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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계시록!(11) : 하늘의 예배! - 이리로 올라오라!”
+ 본 문 : 요한계시록 4장 1절 - 11절 (신약성경 402쪽)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아멘!
우리나라에서 매년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정서행동 특성검사를 실시하고 있는데,
그 검사에서 가슴 아픈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초중고생 648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무려 105만 4천 명의 학생들이 관심학생, 또 22만 3천 명의 학생들이 주의학생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관심학생이란? 교내 상담과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학생들을 말하는데, 평소에는 별 이상증세를,
보이지 않지만 검사 결과에서 약한 우울감이 나타나는 학생들인데, 무려 105만 4천 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심학생에 해당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2차 검사를 해서 심층 상담과 같은 집중 관리가,
필요하다고 파악된 학생들이 주의학생, 관심학생 중의 25 퍼센트가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가슴 아픈 것은, 이렇게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우리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가 하면 최근에 우리나라 50대 어른들의 애환을 다룬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습니다. 그 책에서 50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습자지에 글씨 연습을 하던,
초등학생이 스마트 폰을 만들어낸 세대, 고무줄을 감아 만든 장난감 차로 어린 시절을 보낸 소년들이,
자동차산업을 일꾼 세대, 고무신을 접어 냇물에 흘려보내며 놀던 아이들이 배를 만든 세계적인 조선업을,
창출한 세대, 수출액 100만 불에 불과한 후진국을 1조 달러 선진국으로 도약하도록 디딤돌이 된 세대,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을 초현대식 아파트로 바꾸는 천지개벽하는 건설 현장에서 청춘을 바친 세대”
이렇게 50대 전후 세대를 대단한 세대로 묘사하고 나서, 마지막 문장이 이렇게 끝맺음을 했습니다.
“그러나 각종 스펙으로 무장한 자식 세대에 밀려나서, 쓸쓸하게 퇴장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세대”
그러고 보니 앞에 그토록 장황한 미사여구를 나열한 것은, 뒤에 있는 이 한마디를 위한 것 같습니다.
그 책에 보면, 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세대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쫓기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노후에 위로받을 곳도 없고, 부모와 자식도 아직 챙겨줘야 하는데, 가진 거라곤 나날이 쇠락하는,
몸밖에 없는데.” - 그 책의 저자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를 읽어보니, 어느 날 자기 딸이,
그 책을 읽고 펑펑 울면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나이가 들어 50대가 되고,60대가 되면 쓸쓸히 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수순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생이란? 참 마음이 아픈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며, 분노하며, 싸우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서로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를 아끼며, 서로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는 책의 내용이, 50대를 지나 60대를 살아가는 제게 공감이 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4장 1절 말씀이, 참 위로가 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끝난 후에, 바로 이어서 주신 말씀입니다.
지금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극심한 박해로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일터에서 쫓겨나고, 재산이 몰수당했으며,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죽어가고 있는 절망적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묘사되었던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이 끝나자마자, 오늘 본문 4장 1절에서 주님은 “이리로 올라오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너무나 절망적인 지금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혼란스러운 땅만 바라보며 살지 말고 이리로 올라오라.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이 땅에만 몰두하지 말고 이리로 올라오라.” - 천상의 아름다운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요한을 부르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이, 저 자신에게 엄청난 위로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말씀은 이렇게 단순하게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차원을 넘어 그보다 훨씬 더 깊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데, 두 가지로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먼 관점으로 - 인생을 멀리 바라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얽혀 있는 미로 속에 들어가 있으면, 아무리 사방을 바라보아도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길이 다 보입니다. 왜 그렇게 길을 헤맸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만 시선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리로 올라오라.” 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면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질문해 봐야 그 시련과 고난 안에서는, 그 시련과 고난의 답을 찾지 못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리로 올라오라I”
땅에서의 삶으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미로를 풀려고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고 하나님 나라가 왔을 때에, 비로소 그 고난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에, “이리로 올라오라I” 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 세상에서의 풀리지 않는 모든 일들을 알게 됩니다.
둘째로, 이 말씀 안에는 이 싸움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주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2절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하나님을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으로 보여주신 것은,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 질 당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가장 강력한 권력자는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특별히 로마 황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로마의 황제보다 더 두려워 할 분은,
하나님을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이요. 지금의 권력자인 로마 황제는 일시적이고 한시적안 존재이며,
육체는 건드릴 수 있어도 영혼은 건드릴 수 없는 무능한 자란 사실을 깨달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핍박받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우리의 진정한 권력자가 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지금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전반에 걸쳐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 주” 라는 표현도 로마 황제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 이라는 말도 당시 황제가 궁에 들어올 때 쓰던 말입니다.
이렇게 당시 우상처럼 숭배했던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했던 말들을 하나님 찬양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권력자 로마 황제가 이 땅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진짜로 이 땅의 지배자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심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6절 말씀입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아멘!
여기서 ‘어린 양’ 은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어린 양입니다.
이를 통해 요한은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시고, 피를 흘리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불의와 싸우시며, 그 불의를 꺾고 승리하시는 심판자의 모으로 오실 예수님이심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 황제를 비롯한 세상 모든 권력은 대단해 보이고, 우리는 너무나 초라해 보이지만,
결국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가 이 악한 세상을 멸하시고, 최후 승리를 얻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핍박받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심으로써, 큰 용기를 주기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주신 예수님도 놀라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오늘날 세상을 뒤덮은 악한 권세와 불의를 꺾으시고, 장차 왕으로 다시 오실,
승리의 주님은 더 놀라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만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요. 다른 하나는 천상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인생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두 종류의 인생을 대조하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 마태복음 17장이 있습니다.
함께 봅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마 17:15,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세상에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어렵습니다. 문제는 많은데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시각, 다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아멘!(마 17:1,2)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입니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서로 헐뜯고,
나 하고는 안 맞다고 미워하고, 분노하며, 오로지 이 세상 것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이사야 1장 5절, 6절 말씀에 보면, 얼마나 타락하고 변질됐는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한 마디가 그 시대가 얼마나 악한 시대인가를 보여줍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닌가를 깊이 반성해 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를 보면, 큰 교회서부터 작은 교회에 이르기까지 성한 대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정말로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목회가 힘들거나 나 자신에게 어떤 아픔이 있을 때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 환상을 경험합니다.
지금 우리의 육의 눈으로 보면 온 세상은 썩어 냄새가 진동합니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입니다.
너무나 타락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영안을 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타락하고 부패한 온 땅이 온전히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는 거룩한 땅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슬픈 진실 하나는, 아무리 새롭게 해보려고 해도 세상은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우리 교회만은 보수적인 전통을 따르지 않고 앞서가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늘 새롭게 목회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기초를 잘 닦아 문제 많은 전통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직분을 자랑하고, 신앙 연조를 자랑하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좌우지 하지 못하게 하며,
처음 나온 성도님이라도 원하시면, 등록한 즉시 교회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체제를 갖추어 왔습니다.
그래서 문턱 없는 교회, 누구나 사역하는 교회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우리교회도 이런 저런 문제가 드러나는,
나약한 지상교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저도 변질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교회에선 절대로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합니다.
우리교회에선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깨끗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고,
설교할 때가 많았습니다만, 요한계시록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게 교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가 있을까요? 이 세상에 완벽한 성도가 있을까요?
우리 목사님은 우리 동네에서 일등 목사라고 자랑하며, 남의 교인들에게 “한 번만 와봐!” 라고 말하며,
남의 교인들까지 끌어가고, 그렇게 데려다 놓고 전혀 양심에 가책도 없이 자랑하는 교회를 두고서, 이단보다 더하다는 막말까지 나오는 일도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저는 일등목사가 아닙니다. 일등목사가 될 정도로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자랑해서 남의 교인들 마구잡이로 끌어다가 숫자 불려가며 부흥했다는 소리는 안 듣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교회, 완벽한 목사, 완벽한 성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린 주님만 자랑합시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듣습니다. 교회가 왜 그러냐고, 교회 다닌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교회 밖에 사람들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불평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를 포함한 이 땅에 모든 교회들, 완벽한 교회가 하나도 없고 완벽할 수도 전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이 땅에 모든 성도들, 완벽한 성도가 하나도 없고 완벽할 수도 전혀 없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다 아픈 곳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성도들도 아픈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오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원망과 불평이 많을 수밖에 없고, 저 잘난 맛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시끄럽습니다. 성도들은 제 각각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삐지고 상처받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곳이 지상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아멘입니까?
우리는 눈을 뜨고 완전하지 못한 세상의 교회, 목사, 다른 성도를 바라보는 눈을 감아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하늘의 예배가 드려지는 완전한 하늘나라의 교회! 새 예루살렘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완전한 하늘나라교회에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만을 향해 울려 퍼지는 찬양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은혜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충만하게 채워져야 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변질될 수밖에 없는 정말로 나약한 존재입니다.
이걸 알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야 하는 대상임을 알게 됩니다.
목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목사도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목사 자랑하면 안 됩니다.
인간에게 기대고 의지하면 안 됩니다. 완벽한 척 외식해서도 안 됩니다. 그건 사탄이 주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런 우리인데도 “이리로 올라오라.’ 고 하시니, 이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리로 올라오라.’ 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요한이 바라본,
하늘나라의 교회의 놀라운 일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세히 보니 방 중심으로 보좌가 가운데 놓여 있고,
그 하늘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었으며, 그 네 생물을 또 에워싸는 이십사 장로가 있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네 생물이 어떤 존재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 네 생물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0절, 11절에 나오는 24장로 역시, 네 생물들처럼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이십사 장로들은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존귀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고 있던 이십사 장로들이, 그 관을 벗어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은,
자기들은 하나님께 이 면류관을 받아 머리에 쓸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도, 구원도, 영생도,
천국도 내 능력이나 내 힘으로 얻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얻은 것임을 고백하는 겸손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드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은혜에 대한 겸손입니다.
오래 믿으면 이 겸손이 사라집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 목사가 되면 바로 이 겸손이 사라집니다.
“너는 나처럼 왜 헌신하지 못해? 교회가 왜 이 모양이야?”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왜 그럴까요?
그러나 진정한 예배자는 그렇게 목이 곧은 사람이 아닙니다. 면류관을 벗어 겸손히 돌려드려야 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고백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우리도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잘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고백하고,
내가 잘난 척 쓰고 있는 교만의 관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 드려야 합니다.
개그우먼 이성미 집사님의 간증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룹 울랄라세션의 리더였던 임윤택 씨가 한창 암 투병을 하고 있을 때, 이성미집사가 복음을 전하고,
그 고통을 위로를 했답니다. 그런데 계속 자기 마음에 “나는 암을 겪지 않아서 그 고통을 모른다.
나는 지금 말만 가지고 떠든다.” 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내게도 저런,
암의 고통이 있다면 내가 다가가서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더랍니다.
그랬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정말로 자기에게 암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이성미 집사가 암 판정을 받고, 가장 먼저 임윤택 씨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윤택아! 내가 암에 걸려 보니, 그 동안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야 네 마음을 조금은 알겠다.”
평상시에 한 영혼을 향하신 주님의 애틋한 마음이 그 안에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성미 집사가 펑펑 울면서 하는 간증과 고백을 들으면서, 목사인 나는 뭔가 하는 마음에 울었습니다.
내 안에 한 영혼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있는가? 나는 성도들이 당하고 있는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저렇게 진지한 눈물을 흘리는 긍휼함이 있었는가? 하나의 직업인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신을 늘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짜 크리스천인가?
눈에 보이는 대로만 바라보며 안달복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분노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닌가?
암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에도 가장 먼저 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한 영혼이 생각나고, 자신의 암조차도,
암으로 고통 중인 한 형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애틋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늘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는 사람! 천상의 교회를 바라보지 못하는 근시안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저와 여러분부터, 천상의 예배를 바라보는 눈으로 회복되길 원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눈만 뜨면 그 악한 로마황제에게, 세상 권력자에게 핍박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리로 올라오라. 저 악한 세상 권력자들을 바라보지 말고 이리로 올라오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네 생물과 24장로들과 더불어 너희들도,
함께 마음껏 찬양할 날이 있을 테니, 그것을 잊지 말라.” 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던,
그 은혜가 우리에게도 충만하게 임하여,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되고, 한 영혼을 애틋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