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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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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23대 순조, 즉위, 세도정치, 천주교 박해, | >>
세도정치, 집권 초기에는 정순왕후를 둘러싼 경주 김씨 일문 아래 있었고 친정을 하게 된 15세 이후로는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 아래 있었다. 순조 역시 세도 정권의 전횡을 모를리 없었기에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외척세력인 풍양조씨 일문의 세도정권을 만들어냈을뿐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정계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처럼 당시의 세도정권은 당쟁이 없는 대신에 반대파가 없는 독재 정권으로서 민생과 사회문제는 도외시하고 일문의 영달과 영예에만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천주교 박해의 배경, 군신관계와 상하관계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성리학적 지배원리는 조선왕조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사상적, 통치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인 의례를 거부했으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사상과 유일신사상을 주장했으니 그것은 유교사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 양반층과 수탈과 횡포에 시달리던 서민층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 결합되는 것도 지배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변천사와 패단, 순조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에게 넘어가고 그것이 철종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정권의 특징이라면 당쟁시대와는 달리 견제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버리는 세도정권의 전횡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 사회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한 수탈,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순원왕후 김씨,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1800년(정조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1802년(순조2년) 10월에 왕비로 책봉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 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하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때 순원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하여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한다. 순조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1857년 창덕궁에서 죽었다.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효명세자,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 순조 12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 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 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김씨 일파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아들 헌종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익종에 추존되었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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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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