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유설교(100)
나는 양의 문이라....
본문 : 요10:1-10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경의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예수님 이야기는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셨을 때 제자들에게
(베드로, 요한 야고보)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성경의 예수님 이야기는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이야기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서도....
우리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예수님 이야기는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당신 스스로 당신이 누구인지에 관해
말씀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예수님 이야기는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에서 발견됩니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일곱 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
곧 ‘에고 에이미’가 기록되어 있는데....
지난 두 시간 동안 ...
-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48)와 ...
-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라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세 번째로
‘나는 양의 문이다’(요10:7)라는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다윗은 자신을 한 마리의 양으로,
하나님을 양을 돌보시는 목자로
인식하였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한 마리의 양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양은 세 가지의 특징을 지닌 동물입니다.
첫째, 양은 길을 찾지 못합니다.
방향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인도해 주지 않으면
실종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 못합니다.
길을 차지 못하기에, 먹이가 있는
초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
누군가가 인도해 주지 않으면
굶어 죽기 십상입니다.
셋째, 자기 생명을 스스로
보호할 능력이 없습니다.
걸음걸이가 빠르지 않음은 물론이고,
다른 동물처럼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을 지닌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생명을 지켜주지 않으면
맹수의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신을 양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은 ....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나아가야 할 바른 길을 찾을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참된 먹이를
구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자신의 힘만으로는 자기 생명을
영원히 지킬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자각이 있었기에
그는 목자 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윗처럼 자신의 실상을 바로
깨닫는 것이 은혜의 출발입니다.
얼마 전에 전 참 미스터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레이시아 항공 소속의
한 여객기(MH370)가 쿠알라룸푸르에서
베이징으로 가던 중
갑자기 레이더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난 지금까지 반대 방향인
남인도양에 추락했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납치가 되었는지, 조종사의 자살 비행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아직 비행기 잔해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곧 블랙박스 배터리도 수명을 다한다고 하니
영구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에는 승객과
승무원 239명이 탑승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혹시 뒤늦게 알았다 하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
저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바로 ..
이 비행기에 타고 있는 승객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
죽음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안락한 의자에 누워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언젠가 기사를 보니 미국 국립대기연구센터가
인도와 파키스탄이...
히로시마 원폭 수준의 핵폭탄 100개를
서로 터뜨리는 전쟁을 가정한
모의실험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는 지구에 있는 핵폭탄의 극히 일부만 사용한
소규모 핵전쟁으로 파괴력도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재앙'에 가까웠습니다.
현존하는 만7천개의 핵폭탄 중에서
100개만 터져도 인류 대부분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지구가 파괴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핵폭발로 생긴 불기둥에서 쏟아진 550만t의
검은 재가 대기를 뒤덮으면서
전 지구적인 핵겨울이 발생했습니다.
핵겨울은 핵전쟁 이후 급격하게 기온이 내려가
식량 부족으로 인류가 굶어죽는 사태를 말합니다.
결국 지구는 인류가 생존할 수 없는
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우리 개개인의 능력, 의지, 힘과는
아무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다윗과 같이 자신을 한 마리의 양에
지나지 않음을 고백할 때 목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께서도 자신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종종 목자와 양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1-6절에서 자신이 참 목자임을
강조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양의 우리에 들어온다고 해서 다 목자가 아니라
그중에는 도둑과 강도도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참 목자만이 자기 양의 이름을 알고 부르고,.....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알기에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3-5절).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이야말로
인류의 참 목자로 오셨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서 왔던 거짓 선지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은 도적이며 강도였음을
암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6절).
그래서 예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다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를 비유로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아주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7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양의 문’에 비유합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의미>.....
“나는 양의 문이라”는 비유 말씀이 의미하는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내가 양의 문”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구원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어떤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다가,
‘양과 목자’의 관계가 성경에 많이
이야기 되는 것을 보고...
실제 목동생활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직접 찾아가 보았답니다.
양을 치는 목자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양 우리는 사방에
든든하게 세워져있는데 좁은 통로가
문도 없이 열려있더랍니다.
그래서 거기에 왜 문을 달지
않았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목자가 대답하는 말이
‘내가 바로 문입니다’ 그러더랍니다.
양들을 우리에 안전하게 들여놓으면
자신이 그 통로에 누워서
밤새 지킨다는 것이지요.
자기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 대답을 들으면서 이 사람은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바로 ‘구원의 통로’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구원으로 통하는 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증언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고
증언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예수님은 오늘 본문 9절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는 비유 말씀이
의미하는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내가 양의 문”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구원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 안에 넉넉한 꼴과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9절-10절 읽어라>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문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 양이 목자의 소유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목자는 자신의 우리에 들어 온 양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집니다.
들의 갖가지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분만 아니라
양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게 하기 위하여
열심히 꼴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목자로 삼은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23:2-4 읽어라>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바로 예수님을 목자로 삼은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비록 험한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도
예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기만 하면...
‘영생’을 보장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기에 담대하고
활기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자신이 없이 홀로 남을 제자들을 생각하며....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목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고 천상병 시인은 인생을 ‘소풍’이 비유했는데,.....
성경은 인생을 ‘나그네’,
곧 여행하는 사람에 비유합니다.
중요한 것은 돌아갈 고향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의 문’되신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천국의 시민권’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목자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끔찍이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이
함께하시기에 위험한 사망의 골짜기를
걷는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여 주셔서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우리를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래서 목자이신 그 분을 따르기만 하면
육적으로, 영적으로 풍성하게
삶을 살게 됩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맺는 말씀 - 때가 있다>
그런데 한편 오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양의 문’은 항상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너무 늦으면 못 들어갑니다.
준비가 안 되도 못 들어갑니다.
아직은 닫히지 않았습니다만
한 번 닫히면 영원히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열렸을 때 들어가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의 문과 같습니다.
늦으면 못 들어갑니다.
등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아무리 애원을 해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신랑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늦는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문은 아무에게 열린 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목자가 아무 양에게나 자기 우리의 문을
엽니까? 자기 양인지를 확인합니다.
오직 자기 양에게만 이 문은 열립니다.
이 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천국 잔치에 참여할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만 열린 문입니다.
마음의 결단을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결단해야 합니다.
마음을 재촉해야 합니다.
조선의 최고 명재상이라고 불리던
황희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초행길이라 황희 정승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농부, 산 너머 마을에 가려는데
해가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넘을 수 있겠소” ...
농부는 황희 정승을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황희 정승은 “저 농부가 일이
바빠서 그런가 보다”하고 종종걸음으로
걸음을 재촉하자...
농부가 말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넘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황희 정승이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아까는 대꾸조차 안하더니
지금 대답하는 이유가 무엇이요.” ....
“그거야 어르신의 걸음 속도를 봐야
해가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해가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넘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는
걷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람은 고개를
넘을 수 있지만 ....
천천히 걷는 사람은 넘지 못합니다.
영혼의 구원도 마찬가집니다.
지금은 구원의 문이 열려 있지만
해가 떨어지면 닫힙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려면
걸음을 재촉해야 합니다.
거룩한 열망을 품고 빠른 걸음으로
구원의 문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을 놓치면 내일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구원은 문 밖에서 머뭇거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속히 문으로
들어가는 자의 것입니다.
분명한 마음의 결단과 함께 믿음의 행보를
재촉하는 자가 예수 구원의
은총을 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예수님은 ‘양의 문’,.....
곧 ‘생명의 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열려진 문으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