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 황도학회 발기인
1941 이후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연사
1945 건국부녀동맹 부위원장 선출 이후 각종 여성단체 활동에 앞장섬
1950 제2대 국회의원
1955 민주당 창당 참여, 1956 민주당 최고의원
1967 신민당 전국구 의원
● 아무도 나를 시비할 사람이 없다
가정에서는 한 남자의 부인이며 7남매의 어머니로서, 여성계에서는 대표적인 지식인 여성으로, 정계에서는 치마를 두른 야당 투사로서 기억되고 있는 박순천은 우리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남긴 인물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반생을 오로지 구국운동에 몸바쳐 온 박순천 여사의 일관된 정치행적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애족헌장(愛族憲章)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여사의 생애는 ‘참’을 위하여 ‘민(民)’을 위하여 싸워온 나날들이었다. 치마 두른 청기사(靑騎士)로서 한결같이 살아온 ...." 등이 박순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들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참’과 ‘민’을 위해 살아왔다고 하는 그녀의 정치행적이 과연 박순천 생애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1971년 월간 『다리』에 실린 그녀의 글 「내가 걸어온 야당 사반세기」 제1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동안 무슨 일을 당할 때면 어떻게 처신할까 하고 내심으로는 늘 스스로를 경계해 왔다. 그런데 요즘은 내 전생(全生)이 얼마 안남아서인지 도시 무서울 게 없고...... 아무도 나를 시비할 사람이 없다. 매스컴 계통의 사람을 내놓고는 두려워할 대상이 따로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요즘 세간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리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기막힌 역사적 증언’을 들먹이며 이에 관여했던 박순천의 행적을 꼬집어 말하지 않더라도 ‘일제 침략 이후 비참하게 일그러져 온 역사’ 앞에 박순천처럼 두려움없이 당당하게 설 사람이 오늘날 이 사회에 몇 명이나 될까? 그녀는 정말 아무도 ‘시비’할 사람이 없을 만큼 오로지 구국운동에 몸바쳐 살아왔는가?
● 일경 도피 생활중에 얻은 ‘순천댁’이라는 가명
박순천은 1898년 9월 10일 경남 동래의 기장(機張)이란 해안촌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명련(命連)이었다. 아버지 박재형(朴在衡)과 어머니 김춘열(金春烈)의 무남독녀로 자라난 그녀의 소녀시절은 그 누구보다도 다복했으며 열 살 때에 기독교에 입교했다. 1917년 부산진(동래) 일신(日新)여학교를 졸업한 뒤에 마산에 있던 의신(義信)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던 이갑성(李甲成)과 연결되어 마산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일주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경을 피해 도피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그때 ‘순천댁’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이 그뒤 박순천으로 세인의 입에 굳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19년 가을, 일본 여자로 변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요시오카 여자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몇 달을 못다니고 3.1운동 당시의 ‘보안법’ 위반 혐의로 다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때 마산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출감 후 박순천은 항공사에 뜻을 두고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26년 일본여자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 3학년 재학 당시(28세) 같은 동경 유학생이던 변희용(卞熙容)과 결혼하였다. 대학을 마치고 시집인 경북 고령군으로 돌아와서는 남편과 더불어 야학을 일으키고 12년 동안 농촌계몽사업에 이바지했다.
그후 일제의 황민화운동이 노골화되면서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신사(神社)를 짓기 시작할 때에 박순천 일가는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1936년의 일이었다. 고향을 떠나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점차 더해 가는 일경의 탄압을 피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장남의 취학을 위해서였다.
서울로 오기 직전까지 박순천의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궁색한 것도 아니었다. 비타협적인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민족 문제’ ‘계급 문제’에 대한 치열함은 부족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계몽적이기는 하나 일제에 저항하려는 민족적 성향은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 친일행위로의 첫발
서울로 올라온 박순천 일가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져갔다. 뚜렷한 수입이 없던 그녀의 집안에 현실적인 생활고가 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박순천은 당시 박정근(朴定根)이 경영하던 금강견구공장의 여공감(女工監)으로 취직하여 1년 동안 일제하 가장 열악했던 여성근로 현장에 있기도 했다. 그러나 여공감으로서의 그녀의 경험이 여성운동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거나 새로운 자각을 일깨우지는 못했다. 그녀는 가정을 꾸리기 위해 직장생활을 했을 뿐 비참한 여공들의 생존권 투쟁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관심을 가진 여성 계몽이란 당시의 상황에서 가능했던 교육받은 신여성들의 자유주의적 여권론이었지 계급 문제로 인식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1940년 박순천은 어떠한 경로에 의해서였던지 지금의 중앙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京城家庭義塾)의 설립을 위하여 현해탄을 건넜다. ‘경성가정의숙’은 이 왕가(李王家)의 소유 건물이었기 때문에 동경에서 박순천은 이우공(李偶公)을 만나 여학교 설립의 뜻을 밝히고 그의 집을 빌리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그해 10월 10일 신입생 37명으로 ‘여성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경성가정의숙이 황신덕(黃信德)을 교장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학교가 문을 여는 바로 그때부터 박순천은 해방까지 수년을 교원, 또는 부교장, 때로는 서무직의 일을 맡아보며 경성가정의숙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여성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한 경성가정의숙에 참여하면서부터 그 목적과는 반대로 이때부터 박순천의 행적에는 중대한 변화가 생겨났다.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을 위해, 여성을 위해, 구국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아니라 이 시절부터 ‘친일 행위에 동조하는’ 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명 시절 박순천의 활동은 민족적이었고 높이 평가할 만했지만 여성 교육자로 유명해지고 나서부터의 활동은 점차 ‘친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 각종 친일 단체에 관여하며 시국 강연 연사로
경성의숙의 중책을 맡으면서 박순천의 친일 행적은 총독부 기관지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우선 그녀는 1940년 12월 15일 서울 부민관에서 황도사상의 실천 보급을 목적으로 결성된 황도학회(皇道學會)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이 조직은 발기인으로 각계 인사 46명이 참가한 한인, 일인의 통합 조직이었다. 이른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였던 이 단체는 첫째 황도사상의 학습, 둘째 황도정신의 보급, 셋째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 등을 실천 방책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회원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황도강습회’ 등을 개최하였다. 그녀도 1941년 1월 14일 이후 매일 2시간씩 주 4일 개강으로 대화숙에서 개최하는 황도강습회에 참가하는 활동 실적을 남겼다.
1936년 일제가 여러 곳에 신사를 지을 때 그것을 피해 고향을 나왔다던 박순천으로서는 실로 엄청난 자기 변신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자기 아닌 ‘남’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장려하는 강연회를 맡아 앞장서게 되었으니 말이다.
1941년 12월 27일부터는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에 연사로 출강하기 시작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 10월 22일에 조직된 친일단체였다. 이 단체는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에서 전쟁 협력을 목적으로 하였다. 1941년 12월 27일에 결전부인대회〔장소는 부민관, 연사는 김활란(金活蘭), 모윤숙(毛允淑), 박순천, 박인덕, 임숙재, 임효정, 최정희, 허하백(許河伯) 등 여류인사 8명 참가〕등을 개최함으로써 군수자재 헌납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42년 2월부터는 산하단체인 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로 근로보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부녀층을 광범위하게 동원하여 군복수리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박순천은 이러한 임전보국단 사업에 적극 참여, 1941년 12월 27일에는 <국방가정>이라는 제목으로, 1942년 1월 24일에는 <전황뉴스를 듣고>라는 제목으로 방송 강연을 했고, 급기야 1942년 1월 5일에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에는 황신덕과 함께 지도위원으로 참가했다.
이렇게 전쟁이 장기체제에 돌입하면서 부녀자 및 여학생들을 동원하는 친일단체 활동에 가담했던 당시 박순천의 사상적 경향은 1941년 『춘추』 7월호에 발표한 시국 논문 「조선의 남편과 아버지에게 소(訴)함」이라는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녀가 보인 여성에 대한 관심이란 ‘봉건적인 인습 타파와 금연, 금주를 통한 자기 각성을 이룬 남편들이 이루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가정생활 속에서 해결될 수 있는 부녀자의 문제나 자녀교육 문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정상적으로 안정된 사회가 아니라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한층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일제라는 틀 속에서’ 안주할 수 있는 개인주의적 가정생활의 도덕적 가치만을 내세웠던 것이다〔원래 『춘추』는 『동아일보』와 『신동아』가 발간되자 그 전통을 간접적으로 이었다고 할 수 있게 동아의 가병(佳兵)이던 양재하(梁在厦)의 주재로 창간되어 적극적인 친일은 피한다고 노력했으나 결국은 전쟁협력 내선일체화 운동의 잡지가 되고 말았다〕.
● 제자를 정신대로
일제는 1941년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 발발 이후 전선의 동남아 확대와 더불어 그해 8월 23일 후생성령으로 ‘여성정신근로령’을 공포한 뒤 12~40세의 배우자가 없는 여성들을 근로 정신대 및 종군위안부로 징집, 군수 공장이나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1943~1944년 전쟁 말기에 이른 일본의 발악은 학원에도 파고들어 학생들은 공부보다도 근로봉사를 매일의 일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학교마다 두 명을 정신대로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만일 정신대원을 보내지 않으면 학교를 폐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경성의숙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43년 3월경 황신덕 교장이 전교생을 모아놓은 조회에서 “우리 학교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여러분들 중 한 명이라도 정신대에 지원하면 학교가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박순천 부교장도 비슷한 말로 호소했지만 지원 학생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되는 교장의 호소에 따라 “내 한 몸 희생해서 학교를 구하자”는 생각으로 교장실 문을 두드린 학생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김금진 할머니였다. 김 할머니는 1992년 6월 5일자 『뉴스메이커』 지와의 인터뷰에서 2학년 재학 당시 18세의 나이로 ‘교장 부교장’의 말만 믿고 정신대에 나가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술회를 하고 있다.
해방이 되고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국어를 가르쳤던 김일순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군요. 그때 김 선생님은 경성의숙의 후신이 된 중앙여고를 그만두고 동아일보 기자로 있었는데 내게 “그때 네가 정신대 간다 해도 학교에서 못 가게 했어야 했는데 괜한 아이 병신 만들고 ...... 황신덕과 박순천이 참 몹쓸 짓을 했다. 나라도 몰래 말해 줬어야 했는데 내 책임도 크다” 라며 눈물을 글썽거리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나도 여러모로 알아 봤어요.
김 할머니의 이렇게 한맺힌 사연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일제하 정신대 진상 규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겨우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즉 경성의숙에서 정신대에 학생을 보내게 된 경위는 지난 1970년 9월 발행된 《중앙여고 30년사》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저명한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지도자요 여성 교육자이며 탁월한 정치 지도자’였던 박순천은 말이 없다. 생전에 그 숱한 ‘여성론’을 쓰면서 여성운동에 뜻을 두고 살았으며 정치마저도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했다는 박순천이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일제의 의해 유린된 ‘한국 여성’의 역사적 상처를 밝히고 여기에 가담했던 자신의 과거를 참회했다는 기록을 찾아낼 수 없다.
한 개인에게 평생에 맺힐 한이 될 ‘정신대’에 제자를 보낸 덕분에 경성가정의숙은 폐쇄를 당하지도 않았으며 1945년 1월에는 사립학교 규정에 따라 정식으로 ‘중앙여자 상과학교’로 인가까지 받게 된다. 박순천은 이렇게 살아 남은 학교의 부교장으로 해방을 맞았다.
● 해방 후 적극적으로 우익 여성운동에 투신
급박하게 맞은 혼란된 해방정국 속에서도 일제하부터 조직적인 연계를 맺고 싸워왔던 여성 운동가들은 8월 16일 30여명이 모여 건국부녀동맹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부녀운동의 막을 열었다. 여기에서 황신덕, 박순천, 유각경(兪珏卿), 허하백, 박승호 등 5명의 전형위원이 선출되고 17일 발기총회가 열림으로써 ‘건국부녀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박순천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는데 이것이 그녀를 ‘오늘날의 박순천’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8.15 직후부터 각종 여성단체 활동에 앞서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건국부녀동맹은 일제하의 경력을 떠나 교육계, 종교계,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각계 각층의 여성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건국부녀동맹 간부들의 개인적 경력을 살펴보면 일제하 근우회에서 활동했던 사람(유영준, 황신덕, 조원숙, 김순실, 황애덕, 유각경, 김선 등), 사회주의 여성활동을 하던 사람(조원숙, 김순실, 정칠성, 심금옥), 건국동맹에서 활동하던 사람 (여란구, 전영애, 이각경), 이외에도 일제 말기 친일경력을 가진 사람들(허화백, 황신덕, 유각경, 김선, 박순천, 박승호)까지 가담함으로써 이데올로기와 일제하 경력을 떠나 통일전선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건국부녀동맹은 바로 그 구성원들의 ‘다양성’으로 인해 통일된 노선을 정립하지 못하고 결성된 지 한달도 못되어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분열의 시초는 일부 우익 이데올로기를 가진 여성들이(유각경, 박봉애, 김선 등) 탈퇴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박순천, 황신덕 등 나머지 사람들도 1945년 12월 8일 건국부녀동맹을 탈퇴하자 해방 직후 가능했던 통일전선적 여성운동은 완전히 좌우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열 되고 말았다. 탈퇴자들은 "건국동맹의 회원들 대부분이 순수한 여성운동보다는 좌익 계열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탈퇴하고 말았다(『동아일보』, 1945년 12월 8일자)" 고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그들은 거의 일제하 친일 경력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이 해방 후 그들의 생존과 활동방향에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 독립촉성중앙부인단의 결성
1945년 12월 23일 신탁통치안의 발표로 여성운동계도 들끓게 되었다. 그 첫 움직임은 1946년 1월 1일 우익 여성들의 반탁 결의대회로 시작되었다. 반탁운동을 하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결성된 우익 여성단체가 ‘독립촉성중앙부인단’이었다. 1월 9일 YWCA(기독교여자청년회)에서 창립대회가 있었고 초대 회장에 황기성, 부단장에는 박순천이 당선되었다.
이때부터 박순천은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반탁 국민대회에 참가할 뿐 아니라 반탁을 주장하는 부녀 시국강연회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미군정청 앞에서 탁치 절대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이때부터 그녀는 다른 독립촉성중앙부인단 간부들과 함께 비상국민회 주비회,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준비위원회, 독립금헌성회 등 우익 진영에서 주도하는 각종 정치모임에 여성 대표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반탁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건국부녀동맹에서 탈퇴한 이후 좌익계 여성운동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던 우익계 여성운동은 독립촉성중앙부인단의 결성과 다시 한국부인회와의 결합으로 1946년 6월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결성함으로써 우익 여성계의 전열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결성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 남한의 우익을 통합하여 그 세력을 늘려보자는 미군정의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구할 수 있다. 좌익의 조직적인 대응에 밀린 미군정으로서는 비록 ‘친일계’ 인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우익 여성들의 조직화를 적극 후원했던 것이다. 이후 독립촉성애국부인회는 미군정의 호응을 받고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를 비롯한 우익 정치진영과 긴밀히 밀착되어 1949년 관제 서울시 애국부인회와 통합하여 ‘대한부인회’로 개편될 때까지 남한의 대표적인 우익 여성단체로 활동하게 되었다.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서도 박순천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부인회는 1947년까지도 서울과 지방도시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기관지였던 『부인신보』 1947년 12월 28일자 실린 여성계 동향에 관한 기사에서 “오직 수고하신 분은 대표 몇 분일 뿐이요 일반 책임자들은 그 책임을 이행해 본 적이 없다”는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활동은 그 구성원의 성격상 뻔한 이치였다. 즉 당시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주요 간부들의 일반적인 특성을 보면 첫째, 일제하에서 여성운동에 참가했던 인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대부분 민족해방과는 별도로 개량적인 여성운동을 주장하던 이들로 결국 일제 말에 이르러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친일행각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이들 중 대부분은 기독교 신자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이들이 견지하는 운동노선이 일제하부터 내려온 기독교 여성운동의 특성인 교육 계몽, 문화운동의 노선을 띠게 되는 영향을 미치어 거의 노동자와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해방 당시 민중 여성운동 계층의 참여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서 움직이고 있던 여성들은 거의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여성이나 중산층 이상의 가정 주부들이었다. 셋째, 그들 스스로의 출신 성분 및 계급 성분이 대체로 지주계급이나 부농 출신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부모나 남편들 역시 개화된 지식인으로 해방 후 정부 수립 이후에도 어떤 경로로든 고급관리나 고위직을 지낸 이들이 많았다. 박순천의 경우에도 남편 변희용이 성균관대학 총장을 역임할 정도였다. 넷째, 그들은 거의 대다수가 대졸 이상의 인텔리로 주로 일본이나 미국에 유학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구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에 대한 선망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사상을 보편적으로 한국 여성들에게 부과하고자 했다(박순천, 「정치운동과 부인운동」, 『신세계』, 1956년 2월호).
바로 이러한 점들이 친일잔재의 척결이 제일의 과제로 부각되던 해방 직후 이들의 활동의 방향성 및 우익 일변도의 행동거취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해방 이후 일본을 대신해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에 대한 반미 감정은 전혀 없었으며 미국을 제국주의로 인식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우방이며 조선을 구원해 준 은혜의 나라였다. 이것은 그들에 의해 추진되던 ‘단정’ 수립운동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다. 또한 그 당시 주요한 과제였던 토지 문제나 친일파처단 문제에 대해서도 강령이나 선언문뿐 아니라 그 외 다른 지면을 통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일제 말기 친일로 전락했던 여류 명사들이 해방 이후 우익 여성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한 데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단정수립운동에 매진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정국은 미국과 이승만의 의도대로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를 통한 단독정부(이하 단정) 수립의 길로 가고 있었다 이에 여성단체들의 관심 및 활동도 단정 수립과 관련된 문제로 집중되었다.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비롯한 우익 여성단체가 총망라하여 결집한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이하 여총, 1946년 11월 15일 결성)’ 은 단선 및 단정에 적극적인 참여를 표방하였다. 총선거 촉구 강연회 개최, 선거법에 대한 상세한 해설 강연을 하거나 라디오 방송을 하는 등 선거참여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특히 박순천, 김활란, 박승호를 비롯한 18명의 우익 여성 지도자들은 ‘처음으로 여성에게 주어진 선거권의 적극 활용’이라는 표면상의 이유로 직접 총선거에 입후보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고 분단을 기정사실화 하는 행동이었다.
특히 모윤숙은 당시 유엔 한국위원단 대표 메논 박사를 이화장으로 납치(?)하는가 하면 박순천, 박승호 등 여성 대표들은 거의 매일같이 대화를 나누면서 메논을 위시한 유엔 대표들을 주무르며 이 박사의 의도대로 단정 수립을 추진하도록 일을 꾸미는 데 적극 동조하였다. 이렇게 매일같이 접촉하면서 얻게 된 박순천과 메논과의 친분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모윤숙과 박순천이 피살되었다는 와전된 소식이 메논에게 전해졌을 때 선뜻 그가 이들의 가족을 돕겠다고 하는 연락을 보내왔었다는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 드디어 여성 정치가로 성공했으나
5.10선거에 입후보하여 입법기구를 통한 여성의 지위향상을 도모했던 박순천을 비롯하여 18명의 여류 인사들의 꿈은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노선을 적극 지지한 덕분에 이들은 8월 15일 이후 정부 조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박순천은 (초대)감찰위원이 되었으며 1949년에는 국민회 중앙총본부 부위원장과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역임했으며 1948년 『부인신문』을 창간, 사장으로 5년 동안 활약하였다. 특히 정부 수립 이후 여성운동의 독립적인 지위를 향유하면서 이후 한국 여성단체의 관제적 성격을 결정짓는 데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대한부인회’ 회장에 부임해서 6년 동안 재직하였다.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바로 이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종로갑구에서 출마, 드디어 2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그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되었는데 90일 가까운 나날을 본인의 표현대로 ‘적(赤) 치하’에 있으면서 바로 그 적의 보호를 받았으며 그의 가족과 더불어 무사할 수 있었다. 서울 수복 이후 국회에서 논의된 ‘부역자’문제에서도 국회의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적극적인 부역활동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면 민(民)이 부여해 준 신분 때문에 살아 남고 부역에서도 면죄받을 수 있었을 90일의 기간동안 타의에 의해 부역할 수밖에 없었던 서울 시민들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피난하지 않은 이유를 한 가닥 양심에 비추며 “서울 출신의 국회의원인 내가 유권자들을 그냥 버려 두고 피난을 떠날 수는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했다던 그녀가 바로 그녀 자신과 함께 살아남아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부역자처리 문제에서 보여준 관대함이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역사가 남겨 놓은 미완의 해답
그후 박순천은 서로 다른 정치적 신념으로 인하여 믿고 따르던 이승만과 결별, 자유당 정권과 투쟁하면서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된 이래 계속 야당 국회의원의 자리를 지켜왔다. 제 4,5,6대 국회의원, 제3공화국 시기에 민주당 총재를 역임했으며 1965년에는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당수가 되었다. 1967년 다시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고 정계를 은퇴한 뒤 경기도 안양 근명학교 이사장을 지내는 등 여성 교육에 관여하면서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1983년 세상을 떠났다. 쉬지 않고 달려온 역경의 세월이었다.
이 글은 박순천 스스로 던진 문제 즉 시비(是非)의 문제로 시작했었다. 이 글이 그녀에 대한 ‘시비’를 문제삼으려 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혀 둔다. 일제하에 저지른 친일행위와 해방 후 정부 수립기의 반민족행위 때문에 자유당 정권 이후 야당 국회의원으로서 한국 정치의 민주화에 기여해온 그녀의 공헌,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모든 기억과 행적들이 거짓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전에 고인은 빼앗긴 조국을, 두동강이 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왜곡된 역사 속에서 걸어왔던 자신의 삶을 역사 앞에 진솔하게 참회해 본 적이 없다. 박순천의 기억 속에 일제하는 3.1운동만이, 해방정국은 ‘반공’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 속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들은 모두 망각 속에 덮어 버렸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시비’에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역사는 결단코 호락호락 넘어가는 일이 없다는 것을, 그 속에서 ‘진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