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한 사람은 배우면 되지만 잘못 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고칠 방법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눈 떤 맹인인 바리새인들이
바디매오처럼 보여 달라고 하면 될 텐데 본다고 하니 심판받을 죄가 됩니다(요9장)
1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한 절 한 절 반복 새기는 것이 좋습니다.
2장부터는 우리에게 되어 지는 일을 설명하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너희를
살리셨다’ 이 말씀은 바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엡1:20절의 적용입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다시 사신 것과 아담 안에 죽었던 우리들 안에
다시 사신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진정한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 됩니다.
지금 기독교가 예수의 부활은 크게 부각이 하는데 자신이 아담 안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부활에 대해서는 막연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믿음이
기초가 되어야만 자신이 하나님 우편에 앉혔다는 사실도 믿어 질 것입니다.
2-3절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것이 아담 안에 곧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삶입니다. 따라서
이 신앙의 38선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망과 생명, 어두움과 빛, 마귀와 하나님,
저주와 축복, 어제와 오늘, 이전과 지금이 분명해야 합니다. 만일 처음
신앙생활한 후부터 지금까지 믿음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누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부부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억지 논리를 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는 것을 뻔히 보입니다.(롬1:18, 요3:36b)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후에 구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 회개이며 세례(침례)입니다. 만일 그 자리에 버티면서 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영생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겁니다.
왜? 그곳은 사망이며 어둠이며 사단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라고
말씀으로 조목조목 잘 가르치면서 그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웃지도 못할
일도 있더라고요. 간혹 ‘예수 믿는 우리는’ 하는 말을 섞지만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계시는 말씀은 피해 가면서 입으로 생명의 말씀 운운하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당신 사망 아래에 있는 걸 아느냐고 물어 볼 겁니다.
만일 사망을 가진 채로 지금 바로 죽으면 가차 없이 불 못으로 가고 맙니다.
주님은 오늘도 사망의 종인 줄 모르고 하나님의 진노아래에서 환난과 곤고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 곧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그 안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4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의 구원은 자비(긍휼)가 끊임없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풍성한) 사랑으로 인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9장에서 하나님의 작정의 조건은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1절을 반복합니다. 어쩌면 삽입된 구절일 가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이 부활의 신앙을 재차 강조하는 성경의 뜻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라도
시인해야 합니다. 익숙해지도록 성령 안에서 그 가르침과 생각나심에 잠겨야 합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것이 바로 은혜로 구원받은 겁니다. 우리는
이 일에 손끝도 댄 적이 없습니다. 2) 함께 일으키셨습니다. 일어난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가 그 분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3)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입니다. 이것이
어떤 원리로 되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듣고 믿고 세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상태에서 되어 집니다(롬6장) 오랫동안 말씀에 잠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 날의 베드로의 설교 내용입니다(행2:38) 오순절의 의미가 성령이
임하여 불의 혀 같이 갈라지고 방언과 이적과 기사가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자세히 보게 될 때가옵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항상 앞에 모시듯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우편보좌를 항상 바라보게 됩니다.
성도는 운명적으로 그 분의 대속의 은총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면 포도나무에서 끊어진 가지가 됩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에베소서는 이것을 확실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감정적인 면에 치우쳐
하나님께 어리광을 부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그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베푸신 그 풍성한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지극히 풍성한 은혜의 소식을 오고 오는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입니다.
만약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우리가 일한 것에 대한 삯이라면
그 분의 자비와 풍성한 은혜가 우리를 통해 나타나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설교자들 중에도 자신은 어릴 때부터 좋은 교회 다녀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좋은 교회를 목회 하려고 노력하니 지금 복을 받아 등 따뜻하고 배부르답니다.
그런데 그의 몸짓과 표정과 음성을 보면 사망을 아직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평생 교회를 돌면서 음악사역(본인은 찬양사역이라 함)을 한 목사에게 지금
죽으면 불 못이라고 말을 해서 주변에 있는 분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체면을 보지 않으십니다. 무엇을 했느냐 어떻게 믿었느냐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는가 그 아들의 형상을
가졌는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있나를 보십니다.
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가르) 왜 그럴 수 있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서 난 행위로 구원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은 준 자를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 태어난 선악과의 독성은 구원이 공짜라면
결코 달갑지 않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므로 자신의 지분이 들어가야만
그 구원이 가치 있게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는 집 안에 있는 맏아들과
같이 모범수를 양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니지요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죽었던 자리에서 다시 살아 일으킴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힘을 받는데 까지 우리가 지불한 수고는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에 의한 믿음입니다. 그 선물이 크면 클수록 주신 분을 높입니다.
9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심을 받고 그 분과 함께 하늘에
앉은 이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육체의 행위를 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털끝만큼도 육체에 빚진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라 함은 육체의 행위 반대의
개념으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로마서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그러합니다.
따라서 그 믿음 자체가 행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었을 뿐입니다.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어떤 육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유의지 운운하면서 자신이 믿음을 스스로 선택해서 잘 믿어 왔노라고
말하는 이가 있으면 이는 유대적인 신앙이며 자칭 유대인이라는 이름뿐 실제는
사단의 회당입니다(계2:9) 그런데 생각보다 겉이 멀쩡한 사단의 회당이 많습니다.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입니다.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재창조하시고 우리를 직접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봐라 내가 만들었다’ 하십니다.
그 분의 자녀는 최고가 되는 것이 그 분의 바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끝장을 내고 말겠다는 결심이십니다(8,9절)
선한 일은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 곧 마25장의 의인의
삶을 말합니다. 2) 선한 일 안에서 행하도록 함입니다. 곧 말씀을 따라
믿음을 통한 영생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분의 생명이 안에서
역사하므로 밖으로 그 생명의 빛을 밖으로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그 분이 우리를 만드시는 목적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보편적인 말이지만 Steven Lawson이 하나님의 질문은
여러분이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고 당신이 누구냐 물으신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선한 일은 결코 업무수행이 아닙니다. 섬김이나 봉사와
전도 등의 헌신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나아가므로 하나님의 집이 되어가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행함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의 영이 충만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