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사)창작수필문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엄지바우(이봉길)
수필쓰기 실전 7
제목 달기
- 제목은 그 글 속에 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제목달기가 어느 단계에서 이루어져야 효과적이라는 이론은 없다. 그러나 수필의 경우 대개 제재가 정해진 다음에 글을 쓰게 되는데, 이 때 제재가 바로 제목이 되는 수가 많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제목 없이 글을 쓰는 수도 있으며, 다 쓰고 나서, 또는 쓰는 과정에서 제목을 다는 경우도 있다. 한번 정해진 제목이 그 글이 완성되기까지 여러 차례 바꾸기도 하고, 이미 잡지에 발표된 것도 나중에 단행본으로 낼 때 고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한 편의 수필에서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학자에 따라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제목과 내용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이 경우 제목은 다만 작품의 표지(標識)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음악에서 보면, <교향곡 9번>등으로 표제가 붙는데, 이때 제목의 5니 9니 하는 숫자는 작품 내용과 무관하다. 그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작품 1>, <작품 ‘07F>라고 할 때도 그런 경우이다. 아예 제목을 <무제>라고 달아서 발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목과 글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제목은 글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암시하거나,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제목은 그 글의 안내 역할을 하기 때문에 독자는 제목을 읽고 그 글의 내용을 예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글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제목은 어떻게 달며, 어떤 제목이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대개의 경우 제재를 그대로 사용하든가 제재에 수식어를 붙여서 사용한다. 또는 작품의 주제문을 요약해서 제목으로 삼는다. 앞의 경우는 서정적 또는 서사적 수필일 때가 많고, 뒤의 경우는 교훈적, 설득적, 비판적 수필일 때가 많다.
<그믐달>, <여름밤>, <짜장면> 같은 것은 제재를 제목으로 삼은 경우이고, <청춘 예찬>, <무소유>, <가난한 날의 행복> 같은 것은 주제문을 요약한 경우이다.
제목은 하나의 명사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고, 하나의 명사구로 하는 경우도 있으며, 때로는 하나의 완결된 문장으로 하기도 한다. <나무>, <어머니>, <딸깍발이>는 하나의 명사로 제목을 삼은 예이다. <도마뱀의 사랑>, < 어느 개의 모정>은 하나의 구로 제목을 삼은 예이다. 박경리의 <어린 비둘기를 더 이상 욕보이지 말라> 같은 것은 완결된 하나의 문장을 제목으로 삼은 예이다.
제목이 하나의 문장으로 되었을 때는 자연히 길어지고, 설명적이 된다. 그 대신 내용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점이 있다. 우리나라 수필 가운데 가장 긴 제목은 조선시대 김택영의 <친구 박영기가 토계의 수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아우의 시신을 찾는 것을 돕기 위하여 지은 글爲朴宇營紀祭兎溪水神求第屍文>일지 모른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때는 글을 다시 제세히 읽어보는 것이 좋다. 제목은 그 글 속에 있다.
<예문 A>
그러던 어느 날, 선을 보기로 날짜를 정해 놓았으니 당장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신랑감이 너무 좋아서 놓치기 아깝다는 올케언니의 숨넘어가는 재촉에 배겨 낼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올케언니가 시간이 되었다며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곧바로 나를 앞세웠다.(중략)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가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검고 뚱뚱했다. ‘저 남자는 아닐 거야’하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그 남자 옆에 앉았던 아주머니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의 누님이란 사람이었다. 순간 기운이 쫙 빠지는 것 같았지만 하는 수 없이 그들 앞에 앉았다.
나는 처음부터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었더니 목이 뻣뻣해지면서 온몸이 굳어져 왔다. (중략)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라면서 그의 누님과 올케가 일어섰다. 우리는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짜장면을 먹을 때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나는 군만두를 시켰다. 그는 양장피를 시켰다. 생소한 이름이었다. 어떤 음식일까 하고 궁금해 하는 동안에 음식이 나왔다. 남자는 음식을 받아 내 앞에 놓았다. 군만두가 두 개씩 사이좋게 부어 있었다. ‘저 양장피는 어떻게 먹는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앗!’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무젓가락을 양 손에 쥐고 힘을 주어 붙어 있는 만두를 떼다가 만두 한 개가 그 남자의 어깨 너머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란 기색도 없이 그는 바닥에 떨어진 만두를 보며 껄껄 웃었다. (중략)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보기보다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어느 새 그와 나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들길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중략) 우리는 버스 정류소까지 함께 걸었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고,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이 그 사람과 마지막이었다.
위 예문의 처음 제목은 <선을 보던 날>이었다. 참신성이 떨어진다. <맞선>이라고 고쳐도 마찬가지다. 제목은 내용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참신해야 하고 독자에게 흥미를 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 이 글의 내용은 ‘실패한 맛선’이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그 내용을 잘 나타내면서도 참신하고 흥미를 주는 제목을 달 수 있을지 고심해 보아야 한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나온다. 둘씩 사이좋게 붙어 있는 군만두를 떼려다 그것이 상대 남자의 어깨 너머로 날아간 사건이다. 작가가 당황한 만큼은 아니지만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독자도 당황할 것이 분명하고, 그것이 이 글 전체를 읽고 난 다음에도 뇌리에 남을 것이다.
이렇게 흥미로운 대목을 다시 들여다보면 흥미의 원인이 “군만두가 날아갔다”는 표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군만두는 날아갈 수 있는 조류가 아니다. 그런데 날아갔다고 말함으로써 독자에게 충격을 준 것이다. 이제 ‘군만두 날아갔다’를 명사구로 고쳐서, ‘날아간 군만두’로 해본다. 보통 우리가 ‘밑천을 다 날렸다’고 하는 말은 ‘실패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날아갈 수 없는 군만두를 날아갔다 함으로써 흥미를 유발하고, 그러면서 실패한 맞선을 암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음 박종금의 <날아간 군만두>이다.
위의 경우처럼 그 글 속에서 그대로 가져 올 수 없을 때는 그 글의 주제 문장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요약하면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줄 수 있는 필자의 도움말이다.
<예문 B>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라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는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살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 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들의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엔가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위 글의 주제 문장은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주제문을 요약해 보면, 결국‘소유는 구속’이란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이 말을 불가에서 자주 쓰는 “무소유”라는 말을 의미하고 그것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물론 이 글의 작가 법정이 이런 제목을 달게 된 것은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승려이므로 무소유의 사상이 몸에 배인 사람이기 때문에 저절로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분석해서 보인 것은 유사한 경우에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제목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서정범의 <겨울 무지개>, 최신해의 <미국의 동태지개>, 장호의 <능금나무와 수저> 같은 제목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이질적인 사물을 대치시킴으로써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예라 하겠다. 그 의외성이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킨다.
윤숙경의 <다섯 평의 유산>에서 ‘다섯 평’이란 단어는 ‘유산’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어마어마한 기대와 가능성을 배반한다. 그것은 바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상식을 깨라. 그것이 제목을 찾는 기본 요건이 된다.
제목에 <25시>, <제3제국>,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 <제2의 탄생>, <서른한 번째의 장미> 같이 숫자가 들어 있으면 현대성, 비정함 같은 도회적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최근에는 많이 줄어 들었지만 수필 제목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었다. ‘설(說)’, ‘부(賦)’, ‘기(記)’, ‘송(頌)’, ‘찬(讚)’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설’이란 앞에다 궤적 사례를 들고 그것에서 어떤 교훈을 끌어내어 설득하는 한문 체개이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 예화에서 설리(設理)와 입론(立論)을 끄집어 낸 글이다. ‘부’는 산문으로 들어가서 운문으로 진행하다가 다시 산문으로 끝나는 즉 산문과 운문이 혼합된 문체이다. ‘기’는 어떤 일의 전말을 적은 글이며, ‘송’과 ‘찬’은 대상의 미덕을 예찬한 글이다.
한문 체재에 쓰이는 이런 말을 생각 없이 쓰다가 낭패를 보는 수가 있다.
<연노설煙奴說>이란 제목의 수필을 읽어보았더니 뜻밖에도 일기체였다. 제목에 ‘설’이 들어간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연노일기>로 고치는 것이 옳다. <백설부>는 산문이지만 읽으면 의도적으로 율격을 살려서 쓴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문 체재를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지만 율격을 살리려는 의도에서 쓴 글이란 사실에 수긍이 간다. 따라서 제목에 ‘부’를 붙인 것은 적절했다.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을 때 독자는 거부감을 느낀다. ‘어느 바다의 소년기’가 그 예다. ’바다의 소년기‘라고 하면 바다에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가 있는데 그 중 소년기에 대해서 쓴 내용이 담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실제 그 수필의 내용은 ’바다에서 소년기를 보낸 이야기‘였다. 제목의 첫째 요건은 내용과의 일치다.
겨울 무지개
서 정 범
눈 속에서 피는 동백꽃을 보고자 소설을 쓰는 황순원 선생님과 거제도에 가보기로 했다. 장승포에서 통통배를 타고 한 시간가량 가면 등대가 있는 조그만 섬이 있는데 거기엔 동백나무가 빼곡하다는 것이다.
서울서 떠날 때는 추워서 몸을 움츠렸다. 우리가 거제도에 닿았을 때에는 1월 하순이었는데도 봄 날씨 그대로였다.
조그만 배를 전세 내었다. 바람은 그리 차지 않았다. 거의 섬에 이르렀을 때 빗방울이 후드둑후드둑 지더니 순식간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바다 한가운데 서는 게 아닌가.
“야아! 저 무지개.”
바다에서 무지개를 보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겨울에 서는 무지개가 아닌가. 겨울 나그네가 겨울 바다에서 겨울 무지개를 본다는 생각이 든다. 눈 속에 빨갛게 피는 동백꽃을 보려고 온 우리에게 환영의 무지개를 세워 주는 것인가. 우리의 배가 무지개 속으로 들어가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순간 나는 4월에 본 ‘봄 무지개’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이었다. 봄 무지개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한 20여 년 전의 일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후퇴하는 통에 38선 이북이었던 해주는 피난민으로 도시가 콩나물시루같이 가득했었다. 밤사이에 중공군이 들어오는 바람에 12월 23일 새벽에 남하의 길을 떠나야 했다. 어머니께서는 노비에 보태 쓰라고 내가 장가들 때 혼숫감으로 마련해 두었던 명주 세 필과 금붙이를 옷장 깊숙이에서 꺼내 바랑에 넣어 주셨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이른 새벽 친구와 함께 해주를 떴던 것이다. 그렇게 어려웠던 38선을 싱겁게 넘어 남한 지역에 이르렀다. 이 지역에서 이미 경찰들은 후퇴하고 남아 있는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하여 피난민 속에 빨갱이가 끼어 있지 않나 하고 길목에서 조사하고 있었다. 동행인 박 선생은 생김이 좀 우람하고 말책이 무뚝뚝해서 그런지 조사를 몹시 당했다. 또 한 마을에 이르러 북에서 피난 오는 길이라고 하자 다짜고짜 창고에 가두는 것이었다. 자치대원 가운데 학생이 있어 우리 이야기를 듣더니 다음날 풀어 주었다.
그날이 성탄절이었다. 38선 쪽으로 약 3킬로미터 가면 교회가 있다고 해서 그 학생의 안내로 저녁예배에 참가했다. 밖은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교회 안은 무척 차분했다. 삼십여 명의 교인이 모였다. 축가로 스무 살 안팎인 아가씨가 찬송가를 부르는데 밝고 고운 음성이었다. 시골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여겼다. 예배가 끝나고 다과회가 있었다. 우리의 형편을 들은 장로님이 지금 개성 쪽은 전선이니 갈 수 없고, 천상 배를 타고 가야 할 텐데 배가 없다고 하며 유엔군이 곧 올라올 것이니 당분간 이 마을에 있으라는 고마운 제의였다.
이 ‘바루개’라는 마을은 38선에서 남쪽으로 8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30호 남짓한 마을이다. 교인들이 집집이 돌아가며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었다. 며칠이 지났다. 성탄절에 독창한 아가씨네 집 식사 차례였다. 닭을 잡고 두부를 하고 떡을 하는 등 성찬을 베풀어주었다. 이 아가씨는 병석에 누워 있는 어머니와 아래로는 동생들이 있었다. 마을 학생들에 의하면 아버지는 빨갱이로 6.25 전에 이북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 아주 늦게까지 그네네 집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잠시나마 즐겁게 해 드렸다. 그런데 그네가 왼쪽 발을 약간 저는 것이 아닌가. 교회서 처음 보았을 때에는 저는 것 같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그네에게 발을 다쳐서 몹시 불편할 텐데 성찬을 베푸느라고 수고가 많았다고 고마움을 표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알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전다는 것이다. 고마움의 정을 표한다는 게 그네의 아픈 점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기 짝이 없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괜히 그네에게 발 이야기를 꺼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마을에서 신세를 지기 시작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20리 밖 면 소재지에 인민위원회가 들어서고 내무서가 들어섰다. 내무서에서는 북에서 온 사람은 즉시 돌아가라는 것이며 만약 가지 않고 발각되는 날이면 숨겨준 사람까지 엄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렇지만 교인들은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있으라는 것이다. 다시 한 달이 지나고 내무서원이 자주 오고 인민위원회에서 마을에 드나들어 사태는 점점 어렵게 되었다. 하루는 내무서원들이 갑자기 가택 수색을 했다. 이 마을에서 여섯 명의 피난민이 있었는데 두 명이 붙들려갔다. 난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하러 가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마을 노인들이 나머지 피난민들에 대한 의논이 있었다. 마을이 피해를 적게 보기 위해 피난민을 보내야 한다는 쪽으로 이야기되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쯤 되니 결단해야 할 고비에 이르렀다. 새벽 기도를 드리고 오는데 우물가에서 다리를 저는 그네를 만났다. 우리의 사정을 안 그네는 무척 걱정하는 표정으로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다시 북으로 갈 수 없어 망설이는 중이라고 했다. 그네가 숨겨줄 테니 이 마을에 있으라는 것이다. 마을에서 이북에 가는 척하고 근처의 산에 숨어 있다가 밤에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이때 나의 심정은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잡고 매달릴 판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숨어 있을 때가 어디지?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궁금증에 싸인 채 근처 산에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둡자 약속 장소로 갔다. 그네가 오더니 자기 집 담을 넘어오라는 것이다. 뒤꼍에 있는 장독대 빈 독을 옮겨 놓으면서 그리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미 파 놓은 굴 안에는 침구까지 마련돼 있었고 저녁 식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 굴은 그네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가끔 집에 들를 때 숨어 있기 위해 파 놓은 것이다. 아버지는 올해 들어 소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그네만이 알고 있는 굴이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박 선생과 함께 나를 이 굴에 있기로 양해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낮에는 굴 안에 있고 이슥한 밤에나 살며시 나와 산책하며 바람 쐬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섬을 기지로 하는 우리 유격대원이 이 마을에 가끔 들른다는 소식이다. 알아보니 여기서 50리가량 가면 증산도라는 섬이 있는데 물때만 맞으면 썰물일 때에는 걸어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탈출이나 성공한 것 같이 기뻤다. 그네가 확인하기 위해 유격대원을 따라 밤길을 걸어 증산도를 다녀왔다.
이틀 후에 떠나기로 한 날이다. 아직 어둡지도 않은데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4월인데 때 아닌 소나기가 쏟아진 저녁때였다. 남쪽 하늘엔 아름다운 무지개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저 무지개 있는 쪽이 선생님이 가실 섬이에요. 오늘 무사히 갈 수 있다는 길조예요.”
그네의 마음씨가 저 무지갯빛같이 곱다고 여겨졌다.
“전 무지개를 볼 때마다 선생님 생각하겠어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서 떠날 때 어머니께서 주신 명주와 금붙이를 바랑에서 꺼냈다. 그네가 사양하는 것을 억지로 고마움의 정표로 떠맡겼다. 금붙이 속에는 반지가 하나 있어 그네 손에 끼워 주었다. 나의 손도 떨렸지만, 그네의 손도 떨렸다. 그네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 고개를 돌렸다. 그날 밤에 나는 그네의 뒤를 따라 괴뢰군의 초소를 피해 가며 밤새도록 걸어 새벽녘에야 목적지인 섬에 닿을 수 있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그네였다.
겨울 바다 위에 서 있는 저 겨울 무지개의 미세한 물방울엔 그네의 눈물이 섞여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려 왔다. 지금도 무지개를 보면, 20여 년이 흐른 오늘에도 그네와 함께 보던 봄 무지개와 더불어 그네의 모습이 떠올라 나를 사로잡는다.
그네는 아직도 시집을 가지 않은 채 무지개를 바라보는 스무 살 처녀 같이만 여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서정범(徐廷範, 1926~ 2009)은 대한민국의 대학교수이며, 시인·국문학자·수필가·민속학 자·무속연구가·사회학자·철학자였다. 1958년 자유문학으로 문단에 등단, '병상기(病床記)' 와 '미리내' 등 많은 수필을 발표했고, 모교인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