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 1월 8일, 팽덕회(彭德懷) 남진(南進)을 중지(中止)
“사령관동지, 미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하고 있습니다.”
중공군 정보참모가 미군과 국군이 철수하는 정보를 입수하고 팽덕회에게 보고하였다.
“오후 3시 현재 서울은 텅텅 빈 것 같습니다.”
정보참모는 다시 구체적으로 “미군과 국군은 51년 1월 4일 오후 3시 서울에서 한강 이남으로 도망치고
서울은 유령의 도시가 되었습니다.”라고 보고를 하자
팽덕회는 미군이 그렇게 빨리 맥없이 도망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미군의 무작정 철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군은 아예 수원까지 후퇴하고 있습니다.”라고 불안하여 진격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팽덕회에게 정보참모는 또 다시 보고하였다.
그러자 팽덕회는 불안이 싹 가시고 자신감이 생겼다.
미군이 현대 무기와 많은 항공기와 전차를 가지고도 후퇴한 것이 작전상 후퇴가 아니라
중공군에 겁을 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후로 팽덕회 사령부는 연일 축제분위기였다. 그리고 김일성도 흥분하였다.
미군이 중공군에 밀려 서울을 내줌으로 미군은 전 세계에서 망신을 당하였고, 미국 국민들은 침통해 하였다.
이승만과 남한 국민들은 피난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불안하였다.
이와 반대로 북경 천안문 광장에는 중공군이 미군을 북조선 땅에서 몰아내고 서울까지 입성하였다고 하여
군중들이 밤을 새우며 서울 입성을 축하하며 열광하였다.
중공군의 서울 입성은 중공 인민들에게 일본을 패망시킨 최강 미군과 싸워서 이겼다는 용기와 자긍심을 주었던 것이다.
“사령관 동지, 미군이 평택까지 후퇴하고 있습니다.”
팽덕회의 정보참모는 신이 나서 보고하였다.
팽덕회는 미군이 평택까지 내려갔다는 보고를 받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뭐?”하고 놀랐다.
‘평택까지? 평택까지란 말이지? 그렇다면 이대로 밀고 내려가면 미군은 한국에서 아예 떠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평택까지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미군의 전력을 그렇게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된다.
국방군의 전력 역시 그렇다!’ 팽덕회는 조금만 더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모택동은 미군의 주력부대가 큰 손실 없이, 청천강과 평양과 38선과 서울을 빠져나가자
분통을 터트리며 팽덕회를 질타하고 있었다.
“총 후퇴하는 적에게 재편성의 여유를 주지 말고 제3차 작전을 감행하라!
여기에는 정치적 의의가 크다!”하며 세 차례에 걸쳐 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라고 명령을 하였다.
팽덕회는 “미군은 김포공항과 인천항을 장악하고 있어 반격할 여지가 있다.
50군은 이를 즉시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또한 “인민군 1개 사단만 서울을 방어하고 김포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려
중공군 50군과 인민군 1군단은 일제히 한강을 건너 김포와 인천과 수원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인민군 1군단은 1월 5일 김포를 점령하고,
1월 6일 중공군 50군은 도망치는 미군과 영국군과 국군에게 피해를 주면서 바짝 추격하여 수원을 점령하였다.
8일에는 인천을 점령하였다.
42군과 66군은 소양강을 건너 4일 홍천을 점령하였고, 42군은 양덕원리를 점령하였다.
7일 지평리, 8일 양평, 여주, 이천을 점령하였다.
인민군 2군단과 5군단은 8일 원주을 점령하고 제천을 향해 진격 중이었다.
팽덕회 사령관은 “서울을 점령한 뒤에 지나치게 깊숙이 추격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후방의 병참보급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50군과 인민군으로 도망치는 미군과 국군을 추격하는 척하고 38군과 40군은 한강 북쪽에서 쉬도록 하라.”하고
참모장과 군단장들에게 명령하였다.
팽덕회는 1월 8일 “이번 작전에서도 쉽게 이기기는 했어도
미 2사단 외 미군이 즉시 도망쳐 주력부대를 섬멸하여 무력화시키지 못하였는데,
미군의 주력이 큰 피해가 없이 도망쳐서 우리를 깊숙이 유인한 뒤
우리의 배후에서 또다시 상륙작전을 꾀하는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더 이상 미군을 추격하는 것은 유리하지 못하므로 추격을 정지하라.”고
전군에 추격정지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되어 대한민국은 위기를 면하였다.
팽덕회의 추격정지명령이 내려지자
군단장들과 참모들이 “왜 추격을 중지하십니까?
지금 상대는 서울마저 포기하고 도망치고 있는데
왜 이런 절호의 기회에 계속 밀어붙여 끝을 내지 않고 있습니까?”하고
아우성이었다.
소련 측에서도 “3차 작전을 중지해서는 안 되며,
승기를 잡았으니 여세를 몰아 미군들을 조선반도에서 아예 몰아내야 합니다.”하고
계속 항의가 빗발쳤다.
평양 주재 소련대사 라츠와예프는
“누가 전투에서 이기고도 적을 추격하지 않는가? 이런 작전을 지시하는 사령관은 도대체 누구인가?”하며
공개적으로 팽덕회에게 항의하였다.
김일성도 항의하였고,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모택동도 계속 추격하라고 팽덕회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팽덕회는 “안 돼! 계속 추격은 결단코 안 돼!
현대무기를 갖고 있는 미군을 단숨에 부산 앞 바다로 빠뜨릴 수 없다.”하며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팽덕회는 흥남에서 미 10군단의 철수 때 미국의 국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중공군 포병부대가 쉬고있는 모습, 1951.1.
1월 8일부터 서울, 고양, 동두천, 마석, 가평, 김화에
중공군 38, 39, 40군과 인민군 1군단을 분산시켜 휴식하게 하였다.
50군과 38군 112사단, 인민군 1군단 2개 사단, 42군 125사단으로 인천과 수원을 방어하게 하였다.
인민군 2군단과 5군단도 홍천과 횡성에서 분산시켜 휴식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조선의 부대들은 현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탄약을 비축하는데 3개월 정도의 준비가 있어야
다시 전투를 할 수 있습니다.”하고 모택동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모택동은 기가 막혔다.
이 내용을 안 김일성은 하늘이 낮다하고 길길이 뛰었다.
팽덕회는 참모들과 군단장들에게
“이번에는 잠시 쉬는 것이 아니라 진짜 푹 쉬는 거다!”하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중공군은 서울에 구경 왔나?”하며 인민군의 불평은 하늘에 닿았다.
“도대체 인민군이나 중공군이나 서울만 오면 쉬고 있으니 그 이유가 뭐냐?
서울에 예쁜 처녀들이 많아서 정신이 나가버려 그러는 것이냐?
아니면 무엇이냐?”
인민군 군관들의 불평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월 10일 김일성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조선 주재 중국대사관 무관 시성문을 데리고
성천군 군자리에 있는 조·중 연합사령부를 찾아가 팽덕회를 만나자마자 “왜 계속 추격하지 않습니까?”하고 항의하며
“즉시 추격하였으면 좋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팽덕회는 “미군은 현대무기를 갖고 있고, 우리가 미군 주력을 괴멸시키지 못하였으며,
우리들의 병참보급이 우리들의 진격에 뒤따르지 못하고 있어 추격은 불가능하다.”고 한 마디로 거절하면서
“미군은 한반도를 버리고 떠날 군대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 선에서 휴전해야 한다고 암시하였다.
그러면서 “추격은 3개월 후 봄에 실시한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자
김일성은 도움 받는 입장에서 더 할 말이 없었다.
팽덕회가 1월 8일 추격 정지명령을 내리지 않고
중공군이 제천, 단양, 영주까지 산악지역으로 밀고 내려가면서
1월 14일부터 영주 위 남대리에서 싸우고 있는 인민군 4만 명과 협력하여 밀고 내려갔다면
국군과 미군은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대구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말았을 것이다.
1월 8일 팽덕회의 정지명령은 팽덕회의 판단 착오였다.
이때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려고 한국인 공무원과 그 가족, 경찰과 그 가족 26만 명을
사모아 섬으로 철수시킬 계획도 세워놓고 있었다.
1월 16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은 리지웨이 장군과 철수 협상을 하려고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월 8일부터 중공군이 공격해 오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하여 철수계획은 보류되었다.
팽덕회는 한반도를 통일시켜 세계적인 영웅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그의 판단 잘못으로 스스로 포기하여 3년 동안 기나긴 싸움을 하여 수많은 전사들을 죽게 하였고,
38선을 고착시켜 현재에 이르게 하였다.
전쟁은 모험이나 팽덕회는 모험을 싫어하였다.
(네이버 사이트에서 옮김,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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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의분자들은 흔히 '남북통일'을 방해, 막은 사람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미국의 맥아더 사령관이라고 하면서,
그를 철천지원수라고 욕을 하며, 그의 동상도 넘어뜨리겠다고 야단 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한반도 통일을 방해한 사람은, 위 글을 보면,
팽덕회 중국군 사령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으로 몰려가 그의 흉상들을 모조리 찾아 깨 부셔야 하겠다.
역사, 특히 한국전쟁의 역사란 너무나 아이로니칼한 장면, 국면이 많은 것 같다.
이 국면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승만 대통령께서도 오죽하면;
중공이 참전한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은혜스러운(?) 것이
될런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을까.....
이 때에 팽덕회가 남진을 계속하겠다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그의 군사적상식, 인간적의지, 역사를 보는 경륜만이었을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뭣이었을까.....?
우리는 '기적'같은 전장에서의 사건들을 많이 보아왔고,
어쩔 수 없는 수레를 타야하는 대목들도 보아왔다.
위의 글에서는 소련의 스탈린도 남하중지를 반대하였다고 했지만,
다른 글, 중국의 학자는 스탈린은 팽덕회의 결심을 찬성하였다는 글도 있다.
(姚旭, 중국공산당 중앙학교 산하 黨史硏究室 소속 연구원)
姚旭에 의하면, 스탈린은 팽의 '남진중지'를 항의한 소련대사 라츠와예프를 해임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역사는 흐르고 있는데,
그 원초적 원인을 우리는 땅을 내려다 보면서가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찾아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이 살아났고,
60년이 지나면서 보면,
그 때의 팽덕회의 결심이 어째서 그렇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역사는 그 주관자의 뜻에 따라 흘러가고 있다고 믿는다.
21세기초, 현재 이 땅에서 이루어 지고있는 것, 대선 포함, 역시나다.
彭이 남진을 중단한다는 그 당시, 우리 정부는 '백만대군 양성'을 위해 국민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낫도 좋고 곡괭이도 좋다,
우리는 중공 오랑캐와 싸워 이 나라를 지키고,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이룩하겠다 !!"
그래서 청년들을 모아 국민방위군을 조직하였었다.
그러나, 백만대군의 꿈은 사라졌고,
이 나라 역사는 그런대로 흘렀고, 한미동맹이 이루어졌고,
우선은 총성은 멎게 되었다. (김순욱)
부산 피난정부는 백만대군을 위해 젊은이들을 모아, 국민방위군을 조직;
목재총으로 총검술 훈련을 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