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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6)
- 갈멜산에서 있은 참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대결 -
열왕기상 18장
엘리야가 사르밧에 머문지 제 3년에, 그리고 가뭄이 시작된 때로부터는 이미 3년이 지났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서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는 가뭄이 시작된 지 3년이 아니라 엘리야가 사르밧에 머문 때로부터 햇수로 3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사르밧에 머문지는 2년 이상이 되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이제 가서 아합왕을 만나라. 내가 다시 비를 내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아합을 만나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 땅에 내린 가뭄으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 속에 기근과 기갈을 당하는 재앙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시돈의 사르밧에까지 미칠 만큼 큰 것이었으며 지긋 지긋하고도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가뭄에 의한 기근과 기갈의 재앙은 마침내 왕궁에까지 미쳐 아합도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2절에서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는 기근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도 미쳤다는 것으로 이곳에는 이미 모든 곳간이 바닥 나고 마실 물도 더 이상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아합 왕이 있는 왕궁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 정도는 참으로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이 재앙을 오랜 기간 겪으면서도 이 재앙이 자신과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하여 나간 죄악에서 초래된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이스라엘을 정신을 차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악을 행하는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려는 뜻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더 마음을 강팍하고 완고하게 가져 나갔습니다. 이러한 아합은 재앙을 선포한 선지자 엘리야를 몹시 미워했으며, 그를 찾아 죽이고자 하는 살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그 같은 저주를 선언하였기 때문에 극심한 가뭄이 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뿐만 엘리야가 가뭄의 재앙의 원인을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경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이 사실을 추호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엘리야를 잡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합의 이러한 살기와 혈안은 선지자 엘리야 한 사람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합은 이세벨과 한 마음이 되어서 엘리야를 시작으로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선지자를 찾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이신 여호와에 대한 적대심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3년 6개월이나 지속되어 가고 있는 가뭄으로 인한 기근의 재앙은 대단히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급기야는 아합이 왕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물을 얻기 위해서 직접 찾아 나서는 사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합은 자신과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악을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힘으로 물을 찾아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을 합니다. 이는 왕궁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물을 찾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렸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아합에게는 오바댜라는 아주 충직스런 궁내대신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그를 몹시 신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바댜는 아합과는 달리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합이 이세벨과 함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할 때에 목숨의 위험을 무릎 쓰고 100명에 이르는 선지자를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제공하며 생명을 보호해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신하로서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만 오바댜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여 100명의 선지자들을 지켰습니다. 당시 아합의 폭정으로 수많은 하나님의 경건한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아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거의 전멸할 위기에 처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오바댜가 아합의 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몰래 돌보았는데 각기 50명씩 나누어서 사람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동굴에다 피신시켰습니다. 현대 고고학은 당시 갈멜산에 2, 000여개의 동굴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바댜는 이런 식으로 여호와를 섬기되 생명을 걸고서 까지 경외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이적을 행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생명을 보살펴 나가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땅에는 엘리야 외에도 당시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수를 7,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언급을 하셨습니다. 사실 오바댜 자신이 그 7,000명의 수에 들어 있는 남은 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적지 않은 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과 함께 하시면서 지켜 나가셨습니다. 오바댜 같은 사람은 당시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에 남 모르게 애를 썼습니다. 그와 같은 숨은 자들을 통해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으셨으나 다른 방법을 사용하셔서 해 나가셨습니다. 그것은 이 재앙이 바알 우상을 섬기는 아합과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는 데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아합 왕의 핍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지켜 나간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생명을 지켜 나가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은 자 무리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기근을 당하는 그 속에서 아합의 핍박까지 당하는 이중의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 고난을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잘 인내해 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게 하는 은총에 의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생명은 끝까지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더 이상 참아 보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돌이키시기 위한 일에 엘리야를 보내셨으며, 또한 이렇게 오바댜를 예비하신 중에 필요한 만큼의 자신의 종들을 멸절의 극한 위기로부터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들 보호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하는 '만수'(滿數)로서의 상징성을 가집니다.
오바댜가 100명에 이르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숨겨 주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면서 생명을 보살펴 주는 일에서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의를 하나님 앞에 행하여 나갔습니다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합은 오바댜와 함께 기근을 모면하기 위한 물 찾기에 나섰습니다. 아합은 오바댜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나가서 전국에 있는 모든 땅을 뒤져서 물이 흐르는 내와 물이 시작되는 근원지를 찾아 보자. 그러면 혹시 어딘가에서 말과 노새들을 먹일 풀을 찾아 내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는 궁중에 있는 모든 짐승들을 다 죽이고 말겠다!."(5절)고 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둘은 각기 팀을 이루고서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저 길로 갔습니다.
아합이 간 길의 다른 방향으로 길을 떠난 오바댜는 왕명을 좇아 물을 찾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뜻밖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다름 아닌 아합이 찾아서 죽이려고 하던 바로 그 선지자인 엘리야를 만난 것입니다. 그가 엘리야를 만나게 된 것은 의외로 엘리야가 그를 찾아옴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1절에서 언급한 대로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아서 아합을 만나기 위해 사마리아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오바댜는 자기를 향하여 걸어오는 사람이 엘리야인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오바댜는 엘리야 앞에 서자 그의 발 앞에 엎드리며 존경의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말하였습니다. "내 주 엘리야 아니십니까?"(7절) 엘리야는 그런 오바댜에게 자신이 그가 말하는 엘리야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가서 엘리야가 여기 있다는 것을 왕에게 알리라"(8절)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이처럼 오바댜에게 자신을 아합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은 오바댜가 말한 대로 그가 이세벨의 폭력으로부터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구원하였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아합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아합의 적극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오바댜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바댜는 엘리야에게서 이 말을 듣고서는 참으로 난감해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당신의 종을 아합 왕에게 보내어 그의 진노를 사서 죽임을 당하게 하려고 하십니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지만 지금 아합 왕이 당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서 사람을 보내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이 땅 어디에도 엘리야는 없습니다'라고 알려 오면 그 나라 왕에게 과연 그 말이 진실한지를 확인하며 책임을 지게 하는 맹세까지 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이 나에게 가서 '엘리야가 여기 있다'고 왕에게 알리도록 명령하십니까? 내가 여기서 떠나면 여호와의 신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실 것인데 만일 내가 당신이 시키는 대로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와서 당신을 찾지 못하면 왕을 기만한 죄를 물어 필시 나를 죽이려들 것입니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여 왔습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100명을 각기 50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대어주며 그들을 살린 일을 내 주께로부터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나를 아합에게 가서 '엘리야가 여기 있다'라고 고하도록 명령하여 나를 죽음을 당하게 하려고 하십니까?."(9-14절) 이러한 오바댜의 대답을 통하여 당시 아합이 얼마나 큰 증오심으로 엘리야를 찾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자신이 아합의 굉장한 신임을 얻고 있는 입장에 있지만, 그러나 엘리야를 향한 아합의 증오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자기가 만일 엘리야의 출현을 아합에게 전하였다가 그 말을 믿고 아합이 엘리야를 죽이려 찾아 나왔는데 행여라도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자신의 생명이 온전히 유지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바댜는 지금까지 엘리야가 오랜 기간 동안 전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었던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 다시 그러한 엘리야의 은둔 생활이 반복될 수도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바댜는 이 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지지 않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엘리야를 향하여 자신이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였음으로 인하여 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세벨의 박해로부터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보호하였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오바댜가 어떤 염려를 하고 있는지를 아는 엘리야는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겠는데 내가 오늘 틀림없이 아합을 만나 볼 것이다"(15절)라고 말하여 그를 안심케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다'고 말한 것은 앞서 오바댜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라는 말을 사용한데 대한 답의 표현인데 이러한 표현은 엘리야 자신이 지금 아합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그가 섬기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바알 우상 숭배와 박해 속에서 지금까지 고난도 무릅쓰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그 삶의 실제적인 신실함에 근거하여 이번 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오바댜가 염려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맹세로 보증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오바댜가 자신의 말에 신뢰를 가지고 아합에게 나아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맹세에서 그의 말을 신뢰한 오바댜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즉시 아합을 만나 엘리야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엘리야와 아합과의 만남은 이루어졌습니다. 오바댜로부터 보고를 받은 아합은 그 즉시 엘리야를 만나러 갔습니다. 엘리야를 본 아합은 크게 소리쳤습니다. "네가 바로 이스라엘에 재앙을 내려 온 백성을 고통에 빠뜨려 괴롭게 하는 자이냐?" 이에 엘리야는 대답하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왕과 왕실이 아닙니까? 왕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바알 우상을 섬긴 까닭에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참 신인지를 알게 하려고 나를 왕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온 이스라엘의 대표자들과 이세벨이 먹여 살리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여신을 섬기는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십시오. 내가 그들과 결판을 내겠습니다." 엘리야의 이 말에서 우리는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고자 한 것은 그동안 가뭄의 재앙으로 이스라엘을 징벌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바알과 아세라 우상과의 직접 비교를 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무런 생명 없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긴 것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합이 오바댜로부터 보고를 받자 즉시 그를 찾아 나온 것을 그동안에 겪은 재앙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이를 뉘우치는 마음에서 자신의 회개를 고하고자 하여서가 아니라 단지 엘리야를 몹시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우선은 가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서 오랜 기간 계속된 가뭄과 기근을 멈추도록 엘리야를 위협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것은 가뭄의 재앙이 엘리야가 하나님께 구한 데 따른 것이며 또한 자신이 비가 오기를 기도하지 않는 한에는 단 한방울의 비와 이슬조차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합에서 그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는 그가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에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닫고 귀를 막고 마음으로 깨달아 하나님에게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6:9-10, 마 13:10-15).
이러한 사실은 과거 애굽에서의 바로 왕에게서도 보는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10가지의 재앙에서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도 끝까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였습니다. 장자의 죽음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을 놓아준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마병과 병거를 통원하여서 이스라엘을 다시금 위협하여 애굽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홍해에서 몰살당하였습니다. 이는 후대인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에게서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셨던 숱한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친히 체험하고 목도하였으면서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로 몰아갔으며 심지어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려고 일을 꾸며 나갔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그릇된 신앙적 가치관의 전조는 다름 아닌 여기 아합에게서부터 보여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현재의 극심한 기근은 단지 엘리야가 그것을 그렇게 선포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극심한 재앙이 찾아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떠나 있는 인간이 만사를 생각하는 방향의 어리석음은 매사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은 엘리야를 보는 순간 말하기를, "네가 바로 이스라엘에 재앙을 내려 온 백성을 고통에 빠뜨려 괴롭게 하는 자이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아합은 지금 이스라엘이 가뭄의 재앙을 겪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전혀 엉뚱한 각도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신앙과 배교, 그리고 바울 우상의 숭배가 그처럼 하나님의 크신 진노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엘리야의 저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합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결과는 언제나 이런 식의 거짓된 자기 기만이 판을 치기 마련입니다.
그런 아합을 향하여 엘리야는 단호하게 말하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라고 그의 죄악을 지적하며 준엄하게 책망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을 모두 불러 그들을 하나님에게 굴복시켜 무릎을 끓게 함으로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참 신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은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이세벨로부터 특별한 지원을 받아가면서 그들의 종교적 활동을 펼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세벨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베니게의 왕인 엣바알의 딸이었습니다. 베니게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는데, 이세벨이 아합에게로 시집을 오게됨에 따라 이들 우상이 이스라엘 안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죄악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원주민들과 어떤 조약도 맺지 못하도록 금지하셨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조약을 금지시키신 이유는 그러한 일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올 우상의 도입을 염려하셨던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교가 순결함을 잃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여호와를 버리는 일로 까지 나아갈 것이기에 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선대 왕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혼합 종교의 타락의 길로 치닫다가 아합 때에 와서는 급기야 아예 이세벨과의 혼인을 통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배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을 미혹하여 이스라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궁중 안에다가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양육하며 온갖 특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가 득세하는 나라로 이스라엘을 차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이스라엘 땅에서 없애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다 갈멜산으로 불러 모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도 참석하여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이 어떻게 망하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들이 얼마나 미련하였으며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는지를 똑똑히 알게 하십니다.
아합은 엘리야가 말한 대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과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불러 갈멜산으로 집합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과 "여호와와 바알, 이 둘 중에서 과연 누가 살아 계신 참된 신, 곧 하나님이신가?"하는 대결을 펼쳐 나갑니다. 엘리야가 이 대결을 해 나가는 것은 여호와가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냄으로써 바알 우상을 섬기는 종교는 거짓 종교인 것을 알게 하여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이 참 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살아 계신 참 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바알이 한갖 우상에 불과한 거짓 신이라는 것을 어찌 구별하며 이를 알 수 있습니까?
엘리야는 갈멜산에 모인 자들에게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한 증명으로 알게 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과 바알 우상을 섬기는 자들 앞에서 그들이 보는 자리에서 먼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여호와와 바알 두 사이에서 머뭇 머뭇하려느냐? 만일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면 그분만을 섬겨야 할 것이요 만일 바알이 참된 하나님이라면 그 신만을 섬기라!." 엘리야가 이렇게 외쳤으나 그 누구도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우유부단한 신앙적 태도를 엄중히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과 바알의 두 사이에서 머뭇 머뭇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머뭇 머뭇하려느냐?'는 말은 '여기 기웃거리고 저기 기웃거리며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려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는 두 신(神) 사이에서 자신들의 잇속을 계산하며 이득이 되는 신에게 붙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을 신랄하게 꾸짖었으며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합왕의 통치에 의하여 여호와의 종교를 버리고 바알 종교를 좇았다고 하나 실은 그들 자신들의 잇속과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자신들의 삶을 인도해 오셨던 여호와의 은혜를 저버리고 떠난 것은 풍요와 번성의 탐욕을 가진 그들의 마음이 바알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숭배한 이유는 여호와의 존재에 대한 의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렸던 것은 자기들의 부패한 정욕으로 일어나는 탐욕에 의한 신관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채워줄 수 있는 분으로 여호와이시기를 바라고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것을 요구하는 신앙으로 치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존재하는 '맞춤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세벨이 들여온 바알 우상은 관능적인 유혹의 미소를 던지며 등장하였고 자신들이 바람을 이루어 줄 것으로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같은 죄의 부패성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싫어하시는 바알을 너무나도 쉽게 수용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앙으로 3년 6개월에 걸친 기나긴 날을 고통을 겪으며 심한 고생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가뭄의 재앙이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 내리신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일부러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방신에게서 떠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면 가뭄의 재앙에서 구원하실 것인데도 그들의 마음은 바알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여호와를 떠나 바알을 숭배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바알이 비를 내려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머뭇 머뭇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바알이든 여호와이든 비만 내려 준다고 하면 그 신을 택하여 좇으려고 하는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을 엘리야는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눈치를 보며 머뭇 머뭇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저 옛날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였던 것과도 같은 식의 선택과 결단을 저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일찍이 여호수아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그 말을 지금 갈멜산에서 외쳤습니다. "만일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시면 그분만을 섬겨야 할 것이요 만일 바알이 참된 하나님이라면 그 신을 섬기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의 여러 가르침 중에서 "아무도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혹 이편을 사랑하면 다른 저편을 미워할 것이고 혹 이편을 극진히 위하면 다른 저편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마 6:24), "너희는 이방인들과 같지 않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는 것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을 좇지 말라. 너희의 생명[목숨]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의를 구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마 6:25-34). 엘리야의 외침도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이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는 일갈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아무 말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여기 여호와의 선지자들 중에서 남은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은 450명이나 있다. 이제 내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신지 아니면 그들이 섬기는 바알이 참된 하나님인지를 가려내자. 이제 여기에 제단을 둘을 쌓고 송아지[황소] 두 마리를 갖다 놓고 각각 한 마리씩 제사를 지내자. 제사를 지낼 때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한 마리를 먼저 골라서 잡아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려놓고 제사를 드리는데 불은 붙이지 말라. 나도 나머지 한 마리를 잡아서 똑같은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겠다. 이때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를 부르겠다. 그래서 어느 제단이든지 불을 보내 제물을 태우는 응답을 해 주는 신이 참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그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 쪽이 숫자가 많으니 먼저 시작하라.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서 잡고 제물로 드리고 너희가 섬기는 신 바알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제물에 불을 붙이지는 말라." 엘리야가 이와 같은 제의를 한 것은 아무런 생각 없이 나온 말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의 이 제안은 사실 아론에 의하여 최초로 제사가 드려졌었던 바로 그 당시에 나타났었던 때의 일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2-24).
엘리야의 이 제안을 들은 바알의 선지자들은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절할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엘리야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들 스스로 바알이 거짓된 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인 엘리야도 저렇게 큰 소리치지만 자신들과 별반 다름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섬기는 바알신이 불을 내리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에 엘리야가 섬기는 하나님이신 여호와도 마찬가지로 응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기에 엘리야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수용하여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따라서 별다른 이의 없이 즉시로 두개의 제단이 만들어졌고 그 중에서 먼저 바알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신 바알을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제물을 드리고 아침부터 낮[정오]까지 "바알이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며 바알의 이름을 부르고 춤을 추면서 제단 주위를 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정오까지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엘리야는 그들을 조롱하여 크게 말하였습니다. "더욱 큰 소리로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아마도 바알신이 묵상하고 있거나 아니면 급한 일이 있어서 잠간 나갔거나 여행을 떠났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혹 잠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렇다면 빨리 깨워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점점 더 큰 소리로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들의 규례[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몸을 그어서 상처가 나게 하여 피를 내었습니다.
약속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바알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엘리야에게 저녁 시간까지 계속해서 자신들이 주문을 외울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해왔습니다. 엘리야는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였습니다.
엘리야의 허락이 있자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의 응답을 요구하는 주문을 외우는 부르짖음은 다시 시작하였고 이는 저녁 소제를 드릴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바알은 결코 그들의 부르짖음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를 못하였습니다. 저녁까지 이른 바알 선지자들의 온갖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바알 선지자들이 섬기는 바알신은 저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생각해 내어서 조각하여 만든 한갖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인격 없는 무인격체가 무슨 응답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아무런 응답을 내리지 못함으로써 이제 바알은 우상에 불과한 거짓된 신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사실상 바알은 처음부터 허상이었습니다. 그들이 탐욕을 좇아서 관념적인 신앙을 가지고 만들어낸 거짓 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저녁 소제를 드릴 때까지 하루종일 멈추지 않고 헛된 부르짖음을 계속하고 그래도 안되니 광란의 춤을 추고 또한 자해를 해가면서까지 부르짖어 나간 것은 '혹시나'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알이 결코 불을 내리는 응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미련을 가짐으로써 스스로 속는 어리석음에 빠졌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엘리야의 허락을 받고 바알신에게 계속해서 주문을 외울 때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라" 그러자 모든 백성이 엘리야의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엘리야는 우선 허물어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았습니다. 이 제단이 갈멜산에 세워졌고 또한 어떤 이유로 허물어졌는가 하는 것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추측하기는 아마도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잠정적으로 허락되었던 제단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단이 아합왕의 폭정에 의해서 무차별하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19:10). 엘리야가 새로운 제단을 처음부터 쌓게 하지 않고 이렇게 의도적으로 이미 있었던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아 올리게 한 것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공되었던 제사로 맺어진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상기시키며 다시 회복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자 했던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아 올려 만들고서는 야곱의 아들들인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의미로 열 두개의 돌을 취하여 단 주위에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는 지금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서 열 두 개의 돌을 취하여서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한 것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신 데 따른 것으로 곧 이스라엘 지파의 숫자에 따라서 열 두 개의 돌을 취하여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그는 이러한 상징물을 의도적으로 세우는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누구의 후손인가를 일깨워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제단 주위에 세우기 위하여 취한 열 두 돌의 의미를 설명하여 말하기를,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모두가 야곱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과 같은 국가의 큰 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후손이 지금처럼 창대해질 것임을 약속해 주셨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셔서 지금과 같은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탐욕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여호와의 제단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배신의 행위는 심히 배은망덕한 패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허물어진 제단을 다시 쌓아 올리게 하고 그 제단 주위에 열 두 개의 돌을 세우게 하는 것을 통하여 야곱과 맺은 언약 속에 다시 두시는 은혜를 베푸시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제단을 수축한 후에 그 제단의 둘레에 곡식 종자 두 세아[두 가마 정도의 밀]를 파종할 만큼 넓은 도랑을 파 놓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무를 쌓아 놓고 송아지를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려놓아 제사를 지내는 모든 준비를 다 끝낸 후 물통 넷에 물을 가득 채워다가 제물과 나무 위에 붓게 하였는데 세 번이나 하게 함으로써 물이 제단을 흠뻑 적시고 흘러 내려 도랑까지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당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 장소로 정한 갈멜산 가까이에는 기손강이 있었는데 이곳보다 약 305m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런 갈멜산에 세운 제단 76m 정도의 아래에는 둥근 천장 모양의 매우 풍부한 샘이 있어 물이 솟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샘이 있는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단판의 대결을 펼쳐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샘의 근원을 말리지 않고 솟게 하셨습니다. 이런 샘이 있었기에 제단과 매우 가까이에서 일시에 많은 물을 얻어 제단 주위에 파 놓은 도랑에 물이 채워지기까지 제단의 제물과 나무 위에 쏟아 부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상태로서는 제단의 제물에 불이 붙는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제단 위에 있는 제물과 나무에다가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을 붓도록 하였던 것은, 행여라도 제기될지 모르는 일체의 오해를 아예 철저하게 방지하려는 까닭에서였습니다. 엘리야는 혹시나 눈속임으로 제단의 제물이 불이 붙게 할 수 있다는 의혹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을 하였습니다. 당시 우상 숭배자들은 기만을 행하여 어리석은 군중으로 제물이 신이 보내준 불에 의하여 태워지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제단 밑에 공간을 두어 제물의 나무에 불을 붙이곤 하였기 때문에 엘리야가 세운 제단도 그런 의심을 가질 수 있을만한 요인을 아예 차단을 한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는 이처럼 물에 흠뻑 젖은 나무와 제물이 불타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사람의 방법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되어진 이적이라는 것을 똑똑히 증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제단 주위에 파 둔 도랑에 물이 흘러 넘칠 정도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물을 붓도록 요구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해 놓고 저녁 소제를 드릴 때가 되자 엘리야는 이제 제단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간구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 저는 주의 종입니다. 내가 주께서 시키시는 말씀대로 오늘 이 모든 일을 수행한 것인 줄 이제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옵소서!. 그래서 이 백성이 주[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는 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옵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라고 부르짖는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대대로 전해지고 있었던 여호와의 약속을 의도적으로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야곱의 아들들로서 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믿는 민족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야의 이 기도는 그가 이미 열 두개의 돌을 세웠던 일과 피차 상관 관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 이 언약에 의해서 자신들이 오늘날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곧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엘리야는 간구하기를,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 저는 주의 종입니다. 내가 주께서 시키시는 말씀대로 오늘 이 모든 일을 수행한 것인 줄 이제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옵소서!. 그래서 이 백성이 주께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는 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옵소서!" 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내용인즉 이제부터 일어나게 될 일체의 일은, 여호와께서 진정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는 일로 있는 것이요 또한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있게 하는 일인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이제까지의 긴 가뭄이 있었고 또한 지금의 생명을 건 대결이 있는 것입니다. 실로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버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지금 이처럼 생명을 걸고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스라엘 중에서 상실되었던 여호와의 영광을 다시금 회복시키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부르짖음이 있자 여호와께서 불을 내려 보내셨는데, 그 불길이 얼마나 세었는지 번제물과 나무를 모두 태우고 제단의 돌과 그 주위의 흙과 도랑의 물까지 모두 핥아 태웠습니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엘리야는 그의 종이며 선지자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반면에 바알은 거짓된 신인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하여서 여호와가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바알이 한갖 우상에 불과한 거짓 신이라는 것은 명명백백하게 아주 확연히 구별이 되며 이 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하나님과 거짓된 하나님은 확연히 구별이 되며 뚜렷이 차이가 있습니다. 거짓된 신, 곧 거짓된 신은 사람이 관념적인 신앙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아무런 응답도 주지 못하는 인격이 없는 우상일 뿐이요 따라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 곧 참된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으로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면서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나가십니다. 참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며 또한 전능하신 능력을 행사하여 응답을 주십니다. 아무런 생명이 없는 거짓된 하나님은 생명 있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은 생명 있는 일을 해 나가십니다.
우리는 이 아주 옛날에 있은 갈멜산에서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확인해서야 믿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상에 드러남으로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저 옛날, 갈멜산에서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는 엘리야의 기도가 있게 하는 것을 통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 물에 흠뻑 젖은 제물을 태우심으로써 자기 백성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로 마음을 돌이키게 하여 다만 하나님만을 참된 신으로 섬겨 나가게 하셨습니다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직접 하나님 자신의 희생 사역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두시고 죽음에서 건져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한몸에 받으셨으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보이심으로써 사단과의 대결에서 그 악한 권세를 영단번에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세상에 선포하여 우리에게 선택과 결단을 갖게 하십니다. "너희가 머뭇 머뭇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 사이에서 기웃 기웃거리며 자신에게 잇속이 되는 신이라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이라도 좇는 그런 어리석음을 버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두 신 사이에서 누가 참된 신이며 거짓된 신인가를 저울질 하는 상태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참된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 옛날 갈멜산에서 모습을 보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좇아서 탐욕스럽게도 재물을 신으로 섬기고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배신하고 그리스도교를 배교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경계하여 권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있는 보배와 기쁨에 눈을 돌리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니 하늘나라의 것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채우십시오. 이 세상 일을 염려하는 것으로 세월을 헛되게 보내지 마십시오. 마치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을 둘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참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들의 참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과 함께 빛나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골 3:1-5). 사도 야고보는 한갖 탐욕으로 재물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부요를 잃는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여러분 부자들이요, 지금은 여러분 앞에 닥쳐올 무서운 재앙을 생각하며 슬피 통곡할 때입니다. 여러분의 재물은 썩어 가고 여러분이 사치로 입고 있는 화려한 옷은 좀먹어 누더기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소유한 값나가는 은과 금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여러분이 얼마나 악한 죄 속에 있는지를 고발하는 증거가 되어서 불과 같이 여러분의 살을 태워 삼켜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탐욕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면서 부당하게 재물을 모으고 심지어 선량한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기도 하였으나 그들이 아우성치는 소리는 만군의 주님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갖은 변덕을 다 부리고 쾌락과 만족을 누리며 마음을 욕심으로 살찌게 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을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약 5:1-6). 바울과 야고보의 말은 모두가 지금 우리가 어느 편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바알 우상이 재물이란 신으로나 또는 다른 것으로서의 신으로든지 지금 어느 얼굴로 가면(假面)하고서 죄의 근성에 의해 꿈틀거리는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건드리며 유혹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생각과 관심은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게로 가 있어야 하며 합니다.
마침내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시오 바알 우상은 거짓된 하나님인 것이 드러나자 이를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 이구동성으로 "참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참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라고 반복하여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즉시 온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엘리야는 백성들이 잡아온 바알 선지자들을 산밑의 기손 시냇가로 끌고가서 거기서 모두 죽이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갈멜산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시냇가로 끌어다가 짐승처럼 잡아 죽이고, 시냇물로 그 피를 씻어 내게 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처럼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잡아 죽이게 한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죄악 속에 빠뜨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대신하여 의로운 분노를 행사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나갔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도 포함하고 있음]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이는 일이 끝나자 이제 엘리야는 하나님께 비가 내리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이 간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 편에 설 경우 얼마나 큰 축복이 준비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무려 장장 3년 6개월만에 참된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축복의 단비를 맛봄으로써 그들은 또한 그동안 자신들이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겼던 죄악이 얼마나 큰 죄악이었었는지를 깨닫게 하는 역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비가 이스라엘 땅에 내리게 하기 전에 이것의 기쁨을 실감 있게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합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먹고 마시도록 권하게 됩니다. 사실 아합은 바알을 위하여 그동안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헛된 굶주림 속에 있던 아합에게 이제 그가 바알에게서 떠나는 것을 보시고 갈멜산의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배부름의 기쁨을 갖게 합니다.
아합이 음식을 먹으러 성소로 올라가자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 가까이에 올라가서는 땅바닥에 무릎을 끓고 앉아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묻고 사환[시종]에게 일렀습니다. "너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멀리 바다 끝을 바라보아라!" 사환이 엘리야가 시키는 대로 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엘리야는 다시 똑같이 지시를 하였는데 그러기를 일곱 번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일곱 번째 다녀 온 사환이 "바다 끝에서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 한 조각이 생겼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너는 아합왕에게 가서 이제 비가 쏟아질 것이니 폭우로 길이 막히기 전에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가시라고 알려 드려라"고 지시를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이 말이 있자 곧 바로 폭풍이 일고 온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면서 세찬 비가 쏟아져 내려씁니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이 폭우는 엘리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비를 위해서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비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엘리야에게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 먼저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이 기도는 여호와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기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의 기도는 강한 확신을 동반한 것이었으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은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고 기도하면서 구름 한점 없이 땡?騈? 마른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일곱 번이나 사환을 시켜 비록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지만 그 구름이 일어난 것을 듣고는 곧 폭우가 쏟아질 것을 말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비를 얻기 위해서 그처럼 간절한 심령으로 간구하였습니다. 훗날 사도 야고보는 엘리야의 이 기도를 앞서 비가 내리지 않기를 구한 기도의 거론과 함께 '믿음의 기도'로 규정하고 '의인의 간구'로 말하면서 이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으로 설명해 나갔습니다. 그것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으로서 의로운 사람이 갖는 간절한 기도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살아 계신 참 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 알게 하는 것이 엘리야의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엘리야의 이 믿음의 기도요 의로운 자의 기도에 있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에게 우리가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가령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있음으로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죄 속에 있는 자들에게 믿음의 형제들이 갖는 교회의 기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자에 대해 믿음의 형제들이 갖는 기도는 그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금 회복하게 하여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데 있습니다. 범죄한 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믿음,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는 그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용기를 얻고서 자기가 지금 당하고 있는 징벌을 인내하여 나가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힘있게 해 나갈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이 의로운 기도를 그와 함께 그리스도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이 가져야 할 것이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있은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인 엘리야와 거짓된 하나님을 섬기는 바알 선지자들간에 있은 대결은 결판이 났습니다. "누가 참된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요 그래서 참된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것을 알면 이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섬기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우리가 참된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여호와, 그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으며 이제 자신의 살과 피의 언약으로 세운 교회의 머리로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몸으로 있고 말입니다. 교회!,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몸된 이 교회에서 찾아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신과 하나된 몸이 되게 하여 교회를 이루시는 그리스도를 떠나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엘리야로부터 곧 폭우가 쏟아져 길을 막힐 것이기 때문에 마차를 타고 빨리 왕궁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아합왕은 그 길로 돌아가는데 여호와의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여서 그가 겉옷을 허리에 동여매고 이스르엘까지 30여킬로미터를 아합의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리게 하여 이스라엘에까지 이르는 길에 줄곧 엘리야가 앞서서 그를 호위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아합왕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자 의도된 때문입니다. 아합은 앞서가는 엘리야의 능력을 줄곧 바라보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되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여야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아합왕에게 징계를 내리시기 이전에 먼저 그가 돌이킬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일에 최선을 다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엘리야가 허리를 동이고 아합 앞에서 이스르엘까지 동행하였던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였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이 있은 후에도 어느 날엔가 아람으로부터 이스라엘이 큰 위협을 받게 될 때에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구원을 두 번씩이나 크게 베풀어 주셨습니다(20:13, 2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왕은 계속해서 그의 아내 이세벨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호와 앞에서 여전히 패역한 삶을 살게 됩니다. 어째서 아합왕은 이렇게 지독히도 완고하여 하나님께 패역하는 악을 행할까요? 하나님은 그의 계속되는 완악함을 통해서 사실상 그는 여호와를 신앙하지 않는 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는 일평생을 이세벨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듭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소리를 외면하여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모습을 보이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런 그는 결국에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더 따르다가 전쟁터에서 죽는 비극에 처하였습니다(22: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