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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 산들(10) - 보길도 격자봉(적자봉)
어부사시사로 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조선시대의 고산 윤선도 선생이 제주도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배를 섬에 대고 수려한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배에서 내려 격자봉에 올랐고,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면서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그대로 정착했다고 알려져 있다.
자연경관이 빼어난 보길도에는 섬의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격자봉[(格紫峰)/적자봉(赤紫峰)] 능선이 있는데, 육지 기준으로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바다와 접한 섬에 있는 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만만하게 볼만한 낮은 산이 아니다. 또한, 보옥리 마을 앞에는 보죽산(甫竹山 뾰쪽산, 195m)이 있다.
격자봉 이름의 유래는 ‘윤선도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명확히 함)의 개념과 주자의 자양서원(紫陽書院)의 앞 글자를 차용하여 격자봉(格紫峰)으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고산의 5대 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답사하고 쓴 기행문인 보길도지(甫吉島識)에도 ‘…황원포에서 격자봉(格紫峰) 아래까지는 5리 남짓하다. 주산인 격자봉은 높이가 60~70길쯤 된다.…(이하 생략)’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1917년 일본인이 제작한 1/5만 지도에는 ‘적자봉(赤紫峰)’으로 적혀있고, 완도군 행정지도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검색서비스에도 ‘적자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정상의 높이도 완도군 행정지도에는 해발 431m로, 산에 있는 표지판에는 433m로 표기되어 있다. 이처럼 산 이름과 높이가 서로 달리 표기되어 혼란을 주고 있어 통일된 표기가 필요한 실정이다.
격자봉을 오르는 길은 다음과 같이 몇 갈래의 등산로가 있는데, 필자는 면 소재지인 청별에서 올라 보옥리로 내려가는 종주코스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1. 청별리 ➜ 광대봉 ➜ 큰길재 ➜ 수리봉 ➜ 격자봉 ➜ 누룩바위 ➜ 425봉 ➜ 뽀래기재 ➜ 보옥리(9.0㎞)
2. 낙서재 ➜ 큰길재 ➜ 격자봉 ➜ 425봉 ➜ 뽀래기재 ➜ 선창리재 ➜ 남은사 ➜ 구렁목 골 ➜ 낙서재
3. 보옥리 ➜ 뽀래기재 ➜ 425봉 ➜ 누룩바위 ➜ 격자봉 ➜ 수리봉 ➜ 큰길재 ➜ 낙서재(6.0㎞)
4. 예송리 ➜ 큰길재 ➜ 수리봉 ➜ 격자봉 ➜ 누룩바위 ➜ 425봉 ➜ 뽀래기재 ➜ 망월봉 ➜ 선창리(6.8㎞)
들머리는 청별리 보길파출소 앞에서 건물의 왼쪽을 끼고 돌아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서 세워놓은 안내도가 보이는 곳이다.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여 오르막을 10분쯤 오르면 주변이 환하게 트인 바위가 버티고 서있다.
바위에 올라서면 보길도와 노화도 사이에 있는 장사도를 징검다리로 연결된 보길대교(2008년 1월 준공)의 붉은 색 아치가 눈길을 잡아당긴다. 조금 더 고도를 높이면 왼쪽으로 청별리에서 정동리로 가는 길목의 바닷가쪽에 있는 ‘황원포’[潢源浦) - 고산(孤山) 선생이 제주도로 항해하던 도중에 심한 풍랑(風浪)을 만나 처음으로 보길도에 배를 정박(碇泊) 했던 곳으로, 어떤 바람이 불어도 맞지 않는 팔풍지석(八風之席)이다.]가 보이고, 그 뒤로 넙도•마안도•노록도 등 노화읍에 딸린 섬들이 보이고 멀리 땅끝마을의 전망대와 두륜산의 이어지는 호남정맥의 한 줄기인 달마선 능선도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리 급하지 않은 경사를 따라 오르다보면 광대봉(廣大峰 310.5m)이 나오는데, 도상 거리는 들머리로부터 2.5㎞ 정도 되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보면 발 아래로 월송리가 자리잡고 있고, 간척지를 건너 통리․중리해수욕장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쓴바위’가 있는 백도리와 바다 건너 소안도가 차례로 다가선다. 광대봉에서 큰길재까지는 약 1.4㎞ 거리의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큰길재는 부용리와 예송리를 연결하는 재로 옛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지역 주민들이 이용했던 곳으로, 길이 네 갈래로 갈라진다. 산행을 시작했던 청별리로 가는 길과 목적지인 보옥리로 가는 길이 있고, 왼쪽으로 0.9㎞ 내려가면 예송리로, 오른쪽으로 0.9㎞ 하산하면 부용리의 곡수당(낙서재)이 나온다.
■ 종주 : 보길파출소 뒤쪽 → 광대봉(廣大峰 311m) → 큰길재(↓) → 격자봉(433m) → 뽀래기재(↓) → 보옥리
광대봉 오르는 길에서 뒤돌아 본 보길대교와 노화도. ↓부분이 황원포(潢源浦)
황원포(潢源浦)- 고산(孤山) 선생이 제주도로 항해하던 도중에 심한 풍랑(風浪)을 만나 처음으로
보길도에 배를 정박(碇泊)했던곳으로, 어떤 바람이 불어도 맞지 않는 팔풍지석(八風之席)이다.]
광대봉에서 내려다 본 월송리 앞 간척지. 보길도의 유일한(?) 논들이 있는 지역이다.
광대봉을 지나면서 바라 본 '통리해수욕장'.
광대봉을 지나 큰길재로 가는 능선길에서 바라 본 예송리 마을과
바다 건너 예작도, 그리고 구름에 가려 당사도가 희미하게 보인다.
광대봉을 지나 큰길재로 가는 능선길에서 바라 본 격자봉(↓)과 수리봉(↓)
격자봉을 지나 누룩바위로 가는 능선길에서 바라 본 걸어왔던 능선
격자봉을 지나 누룩바위로 가는 능선길에서 바라 본 누룩바위(사람이 보이는 곳의 바위)
부황리에서 올려다 본 격자봉의 능선길. 왼쪽의 제일 높은 부분이 격자봉이고,
그 왼쪽으로 비슷한 높이에서 약간 솟아 오른 부분이 수리봉이다.
큰길재에서 수리봉으로 올라 내려다 본 예송리 주변 해역. 왼쪽으로 바다 건너 보이는 지점은 소안도이다. 예송리 앞에 보이는 섬이 '예작도'이고,
그 뒷쪽 두 개의 섬처럼 보이는 섬이 '당사도'이며. 당사도 오른쪽 앞에 보이는 섬이 무인도인 '복생도'다.
■ 보길도와의 인연
보길도에 고산 윤선도 선생이 정착한 해는 1637(인조 15)년 선생의 나이 51세 때였다. 혼탁한 정치현실에 회의를 느껴 향리인 해남에 낙향하여 있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우국충정에 불타던 선생은 임금을 돕기 위해 향리자제들과 의병, 가복(家僕) 등 근왕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배편으로 강화도로 향했다. 그러나 수일이 안 되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선생은 생각하기를, 호남으로 급히 돌아가면 영남으로 갔다는 어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조정의 명령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렇지 못하면 백이(伯夷)처럼 서산(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서산지미(西山之薇)>, 기자처럼 은둔하여 거문고를 타며 <기자지금(箕子之琴)>, 관녕처럼 목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관녕지탑(管寧之榻)>것이 나의 뜻이라 하고 급히 영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하지맹(城下之盟, 남한산성 아래 삼전도에서 항복한 일)의 치욕이 있었다. 선생은 충분(忠憤)에 복받치어 다시는 육지에 오르지 않으려고 배를 띄워 남쪽을 향해 내려가서 탐라(耽羅 : 제주도)로 들어가려 하였다. 가는 길에 심한 풍랑으로 배를 보길도에 대고, 그 수려한 봉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배에서 내려 격자봉에 올랐다.
그 영숙(靈淑)한 산기(山氣)와 기절한 수석을 보고 탄식하기를,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하고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그대로 살 곳으로 잡았다.
* 산의 높이는 완도군에서 발행하는 ‘완도군 행정지도’에 나오는 높이를 기준으로 표기. 보길도 보적산 431m
[ 격자봉 등산코스 ]
■ 등산 코스
제1코스 : 정자리고택 → 남은사 → 뽀래기재 → 격자봉정상 → 큰길재 → 동산
제2코스 : 세연정 → 보길초등학교 → 부용리사무소 → 곡수당 → 낙서재 → 산신당골 → 격자봉 정상
격자봉(425m, 완도군 보길면)
보길도는 하나의 커다란 자연공원이다. 동서12㎞ 남북 8㎞로 15개의 부속도서를 거느리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숨겨둔 보석으로 남아있는 섬이다. 그 중심에 적자봉(425m)이 있다, 실질적으로 보길도를 이루는 섬이 적자봉이다. 적자봉이라는 이름은 산 자체가 상록활엽수로 이루어져 해가 비추면 나뭇잎이 햇볕을 반사해 산이 붉은색을 띤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적자봉을 중심으로 광대봉(廣大峰 311m), 망월봉(望月峰 350m)이 둥근 원을 그리듯 펼쳐져 있고 안쪽으로 고산 윤선도의 적거지였던 부용동이 있다.
적자봉은 난대림 지역으로 동백을 비롯해 200여종 이상의 난대림(상록활엽수)이 자생하는 곳이다, 산의 대부분이 난대림으로 덮여 있지만 8부 능선부터는 섬회양목과 소사나무가 90% 이상으로 주종을 이룬다. 특히 능선에는 이끼식물과 덩굴식물이 가득해 마치 원시림에 들어온 느낌이다. 우리나라에 동백꽃과 군락지가 좋은 곳이 많이 있지만 적자봉 만큼 많은 동백나무가 있고 붉은 꽃이 피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11월부터 피기 시작하는 동백은 이듬해 4월까지 꽃을 피우며 손님들을 맞는다. 쉽게 말해 적자봉은 제주에서 온 봄소식을 육지에 전해주는 전령사로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다.
■ 격자봉을 오르는 길
낙서재 ☞산신당골 ☞큰길재 ☞정상 ☞425봉 ☞뽀래기 재 ☞선창리 재 ☞남은사 ☞구렁목 골 ☞ 낙서재 [원점회귀]
이 길은 원점회귀 산행으로 적자봉을 종주하는 길이다. 먼저 부용동의 고산 적거지였던 낙서재가 산행의 기점이다.
낙서재는 고산의 생활공간으로 지금은 돌담과 함께 터만이 덩그렇게 남아있다. 낙서재의 바로 옆으로 곡수당이
있는데 곡수당 옆을 흐르는 조금한 개울이 차낭골이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차낭골을 따라 큰길 재를 오르는 산길은 대낮에도 어두울 만치 울창한 숲이 터널을 이룬다. 경사는 완만한 편이나
다소 답답함이 있다. 20여분을 오르면 큰길재 정상이 나온다. 큰길재는 부용동과 예송리를 연결하는 재로 옛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이곳 사람들이 이용했던 길이다. 여기서 곧장 가면 예송리이고 좌측으로 오르면
광대봉이다. 광대봉을 뒤로하고 우측으로 접어들어 수리봉 능선으로 들어선다. 길이 가파르다 종주길에서 가장
어려운 가파른 길이다. 군데군데 바다를 볼 수 있는 바위가 있지만 온통 울창한 숲이 능선길을 이룬다. 50여분을
걸어 수리봉 정상에 오르니 보길도가 사방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남쪽의 해안이 아름답다. 능선을 바라보니
정상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다시 정상을 향한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40여분이 소요된다. 지극히 평범하고
순탄한 길이다. 주변으로는 회양목과 소사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태고의 신비를 간직, 이끼와 콩란으로 가득했던 원시림이 어느 때부터 인가 사람의 발길이 닿기 시작해 지금은
고속도로가 되어버렸다.
흐트러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적자봉 정상에 선다. 여기도 표지석이 없다면 정상인지 아닌지 아리송할 정도로 적자봉
능선은 전체가 완만하고 밋밋하다. 여기도 조망은 괜찮지만 잠시 숨을 돌리고 바로 옆의 누룩바위로 향한다, 적자봉
능선에서 전망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다. 바위에 대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높이가 10여m이상은 족히 되는 커다란
바위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광을 볼려면 여기서 담력시험에 들어야 한다. 누룩바위에 오를려면 한길쯤 되는
수직벽을 건너뛰어야 한다. 평상시 산행을 많이 했다면 모르지만 초보자라면 쉽지가 않다. 누룩바위 정상에 오르니
전망이 압권이다. 이런 다이내믹한 풍경이 대한민국 섬 어디에 또 있을까..... 동쪽을 보니 부드러운 능선위로 소안도가 솟아있고 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예작, 당사, 사수,제주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추자군도와 진도의 조도군도
가 북쪽으로는 넙도, 서넙도, 마안, 죽굴도등 셀수도 없이 많은 섬과 함께 땅끝 전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발아래는
연꽃이 피는 형국이어서 고산이 이름을 붙였다는 부용동이 펼쳐진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누룩바위를 내려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뽀래기재를 향해 또다시 숲속으로 빠져든다. 계속되는 나무터널을 지나 425봉을 넘으니 뽀래기재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좌측으로 보옥마을의 컬러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선명하게 빛난다. 종주산행 중 두 번째로 지나는 뽀래기재는 20여년전까지 보옥리 사람들이 부용동으로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보길에서도 가장 외진곳인 보옥리는 20여년전까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뱃길을
이용하거나 이 길을 통해 도회지로 나갔다.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보옥리를 뽀래기라 부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뽀래기재에서 망월봉 능선으로 오른다. 산줄기는 서북능선으로 이어진다, 서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선창리
앞 바다가 쏟아지는 햇살에 은빛으로 일렁인다. 망월봉을 버리고 한참을 가니 선창리재가 나온다 오늘의 마지막
고개이다, 이곳도 옛날 선창리 사람들이 부용동으로 넘어올 때 사용되었던 고갯길이다. 지금은 오프로드 차를 이용한다면 부용동에서 선창리로 넘을 수 있게 길이 나있다. 선창리재에서 부용동 쪽으로 500여m를 내려오면 남은사로 오르는 길이 있다, 초입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무사안녕을 빌며 하나 둘 모아둔 돌탑이 있다. 30여분을 오르면 조금한 절집이
나타난다. 남은사다. 이곳은 물맛이 좋고 뒷산의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남은사를 들르고 싶지 않다면 선창리재에서 비포장 도로를 따라 부용동으로 바로 오면된다.
보옥리 ☞ 뽀래기 재 ☞ 425봉 ☞ 누룩바위 ☞ 정상 ☞ 수리봉 ☞ 큰길 재 ☞ 낙서재
이 길은 최근 들어 산악인들로부터 각광받기 시작한 길이다. 부용동의 반대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바다가를 끼고도는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따라 보옥리에 도착하여 보죽산(뾰쪽산)을 등반하고 마을 뒤 골짜기로 접어들면 등산이 시작된다. 보죽산은 국립지리원이 사용하는 공식 이름이나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뾰쪽산이라 부른다. 보옥리 마을앞에 우뚝 선
보죽산은 초입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비록 봉우리는 낮으나 경사가 가파르고 정상까지 나무 터널로 이어져 있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과 함께 가뿐 숨을 몰아쉬면 정상의 상쾌함이 여러분을 반길 것이다, 이후는 상상속에 맞긴다.
보죽산 등반을 마치고 마을 가운데 길을 통해 오솔길로 접어들면 보옥리재로 가는 등반이 시작된다. 곳곳에 크고 작은 바위가 널려있다. 25분여를 오르면 폐사지가 나타난다. 백련사지다. 주변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너럭바위라 부른다.
50여명은 넉넉하게 않을 수 있는 바위인데 이곳에서 보옥리 마을과 함께 추자도가 훤히 내려 다 보인다. 너럭바위에서 10여분을 오르면 뽀래기재고 이후부터는 425봉을 거쳐 적자봉, 수리봉, 큰길재를 거쳐 부용동(낙서재)으로 내려서면
된다.
예송리 ☞ 큰길 재 ☞ 수리봉 ☞ 적자봉 ☞ 425봉 ☞ 뽀래기 재 ☞ 망월봉 ☞ 선창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중에 하나인 예송리 마을 뒤편에서 시작된다. 마을뒤편에 예송마을 당집이 있다,
여기가 산행의 기점이다. 초입에 보옥리 10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나 실질적인 거리인지 도상거리인지는 알
수 없다. 초입부터 나무계단이 시작된다. 이곳도 낙서재에서 오르는 길처럼 숲이 울창하다. 나무만 바라보며 30여분을 오르면 큰길재와 만난다. 이후 수리봉, 정상, 누룩바위, 뽀래기재를 거쳐 망월봉 능선으로 오른 뒤 망월봉으로 올라
서면 된다. 망월봉 능선은 짧지만 곳곳에 바위가 있어 좌우로 바다를 바라보며 망월봉으로 갈 수 있다. 망월봉에 올라서면 선창리와 걸매도, 미역섬, 모래섬, 닭섬, 넙도, 서넙도등, 아름다운 다도해를 볼 수 있다. 하산은 선창리로 하면 된다.
보길면의 유래
(송하진 교수의 ‘보길도 지명의 조사 연구’ 논문에서)
1. 보길도(甫吉島) - 배골두, 보고리, 보고래
보길도’라는 표기는 「동국여지승람」(1481년)에 등장하고 있어 그 구전 명칭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전래 고유어 지명을 고산(孤山)이 한자로 바꾸어 표기한 것으로 추측한 것은 잘못이다.
2. ‘뵈골두~배골두’라 부르는 학설
바구리의 옛말 ‘보고리’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지도상의 보길도는 백도 쪽을 제외하면
바구니 모양이다. 인근 도서민들이 바구리 섬이라고 부르곤 했다.
3. ‘보고래’로 부르는 학설
보+가래’로 분석될 것으로 보인다. ‘보’는 나무와 관련된 형태소로 짐작되며, ‘삽’을 뜻하는 고어로 보인다.
나무로 만든 보습의 방언형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습이란 쟁기를 뜻한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 영암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묘 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십용십일구(十用十一口, 甫吉)’라는 글을 남겼다 한다. 부자는 월출산에 있는 한 스님에게 내용을 물으니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군데가 있는데 10군데는 이미 사용되었고 나머지 1군데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고 풀어 이 섬을 보길도라 불렀다고도 한다.
[출처] 완도의 산들 ⑪ - 보길도 격자봉(적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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