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제도의 시작
과거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중국의 수나라 문제(隋文帝) 개황(開皇) 7년, 서기로는 587년이다. 수 문제는 당시 강성했던 귀족 세력을 누르고 천자(天子)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수나라의 과거제도는 당나라에 계승되었으나 인재선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송나라에 와서 발달하게 된다.
중국의 과거제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 광종(光宗) 9년, 서기 958년이다. 후주(後周)의 귀화인인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드려 실시하였는데 중국에서와 같이 각 지역의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통일신라 원성왕(元聖王) 4년, 서기 788년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설치되었지만 골품제의 제약으로 과거의 본래 의미를 살리지 못하였다. 고려왕조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귀족 호족 세력을 억압하는 반면에 이들을 과거제도를 통하여 중앙관료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 고려때 과거제도는
고려시대의 과거에는 製述科(제술과)·明經科(명경과)·雜科(잡과)가 있었다. 제술과는 詞章(사장, 문장文章과 시가詩歌)을 시험보았고, 명경과는 유교 경전을, 잡과는 기술과목을 시험 보았다. 제술과와 명경과는 兩大業(양대업)이라 하여 강조되었고, 잡과는 醫業(의업)·卜業(복업)·地理業(지리업) 등으로 기술관을 등용하는 시험이었다.
■ 조선때 과거제도는
조선의 과거제는 고려의 제도를 근간으로 하되 보다 정비하여 제술과와 명경과를 통합하여 문과(文科)로 하고, 무과(武科)를 신설하였다. 문과와 무과를 통해 문무관료를 균형있게 선발하게 되어 문무 양반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여 중앙집권적인 양반관료제의 성격을 강화시켜 나갔다.
조선시대의 과거에는 문과·무과·잡과(雜科)·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가 있었다. 문치주의를 표방했던 국가의 정책으로 인해 양반들은 문과를 더 선호하였고, 문과의 예비시험적인 성격이 강한 생원 진사시에도 비중을 두었다. 잡과에는 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율과(律科)가 있는데 기술직 중인들이 많이 보는 시험이었다. 문과는 조선시대 과거의 꽃이라고 할 만큼 중요시되어 문과 급제는 가문의 영광이며 사회적으로 인정과 명예를 얻는 지름길이었다.
과거의 종류
■ 정기시험, 식년시
식년시는 3년에 한번씩 실시하는데 子(자)·卯(묘)·午(오)·酉(유)年을 식년이라 한다. 上式年(식년 전해)의 가을에 초시를 보고 식년에 복시를 보았다. 식년시에는 문과와 무과, 생원진사시, 잡과가 함께 설행되었다.
■ 비정기시험, 증광시
증광시는 태종의 즉위를 계기로 설행되어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되는 시험이다. 처음에는 국왕 즉위시에만 설행되었으나 선조 이후에는 세자 탄생, 왕비와 왕세자 책봉 등 왕실의 대소 경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실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왕실의 경사가 여러 번 겹치는 경우를 대증광(大增廣)이라고 한다. 증광시는 식년시와 마찬가지로 문과 뿐아니라 무과, 생원진사시, 잡과가 동시에 설행되었다.
■ 특별시험, 별시
증광시 이외의 각종 별시에는 별시(別試), 외방별시(外方別試), 알성시(謁聖試),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 중시(重試), 발영시(拔英試), 등준시(登俊試), 도과(道科) 등이 있었다. 증광시와는 달리 각종 별시는 문무과에만 있었다.
별시(別試)는 예고없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지방 거주자에게는 불리하였다. 선발 인원이 제도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달랐다. 외방별시(外方別試)는 국왕이 지방에 行幸(행행)할 때 行在所(행재소)에서 실시하는 특별시험이다. 국방상의 요지인 함경도에서 실시하는 北道科, 평안도에서 실시하는 西道科, 강화도와 제주도·개성부에서 실시하는 별시가 있었다.
알성시(謁聖試)는 국왕이 봄·가을에 성균관 文廟(문묘)에 참배한 후 明倫堂(명윤당)에서 주로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치루는 시험이다. 국왕이 직접 나와 실시하는 親臨科(친임과)의 하나로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여부가 결정되었다.
정시(庭試)는 단 1회의 제술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시험으로 본래 정식 과거라기 보다는 권학의 의미로 시행하여 우수한 사람에게 殿試(전시)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거나 殿試(전시)하던 시험이었는데 宣祖(선조) 이후에 독자적인 시험으로 승격되었다. 춘당대시(春塘臺試)는 본래 각 軍門의 무사들을 춘당대(현 창경궁)에 모아 武才를 시험보던 것이었는데 뒤에 문과에도 적용되었다.
중시(重試)는 당하관 이하의 문관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으로 10년에 한 번씩 시행하였다. 합격자에게는 성적에 따라 4등급에서 1등급씩 올려주었다. 참하관에서 참상관으로, 당하관에서 당상관으로 승진시키는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응시자격과 선발인원
■ 응시자격
응시자격은 법제상 명문화된 규정은 없으며 결격사유에 대해서는 經國大典(경국대전)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죄를 범하여 영구히 관직에 임명될 수 없게 된 사람, 국가 재정을 횡령한 관리의 아들, 재가했거나 실행한 부녀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 자손은 문과와 생원 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또한 문무과는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 이하, 생원 진사시에는 정5품 통덕랑 이하가 응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위의 사유는 주로 신분상의 문제이며 태종 17년에 정해진 과거법에 의하면 문과에 응시하려면 성균관 유생으로 圓點(원점) 300점을 따야 한다. 원점이란 성균관 출석 점수를 말하는 것으로 성균관 식당에 아침 저녁 두끼를 참석하면 원점 하나로 계산해 주었다. 따라서 원점 300점을 딴다는 것은 300일을 성균관에서 수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이 성균관에 들어가 약 1년간 수학해야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점제도가 잘 지켜지지 않아 원점을 줄여주기도 하고 영조 이후에는 아예 원점을 묻지 않았으며 생원 진사가 아니어도 응시할 수 있었다.
■ 선발인원
식년시와 증광시는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세 단계가 있었는데, 초시에는 향시(鄕試), 한성시(漢城試), 관시(館試)가 있었다. 향시는 각 도의 관찰사가 주관하여 실시하는 시험으로 8도에 거주하는 유생을 대상으로 한다. 한성시는 한성부에서 주관하며 주로 당하관 이하의 관리와 한성부에 거주하는 유생이 응시하였으며, 관시는 성균관의 거제유생(居齋 儒生:성균관에서 생활하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각종 별시에는 초시와 전시 두 단계만 있었다. 식년시 초시의 선발인원은 향시가 150인(경기 20, 강원 15, 황해 10, 충청 25, 경상 30, 전라 25, 평안 15, 함경 10), 한성시가 40인, 관시가 50인이다. 이들 초시 합격자 240인을 대상으로 복시를 보여 33인을 뽑고, 전시에서 등급을 결정하였다.
시험순서와 합격발표
■ 응시서류제출(녹명 錄名)
문과의 주관은 예조와 성균관이 하였는데 응시자는 시험 전에 錄名(녹명)을 하여야 한다. 시험 10일 전에 錄名所(녹명소)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뒤에는 入門할 때 녹명하는 일이 많았다. 응시생들은 녹명소에 성명, 본관, 거주지와 부·조·증조·외조의 관직과 이름, 본관을 기록한 四祖單子(사조단자)를 제출하여야 한다.
16세기 후반 이후에는 사조단자 이외에 保單子(보단자)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보단자란 6품 이상의 朝官(조관)이 署押(서압)한 신원보증서이다. 四祖 안에 顯官(현관, 종9품 이상의 관원)이 없는 경우에 지방 응시자는 경재소 관원 3인, 서울의 응시자는 해당 부의 관원 3명의 추천을 받아 제출하도록 하였다.
허위가 드러나면 해당 관원은 파직하고 응시자는 水軍에 충정하였다. 녹명관은 사조단자와 보단자를 통해 응시 자격을 확인하고 해당 사항이 없으면 녹명책에 기입한다.
■ 시지의 구입
응시자들은 각자 試紙(시지)를 구입하여 시험지 끝에 본인의 관직, 이름, 본관, 거주지와 부·조·증조의 관직과 이름, 외조의 관직과 이름, 본관 등을 다섯 줄로 쓰고 관원들이 누구의 시험지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그 위를 종이로 붙여 봉하였다. 이같이 이름을 가리는 것을 封彌法(봉미법)이라 한다.
■ 시험장 입장과 자리배치
입문관은 시험보는 날 새벽에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가 녹명책을 보고 호명하여 들여보낸다. 搜挾官(수협관, 과거 보는 데서 책을 가진 사람의 있고 없음을 살피던 임시 벼슬)은 문밖에서 응시자들의 옷과 소지품을 검색한다. 만약 책을 가지고 들어가다가 발각되면 禁亂官(금란관)에게 넘겨진다. 입장이 끝나면 입문관은 수험생들을 6자 간격으로 떼어 앉히고 금란관은 문을 잠그어 잡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 시험문제 풀기
문과는 三場連券法 또는 東堂三場이라 하여 初場이 끝난 하루 뒤에 中場, 중장이 끝난 하루 뒤에 終場을 보았다. 시험과목은 초장에는 經學, 중장에는 詩·賦·表, 종장에는 時務策을 보았다.
초장의 경학시험은 講經과 製述이다. 강경은 경서를 대상으로 하는 구술시험이고, 제술은 논문식 필답시험이다. 제술은 疑義라고도 한다. 강경에는 책을 보지 않고 물음에 답하는 背講과 책을 보고 답하는 臨文考講이 있다. 식년시와 증광시, 별시의 시험과목이 조금씩 다르다.
■ 답안제출과 채점
답안 작성이 끝나면 收券所에 낸다. 시험지를 다 거두고 나면 낸 순서대로 100장씩 묶어 봉미관에게 넘긴다. 封彌官, 謄錄官 査同官, 校同官의 손을 거쳐 試官에 넘겨지면 시관은 채점을 한다. 채점은 通·略·粗·不의 4등급으로 나누어 통은 2분, 약은 1분, 조는 0.5분으로 계산하여 초·복시를 막론하고 3장의 성적을 통산하여 합격여부를 결정하였다. 과차는 上·中·下, 二上·二中·二下, 三上·三中·三下의 9등으로 나누고 3下를 一分으로 정한다.
복시에 합격한 33인은 다시 전시를 보았다. 전시에서는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왕이 甲科 3인, 乙科 7인, 丙科 23인을 성적에 따라 정하였다.
처음에는 乙科·丙科·同進士로 구분하였다가, 태종 14년에 乙科 1·2·3등으로 바꾸었고, 세종 때에 同進士를 丁科로 바꾸었다. 세조 12년에 甲·乙·丙科로 바뀐 뒤에 내내 그대로 실시하였다.
■ 급제자 발표(출방 出榜)
등수를 발표하는 것을 出榜이라 한다. 출방 때에는 唱榜儀가 거행되는데 국왕과 종친, 문무백관이 참석하였다. 奏樂이 울리고 呼名에 따라 문과급제자는 오른편에, 무과급제자는 왼편에 늘어서서 국왕에게 四拜禮를 한다. 문과급제자에게는 이조정랑이, 무과급제자에게는 병조정랑이 紅牌를 준다. 그리고 국왕이 御賜花와 蓋와 酒果를 내린다.
■ 급제자 축하연(은영연 恩榮宴)
급제자들에게 정부가 축하연을 베풀어 주는데 이를 恩榮宴이라 한다. 은영연이 끝난 다음 날 급제자들은 문과 장원의 집에 모여 詣闕하여 국왕에게 謝恩禮를 드리며, 다음날에는 무과 장원의 집에 모여 문묘에 가서 謁聖禮를 올린다. 그리고 나서 친지를 불러 잔치를 하거나 선배의 집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거나 시관을 초대하여 恩門宴을 열기도 한다.
■ 금의 환향 (유가 遊街)
급제자에게는 3~5일간의 遊街가 허락되었다. 天童이 앞에서 인도하고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며 광대가 춤을 추고 재인이 雜戱를 부린다. 시골 출신이 고향에 내려가면 그곳 수령과 향리들의 환영을 받고 유가한다. 향교에서 알성례를 마치면 수령이 급제자와 그 부모를 불러 주연을 베푼다.
■ 방목의 작성과 반포
藝文館에서는 급제자의 성명, 자, 생년간지, 본관, 거주지, 부모의 관직과 성명, 양친 생존여부, 형제의 이름 등을 기록한 방목을 작성하여 中外에 반포한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부정 행위와 방지 장치
시험의 부정행위는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닌 듯하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부정행위도 늘 말썽이 됐다. 조선시대 과거는 시험으로 인재를 뽑았다는 점에서 아주 선진적인 제도였다. 다시 말해 인재등용에 있어서 중국과 우리나라만이 시험제도를 실시했던 것이다.
과거시험은 종류도 많았으며 여러 단계를 거치게 했다. 하지만 그 부정행위를 방지하려는 장치는 똑같았다.
먼저 방지 장치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과거 시험장을 1소(所) 2소로 나누어 시험을 치르게 했다. 부자나 형제 또는 가까운 친척이 한 곳에서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형제가 같은 시기에 시험을 볼 경우 각기 다른 장소에서 보게 한 것이다. 또 시관도 가까운 친척이 응시할 경우에는 이를 피하게 했다. 이를 상피제(相避制)라 했다.
시험장의 입구에는 문지기인 수협관(搜挾官)을 세워두었다. 응시생들은 시험장 안에 종이, 붓, 먹, 벼루 이외에는 어떤 물건도 갖고 들어가지 못했다. 만일 책 따위를 숨기고 들어가다가 들키는 경우 몇 년씩 응시자격을 박탈하는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수협관은 응시생들의 몸수색을 철저히 했다.
또 시험장에는 응시생과 종사자들 이외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양반 자제들은 평소 나들이할 때 수종을 드는 종을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과거시험장에서는 수종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잡인이 시험장에 들어간 사실이 발각되면 누구든 즉시 체포해서 수군(水軍)으로 보내게 했다.
응시생의 입장이 끝나면 여섯 자 간격을 두고 앉힌다. 답을 쓸 동안 군데군데 감독관이 배치되어 부정행위를 감시한다. ‘경국대전’ 같은 책을 들여와 베끼는지, 모르는 글자를 찾으려 옥편을 들추는지, 남의 답안지를 엿보는지, 미리 답안지를 작성해 슬쩍 끼워 넣는지, 외부에서 답안지를 들여와 바꿔치기를 하는지, 두 사람이 답안지를 작성하고서 한 사람의 것만 내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규정을 어기거나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두 번의 응시자격(6년)을 박탈했다. 모의해 남의 글을 낸 사실이 발각되면 곤장 100대를 치고 징역 3년의 처벌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응시생에게는 시험지에 이름을 쓰고 종이를 붙여 가리게 했다. 수권관(收券官)은 시험지를 받아 살펴보고 등록관에게 넘겨준다. 등록관은 시험지의 맨 끝에 수험번호인 자호(字號, 천자문의 순서대로 써서 매긴 순번)를 쓰고 도장을 찍어 가운데를 자른다. 이름 부분이 잘려나간 시험지를 등록관이 다시 베껴서 시관에게 올린다. 시관이 시험지를 채점할 적에 누구의 답안인지 모르게 한 것이다.
한편 초장 시험의 경우 사서삼경의 대문(大文, 주석이 아닌 본 글)을 외우는 시험을 보였다. 초기에는 응시생이 시관과 등을 돌리고 외우게 했으나 후기에는 장막을 쳐서 시관의 얼굴을 가리고 시험을 보게 했다. 시관과 응시생의 친분관계를 차단하려는 것이다.
이런 갖가지 방지 장치와 엄한 처벌규정을 두었는데도 부정행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 방법도 교묘했다. 초기에는 비교적 부정행위가 적었으나 후기에 들어서는 정치적 혼란과 관기 문란을 틈타 부정행위가 만연했다. 이제 부정행위의 갖가지 방법을 살펴보기로 한다.
단속이 느슨한 틈을 타서 양반 자제들이 많은 수종을 데리고 들어갔다. 수종들은 책을 가진 자, 시험지를 베껴주는 자, 외부와 연락해 시험답안지를 바꿔치기 하는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때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밟혀 죽는 자와 상처를 입는 자들이 많았다 한다.
응시자들이 하도 많아 시관이 시간에 쫓겨 다 읽어 채점을 하지 않고 반절 정도만을 채점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자 시험지를 먼저 내려고 다투기도 했고, 몇 사람의 글쟁이를 데리고 들어가 분담하여 시험지를 신속하게 작성해 내기도 했고, 종사자를 매수해 늦게 내고도 앞에 슬쩍 끼워 넣게도 했다.
다음은 차술(借述) 대술(代述)하는 방법이 있었다. 시험장에 대여섯 명을 데리고 들어가 각기 답안지를 작성하고 그들 속에 제일 잘 쓴 답안지를 골라서 내는 것이다. 이것이 차술이다. 또 시험장 밖에 글 잘하는 선비를 대기시켜 놓고 종사원을 매수해서 시험 제목을 일러주면 대리 답안을 작성한다. 이 대리답안지를 다시 종사원이 응시생에게 전달하여 제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술이다.
심지어 응시생이 시험장 안에서 일단 절차를 밟고 난 뒤 시험장을 빠져 나와 집이나 서당에 앉아 답안지를 작성한 뒤 다시 들어와 제출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은 여러 종사자들을 매수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특별히 권세있는 집의 자식들이 써먹던 부정행위였다.
응시생과 시관이 짜고 부정으로 합격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시관이 시험문제를 미리 일러주어 집에서 답안지를 작성해 제출하는 방법, 응시생이 답안지에 점을 찍는 따위 암표(暗票)를 하여 누구의 답안지인지 알게 해서 시관이 합격시켜주는 방법, 종사원에게서 자호를 알아내 시관에게 알려주는 방법 따위가 동원되었다.
또 시관의 보조역할을 맡은 등록관을 매수해 답안지를 베낄 때 잘못 놓여진 글자나 엉터리 문맥을 바로잡아 고치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를 역서(易書)라 한다. 또 종사자를 매수해 다른 합격자의 이름을 답안지에 바꿔 붙이게 했다. 이를 절과(竊科)라 했다. 다른 합격자를 도태시키는 가장 악질적 방법이었다.
이를 막으려고 영조는 수권관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답안지를 내지 못하게 하기도 했고 정조는 시험문제가 발표된 뒤 3시간 이후에 답안지를 제출케도 했다. 한편 처벌의 규정을 더욱 강화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쉽게 사라질 리가 없었다.
이 따위 부정행위는 대체로 첫째 대가를 받고 행해지는 경우, 둘째 권세가에 빌붙어 한 자리를 노리려는 경우, 셋째 인정에 못 이겨 동조하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첫째의 경우는 모든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둘째의 경우는 문벌정치가 극성을 부렸던 19세기 이후에 주로 자행되었고, 셋째의 경우는 그래도 드물게 나타났다.
조선 전기에 어느 유씨 형제가 과거시험을 보았는데 답안지를 잘 쓴 동생이 형의 이름으로 내주어 합격시킨 경우가 있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뀐 동생이 문제를 제기해 바로잡혔다. 또 19세기 말기 흥선대원군이 전주 이씨들만 응시할 수 있는 종친과를 두었을 때 일테면 브로커들이 날뛰어 더욱 과거제도의 문란을 가져왔다.
오늘날 수능의 부정방법은 사전 모의시험을 하고 문명의 이기인 휴대전화를 이용했다고 하나 그 동기와 방법은 근원적으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런 부정의 동기는 예전처럼 대가와 인정에 관련이 깊은 듯하다.
- 과거는 3년에 한번씩 -
과거는 3년마다 보이는 정기시험과 필요에 따라 보이는 부정기시험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성균관의 명륜당 앞뜰에서 보이는 알성시(謁聖試)와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보이는 전시(殿試)가 대표적이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성균관은 교육기능과 함께 공자와 그 제자들을 받드는 기능을 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성균관 안에 명륜당을 지어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다.
임금들은 자주 성균관을 찾아 문묘에 술잔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치렀다. 임금은 이런 기회를 이용해 과거시험을 보였다. 이를 성인 공자 앞에서 시험을 치른다 하여 알성시라고 불렀다. 알성시는 문과·무과 응시생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 시험은 한 번으로 합격자를 뽑았고 한 과목만 보여서 시험 본 날 합격자를 발표했다. 또 고시 시간도 초 한 자루가 다 탈 때까지 답안지를 내게 한다하여 촉각시(燭刻試)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 탓으로 간단하게 채점할 수 있는 문제를 냈다. 조선 후기에는 알성시가 운이 많이 작용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응시생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적게는 몇 천명, 많게는 2만여 명이 몰려왔다. 그야말로 장터나 다름없었다.
창경궁 안에는 넓은 연못이 있고 연못 안에는 연꽃이 아름답게 피었다. 이곳을 춘당대라 부른다. 춘당대 주변에는 너른 공간이 있었다. 임금과 비빈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조선 전기부터 춘당대시의 이름으로 과거시험을 보였다. 또 왕궁의 뜰에서 보인다 하여 정시(庭試)라고도 했다.
춘당대시는 정기시험이 아니라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이는 특별시험이었다. 그리고 문과의 경우, 여러 단계를 두지 않고 한번의 시험으로 끝냈다. 무과의 경우, 복시(두 번째 시험)만을 보였다. 문과는 합격자를 5명 정도, 무과는 합격자를 몇 십명 단위로 뽑았다. 합격자는 당일 발표했다. 그 횟수도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20회 정도였다.
임금이 직접 시험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고관들이 시관을 맡았다. 그러므로 질서도 잡혔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 실력 있는 응시자들이 많이 몰려들었으며 다른 과거 합격자들보다 자부심을 가졌다.
아무튼 후기에 두 과거시험은 상피제를 적용치 않아 시관의 자제들도 응시할 수 있었으며 운이 많이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 탓으로 부정이 횡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