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절 머문 개성(開城)
최 화 웅
벌써 11년 전의 일이다. r그해 늦봄 나는 북녘 땅, 개성을 다녀왔다. 개성은 옛 고려의 수도로 서울까지 직선거리로 50여 km, 경의선 철로로는 56km, 통일로로 가면 65여 km에 떨어진 곳이다. 개성으로부터 평양까지는 130여 km의 직선거리지만 철길로는 206km다. 개성은 6.25 이전에는 38 이남으로 남북한이 휴전을 앞두고 서로 빼앗길 수 없는 전략 요충지로 전투 또한 치열했다. 6.25 때 휴전을 앞두고 한 치의 땅도 더 차지하겠다는 작전이 네이팜탄의 융단폭격으로 개성 전체의 90%이상을 초토화시킨 상흔이 아직껏 남아 있다. 개성 방문에는 여권이 필요 없는 대신 통일부장관이 발행한 방문증명서가 대신 했다. 동부전선에서 군복무를 마친 뒤 40여 년 만에 군사분계선(DML) 철책을 넘어 북녘 땅으로 들어가는 마음이 두려움과 설렘이 섞였다. ‘그린닥터스 개성협력병원’(병원장 정근) 개원식에 참석하는 그린닥터스 회원과 본부요원 등 160여 명이 전세버스 편으로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새벽녘 서울에 도착한 일행은 정동 찜질방에서 잠시 눈을 붙인 뒤 이튿날 새벽 청진동 해장국으로 아침을 나누고 서울 역사박물관에 모여 무박 2일의 개성방문 일정에 들어갔다. 개성으로 가는 길은 육로의 경우 경의선과 1호선 국도를 이용한다. 우리 일행은 6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자유로를 따라 통일대교를 지나 도라산역 출입사무소(CIQ)를 거쳤다. 거기서 법무부 출발확인 점검을 받고 스탬프를 찍었다. 도라산역은 경의선의 최북단에 자리 잡은 기차역으로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으로부터 700m 떨어진 곳이다. 도라산역은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에게 나라를 내어준 비운과 이를 거부한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슬픈 사연이 전해지는 곳이다. 도라산역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의 해발 156m 도라산(都羅山)에서 따온 이름이다. 도라산역은 지난 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끊어진 철로를 잇기로 합의하고 그해 9월 ‘경의선복원사업’이 추진되었다. 도라산역은 남쪽의 문산역과 북쪽의 봉동역 사이에 세워졌다.
2002년 2월 20일 방한한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도라산 역사(驛舍) 앞에 놓인 경의선 철도 침목에 “May This Railroad Unite Korean Families."라고 써서 이 철로가 한국의 이산가족을 맺어주기를 기원한 바 있다. 한평생 통일운동을 위해 몸 바친 늦봄 문익환 목사님이 1989년 새해 첫날 아침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로 시작하는 통일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쓰고 그해 3월 25일에 평양에 들어갔었다. 서울에서 파주, 문산을 거쳐 임진강을 건너 고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개성으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 서해안 따라 이어진 제1호 국도다. 시인 조근호는 ‘국도 1호선-흐르는 강’을 이렇게 읊었다. ”남도 끝 유달동에서 북으로 올라올라 길게 뻗어 있는 길, 국도 1호선. 북도 땅 신의주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먼데 여기서 가로 막혔습니다. 임진강은 한강을 만나 말없이 흐르고 들녘을 흐르는 바람결은 막힘없이 하나인데 허리 잘려진 운명의 골은 세월이 쌓여 강물의 깊이만큼이나 깊어만 갑니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남측 출입사무소를 거쳐 북쪽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 남측 제2통문을 나서자 ‘여기부터 개성입니다. 개성공업지구 5km’라는 이정표가 선명했다. 남측 출입국사무소로부터 비무장지대의 남북연결통로를 따라 군사분계선까지는 국군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북방한계선까지는 북측의 호송을 받았다. 긴장된 순간에 어릴 때 병정놀이도 이렇게 유치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 머리를 스쳤다. 자유로를 따라 여기까지 오는데 한 시간, 남과 북이 지척인데 마음과 길은 그토록 멀기만 했던가? 이태 전 문을 닫은 개성공단 관리위원회 강당에서 열린 그린닥터스 개성협력병원 개원식에 참석한 뒤 오찬장이 마련된 자남산 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관이라 부르지만 김일성 주석이 다녀간 곳으로 북한이 자랑하는 고급 호텔이었다. 남북 참석자들이 어울려 들쭉술로 건배를 한 뒤 개성명물이라는 11첩 반상의 한정식을 받았다. 한복차림의 상냥한 접대원이 개성 약밥과 녹두지짐, 도토리묵 냉채와 삼색 나물을 차례로 날랐다.
점심을 끝낸 우리 일행은 개성시내 관광에 나섰다. 개성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진산 송악산이 시내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도심 한가운데에는 해발 104m의 자남산이 고즈넉이 자리 잡았다. 개성은 고려 500년의 도읍지로 고대에는 청목령, 고구려 때는 부소암과 동비흘, 신라에 와서 부소압은 송악군, 동비흘은 개성군으로 개편되고 고려왕조가 들어와서는 송악군과 개성군을 합하여 개주(開州)라 했다가 조선조에서는 송도, 중경이라 불렀다. 개성의 유적지로는 자남산과 송악산 기슭의 옛 왕궁 터인 만월대와 정몽주를 기념하여 세운 숭양서원, 관덕정과 선죽교(善竹橋), 고려 성균관(成均館)으로 더 잘 알려진 고려민속박물을 비롯한 공민왕릉 등이 국보급 문화재로 보존되었고 우리나라 3대 폭포로 불리는 박연폭포가 북한 천연기념물 제388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개성은 평양, 남포에 이어 북한의 3대 도시다. 개성의 가로수는 모두 은행나무였다. 거리는 말쑥하고 한산했다. 거리에서 군밤, 고구마 상점, 리발관, 양복 수선옷 전문, 과실 남생상점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마미천(馬尾川) 지류는 봄빛을 머금은 채 말없이 흘렀다. 개울을 따라 숭양서원 아래로 내려가자 개울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선죽교를 만날 수 있었다. 선죽교를 지나며 문득 정몽주의 팔순 노모가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고 팔을 부여잡았던 애끓는 모정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시대상황에 이방원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이어지는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의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라는 ‘단심가(丹心歌)’가 차례로 머리를 스쳤다. 단심가를 들은 이방원은 조영규를 보내 귀가길의 정몽주를 선지교(善地橋) 위에서 쇠몽둥이로 살해한다. 그 자리에 참대가 솟았다 하여 선죽교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한이 서린 선죽교 옆에는 명필 한석봉이 쓴 ‘善竹橋’를 새긴 돌비석도 서 있었다. 그 곁에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표충비가 눈길을 끌었다. 이곳 젊은이들은 잇단 변란과 외침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 무술을 익혀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충정을 다진 곳이기도 하다.
북한향토사학자 송경록은 ‘개성이야기’를 통해 “왜구의 준동과 임진왜란 때 맹활약한 동래부사 송상현 공을 비롯한 유극량과 박내성 등의 명장들이 젊은 날 이곳에서 무술을 익혔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어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을 찾았다. 성균관에 들어서자 양쪽에 30m가 넘어 보이는 은행나무가 하느을 떠받친 채 옛 고려왕조의 역사를 말해주었다. 개성은 고려의 도읍지답게 천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가 지나간 세월을 끌어안고 말없이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 성균관은 개성을 대표하는 옛 건물로 지난1988년 자남산에 있던 개성박물관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고려민속박물관으로 현판을 바꿔 달았다. 북한문화재 제50호인 고려민속박물관에는 명륜당과 공자의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 학생 숙소였던 동재, 서재, 동무, 서무 등 200여 칸의 건물 18채를 지었다. 전시관에는 고려의 성립과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역사유물 1,000여 점도 전시되어 있었다. 2006년 3.1절을 맞아 이곳에서는 일본으로부터 되찾은 ‘북관대첩비’인도인수식도 열렸었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숙종 34년(1707)에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의병 3,000여 명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왜군 2만 8,000명을 맞아 싸워 이긴 전승기념비를 길주군에 세운 것이다.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 소장이 일본으로 약탈해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버려둔 북관대첩비를 100년 만에 되찾아와 비석이 원래 있던 곳으로 옮기기 위해 이곳을 통해 북측에 전달했다. 북관대첩비는 지난 2005년 10월 21일 되찾아온 뒤 서울국립박물관에서 잃어버린 머릿돌을 복원해 2006년 3·1절에 북한에 돌려주게 되었다. 북한은 북관대첩비를 국보유적 193호'로 등록하고 김책시에 표지석과 안내석을 나란히 세웠다. 아무런 관직도 없이 왜군과 싸운 정문부 장군의 애국애족정신을 이어받아 조국통일의 길을 밝혀주기를 기원했다. 한나절 머문 개성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새삼 조국분단의 오늘과 그 슬픈 역사에 짙은 연민의 정을 한없이 느꼈다. 나는 묻는다. “당신은 조국의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