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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7:18-20절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7: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7: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주제 :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강론
미가서 1:1절과 이사야서 1:1절을 대조해보면 “미가와, 이사야”는 같은 시대에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가서와 이사야서에는 상통하는 말씀이 나타나는데 이는 예언의 확실성을 더욱 강화시켜주고 있습니다. 미가서의 구조도 이사야서와 마찬가지로 앞부분에서 죄라는 문제(問題)로 심판을 경고하고 뒷부분에서 해답(解答)을 계시하시는 구조(構造)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미가서의 문제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하십니다. “우상, 음행, 기생”이라는 묘사로 표현된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인식하셨습니까? 메시아언약을 “우상”으로 바꿔치기 했기 때문에 “음행, 기생의 값”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3:10절에서는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하십니다. 이사야서에서도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사 1:21)합니다. 얼마나 가공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된 상황을 깨달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1:8)합니다. “들개”의 우는 소리는 불길하고 “타조”의 우는 소리는 구슬픈 소리입니다. 어찌하여 선지자가 이처럼 애통하면서 외치고 있는가?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노니(2:3),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3:12)하시는 심판의 경고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경고입니까?
이 경고는 바벨론에 의하여 문자적으로 성취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은 한 번으로 끝인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로마에 의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는 것”(마 24:2)으로 반복이 되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터가 높고 아름답다”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창기”같이 된 원인이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점입니다. 3:11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 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한 지도자들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3:2-3절에서는 지도자들의 죄를 원색적인 언어로 지적합니다.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합니다.
3:5절도 보겠습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합니다. 무슨 뜻인가? “이에 물 것”이란 점쟁이에게 “복전”(福錢)을 주는 것 같은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 하냐”(3:11)했다는 것은 가장 경건한 척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가공스런 일입니까?
이점을 이사야서에서는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은 “비전, 꿈, 긍정, 스마일”이 인기인데 현대교회의 실상은 “애통하며 애곡하면서” 외쳐야 할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야고보서 4:9절을 보십시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즉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하신 경계를 오늘의 목회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6:6-7)하나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한심한 말인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하십니다. 두 마디로 요약할 수가 있는데 첫째는 “정의를 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이 이웃과의 바른 관계라면 “인자를 사랑하며”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점을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이럴 경우 윤리적인 죄나 사회정의만을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6:1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을 사람의 조소 거리로 만들리라”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이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켰다”는 죄가 윤리적인 죄입니까? 다시 상기시키면서 강조합니다만 “메시아언약”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바꿔치기 했다는 신학적인 죄가 우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불의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언약을 망각하고 우상을 섬기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즉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나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지 말해보라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신”(6:3-4)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키십니다. 이것이 너희에게 잘못을 범한 일이란 말이냐고 따지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도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하시면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不義)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렘 2:4-5)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애굽 바로의 노예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나님, 광야를 통과하게 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호소하십니다.
이점을 신명기에서는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신 32:6)합니다.
그런데 미가서는 심판, 멸망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로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해주실 행사에 구원이 있고 소망이 있다는 점을 증언합니다. 그래서 미가서의 내용을 유의해 보시면 구조가 “절망(1:1-2:11) 소망(2:12-13), 절망(3장) 소망(4-5장), 절망(6:1-7:6) 소망(7:7-20)”이라는 3번의 사이클로 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이처럼 반복적으로 경계하시는가? 이것이 선지자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해답인 소망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 번 소망의 말씀은 2:12-13절입니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시겠다”(12)하십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돌아오게 하시는 광경이 2:13절에 나타납니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길을 여는 자”란 길 예비자를 가리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의 왕(王)이, 선두(先頭)로 가시리라”합니다. 이 감동적인 예언이 세례 요한과 우리의 왕 그리스도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쯤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 두 번째 소망에 관한 말씀이 4장-5장에 있습니다. 4:1절을 보겠습니다. “끝 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리라”하십니다. 이사야서에서도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 2:2)합니다.
예언할 당시의 상황은 솔로몬의 성전이 불에 탈 처지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전이 굳게 세워지리라”하십니다. 그리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합니다. 왜 몰려가는가?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하신 복음에 대한 구약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이점이 5장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합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서에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사 9:6)한 그리스도가 미가서에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다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을 이사야서에서는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고 말씀하고, 미가서에서는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합니다. 이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소망의 말씀이요,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 세 번째 소망은 7:7절부터 마지막 절까지입니다. 여기가 미가서의 중심부분입니다. 그 중에서 핵심은 7:19절입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罪惡)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罪)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죄(罪)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는”, 즉 다시는 기억지도 않으신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여지는지 아십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그 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서뿐인 것입니다.
이점을 이사야서에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확실합니까?
왜 이렇게 행해주신다 하시는가? 마지막 2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誠實)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仁愛)를 더하시리이다”(7:20), 즉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지켜주시기 위해서라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은 “인애”(仁愛), 즉 은혜요 맹세하신 대로 행해주심은 “성실”(誠實)인 것입니다.
이점을 이사야서에서는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 41:8)하고 부르십니다.
미가서의 중심을 붙잡았으니 좀 더 깊이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7:8절입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고 담대히 선언합니다. 그리고 7:9절에서는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하고 자신들이 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光明)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公義)를 보리로다”(7:9)고 소망을 말합니다. 이 말씀이 1차적으로는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을 가리킨다 하여도 이는 예표에 불과합니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7:20)한 말씀이 바벨론 포로가 귀환함으로 온전히 성취될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보리로다”한 말씀을 구속사적으로 보면 참으로 의미가 깊고도 깊은 은혜라는 점을 깨닫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를 보리로다”한 말씀을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보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로마서 3:26절을 보겠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합니다. “이 때”란 “이 예수를 하나님이,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세우신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타내셔야 할 “공의”, 즉 심판하실 일을 자기 아들에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행해주심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까?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보리로다”의 구속사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1:17)고 외친 것입니다. 이점을 루터는 신학의 진수라고 말했는데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나타내셔서 우리로 보게 하셨는지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복음의 핵심을 알고 믿는 참으로 복을 받은 분들이십니다.
명심하십시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7:19)한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자기 아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신 대속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7:18)하고 감격해하면서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고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7:18절을 다시 한 번 주목해보시면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신다”고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미가서에는 “남은 자”가 5번(2:12, 5:3, 7, 8, 7:18)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사 10:22)합니다. 이것이 1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 중 “남은 자”가 돌아오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만 사도 바울은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5)고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남은 자”가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미가서의 전체적인 구조(構造)를 상기시킴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미가서는 앞부분에서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1:5)고 “죄와, 허물”을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는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7:19)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범한 죄라는 문제를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자기 아들을 통해서 해결해주신다는 말씀으로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7:17)하는 감사와 감격이 이제 형제의 찬양이 되었습니까?
이런 사랑과 은혜를 입은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이것이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한 미가서의 중심주제입니다.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나 또한 예수를 사랑하네
날 구원하시려 내려오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네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니 나는 참 기쁘다 (20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