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비결 3
"안녕하셨는지요, 스님."
"아니, 이렇게 먼 길을.
그래 화담 선생은안녕하시고요?"
"세상을 뜨신 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지족은 이미 이가 빠졌는지 아래턱이 위턱에
바짝붙어 있었다.
얼굴에는 이미 검버섯이 피어나
표정이잘 드러나지 않을 정도였다.
"저, 혹시 북창을 아십니까?"
토정은 북창이 이승을 떠나가면서
'지족이 기다리고있다'고 한 말이 궁금해 물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사람이 교감을 한 것인가,
그렇다면 지족은 토정에게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것인가
또한 짐작이 가지않았던 것이다.
"북창이라면, 도가 수련을 하는 그이 말씀이오?"
"예, 그러합니다."
"이름이야 전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지만
만나본적은 없소."
지족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면 무슨뜻에서
북창은 토정을 지족에게 보낸 것일까?
알 수없는 일이었다.
"참, 소개가 늦었습니다."
토정은 말머리를 바꾸어 지족에게 정휴를 소개했다.
지족 또한 자신의 상좌에게 토정과 정휴에게
인사를하도록 분부했다.
그러자 수좌는 합장을 하면서고개를 숙였다.
"소승 현수(玄首)라고 합니다."
천천히 머리를 쳐든 현수 상좌는
토정과 눈이마주치자 무엇엔가 깜짝 놀란 듯
다시 고개를 떨구고시선을 피했다.
신당에서 도망치듯 나와 사라졌던 그소년이었다.
비록 어둠 속에서 본 모습이었지만
토정은 그를 이내 알아볼 수 있었다.
정휴도 알아차린듯했다.
지족은 토정과 정휴를 승방으로 안내했다.
지족은 현수 상좌에게 일러 찻물을 데워오도록시켰다.
토정은 천불천탑을 묻고 싶었지만
지족이먼저 얘기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토정은 두무지의 이야기를 전하고싶었던 것이다.
이런 토정의 눈치를 읽은 정휴가 실례를 무릅쓰고
지족 선사에게 말을 붙였다.
"저, 선사께서 쌓으시던 천불천탑은
어찌중지되었는지요?"
그러자 지족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아마도 그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상좌가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상좌가 다기를내어 씻고 찻물을 우려내는 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않았다.
"한번 더 데우거라."
상좌가 뜨거운 물로 한번씩 더 찻잔을 덥히자
보고있던 지족이 한마디 일렀다.
그러자 상좌는 다시 한번
찻물을 찻잔에 돌아가며 붓고는
다시 찻주전자에따랐다.
"내가 애비 노릇까지 하며 데리고 있는 아이요."
상좌는 찻잔을 차례로 돌렸다.
토정과 정휴는찻잔을 입술에 대고 향기를 맡으며
조금씩 목 안으로넘겼다.
지족은 찻잔을 입에 대고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다가는
조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천불천탑을 쌓을 재목이 못 되오.
나무꾼만한 신심도 없소. 그래서 그만두었소.
나무꾼이마지막으로 조각한 모자불도
일으킬 재주가 없소.
그모자불이 일어서면 이 나라에 미륵이 오신다고 했는데
도무지 일으킬 수가 없었소.
이제는 힘도 없소.
그래서 이 녀석을 들였는데
신심 없기로는 나하고 도토리 키재기요.
녀석, 밤마다 어딜쏘다니는지…
선기도 뿌리가 깊지 못하고 공부도짧아서
미륵을 모실 그릇이 못 되는 것 같구려."
상좌는 자기 이야기가 지족의 입에서 거칠게흘러나오자
얼른 다기를 수습하여 방에서 물러났다.
토정은 뭔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상좌를 돌아본 후
곧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그러면 누가 천불천탑을 마저 쌓는단 말씀입니까?
스님께서 이미 연로하시니
이 일을 앞으로 어떻게하실 작정이십니까?
이 일은 국가 대사입니다."
토정의 국가 대사라는 말에 정휴의 귀가 번쩍했다.
그러나 지족은 태연히 말을 받았다.
"미륵은 국가 대사 같은 것으로 움직이지 않는다오.
중생이 다 죽는다 해도 움직이지 않소."
지족은 밤늦도록 가슴 속에 맺힌 말을 죄다풀어놓았다.
그러나 토정은 두무지에 대해서는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지족은 거짓말처럼 조용히 입적했다.
상좌 현수는 금강경과 열반경을 독송하면서
영가를천도하기에 바빴다.
정휴는 상좌를 대신해서
장작을패서 법당 앞에 높다랗게 쌓았다.
정휴가 한참 장작을 쌓고 있을 때 토정이 오더니
처음부터 다시 쌓으라고 일렀다.
기왕 쌓는 것 목탑으로 쌓게나.
정성을 들여 쌓으면 될 것일세."
그래서 정휴는 맨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기단을만들고
장작을 조심스럽게 쌓아올렸다.
그리고 그중간에 상대석을 올려놓은 것처럼 탑신을 받치고
그사이에 시신을 뉘었다.
다음날 정오,
상좌 현수가 다시 한번 극락 왕생을비는 염불을 한 뒤에
토정이 불을 당겼다.
서서히오르던 불길은 금세 지족의 시신을 한입에 삼킬 듯이
기세 좋게 치솟았다.
북창은 무엇 때문에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일까?'
토정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북창의 속뜻을헤아려보았다.
지족 선사의 임종을 지키라는 뜻이었을까?'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도무지 짐작이 가질않았다.
"형님,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함께 불길을 지켜보고 있던 정휴가 토정에게물었다.
정휴는 그것이 궁금했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그것이.
물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은 적이 있긴했다.
온 곳으로 간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온데가 있으니 갈 데가 있는 것 아닌가.
정휴가 아는 바로는 이런 질문에
스님들은 이렇게문답을 했었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는 어디에있었느냐?
가기는 어디를 가는가? 지금 죽었지 않은가?
난죽었다는 말밖에는 모른다네.
그런 희망은 절에나가서 가지도록 하게."
죽으면 극락에도 가고 지옥에도 간다잖습니까?"
정휴가 재차 물었으나 토정은 냉담하게 말했다.
"그건 누가 지어낸 허깨비 소리란 말인가?
나도 그말을 들어 알기는 하나,
그건 상상의 세계에 지나지않는 거라네.
극락에 가본 사람이라도 있고,
지옥에가본 사람이라도 있다던가?
다 사람 머리에서 나온허상에 지나지 않으니
너무 깊이 생각 말게.
사람이라는 게 하도 영악스러워서
죽어도 죽지않으려고 별별 거짓을 꾸며 스스로 믿는다네.
스스로위안을 받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짐짓 꾸며낸말일 뿐일세.
어디 죽은 사람이 살아오던가?
죽으면 다 그뿐이라네.
그것은 그대가 아무리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제는 안 되는 것과 같다네.
하기사 이 세상 사람 치고 그런 말을 진짜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니 나무랄 일도 아닐세.
나 역시그런 말을 믿고 싶은 생각은 똑같다네."
"그러나 형님, 화담 선생님은 현신까지
하셨잖습니까?"
"난 불가에서 이미 정해 놓은
사후 세계를 경계해서하는 말이네.
한번 더 생각해보란 뜻일세."
"그래도 성현들이 이미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눈 밝은 도인들은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 오색이 있어
사람의 눈을가리고,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오음이 있어
사람의귀를 먹게 한다고 했네.
자네가 꼭 그 꼴이네."
"형님, 그러나 엄연히 보이고 들리지 않습니까?"
"도는 볼 수가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것이라네.
그러므로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도가무엇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은
실상 그것을 모르는것일세.
그러므로 형상이 없는 데서 그것을 보고,
소리가 없는 데서 그것을 들어야 하네."
"그렇다면 죽어서도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꼭 그렇게 존재를 한다 안 한다 하는 식으로
규정해야 성에 차는가?
고래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조상들의 영에 둘러싸여 같이 살았네.
장독대에도잿간에도 귀신을 모셔놓고
늘 정성껏 모셨지.
신명과인간은 함께 사는 것이니
도가에서는 간다 온다가 다한 가닥일세."
토정은 타오르는 불꽃을 올려다보면서
길게 한숨을내쉬었다.
이튿날 토정과 정휴는 운주사를 떠났다.
현수 상좌,
이제는 그가 운주사를 맡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천불천탑의 전설도 연기 속으로
날아가버린 지금
시주도 변변찮은 절을 지킨다는 것은
그대로 고생을 떠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토정은 현수 상좌에게 친근한 목소리로 몇 마디일렀다.
정휴는 운주사에 머무는 동안
토정이 현수 상좌에게보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당에서 신처와몸을 섞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은
아닌 듯했다.
그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자연스런 행동으로보였다.
한참 뒤에야 결국 그 까닭이 밝혀졌다.
북창이 운주사로 토정을 보낸 이유도.
그러나, 그때까지는정휴도 토정도
그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운주사에서 나온 토정과 정휴는
즉시 한양으로향했다.
한시가 급했던 것이다.
토정은 북창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박지화에게전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조선의 대환난을 앞두고 그 비책을 세우려면
도인들의 기지를 모아야 하고
그러자면 전국에 흩어져있는예언가와 역술가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러자면 조선 역술가들이 모두 모이는
커다란 모임을 가져야겠습니다.
거기서 대책을 논의하고
방비책을 준비해가야겠습니다."
토정과 박지화는 조선역술가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모이는 장소는 일찍이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겨레의 영산인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으로 정했다.
모이기로 한 날은 기사년(己巳年, 1569년) 6월 6일,
토정의 나이 53세 되는 해였다.
첫댓글 소설 같기도하고, 실록 같기도하고 ..... 암튼 오늘도 즐독 했습니다.
아마 소설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