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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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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천골 | 거림계곡 | 도장골 | 구룡계곡 | 용소 | 용추계곡 | 화림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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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궁계곡 | 목통골 | 얼음골 | 조개골 | 천은사계곡
1. 뱀사골하면 한국의 명수(名水)로 통한다.
지리산의 깊고 깊은 산록에서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빚어져 즐비한 징담을 거쳐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뱀사골의 청정계류는 가히 손색없는 우리나라의 으뜸 물줄기라 부를만 하다.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사이의 울창한 원시림 지대에서 발원된 물줄기가 기암괴석을 감돌아 흐르면서 절경을
일구어 놓아 뱀사골의 계곡미 또한 장관이다. 우리나라 계곡의 대명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잘 알려져 찾는 이도 많지만 그 품이 너무도 넓고 깊어 쉽게 오염되지 않는다.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의 화개재에서 남원시 산내면 반선리 집단시설지구까지 12km, 장장 39여리의 물줄기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소(沼)와 징담이 뱀사골의 가장 큰 자랑이다.
대표적인 것만 하더라도 오룡대, 뱀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가 그림같이 전개 돼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뱀사골의 특징은 화려한 소와 징담의 잔치와 더불어 산행을 하다 보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힘들이지 않고 어물쩍
길손의 발길을 산마루에 올려 놓게 하는 그 완만하고 고른 경사도를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뱀사골에는 연중 등산객 뿐만 아니라 가족 단위의 행락객들이 많이 찾아 든다.
옛날 뱀사골 입구에는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매년 칠월 칠석날 밤이면 주지 스님이 사라져 마을 사람들은 스님이
부처로 승천했다고 믿고 있었다. 서산대사가 이 소리를 전해 듣고는 사람이 부처가 되어 승천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
어느해 칠석날 장삼 속에 비상(극약) 주머니를 달아 주지 스님에게 입혀 예년과 똑같이 독경을 하도록 시켰다.
새벽녘이 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큰 뱀이 송림사에 왔다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이에 서산대사가 뱀을 따라 올라 가보니 용이 못 된 이무기가 뱀소에 죽어 있어 뱀의 배를 갈라보니 주지스님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死)골이라고 하였고 끝내 용으로 승천하지 못 한 이무기를 일러
반선(半仙)이라 부르다 어느 때부터인가 반선(伴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전설 속에 등장한 송림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며 그 터에 전적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뱀사골의 유래는 이 외에 여러 이야기가 많다.
옛날 석실(石室) 부근에 배암사라는 절이 있어서 뱀사로 줄여 뱀사골로 됐다는 얘기도 있고 뱀소(沼)에서 유래되어 뱀소골, 뱀사골로 부른다. 또 뱀사골은 수많은 소(沼)가운데 간장소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개재를 넘나들며 소금 장사를 하던 운봉
소금장수의 얘기가 있다. 그 옛날 화개장터에서 소금을 사서 화개재를 넘어오던 소금장수가 너무 지친 나머지 발을 헛디뎌 소금과 함께 웅덩이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 후로 이 웅덩이의 물이 간장처럼 짜다고 해 간장소라 불렀다 한다.
그리고 화개재에서 삼도봉을 거쳐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목 왼쪽에 이름모를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 무덤이 운봉 소금장수의 무덤이라는 얘기도 있다. 뱀사골의 소와 징담마다 그에 얽힌 얘기가 전해지는데 제승대는 정진 스님이 산을 향해 제를
올렸던 곳이라고 하는 등 뱀과 용에 얽힌 설화가 수두룩하다. 곳곳마다 징담이 이름과 함께 그 유래를 간략하게 소개해주고 있어 찾는 이를 흥미롭게 해주고 있다. 또 간혹 오래된 지도상에 삼차, 막차라고 나오는 지명이 있는데 이는 산간도로를
만들어 지리산의 거목을 나르던 당시의 지명들이다.
뱀사골의 절경은 빼어나지만 이 곳에는 잊지 못 할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픈 흔적이 남아 있다.
반선의 옛 송림사 터에 세워져 있는 전적 기념관만이 당시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 전적기념관은 지난 79년 국방부가 조성한 것으로 광복 이후 6·25를 거치는 동안 지리산에서 벌어진 동족 상잔의 역사를 유일하게 상기시켜 주는 곳이다. 기념비와 2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각각의 전시실에는 당시의 각종 무기류와 사진, 모형물들이 전시되어 교육적으로 큰 가치를 갖고 있다.
전적기념관에서 시작되는 뱀사골은 화개재까지 이어지는데 대개 등반객들은 화개재 200m 아래 뱀사골 산장을 목표로
산행을 한다. 12km의 긴 등산로는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데다 지리산 등산로 가운데 가장 완만한 경사를 하고 있는 탓에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뱀사골 등반은 등산이라기 보다 산책하듯 즐길 수 있는데 전적 기념관 옆으로 널따란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한동안 이어진다. 큰 길 대신 계곡변 소로를 택해 오를 수도 있다.
두 길은 결국 석실 부근 제3야영장에서 만난다.
감나무와 간이매점을 지나면 용이 머리를 흔들고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는 일명 흔들바위 요룡대가 나타나고 곧 반야교가
나온다. 곧이어 탁용소가 나오는데 긴 암반 위로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물줄기가 장관이다.
탁용소에서 금포교를 건너면 용이 못 된 이무기가 살던 곳이라는 뱀소가 나오고 병모양의 기묘한 형상을 한 소가
연이어진다. 천장이 아치형인 명선교, 옥류교를 거쳐 계속 오르면 정진스님이 산신제를 올리던 제승대, 소금장수가
빠졌다는 간장소가 이어진다. 화려한 소와 징담을 지나 고목이 뒹굴기도 하는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어느샌가 뱀사골산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78년 반야봉산장으로 탄생했던 뱀사골산장은 그후 85년 개축돼 지금은 8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
89년 12월에는 전화도 개통돼(0671-33-1732) 대피소 기능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풍부한 샘물 덕분에 많은 등산객이 붐벼 다소 지저분하다는 인상마저 든다.
뱀사골을 찾는 등반객들은 이곳에서 1박 한 뒤 반야봉을 오르거나 산을 넘어 피아골, 멀리 노고단과 화엄사를 거쳐
하산하기도 한다. 또 연하천산장을 지나 세석이나 천왕봉을 오르는 등반객도 많다.
한여름철 뱀사골을 찾아 지리산 계곡의 진수를 만끽해 봄직하다.
2. 칠선계곡은 지리산 최대의 계곡미를 자랑하며 갖가지 형용사들이 동원돼 표현된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면서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는 칠선계곡은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가 펼쳐지는 대 자원의 파노라마처럼 천왕봉정상에서 마천면 의탄까지 장장 18km에 걸쳐 길게 이
어져 있다.
지리산자락 가운데 유독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이 가장 많으면서도 들어가면 갈수록 골이 더욱 깊고 날카로운 칠선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해 숱한 생명을 앗아 가기도해 죽음의 골짜기로도 불릴 정도이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꼭 등반하고 싶어 하지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전문 산악인들도 히말라야등 원정등반에 앞서 겨울철 칠선계곡에서의 빙폭훈련등반을 거칠 정도로 겨울의 칠선은
고난이도의 등반 기술을 요구한다. 일반인들의 경우 칠선계곡을 등반하려면 여름철에도 계곡 아래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루트는 피하고 주로 다른 코스로 천왕봉에 올랐다가 하산 길로 칠선계곡을 택한다.
칠선계곡의 총 연장은 18km이지만 등반코스는 추성동에서부터 천왕봉까지 14km이다.
지난해 까지만해도 버스편에 의한 마을까지 밖에 연결이 안됐지만 지금은 한시간 간격으로 추성동-함양읍간을 운행하는
버스편이 있어 등산로가 4km줄어든 셈이다.
추성동에서 시작되는 칠선계곡 등반로는 전체적으로 계곡등반의 위험성 때문에 상당 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산로를 벗어나서는 마음놓고 발길을 둘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동에서 등산로를 따라 곧장 가면 칠선계곡에서 처음 만나게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에 용소가는 길을 표기해 놓았으나 등산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계곡으로 거슬러 가면 5백여m 지점에 위치한 용소는 산신제를 지낼때 산돼지를 집어 넣는 곳으로 전해진다.
계곡을 따라 2km남짓 오르면 두지동(두지터라고도 함)이 나오는데 등산로는 계곡길 떨어져 별도로 나있다.
주로 등산로를 이용하고 있는데 두지동은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화전민들이 기거하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담배건조장과 농막등만 남아 이 마을이 등산객들의 휴게소로 각광받고
있는데 담배 건조장이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변해있어 눈길을 끈다.
두지동에서는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갈수도 있다. 한동안 계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암반과 소가 어우러진 곳에 설치된 쇠다리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힘겹게 오르다보면 잡초와 감나무, 호도나무가 어지럽게 뒤덮인 마을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이 옛 칠선동 마을 터로 한때 독가촌이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울창한 잡목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 아래서 들릴듯 말듯 하며 널따란 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여기가 전망좋은 쉼터인 추성망 바위이다.
여기서부터는 계곡등반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험난한 산 길이 계속돼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까지 계속된다. 일곱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 지금은 돌과 모래등으로 메워 져 전설속의 선녀가
목욕했을 정도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초라하다.
선녀탕의 전설은 선녀에게 연정을 품은 곰과 선녀를 도운 사향 노루가 등장하는 동화같은 얘기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선녀가 이 곳에서 목욕하는 것을 본 곰이 선녀들이 하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겨 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때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 틈에 누워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 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이주 시켜 살게 했으며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는 전설이다.
선녀탕에서 조금 지나면 1백여평 남짓한 소와 매끈한 암반이 있는데 칠선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옥녀탕이다.
하늘을 뒤덮은 듯한 울창한 수림과 넓은 소가 연출해 내 는 옥녀탕의 전경은 위로 무명 소들과 이어져 깎아지른듯한
벼랑으로 연결되면서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벼랑으로 조심스럽게 오르다 보면 비선담이 또 색다른 모습으로 반긴다.
계곡등반의 묘미를 한껏 맛볼 수 있는 구간이다.
비선담을 지나면 다시 옛 목기막터가 있었다는 산죽밭을 지나 오른편 계곡으로 건 너게 되는데 계곡주변에 조그마한
바위굴이 있다. 과거 목기를 만들던 인부들이 지내던 곳으로 청춘홀이라 불리고 있다.
3. 피아골은 아름다운 계곡이다.
특히 피아골의 아름다움은 봄철 진달래, 여름철 우거진 녹음, 가을철 단풍, 겨울철 설화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가을의
단풍은 지리산에서 으뜸이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하고 고운 피아골의 단풍은 찾는 이를 매료 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피아골의 단풍은 삼홍(三紅)이라 하여 산이 붉게 불타는 산홍(山紅), 붉은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치는 수홍(水紅) ,
사람이 들어서면 사람도 붉게 물드는 인흥(人紅)이 절경이다.
그 가운데 표고막터에서 삼홍소 간 1km사이의 빼어난 풍경이 피아골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토록 아름다운 단풍을 빚어내는 피아골은 연곡천의 상류인 연곡사로부터 주릉을 향해 40여리에 걸쳐 이어져 있다.
반야봉 중턱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주릉과 불무장등릉, 그리고 노고단과 왕시루봉릉 사이의 원시림지대를 누비며 서남으로 돌고 돌아 왕시루봉을 따라 내려가 섬진강에 이른다.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 주릉에서 빚어지는 피아골의 물은 울창한 수림과 아름다운 수석을 감돌아 늘 청정함이 깃들여 있다. 즉 반야봉의 중턱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삼도봉과 노루목, 임걸령, 불무장등 사이의 원시림지대와 기암괴석을 감돌아
내려오다 노고단과 질매재에서 흘러내린 계류와 하나가 되면서 웅장하고 깊고 깊은 계곡을 만든다.
피아골의 어원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계곡 중간의 직전마을이란 지명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연곡사에서 2km정도 오르면 조그마한 마을이 나오는데 바로 직전(稷田)마을이다.
이는 오곡 중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가꾸는 밭, 즉 피밭이 있던 마을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옛날부터 이곳에서 오곡 중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다는 의미가 바로 피아골의 어원이다.
처음에 피밭골 (稷田谷)이던 것이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다.
피아골은 장장 40여리에 이르지만 차량이 직전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는 탓에 그 깊이를 그렇게 크게 느낄 수는 없다.
피아골 등반은 차량이 들어가는 직전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직전마을에서 선유교까지는 30분 정도 걸리는 비포장의 넓은 길이다.
왼쪽의 아름다운 계곡미를 맛보며 거닐면 상큼한 기분이 압도한다.
선유교를 건너면 비교적 너른 야영장이 나온다. 표고막터라 부른다.
일제시대 때 이곳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했던 곳이라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철에 한해 이곳에서 야영이 가능하다는 국립공원 안내 입간판이 이색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냐면 지리산 어느곳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야영장으로 둔갑해 있는 현시점에서 구태여 이곳에 한해 여름철 한철만
야영을 허가한다니... 화장실 시설과 함께 잘 다져진 야영장 바로 아래 큰 나무 밑을 살펴보면 그물망을 쳐놓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서울대 농대에서 만들어 놓은 채종장이다. 종자를 받기위해 조그마한 그물을 나무 아래에 설치해 놓은 것이다. 표고막터에서부터는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선유교를 건너지 않고 그대로 계곡 오른편으로도 등산로가 이어져
있으나 잘 이용되지 않고 선유교를 건너 표고 막터를 거쳐 계곡 왼쪽길이 많이 애용된다.
울창한 활엽수림에서 내뿜는 상큼한 산소를 마시며 잘 다듬어진 돌길을 걷는 기분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평탄하며 완만한 길을 흠뻑 물든 단풍의 정취에다 계류의 청아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피아골 단풍의 백미로 산홍, 수홍, 인홍 등 삼홍을 맛볼 수는 삼홍소까지는 30분 정도면 당도한다.
86년에 가설된 삼홍교가 주변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삼홍소에서 10여분 오르면 구계포다리가 나오고 여기서 바라보는 피아골의 경치는 극치를 이룬다.
완만한 암반위로 영롱한 오색의 구슬들이 층층 계단을 타고 쏟아지는 장관은 탄성을 절로 나게 만든다.
절경을 뒤로 하고 다시 10여분정도 오르면 남매폭포가 기다린다. 3∼4m의 아담한 쌍폭이다.
여기서 다시 조금 오르면 와폭이 있고 기다리던 피아골 산장이 나타난다.
4. 장당골, 길고 깨끗하며 적막감마저 감도는 지리산 동부의 계곡이다.
써리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의 덕천강에 합류하기까지 그 길이가 50여리, 20km에 이른다.
기나긴 여정을 요구하는 장당골은 골짜기 속의 골짜기로 곧잘 표현된다.덕산에서 대원사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포마을에서 계곡을 거슬러 가다보면 내원사 앞 계곡에서 물줄기가 둘로 나뉘어지는데 왼쪽은 내원골, 오른쪽이 바로
장당골에 해당된다.
장당골은 다시 바깥장당과 안장당으로 구분되는데 더 상류로 가면 무재치기폭포로 이어지는 물줄기와 써리봉과 남단부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써리봉∼국사봉을 잇는 황금능선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 주변에서 모여져
내원사까지 흐르다가 내원골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합류, 대포마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류의 무재치기 폭포는 지리산에서 가장 이름난 폭포수로 물줄기가 쏟아지면서 아래의 바위에 부딪쳐 아름다운 무지개를 빚어내는 폭포로 유명하다. 무재치기폭포 이외에 장당골에는 이렇다 할 명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장당골의 속으로 깊이 파고 들수록 배어나오는 태고적 신비감과 순수함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독특한 형태의 물줄기는 하류, 다시 말해 경상대 연습림이라는 널찍한 산판도로와 8차례나 엉키며 이어지고 있어
등산로라기 보다는 산책로 정도로 평가되고 있으나 상류는 전혀 판이한 형국을 하고 있다.
울창한 수림이 뒤엉켜 넘어지면 그대로 썩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자연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 바로 장당골 상류이다. 아직은 사람의 때를 덜 탄 때문이다.
진초록의 청류와 수림은 정적의 운치를 더해 찾는 이를 오히려 두려움에 젖게 할 정도다.
등산로는 치발목 산장과 무재치기 폭포에서 내원사 주차장까지 17km구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대포마을에서 내원사까지는 차량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버스편으로 등반을 시작하려면 대포마을까지를 등산로로 간주해야 한다.
내원사 주차장 오른편 위로 계속되는 산판도로 입구에는 국립공원관리 공단에서 차량운행을 통제하는 시설을 설치,
차량 운행을 하지 못 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등산로의 시발점을 이곳으로 본 것이다.
내원사에서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까지 도로가 잘 다듬어져 있는데 8번이나 계곡과 만나는 탓에 지프차 이외의
일반차량은 운행이 불가능하다.장마철 계곡 물이 불어나면 지프차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내원사∼장당보호소 간은 대략 10km 거리로 두 시간 가량 걸어야 된다.
등산로라기보다는 호젓한 산책로 같은 이 구간은 장당골 특유의 깨끗하고 짙푸른 계곡수로 유명하다.
거대한 폭포수가 있는가 하면 산중호수를 연상케 할 정도의 넓고 깊은 소등 오밀조밀 계곡의 풍치는 일품이다.
이런 탓에 이 일대는 아직 덜 알려져 있는데도 매년 여름철이면 피서 인파들로 붐빈다.
실제는 여름 한철뿐 아니라 장당골에는 사시사철 색다른 자연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일반인들이 잘 몰라 아직은 여름
한철만 애용되곤 한다. 그래서 장당골을 잘 아는 산꾼들에게만 지리산의 아름다운 자연 세계를 보여주는 [소중한 비밀]로 아직 남아 있다. 이는 아마도 장당골이 천왕봉과 다소 동떨어진 탓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경상대 연습림을 지나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는 구간은 계곡의 아름다움과 함께 대자연의 신비를 일깨워주는 진미가
감취진 곳이다. 더욱이 이곳 장당골에 조림된 경상대의 연습림까지 있는 사실을 고려하면 장당골 계곡의 세계는 더할
나위가 없는 값진 것이다.경상대의 연습림은 지리산 자연자원의 경이로운 세계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는 잣나무 숲지대는 장관이다.
이 잣나무들은 일제 당시 일본의 규퓨대 연습림 시절에 조림된 것으로 광복과 함께 경상대에서 인수 받은 것이다.
자연자원의 활용과 조림 등에서 당시 일본인의 자연에 대한 애정을 새삼 되새겨 볼 수 있는 부분이지만 한편으론 일제의
당시 손길이 지리산 깊은 계곡 장당골에까지 미쳤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장당골의 경상대 연습림은 한대와 온대에 속하며 전체 면적은 4천5백37ha에 이른다.
임업과 학생들의 실험 실습장으로 활용되며 임산 및 임산가공 등에 관한 연구의 장으로 널리 이용돼 경상대 임학 연구뿐
아니라 우리나라 임산가공학의 산실로 평가되고 있다.뿐만아니라 지리산의 삼림 자원과 생태계 보존 관리 측면에서
경상대 연습림은 크게 기여해 오고 있다.
장당골 산판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장당골 보호소는 임학도뿐 아니라 일반 대학생들의 하·동계 수련장 등으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경상대 연습림의 효용도는 지리산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자연세계의 모든 것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하는데서 찾을 수 있듯이 이에 따른 보다 적극적인 연구와 투자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즉, 자연자원의 효율적인 이용과 연구를 통해 자연을 보존하고 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과감한 투자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여태껏 임산 및 임산가공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나 다소 원시적인 수법으로 관리돼 온 사실은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그저 조림사업만 해놓은 채 관찰하기보다는 보다 과학적인 측면으로 자원에 접근함으로써 합리적인 자연자원의
활용 방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당골에는 아름다운 배경과 경상대 연습림 이외에 특이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화전민의 생활터전이던 화전민 가옥과 화전민의 삶터가 그것이다. 지금도 장당보호소와 안장당에는 화전민들이 기거했던 통나무집들이 몇 채 남아 있어 당시 화전민들의 생활양식을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될 만하다.
계곡 주변에는 수풀이 우거진 채 묵은 논 밭들이 줄을 지은 채 버려져 있다.
언뜻 보기에도 이 일대가 상당한 농가들이 살면서 논밭을 일궈 살았으리란 짐작을 할 수 있다.
장당골에는 6.25이전까지 50여 가구의 화전민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쟁 와중에 빨치산들의 주요 근거지로 이용되면서 화전민들은 생활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가 60년대 다시 화전민들이 장당골에 들어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60년대 들어왔던 화전민들은 그 옛날 화전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통나무를
이용해 집을 짓고 논밭을 개간하거나 가축들을 기르며 바깥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영위해 왔었다.
그러나 이들 화전민들은 64년 화전 민가전방화사건과 67년 국립공원 지정이후 다른 곳으로 이전되면서 모두 종적을 감추고 장당골에는 이들 화전민들이 살던 통나무집만 남았다. 강렬한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화전민의 삶처럼 통나무집들도 제
모습을 쉽게 잃지 않으려는 듯 그렇게 버티고 있다.
이 통나무 집은 자연학습원이 복원해 기념물로 보존하고 있는 두류옥(귀틀집) 형태를 그대로 하고 있는데 다만 지붕은
양철로 남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 현대 문명과 귀틀집의 조화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자연학습원의 귀틀집 원형이 사실은 장당골 화전민들의 폐가인 통나무집이었던 것이다.
굵기가 비슷한 통나무를 일정한 길이로 잘라 네 귀퉁이를 연결해 쌓아올린 뒤 흙을 발랐으며 지붕은 원래는 갈대나
산죽 등을 엮어 이용했으나 남아 있는 이들 집에는 양철지붕이 씌워져 있다.
더 허물어지기 전에 이들 가옥을 복원해 화전민들의 생활상을 남겨 후세에 전해줄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당골 화전민의 삶에는 우리 한민족의 애환과 동족상잔의 잔영이 배어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5. 내원사의 풍경은 실경산수(實景山水) 그 자체다.
봄에는 골짜기를 타고 오르는 봄기운이 절에서 나는 향 내음과 함께 사바세계를 맑게 정화하는 듯하고, 여름에는 짙푸른
녹음과 골짜기를 울리는 계류소리로 더운 기운을 멀리 떨치는 듯하고, 가을이면 저녁 노을이 없어도 온갖 단풍들로 하늘과 계류가 붉게 물들고, 겨울이면 순백의 산등성이 위로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삼라만상의 본성을 깨우려는 듯 소리의
멈춤이 없다. 지리산의 비극과 고적함, 광대함, 깊이를 동시에 갖고 있는 계곡이 내원사 계곡이다.
지리산의 마지막 빨치산이 내원사계곡에서 붙잡혔으며, 계곡에 위치한 암자가 10여개에 달하고, 구곡산에서 국사봉을 거쳐 써리봉, 중봉으로 해서 천왕봉에 이르는 산정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 계곡의 양 축인 내원골과 장당골의 길이만도
100여 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산청군 삼장면 소재지인 대포리에서 시작하는 내원사계곡은 내원사 앞에서 내원골과 장당골로 나눠진다.
양쪽 골짜기에서 흘러온 계류가 대포리 어귀에서 대원사쪽 계류와 합쳐지면서 대포(大浦)란 이름 그대로 큰 물바다를
이룬다. 대포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노송 숲과 음양석이 반긴다.
내원사계곡은 1960년대만 해도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 깃점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중산리나 대원사까지 차가 들어가지 못하던 시절에는 산청군 시천면 소재지인 덕산이 종점이었기에
덕산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대포리에서 본격적인 산행을 해야 했다. 당시에는 등산장비도 없던 시절이라 장비 무게만도
보통 50kg이 넘었는데 된장독을 지고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산행코스는 대포리에서 내원사를 거쳐 내원골이나 장당골로 해서 순두류와 법계사를 통해 정상인 천왕봉에 올랐다.
여름에는 산행을 하다가 계곡에 발을 담그고 땀을 식혀 가며 올랐는데 천왕봉을 다녀오는데도 대부분 산행기간을 짧게는
3,4일에서 길게는 10여 일 이상씩 잡았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이 당일 산행과 같은 속도감 보다는 진정 산의 속내를 느끼는 산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포 마을에서 내원사에 이르는 3km는 계곡을 따라 오른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토담 너머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어 가을에 가면 손만 벌리면 잘익은 홍시를 따 먹을 수 있다.
마을 인심도 길 가는 과객의 홍시 하나쯤엔 눈길도 주지 않을 정도로 후하다.
또한 여름이면 야영객들로 붐빈다. 그러나 내원사계곡의 압권은 내원사 주변이다.
내원사는 갈림길에서 내원골과 장당골 중 어느쪽으로 가도 되지만 첫 맛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장당골쪽인 곧장 앞으로
가는 길이 좋다. 들머리의 숲도 그렇지만 장당골에서 흘러내려오는 계류 위를 걸치고 있는 반야교(般若橋) 주변의 경치가
어느곳 보다 빼어나기 때문이다. 반야교에 서면 한 여름에도 소름을 돋게하는 계곡의 찬 기운을 느낄 수 있고,
기암괴석 사이로 미끄러지듯 유연한 계류를 볼 수 있다.
내원사는 지리산의 웅장함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그 자태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가람답게 당당해 보인다.
먼저 오랜 풍상 속에서도 제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삼층석탑의 단아한 자태는 용맹정진 중인 스님의 모습처럼 결기가
보이고, 비로전에 안치돼 있는 비로자나석불은 자비가 가득한 표정으로 중생제도의 넉넉함을 보여준다.
이 나라에 불교문화가 꽃을 활짝 피우는 시기인 8세기의 석탑과 불상의 양식을 볼 수 있다.
절을 한 바퀴 돌아 대나무 밭쪽으로 나가면 내원마을 가는 길이다.
장당골에는 마을이 없는 반면 내원골에는 바깥내원과 안내원마을이 있다.
예전에는 양쪽 골짜기 모두에 화전민촌이 있었으나 경상대학교 연습림이 있는 장당골쪽은 모두 철거되고 없다.
해발 800m에 위치한 안내원까지는 차로도 갈 수 있다.
광산을 개발한다고 산길을 만들었는데 국립공원법에 의해 광산을 못하게 되면서 마을 도로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내원마을은 감나무와 복조리가 일년 농사로 시천면과 삼장면 일대의 특산물로 손꼽는 곶감과 복조리가 이곳에서 시작됐다. 곶감은 내원마을이 워낙 고산지대에 있는데다 공기도 맑아 당분이 많고 무공해라 인기도 높다.
복조리 역시 지리산에 지천으로 있는 조릿대로 만들어 품만 있으면 얼마든지 수입을 올릴 수 있어 이곳 사람들은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곶감 깎고 복조리 만드는 것이 일이다. 그러나 내원마을에는 이런 평화스러움만 있지는 않았다.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이자 2인부대로 알려졌던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한쪽 발에 총을 맞고 생포된 곳이
내원마을이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전라도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다가 토벌대에 쫓겨 지리산에 숨어들면서 시작된 빨치산은 6·25를 거치면서 경남지역까지 확대돼 1955년 5월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빨치산이 모두 섬멸되었다는 발표가 있기까지 7여년 동안 일체의 접근이 금지된 반역의 땅이었다.
내원마을은 지리산 깊숙이 있는 만큼 지리산이 겪은 아픔을 어느 지역보다 많이 앓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원골에는 절이 많다. 골이 깊어 아픔이 컸던 내원골의 한을 달래주려는 듯이 작은 암자들이 계곡을 끼고
10여개나 된다. 내원골에는 예전에도 절이 많았다. 안내원마을 위쪽 골짜기를 큰절골, 작은절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내원사에 있는 비로자나불좌상도 내원골 상단에 있는 국사봉 부근에서 옮겨왔다. 내원골은 절골인 셈이다.
내원사계곡의 한 축을 이루는 장당골은 산을 즐겨 찾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리산의 마지막 비경이라고 꼽는다.
중산리와 대원사쪽 등산로가 잘 개발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지리산의 원시성이 보존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장당골은 행락객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내원사 앞에서 경상대학교 연습림까지 넓직한 길이 있고 대원사쪽에서도 무제치기폭포까지 쉽게 갈 수 있다.
장당골의 이름에 대해 여러 가지 유래가 있다.
지금의 장당(長堂)은 글자 그대로 골짜기가 길고 깊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또다른 글자인 장당(將堂)은 이곳 삼장면(三將面)의 지명과 더불어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 예로부터 절이 많아 부처 앞에 불을 밝히는 장등(長燈)이 언제나 골짜기를 환히 비쳐 ‘장등이 많은 골짜기’라는 말이
음운변화하여 장당골로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도 있다.
장당계곡은 써리봉에서 발원하여 치밭목산장 아래에는 해발 1,000m상에 위치한 무제치기폭포를 품고 있다.
스스로 무지개를 만드는 폭포라 하여 ‘무지개치기’의 준말인 ‘무제치기’로 불리는 폭포는 40여m의 거대한 암벽 위에 3단을 이루고 있다. 위쪽 1단에서는 세 가닥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2단에서는 여덟 갈래로 흩어졌다가 3단에서는 다시
양갈래로 모아져 쏟아진다. 폭포수가 여러 갈래로 떨어지다 보니 소리 또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듯, 여러 악기들이
합주를 하는 듯 수량에 따라 달리 들릴 정도로 앙상블을 연출한다.
일설에는 우륵이 이곳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무에 실을 매달아 튕겨 가며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제치기폭포를 내려서면 2천2백여 그루나 된다는 잣나무 숲이다.
경상대학교 연습림으로 일제시대 큐슈대(九州大)와 교토대(京都大)에서 조림했다.
잡목 더미 일색인 다른 계곡과 달리 하늘을 가릴 정도로 치솟아 있는 나무들 하며 계곡을 울리면서 힘차게 흐르는 계류는
선경이 따로 없을 정도다. 장당골을 감춰진 지리산 비경이라 하는 이유도 이곳을 다녀가면 알 수 있다.
잣나무숲을 지나 내려오면 화전민촌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다랑이 논밭이 잡초들 사이로 보이고, 통나무 사이에 황토를 짓이겨 바른 옛 화전민 집이 아직도 두어 채 남아 있다.
옛 화전민촌을 내려오면 바깥장당이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넓어지는 계곡은 내원사 어귀에서 완만한 흐름을 보이며 써리봉에서부터 싣고온 기운을 천천히 펼쳐
보인다. 향락객의 발길을 거부하는 대신 유장한 강물의 시작됨을 감춤없이 보여준다.
6. 가장 지리산다운 계곡이면서 투박한 계곡을 손꼽으라면 중산리계곡이다.
이 계곡은 칼바윗골, 법정골, 법천골 등으로 불려지는데, 이는 칼바위를 경계로 윗쪽을 법천골, 아래쪽을 중산리 계곡으로 구분하기 위해서고, 법천골은 법계사 방면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법천폭포를 만들고 있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천왕봉을 업고 생성된 법천골은 많은 명소와 애환 그리고 역사가 깃든 계곡이다.
그러면서도 다듬어지지 않고 투박한 자연 그대로 지금껏 남아 있기에 가장 지리산다운 계곡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법천골의 역사는 옛 선조들의 물물교환을 위한 길목에서 엿볼수 있는데 장터목이란 지명이 바로 그것이다.
연하봉과 제석봉 사이의 잘룩한 고갯마루에 해당하는 장터목. 지금은 등반객의 쉼터로 산장이 자리하고 있지만 예전엔
장날마다 성황을 이뤘다 한다.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내륙지방과 해안지방 간의 교역 장소로 이용된 "재"는 여러 곳에
있었으나, 이곳 장터목 만큼 널리 알려지고 이용된 곳은 드물었다 한다. 그래서 지명까지 "장터"로 표기되고 있는 것이다.
산청쪽의 덕산 사람들이 소금, 쌀자, 해산물등을 등에 매고 법천골을 따라 장터목에 오르면 북쪽의 함양, 마천, 남원사람들은 밭곡식, 직물류등을 짊어지고 백무동 계곡을 따라 장터목에 올라와 서로의 안부도 묻고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던 곳이다. 생존과 교역의 길로 활용된 이곳이 바로 장터목 아래로 길게 뻗어진 법천골이었던 셈이다.
해발 1천7백50m의 장터목은 공교롭게도 남쪽의 중산리에서 9km, 북쪽의 백무동에서도 9km거리로 같다.
지리산 주릉을 사이에 두고 강렬한 삶의 의지를 보여줬던 선조들의 힘든 장날 길은 주변에 펼쳐진 선경의 파노라마로
다소나마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법천골은 천왕봉에서 남서쪽으로 급경사의 협곡을 이루는 통신골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연하봉과 제석봉에서 흐르는
물줄기와 만나 하나로 뭉쳐 법천폭포를 거쳐 법계교 아래로 내려오면서 중산리계곡을 만든다.
흔히 등산을 하게 되면 법계교에서 칼바위를 거쳐 법천폭포와 유암폭포등을 지나 울창한 수림속의 산길을 따라 장터목으로 가는 탓에 법천골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법천골은 일반 등반객이 느끼는 것 이상으로 길고 다양한 풍미을 간직하고 있다.
법천골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매표소를 지나 법계교를 건너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리던 字天
허만수 추모비를 지나 칼바위 방면으로 향하면 된다. 등산로에 접어들기에 앞서 법계교에서 법천골을 따라 위로 시선을
모아 보면 천왕봉이 보인다. 청명한 겨울에는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가을이면 단풍의 절경이 아름답다.
하늘을 찌를 듯 두개의 바위가 칼처럼 우뚝솟아 있는 칼바위를 지나면서부터 법천골은 등반객들에게 계곡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칼바위를 분기점으로 등산로는 법계사 방면과 장터목 방면으로 구분된다.
칼바위를 지나면 법천폭포가 있는데, 등산로와 1백여m 정도 떨어진 탓에 등반객들은 놓치기 쉽다.
법천폭포는 법계사 물줄기가 내려온다고 해서 명명됐으나 실제 법계사 물줄기는 이 계곡으로 유입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 많은 세월을 지나오면서 법천폭포로 굳어져 골짜기 이름까지 법천골로 불리는 상태다.
법천폭포는 법천골의 특성상 평소는 수량이 적다가도 비가 오면 산 전체를 휩쓸고 갈 정도로 굉장한 물줄기의 위력을
갖는데, 이 위력은 계곡에 널려 있는 너덜지대 같은 바위 덩이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법천폭포를 지나면 곧장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바위들인데, 10여 년 전 여름 장마 때 천왕봉
남서쪽 통신골 위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이 일대가 폐허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너져 내리면서 생긴 것이다.
이 돌투성이들은 유암폭포에서 끝나는데, 폭포는 높이 10m가량 기름칠 한듯 미끌미끌하다 해 불리어진 이름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폭포수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기름이 떠 있는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고 하는데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산중에 기름 흔적이 있다는 것은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하겠다. 유암폭포에 이르면 계곡의 절반은 지난 셈이다.
여기서 울창한 숲속의 산길로 접어들어 호젓한 산행을 즐기다 보면 산희샘을 만나는데 바로 장터목 아래다.
그 옛날 장터를 향했던 선조들의 길이 오늘날 그대로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협곡 위에는 천왕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통신골이 천왕봉을 떠받치고 있다.
층암 절벽 아래서 발원한 물줄기는 법천골을 빚어내고 그 법천골 발원지 층암절벽에는 지리산신을 모시던
향적사(香積寺)가 있었다.
李陸의 "유 지리산록", 金馹孫의 "두류기행록"등이 남긴 문헌에 따르면 향적사는 천왕봉에서 남서쪽으로 향하다 보면
층암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천왕봉 성모사의 香火를 위해 세웠다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지리산신을 섬기는 마음이 각별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향적사터는 법천골의 발원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산희샘에서 천왕봉쪽으로 15분쯤 거리에 있다.
절은 사라졌으나 그 흔적은 그대로 남아 천왕봉을 우러러며 법천골을 굽어보고 있다.
지리산에 있어서 중산리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거대한 지리산자락 어느지역 보다 중요시되며 많은 등반객들이 중산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마도 주봉인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고 오를수 있다는 지리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인 지리산 답사(등반)의 시발점으로 "알프스의 샤모니"로 불릴 정도인 중산리는 천왕봉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장 사랑받는 자리를 차지 할수 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천왕봉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오르려면 중산리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다.
북쪽사람(충청이북)들은 흔히들 지리산을 오르면서 구례나 남원, 함양등지를 시발점 으로해 천왕봉을 등정하는 탓에
중산리의 의미를 하산하는 종착지쯤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는 자신들의 편의에 의한 것일뿐이며, 지리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많다. 그리고 지리산 등반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중산리를 기점으로해 천왕봉을 오르고 지리산을 등반하는것 만큼 지리산 등반의 묘미를 느끼는 산행은 드물다.
이른 새벽 여명을 등지고 중산리를 출발해 멀리 운해위에서 용솟음하는 아침햇살을 천왕봉에서 맞이하는 기쁨은 중산리를 거치지 않은 등반객은 결코 알지 못한다. 지리산행의 진미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등산로의 전진기지가 중산리인 셈이다. 몽블랑과 알프스의 수많은 산군들을 조망할 수 있고 등정하기 위한 시발점인 샤모니와 중산리가 곧장 비유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천왕봉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중산리,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올려볼때면 한걸 음에
달려 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지리산을 사랑하고 즐겨 찾는 이들은 중산리를 마음의 고향으로 정해 두기 도하며, 중산리 입구에 들어서기만해도 마음이 설렌다고들 말하고 있다.
7. 지리산의 북쪽 자락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거리는 곳이 백무동이다.
이곳은 남쪽의 중산리처럼 천왕봉을 오르는 북쪽의 등산구이자 세석고원과 10km 거리로 가장 가까이 자리한 마을이다.
세석고원에서 철쭉제가 열릴 때의 백무동 일대는 등산객들로 파시를 이룬다.
세석고원으로 오르는길 길은 주능선 남쪽의 경우 거림 청학동 대성리로 나뉘어져 있으나 북쪽은 백무동이 유일하다.
또 백무동은 우람한 폭포가 연이어 있는 한신 계곡과 백무동계곡의 매력 때문에 한여름철엔 지리산 최고의 피서 명당이다.
경남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이 강청리는 상백무, 중백무, 하백무와 도촌, 송알, 강청 등의 여러 마을로 이뤄져 있으나
요즘은 강청리란 행정명칭 보다 백무동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강청이란 이름은 대부분 모르고 있지만 백무동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백무동이 너무 아름답다 보니 지난 60년대까지 북쪽 지리산 관문이던 인월, 이어 70년대까지의 관문이던 마천면 소재지
가흥리가 이제는 그 자리를 백무동에 넘겨주고 통과지역으로 자리바꿈을 하였다.
부산에서 백무동에 가려면 산청~함양을 거쳐 인원~가흥의 우회 도로를 밟는다. 가흥~백무동은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아슬아슬하고 좁은 벼랑길 이었으나 현재는 2차선 도로확장 포장공사가 끝났다.
부산에서 차량으로 4시간 정도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휴천계곡을 따라 생초에서 바로 직행하는 도로가 포장되면 백무동도 부산에서 3시간의 거리로 차량
운행 소요시간이 중산리와 거의 맞먹게 된다.
'백무동 가는길' 이 결코 멀지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날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백무동은 교통이 불편하던 옛날에도 많은 기도객이 붐비는 곳으로 이름나있다.
전국 무당들의 우두 머리가 천왕봉의 성모사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언제나 1백명의 무당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원래의 이름은 '백무동(百巫洞)' 으로 불렸다.
또 다른뜻으로 ' 백무(白霧)동 '으로 일컬어진 때도 있었는데 안개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썼다.
현재는 이도 저도 아닌 백무동(白武洞)으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도 '백무'는 여전히 사라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수
있을 것이다. 주로 '지리산 굴바위' 주변에서 많이 활동하고 한때는 휴천계곡의 용류담, 한신계곡의 가내수폭포와 하
동바위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8. 지리산 북부의 깊고 넓은 한신계곡은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의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계곡미가
일품이다.
계곡미의 극치인 폭포를 수없이 빚어내며 백무동에서 세석까지 10Km의 여정을 자랑하는 한신계곡은 영롱한 구슬이 구르듯 맑고 고운 물줄기가 사철 변함없이 이어지는 폭포수의 계곡이다.
한신계곡은 수많은 폭포수만큼이나 많은 명명 사연을 갖고 있다.
우리네 선조들이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물줄기 하나에도 깊은 사연을 만들고, 그것을 즐겨 얘기해왔듯 이 계곡 마찬기지로 예외가 아니다. 하나는 「깊고 넓은 계곡」의 의미로 한신계곡이며 다른 하나는 한여름에도 몸에 한기를 느낀다 해서
한신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계곡의 물이 차고 험난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심하다고 해서 한심계곡이라 불렀으나 발음 이 변해서 한신계곡이 됐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옛날 한신이란 사람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몰죽음을 했대서 한신계곡이 되었다는 사연이 있는데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계곡에서 꽹과리소리가 들린다는
게 이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신계곡의 본류는 세석으로 이어지지만 이 계곡 주위에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형성돼
있다. 하부 백무동 앞의 계곡을 백무동계곡으로 지칭할 지 백무동계곡은 크게 네 갈래의 큰 계곡을 안고 있다.
백무동 위로 세석까지의 한신계곡과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재골, 칠선봉부근에서 내려오는 곧은재골,
장터목방향에서 흘러내리는 한신계곡 등 네 갈래가 그것이다.
여기서 한신계곡을 중심으로한 네 개의 계곡이 백무동계곡을 만들어 엄천으로 흘러 남강의 상류가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한신계곡은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의 협곡으로 만들어져 가네소폭포에서 한신지계곡과 합류,
백무동으로 이어진다. 한신계곡과 한신지계곡은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통해 누구나 쉽게 등반할 수 있으나 바른재골,
곧은골은 아직도 범접하기 힘든 미지의 계곡으로 남아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한신계곡의 등반기점은 백무동이다.
백무동까지 차량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며 여기서 야영장을 지나 넓다란 길을 따라 첫나들이 폭포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백무동 - 첫나들이 폭포까지 2Km구간은 계곡과 절벽을 사이에 두고 평탄한 오솔길이 있는데 울창한 숲의 터널을 이뤄 계
곡에서 울려오는 물줄기 소리와 어우러져 환상의 등산코스로 불린다.
여름철이면 싱그런 녹음과 시리도록 차갑고 맑은 물줄기로 최고의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늦은 가을이면 어지러이
나뒹구는 낙엽과 단풍 물결로 만추의 서정을 빚어내 찾는 이를 감동케 한다.
백설이 쌓이면 빙벽과 설벽을 만들어 모험을 즐기는 산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백무동에서 첫나들이폭포까지의 넓다란 오솔길은 가족 등반을 가능하도록 해주고 있을 정도로 잘 닦여져 있는데
이 도로의 생성 동기는 의외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1963년 9월 삼성흥업주식회사란 벌채업소가 서울 영림서로부터 마천면 강청리, 삼정리, 추성리 일대 국유림 내의 고사목
등에 한해서 벌목 허가를 받았다. 그당시 목재 운반을 위해 산판도로를 만든 것이 이 오솔길인데 벌목허가가 그후
남선목재와 서남흥업이란 회사로 전매되면서 무차별 도벌이 자행된 아픈 과거사의 현장이다.
숲속 길을 한참 지나다보면 처음으로 등산로와 계곡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곳이 첫나들이 폭포이다.
20여 개의 물줄기를 자랑하는 이 폭포는 바람폭포로도 불리고 있다.
계곡을 가로 지르는 철제다리 아래로 쏟아지고 있는데 다리 위에서보다 아래서 위로 보는 폭포수가 더욱 장관이다.
등산로만 따라가다 보면 놓치기 쉬운 폭포수로 바람처럼 물방울이 흩날리면서 물안개를 피어 올리기도 해 환상적이다.
철제다리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가면 곧장 또다른 철다리 3개를 더 만날 수 있는데 출렁이는 다리 위에서 발아래 계곡류를
구경하는 것도 일품이다. 첫나들이에서 1Km 남짓한 거리를 두고 있는 가네소폭포까지의 계곡미는 한신계곡의 진수로
평가되고 있다. 이름없는 폭포수며 넓다란 반석들과 울창한 수림은 바로 선경이다.
가네소폭포 바로 아래 지점에서 물줄기는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바로 한신계곡과 한신지계곡이다.
지계곡은 내림폭포를 따라 장터목으로 이어지며 한신계곡은 오층폭포 한신폭포를 따라 세석으로 연결된다.
가네소는 15m 높이의 폭포이며 50여 평의 검푸른 소를 만들고 있어 우선 그 웅장함에 압도 당한다.
사철 수량이 변함없어 예로부터 기우제 장소로 많이 이용돼 왔다.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영험스런 곳으로 전해진다. 기우제 방법도 특이해 부녀자들이 홀치마 바람으로 앉아 방망이를 두드린다.
방망이 소리는 통곡을 대신하는 것으로 이는 지리산신인 마고할매의 통곡을 유도, 그 눈물이 비가 되어 속세를 적시게
한다는 주술적 방법이다.또 한가지는 돼지를 잡아 피를 바위에 뿌리고 머리는 가내소에 던지는데 이는 산신이 산이
더럽혀지면 씻어내기 위해 비를 뿌릴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기우제의 전설을 안고있는 가네소는 요즘 들어 연중 수많은 등반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러한 조건으로 백무동 - 가네소구간은 한신계곡의 서막이다.
한신계곡의 본격적인 산행은 가네소에서부터 세석까지의 7Km구간이다.
가네소 왼쪽 흙비탈길을 올라 조금만 가다보면 계곡을 만나 건너게 되는데 계곡주변 숲길을 가면 5단계의 폭포가 길게
이어지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오층폭포가 나온다. 오련폭포라고도 한다.
오층폭포에서 산죽과 잡목터널을 따라 계곡을 건너고 등반로를 따라가다 보면 다소 벅찬 경사길이 나타나기를 몇 차례
한 뒤에야 한신계곡을 상징하는 한신폭포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폭포는 이정표에서 80여m 우측 계곡으로 내려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다.
한신계곡은 수많은 폭포수를 빚어놓은 채 마지막으로 1Km거리를 칼날같은 바위길을 따라 세석으로 이어진다.
백무동을 출발해 원시림과 수려한 물줄기를 지나 철쭉의 향연이 베풀어지는 세석에서 마무리 되는 한신계곡 루트는
올여름 한번쯤 등반할만한 환상적 등산 코스로 여겨진다.
9. 지리산 대성계곡은 오랜 옛날부터 보기드문 기도처로 뭇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근세에 들어서는 전란의 소
용돌이 속에 피의 제전이 역사를 간직한 길고 깊은 골짜기로 잘 알려져 있다.
화개동천 맨 안쪽에 숨어있는 협곡의 수림과 남향으로 배치된 기암 절벽, 그리고 그 위용의 품위를 한 단계 높여주려는 듯 흐르는 물줄기는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로 손색이 없다.
세석평전을 거느리는 영신봉의 위엄은 세석과 더불어 대성골을 이상향의 대상으로 삼게 만들어 오랜 옛날부터 과학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성골을 찾아나서는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대성골 가운데서 가장 깊숙이 숨겨져 있는 영신봉 아래 영신대는 지리산에서 최고의 기도처로 각광 받으면서 치성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 영험스런 자태는 금방이라도 소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듯해 치성객의 애간장을 태우기에 충분하다. 우리 민중의 정서를 방증하는 대성골의 소망하는 그러나 온 산하가 동족상잔의 전란을 겪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변하기도 해 우리에겐 비운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성골은 빨치산 투쟁의 최대의 비극으로 이 곳에서 수백여명의 빨치산이 몰살당했다.
정충제씨가 기록한 "실록 정순덕"과 이기형씨가 쓴 "죽음의 골", 그리고 이태의 "남부군"등은 1950년대 초 지리산 일대에서 치러진 군·경과 빨치산의 처참한 격전을 기록으로 전해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성골의 비극이 가장 격렬하고 처절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들 기록마다 빨치산 몰살 규모와 일시등이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그 시기는 1952년 1월 17일과 18일이 최대 격전기였으며 그 해 1월 한달동안이 백야전사령부 3기 토벌작전 시기로 보인다.
토벌대의 작전이 시작되면서 1월 17일 무렵 지리산 온 골짜기는 함박눈이 퍼붓고 있는 가운데 날이 저물자 빗점골, 거림골, 신흥등지에 있던 빨치산이 대성골로 모였다.
다음날 새벽무렵 눈덮인 대성골에는 적게는 1,000명에서 많게는 1만명에 이르는 빨치산이 모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른바 백야전 사령부의 제3기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대성골에 모인 빨치산은 사면초가 격으로 수백명이 처참한 최후를
맞은 사실이 전해진다. 당시 몰살 당한 빨치산의 규모는 각 기록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1952년 1월께 남은 빨치산 수를 미뤄볼 때 이기형씨의 "죽음의 골"에 나오는 수백명(대략 800여명)이 근사치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빨치산 몰살 사건이 이 곳 대성골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대성골이 갖는 지형적 특성에서 비록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계곡중 대성골이 가장 깊은 협곡인데다 지세가 험난해 도피하기엔 안성 맞춤이어서 궁지에 몰린 빨치산이 이곳으로 숨었고 때마침 토벌대의 정보와 작전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불과 40여 성상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대성골엔 당시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무심한 대자연은 수천년 변함없이 그대로
인간이 하는 일을 모른듯 지켜만 보고 있을 따름이다.
비운의 사연을 간직한 대성골을 찾아가는 길은 화개동천을 따라 잘 포장된 길을 올라 대성교에서 시작된다.
등산로는 대성교에서 시작되는 길과 조금 위의 의신 마을에서 시작되는 두갈래다.
세석까지 12km, 대성교에서 등산로는 시작부터 가파른 길이지만 의신부터는 평탄한 길이 시작돼 1km만 지나면 하나로
된다. 이곳이 옛날 능인사가 있었다는 절터이다. 해발 500m지점이기도 하다.
능인사 터에서 완만하고 뚜렷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후박나무가 우거진 대성동 마을에 도착한다.
대략 대성교에서 2km거리에 위치한 대성동에는 10여 가구가 산골생활을 하면서 민박도 하고 토종닭, 산채, 동동주등을
팔고 있다. 자가발전으로 전깃불을 이용해오다 95년 12월에야 한전에서 전기를 공급했다.
경운기 동력으로 전기를 만들던 자가발전기는 새해부터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원래 대성동은 이곳에서 4km 더 들어간 곳에 있었으나 60년대 후반 정부의 배려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4km 위의 집터가 있는 곳을 원대성이라고 부른다. 대성동에는 대성골이 으뜸 기도처임을 입증이라고 하듯 지금도
아무 하는 일없이 정신수양을 하거나 요양을 위해 장기간 민박하는 사람이 10여명이 된다고 한다.
대성동 마을에서 세석까지는 10km. 이 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등산은 험난한 코스가 별로없이 비교적 평탄한 길이
계속된다. 남부 능선과 갈라지는 1,400m 갈림길에 못미쳐 3m 구간이 조금 힘들 뿐 등산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조금 지루한 산행은 각오해야 하는 게 대성골 등반의 특징이다.
대략 오르는데 4시간30분에서 5시간은 걸리며 내려오는데도 3시간 30분은 각오해야 한다.
지리산 서쪽 자락에 가면 천년 수목 사이를 운무가 감도는 천혜의 절경이 늘 반긴다.
반야선경과 노고단의 그윽한 정취와 풍경이 곁들여져 마치 심연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감도는 곳이 바로
심원(深源)계곡이다.
칠선계곡, 문수계곡과 더불어 지리산의 3대 계곡으로 손꼽히는 심원계곡은 굽이굽이 청산녹수요, 사방이 영봉이니 지리의 깊고 깊은 그 오묘함이 서려있는 곳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반야봉과 노고단 사이의 깊고 깊은 계곡인 심원계곡은 담(潭)과 소(沼)가 50여개나 연이어 펼쳐지는 골짜기로 계곡을
거슬러 오를수록 산행을 한다는 느낌보다 선경에 몰입하는 기분이 들게하는 곳이다.
심원계곡은 마한의 피란도성 터인 달궁 마을에서부터 시작되는 달궁계곡과 이어져 펼쳐진다.
달궁 마을에서 20여분 오르면 쟁기소가 나타나고 다시 20분 가량 가면 둘레가 80m나 되는 쟁반소가 눈에 띄는데 여기서
부터 심원계곡의 신비가 시작된다. 옛적에 비가 오면 수천마리의 두꺼비가 모여 울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두꺼비소가
있는가 하면 이름 모를 수많은 징담이 즐비해 찾는 이를 매료시킨다.
반야봉에서 달궁마을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지나가기도 하는 쟁기소에서 500여m 더 계곡을 거슬러가면 반야봉 서북 능선
자락과 만복대 사이로 지나는 전남과 전북의 경계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 아래까지는 전북 남원시 산내면이며 그 위로는 전남 구례군 산동면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곳부터가 심원계곡이라 할 수 있고 그 아래는 달궁계곡으로 봄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심원마을에서 부터 노고단, 반야봉, 임걸령까지는 자연 휴식년제 실시에 따라 등산로가 오는 98년까지 폐쇄돼 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지키려는 등산객은 드물다. 등산로 입구에 철조망과 안내판을 세워두고 있으나 이를 지키는 등산객도 없으며 이를 단속 또는 규제하는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도 없다. 그저 헛구호일 따름이다.
지리산에서 자연 휴식년제를 가장 잘 지키는 곳은 아마도 노고단 정상 주변 500여m 둘레일 것이다.
이곳 외에는 말뿐인 휴식년제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심원마을 노고단","심원마을 반야봉" 구간도 마찬가지로
철조망을 뚫고 또는 우회한 등산로에 는 여전히 등산객으로 붐빈다.
심원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는 서울대 연습림 관리사무소 담벼락 아래로 이어지는데 이곳 역시 철조망이 드리워져
있으나 무용 지물이다. 이 철조망은 단지 등산객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뿐 그 이외의 출입금지 기능은 하지 못하는 것이다. 심원마을에서 노고단까지는 대략 2시간∼2시간 30분이면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반야봉으로 바로 오르려면 노고단 방면으로 오르다 왼쪽계곡, 즉 대소골을 거슬러 이어진 등산로가 잘 열려져있다. 또한 심원마을에서 임걸령까지도 오를 수 있는 등 다양한 등산로가 열려 있다.
그러나 심원계곡의 신비함을 찾아 힘들게 등산을 한다는 것은 근래들어 별다른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달궁에서 계곡을 따라 이어진 도로망이 쉽게 하늘 아래 첫동네인 심원마을에 이를 수 있게 해주 는가 하면 성삼재에서
30분이면 노고단에 이를 수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노고단과 반야봉에서 내려다 보는 심원계곡의 깊고 깊은 원시성은 위에서 쉽게 한눈에 내려다 보는 것보다
힘들게 걸어야만 심연에 빠져들 듯한 느낌을 맛볼 수 있음은 분명하다.
10. 지리산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가장 풍성한 볼거리와 먹거리 그리고 소중한 문화유적과 그에 따른 얘깃 거리가
담겨져 있는 곳이 화개골이다.
사시사철 색다른 모습으로 변하면서 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풍경이 화개동천만이 가진 특성이라면 특성이다.
그 옛날 선조들이 지리산의 이상향을 찾아 나섰던 들머리가 바로 이 곳 화개골이고 보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고있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이른 봄이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화개 10리 벚꽃길은 일제때 부터 내려온 고목의 벚나무들이 길 좌우로 늘어서
있다. 그 나무에서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은 하늘을 가릴듯 벚꽃터널을 만들어 장관을 이룬다. 봄 내음을 물씬 풍기는
화개천의 옥류와 10리 벚꽃길이 빚어내는 화개의 봄 풍경은 생동감이 넘치며 대자연의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해마다 4월 초순께면 이 곳의 벚꽃 장관을 즐기려는 상춘객들이 줄을 잇는 까닭은 지리산 자락의 봄기운이 화개천변의
벚꽃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는 탓이다. 갈수록 벚꽃 인파가 늘어나면서 93년부터 하동군에서는 상춘객의 흥을 돋우기 위해 화개장터 벚꽃제 행사를 마련했다. 화개장터 벚꽃제는 지난 4월 4일부터 9일까지 다채로운 행사와 함께 열렸으나 꽃샘
추위로 인해 벚꽃이 개화가 늦어져 벚꽃의 화려함은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올해는 예년에 비 해 벚꽃 개화 시기가 열흘쯤 늦어져 환상적인 벚꽃의 향연은 4월 중순께 극치를 이뤄 이무렵 전국에서
몰려든 벚꽃 인파로 화개골은 터져 나갈듯했다.
화개 벚꽃과 함께 화개골 들머리의 화개장터 역시 아직도 그 명성을 충분히 떨치고 있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이며 최근엔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 주무대로 더 알려진 이 곳 화개장터는 그 옛날 우리나라 3대 장터 중의 하나였다. 해안지방의 해산물과 내륙의 산나물, 약초 따위를 거래하기 위해 1일과 6일 닷새마다 열렸던
그 옛날의 화개장터 모습은 이제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지만 지리산을 찾는 이들에겐 소중한 향수를 일깨워주는
장터임엔 틀림없다.
화개골의 또 다른 진면목은 수많은 불교 유적들이다.
조선시대 까지 만해도 이 계곡 안에는 100개가 넘는 절과 암자가 있었다 한다.
이들 불교 유적들은 대부분 빼어난 절경을 끼고 있어 당대의 고승들과 유학자들이 탐승의 발길을 끊지 않았다.
쌍계사와 칠불사의 대비되는 불교 문화를 음미해 볼 수도 있으며 이들 사찰을 배경으로 한 고승들의 발자취,
그리고 융성했던 신라불교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래돼온 과정을 살필수도 있다.
화개골의 사찰은 특히 신라시대의 고운 최치원과 조선시대 서산대사의 행적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는가 하면 가락국
일곱왕자의 성불에 얽힌 사연을 전해 주기도해 더더욱 흥미를 끌게 하고있다.
화개골에 사찰이 많았음을 보여 주는 것은 쌍계사와 칠불사 이외에 화개장터 주변의 마을이름이 탑리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곳에 탑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도 화개장터 건너편에 3층석탑이 남아 있어 이 일대의 불교문화가 번창했음을 엿볼 수 있다. 가락국과 신라시대의 융성했던 불교문화는 가히 이곳 화개골에서 그 깊이를 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범패음곡등 불교음악의 원류가 이 곳이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화개골의 불교는 또한 우리나라 차(茶)문화의 발달과도 연관지어볼 수 있다.
삼국 사기에 따르면 흥덕왕 3년(828)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廉)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했다고 한다. 아울러 차는 이미 선덕 여왕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번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대렴이 차를 처음 심은 곳이 지리산에서도 쌍계사 근처의 화개골이냐 화엄사 부근이냐는 논란이 있으나 여러 정황과
현재 화개일원의 야생 차밭 등으로 미루어 화개골이 시배지라 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리산 서쪽 방면의 들머리는 단연 노고단 발아래 화엄사 계곡이다.
주릉등반의 첫 관문으로 노고단을 오르는 대표적 등산로로 널리 알려져 전국의 산꾼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지리산과 더불어 그 아늑한 지세를 최고로 자랑하는 전남 구례군의 마산면 황전리에 조성된 집단시설지구 내 지리산
탐방안내소에서 남악사, 화엄사를 거쳐 계곡을 거슬러 노고단에 이르기까지 10여㎞ 구간이 통칭 화엄사 계곡 등반코스다. 전남 구례는 예로부터 지리산의 역사와 전통, 정기를 송두리째 지닌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이러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여기며 지리산과 하나되어 살아오고 있다.
지리산과 구례 사람들의 하나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화엄사골 언저리에서 해마
다 곡우절이면 여는 약수제가 그것이다.
천여년 전부터 국태민안, 즉 나라와 백성의 평안함을 선도성모(仙桃聖母)께 기원해 온 약수제(藥水祭)는 화엄사 입구의
남악사(南岳祠)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민속제전이다.
그 유래는 멀리 신라 진흥왕 때 오악(五岳)의 하나인 지리산 길상봉(吉祥峰:지금의 노고단)의 남악산신인 선도성모께
제사를 지내고 거자수 즙을 마시며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한데서 비롯되고 있다.
지리산이 우리 민족과 더불어 지내온 민족의 영산임을 증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 남악사의 약수제는 신라시대 이래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 제례를 행해왔으며 조선조 세조 2년, 1457년부터 남악사로 이름했는데 마찬가지로
나라에서 제를 행해오다 한말 융희 2년, 1908년 폐사됐다. 이 남악사를 중심으로 한 약수제는 구례 사람들의 남다른
지리산 사랑정신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번창하는 화엄사와 그 일대의 관광지에 비해 화엄사 입구에 서있는
남악사의 모습은 갈수록 초라하게 남아 있는 듯해 아쉬움으로 남는다.
구례 사람의 지리산 사랑을 느끼며 찾아볼 수 있는 화엄사 계곡 등반코스는 황전리 집단시설 지구부터다.
황전리의 집단시설지구는 89년 갈수록 늘어나는 지리산 탐방객의 편의 제공과 환경 파괴 예방을 목적으로 조성된 이후
지리산 서쪽 들머리의 최대 명소로 연일 사람들이 북적인다.
최근엔 인근의 지리산 온천을 즐기려는 인파들까지 내친 김에 화엄사를 구경하려고 몰려 북적임을 더한다.
이곳에는 각종 숙박시설과 위락시설이 즐비하여 야영장도 비교적 충분하다.
황전리의 번잡함을 지나 잘 닦여진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면 지리산 매표소 가운데 가장 비싼 입장료를 받아 항상 말이
끊이지 않는 화엄사 입구매표소가 나온다. 국립공원 입장료 1,000원에다 사찰관람료(문화재관람료) 1,200원을 포함해
성인 한명당 2,200원으로 이 관문을 통과하려면 적잖은 비용 부담을 해야 한다.
그래서 늘 말도 많고 이곳에서 차를 돌리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한때 화엄사 여관촌으로 명성을 날리던 곳에 시의 동산이란 곳이 만들어져 있는데 호텔을 지나 오르다 보면 나온다. 89년 여관지구를 집단 이주시킨 뒤 이 지역의 한 인사가 사재를 털어 만들어 놓은 산책로이자 사색과 휴식의 공간이다.
시의 동산에는 김소월과 박목월 선생 등의 고운 시구들이 검은 돌에 새겨져 있으며 각양각색의 조형물들도 눈길을 끈다.
다시 조금 오르면 지리산 남부관리사무소 건물이 있고 그 바로 위에 가게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으며, 뒷편에는 남악사가
초라하게 서있다. 천년대찰 화엄사의 위용과 불토정국의 신비로움을 음미하고 노고단으로 향하려면 화엄사 입구의 다리를 건너 잘 만들어진 등산로를 따라 가면된다. 화엄사 오른편 계곡을 거슬러 비교적 평탄한 길을 따라 20여분 오르면 철다리를 만나고 이어 본격적인 산행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산길에 이른다. 용소와 제2야영장을 지나 큰고목이 서있는 써나무 터를 쉽사리 오르고 나면 다시 철다리를 만나 건너면 제3야영장에 도착한다. 이제부터는 다소 가파른 경사길이 시작된다.
짙은 수림의 터널을 오르는 즐거움을 누리며 한발 두발 오르면 참샘이 반긴다.
이어 돌거지와 국수등이라는 흥미로운 지명의 안내판을 지나면 자그마한 산등성이에 이른다. 이곳이 바로 중재이다.
여기까지 화엄사에서 5.5㎞가량으로 2시간 정도 걸린다.
계곡과 다소 떨어진 투박한 길을 30여 분 걸으면 한줄기 시원한 폭포를 만나는데 이곳이 접선대이다.
여기서부터는 급경사에다 너덜지대여서 힘들여 올라야 한다.
오르는 사람들의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경사가 급해 이곳을 코재라고 부른다.
쉬운길을 두고 뭣 때문에 이토록 힘들여 올라야 하는 지를 수없이 되뇌이어야 할 정도로 어렵게 한참을 오르다 보면 탁트인 전망을 지닌 훌륭한 반석에 도착한다. 눈섭바위라 불리는 곳이다.
발아래로 섬진강과 어우러진 구례의 비옥한 들판과 화엄사 계곡의 고요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토록 힘들여 오르는 까닭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맛볼 수도 있다.
이윽고 눈썹바위를 지나 조금 오르면 성삼재에서 맨발로도 오를 정도로 잘 닦여진 도로를 만난다.
그동안 비지땀을 흘리며 오른 성취감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어떠하리.
이곳에 이르면 무넹기란 특이한 지명이 눈길을 끈다.
노고단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도랑을 파 인위적으로 물을 끌어 화엄사계곡으로 넘어가게 한 것이다. 그래서 무넹기란다. 일제 때 이나미 총독이란 사람이 전국적인 대가뭄이 있어 노고단의 물을 구례 벌판의 마산저수지에 가두기 위해 한 일이라 한다. 당시의 일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당시 외국인 선교사가 무엇 때문에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노고단에다 별장을 짓고
휴가를 즐겼는지를 곰곰히 되새기며 성삼재서 올라오는 길을 따라 노고단에 오르면 된다.
11. 광대골이라는 넓고 커다란 계곡이 지리산에 있다.
지리산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앞으로 가장 각광받을 명소로 등장할 조짐이 나타났다.
지리산 계곡 중에서 그 규모나 비경이 다른 계곡에 결코 뒤지지 않으면서도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지리산의
골짜기로 남아있다. 인근의 백무동이나 칠선계곡·뱀사골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반해 넓고 커다란 광대골은 그저 묵묵히 자연의 흐름을 쫓아 조용히 숨겨져 있었던 탓에 그 값어치는 더욱 돋보이기에 충분하다.
광대골은 뱀사골과 한신계곡 사이의 커다란 물줄기다.
지맥으로는 덕평봉 ∼ 벽소령꼭대기 ∼ 형제봉 ∼ 삼각봉과 덕평봉에서 강청마을 뒷편의 오송산(669m)을 잇는 산줄기,
그리고 삼각봉에서 삼정산(1225m)을 연결하는 지맥사이의 계곡이다.
흔히들 벽소령의 이름을 따 벽소령계곡 이라고도 하지만 넓고 커다란 골짜기란 의미의 광대골이 본래 이름이다.
벽소령 북쪽에 10여개에 달하는 지류를 하나로 만들어 임천강으로 흘러 강청리에서 백무동의 물줄기와 합류한다.
광대골의 수많은 지류와 능선 사이사이에는 벽소령 군사도로라는 구절양장의 꼬불꼬불한 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이러한 탓에 광대골은 계곡미를 음미하며 찾아나서는 등산객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대부분 비포장 도로지만 비교적 잘 닦인 군사도로를 등산로 삼아 벽소령을 오르내렸을뿐 그 아래 원시수림과 함께 어우러진 광대골의 비경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외면해 왔다.
반면 광대골 가운데 삼정산에서 흘러내리는 지류방면에는 천년고찰 영원사와 상무주암등 숱한 불적들이 많아 벽소령
군사도로 못지 않은 도로가 삼정마을에서 영원사 입구까지 잘 만들어져 있는데 이 구간은 삼정산 등산로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결국 광대골은 삼정산 기슭은 불적들과 벽소령도로등 인위적으로 조성된 일부분은 잘 알려진 반면 계
곡 깊숙이 숨겨진 비경은 전인미답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베일에 가려졌던 광대골은 이제 더이상의 신비감을 숨겨놓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풍부한 수자원에다 울창한 원시림을 최대한 활용한 자연 휴양림을 산림청에서 조성하기 시작해 벌써 마무리 단계에
이른 것이다. 산림청이 굳이 광대골에다 지리산 자연 휴양림을 조성하게 된 것은 광대골의 빼어난 수림과 수자원을
간파했음은 물론 아직도 그러한 비경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산림청 남원영림서 함양관리소가 조성중인 지리산 자연휴양림은 광대골 일원 142ha에다 6억여원의 사업비를 들여 32개의 시설물을 이미 설치했으며 삼정마을에서 2개의 연결도로망을 구축해 놓는 등 마무리 단계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삼정마을의 입구에서 왼쪽으로 2개의 진입도로가 있는데 하나는 마을 못미쳐서 계곡을 건너 이어지며 다른 하나는 마을을 돌아 연결된다. 휴양림 입구 못미친곳에는 대규모 주차장과 야영장이 만들어졌으며 휴양림 안에는
야외학습장, 삼림욕장등의 시설물이 대부분 완료돼 있다.
뿐만 아니라 광대골의 발원지격인 벽소령 꼭대기에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올해 안으로 대규모 산장을 건립할 예정이어서 광대골의 앞날은 수많은 인파가 뒤덮이는 수난의 시기를 맞게 될 운명이다.
여기서 우려되는 대목은 광대골의 자연휴양림과 벽소령산장 건립을 계기로 벽소령 군사도로의 재활용 문제가 오래지 않아 도마에 올려질 가능성을 예견해 볼 수 있다. 수년 전 마천면 삼정마을에서 하동군 화개면 삼정마을 사이의 군사도로 개설이 커다란 문제로 등장했다가 환경단체 등 환경보호론자들의 비난에 밀려 백지화했으나 산장건립과 휴양림 조성을 계기로
조만간 이 문제가 다시 대두될 전망이다.
섬진강변의 화개장터에서 화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신흥마을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따라가면 범왕리 목통마을이란 곳이 있다. 물레방아 도는 지 리산의 전형적인 산간마을이다.
12. 목통마을을 휘감고 도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가 연동골(일명 목통계곡)이다.
골짜기 안에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연동마을이란 곳이 있었다고해 연동골이라 불린다.
지금은 오히려 목통마을의 이름을 따 목통계곡으로 더 알려져 있다.
연동골은 화개재 가는 길목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그 물줄기는 화개재를 좌우로해 두 봉우리를 타고 이어지는 두 줄기 능선에서 흐른다. 해발 1,360m의 화개재 동쪽으로는 1,533m의 토끼봉 정상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1,550m의 삼도봉이 솟아있다. 토끼봉 정상에서 흘러내린 능선은 칠불사까지 내려와 목통마을에서 꼬리를 감춘다.
이 능선을 칠불사 능선으로 부른다. 삼도봉에서 뻗어내린 능선은 불무장등(1,446m), 통꼭봉(904m), 당재를 거쳐 황장산
(942m)으로 이어진뒤 화개장터가 있는 탑리까지 내려와 섬진강에 닿는다. 불무장등 능선이라 부른다.
칠불사 능선과 불무장등 능선사이의 골이 연동골이다. 물론 연동골은 화개동천의 지류에 해당된다.
13. 화개동천은 크게 신흥마을에서 두 계곡으로 나누어지는데 왼쪽이 범왕계곡 연동골로 이어지며 오른쪽으로는
의신계곡(대성골, 빗점골, 절골, 산태골 등등)이 있다.
지리산 최대의 계곡답게 화개동천에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계곡미를 간직하고 이름까지 독립적으로 갖고 있는 지계곡이
최소한 10개에 이를 정도로 많은 지류를 거느리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지류를 형성하는 연동골은 해안지방과 내륙 산간지방을 잇는 최단거리 역할을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화개재가 지리산 능선가운데 가장 낮은 해발인 만큼 넘나드는 길목으로 유용하게 활용된 것이다.
그 화개재를 기점으로 해 연동골과 내륙의 뱀사골은 훌륭한 길목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담겨져 있는 길이었던 셈이다.
경남과 전북의 경계지점 이기도한 화개재는 옛날부터 화개장터가 크게 번창한 탓에 그 지명이 화개재로 불렸다.
그런데 그 화개재의 지명이 지금은 이상하게도 "뱀사골 정상"이란 얼토당토 않은 지명으로 등장해 있다.
이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이정표를 세우면서 오랜 옛적부터 전해져 오고 있는 화개재 대신 "뱀사골 정상"으로
표기한데서 비롯됐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지명은 나름대로의 사연과 지형 지세,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해 명명 돼왔던 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구태여 말도 되지 않는 지명을 만들어 혼란스럽게하고 있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측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화개재에 가면 지리산 이정표에 뱀사골 정상, 반야봉 4km, 노고단 10km, 토끼봉 2km, 천왕봉 35km라고 표기해놓고 있다.
뱀사골 계곡의 정상이란 의미의 뱀사골 정상은 우리 어법상 말도 안되는 소리다.
모든 계곡의 끝을 계곡의 정상이라 한다면 칠선계곡이 끝나는 천왕봉 역시 칠선계 곡 정상이라고 해야 한다는 논리와
다름 없다는 어느 산악인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이는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순수한 우리말인 "재" 대신 골짜기의 정상이라 고쳐 쓴 모순을 바로 잡아야 할 때로 여겨진다.
더욱이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두 지역 주민들이 오랜 옛날부터 오고 가면서 남겨진 역사와 발자취, 그리고 화개재에
얽힌 전설등을 오늘에 다시 발굴해 전함으로써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꺼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화개재에 얽힌 설화중 "운봉무더미"란 얘기가 있다.
운봉사람 소금장수 3대의 조상이 일흔살 나이에 화개에서 소금을 지고 운봉으로 넘어가다 화개재에 이르러 힘에 지쳐
소금을 진채 쓰러져 죽었는데 손자가 할아버지를 그 자리에 묻고 정성을 다해 큰 묘를 만들었다 한다.
화개재 언저리의 큰 무덤을 두고 그 소금장수의 무덤이라 해 운봉무더미라 부르고 있다.
이 설화에서 보듯 화개재는 해안지방의 소금이나 수산물과 내륙지방의 삼베를 비롯한 농산물을 서로 교역했던 삶의
고갯마루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지리산에는 화개재와 비슷한 역할을 한 고갯마루가 많다. 그만큼 지리산이 광활하다는 증명 이기도하며 이에 따른 조상들의 삶의 얘기들도 다양하게 서려져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목통마을에서 출발해 연동골을 거쳐 화개재로 가는 길은 오랜 도로기능의 역사 덕분에 잘 열려 있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며 칠불사 아래의 첫 마을로 사하촌(寺下村)이기도한 목통마을은 10여 가구가 사는 조그마한
산촌이다. 지금은 승용차가 쉽게 오를 수 있으며 물밀듯 들어오는 관광객, 등산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계속 들어서고
있는등 번창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을앞 계곡에는 옛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물레방아가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그리고 물레방아 와 함께 산 너머 직전마을로 넘어가는 좁다란 길을 이어주는 돌다리가 이채롭다.
여기서부터 연동골 산행은 시작된다. 물레방아와 독특한 양식의 돌다리를 살펴본뒤 마을을 지나 잘 열려져 있는 등산로를 따라 화개재까지는 대략 8km 남짓하다. 아직은 일반 등산객에게는 덜 알려진 연동골은 아기자기한 경관과 조용한 것이
특 징이다. 목통마을을 출발해 30여분 가량 오르면 연동골의 으뜸 명소인 스님소(沼)가 나온 다.
칠불사 스님들이 목욕하는 곳이라해 붙여진 지명인데 늘 옥류가 흐르며 싱그런 분위기가 가히 세속의 때를 씻을만하다는
느낌이 간다. 계곡을 따라 한동안 가면 풀밭과 잡목지대로 변해있는 마을터를 만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께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연동마을 터다. 마을이 사라진 것은 1967년 여름 서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9명이 지리산에 들어와 이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다 모두 사살된 사건이후 연동마을을 없어지게 했던 것이다.
연동마을 터를 지나 30여분 가량 지나면서 부터 화개재까지 급경사로 힘든 코스지만 쉽게 화개재에 오를 수 있다.
산행시간은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하산은 토끼봉∼칠불사, 또는 뱀사골∼반선 등 다양하게 열려 있어 시간만
잘 조절하면 어느 곳으로 하산해도 좋다.
하동지역에서 짧은 시간에 반야봉을 올랐다가 하산 할 수도 있는 등산로가 연동골 코스이기도 하다.
14. 빗점골이라는 숨은 골짜기가 있다.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아마도 가장 깊고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계곡으로 짐작된다.
그 빗점골은 또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절터골과 산태골, 온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더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 놓고 있다.
"지리산의 빗점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남부군"이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을만한 빨치산의 행적이 가장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곳이 바로 빗점골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했던 곳이기에 이곳 빗점골이 갖는 한국 현대사의 의미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이른바 빗점골 회의를 갖고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되며 그리고 그 자신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곳은 빗점골의
너덜지대로 알려지고 있다. 이 너덜지대는 "합수내 흐른바위"라고도 하는데 지리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인 빗점골이
다시 절터골과 산태골을 빚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빗점골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된 기록은 당시 서남지구 전투사령부(경찰부대)의 "전투상보"와 이태의 "남부군"
등에 비교적 소상하게 남아 있는데 이러한 기록들과 증언들은 부분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기록 또는 증언으로 전하는 사실이 기록자의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즉 아전인수격으로 풀이했기 때문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경찰과 국군 토벌대, 그리고 토벌대상이던 빨치산 또한 그 사건 이후
현지인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얘깃거리 등이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묘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의 매우 중요한 상황, 다시 말하면 이현상의 최후에 관한 정확한 사실이 아직도 규명되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제5지구당을 이끌고 벽소령과 토끼봉을 연결하는 주능선 사이의 골짜기인 빗절골과 절터골, 산태골 등을 빨치산 투쟁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이 일대를 주요 거점으로 정해 칠불사 능선과 뱀사골, 광대골 등지로
진출하는 등 적절한 게릴라전을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빨치산 수기와 현지인들의 증언 중에는 당시 빨치산들이 통신 수단의 배터리 충전을 위해 절터골에서 수력발전
시설까지 갖추기도 했다는 부분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이 일원이 그들 빨치산 최후의 항전무대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어떻든 쇠잔해가던 빨치산 무리들은 이곳에서 남로당 간부와 각 지구 유격대 사령관들이 최후의 회의를 열고 이현상이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그때가 1953년 10월 18일로 전해지고 있다.
빨치산 최후의 항전지였던 빗점골은 화개천을 거슬러 50여 리 올라가야 한다.
지금은 화개장터에서 의신마을까지 포장도로로 잘 연결돼 있으며 의신마을에서 삼정마을까지는 벽소령 작전도로를
정비한 비포장도로가 비교적 잘 연결된 덕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현지 주민들은 의신마을 상단부 계곡에서부터 빗점골로 부르고 있는데 일부는 삼정마을까지를 의신계곡으로 부른다.
의신에서 삼정까지는 3km 남짓한 거리로 비포장도로 변으로 좁은 계곡이 이어진다.
수만여 평에 달하는 넓은 초지대를 염소방목장으로 활용하며 3가구가 살고 있는 삼정마을을 지나 비포장도로는 2km 남짓 더 계속된다. 이 도로는 벽소령까지 연결되는 작전도로를 마을 주민들이 보수, 정비한 것인데 이는 주민들이 고로쇠 수액
채취와 수송을 목적으로 보수한 것이다. 아마도 멀지 않아 삼정에서 7km 지점인 벽소령 꼭대기까지 어떤 모양이던 도로가 정비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해 걱정이 앞선다. 이미 삼정마을에서 방목하는 염소무리들은 벽소령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며 그 활동 영역을 넓혀 놓고 있는 상태이고 보면 멀지 않아 차량까지 오르리란 추측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산 너머 마천면 삼정에서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지프형 택시가 10만원을 받고 벽소령 꼭대기까지 영업하고 있는
사실은 하동지역 폐도 역시 곧 인위적으로 보수될 것임을 예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삼정에서 조금 지나면 차량의 진입이 더이상 불가능하고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차가 언제든지 몇 대씩 세워져 있다.
이 주차장 조금 못미쳐 계곡과 도로 사이가 꽤 넓은 곳이 있는데 사람이 살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이곳이 바로 옛날 빗점마을이다. 빗점마을은 한때 지리산 화개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으나 지금은 모두 이주하고 집터만 남아 있다. 전란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면서 당국이 삼정 또는 의신마을로 집단 이주시켰다 한다.
의신마을에 사는 조봉문씨 같은 이는 어릴적 빗점마을에서 산 기억을 갖고 있기도 하다.
빗점골은 빗점마을 위 주차장에서부터 본격 산행을 시작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널따란 너덜지대가 나오는데 이곳이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합수내 흐른바위다.
합수내는 삼각봉과 연하천에서 흐르는 절터골과 명선봉(1586m)과 토끼봉에서 흘러내리는 산태골, 완골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합수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다.
빗점골에서 종주능선까지의 등산로는 물줄기와 0걋?세 갈래로 이어진다.
한 갈래는 절터가 있다 해서 이름 지어진 절터골을 따라 연하천 산장 또는 삼각봉까지 연결되는데 대략 8km에 이른다.
또 한갈래는 산태골을 따라 명선봉 꼭대기까지 또는 명선봉과 토끼봉 사이의 총각샘으로 연결되며 나머지 하나는 산태골을 따라가다 왼쪽으로 흐르는 왼골과 연결되는 등산로로 이는 토끼봉으로 연결된다. 이들 등산로 모두 찾는 이가 많이 없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다 계곡이 너무 깊어 아예 길이 없을 것으로 보고 찾지 않고 있는 탓이다.
최근엔 고로쇠 수액을 받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자주 오르내려 등산로는 잘 이어진 편이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의 안내를 충분히 받을 필요가 있다. 세 갈래 등산로 모두 비슷한 산행시간을 요구하고 있으며 연하천
산장을 이용할 수 있고 또한 뱀사골 산장까지 산행도 가능한 만큼 1박할 수 있는 산장을 적절히 선택해 빼어난 계곡미와
종주능선의 운치를 즐길 수 있다. 빗점골 산행의 묘미로 지리산 한가운데 가장 깊숙한 골짜기를 시작으로 주변의 피아골,
뱀사골, 벽소령, 세석 등지를 적절히 즐길 수 있으며 빨치산의 행적을 되짚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최대로 손꼽힌다.
15. 지리산 화개동천 깊숙이 감춰진 곳에 단천골이 있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로 등장하기도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장터로 전해지고 있는 화개장터에서 섬진강과 합류하는 화개동천은 지리산 줄기에서 장장 50여 리에 걸쳐 흐른다.
그 화개천 속에는 크고 작은 골짜기들이 수도 없이 많다. 신흥마을에서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 화개동천은 동쪽으로는
촛대봉과 영신봉 칠성봉 덕평봉 형제봉 그리고 삼신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 내려온다.
서쪽으로는 토끼봉과 불무장등 능선의 물줄기가 범왕골을 타고 내려와 신흥에서 모인다.
신흥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선유동천 단천계곡 대성계곡 빗점골 등을 거느리고 있다.
그 가운데 단천계곡은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선유동계곡과 영험이 깃들여 있다는 대성계곡 사이에 있다.
인접한 두 계곡과 함께 단천골은 남부능선에서 서북방향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특히 단천골은 남부능선 상의 박단샘과 삼신봉 사이에서 발원해 지계곡이라기보다는 독립된 계곡과 같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단천골은 그러나 화개동천의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이렇다할 특징을 보이지 않고 평범한 지리산 계곡 중의 하나로
조용히 남아 있다. 하물며 지도를 펴놓고 보아도 인접한 선유동, 대성계곡 등은 등산로와 함께 표기돼 있으나 단천골은
단천마을 이외의 표기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만큼 단천계곡은 지리산 계곡 가운데 일반에 덜 알려진 무명계곡으로 남아 오래도록 등산객들의 발길도 뜸했다.
불과 4∼5년 전까지만 해도 단천계곡을 따라 등산을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들었다.
요즈음엔 교통의 발달과 등산 인구의 급증에 힘입어 이 계곡을 찾는 등산객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는 평범하면서도 찾아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매력이 넘치는 계곡의 정겨움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선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찾아나섰던 화개동천 어느 언저리에 있을 것으로 여겼던 청학동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살기 좋은 느낌이 드는 곳이 이 계곡의 입구 단천마을이다.
단천골 가는 길은 화개천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 고운 최치원의 숱한 행적이 남아 있는 신흥마을에서 잘 포장된 오른쪽
도로를 따라 국립공원 간이 매표소를 지나 선유동 계곡 입구를 거쳐 단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단천골 입구가
나타난다. 급커브 포장도로를 돌아서면 곧장 오른편에 콘크리트 도로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2km 남짓 차량을 이용해
오르면 광활한 계곡과 함께 단천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병목처럼 좁다란 계곡 안에 비교적 넓은 농경지를 끼고 남향으로 위치해 있는 마을 풍경이 그저 정겹고 풍성하다.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이렇게 큰 마을이 숨어 있으리란 생각은 쉽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해 보인다.
단천교에서 시작되는 단천계곡은 다시 단천마을 입구에서 도로와 만난다.
계단식 논과 개간한 밭, 그리고 우리네 전형적인 농촌마을을 연상케 하는 죽림이 어우러져 이곳이 바로 청학동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20여 가구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따사로운 해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리산에서 보기 드물게 포
근함을 느끼게 만드는 마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계곡 언저리의 비교적 넓은 면적의 농경지와 산비탈을 이용해 벼농사와 가축 사육, 송이와 산채를 채취하고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을 상대로 민박을 해주면서 삶을 영위해가고 있다.
예전에는 숯도 구워 화개장터에 내다팔기도 했으며 산 너머 덕산까지 이어지는 길목에서 오가는 길손을 위한 주막 역할도 했으리란 짐작은 쉽게 간다. 단천골은 예부터 산청 덕산 방면으로 가는 삶의 고갯마루 입구 역할을 했다 한다.
산을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으면서도 화개에서 덕산을 가려면 멀리 진주를 거쳐야 했던 탓에 단천골을 따라 삼신봉에 올라 거림골로 내려가 덕산장으로 가는 길은 우리네 선조들의 애환이 깃들여 있다.
단천골에는 그래서 계곡 곳곳에 집터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단천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는 마을 오른쪽 대밭을 따라 이어진다. 마을을 지나면 노송과 기암이 우뚝 선 쉼터가 나오는데 단천교에서 시작되는 계곡은 벌써 3km 남짓 지난 위치다. 2km는 차편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곳 쉼터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면 널따란 계단식 논과 그 사이로 흐르는 계곡미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멀리 남부능선의 스카이 라인을 올려보며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금방 계곡과 만난다.
단천계곡에는 지도상에 표기될 만큼 명소가 많은데 그 첫번째가 단천교를 조금 지나 도깨비소가 있으며 단천마을에
오르기까지 독아지소, 종개지소 등 이름까지 특이한 소가 즐비하다.
이들 명소는 그러나 등산로와 떨어져 있어 찾아 보기 위해서는 단천교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단천골 유일의 폭포는 단천마을을 지나 계곡을 서너 번 건넌 뒤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 계곡 중 오른편을 따라 조금 오르면 나오는데 용추폭포라 한다. 단천골 등산로는 비교적 산만하다. 이는 근년들어 지리산 대부분 지역이 그렇듯 고로쇠수액을 채취하면서 인근 마을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길을 만들어 놓은 까닭이다.
이곳 등산로는 어지럽게 이어진 듯하지만 일단 목표를 삼신봉으로 정하면 계곡이 둘로 나누어지는 곳에서 오른편을 따라
등산로를 감시하는 리본을 따라가면 별다른 무리는 없다.
다만 계곡물이 불어나는 여름철엔 계곡을 몇 차례 건너야 하는 탓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계곡이 나누어지는 지점의 왼쪽길은 남부능선의 박단샘으로 이어지는데 상단부 길이 다소 희미하지만 날씨만 맑으면
능선을 따라 계속 오르면 된다.단천마을에서 시작되는 단천골 루트는 삼신봉까지 2시간 30분∼3시간 가량 소요된다.
삼신봉 정상에서 지리주능선을 한눈에 살펴보고 화개동천의 비경을 내려다 본 뒤 곧장 단천골로 하산할 경우 전체 소요시간은 5시간 정도면 가능해 당일 등반이 가능하다. 청학동 등 다른 길을 따라 하산할 수 있음도 물론이다. 최근 당일 등반이
보편화 추세에 있음을 감안할 때 단천마을에 차를 세워 두고 삼신봉에 올랐다가 그대로 하산하는 것이 무난하다.
16. 거림계곡은 세석고원의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촛대봉과 영신봉 두 봉우리 사이로 광활한 고원지대를 형성하는 세석과 남부능선 사이로 아기자기한 골을 만들며
거림마을까지 이어진 계곡이다. 촛대봉과 연하봉 사이에서 만들어진 도장골과 거림마을에서 합류한 거림계곡이 8km 아래 곡점까지 계속된다. 거림계곡은 깊은 물줄기와 울창한 원시림을 따라 세석고원까지 8km가량 계속 되면서 중간중간
남부능선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받아들인다. 거대한 수림으로 뒤덮인 골이 란 뜻의 거림계곡은 세석고원으로 가는 길
가운데 가장 가까운 길이다. 거림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를 따라 8km(약3시간 정도) 걸으면 철쭉이 장관을 이루며 만발해 있는 세석에 도달한다.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에서 시작되는 한신계곡 코스(10km)보다 가까운데다 등반로도 완만해 철쭉
시즌이 되면 거림계곡은 수많은 등산객들로 붐빈다.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까지 거림계곡의 등산로는 철쭉의 향연을 만끽하려는 인파들로 체증을 빚을 정도이다.
계곡 주변에는 백숙과 산나물 도토리묵 등을 판매하는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산중의 멋을 더하며, 등산로 입구
마을을 지나면 억만겁의 세월을 두고 보내온 수림과 계곡의 청류는 모든 일들을 망각케 해준다.
계곡을 건너면 등산로를 가운데 두고 들어선 음식점 집 뒤편에서부터 본격적인 등산로가 나온다.
등산로가 시작되자마자 노송과 어우려진 신선바위가 반기는데, 그 옛날 고운 최치원선생이 넘나들면서 시 한수를 읊었을
듯한 풍류와 운치가 있는 곳이다.등산로는 싱그런 녹음과 함께 호젓한 오솔길처럼 이어지며 길을 따라 계속되는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표고 "850m, 세석 5.5km, 거림 2.5km" 지점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그리고 한쪽에는 "통행금지" 표시를 해 놓았다.
이곳 통행금지 표시의 길이 바로 남부능선으로 연결되는 "자빠진 골"을 따라 한벗샘으로 가는 등산로다.
세석과 삼신봉을 잇는 남부 능선의 중간 지점에 해당되는 한벗샘까지 이곳에서는 갈 수 있다.
거림에서 세석으로 곧장 가는 것보다 거림계곡으로 가다가 자빠진골을 따라 남부 능선을 일부 걸어 음양수샘을 거쳐
세석으로 가는 코스도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거림계곡의 단조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등산로나 이용객은 드물다.
거림~세석간 등산코스의 묘미를 더할 수 있는 부분에서 오른편 계곡을 따라 깊숙한 수림을 따라 가다 보면 다소 험난하고 희미한 산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암층이 시작되는 시루봉이 나온다. 시루봉에서 왼편으로 보면 세석고원의 광활함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아기자기한 암층을 따라 붉게 물든 철쭉을 보며 촛대봉에 이를 수 있다. 촛대봉에서 바라다 보이는
세석의 묘미는 사뭇 대자연의 신비가 느껴지는 듯하다. 멀리 반야봉의 선경이 구름 위에 솟아 있는 장면은 장관이다.
일명 세석골로도 불리는 골을 따라 시루봉 촛대봉 세석코스를 등반하는 묘미는 색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촛대봉 시루봉 구간에서 보는 천왕봉의 웅장함과 발아래 도장골의 아름다움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림계곡은 이처럼 양쪽으로 두 갈래의 등산로를 끼고 있어 단조로운 거림-세석간 코스에만 매달리기 보다 두 코스 중
어느 한쪽을 가미하면 지리산의 색다르고 다양한 묘미를 맛볼 수 있게 된다.
거림계곡 4km 지점을 지나면 한동안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걸어야 한다.
다소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걷다 한번쯤 뒤돌아 보거나 주변을 둘러 보는 여유를 가지면 남부능선과 시원한 거림계곡의
상류를 조망하는 즐거움을 더할 수 있게 된다. 가파른 길이 어느샌가 끝나면 다시 등산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이어지는데 드디어 세석입구, 남부능선과 대성골 코스가 만나는 지점에 닿는다.
고산지대 특유의 황량함이 감도는 곳이 오른편으로 촛대봉이 손에 닿을 듯 보인다.
17. 6월의 철쭉 향연이 베풀어지는 세석가는 길목, 거림마을에서 오른편으로 인적 드문 길을 접어들면 도장골이 나온다.
촛대봉과 멀리 연하봉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크고 작은 골을 이뤄한데 모여 거림마을까지 이어지는 계곡이다. 지리산 억겁의 신비가 담겨있는 듯한 골짜기로 알려져 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웅장함의 계곡미를 자랑하며 일반의
발길을 좀처럼 용납치 않고 비경을 간직한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물론 지리산 대다수 계곡이 그러하듯 이곡 도장골 역시 등산인구가 급증하면서 차츰 차츰 사람들의 발길에 멍들어 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여름철 피서인파들은 이미 도장골 입구인 밀금폭포까지 진입, 천하제일의 피서지임을 찬탄하며
이곳을 찾은 현명함을 자랑삼아 늘어놓고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니 멀지않아 다른 모습으로 둔갑할것은 명백한
현실이다. 도장골은 거림마을 주민들이 식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놓고 있어 마을주민들은 등산객들이 이 골을 오르는
광경을 매우 싫어하고 있다. 주민들은 지리산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이 골만큼은 자연 그대로 남아있기를 원하며 갖가지
경고성 문구를 등산로어귀에 내걸어놓고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조치 덕분에 그동안 잘 보전돼 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갈수록 줄을 잇는 등산객들의 무차별적인 입산은 마을 주민들의 소극적인 보존책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으니
도장골의 운명도 여느 계곡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마을주민들이 자신들의 식수원인 도장골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소극적 으로 일관할 경우 도장골도 이제 더이상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남기 힘든 지경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을주민들이 등산로를 개방해 놓고도 말로만 출입통제를 외칠 뿐 특별한 제한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역시 분명한 입장 정리를 해주지 않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실제 도장골을 가려면 거림마을에서 왼쪽 거림계곡으로 가는 것 못지않게 쉽게 찾아갈 수 있는것은 물론 가는 길도
잘 만들어져 있어 한번 가본 사람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며 다른 동료들까지 동행해 오고 있다.
도장골의 묘미가 다른 어느 골짜기보다 더 압도적임을 쉽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는 길은 누구든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와룡폭포까지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편이다.
계곡 초입부터 거대한 수량의 밀금폭포가 버티고 있으며 용소·웝용소를 지나다 보면 반들반들한 반석들이 푸른 녹음과
어우러져 청량감을 맛볼 수 있다. 두어시간 가량 오르면 깊은 계곡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높이의 폭포수를 맞이할 수
있다. 이 폭포는 와룡폭포라 한다.
대다수 등반객들이 주로 거림마을에서 와룡폭포 구간까지 산책정도로 등반하고 하산하고 있다.
이곳부터 다소 험난한 등산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와룡폭포에서는 촛대봉으로 올라 세석펑전까지 갈 수 있으며 멀리 연하봉까지 오를수 있으나 연하봉으로 가는 길은 거의
찾는 이가 없다. 전문 등반가들이 가끔 연하봉으로 가는 길을 찾아나서지만 쉽지는 않다.
촛대봉으로 가는 길은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쯤 시도할 만한 등산코스다. 깊은 계곡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면 갑자기
광활한 대평원을 만날 수 있는데다 촛대봉 못 미쳐 시루봉에서부터 시작되는 암릉은 지리산이 아닌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설악산의 용아장능을 걷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며 멀리 오뚝 솟은 천왕봉의 위용은 이색적이다.
도장골 코스를 거쳐 촛대봉으로 가는 등반로가 다소 무리한 것으로 판단되면 거림계곡을 뒤따라 세석에 올라 촛대봉 -
도장골 코스로 하산하는 방법을 택해도 좋다. 도장골은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며 원시림이 자연상태로 잘 보존돼
있고 지형도 험난해 근 대사의 지리산 최대 비극인 빨치산의 주무대로 활용되기에 충분했음을 할 수 있다.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깊고 넓어지는 지형 탓과 양지 바른 특성은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로서 최적 지였던 것이다.
당시 지리산에 몰려 들었던 빨치산은 거림골과 도장골, 그리고 빗점골 등지를 넘나들던 빨치산은 이곳 도장골을 최대
식량저장지와 환자수용소로 활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와룡폭포 상단부는 지휘부와 환자수용소로 활용될 정도의 주요 은신처였음이 이태의 「남부군」, 정충제의
「실록 정순덕」등의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당시 국군토벌대와 빨치산과의 끊임없는 교전은 「피습과 은신」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워낙 산세가 깊고 험난해 토벌대는 빨치산의 주요 지휘소와 식량기지를 한두 차례밖에 피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지금은 도장골이나 거림골이 곡점에서 거림마을까지 닦여진 도로를 따라 차편을 이용하면 금방 갈 수 있으나 당시는 곡점에서부터 시작되는 골짜기를 한번
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점을 최대한 이용한 빨치산의 활동이 도장골에서 최고조에 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자명한 이치다. 도장골이 피습당하면 세석 등지로 옮겨 지리산 어느 골이든 쉽게 은신처로 이동할 수 있었던 지형적
요충지로 한몫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장골도 궁극적으로는 안전지대로 남지 못 했음은 물론이다.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역사의 순리를 벗어난 역리는 결코 종말을 맞을 수 밖에 없다는 엄연한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다. 어두운 과거사의 흔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고 있으나 도장골을 오르면서 새삼 되새겨진다.
당시 토벌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진주지역의 60-70대 산꾼들이 종종 주말을 이용해 도장골을 등반하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후배들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오고 가며 만나는 젊은이들에게 간혹 들려주는 당시 도장골에서의 빨치산 활동과
토벌대의 피습 얘기들은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당시의 아픔을 되뇌이며 젊은이들에게 지리산의 산역사를 알려주던 老산꾼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도장골은 젊은이들에 의해 점점 오염되며 개방되고 0聆?뿐이다. 지리산 골골이 깃들인 역사의 아픔과 교훈을
두고두고 전할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 시점임을 도장골에서 느껴본다.
18. 구룡계곡은 용호구곡 또는 구룡폭포 라고도 한다.
이처럼 이름을 달리 하는 것은 옛날 음력 4월 8일이면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군데 폭포에서 한 마리씩
자리잡아 노닐다가 다시 승천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용호구곡을 곡별로 소개하면
제1곡 : 주천쪽 지리산 국립공원 매표소에 조금 못미치고 있는 송력동폭포를 1곡이라하며, 이곳을 흔히 약수터로 불린다.
제2곡 : 매표소를 조금 오르면 높이 5m의 암벽에 이삼만이 썼다는 용호석문 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는 절벽아래 흰 바위로
둘러싸인 못이 2곡으로 불영추라 한다.
제3곡 : 육모정에서 300m 지점에있는 황학산 북쪽에 암석층이 있는데 이 암벽 서쪽에 조대암이 있다.
이 조대암 밑에 조그마한 소가 바로 4곡인데, 학들이 이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는다 해서 학서암이라 한다.
제4곡 : 학서암에서 300m쯤 오르면 유난히도 흰 바위가 물에 닳고 깎여 반들 거리고, 구시처럼 바위가 물살에 패여있다.
또 거대한 바위가 물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가 하면 건너편 작은 바위는 중이 꿇어 앉아 독경하는 모습같다 하여
서암이라고 하며, 일명 구시소 로 더 알려져 있다.
제5곡 : 구시소에서 1km지점에 45도 각도로 급경사를 이룬 암반을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곳에 깊은 못이 5곡인 유선대이다.
유선대 가운데에 바위가 있는데 금이 많이 그어져있기 때문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 신선들이 속세의 인간들에게 띄지 않기 위해서 병풍을 치고 놀았다 하여 은선병 이라고도 한다.
제6곡 : 유선대로부터 500-600m쯤 거리에 구룡산과 그 밖의 여러갈래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게곡 물이 여기에서 모두
합류한다. 그 둘레에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제일 뾰족한 봉우리가 계곡물을 내지르는 듯하여 그 봉우리 이름을
지주대라 하고, 이곳을 6곡이라 한다.
제7곡 : 지주대로부터 왼쪽으로 꺾이면서 북쪽으로 1km 지점에 거의 90도 각도로 깎아지른 듯한 문암이라는 암석층이
있는데, 이에 속한 산이 반월봉이고 여기서 흘러내린 물은 층층암벽을 타고 포말려 비폭동이라 하며 이를
7곡 이라 한다.
제8곡 : 비폭동에서 6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암석층이 계곡을 가로질러 물 가운데 우뚝 서 있고, 바위 가운데가
대문처럼 뚫려 물이 그 곳을 통과한다 해서 석문추라 하는데, 바로 이 곳이 8곡이다. 경천벽이라고도 부른다.
제9곡 : 경천벽에서 500m 상류 골짜기 양켠의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있다.
멀리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두 갈래 폭포를 이루고, 폭포 밑에 각각 조그마한 못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용 두 마리가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 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서로 꿈틀
거린 듯하므로 교룡담이라 하고, 이 곳이 바로 9곡이다.
아홉 마리 용이 살다가 승천 했다는 전설과 함께 일명 구룡폭포라 한다.
지리산 동면 좌사리 심원계곡 남쪽 상류에 있는 용소는 위에서 부터 여러개의 소가 집단적으로 모여 있고 물이 맑아
여름철의 피서지로 이곳을 아는 이는 가끔 찾는다.
천은사 신도로 가면 노고단 계곡이 나오는데이곳 삼거리에서 북쪽 계곡을 따라 한참가면 첩첩산중에 조그만 마을이
보이는데 이 계곡에 위치한 이 소는 인적이 드물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 맑은 계곡과 울창한 원시림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몇시간의 등산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곳이
용추계곡이다.
옛날 안의현에는 세곳의 빼어난 절경을 간직한 곳이 있어 "안의 삼동" 이라 전한다.
이곳 용추계곡은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리삼매경에 빠졌던 곳" 이라 하여 "심진동"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용추계곡 입구에 들어서면 심진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심원정이 있다.
유학자 돈암 정지영이 노닐던 곳에 그 후손들이 고종 3년 (1806년)에 세운 것으로 수수하고 고풍스런 정자에 오르면
마음까지 맑아 진다는 청신담과 층층이 포개진 화강암 무리가 한눈에 펼쳐진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오르면 계곡의 곳곳에 전설과 유래를 적은 현판들이 세워져있다.
심원정을 지나 3km가량 더 들어가면 넓은 주차장 뒤로 장수사 일주문이 외롭게 솟아있다.
신라 소지왕 9년 각연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장수사.
그러나, 장수사의 흔적은 일주문만을 남긴채 동족 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으로 소실되고, 복원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사찰의 흔적을 찾아 "용추사"에 들르면 절앞에서 들리는 우뢰와 같은 소리, 용추폭포다.
용추계곡의 깊은 곳에서 모이고 모여서 이룬 물이 용호로 떨어지니 이곳에 서면 여름더위는 어느새 잊혀지고 만다.
화난 용이 몸부림치듯 힘차게 떨어지는 물줄기는 사방으로 물방울을 튕겨내어 장관을 이루고 폭포앞에 서있는 나는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20. 지리산안의 삼동 중에서 화려한 자연의 미를 간직한 곳이 화림동계곡이다.
화림동은 안의에서 전북 장수군으로 통하는 국도 26호선을 다라 약 4km를 가면 굽이치는 물가에 아담한 마을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곳이 화림동의 정수 '농월정'이 있는 곳이다.
화림동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금천이 굽이치며 흘러 팔담팔정을 이루었다.
그래서, 옛부터 화림동을 정자문화의 보고라 한다. 지금도 농월정을 비롯한 4개의 고풍스런 정자가 남아 있다.
특히 농월정은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옛날 우리 선조들의 풍류사상이 깃든 곳, 함양을 찾은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필히 거쳐간 곳이다.
이 곳 녹수를 사이에 둔 양쪽 산기슭의 송림은 거문고 현을 퉁기는 듯하며, 길게 늘어선 수양버들은 천줄기의 실로
낚시질을 하는 듯 보인다.
맑은 물이 급한 굴곡을 이루는 곳에 커다란 반석이 펼쳐져 있다. 반석위를 흐르는 물이 달빛을 받아 금물결을 이루는
이 곳에 세워진 고색창연한 농월정은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하고 있는 듯하다.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월연암이라 이름 붙은 너럭바위 위로 미끄럼타듯 물살이 세차게 흐르고,
물길따라 골이 깊게 패였다.
월연의 맑은 물에서 물장구치며 노는 개구쟁이들의 모습과 아름다운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가 되어 지나는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9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농월정의 관광편의 시설들이 올 봄에 완전한 모습을 갖춤에 따라 야영, 민박 등 숙식에는
불편함이 없다.
특히 2천여명의 야영장은 모래땅 위에 조성되어 있어 비가 와도 배수가 잘 되어 한번쯤 비오는 날 텐트속에서
야영해 보는 것도 운치있어 보인다.
화림동에서는 더덕구이, 백숙, 메기매운탕이 별미다. 백숙은 마리당 2만5천원이다.
이 곳 안의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우직한 손끝에서 묻어나는 얼큰한 맛은 바로 고향의 맛이다.
골이 깊고 물이 맑아 수많은 인파가 붐비는 농월정. 너럭바위 위로 흐르는 맑은 물에 몸을 담그다 정자밑에서 더위를
피하기도 하는 농월정의 운치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소로길을 따라 올라가면 수정처럼 맑은 물이 조용히 흐르고 주변계곡의 절경은 그만자리에 주저앉아 천년만년 살고
싶어진다.
이름모를 새소리가 더위를 쫓고 나는 그냥 옷을 훌훌 벗고 벽계수에 몸을 던지고 싶어진다.
용추폭포에서 약 30분을 걸어올라가면 상사평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용추계곡의 맛갈난 음식들을 맛 볼 수 있다.
용추계곡 끝에는 함양군에서 조성한 "용추자연휴양림"이 있다.
아담하고 멋스럽게 꾸며진 산막들과 넓은 주차장 그리고 물놀이장과 전망대 등의 휴양시설을 갖추고 있는
"휴양림"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고 있어 매우 싼가격으로 멋스러운 휴가를 보낼 수 있다.
1박2일 기준으로 산막 4인용 3만원, 8인용 4만원, 14인용 6만원이다. 이곳 자연휴양림에서 남덕유산의 줄기인
1,000 m 남짓의 기백산과 황석산을 등반할 수 있는 등산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가족간 등반도 즐길 수있다.
무더위로 심신이 피로할 때, 용추계곡의 아름다움에 젖어봄은 하나의 신선한 청량제가 될 것이다.
21. 지리산 수많은 계곡 가운데 유독 산세가 험난하지 않은 평지에 강처럼 50여리나 이어지는 물줄기를 계곡이라고
이름한 곳이 있다.
엄천이라고 불리는 휴천계곡을 말한다.
아름다운 물굽이가 장장 50여리에 걸쳐 산청군 생초면 경호강에 까지 이어지는 휴천계곡은 지리산자락에서 색다른
풍치를 찾아볼 수 있는 한 폭의 동양화처럼 와 닿는다.
지리 주릉 1백리 북쪽의 물줄기가 마지막으로 모여 경호강으로 흘러 들어 남강을 만들 수
있도록하는 물굽이가 바로 휴천계곡, 다시말해 엄천이다.
주릉 북쪽의 물줄기는 모두 3개의 이름으로 나뉜다.
전북 남원군 일원에서 함양군 마천면 가흥까지의 물굽이를 만수천(萬壽川), 가흥(또는 산내)에서 용류담까지를 임천(臨川), 용류담서 생초면(또는 화계면)가지 50리를 엄천(嚴川)또는 휴천계곡이라 한다. 이 물굽이는 생초, 산청, 원지 나루까지를
거치면서 경호강이라 불리었다가 다시 주릉 남쪽의 물굽이와 만나면서 남강이 된다.
이렇듯 우리네 선조들은 물줄기 하나 바위 하나, 이끼 하나에 까지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이름을 달리할 정도로 지리산을
사랑했고 풍류를 아는 조상임에 틀림없다.
휴천계곡을 제외하고는 이들 모든 물굽이를 따라 도로가 포장도로로 잘 연결돼 있다.
물론 휴천계곡 구간인 마천면 의탄∼유림면 까지는 모든 길이 잘 단장돼 명실공히 지리산 순환도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휴천계곡 변의 도로는 지리산 경남권역 북부지역의 새로운 지리산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게 될 전망이다.
이 도로는 지리산 남부권인 산청군 시천, 삼장, 금서지구와 북부권인 함양군 휴천, 마천을 곧장 연결하고 다시 남원군
인월 노고단, 구례군 천은사 화엄사, 하동군 화개면 청암을 이어 산청군 시천면으로 통하는 지리산 순환도로가 될 것이다.
이 도로망 완공은 곧 휴천계곡 명소의 완전 개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는 도로망이 부족해 백무동 등지를 가려면 함양읍에서 전북 남원군 인월을 거쳐야 했던
탓에 휴천 계곡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천왕봉과 중봉, 하봉 등 주릉을 앞세우고 뒤로는 금대산과 법화산 등 비교적 낮은 봉우리를 가진 휴천계곡은 우선
산세와 물굽이가 절경을 이뤄 가는 곳마다 최고의 명승지이다.
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넋과 혼이 깃들은 흔적들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어 지리산자락 답사의 색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5백년전 함양군수로 부임한 뒤 지리산 등반에 나섰던 김종식과 김일손은 휴천계곡 주변의 경관을 찬탄했고 당대의
석학 정여창은 "바로 이런 곳이 살만한 곳이 아니겠느냐"며 은둔하기에 알맞은 선경이라 묘사하기도 했다.
덕행을 쌓고 절의를 지키던 선비들이 지리산 산행에 나서면서 주위 경관을 보고 "은둔의 명소"로 표현한 부분은 당시
예견되던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선비들의 대대적인 학살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여겨진다.
고난의 길을 지리산 산중에서 예견했던 이들 선비들은 끝내 지리산 은둔을 하는 대신 선비로서 꿋꿋이 절의를 지켜
희생되는 삶을 택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매우 크다.
당시 선조들이 은둔해 살만한 곳으로 본 곳은 아마도 휴천계곡 주변의 문정, 남호등지로 보인다.
지금도 여유있어 보이는 이 일대의 풍경은 가히 사람살만한 곳 처럼 느껴진다.
문정마을은 원래 탄촌(炭村)마을로 영산의 정기가 그대로 풍겨지는듯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문정마을에서 유림면 방면으로 조금 더 내려 가면 휴천계곡 주변에서 가장 큰 마을이 나오는데 동호, 원기,
한남 세마을을 안고있는 남호리이다.
이 일대에는 지금은 사라진 엄천사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라진 대찰, 엄천사의 흔적들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김일손은 "왕대 숲속에 고색 창연한 절이 있었다. 엄천사라는 절이다.
땅이 넓고 편편해 가히 집을 짓고 살만한 곳이다"라고 적고 있으나 지금은 절 터의 부도등 사찰의 흔적만 남아있다.
특히 휴천계곡 가운데 인상적인 곳이 하나 있는데 바로 새우섬이다. 조선왕족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왕족이면서도 찬탈과 단종 복위운동을 주장하다 유배돼 희생됐던 한남군(漢南君). 강가의 새우섬은 지금은 섬이 아닌
강언저리로 변해 있으나 한남군이 유배돼 살다가 생을 마감한 뜻을 기려 새우섬이 있는 곳을 한남마을이라 한다.
한남군은 세종 11년(1419) 세종대왕의 열여덟 왕자 가운데 열두번째로 태어났다.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병약한 문종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채 성삼문, 박팽년 등 신하들에게
아들 단종의 보위를 유언으로 남긴다.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을 대신해 세조로 등극하자 한남군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나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한남군은 왕족으로 세조의 동생인 까닭에 참형은 피했으나 함양 땅 새우섬으로 유배를 가게된다.
부왕인 세종의 유지를 받들어 장형인 문종의 유명(遺命)을 따랐던 한남군은 유배 4년만에(세조 5년(1459)) 마음의 병이
깊었는지 몸이 쇄약했는지 새우섬에서 생을 마감했다.
왕손의 절개를 지키며 마지막 삶을 새우섬에서 보낸 한남군의 육신은 함양읍 교산리 봉강마을 뒷산에 묻혔다.
조선조 세종대왕과 단종, 그리고 한남군의 숨결이 한양땅에서 천리길이나 되는 경남땅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가 사천군 곤명면에 마주 보고 있으며 이곳 새우섬에 세종의 열두번째 아들 한남군이
유배돼 숨졌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한남군이 유배된 새우섬은 대략 6천여평의 섬이었으나 지금은 섬이라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있다.
함양 유림들은 한남군의 지조와 절개를 기려 1867년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한오대(漢鰲臺)"라 편액하고 추모해 왔다한다.
그러나 이 누대는 1936년 병자년 대수로 물에 휩쓸려 가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한남교란 다리로 연결된 새우섬.
한남군의 절의를 추모하고 후세에 이를 전하기 위해서는 단종의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가 사적지로 지정돼
보호하는 것처럼 보전할 필요가 있다하겠다.
더욱이 앞서 언급했듯 경남 지역에 세종과 단종 태실이 남아있는 사실을 들어 이곳 한남군의 애환이 깃들은 새우섬을
두 태실지와 연계된 사적지로 지정함이 바람직할 것으로 여겨진다.
지리산 끝자락에 서린 한남군의 혼을 담은듯 휴천계곡은 맑고 고운 물굽이와 아름다운 경관을 간직한채 흐르고 있다.
지리산의 체취가 묻어 나온 물줄기가 흐르는 휴천계곡 50리를 찾아가면서 한남군의 절의와 선조들의 숨결을 한번쯤
되새겨 봄직하다.
지리산은 그냥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한민족의 애환과 삶, 문화, 역사가 숨쉬는 곳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22. 무릉계곡 馬川으로 가면 아무리 무더운 여름에도 소름이 오싹할 정도의 시원한 청량감을 맛볼 수 있다.
지리산 북쪽 관문을 통틀어 부르는 마천은 행정구역상 함양군 마천면이다.
천왕봉을 위시한 고봉준령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여기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하나로 만들어 내는 곳이다.
특히 1백리 지리산 주릉의 북쪽 비탈면의 물줄기가 모여 아름답고 시원하기 그지없는 내(川)를 이루는 곳이고 보면
무더운 여름날 마천의 풍광은 가히 천국이 아니랄 수 없다.
마천은 그래서 매년 여름철이면 전국 각지에서 찾아드는 피서 인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즐비한 계곡류의 폭포수와 검푸른 소, 그리고 울창한 원시림이 토해내는 청량감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마천의 으뜸 피서지는 칠선계곡의 들머리인 추성동과 한신계곡의 초입부인 백무동, 그리고 임천과 엄천을 구분짓는
용류담(행정구역상 마천면과 경계지점 부근인 휴천면 송천리에 위치해 있으나 여기서는 크게 보아 마천으로 포함한다)을 꼽을 수 있다.
이밖에 벽소령 아랫 마을인 음정, 양정, 하정의 삼정마을과 창암산, 추성동에서 하봉으로 가는 길목인 광점동, 얼음터,
국골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 가운데 추성동은 지리산 최대의 계곡인 칠선계곡과 국골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여름철이면 수많은 피서객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더욱이 추성동에는 계곡과 벽송사, 가락국 최후 임금의 피난처였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곳이어서
더욱 의미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추성동이 등산객이나 피서객들의 편의도모를 위한 민박촌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으나 예전엔 칠선동, 두지터,
광점동, 얼음터 등과 더불어 화전민들의 터전이기도 했으며 유명한 마천곶감, 마천산나물, 마천한지(문종이)등의 집산지
역할을 다한 곳이다. 추성동 위쪽에 위치한 국골에는 연대를 알수 없는 석성이 있는데 바로 가락국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피난처 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지명이 국골이라고 붙여졌다 한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천왕봉 고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명 추성 또는 박회성이라 하며 의탄에서 5,6리 떨어졌는데 마소가 갈 수 없는 곳이며 안에는 창고터가 있다.
세상에서는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것이라 전한다."
이는 국골의 산성터를 말하는 것으로 전설처럼 가락국 최후의 왕인 구형왕이 피난해 군마를 훈련시키던 곳인지의 여부는
쉽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일대에는 두지터(쌀을 담는 두지를 지칭)와 얼음터 (석빙고와 같은 기능을
한 것으로 전해짐)가 있는데 이는 고대국가의 식량창고와 여름철 음식물 저장고 역할을 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피서지로 각광받는 칠선계곡과 추성동을 찾는 이들에게 색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되새겨 봄직하다.
마천면소재지에서 추성동으로 가다보면 임천을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다리를 볼 수 있는데 의탄교이다.
의탄교를 건너면 의평동, 의중동 등이 있는 의탄마을이 나온다.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인데다 경관이 빼어나 일찍이 5백년전 지리산 등정에 나섰던 점필재 김종직은
이곳을 무릉도원으로 표현했다.
1471년 함양군수로 부임한 점필재는 이듬해인 음력 4월 함양성을 나와 지리산 탐승에 오른다.
유호인, 조위, 한인효등 그가 아끼던 제자들과 사근역을 지나 휴천계곡 50리를 거쳐 의탄마을에 당도해
그의 심경을 글로써 털어 놓았다.
...서너 곳의 모퉁이를 돌아 이르는 곳에 깊숙하고 한적한 동부(洞府)가 열렸다.
숲은 해를 가리고 솔겨우사리와 담쟁이 덩굴이 서로 얽혀 나무를 덮고 있는 아래에는 시냇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꺾여
힘찬 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동산(東山:옛 중국의 명승지)에 와 있는성 싶다... 나무를 베어 내고 밭을 일궈 살면 바로 무릉도원이 된 것 같다.
점필재 김종직을 유혹했던 곳이 바로 의탄마을이다. 점필재는 여기서 동행했던 유호인에게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떠리요'라는 말로써 의탄마을에서의 강한 인상을 대변하기도 했다.
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에는 아름드리 정자나무들이 서 있고 칠선계곡에서 흐르는 청정계류가 어우러져 으뜸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김종직 일행은 당시 의탄마을에 당도하기에 앞서 용류담을 지난다.
용이 노닌다는 용류담은 지리산 물을 받는 시내중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
명경지수같은 맑은 물이 용틀임 하듯 흘러내리는 용류담을 보고 그냥 지나칠 문인은 아무도 없다.
엄천과 임천을 구분짓는 용류담은 행정구역상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로 마천면과 경계부근에 위치해 있다.
마천-유림간을 잇는 도로를 지나다 보면 그냥 지나칠수 없는 용류담은 여름철은 물론이고 사시사철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점필재 보다 17년 후에 두류산 탐방에 나섰던 김일손은 그의 '속두류록'에서 용류담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내(임천)의 북쪽, 아슬아슬한 언덕을 따라 내려가 용류담에 이르렀다.
못은 남에서 북으로 깊이 패어 아득하고 바윗돌이 기이하여 인간세상에서 멀리 천리나 떠나온듯 했다...
못가의 돌들이 흡사 고기 비늘 무늬를 새긴 것처럼 반질반질하고 독처럼 움푹 파이고 솥모양을 닮아 보이기도 해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이곳의 전설을 믿는 백성들은 이러한 돌이 용의 그릇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계곡의 급한 물살이 오랜 세월동안 돌을
구르며 깎고 파이게해 마침내 여러 모양을 만들었음을 인식 못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어찌 사실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황당한 이야기에만 빠져드는고?라고 했다.
김일손의 애민정신과 용류담의 아름다움에 심취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용류담에는 김일손이 우매한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겼던 전설이 숱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홉마리의 용이 이곳에 살면서 하루는 크게 싸워 커다란 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태초에 거대한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는 지리산에서 모여드는 물줄기를 가로막고 있었다.
성난 물줄기는 바위와의 싸움을 시작해 지리산 골짝마다의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노도와 같이 바위를 향했다.
바위는 깎이고 구멍이 뚫리고 엉망이었으나 그렇다고 태산의 의지를 굽히지는 않았다.
어느날 하늘이 울고 땅이 쪼개지듯한 큰 부딪힘이 있은뒤 바위와 물은 서로 대립만 해온 자세를 풀고 공생하는 길을
생각해냈다. 용류담은 이렇게해서 물과 바위가 합작한 명소가 됐다.
용류담을 아끼는 이 고장사람들은 산기슭에 구룡정이란 정자를 세워 이들 전설을 소중히 전해오고 있다.
마천의 명소는 이들외에 많이 산재해 있으나 오늘날에는 한신계곡의 물줄기가 모이는 백무동이 으뜸이다.
풍부한 수량과 수림이 장관인데다 마천골 가운데 가장 먼저 교통편의 시설이 갖춰진 탓에 백무동은 끊임없는
인파가 연중 끊이질 않는다.
마천골에는 어느 곳에 가든 맑고 차가운 물줄기를 만날 수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옛 선조들의 풍류정신과 역사의 현장임을 되뇌이며 올 여름 마천에서 여름나기를 한번쯤 해봄직하다.
23. 청학동계곡이란 청학동 계곡과 회동 계곡물이 합류하여 횡천면 삼거리에 이르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50리를 말한다.
계곡의 경치는 청학동으로 오를 수록 더욱 절경이다. 좌우로 둘러져 있는 울창한 숲과 깍아 세운 듯한 바위와 기암괴석은
기경을 이루며 맑은 물은 곳곳에 늪과 못을 이루어 진경을 보여 준다.
20리를 오르면 청암면 평촌이 한 폭의 그림 속에 나타난다. 깍아 지른 산들이 멀리 뒷걸음한 속에 넓은 분지가 시원하게
펼쳐지면서 계곡은 느린 걸음으로 산밑을 돌아 먼 산의 단풍이 짙게 물들어 있다.
이윽고, 계곡은 다시 좁아들면서 붉은 감들이 익어 여기저기 눈길을 끈다.
다시 깊은 계곡은 산과 마주하며 더 높게 더 깊게 아름다운 산천을 꾸며 가고 있다.
상이리 언덕 밑에는 여름에도 추위를 느끼는 늪이 있고 바위가 있다. 길에서 내려다보면 천길 낭떠러지 밑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시퍼런 물은 쉬지 않고 바위 위를 흘러온다. 깍은듯한 벼랑에는 태고의 수림으로 엉켜 있고 조그마한
정자는 옛 향기를 풍긴다. 신라 경순왕을 추모하는 경춘묘도 있고, 고려유신 이색을 추모한 금남사도 있다.
산을 뚫고 올라오는 계곡의 물소리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그 맑은 자태를 자랑하며 울창한 숲이 하늘을 찌르듯 서 있다. 기암괴석이 물살과 어울려 형형색색의 자태를 뽐낸다.
억조의 세월이 쌓여 바위는 부서지고 그 부서진 바위틈으로 낀 이끼는 꽂보다 곱다.
뒤돌아보면 점점이 모인 산봉우리들로 마치 구름 위에 서 있는 느낌을 준다.
다시 언덕을 내려오면 묵계리 계곡이다. 수많은 물줄기가 모이고 모여 폭포를 이루고 또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맑은
샘물은 계곡을 감돈다. 전하는 말에 이곳에 계곡을 걸쳐 절을 지었는데 절에서는 도무지 계곡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설화이다. 이로 인해 이곳을 묵계라고도 하며 영원한 신비의 대자연이 더욱 신비감을 뿜어내어 자연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화개장터에서 12㎢ 지방도로(포장)를 따라 올라가면 50가구가 사는 의신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마을 앞쪽으로
흐르는 이 의신계곡은 넓은암반과 숲이 많아 매년 여름철 많은 피서인파가 즐겨찾는 곳이기도 하다.
★ 오시는 길
진주에서는 버스와 열차편으로 1시간 정도 걸려서 하동읍에 도착하면 매시간 화개장터까지(20분소요) 직행버스가 기디리고 화개장터에서 의신까지는 약 12㎞로서 1일 4회 버스운행.
구례구(역)에서는 5분을 달려 구례읍에 도착하면 화개장터에 도착하는 시간 버스가 시간대별로 대기해 있다.
★ 주변관광지
의신계곡에 도착하기 전 4㎞지점인 신흥삼거리에서 범왕리 방면으로 6㎞ 가파른 포장도로에 이르면 일곱왕자가
승불했던 칠불사가 있는데 아자방이 유명한 고찰이다.
★ 특산물
지리산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참나물과 취나물로 만든 비빔밥이 유명하며, 봄 2월 중순(우수,경칩절기)경에 고로쇠
수액채취가 한창인데 신경통, 치료등 만병통치로 유명하다.
지리산이 갖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신선설과 이상향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는 대자연에 의지하고픈 인간의 본능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지리산 전역 가운데 유독 신선과 이상향의 전설이 많이 전해져 오는 골짜기가 있다면 단연 화개동천 언저리이다.
화개동천 일원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신선설과 이상향인 삼신동, 그리고 신선이 노닐었다는 수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다. 그 가운데 화개천의 지류인 선유동 계곡과 최치원이 삼신동으로 이름지었던 신흥마을에 얽힌 전설은 사뭇 감동적이다.
신흥마을에는 최치원에 얽힌 전설과 유적들이 많다. "삼신동"이라 새겨진 각자와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조선시대에
나타났다는 전설, 그리고 세이암에 얽힌 사연이 흥미롭다. 삼신동은 최치원이 이상향으로 설정했던 곳이다.
그가 당시 삼신동으로 들어가면서 속세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는 심정으로 귀를 씻었다고 전해는 그 바위를
세이암이라고 부른다.
선유동 계곡은 삼신봉과 그 능선에서부터 빚어진 골짜기로 이름 그대로 신선들이 노닐던 곳이라는 전설이 담긴 곳이다.
이 의미를 되새기면서 선유동 계곡에 발을 들여놓으면 널따란 반석위로 구슬이 구르듯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전설과
어우러져 스스로 신선이 된 듯한 운치를 느낄 수 있다.
한여름 수많은 인파가 몰렸을 때보다 한겨울 아무도 찾지 않는 선유동 계곡의 정취는 너무나 청아하다.
그것도 흰눈이 흩날리는 날이면 신선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눈이 없는 겨울날에도 뼛속 깊숙이
파고드는 맑고 맑은 계곡 물과 더불어 신선처럼 살다간 그 옛날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별유천지이다.
선유동 가는 길은 쉽게 열려 있다. 화개동천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계곡이 둘로 나뉘는 신흥마을에서 오른편
물줄기를 따라 잘 포장된 도로를 조금만 가다 보면 어귀가 나온다.
신흥마을에서 2km 남짓 가서 국립공원 관리공단 간이 매표소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선유동 계곡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이 안내판을 따라 그대로 오르면 된다.
24. 국골은 역사의 베일에 가려진 가락국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애환이 깃들여 있는 지리산의 숨은 계곡이다.
그리고 이웃한 칠선계곡의 선녀탕에 얽힌 사연과 함께 곰들이 쫓겨 들어와 살았던 골짜기이기도 하다.
국(國)골. 지리산의 많고 많은 계곡과 봉우리들 가운데 나라를 의미하는 뜻의 "國"자를 쓰는 지명은 이곳밖에 없다.
가락국의 10대 임금이며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이 추성산성을 축조하고 국골에서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군마를 이끌고
훈련을 시켰다는 말에 근거를 두고 붙인 지명이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아직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는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나라를 신라에 평화롭게 넘겨주었다고 해서 양왕(讓王)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일각의 주장에 따를 때 그러하다.
그러나 지리산 사람들은 구형왕이 나라를 넘겼다고 해서 양왕이라 하지만 국골과 추성산성을 근거지로 해 신라에 항거하고 인근의 왕등재 일대에서 토성을 쌓고 저항하다 끝내는 왕산으로 쫓겨가 최후를 맞았다는 등의 구전을 들어 구형왕과
지리산을 애써 결부시키고 연관지으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리산 동부권역에는 가락국 구형왕에 얽힌 지명과 유적지가 유난히 많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추성산성터 주변의 두지터(식량저장고), 얼음터에서 국골은 물론이고 구형왕이 올랐다는 왕등재 그리고 왕등재 일대의
토성, 산청군 금서면의 왕산과 구형왕릉, 덕양전 또한 구형왕의 증손자였다는 김유신 장군의 훈련터 등이 그것이다.
개국 과정에서부터 베일에 가려져 아직도 정확하게 사료가 정립되지 못 하고 있는 가락국의 실체가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의 행적까지 송두리째 뒤덮여 있어 신비감을 더 갖게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구형왕이 지리산으로 피해 들어와 국골을 천연 요새로 해 추성산성을 쌓아 도성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등재 일원에서도 토성을 쌓고 신라에 항전하려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지리산 사람들은 하봉과 중봉사이를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나라의 뜻을 인용, 국골로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들이 물론 오랜 세월을 보내 오면서 과장될 수도 왜곡될 수도 미화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리산이
이미 1천5백 여년 전부터 우리 민족사와 함께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보면 새삼 지리산과 한민족의 깊은 인연을
되새기게 한다. 이즈음에서 국골 주변의 산성과 왕등재 일원의 토성, 그리고 왕산 일대의 유적들에 대한 학계의 발굴 노력을 통해 가락국의 패망과 신라와의 관계 등의 역사를 규명해 봄직하다는 생각이다. 국골은 가락국 마지막 왕의 피난 도성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과 함께 태고적 선녀들의 노여움을 산 곰들이 칠선계곡에서 쫓겨 들어왔다는 동화같은 얘기도 전해 온다. 앞서 칠선계곡 편에서 언급했듯이 국골 너머 칠선계곡의 선녀탕과 그 전설의 궤를 같이한다.
일곱 선녀가 칠선계곡 선녀탕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던 것을 본 지리산 곰이 평소 연정을 품고 있던 중 선녀들의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겨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은 옷을 입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려 했으나 아무리 찾아 헤매도 옷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사향노루가 이 사실을 보고 자신의 뿔에 걸려 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선녀들의 옷을 훔쳐 바위틈에 숨긴다는 게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 알고 옷을 숨긴 것이다. 그리하여 선녀들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노루는 칠선계곡으로 집단 이주해 살게 하고 몹쓸 짓을
한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는 얘기다.
국골은 선녀들이 곰을 내쫓았지만 그렇게 작지도 빈약하지도 않은 계곡이다.
칠선계곡의 지류에 해당하는 국골은 중봉과 하봉 사이에서 형성돼 추성동의 용소에서 칠선계곡과 합류한다.
마찬가지로 큰 계곡의 그늘에 가려 아직도 숨겨진 골짜기나 다름없다.
칠선계곡과 얼음골과 함께 추성동에서 오를 수 있는 세 개의 골짜기 중 가운데 위치해 있다.
하봉 능선을 사이에 두고 깊숙하게 이어진 국골은 지금은 등산로가 비교적 잘 이어져 있어 간혹 하봉 능선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찾는 깨끗하고 한적한 계곡이다. 당장에라도 칠선계곡에서 쫓겨난 곰들이 불쑥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는가 하면 구형왕이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들어왔듯 지리산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국골의 인상이다.
국골 산행은 한적한 분위기와 더없이 깊은 골짜기 특유의 원시림 속에서 표출되는 상쾌함, 그리고 태산장곡만이 자랑하는 스산함 등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산행의 시발점을 추성동으로 할 때 하봉 언저리의 하봉 능선과 교차 지점에서 하산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봉을 거쳐 천왕봉을 올랐다가 다시 칠선골을 통해 추성동으로 하산할 수 있다.
이 코스는 상당한 체력소모를 요하므로 신중한 산행 준비가 필요하다. 국골 산행은 천왕봉을 오르기보다는 오히려
하봉을 오른 뒤 쑥밭재를 거쳐 왕등재를 거쳐 유령계곡 또는 오봉리로 하산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코스는 특히 국골과 왕등재가 공통적으로 갖는 특징, 즉 구형왕과 가락국의 사연들을 인식하며 답사해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이 구간은 지리산 동부권역 가운데 가장 덜 개방돼 인적이 드문데다 산세는 그 어느 곳 못지 않게
수려한 특성을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해 등반의 묘미를 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구간 중 쑥밭재에는 일제 당시 지리산
일원에서 일제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애국지사 석상용 선생의 묘가 있는가 하면 빨치산과 국군의 양민학살
현장이 있기도 해 지리산 근대사의 실상을 체험해 볼 수도 있다.
국골 산행은 추성동 마을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마을 가운데를 지나는 농로가 시발점이 된다.
마을 뒷산, 칠선계곡과 합류지점인 용소 바로 위에 등산로가 잘 다듬어져 있는데 노송과 거목들이 운치있게 서 있어 본격
산행에 앞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기에 적격이다.
초반부에는 계곡과 다소 거리를 두고 등산로가 나 있으나 10여분만 오르면 계곡과 함께 등산로가 있어 부담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비교적 평탄한 등산로를 따라 2시간 남짓 오르면서 국골 산행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세련되지 못한 계곡미와 울창하면서도 덤불이 뒤엉켜 다소 무질서한 분위기는 음산함마저 일게 한다.
멀리 정상을 올려다보려 해도 수림으로 뒤덮여 중봉과 하봉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2시간여 동안의 산행을 하다 보면 계곡은 다시 하봉과 두류봉 사이의 골과 하봉과 중봉 사이의 골로 나뉘는 지점이 나온다.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식수를 준비해야 한다. 더이상 물줄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골 산행의 마지막 고비가 남은 셈이다. 깎아지른 듯한 등산로는 극심한 체력 소모를 요구한다.
길은 비교적 잘 나있는 편이지만 곳곳에서 길이 희미해지나 별다른 문제는 없다.
한시간 또는 한시간 30분 가량의 힘든 산행을 해야만 하봉능선에 도착할 수 있다.
얼음골에서 올라오는 길과 마주치는 곳이다. 마지막 구간의 급경사면은 돌이 떨어질 위험이 있어 주의해야 하며 겨울철
산행은 지극히 위험한 구간이 된다. 국골 산행은 일단 하봉능선에 도착하면서 끝이 난다.
여기서 하봉 정상으로 올라가 밭 아래 국골 전경을 뒤돌아 보는 것 역시 운치있다.
국골은 오르는데 상당한 체력 소모를 요구해 주로 이 골을 찾는 등산객들은 얼음골 등 다른 코스로 하봉에 올랐다가 국골을 하산코스로 활용하고 있다. 어떤 코스를 선택하든 국골은 지리산의 숨은 골짜기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여기에다 가락국 마지막 왕의 애환이 얽힌 사연까지 되새기며 산행을 한다면 더더욱 멋진 가을 산행이 될 것이다.
25. 달궁계곡 지리산에 "달의 궁전"이 있었다.
지리산에 사람이 들어와 최초로 인문적 환경을 꽃피웠다고 전해지는 "달의 궁전"은 그 이름만 들어도 신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리산 깊고 광활한 골짜기에 2,000년전 달의 궁전이라는 신비스런 궁전이 들어섰다는 사실,
이는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를 의미하는 부분이다. 즉 그로부터 지리산은 자연으로서의 산에서 사람의 산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연요새로 에워싸인 달의 궁전은 2,000여년전 온조왕의 백제 세력과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에
쫓긴 마한(馬韓)의 효왕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도성(都城)을 쌓으면서부터 시작된 피란도성이었다.
지리산의 "달의 궁전"에 관한 기록은 서산대사의 사기(寺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황령암(黃嶺庵)에 대해 기록한
청허당집(淸虛堂集)에 남아 있다. 반야봉 좌우에 두 봉우리가 있는데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
옛날 한나라 소제(昭帝) 3년(BC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에 쫓기어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을때 黃·鄭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했다. 도성이 완공된 후 도성을 에워 싼 고개 이름을 두 장수의 성(姓)을 따서 각각 황령,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 "고 기록했다. 그리고 현재 남원군 산내면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가다가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달궁마을이 나오는데 이 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2,000년전 마한의 효왕이 피란도성을 쌓았던 곳으로 달에 있는 궁전으로 불렸다는 안내판이 초라하게 내걸려
있다. 바로 이 곳이 마한의 피란 도성인 달의 궁전이 세워졌던 곳이다.
서산대사의 기록을 근거로 당시 마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지리산 인근을 근거지로 했던 마한이 북쪽으로 백제 세력,
남동으로는 진한과 변한의 세력에 쫓겨 도성을 지리산, 즉 오늘날의 달궁으로 옮겨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고 이 곳에서
72년이란 세월동안 장기 항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달궁의 도성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황령과 정령을 전초기지로 삼았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덕두봉 등의 고산준령으로 에워싸인 달궁은 그야말로 지정학적으로 천혜의
요새로 손색이 없을 정도다. 끝내는 함락, 패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한의 피란도성, 즉 달의 궁전은 지금은 잡초더미에 묻힌 몇 안 되는 돌더미와 주춧돌 등 잔해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 곳을 달궁(月宮)으로 불렀다.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달궁(月宮)이란 한자 지명도 마한의 그 한맺힌 역사가 변천을 거듭, 잊혀져가듯 바뀌어 지금은
"達宮"으로 불린다. 마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명확한 역사가 정립되지 못 하고 있듯 이 곳 달의 궁전을
중심으로 빚어졌던 마한의 역사도 여전히 정확한 고증을 거치지 못 하고 있으나 지리산이 최초로 사람의 산으로 바뀌게
된 시점이란데서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매우 신비롭고 서정성이 깃들어 있는 "달궁"은 이제 예전과 같은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더이상 달속에 있는 신비스런 궁전의 모습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궁터에는 시커먼 매연을 내뿜는 차량들과 민박촌, 그리고 관광객들의 북적거림으로 뒤덮인지 오래다.
지리산 종단도로가 개통되면서 달궁은 그 한복판에서 신음하게 된 것이다.
차량의 기나긴 행렬을 따라 달궁의 자취는 이제 바깥 세상과 하나가 되고 만 셈이다.
달의 궁전은 이제 관광객들의 쉼터로 변해있는데 그나마 옛 마한의 역사를 음미하기 위함이 아니라 빼어난 달궁계곡의
절경탓이란 사실에 안타까움이 앞선다. 달궁계곡의 비경은 달궁마을에서 심원마을에까지 이어지면서 특유의 계곡미를
한껏 과시한다. 20여m 거리를 두고 종단도로가 이어지지만 계곡에 들어서면 별유천지를 연상케 할 정도이니 많은 인파가 몰리 수밖에 없다. 쟁기소, 쟁반소, 와폭, 구암소, 청룡소, 안심소를 거치면서 달궁계곡의 풍성함과 비경을 맛볼 수 있다.
6km에 이르는 원시비경과 더불어 달궁을 기점으로 한 등산로 역시 산행의 묘미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열려 있다.
마한의 애환과 달의 궁전에 얽힌 옛 일을 유추하고 더듬으며 시작하는 산해이야말로 지리산의 진수가 아닐 수 없다.
달궁마을에서 200여m 가량 올라가면 시작되는 달궁계곡의 계곡로를 따라 쟁기소를 지나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쇠다리가
있다. 이 쇠다리를 건너면 지리 제2봉인 반야봉으로 오를 수 있다.
양탄자같은 흙길과 아기자기한 바위길을 3시간 남짓 오르면 반야선경이 펼쳐진다.
반야봉 아래 중봉 조금 못 미쳐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서 반야봉 방면이 아닌 오른편 길을 따라가면 심원계곡으로
갈 수 있다. 심원계곡을 따라 하산하면 심원마을에서 다시 달궁계곡의 끝부분과 만날 수도 있다.
아니면 반야봉에 올랐다가 노루목, 임걸령을 거쳐 돼지평, 노고단을 지나 심원마을로 하산할 수도 있다.
원시수해와 기화요초 그리고 마한 피란도성의 자취를 음미하며 찾아나서는 달궁 주변의 산행은 감미로움마저
맛볼 수 있을 정도로 환상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26. 섬진강변의 화개장터에서 화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신흥마을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따라가면 범왕리 목통마을이란 곳이 있다.
물레방아 도는 지리산의 전형적인 산간마을이다.
목통마을을 휘감고 도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가 연동골(일명 목통계곡)이다.
골짜기 안에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연동마을이란 곳이 있었다고 해 연동골이라 불린다.
지금은 오히려 목통마을의 이름을 따 목통계곡으로 더 알려져 있다.
연동골은 화개재 가는 길목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그 물줄기는 화개재를 좌우로 해 두 봉우리를 타고 이어지는 두 줄기
능선에서 흐른다. 해발 1,360m의 화개재 동쪽으로는 1,533m의 토끼봉 정상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1,550m의 삼도봉이
솟아 있다. 토끼봉 정상에서 흘러내린 능선은 칠불사까지 내려와 목통마을에서 꼬리를 감춘다.
이 능선을 칠불사 능선으로 부른다. 삼도봉에서 뻗어내린 능선은 불무장등(1,446m), 통꼭봉(904m), 당재를 거쳐 황장산
(942m)으로 이어진 뒤 화개장터가 있는 탑리까지 내려와 섬진강에 닿는다. 불무장등 능선이라 부른다.
칠불사 능선과 불무장등 능선 사이의 골이 연동골이다. 물론 연동골은 화개동천의 지류에 해당된다.
화개동천은 크게 신흥마을에서 두 계곡으로 나누어지는데 왼쪽이 범왕계곡 연동골로 이어지며 오른쪽으로는 의신계곡(
대성골, 빗점골, 절골, 산태골 등등)이 있다.
지리산 최대의 계곡답게 화개동천에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계곡미를 간직하고 이름까지 독립적으로 갖고 있는 지계곡이
최소한 10개에 이를 정도로 많은 지류를 거느리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지류를 형성하는 연동골은 해안지방과 내륙 산간지방을 잇는 최단거리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화개재가 지리산 능선 가운데 가장 낮은 해발인만큼 넘나드는 길목으로 유용하게 활용된 것이다.
그 화개재를 기점으로 해 연동골과 내륙의 뱀사골은 훌륭한 길목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담겨져 있는 길이었던 셈이다.
경남과 전북의 경계 지점이기도 한 화개재는 옛날부터 화개장터가 크게 번창한 탓에 그 지명이 화개재로 불렸다.
그런데 그 화개재의 지명이 지금은 이상하게도 "뱀사골 정상"이란 얼토당토 않은 지명으로 등장해 있다.
이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이정표를 세우면서 오랜 옛적부터 전해져 오고 있는 화개재 대신 "뱀사골 정상"으로 표기한데서 비롯됐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지명은 나름대로의 사연과 지형 지세,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 명명돼왔던 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구태여 말도 되지 않는 지명을 만들어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국립공원 관리공단 측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화개재에 가면 지리산 이정표에 뱀사골 정상, 반야봉 4km, 노고단 10km, 토끼봉
2km, 천왕봉 35km라고 표기해놓고 있다. 뱀사골 계곡의 정상이란 의미의 뱀사골 정상은 우리 어법상 말도 안되는 소리다. 모든 계곡의 끝을 계곡의 정상이라 한다면 칠선계곡이 끝나는 천왕봉 역시 칠선계곡 정상이라고 해야 한다는 논리와
다름없다는 어느 산악인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이는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순수한 우리말인 "재" 대신 골짜기의 정상이라 고쳐 쓴 모순을 바로 잡아야 할 때로 여겨진다.
더욱이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두 지역 주민들이 오랜 옛날부터 오고 가면서 남겨진 역사와 발자취, 그리고 화개재에 얽힌
전설 등을 오늘에 다시 발굴해 전함으로써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뒤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화개재에 얽힌 설화 중 "운봉무더미"란 얘기가 있다.
운봉사람 소금장수 3대의 조상이 일흔 살 나이에 화개에서 소금을 지고 운봉으로 넘어가다 화개재에 이르러 힘에 지쳐
소금을 진 채 쓰러져 죽었는데 손자가 할아버지를 그 자리에 묻고 정성을 다해 큰 묘를 만들었다 한다.
화개재 언저리의 큰 무덤을 두고 그 소금장수의 무덤이라 해 운봉무더미라 부르고 있다.
이 설화에서 보듯 화개재는 해안지방의 소금이나 수산물과 내륙지방의 삼베를 비롯한 농산물을 서로 교역했던 삶의
고갯마루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지리산에는 화개재와 비슷한 역할을 한 고갯마루가 많다. 그만큼 지리산이 광활하다는 증명이기도 하며 이에 따른 조상들의 삶의 얘기들도 다양하게 서려져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목통마을에서 출발해 연동골을 거쳐 화개재로 가는 길은 오랜 도로 기능의 역사 덕분에 잘 열려 있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며 칠불사 아래의 첫 마을로 사하촌(寺下村)이기도 한 목통마을은 10여 가구가 사는 조그마한
산촌이다. 지금은 승용차가 쉽게 오를 수 있으며 물밀듯 들어오는 관광객, 등산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계속 들어서고
있는 등 번창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을 앞 계곡에는 예스런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물레방아가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그리고 물레방아와 함께 산 너머 직전마을로 넘어가는 좁다란 길을 이어주는 돌다리가 이채롭다.
여기서부터 연동골 산행은 시작된다. 물레방아와 독특한 양식의 돌다리를 살펴본 뒤 마을을 지나 잘 열려져 있는 등산로를 따라 화개재까지는 대략 8km 남짓하다. 아직은 일반 등산객에게는 덜 알려진 연동골은 아기자기한 경관과 조용한 것이
특징이다. 목통마을을 출발해 30여 분 가량 오르면 연동골의 으뜸 명소인 스님소(沼)가 나온다.
칠불사 스님들이 목욕하는 곳이라 해 붙여진 지명인데 늘 옥류가 흐르며 싱그런 분위기가 가히 세속의 때를 씻을만 하다는 느낌이 간다. 계곡을 따라 한동안 가면 풀밭과 잡목 지대로 변해 있는 마을터를 만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께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연동마을 터다.
마을이 사라진 것은 1967년 여름 서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9명이 지리산에 들어와 이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다 모두
사살된 사건이후 연동마을을 없어지게 했던 것이다. 연동마을 터를 지나 30여분 가량 지나면서부터 화개재까지 급경사로
힘든 코스지만 쉽게 화개재에 오를 수 있다. 산행시간은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하산은 토끼봉∼칠불사, 또는 뱀사골∼반선 등 다양하게 열려 있어 시간만 잘 조절하면 어느 곳으로 하산해도 좋다.
하동지역에서 짧은 시간에 반야봉을 올랐다가 하산할 수도 있는 등산로가 연동골 코스이기도 하다.
27. 智異山에도 얼음골(일명 허공다리골)이 있다.
얼음골하면 대개 밀양 천황산의 그것을 연상케 된다.
그러나 지리산 자락에도 그와 유사한 지명을 지닌 계곡이 있다. 함앙군 마천면 추성동에서 쑥밭재와 하봉을 향하는 등산로 사이의 계곡이 그것이다. 지도상에는 무명계곡으로 아예 표기조차 돼 있지 않으나 이 주위의 지리산 사람들은 이 골을
얼음골 또는 얼음터 계곡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이 계곡의 초입부인 광점동 마을을 지나면 오래전 아마도 삼국시대 무렵부터 "얼음터"란 지명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이곳 사람들이 이 골짜기를 얼음골이라 부르고 있는 까닭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계곡에 들어서면 한여름에도 늘 한기를 품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도 사실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이와 함께 이골은 허공다리 골로도 불리는데 이는 계곡이 마치 하늘에 걸려 다리처럼 보인다 해서 불여진 이름이다.
하봉과 두류봉(시루봉 또는 도리봉으로 불린다. 해발 1432m)을 잇는 하봉능선과 쑥밭재에서 흘러내리는 Y자형 계곡이다. 추성동에서 가장 윗 마을에 해당하는 광점동에서부터 시작되는 얼음골 코스는 1781m의 하봉에 이르기까지 3시간여
거리로 8km 남짓. 비교적 폭이 넓고 큰 바위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다 풍부한 산림자원의 보고로 매우 아름답고
청량감을 맛볼 수 있는 계곡이다. 지명에 걸맞게 피서지로는 1급지에 해당될 것으로 보이는데도 아직 일반에 덜 알려져
있다. 인근의 칠선계곡과 백무동 한신계곡 등의 유명세에 밀린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엔 이 계곡이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주말이면 어김없이 2-3팀의 등산객들이 찾아 자신들만의 묘한 스릴을 만끽하며
이 골짜기가 더이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길 간절히(?)소망하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마치 히말라야 산군을 원정 등반하기에 앞서 원정대가 지레 반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풍치가 있는가 하면 밀림을
뚫고 가는 듯한 등반의 묘미도 맛볼 수 있고 계곡등반의 진수도 느낄 수 있는 곳이고 보면 이들 소수 등반객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얼음골 들머리인 광점동과 얼음터 일원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토종벌이다.
지리산자락 어딜 가나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 게 토봉이지만 이 일대가 유독 많음을 알 수 있다.
대략 2천통 이상이라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이 마을 주민들의 주 소득원인데, 이렇다할 농경지가 없는 이유다.
광점동 마을로 가려면 우선 추성동에서 벽송사 가는 길을 따라 하늘을 가듯 경사진 도로를 따라 가면 된다.
마을 끝부분까지 콘크리트로 포장이 돼 차편으로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코스로 등반했다가 하산길은 국골 방면이나 하봉능선을 이용하는 게 더 운치있으므로 차량은 추성마을에
세워두고 오르는 게 좋다. 얼음골 코스로 등산했다가 국골 또는 하봉능선으로 하산하는 코스는 당일 등반에 적합하다.
소요시간은 대략 6시간 정도. 폭우가 쏟아지거나 겨울철은 예외로 한다.
이 등반코스를 찾는 시기는 한여름이나 만추의 계절이 좋다. 서늘한 피서지로서의 한여름 산행과 갈대숲과 갖은 단풍이
물든 가을 산행이 가장 적합하다. 광점동 마을의 고산마을 운치를 즐기면서부터 얼음골 산행은 시작된다.
광점동 마을에서부터 목적지에 다 온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을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다 고산의 풍치가 서려 있는 탓이다.
마을 사이의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섬처럼 우뚝 선 작은 산봉우리 사이로 얼음골이 빙돌아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고 멀리 산등성이로는 코발트빛 하늘과 능선의 푸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얼음터 주위의 시원스런 물줄기를 따라 계곡과 옛 마을의 흔적, 절터의 체취를 맛보며 20여분 걷다보면 노송과 함께 널따란 반석과 절벽에 이른다. 이제 들머리인데도 꽤나 높은 곳에 온 듯하다.
땀방울을 식히며 옛날 옛적 함양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쑥밭재를 넘어 산청(대원사 유평계곡)으로 오고 갔을 당시를
상상해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5백년전 김종직 일행이 함양관가에서 출발, 의탄마을과 추성동을 거쳐 이곳에서 잠시 쉬며
풍류를 노래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면 이 또한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김종직 일행은 이곳 얼음터를 거쳐 두류봉을 따라 하봉능선으로 등반, 천왕봉에 오른 것으로 기록이 전해진다.
이 길은 지금은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추성동 뒷산인 영리봉(추성산성지)에서 두류봉∼하봉으로 오를 수 있는
등산로가 개설돼 있다. 얼음터의 어원은 명확치가 않으나 추성동에서 칠선계곡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뒤주터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뒤주터는 쌀을 저장하는 곳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비해 얼음터는 석빙고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풀이는 추성동과 국골, 그리고 추성산성터 등과 견주어 볼 때 가락국 마지막 왕인 양왕이 이 일대를 요새화 하면서 뒤주터와 얼음터를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인근 왕산과 구형왕릉, 덕양전이 이곳 지리산 자락에 와있다는
사실은 이를 뒤받침하기에 충분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학계의 고증이 아직 부족하다.
어쨌든 얼음터에 얽힌 사연들이 아직도 전해져 오고 있음을 되새기며 얼음골 등산을 시도하는 사실은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첫번째 휴식처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마을의 흔적이 계속 나와 어디가 끝인지 시작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광점동에서 한시간 가량 오르면 깊은 산중에 함석집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광점동 마을주민이 토봉을 위해 지은 집이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계곡이 둘로 나누어진다.
왼쪽 골이 쑥밭재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며 오른쪽은 하봉과 두류봉 사이의 계곡이다.
등산로는 오른쪽 계곡 방면으로 이어지나 길은 가팔라진다.
동시에 계곡의 물소리도 갈수록 희미해져 물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5분여 가량 가다보면 노송과 반석의 쉼터를 만날 수 있고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마지막으로 등산로가 계곡과 마주친다.
여기서 식수를 준비해야 하며 당일 산행 때 점심을 마치는 게 좋다. 여기서부터가 얼음골 코스의 마지막 난코스에 해당된다. 하봉과 쑥밭재를 잇는 능선에까지 가파른 길이 계속된다.
그러나 힘들다고 느낄 무렵이면 등산로는 오른쪽으로 꺽어져 별로 힘든 줄 모르고 오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산죽과 낙엽이 뒤섞여 있는 이 길은 푹신푹신해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호젓함을 맛볼 수 있는 것도
이 등산코스의 묘미에 해당한다. 어느덧 능선에 도착했겠거니 생각하기를 수차례에 걸쳐 거듭해야만 능선에 이를 수 있다. 금방이라도 산짐승이 나타날 것만 같은 숲속길을 따라 가면 하봉∼쑥밭재 능선에 도착한다. 밭 아래 유평계곡이 보이지만 울창한 수림에 가려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능선길을 따라 10여분 남짓 걷다보면 네거리의 등산로에 도착한다.
이곳이 하봉과 두류봉을 연결하는 하봉능선의 중간부분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두류봉을 따라 추성동에 갈 수 있으며 바로 발 아래 계곡으로 가면 이곳이 국골이다. 하봉은 네거리 중 왼쪽으로 가야한다.
하봉정상은 여기서부터 15분여 거리에 있다.
얼음골 등반코스의 목표지점인 하봉에 도달하면 눈 앞을 가로 막는 험준한 봉우리가 보인다. 중봉이다. 그
리고 멀리 1백리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연결되며 발 아래 국골과 칠선계곡이 아스라이 다가온다.
28. 천은사계곡은 지리산 차일봉에서 발원하여 상선암과 천은사를 거쳐 천은제에 이르는 계곡으로 중류의 우거진 숲과
맑은물이 장관이다. 그중 경치가 좋았던 하류부분의 계곡은 천은제 축조로 수몰되고 천은사 주변은 일부 통제되고 있으나 지리산 일주도로를 타고가다 중간중간에서 계곡과 접할수 있다.
출처 : http://blog.daum.net/najongdai/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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