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는 살 수 있겠냐” 허구헌날 방 안에서 책만 읽는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렇게 묻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것만이 삶의 즐거움이던 아들 역시 대학 시절까지 자신이 도대체 뭘 해서 먹고살 수 있을지 몰랐다. 단지 좋아서 책을 읽고, 책을 곱씹어 글을 썼다.
책, 책, 책… 책 이야기만 한다
그, 표정훈(36)은 이제 ‘표정훈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책벌레’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정평이 난 출판평론가다. 당연히 그를 찾는 곳이 많아 지난해 내내 1달 평균 12~13편의 서평을 쓰고, 일주일에 6개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책 이야기를 했으며, 독서를 주제로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중국 철학과 사상에 관심이 많아 그와 관련한 책을 여러 권 쓰거나 번역했고, 그에게 출판기획과 관련된 조언을 구하는 출판사들도 많다. 그리고 그의 아파트에는 7천여권의 책이 함께 살고 있다. “편집증적으로 책에 대해 계획을 세워놓고 읽은 책에 대해 기록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지금도 해외 사이트까지 헤매다니며 우리나라에서 번역했으면 좋겠다 싶은 책 목록을 만들어둔다. 읽는 것도 좋지만 원하는 책을 만나기만 해도 냄새를 맡아보고 행복해할 만큼 책 자체가 너무 좋다.” 그처럼 출판평론가, 도서평론가, 출판칼럼니스트 같은 직함을 가지고 책을 소개하며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는 전문 ‘책벌레’들이 이제 방에서 나와 세상 밖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이권우, 최성일, 한기호, 임지호, 강유원, 한미화, 김지원, 박천홍이 쓰는 책 이야기나 출판계 소식은 이제 왠만큼 책을 좋아하는 열혈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70년대가 문학평론가의 한 시대였고, 90년대가 영화평론가의 무대였다면 2000년대는 출판평론가들의 시대가 되고 있다.
돌아보면 불문학자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나 소설가 장정일의 〈장정일의 책읽기〉처럼 책읽기를 주제로 한 시대를 매혹시켰던 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현이나 장정일이 문학을 연구하고 소설을 쓰면서 ‘부업’으로 서평을 썼던 데 비해 최근 등장한 출판평론가, 도서평론가들은 서평으로 먹고사는 프로 독서가들이다. 이들은 이전의 문학평론가나 소설가들에 비해 훨씬 대중을 염두에 두소 쓴 다양한 서평을 내놓고 있다.
표정훈씨는 “오랫동안 언론매체에 글을 쓰려면 교수나 사회적 명사여야 한다는 ‘장벽’이 높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대중들이 대중문화에 열광하게 되면서 장벽이 많이 낮아졌다. 영화평론을 중심으로 한 문화비평이 엄청나게 늘었고, 출판계에서도 문학의 지위가 하락하고, 정통 학술서가 아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대중적 교양서들이 주목을 받았다. 예전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쓴 서평에 대해 ‘뭐야, 학위도 없고 전공도 안 했으면서’라는 비판이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또 “지금 출판평론가들의 역할은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급 정보를 골라주는 것이다.
△ "표정훈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책벌레"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책과 함께 살며 책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사진/ 박승화 기자).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한미화씨, 이권우씨(사진/ 스카이라이프 정용일 기자)도 출판시장, 어린이 책, 문학, 인문서에 대한 글들을 통해 대중과 책 사이를 이어주고 있다(왼쪽부터).
독서평론가들은 지금 당신이 이것을 읽으면 이런 점에서 재미있고, 이런 지식정보를 얻을 수 있고 쓸모도 있다는 식으로 독자들이 원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대화를 한다.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학자들처럼 깊은 것은 아니지만 한 분야에만 집중해 어렵게 쓰지 않고, 친절한 글로 다양한 책과 독자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점이 호소력을 얻고 있다”고 최근의 흐름을 설명한다. 이들 평론가들의 ‘대부’격인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열린 감성과 직관을 중요시하는 매트릭스 사회에서는 전통 사회에서 중시하던 문·사·철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책읽기가 중요하다. 대중사회는 요약을 원한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증도 크다. 수많은 컨텐츠를 자유롭게 바라보고 연결하고 요약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독서·출판 평론가들이 각광받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이 스타평론가 배출
2000~2001년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들 독서평론가들은 대부분 서적광, 서적애호가라는 뜻의 ‘비블리오파일(bibliophile)’들이다. 표정훈씨는 수많은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영어, 중국어, 일본어 실력을 가지게 돼 번역가로 활동하다 “2000년 9월 일간지에 서평을 쓰기 시작하니 여기저기서 청탁이 몰려들어 졸지에 평론가가 됐고” 이권우, 최성일씨는 국문학을 전공하고 〈출판저널〉을 통해 출판계로 들어온 뒤 전문적으로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와 〈이크와 각주의 책읽기〉 등을 낸 이권우씨는 “책 읽고 쓰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책이라는 이름의 성채에 머물 때면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가 있는 듯 편안했다. 사람들이 집에 책을 몇권 가지고 있냐고 묻는데 그런 거 세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 어쨌든 가지고 있는 책의 10%만 읽어도 박사될 정도”라고 말한다. 문화일보에 ‘사서 읽은 책’ 코너를 연재하고 있는 강유원은 한 회사의 웹마스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밤에는 공부하고 강의하는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80권의 책을 도발적으로 평한 서평집 〈책〉을 내놓기도 했으며 “책은 직접 내 돈 주고 사서 읽고, 냉철하고 날카롭게 비판한다”는 원칙을 지키며 독특한 서평을 쓰고 있다.
이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책을 이야기하는 무대가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 〈TV 책을 말하다〉 〈즐거운 문화읽기〉〈라디오 책세상〉 같은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앞다투어 독서 프로그램 또는 책 관련 코너를 만들었고, 일간지마다 거의 잡지에 가까운 정도로 방대한 북섹션들을 내놓기 시작했으며 잡지, 웹진들까지 책 관련 코너를 마련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은 많지 않은 평론가들이 한 사람당 일주일에 열 개가 넘는 서평을 쓰거나 방송을 맡다가 과로로 몸져 눕는 사태가 잇따르기도 했다.
인터넷 역시 이들이 활동하는 주요한 공간이다. 표정훈씨가 운영하는 출판사 궁리의 사이트(www.kungree.com)에는 역사, 철학과 관련된 책 정보들과 책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창립 멤버로 편집장과 웹마스터로 활동한 뒤 프로메테우스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는 도서평론가 임지호씨 역시 개인 홈페이지 리드 오어 다이(www.readordie.net)를 통해 꼼꼼하게 새로 나온 책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평을 올리고 있다. 강유원씨의 홈페이지(armanius.net/ex_libris)에서는 주로 학술, 인문서에 대한 실랄한 평들을 볼 수 있다.
인터넷은 또한 보통 사람들을 ‘아마추어’ 평론가로 만들고 또 그 중에서 스타 독서평론가를 발굴해낸다. 웬만한 인터넷 서점마다 일반 독자들의 서평을 보여주는 북로그, 나의 서재, 서재의 달인, 리스트의 달인, 리뷰의 달인 같은 코너를 선보이고 있다. 소수가 책에 대해 훈계조로 이야기하던 시대는 가고,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책에 대해 평가하는 시대다. 그 가운데 ‘조금 내공이 있어 보이네’ 하는 평을 받으면 각광받는 온라인 평론가가 되기도 한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가영아빠’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그림책 읽어주는 남자’로 유명해진 류증희(33)씨는 “학사 장교 시절 백혈병으로 투병하면서 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동안 그림책 읽는 재미를 뒤늦게 깨닫게 되면서” 진솔하고 핵심을 짚은 어린이책 평을 올려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글은 〈하하 아빠 호호 엄마의 즐거운 책고르기〉라는 책의 일부로 묶여 나왔고, 지금은 ‘가영이랑 은수랑’(kidbook.co.to)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그림책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서평을 담고 있다.
사상최악의 출판시장 불황 속에서…
류증희씨의 전문 분야가 어린이책이라면 다른 출판·도서 평론가들 역시 ‘전문 분야’가 있다. 박천홍씨는 역사, 이권우씨는 문학과 인문, 표정훈씨는 철학과 사상, 한기호씨는 베스트셀러와 실용서, 변화와 트랜드, 한미화씨는 어린이책, 여성을 독자로 하는 실용서적, 문학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평을 쓴다. 정재승씨는 과학전문 서평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 출판평론가들은 책을 평론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출판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고, 출판사의 기획위원으로 일하면서 새로운 책의 생산자가 되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쌓을 수 없는, 오랜 세월 책벌레로 다져온 이들의 책에 대한 감각을 원하는 출판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권우씨는 사계절 청소년 시리즈와 단행본 기획자이며, 표정훈씨는 출판사 휴머니스트와 궁리의 출판기획자도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한권 한권의 책에 대한 평을 넘어 책이 만들어지는 세계인 출판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기도 하고, 출판계의 현실과 흐름, 제도와 현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지난 3월26일 오후 서울 신촌의 출판마케팅연구소 사무실에서 한기호 소장과 도서·출판 평론가 이권우, 한미화, 이면희씨, 번역가 강주헌씨 등이 모여 출판계와 어린이책에 대한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금요일마다 모여 요즘 무슨 책을 읽었는지, 출판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애들 책은 왜 꼭 하드커버여야 하는 거야? 오히려 너무 무겁고, 다칠 수도 있잖아?” “다들 유명 그림작가들에게만 몰려가니 어린이책 그림 하나 그리는 데 2년씩 기다려야 하고 비용도 외국의 유명 작가에게 맡기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이제 새롭고 신선한 작가들을 발굴해야 하는 것 아니야?” “애들에게 강제로 책 500권을 읽게한 뒤 4지선다형 시험을 봐서 등급을 매기는 독서능력검증시험이란 게 생긴대. 그것도 일부 교사들이 나서서 한다는데, 도대체 이런 무책임한 독서교육이 어딨어?” “어린이책이 엄청 호황이라고 했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호황을 맞고 나서 그것을 이어나갈 힘이 없는 것 같아.” 영화평론가들이 뜨던 90년대 초는 바야흐로, 문학의 시대가 가고 영화의 시대가 오던 때였다. 그러면 출판평론가들이 뜨는 2000년대에 책의 시대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들에 따르면 단기적으로 올 상반기만 본다면 그런 기대와는 반대로 출판시장은 정말 심각한 사상 최악의 불황을 겪으며 얼어붙고 있다. 경제가 어렵자 사람들이 책 소비를 가장 먼저 줄이고 있으며, 대학시절 사회과학 서적으로 단련된 30~40대와 달리 요즘 대학생들은 정말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이다. 실용서는 많이 팔리지만 불황에도 끄떡없다던 어린이책도 출판사들마다 자회사를 세우고 뛰어들어 경쟁을 하다보니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빛깔있는 책들이 보여주는 희망
그러나 한편에선 책의 소재가 다양해지고 개성 있고 신선한 책들이 고루 나오고 있다는 데에 희망이 있다. 전통적으로 창비, 문지, 민음사, 한길사, 사계절 같은 몇몇 주요 출판사들이 주도해가던 출판시장에서 중소 규모 출판사들이 전문성을 강화해 좋은 책을 내놓고 있다. 이권우씨는 “2~3년 사이에 좋은 책이 많이 나왔다. 규모가 큰 출판사는 기본을 하고 작은 출판사들이 색깔 있는 책을 많이 냈다. 주제도 좋고 접근 방법도 새롭다. 푸른역사가 내놓은 역사책들, 그린비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같은 새로운 인문서들, 동아시아, 지호, 승산, 한승, 이끌리오의 과학책들도 주목할 만하다. 다만 몇년 동안 ‘386이 주독자’라는 말이 나올 때 참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취향만을 고려하고 새로운 독자층을 개발하거나 20대를 끌어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다. 이 점을 극복하면 출판시장에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곳의 전철은 S-Bahn과 U-Bahn이 있다.(IC나 Iche 같은 게 또 있는 모양이지만 안 타봐서 모름) 내가 주로 타고 다닌 S-Bahn은 꼭 우리나라 완행 경춘선 비슷하다. 도심 바깥으로 많이 나가기 때문에 지하로 들어가는 일도 별로 없다.
S-Bahn은 1에서 9까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머무른 Bad Soden(바트 조덴)이란 곳은 S3의 종점. 특이하게 이 곳의 전철들은 승객이 직접 문을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레버를 당기든지 버튼을 누르든지. 처음엔 몰라서 멀뚱하니 서 있다가 못 내릴 뻔하기도...;
우리나라 전철처럼 패스를 끊고 들어가는 곳이 없어서 편했다. 표 검사는? 불시에 양 옆에서 검사하러 다닌다. 걸리면 40유로(5만 4천원 정도) 벌금. 평소에는 거의 안 한다는데 도서전 기간 중에는 승객수가 늘어나서 그런지 하루에 한 번씩은 하는 편이었다.
표는 사람이 따로 팔지 않고 자판기가 있어서 자기가 갈 행선지까지 끊는다. 우린 다행하게도 도서전 입장권이 전철 전 구역에 적용되는 패스 구실을 하게 되어 교통비 절약! (*아싸~*) 전철 안에서는 다들 조용하길래 여기는 별로 시끄럽지 않구나..했지만 역시 사람이 모이니까 왕수다다. 조용했던 건 다들 혼자 타서 그런 거였고 ^^;
프랑크푸르트 메세, 도서전 입장
S-Bahn에 프랑크푸르트 메세 역이 있다. 이 역은 곧바로 메세장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모두 5일 동안 열리는 국제도서전은 처음 3일 동안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마지막 이틀에만 열린다. 그래서 입장권을 사려면 "거래 방문자 등록" 즉, 자신이 출판사 사람임을 증명하는 등록을 먼저 해야 한다.
표를 사기 전에 방문자 등록하는 곳.
명함이 없으면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하더니 이 말이었구나. 한쪽에서 등록을 하고 입장권을 끊었다. 가격은 꽤 비싸지만(시즌 티켓 60유로, 약 8만원) 교통비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 셈을 치면 오히려 싼 값이지. 책 판매상(부스를 차린 출판사)들이 먼저 들어가고 거래 방문자는 뒤에 입장을 한다.
전날 만날 약속을 한 장소는 찾지 못하고(알고 보니 그곳은 우리가 예상한 곳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시간이 되면 들어가야지..하고 있는데 저 쪽에서 일행이 보인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그렇게 해서 본격적인 도서전 탐색을 시작했다.
전부 신기해!
첫날엔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내가 놀란 대부분은 주로 규모 때문이었는데, 서울 국제도서전과 비교하자면 코엑스의 그 넓이되는 면적이 2~4층으로 된 돔이 다섯 개가 넘었다. 도서전은 삼일만 보고 나머지 계획이 없는 날에는 다른 곳에 놀러간다,는 예상이었는데 출발할 때까지 거의 도서전만 돌아다녔다.
홀과 홀을 이동하기 위해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할 정도로 전시장 전체의 규모는 대단하다
하루 열두 시간이 넘는 강행군..-_-; 이러니 발에 물집 안 잡히고 배겨. 그래도 다닐 때는 잘 몰랐는데 돌아오는 날에 긴장이 약간 풀리니 아픈 게 느껴져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와선 징징거렸고. 하핫.
내 계획은 이랬다. 같이 간 에이전트는 주로 독일어권 담당이고, 같이 간 출판사 사람도 나와는 관심 분야가 달라(주로 비즈니스와 어학 관련) 함께 다니는 게 오히려 서로에게 불편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첫날만 대충 같이 보고 두 번째 날부턴 혼자 구경 다니기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겠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책 보러 왔으니까...
그런데 자의반 타의반 에이전트 스케줄에 맞춰 따라다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실 처음에는 내가 보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통에 짜증도 좀 났다. 여기까지 오는 데 많이 신경써줬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나도 배려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 스케줄이라는 게 있는데! (없었다...)
같이 온 에이전트의 말을 듣자니 고충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에이전시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출판사들(국내든 해외든)과 안면도 많이 못 튼 상태고, 계약도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해외 출판사들의 신뢰를 바로 얻기란 쉽지 않다는 것. 지난해에는 그 때문에 다니는 게 많이 힘들었나 보다.
전시장 안에 있는 작은 까페에는 늘 사람이 *북적북적*
미팅을 몇 차례 들어갔다 나오더니 희색이 만면하여 우리에게 그런다. 출판사와 함께 들어가니까 대우가 달라진다고. 그것도 두 군데나, 잘 생기고(과연) 허우대 좋은(그렇지) 남자를 데리고 들어가니(외국 저작권 담당자들은 98% 여자다) 어찌 대우가 소홀할쏘냐. 들어갈 때마다 커피와 각종 음료수며 비스킷, 심지어 샌드위치(이건 거의 훔쳐먹다시피 한 거지만)까지 풍족한 미팅을(대부분) 했다.
그럼에도 처음엔 재미없었다. 내가 관심하는 쪽의 출판사가 별로 없기도 했고, 말을 잘 못 알아듣는데다가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여 병풍 같은 신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팅이라는 것에 익숙해지고 말이 안 통해도 미소(!)와 몸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고도의 기술을 구사할 정도가 되니 그냥 책 구경하는 것보다 재밌는 구석이 많았다.
미팅을 다니며
해외 출판사와의 미팅에서는 보통 관심 있는 책들의 저작권 확인과 검토, 필요에 따라선 그 자리에서 계약도 이루어진다. 큰 출판사들은 대부분 첫날 미친 듯이(?) 다니며 쓸 만한 책들을 훑는 것 같은데 그나마 거의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그림책이다. 나중에 천천히 다니며 확인한 결과, 눈에 좀 들어온다 싶은 그림책들은 전부 첫째날과 둘째날 계약이 끝났다고.
우리(라고 해서 민망한데, 난 사실 비즈니스 차원보다 여행 차원에서 간 것이기 때문에)처럼 작은 출판사들은 그렇게 마구 계약하긴 힘들고 꼼꼼히 검토할 시간이 필요한지라 에이전트를 통해 관심 있는 책들을 일단 찍어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어떤 책들은 검토할 동안 "옵션" 기간을 두기도 한다. 즉, 우리쪽에 계약 우선권을 주는 것.
미팅 시간은 짧으면 10분에서 30분까지 걸리곤 했는데 미팅과 미팅 사이의 텀이 굉장히 짧은 편이라 그 넓은 전시장을 이동하려면 애를 먹곤 했다. 가능하면 미팅할 출판사 부스에 먼저 가 책들을 미리 보고 보내달라고 할 책들을 꼽아둔다. 물어볼 것도 적고.
가장 많이 다닌 3홀. 역시 가장 많은 출판사가 참여한 독일의 규모가 가장 컸다.
독일 출판사 미팅이 많아서 주로 에이전트가 얘기하고 난 듣고 있었는데 한 이틀쯤 독일어를 계속 듣다 보니 나중엔 어쩐지 내가 알아듣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완전히 착각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부분부분은 실제로 알아듣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 고등학교 때의 독어 실력이 살아났다기보다 대화의 분위기와 몸짓들에서 유추한 결론일 테지만 말이다. 이 때처럼 언어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느껴보긴 오랜만이었다. 알아들을 듯 말 듯한 묘한 느낌. 그들은 대부분 영어도 했고 어떤 담당자는 우리(나와, 같이 다닌 출판사 사람)를 배려하여 영어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입말이 짧기도 하고 처음엔 입이 잘 떨어지지 않기도 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나중엔 자연스럽게 되든 안되든 얘기를 꺼내게 되었다. 내가 답답해서. 물론, 말을 해서 더 답답한 경우도 있었지만 재밌는 경험이었다. 영어를 함께 하긴 하지만 그네들도 영어보다는 독일어로 말하길 더 기꺼워하더라.
영어든 독일어든 난 아주 유심히 들었는데, 여러 사람의 말을 듣다 보니 사람에 따라 말을 아주 깨끗하게 하는 티가 났다. 어떤 사람은 영어를 독어처럼 하는 통에 영어인지 독어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독어라 의미는 전혀 모르는 데도 단어 하나하나가 귀에 쏙쏙 들어오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단어가 눈에 보였다(!)
어... 도서전 얘길 하다가 딴길로 샜다(;) 암튼 몇 번 다니니까 관심 없는 분야도 재밌고 나름대로 예기치 않던 책들도 보고 책 설명도 따로 들을 수 있고, 전시된 책 말고 다른 "비밀스런" 책도 보여줘서 즐거웠다. (두서없는 여행기 계속 ; 이제 오래되서 다 까먹겠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