를 아주 잡아먹으려고 벼르고 있답니다. 진나라 군사는 무섭기가 맹수와 같다니까요. 연(燕), 제(齊), 초(楚)는 숫제 날 잡아 잡수 하고 포기한 듯하고, 우리 3가(趙, 韓, 魏, 3국)만이 국방을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러니 장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나라야 망하건 말건 우리 가문만 튼튼히 지키면 된다.”
“나라가 망하는데 어떻게 우리 가문만 온전할 수 있습니까. 아버님, 지금이라도 나라에서 군사로 나오라고 하면 저도 꼼짝없이 끌려가야 할 판인데요. 군사 안 나가려고 쓴 돈만 백금이 넘습니다. 제가 암만 돈이 많으면 무엇합니까? 전장에 나가 화살 한 방이면 끝이 날 텐데.”
“그러니 목숨을 살 만큼만 벌어놓으면 그래도 안심은 된다.”
“아버님, 그것도 안심하긴 이릅니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돈 뜯기는 것도 지겹고 쥐새끼 같은 것들이 대부랍시고, 장수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도 보기 싫습니다.”
“그럼 네가 나라를 세우거라. 아득한 남방이나 머나먼 북방에.”
“우리 재산으로 어디에 나라를 세웁니까? 10만 군사를 먹여살리려 해도 그 돈이 얼만데요. 가진 돈 다 털어도 나라는 못 세웁니다.”
“그러니 그만한 돈을 벌어 저 북쪽의 흉노를 끌어모아다가 약해빠진 나라 하나를 골라 냅다 치든지.”
商王 여불위 18회
기화(奇貨) 가거(可居)-18
물론 농담으로 하는 말이다.
“그건 계산이 안나와요. 왕들이 제 돈으로 군사를 먹이고 입힙니까? 다 백성들 돈 뜯어다가 호들갑떠는 거지. 벌어서 한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하긴 수천억원이 드는 선거 자금을 제 통장에서 꺼내 쓰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미국에도 없다. 다 있는 놈 주머니를 재주껏 털어 쓰는 것이다.
“그럼 왕이 될 수 없는 놈을 밀어 왕으로 올려세우거라. 그러면 하다 못해 대부 벼슬쯤이야 하나 못 얻겠느냐?”
“중이처럼 떠돌아다니는 공자도 없는 세상인데 누굴 세웁니까? 춘추시대라면 몰라도 지금은 어림없습니다. 고민입니다, 고민.”
“하긴 내 재주라는 것도 장사꾼 재주에 불과하니 그저 천금을 모은 부자로나 사는 거지 다른 수를 내지 못했다. 다만 너는 좀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한 백만금을 모아보거라.”
“휴…. 참 세상 살기 어렵습니다.”
여불위는 아직 마음을 잡지 못했다. 좀더 조사를 해봐야 했다.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비록 아버지라도 아직은 흉중의 비밀을 털어놓을 단계는 아니다. 흉중에 비밀이 많은 장사꾼일수록 이문도 많이 본다.
밤새 고민하던 여불위는 이튿날 믿을 만한 양책의 집사를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그에게 1백금을 쥐어주고는 밀령을 내렸다.
“너, 쥐도새도 모르게 함양성에 들어가 진나라 세자 안국군의 자식들에 대해 조사해 오거라. 어느 놈이 똑똑한지, 몸이나 정신이나 장애인은 없는지, 안국군의 총애를 받는 자식이 누군지, 안국군의 비인 화양 부인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무슨 보석을 좋아하고, 누구하고 자주 만나는지, 하여튼 모을 건 다 모아 오너라.”
“그런 정보를 모아 무얼 파시게요? 조나라에서 팔지 못한 호안벽을 화양 부인에게나 팔게요?”
“호안벽은 잘해야 천금이다. 난 그것보다 까마득히 더 비싼 물건을 팔려고 한다. 그러니 안국군과 화양 부인 두 사람에게 관계된 것이라면 먼지 하나라도 털어오고, 세자 궁에서 들리는 소리는 고양이 울음소리까지 담아와라. 알겠지?”
“그러믄요. 이런 일을 어디 처음 하나요?”
그랬다. 여불위는 장사를 떠나기 전에 집사와 식객들을 먼저 보내 그곳 사정을 미리 탐지했다. 누가 물건을 살 만한지, 무얼 팔아야 할지 미리 알아보고 짐을 꾸리는 것이다.
이번에 조나라 대부에게 양환옥을 판 것도 실은 6개월 전에 이미 여불위의 식객들이 가서 조사해온 정보를 토대로 성사시킨 것이었다. 대부 조획이 눈독을 들인다는 것쯤은 미리 알고 있다가 적기에 팔아버린 것이다. 뭐든 거저되는 건 없다.
여불위의 아버지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엉뚱한 욕심을 냈다.
“아들아, 그나저나 너 못보던 계집 하나 달고 온 듯하더라만 이 애비 주려고 사온 거냐?”
여름무지개와 푸른물결은 양책에도 머문 적이 있었으므로 여불위의 아버지가 말하는 아이는 보나마나 불덩이 아니면 소나기다.
“그 아이는 저 북쪽 유목민 출신이라 야생마처럼 거칩니다. 아버님은 하룻밤도 못 품을 계집이니 다른 생각 마십시오. 저도 하룻밤 자고 사흘을 꼼짝 않고 쉬었습니다. 그러니 아버님, 낙양 왕성에서 곱게 자란 아이를 하나 사다 드릴 테니 제 계집들은 넘보지 마십시오. 저 애들은 제 상품이라고요. 돈이고요.”
“암암, 속살 하얗고, 잘 웃는 예쁜 계집으로 사다 다오. 늙으니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더듬는 게 더 좋아.”
여불위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침소로 들었다. 부인과 첩들이 늘어서서 읍을 했지만 그는 이번 장삿길에 사온 야생마 소나기를 불렀다.
商王 여불위 19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 19
불덩이는 이제 여름 무지개와 푸른 물결이 하던 대로 학습을 시켜야 했다. 학문과 예절을 익히고 방술 양생까지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양책의 저택에는 방술과 예절 등 각 분야의 선비들이, 혹은 기술자들이 수십명이나 있었다. 이제 불덩이는 한 단계 더 가다듬기 위해 당분간 참아야 했다.
“소나기를 들여라.”
여불위의 부름을 받은 여자는 북쪽 변방 이름으로 그저 소나기라고 하는 소녀였다. 성도 없는 그네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불렀다. 태어날 때 소나기가 내렸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그런데 여불위가 그 소녀를 사 하룻밤을 지내보니 소나기란 꼭 하늘에서만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침대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절정에 이르기가 무섭게 소나기의 옥근에서는 우윳빛 같은 물줄기가 한 자는 솟구치곤 했다. 그러니 그 입구인 옥근을 자신의 양근으로 단단히 틀어막지 않으면 옷이고 침대고 다 젖어버리는 것이다.
여불위는 지금 중대사를 앞두고 한가하게 계집이나 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지 깊이 생각하기 위해 여자가 필요했고, 그러자면 격정적인 소나기가 제격이라고 믿은 것이다.
여불위는 큰 계획을 세우는 방식이 독특했다. 옛날 사람들은 작문삼상(作文三上)이라고 하여 글을 쓸 때 가장 깊이 골몰할 수 있는 장소 세 곳을 들어 말했는데, 마상과 침상과 측상이다. 말을 타고 갈 때, 혹은 침대에 누워 잠들기 직전, 혹은 변소에 앉아 있을 때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불위는 있는 힘껏 정기를 발산하고 나서 숨을 헐떡거리며 여상(女上)하여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는 흠뻑 젖은 소나기를 끌어안고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영이인, 이 기화를 어떻게 다듬어야 백만금 천만금이 나가는 보배로 만든단 말인가.’
여체를 안고 있으면 몸이 아늑해지면서 피로가 풀리고, 정신이 또렷해진다.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도 좋고 보약을 마시는 것도 좋지만 봄빛이 무르익은 듯한 여체에 몸을 깊이 묻고 있으면 이른 봄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듯 저절로 원기가 솟구친다. 꿈틀거릴 때마다 힘이 쭉 뻗치고, 살고 싶고, 뭔가 이루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소나기 같은 어린 소녀는 보약 중의 보약이다.
여불위는 소나기의 가느다란 호흡과 뛰는 맥박을 느끼면서 진나라 인질 영이인을 어떻게 가공해 팔아야 할까 궁리했다.
‘누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을까…. 7국 중에 진나라가 가장 힘이 세다. 제나라와 초나라는 너무 약하다. 연나라와 위나라는 남을 병탄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 남은 것은 진나라와 조나라. 진나라는 백만 군대를 출병시킬 만하고, 조나라는 방어할 수 있는 군사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백년 안에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사는, 천하 판세를 결정짓는 대전쟁이 일어난다. 그때 가서는 수십만금의 부자로도 살아남지 못한다.’
여불위는 밤새 고민했다. 그의 품에 안긴 소나기만 언제 또 손길이 미칠지 몰라 혼자 쌔근거리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생각을 정리한 여불위는 다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 농사를 지으면 몇 배나 이익을 보지요?”
“열 배는 보지. 한 말 심어 한 가마 거두는 거지.”
“보물 장사를 하면요?”
“잘하면 백배까지도 이익이 생긴다. 네가 연환옥인가를 십금 들여 천금짜리로 만들잖았니?”
여기까지는 여불위도 알지만 아버지의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 끌어댄 문답이다.
이제 본론이다.
“만일 누군가를 도와 일국의 왕으로 세우고 그 나라의 정권을 잡는다면 그 이익은 몇 배나 될까요?”
商王 여불위 20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 20
“글쎄, 천배나 만배? 아니 그 몇 배. 어이구, 그걸 어떻게 따지느냐?”
여불위는 힘주어 말했다.
“아버지, 제가 사람 장사 좀 하렵니다. 그동안 번 돈을 거기 투자할 테니 절대 묻지 마시고, 소문도 내지 마십시오. 상(商)의 극에 이르러 보고자 합니다.”
“상(商)의 극이라. 그럼 상왕이 되겠다고? 오라, 네가 옥과 색만을 다루지 않고 왕도 만들어 보겠다, 이 말이구나? 너, 제법 큰 장사꾼이 됐구나. 나라면 감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네가 그런 꿈을 꾼다니 힘껏 응원하겠다. 원석은 무엇인고?”
아무리 좋은 옥이라도 처음에는 흔한 돌처럼 보이는 법이다. 눈 있는 자만이 그걸 알아볼 뿐 범인은 아무리 오래 봐도 잡석으로 보인다.
“아버지, 절대 입밖에 내시면 안됩니다. 지금 조나라 서울 한단에 화씨벽의 천배, 만배, 아니 천만배 나가는 원석이 있습니다.”
“호, 그렇게나 좋은 보석이? 대체 뭔데 그러느냐?”
“진나라 왕손 영이인이란 인질입니다. 그런데 양국간에 전쟁이 잦다 보니 이 인질은 대접을 못 받는 천덕꾸러기로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이인의 아버지는 진나라 태자인데, 태자비인 화양 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석녀입니다. 마침 영이인의 생모는 죽고 없으니 어떻게든 화양 부인의 양자가 되도록 할 참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영이인은 태자의 자식으로 장차 태자로 책봉될 것이고, 언젠가는 왕이 되는 것 아닙니까.”
“흠, 영이인이란 인질이 화양 부인의 양자로 들어간다면 너는 백배 이익을 볼 것이고, 그가 태자로 책봉된다면 너는 천배 이익을 볼 것이고, 그가 왕이 된다면 만배 이익을 볼 것이다.”
여불위가 만일 이인을 위해 돈을 쓰기로 작정한다면 적어도 10만금은 써야 하니, 그러면 그 이익은 10억금이나 된다는 말이다. 이 정도라면 전국시대 일곱 개 나라 중 하나 정도의 나라를 통째로 살 수 있는 국부(國富)보다 더 많고, 전·노 두 대통령이 해먹은 것보다 많다.
“아버님 말씀을 새겨듣겠습니다.”
“한 마디 더 들어야지. 이익만 따지고 손해를 계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장사는 그것이 옥이든 모피든 말이든 칼이든 밑져야 본전이고, 크게 손해를 본다고 해도 겨우 몇 십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왕이 포악하거나 은혜를 모르거나 방탕하거나 교활하다면 본전은커녕 재산도 다 잃고, 종국에는 목숨까지 잃고, 나아가 처자와 구족이 다 죽을 수도 있다.”
줄을 잘못 서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역사는 수많은 현장 학습을 시켜주었다. 가깝게는 이회창 후보에게 줄섰다가 교도소로 직행하거나 금배지를 잃은 사람 등등 사례는 부지기수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을 지지하는 패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패가 붙어 결국 도요토미 계열의 성주들과 장수들은 한 날 한 시에 일제히 죽어야 했다. 이처럼 영이인이 과연 태자의 적자로 입적될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왕손들의 반격으로 목숨을 잃게 될지 알 수 없다. 권력 투쟁은 시작도 안한 상태다.
또 잘해서 영이인이 태자의 적자로 들어갔다 쳐도 뒷일을 보장할 수 없다. 그의 아버지 안국군이 수십년간 죽지 않고 왕위를 지키는 날이면 그 동안 권력 투쟁에 휘말릴 수 있고, 태자로서 위험한 전쟁에 나가지 않을 수 없으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고도 어찌어찌 왕이 되었다 치자. 과연 왕이 된 영이인이 여불위의 고마움을 알아줄까. 왕이 되고나면 으레 공신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초기에 거세해버리는 게 춘추전국 시대의 관행이다. 일단 왕이 되면 장사꾼하고 맺은 약속쯤 어겼다 해서 탄핵받을 일도 없고, 도덕적으로 나무랄 사람도 없다. 공자나 맹자를 변호사로 세워도 여불위가 이길 방법은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