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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비문학》 시 등단
•시집 『아껴둔 말』
•시화집 『저마다의 나무로』
•수필집 『송무백열』
•산림문학회 회원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날씨가 맑아 좋았다. 이번 제주도 성지순례는 ‘대구가톨릭학술원’에서 주관하였다. 제주도의 가톨릭 성지를 방문하여 2박 3일간 가톨릭 전래 역사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대구공항을 출발해서 제주공항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 바로 한림으로 이동하여 용수성지를 만났다.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 포구에 세워진 용수성지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1845년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이다. 우리나라 토종 첫 신부님이 되어 귀국하는 길에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성당이 있고 그 바로 곁에 신부님이 타고 왔던 라파엘호 모양을 본떠서 지어진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 안에는 박해 때 신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한 형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공포감이 드는 주뢰형, 학춤, 톱질, 주장질, 줄주뢰, 가위주뢰 등의 형벌을 받는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 전시되어 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선조 교인들의 신앙심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을 관람하고 바로 옆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 묘소를 참배하러 갔다. 백서사건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는 다산의 형 정약전의 딸이다. 1801년 백서사건으로 체포된 황사영은 참수를 당하고 부인 정난주는 두 살배기 황경한을 데리고 제주 대정으로 관비가 되어 오게 되었다. 배를 타고 오는 도중 아들마저 노비를 만들 수 없다 생각하고 추자도 바닷가에 아들을 놓고 와서 일생 생이별을 하게 된다. 37년을 더 살다가 생이별한 아들은 만나 보지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제주교구에서는 1970년 정난주의 묘지를 찾아 1977년 순교자 묘지로 단장했다.
제주 서쪽 끝부분인 한림 바다는 푸른 파도가 바람을 타고 높이 일고 있었다. 입구에는 키 큰 당종려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돌담장 길을 따라 들어가면 가장 안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무덤이 만들어져 있다. 묘지 주변에 모여 기도를 올렸다. 다산의 조카인 정난주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조선 후기 정치 싸움에 말려 가톨릭 신앙이 무자비하게 박해 받았던 일이 새삼 가슴을 저리게 했다.
‘새미은총의 동산—이시돌 목장’으로 가는 도중 길가에 세워진 삼의사의 비를 참관하였다. 이승인 베드로가 세례를 받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1874년부터 끊임없이 박해를 받던 가톨릭교회가 1899년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때 고종황제
는 가톨릭 신부님들에게 옥패를 나누어 주어 법적인 보장을 받도록 하였다. 1901년 제주에서 발생한 ‘신축교안사건’은 임금의 옥패를 가지고 제주로 들어온 두 사람의 신부가 관련된 사건이었다. 이들 신부는 고종황제가 특명으로 ‘짐같이 여기라’는 명령을 하여 내려 보낸 신부들이었다. 고종황제의 옥패를 가진 신부님들이 특별히 보호받게 되었다. 이에 이 신부 곁에는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이 중 일부 신자들은 자기들도 특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법을 어겨도 정부 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가렴주구를 하는 관리들과 결탁하여 주민들을 괴롭히게 되었다. 이들 행패가 심해지자 드디어 민간인 삼의사가 조직한 의용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 결과 거의 350명에 달한 가톨릭 신자들이 제주 관덕정 앞에서 참수가 되거나 죽창이나 칼에 찔려 죽게 된 사건을 ‘신축교안사건’이라고 한다.
일제 36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의 바르지 못한 행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제주도에서는 일제 침략이 있기 전부터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니 가톨릭 신자로서 심히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되었다.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인 새미은총의 동산—성 이시돌목장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찾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제주교구 사제들의 뜻에 따라 성이시돌목장을 세운 임피제 신부가 1992년부터 목장 뒤를 순례지로 본격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이 삼뫼소를 ‘은총의 동산’으로 명명하고 교구의 대표적인 순례지로 지정했다. ‘삼뫼소’(묵주기도 호수)는 세 개의 오름(봉우리)으로 둘러싸인 못이란 뜻이다. 2009년 제주교구는 ‘삼뫼소’란 명칭을 ‘새미은총의 동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새미는 주님의 은총과 순례객의 기도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곳곳에 성서에 나온 주요 부분이 동상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중에 우리가 만난 것은 결혼잔치에서 예수가 처음 기적을 행한 물을 포도주로 바꾼 동상과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해 마시는 동상도 만들어져 있다. 구불구불하게 돌아나오는 언덕길 양편에는 성서에 나온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곳 성지의 하이라이트는 프랑스 루르드 성지에 있는 것과 맞먹는 크기의 대형 14처를 조성해 놓은 것이다. 14처를 돌면서 기도를 하고 마지막 예수님 무덤 앞에서 주모경을 올리고 일정을 끝마쳤다. 14처가 끝나는 곳에는 큰 호수가 만들어져 있고 묵주 모양으로 주변을 아름답게 단장해 놓았다.
가이드가 자랑하는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한 것을 보니 음식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회정식인데 처음부터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고 그 음식이 끝나면 다시 다른 음식이 나왔다. 식사도 맛있게 하고 술도 한잔씩 하고서 호텔로 향했다. 코로나 역병이 끝난 것인가? ‘Hotel Air City Jeju’ 대형 호텔에는 국내 손님으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단체 여행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가이드를 잘 만나야 된다는 것이다. 이번 성지순례 가이드는 대구 사람으로 나이가 아직 70은 안 되어 보이지만 우리나라 가톨릭 역사에 대해 연도와 내용을 통달하고 있었다. 대단한 가톨릭교회의 증인이었다. 정다산 집안 이야기, 이승인과 이백 이야기, 이승인이 4번씩이나 배교한 이야기,황사영의 백서사건 전말과 그 이후 그 부인과 그 아들의 행방 등에 대해서도, 거기에 일본 가톨릭 역사에 대해서도 쉬지 않고 이야길 계속해주었다. 가톨릭 역사 공부를 깊이 하지 못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일은 오전 8시 30분까지 1층 로비로 모이라는 연락과 함께 아침은 지하 2층 연회장에서 아침 6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제주의 첫날 밤을 안락하고 편안하게 잘 보냈다.
두 번째 날인 오늘은 추자도에 가기로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제주항으로 나갔다. 크고 작은 배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항구에서 9시 30분 추자도에 가는 ‘하버크리프트’를 탔다. 가이드는 바다에 파도가 없이 양탄자 같아 멀미에 대해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원래부터 멀미를 하는 체질이라 걱정이 되었지만 가이드 말을 믿고 멀미약도 먹지 않고 배에 올라 중간에 지정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200여 석의 자리는 빈자리가 없이 만원이었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고 관광객들이 증가하는 것 같았다.
9시 30분 정각에 배가 추자도로 출발하였다. 추자도까지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출발하기 전부터 옆으로 흔들거려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항해 시간이 한 시간인데 30분간은 잘 견디었으나 그다음은 호되게 뱃멀미를 했다. 머리가 빙빙 돌고 온몸이 방향 감각이 없다. 배에서 내려 동료들의 말을 들어보니 나처럼 심하게 뱃멀미를 한 사람이 서넛은 된 것 같았다.
출발한 지 1시간 후 10시 30분에 추자도에 도착하였다. 추자도는 7평방킬로의 넓이를 가진 아주 작은 섬인데 상추자, 하추자로 이루어져 그 중간에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광활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갯바람을 맞으니 조금은 정신이 돌아왔다. 이곳 추자도에는 성당이 없고 추자도 공소만 있다. 이곳 공소에 담당 신부님이 오시어 미사를 집전하시기로 했으나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한다고 하여 11시부터 대구가톨릭학술원 지도신부 전헌호 실베스텔 신부님의 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미사를 마치고 추자도 굴비 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추자도에는 굴비가 많이 나온다고 하여 굴비 정식이 가장 좋은 식단이라고 한다. 김치 젓갈 그리고 굴비 두 마리씩 배정되었다. 빈속으로 어지러웠으나 식사를 하고 나니 조금은 정신이 돌아왔다.
오늘 추자도에 온 목적은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 묘를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하추자도에는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소가 있다.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전의 딸인 정난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이 체포되어 순교한 후 부인은 관비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젖먹이 아들마저 평생을 죄인의 자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어머니 정난주는 유배길에 호송선의 뱃사공과 나졸을 매수하여 경한을 하추자도 예초리의 갯바위에 내려놓았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져 그의 아들로 키워졌다.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이 지금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신양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때 그 집안에서 간직해 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모두 소실되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를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고,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 공소 신자들이 묘소를 돌보고 있다고 한다.
상추자도에서 마이크로버스 자동차 3대에 나누어 타고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 묘소로 향했다. 묘소로 가기 전에 추자도 10경 중의 하나인 상추자도 전망대에 올라가 바다와 섬과 그리고 상추자도 절경을 보며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다. 노래는 성가를 불렀고 이어 「가을의 여인」이라는 노래로 이어졌다. 푸른 파도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천상의 하모니를 만들어 주었다.
다시 자동차를 타고 경사가 심한 산길을 내려와 포장된 섬 주변 일주도로를 따라 달렸다. 한 십여 분 달려가니 동쪽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큰 십자가가 서 있고 그 아래 황경한 묘가 자리잡고 있었다. 묘소 앞에 벽을 만들어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가 제주도로 유배 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새겨놓고 두 사람의 생이별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모습도 그려 놓았다. 성모경을 바치고 황경한 묘소를 떠나 동쪽 바다 절벽 아래 바위 위에 두 살배기 황경한을 옷으로 싸서 갯바위 위에 내려놓았다는 바로 그곳에 ‘눈물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자동차 주차장에서 눈물의 십자가까지 내려가는 길은 너무 험하여 목책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목책 계단은 만들어 놓은 지 오래되었는지 중간중간이 부셔져 있었다. 눈물의 십자가 앞바다의 파도 소리는 백여 년이 흘러간 그때의 애절함이 서린 듯 슬픈 통곡 소리를 닮았다.
선착장에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하니 제주로 돌아가는 배가 4시 30분에 출발한다고 한다. 한 시간이 넘게 시간이 남아서 다들 지친 몸으로 대합실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나는 그 짧은 시간이지만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우선 등대가 있는 방파제를 따라 바다와 마주치는 곳까지 가서 추자항 항구를 둘러보았다. 작고 아담한 어항이었다.
선착장 바로 앞 작은 산봉우리에는 정자가 보였다. 꼬불꼬불 좁은 골목길을 돌아 정자에 오르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사방에서 갯내음을 몰고 와 마음속까지 시원해졌다. 정자 바로 앞에는 반공탑이 세워져 있었다. 1972년 이 마을에서 살다가 6·25 전쟁에 참전하여 행방불명이 된 송씨라는 사람이 간첩 4명과 함께 자기 동네를 찾아왔다. 이 마을에서 경찰과 맞붙어 경찰 2명과 주민 1명 그리고 간첩 한 명이 스스로 터뜨린 수류탄으로 죽고 원래 이곳에 살던 원씨와 간첩 한 명은 도주하는 과정에서 예비군 두 명을 더 죽이고 북으로 달아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때 간첩 사건 때문에 추자도에 오고 가는 사람들은 신분증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었다. 남북 분단의 파편이 이 먼 남쪽 추자도에도 남아 있다니 우리나라에 언제쯤 평화가 오려는지 가슴이 아렸다.
추자도에 올 때 뱃멀미로 혼이 나서 추자도 약국에서 멀미약을 사 먹은 덕분에 돌아오는 뱃길은 편안했다. 제주도에 도착하여 흑돼지 구이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호텔에 돌아왔다. 오늘 하루 뱃멀미로 심신이 피곤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제주도 성지순례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니 짐을 다 챙겨 나와 차에 올랐다. 오늘 돌아볼 곳은 제주도 관덕정, 제주 주교좌성당, 가톨릭 황사평 묘지, 복자 김기량 기념관, 천연기념물 제주 비자림과 마지막으로 성산 일출봉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성산포성당이라고 하였다. 가장 많은 성지를 돌아보는 알찬 순례길인 것 같았다.
관덕정은 세종 때 제주목사 신숙청이 지었으며 세워진 이래 지금까지 헐리지 않고 그 자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관덕觀德이란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즉,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는 『예기』의 글귀에서 유래했다. 관덕정과 그 주변은 조선시대 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행정 관청이 모여 있어 제주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제주 역사의 중심지, 제주의 심장 같은 공간. 하지만 번영의 역사보다는 오히려 세찬 바닷바람에 상처 입은 섬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더 많이 보아 온 곳. 바로 이곳, 관덕정 광장이다.
1901년 ‘신축교안 사건’ 때 300여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죽창에 찔리고 칼에 맞아 죽었다는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도를 드렸다. 관덕정 안쪽은 제주 관아가 있던 곳으로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빈 공간에는 공연장이 마련되어 있어 시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공연장에서는 구경꾼들이 모여 있는데 국악 소리와 함께 사철가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관덕정 관람을 마치고 주교좌성당인 제주 중앙성당으로 갔다. 제주도의 가톨릭 역사를 간직한 주교좌성당은 그 이름에 걸맞게 크고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제주도에 있는 10만여 명의 가톨릭 신자들의 중심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 안에 들어가 성모송을 바치고 나왔다. 자동차를 타고 황사평 순교자 묘역으로 갔다. 1901년 신축교안 때 발생한 민란으로 희생된 가톨릭 신자들의 무덤을 만들어 놓은 곳이다. 처음에 황사평이라고 들었을 때 사람 이름인가 생각했는데 신축교안 사건으로 죽은 가톨릭 신자들의 묘가 있는 지명이다. 총면적이 약 18,000평의 황사평은 현재 신축교안 순교자 묘역뿐만 아니라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도 사용하고 있다. 1980년 순교자들의 묘를 평장으로 이장했다가 1995년 11월 제주교구 선교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28구의 유해를 합장하여 순교자 묘역을 새로 단장하고 교구 성직자 묘지를 조성했다.
1998년 제주에서 활동한 외국인 성직자들을 기리는 공덕비와 제주 출신 최초의 신자인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비를 세웠다. 2008년 제주교구는 황사평 순교자 묘역에는 납골당과 같은 새로운 부대시설이 들어오고 주변 경관을 새롭게 가꾸어 아름다운 추모공원을 조성하였다.
무연고자 묘지를 둘러보았다. 현재 가톨릭 신도들의 무덤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제 매장 장소가 협소해져서 납골당에 모시고 있다고 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받고 죽은 일들이 많이 있지만 ‘신축교안 사건’은 가렴주구를 하는 관리들의 앞잡이로 일반 민중을 탄압하고 수탈의 선봉에 섰던 사이비 가톨릭 신자들이 일반 민중에게 저지른 끔찍한 죄악이었다. 마땅히 가톨릭교회는 사죄를 하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신자들을 모아 새롭게 출발하여 이제는 전 제주도민의 16%가 가톨릭 신자가 된 큰 교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순교 현양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지어진 박물관과 돌비
들이 제주도에 한 분밖에 없는 복자의 묘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5월 31일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김기량은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 만인 1858년 4월 고향으로 돌아와 이웃 사람들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다.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통영의 게섬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간 그는 교수형에 처해져 순교하였다. 그때가 1867년 1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제주교구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황사평 순교자 묘역에 김기량 순교비를 세웠고, 2005년 4월 24일에는 그의 고향인 조천읍 함덕리에 순교 현양비를 세웠다. 드디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점심은 ‘낭뜰에 쉼팡’(나무가 심어진 뜰의 쉼터) 식당에서 보리밥 정식을 먹었다. 여러 곳에서 온 관광객들이 무리 지어 모여들었다. 코로나 이후에 생기를 되찾고 있는 제주 관광 현장을 보았다. 그 어렵던 코로나 시대가 좀 안정이 되어 이제라도 생기를 되찾았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제주 평대리 천연기념물 374호로 지정된 새천년 비자나무 숲을 찾아갔다.
비자나무는 백양산과 내장산에 자생하고 있으며 제주도에는 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비자 열매와 나무는 예로부터 민간과 한방에서 귀중한 약재와 목재로 널리 쓰이고 있다. 비자는 “눈을 밝게 하고 양기를 돋운다.”라고 하였고 장수를 위한 비약이라 하였다. 콜레스테롤을 제거하는 작용도 있어 비자를 상시 먹으면 고혈압 예방 치료에도 도움을 주며, 요통이나 빈뇨頻尿를 치유한다. 기침, 가래를 다스리고 폐기능 강화, 소화 촉진, 치질, 탈모, 기생충 예방에도 좋으며, 벌레 독 제거에도 쓰이고 있다. 또한 목재는 고급 가구재, 장식재 등 각종 도구 재료로 쓰이며 특히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은 시중에서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비자나무는 추위에 약해서 남쪽 지방에서만 자라고 있다. 대구 팔공산 갓바위 길가에 자라고 있는 개비자나무는 비자나무와 생긴 모양이 비슷하지만 키가 크지 않는 관목이다. 제주 비자나무 숲은 관광 자원으로 ‘새천년 비자나무 숲’으로 이름을 붙여 잘 가꾸어 보존하고 있었다.
새천년 비자 숲 탐방로는 A코스(송이길) 2.2km와 B코스(오솔길) 3.2km로 되어 있다. 송이길이란 우리가 먹는 송이버섯이 아니고 ‘scoira’는 화산 활동 시 화산쇄설물로 알칼리성의 천연 세라믹이며 제주를 대표할 수 있는 지하 천연자원을 말한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은 넓게 잘 만들어져 있고 길 한쪽에는 제주 특산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곰의말채, 말오줌대나무, 후박나무, 머귀나무, 상산, 예덕나무, 구실잣밤나무 등이 이름표를 달고 씩씩하게 한창 젊은 나이로 성장하고 있었다. 천년 숲 입구에 들어서자
바자나무 숲에서 뿜어 나오는 청량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신비스럽고 신령스러운 기분에 휩싸인다.
거의 천년에 가까운 비자나무의 숲은 묵직하고 장중한 맛이 나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듣는 것같이 느껴졌다. 육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천년 비자나무 숲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 주는 것 같았다.
오래된 숲속에 들 때마다 우리 인간의 왜소함, 나약함에 크게 놀라게 된다. 소나무 숲이나 자작나무 숲에서 보는 밝은 숲속이 아니고 그늘이 더 짙고 습기가 많아 음침한 비자나무 숲속에 들어서면 특별한 감성에 쌓이게 된다. 비자나무 숲속의 언어는 희망이나 행복 같은 그런 밝은 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반성하거나 실패나 좌절, 심지어 죽음의 언어에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뿐만 아닐 것 같다.
이제 성지순례 마지막 코스는 제주 일출봉이 가장 아름답게 바라보인다는 성산포성당으로 향했다. 가이드 말처럼 이곳 넓은 성당 잔디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일출봉은 그대로 하나의 그림이었다.
성당 뒤로 넓은 잔디밭이 있고 잔디밭에서는 잡풀을 골라내 뽑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다. 매우 힘든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즐겁게 우리들과 말씀을 나누어 주니 우리들의 마음도 즐거웠다.
이 성당 구내 앞마당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만들어져 있다. 연못도 있고 많은 소나무가 정원수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 좋아 보였으나 너무나 인위적으로 만든 일본식 정원의 모습으로 자연미를 찾아볼 수가 없어 답답해 보였다. 우리나라 전통 정원처럼 자연에 순응하는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이 정원은 신자가 기증하여 지금도 그 사람들이 관리를 맡아서 해주고 있다고 했다. 대단한 성심을 가진 신자라 생각하면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제주 성지순례의 마지막 코스, 성산봉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성산포 성당의 마당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 오늘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본 제주성지에 대한 이야길 나누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어서 좋았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중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연극이 있다고 한다. 우리의 제주도 성지순례 역시 희망의 아침 해가 뜨는 일출봉을 바라보며 마무리하게 되었으니 좋고 좋은 피날레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제 제주성지 순례를 마치고 18시 30분 대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제주도에 관광객이 몰리어 시내에 자동차가 많아 막히고 막혀 17시가 넘은 시간에 제주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수속이 늦어졌다. 짐을 부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려 진에어 비행기가 20여 분 늦게 출발하였다. 빈자리 한 곳 없이 만석인 비행기는 8시가 다 된 시간에 대구공항에 도착하였다.
3박 4일간의 제주도 성지 순례였다. 대구가톨릭학술원에서 주관한 제주 성지 순례길이었다. 김대건 신부님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용수성당. 백서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 묘소, 이시돌 목장의 14처, 보통은 가기 힘든 추자도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의 묘소, 제주 관덕정, 제주 주교좌성당, 황사평 성직자 묘지, 제주 복자 김기량 베드로 성지, 천년 비자숲 탐방, 성산포성당 등을 돌아보았다. 특히 1901년 제주에서 일어난 ‘신축교안 사건’은 가톨릭교회가 잘못한 큰 사건이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신사참배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해방 이후 혼란기에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던 가톨릭교회가 부끄럽게 여겨졌다. 스스로가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가장 어려운 시절에 우리는 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끝으로 제주 성지 순례를 계획하고 알뜰하게 진행시켜준 대구가톨릭 한림원 임원진과 항상 조용한 언행으로 우리의 성심을 더욱 높여주신 전헌호 지도 신부님, 그리고 함께한 모든 분들을 위해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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