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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징 스님과 통거사
굉철(강윤철, 중국 연변)
1) 한국에서 통역을 맡게 된 사연
나는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 태어나 농업대학을 나와 용정시 특산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1983년부터 KBS텔레비전에서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라는 프로그램으로 대대적인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 가족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내 아내의 친삼촌이 한국에 계셔서 서로 알게 되었고 연락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989년 그 삼촌 되시는 분이 우리 집을 찾아오셔서 한 달간 머물다 가신 뒤 우리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하였다. 당시 한국으로 직접 오는 비행기가 없기 때문에 일본을 거쳐서 왔는데, 삼촌이 잘 아시는 분이 일본에 계셔서 일본 구경까지 하였다. 그 뒤 나와 처형은 평창동에 있는 그 삼촌 집에서 가사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관징 스님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아내의 숙모이신 조상락(법명: 상락선)보살 때문이었다. 상락선 보살은 불교를 열심히 믿어 많은 스님들과 친분이 있으나 나는 불교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중국에서 공무원으로 있던 나는 종교적 믿음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서 사회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대부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97년 3월 9일, 상락선 보살이 말씀하셨다.
“강서방, 능인선원에 중국에서 오신 스님이 오셔서 법문을 한다는데 함께 가서 들어보자.”
나는 불교 자체를 좋아서라기보다는 집에서 일하는 것보다 좋고, 또 오랜만에 중국에서 오신 분이 법문을 하신다니 따라 나섰다. 능인선원에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들어갈 때 모든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었다. 관징 스님은 강한 복건성 사투리로 법문을 하시는데 통역을 맡은 여자 분이 차트를 넘기며 주로 차트에 적힌 내용 위주로 통역하고 있었다.
법회가 끝나자 많은 대중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가운데 길을 내어 드리자, 관징 스님이 나오시고 그곳에 참석하셨던 7명의 스님이 뒤따라 나왔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법문 잘 들었습니다.’하는 마음으로 상락선 보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줄에 서 있었는데, 우리 앞을 지나가시던 관징 스님이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시고 보고 또 보고 하시더니 중국말로 물었다.
“너 왜 여기 와 있는가?”
나는 속으로 ‘웃기는 일이다. 나를 언제 보았다고 아는 척을 하지?’라고 한국말로 두런두런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일 구룡사에서 전법하는데 꼭 오너라.”
사실 연변에서 관징 스님이 계시는 복건성까지 가려면 기차를 여러 번 바꾸어 타면서 일주일은 가야 하는 먼 거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징 스님이 나를 알아보고 내일 법회에 오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상락선 보살에게 말씀 드렸다.
“큰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가 봐야지, 유기사 내일 강서방 구룡사까지 모셔 드려라.”
그래서 다음날 유기사와 함께 구룡사에 갔다. 내용은 이미 어제 들었던 것이고, 크게 흥미도 없어서 유기사와 뒤에서 놀다가 법회가 끝나 관징 스님이 나오실 때 뒤에 서 있었더니 스님은 미국 . 중국 . 싱가포르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써 주시며 내 연락처를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일하고 있는 상락선 보살 집 전화번호를 적어 드렸다. 다음날 ‘부석사로 간다’고 전화를 하셨고, 옮기실 때마다 전화를 주시더니, 중국으로 떠난다고 하시며 또 전화를 하셨다. 상락선 보살이 공항에 나가보라고 했으나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가지 않았다.
다음 해인 1998년 8월, 정원에서 나무를 전지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고 해서 받아보니 관징 큰스님이었다.
“군위 압곡사 자해 스님이 나를 초청했는데, 네가 가서 몇 개 절에서 초청하고 준비상황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아라. 이틀 뒤에 한국에 도착할 것이다.”
상락선 보살에게 말씀드렸더니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라고 하였다. 8월 15일 당시는 흔하지 않은 외제차를 가지고 상락선 보살과 함께 김포공항에 가서 모시고 평창동으로 와 공양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상락선 보살과 함께 스님을 압곡사에 모셔다 드렸다. 우리가 절에서 다시 서울로 떠나려 하자 관징 큰스님이 “강거사는 안 가면 안 되니?”하고 나를 붙잡으셨다. 상락선 보살이“스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라.”고 하여 이때부터 큰스님을 모시고 통역을 하게 되었다.
2) 한국에서 만난 난관을 넘어서
(1) 그렇다면 한 번 해보자.
1997년 관징 스님이 처음 왔을 때 대구의 한 호텔에서 그 지역 원로 스님들과 모임을 가졌다. 22명의 큰스님이 모였는데 대부분 각 종단의 종정을 비롯하여 유명한 스님들이었다. 그 때는 초창기라 최안지 씨가 통역을 했는데 나는 옆에 서서 열심히 듣기만 했다.
관징 스님이 극락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정토선 수행법을 설명하자 대부분 화두선을 하는 스님들은 이에 아주 비판적인 공격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에서는 염불이란 근기가 낮은 사람이 하는 수행법이다.”
“우리는 참선을 한다.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다.”
처음에는 공격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답을 해 나갔으나, 참석자들의 공격이 그치지를 않고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 관징 스님께서 결심하시고 참석한 스님들께 말씀하셨다.
“그러면 좋습니다. 나도 허운 화상으로부터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수행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30여년의 선수행을 통해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염불을 통해서 번뇌를 완전히 벗어나 무념상태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논란만 벌일 것이 아니라 서로 어느 정도 경계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 염불을 통해 선정에 들어가 7일 동안 꼼짝도 않고 일어서지 않겠습니다. 여기 선을 많이 하신 대선사들이 많이 계시니 여러분이 닦은 수행법을 통해서 저보다 더 우월한 수행력을 보이실 분은 나서 보십시오.”
이처럼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관징 스님의 사자후에 아무도 나서는 스님이 없었다. 실제 관징 스님이 법회 하러 가는 곳에는 이처럼 선승들이 나타나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았다.
강원도 철원 심원사에서 법회를 할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관징 스님에게 천도재와 마정수기를 부탁하기 위해 모셨는데도 그곳 주지 스님을 비롯하여 몇몇 스님이 말끝마다 염불이란 하열한 사람들이 하는 수행법이라며 무시하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도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네 수행법이 옳다’ ‘내 수행법이 옳다‘고 논란만 하지 말고 당신들은 참선법으로, 나는 염불법으로 5일 동안 선정에 들어가서 어떤 수행법이 더 수승한 것인지 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선언하자 그 스님들은 결국 관징 스님의 도력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큰스님 자신이 7일간이나 5일간 선정에 자신이 없는데 엄포를 놓았고, 한국의 선승이 일주일간 선정에 들어가는 경계에 있는 스님이 있었다면 관정 스님의 한국 전법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주일 선정에 드는 것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에서는 그 장면을 비디오로 찍었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참 아쉽다.
(2) 내가 법을 전하러 다니느냐? 돈을 모으러 다니느냐?
앞에서 잠깐 보았지만 본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 이다. 그리고 이때까지 가장 열심히 스님을 모시고 도왔던 절이 군위 압곡사이다. 당시 압곡사의 자해 스님은 누구보다 구도정신이 강해 극락 다녀온 관징 스님을 정말 스승으로 모시고 하나라도 더 배우고 모든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압곡사 사무장이 관징 스님의 도력이 완전히 가짜라고 들고 나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언제부터인가 관징 스님이 한국에 와서 법회를 할 때는 천도재와 마정수기라는 두 가지 행사를 하게 된다. 문제는 천도재에서 생겼다. 천도재를 마치고 참석한 가족과 신도들에게 영가가 어디에 태어났는가를 이야기 해주는 시간이 있다. 보기를 들면, “이 영가는 하늘나라 도리천에 태어났다.” “이 영가는 하늘나라 도솔천에 태어났다.”하는 식으로 발표를 하면 참석자들이 환희심을 가지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 때 봉투를 불에 그슬리면 거기에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파라핀으로 글씨를 쓰면 보이지 않다가 불기에 닿으면 글씨가 나타나는 아주 초보적인 수법으로, 이것이 사기라는 것이다. 그 뒤 압곡사 사무장은 지금까지의 태도와 완전히 달라져, 관징 스님을 초청하는 절에 하나하나 전화해서 “이런 사기수법으로 신도들을 속여 인기를 얻으려 했다”며, 법회를 취소하도록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고 한다. 찾아가는 스님들에게 그 글씨와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보여주면서 온 힘을 다해 “관징 스님은 도력이 없고, 오로지 돈만 벌러 다닌다.”고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 문제가 터졌을 때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전하러 다니느냐? 돈을 모으러 다니느냐? 책에도 있지 않느냐! 내가 만일 돈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 법을 전하기 위해 왔고, 이제는 시작하는 단계인데 그런 짓을 한다면 뒷수습은 누가 하느냐? 잘 생각해 보아라. 내가 그런 짓을 해야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관징 스님은 초를 가지고 글씨를 쓰고 그 초 위에 재를 뿌리고 흔들면 글씨에 재가 묻어나면서 글씨가 나타나는 방법을 안다고 하셨다. 그러나 천도재에서 그런 잔재주를 가지고 몇 번이나 하겠느냐고 되물으셨다. 나는 그 동안 관징 스님과 늘 함께 하면서 큰스님의 도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기 때문에 굳이 구차스럽게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굳건하게 믿는다. 또 관징 큰스님이 그런 것을 하려면 천도재를 하기 전 미리 준비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반드시 나에게는 말씀하셔 함께 해야 하지만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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