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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첫선을 보는 자리!
‘가톨릭’군과 ‘와인’양이 만났다. 가톨릭군의 가정은 엄격하고 종교 진리를 중요시하는 가정이다. 술, 담배를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해 왔다. 그리스 학문적인 정의대로 본다면 ‘로고스(Logos)적 가정’이다. 반면, 와인양의 가정은 개인의 표현이 자유롭고, 가족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한다. 감성이 풍부하고, 음주가무를 즐기니, ‘파토스(Pathos)적 가정’이라고 보겠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두 가문 같지는 않는다 해도, 얼핏 보기에 정반대 성격을 가져 잘 안 어울리는 듯 한다. 이들은 순탄하게 결혼에 골인할 수 있을까?
첫눈에 마음에 든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면서, 이런저런 집안 얘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나오면 나올수록, 상대 집안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고, 중첩되는 것을 알고는 놀란다. 먼저 서로 고향이 어딘지 물어보니, 가톨릭군 집안 고향은 중동의 이스라엘 근방인데, 와인양의 고향도 중동 근처가 아닌가. 깜짝 놀란 가톨릭군은 집안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노아 할아버지 얘기를 했는데, 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살아남은 인류로서는 최초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한 장본인이었으니, 와인양의 집안에서도 시조로 삼는 인물이었다.
최근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니, 가톨릭군 집안의 중시조(中始祖)라 할 수 있는 예수가 나오는데, 이분이 어떤 혼인 잔칫집에 가서 그 집의 V항아리에 든 물을 모두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행하셨다. 그런데 이분은 와인양 집안에서도 ‘전설적 마법사’로 통하는 분이셨다. 게다가 이분은 제자들과 헤어지기 전에 만찬을 베풀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포도주를 자기 피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피는 생명이고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인데, 이 피와 포도주를 동일시한 비유는 그만큼 두 집안이 태초부터 그리고 역사와 더불어 항상 함께 했었고, 함께할 동반자요 배우자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지….
이렇게 데이트를 하던 두 사람은 성당에서 결혼하게 됐고, 혼인 미사를 통하여 하나가 됐다.
위의 드라마 같은 시나리오는 필자가 평화신문의 칼럼 제안을 받고, 어떻게 ‘가톨릭과 와인’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생각하다가 재미있게 창작해 본 에피소드다. 필자는 프랑스에서 서양 역사를 전공했는데 그 과정에서 포도로 만든 와인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됐다. 포도주, 즉 와인도 술의 일종임에는 분명하지만, 나의 신앙인 가톨릭과 그 교리 속에서 와인을 재해석을 하다 보니, 이 두 아이템처럼 잘 맞는 궁합이 없었고, 결국 내 전공은 와인으로 바뀌게 됐다.
앞으로 이어지는 칼럼을 통해 독자 여러분은 가톨릭과 와인이 어떻게 긴밀히 연결되는지 느끼게 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성경 이야기 속에서, 가톨릭과 연관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와인과 관계를 풀어나가며, 때로는 구체적인 와인도 소개할 것이니, 함께 맛을 보며 글을 읽는다면 더욱 실감 날 것이다.
필자소개
손진호(스테파노) 교수는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역사학(박사학위)을 전공했고, 그 과정에서 와인의 매력에 빠져 1999년 귀국해 중앙대학교 산업교육원에서 와인 소믈리에 과정을 개설했다. 이후 15년간 한국 와인 교육의 기초를 다져왔으며 현재 ‘손진호와인연구소’를 통해 와인 교육 콘텐츠를 생산, 여러 대학과 교육 기관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와인 구매 가이드」「한 손에 잡히는 와인」「와인 테이스팅의 이해」「파리의 심판」「매혹적인 와인의 세계」등이 있다. 전자우편 주소 : sonwine@daum.net
▲ 왼편을 술 빚는 노아, 오른 편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노아. 예나 지금이나 절제가 중요하다. |
인류 역사에서 포도주의 위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광범위하고 깊게 뿌리 박혀 있다. 포도주는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작품 중 하나며, 각 문명에서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태초부터 찾아볼 수 있는 빵, 그릇, 의복 등과 함께 인류의 첫 생활 주변품이기도 하다.
포도주는 인류 역사와 함께 영고성쇠를 반복해 왔다. 그 역사, 그 미묘함, 그 기쁨, 그 열정~! 참으로 포도주는 매력적인 존재며, 그 자체로 문화적 가치를 가진 문명 현상이다. 특히, 유럽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포도주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 보면, 정말 신비롭기 그지없다.
왜 유독 포도주인가? 이 특별한 운명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들으려면, 고대로부터 인간이 포도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경위와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 인간은 원시 수렵 채집 생활을 마치고 정착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먹을 것의 궁핍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러면서 문화와 예술을 추구하는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후가 온화한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방에서 문명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빵과 포도를 사용하여 술을 빚기 시작했다.
빵을 이용한 맥주는 가볍고 묽으며 양이 많아 주로 서민들이 마셨다. 그러나 포도주는 고대 사회에서 소수 특권 계층에 제한됐다. 알코올 도수가 높았던 포도주는 맥주보다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차츰 사람들은 포도주에 무언가 ‘효험’이 있음을 알게 됐다. 건강, 무역 등의 상품적 가치를 지닌 포도주는 고대 종교의식과 연계되면서 비로소 그 ‘신비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다.
고대인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요시했는데, 이때 술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면 왜 유독 포도주를 선택했을까? 먼저 포도주의 붉은 색상은 다른 술에는 없는 색이다. 붉은색은 피를 상징하며, 피는 생명의 필수 요소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보호해 주는 신께 바치는 제사에서 붉은색의 상징성은 매우 그럴싸한 연계 요소였다. 또한 붉은색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력과 왕권을 상징했다. 고대 사회는 제사를 올리는 사제가 곧 권력자인 제정일치 사회였다. 아마도 왕과 귀족은 붉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자신의 권력과 왕권신수설을 공고히 했을지 모른다. 아울러, 붉은색은 상서로운 색이다. 액운을 물리쳐 주는 색이기에, 경건한 제사에서 포도주만을 사용했다.
창세기의 노아는 대홍수가 잦아들자 땅에 내려, 그의 가족과 귀한 동식물의 생명을 지켜준 하느님께 감사 제사를 드렸다. 그는 아라랏 산 중턱에서 포도를 재배해 붉은 포도주를 빚어 올리면서 생명을 준 하느님께 대한 보은과 충성의 서약을 다졌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 대신 양을 잡아 그 피로 대속한 것은 붉은 포도주의 상징성과 결합해 후일 신약의 제사와 기묘하게 연결되고 있다.
유럽 최초의 문명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는 디오니소스와 바쿠스라는 포도주의 신이 단독으로 등장한다. 그것만 보더라도 포도주가 인간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로마 신화와 유다교, 그리고 그리스도교로 이어지는 일련의 종교 의식은 오늘날 세계 와인 산지 거의 대부분이 그리스도교 문명 국가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후 2000년간 포도주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음료로 자리 잡게 됐다. 다음 글에서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포도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겠다.
손진호(스테파노, 중앙대) 교수
▲ 작자 미상. ‘십자가를 지고 피땀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발 밑에 놓여진 포도가 눈에 띈다. |
공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예수는 한 마을의 결혼식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다. 그분의 첫 기적이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리고, 물 위를 걷는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멋지게 데뷔한 것이 아니다. 쪼잔하게 항아리의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을 한 것이다. 기적이기나 한 걸까? 속임수로 의심될 수도 있었다. 왜일까? 무엇 때문에 예수는 첫 기적으로 포도주를 만들었을까?
물은 생명수(Aqua Vitae)다. 지구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 생존에 필수다. 태초부터 자연적으로 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인데, 늘 있다 보니 중요성을 잊을 수도 있다. 예수는 이제 이 물의 형상을 다른 것으로 바꾼다. 같은 액체인데 이번엔 붉은 피다. 피는 물보다 더 고귀하다. 생존에 필수 요소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다.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으로써, 그 현장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세계와 새로운 계약을 맺기 원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물의 계약’에서 ‘피의 계약’으로 전이된 것이다. 이것이 첫 기적으로 포도주를 선택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제, 인류의 죄를 대속한 십자가 사건으로 가 보자. 해골산으로 불리는 골고타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향해가는 예수. 가시관이 깊게 박힌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십자가에 못 박힌 두 팔목과 발목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힘들고 고된 마지막 호흡을 멈춘 그의 죽음을 로마 병사들은 창으로 가슴을 찔러 확인한다. 그곳에서 마지막 피가 흘러나온다.
이 사건을 와인 문명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삽입된 그림에서 보듯이,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가 발로 포도를 밟고 있다. 포도가 으깨어지면 붉은 포도즙이 나오는데, 이 포도즙으로 포도주를 만든다. 그런데 이 벽화에서 보면, 포도즙에 그리스도의 피가 섞인다. 그리스도의 피는 결국 포도주를 통해 형상화됐음을 보여 준다.
그 직전에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예수는 잡히던 날 저녁에 어느 다락방 이층에서 제자들과 만찬을 함께한다. 예수는 포도주를 마시고 사례한 후,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니라. 너희는 이 예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억하라.” 이는 실로 엄중한 명령이다. 스승이자 구세주로 모신 예수의 마지막 명령이기에, 제자들과 그 후예인 성직자들은 지금도 전 세계 어디서든지 미사성제를 올리며 포도주를 마신다.
로마 제국은 처음엔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지만 후일 공인하고 국교로 삼는다. 이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지구상의 어디서든 교회가 건설되고 주변에서는 포도밭이 조성되었다. 처음엔 유럽 대륙에서, 15세기 지리상의 대발견 이후에는 새로 발견된 신대륙에서 포도주가 생산되었다. 초기에는 대부분 종교적 필요가 목적이었다. 포도밭을 일구는 것은 신성한 노동이며, 그 결과 포도주를 얻게 되고, 이 포도주로써 그리스도교의 핵심 예식인 성찬례가 완성된다.
이처럼 인류의 죄를 대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미사성제를 통해 사제가 영하는 포도주로 기억되고, 이리하여 그리스도교와 포도주와의 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다음 호에는 미사주가 어떻게 생산되고, 사용되는지 그리고 미사주의 미식적 특성에 대해 알아보겠다.<스테파노, 손진호와인연구소장>
▲ 한국 천주교 미사주는 엄격한 전례 규정에 따라 섬세하게 생산된다. 지하 저장고에는 미사주용 저장 탱크가 따로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
1989년 개봉한 영화 「인디애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서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한 성배 (Holy Grail)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 속 인디애나는 아버지가 총에 맞자,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성배를 찾으러 뛰어간다. 촌각을 다투는 짧은 시간 안에 수 백 개의 술잔 중에서 바로 그 ‘성배’를 찾아야만 아버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때, 인디애나가 선택한 잔은 바로 가장 허름한 나무잔이었다. 그 잔에 물을 담아 아버지의 총 맞은 배에 부으니 상처가 감쪽같이 나았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스토리다.
그런데 실제로 2000년 전 새로운 계약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잔에 담았던 그 예식은 현재까지도 가톨릭 신자들의 미사 성제를 통하여 매일, 매주 재현되고 있다. 성직자들은 성찬례를 행하면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신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이 미사를 통해 축성된 성혈을 성체와 함께 모시는 양형 영성체는 한때(13세기) 금지되기도 했지만, 피정이나 연수 등 특별한 행사에서는 사제의 허락 하에 양형 영성체를 하고 있다. 필자는 대학생 시절에 주일학교 교사를 오래 했다. 와인을 전혀 몰랐던 당시에는, 신부님이 미사 때 드시는 포도주가 얼마나 맛있는지, 진짜 포도주인지 등등이 궁금해, 보좌 신부님 허락하에 조금 맛본 적이 있었다. 무척 시고 맛이 없었던 기억이었다.
이제 와인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다시 이 미사주에 대한 칼럼을 쓰니 감개가 무량하다. 한국 천주교에서 공인한 미사주는 경북 경산의 마주앙 공장에서 생산된다. 거룩한 미사에 사용되는 와인인 만큼,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의 엄격한 규정에 따라 생산된다. 경북 왜관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사들이 품질 관리를 하고 있으니, 유럽의 명품 와인들도 수도자들이 생산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같다.
공장은 매년 포도 수확기에 축복식을 거행하고 있다. 축복식은 거룩한 미사주의 원료가 될 당해 연도 포도 수확에 대해 감사하고, 미사주 생산에 축복을 기원하는 행사다. 미사주 화이트의 경우 의성 지역의 청포도 세이벨(Seibel) 품종을 사용하며, 미사주 레드는 경산지역에서 재배하는 MBA 품종을 쓴다. 일반 와인과는 달리 미사주는 화이트 와인이 더 많이 사용된다. 이는 미사 집전 중 혹시라도 붉은 포도주를 쏟으면 수단과 제대에 얼룩질 우려가 크기 때문인 듯하다.
축성 후 성혈로 변모된 포도주는 절대 남겨서는 안 되므로, 사제는 그것을 모두 마셔야 한다. 그리고 집전 사제는 미사 중 포도주를 그냥 마시는 것이 아니라 물을 따라 마신다. 미사주에 관한 허영엽 신부의 글(평화신문 2008년 9월 7일자, ‘성경 속 상징’ 포도주편)에 의하면, 미사 중 사제가 포도주에 물을 조금 섞는 것은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뜻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의미(2베드 1,4)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 두자.
▲ 마주앙 미사주 |
필자는 이번 기회에 마주앙 미사주를 마셔 보았다. ‘마주앙 미사주’로 이름이 적힌 와인은 화이트, 레드 모두 12%vol 의 알코올을 가지고 있으며, 용량은 700ml 이다. 미사주 화이트 와인은 밝고 투명한 엷은 노란색을 띠었다. 향에서는 레몬 향과 오렌지, 청사과의 풋풋하고 싱그런 풍미가 나 기분이 좋았다. 입안에서는 맛깔스러운 산미와 동시에 따사로운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와인이었다. 자애로우신 성모 마리아의 손길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미사주 레드 와인은 밝은 루비빛 색상에 딸기와 복분자, 자두향이 풍부하며, 미려한 질감에 부드러운 타닌을 함유하였다. 한 모금 한 모금에 인류 대속의 피를 흘리신 성자의 성혈이 그대로 내 혈관을 타는 느낌이 들었다.
<스테파노, 손진호와인연구소>
▲ 교황의 성모 티아라와 베드로의 열쇠 문양이 새겨진 샤또뇌프 뒤 빠쁘 |
지금은 교황청이 로마의 바티칸 시국에 있지만, 중세 시대의 한 때에는 프랑스 남부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중세 중반까지 강력했던 교황권이 다소 쇠퇴해 질 무렵, 프랑스에서는 필립 4세라는 강력한 국왕이 나오면서, 세속 권력이 교권을 압도하게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 14세기 초 교황 선거가 치러졌다. 프랑스 왕 필립 4세의 강력한 후원을 입은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주교가 1305년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가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V)이며, 세속명 베르트랑 드 고트(Bertrand de Goth)이다. 그는 로마로 가려다 정치적 상황과 필립 4세의 압력에 굴복해, 결국 프랑스 남부 도시 아비뇽(Avignon)에 정착했다. 1309년 이곳에 교황청을 지으니, 소위 ‘교황의 아비뇽 유수’ 라는 역사적 사건이 전개된 것이다.
교황청이 아비뇽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유럽의 종교적 본산이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겨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유럽 각국의 모든 종교적 지도자들이 아비뇽을 드나들게 되고, 모든 종교적 활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자 갑자기 불어난 종교 행사에 쓸 와인이 필요하게 됐고, 아비뇽 주변의 구릉지는 포도밭으로 변화됐다. 아비뇽은 지중해가 멀지 않은 데다가, 론 강을 끼고 있어 기후가 따뜻하다. 구릉지가 많아서 본래부터 좋은 와인 생산지였는데, 종교적 소비가 많아지니, 와인 산업이 더욱 발달하게 됐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게 된 산지가 바로 샤또뇌프 뒤 빠쁘(Chateauneuf-du-Pape) 마을이다. 교황 클레멘스 5세 후임으로는 요한 22세 교황이 부임했는데, 그는 자신의 여름 별장지로 아비뇽에서 20㎞ 정도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한적한 마을을 선정했다. 그리고 그 마을의 중앙에 있는 언덕 정상에 성을 쌓고 별장을 지었다. 종교적 문제와 정사로 복잡한 일상을 떠나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별장이었다.
바로 이런 유래에서 이 마을 이름이 나왔다. ‘샤또뇌프’는 ‘새로운 성’이라는 뜻이요, ‘빠쁘’는 ‘교황’을 의미하니, 샤또뇌프 뒤 빠쁘는 ‘교황의 새로운 성(별장)’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 생산된 와인에는 교황청 문장이 들어가는 영예를 갖게 됐다. 교황청 문장은 ‘교황의 성모 티아라’(Tiara)와 ‘베드로의 열쇠’로 구성돼 있다. 바로 그 문장이 와인 레이블과 병 자체에 양각돼 있다. 전 세계 와인 중에서 가장 영예스러운 와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마을의 토양이 아주 특별하다. 땅에 주먹만한 돌들이 퍼져 있어, 낮의 태양 열기를 간직하고 밤에도 따뜻하게 해 포도를 잘 익게 한다. 모래와 자갈이 많으니 배수가 잘되어 포도즙은 농축된다. 이렇게 만든 와인이 바로 샤또뇌프 뒤 빠쁘 와인(Chateauneuf-du-Pape AOC) 이다. 우리나라 가격으로 10만 원대 이상의 고가 와인이다. 한때는 교황만 드셨으니, 지금은 비싸긴 하지만 일반인도 마실 수 있어 감지덕지다.
대표 생산자로는 도멘느 뻬고(Domaine du Pegau)라는 양조장이 있다. 유기농법으로 포도를 재배하고 전통적 생산법을 사용하여 양조한다. 그르나슈, 시라, 무르베드르 라고 하는 세 가지 품종을 잘 블렌딩하여 매우 조화롭다.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하듯, 이 와인은 매우 힘차고 웅장하다. 그러면서도 감미롭고 자애로우니, 교황 성품을 그대로 닮은 와인이 아닐 수 없다. 깊어가는 가을밤, 신심 깊은 신자분들이 모여 이 한 병을 나누어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스테파노, 손진호와인연구소>
▲ 성부와 성자, 성령을 상징하는 성화. |
대학생 때부터 군대를 거쳐 복학해 대학원 시절까지, 주일학교 교사를 한 10년 했다. 당시 가톨릭의 엄정한 교리를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참 힘들었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동정녀 잉태, 욥의 고난, 삼위일체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탄생한 와인’이라고 하는 아이템을 다루는 전문가가 되어 관련 와인을 마시게 되니, 그 당시의 에피소드나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미소 짓곤 한다. 그렇다. 가톨릭의 품 안에서 태동한 와인이기에, 와인 이름이나 레이블 디자인에는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표현과 상징이 매우 풍부하다. 그중에서 이번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와인을 마시며, 삼위일체의 어려운 교리를 풀어 보고자 한다.
성삼위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트리니티(Trinity)는 ‘셋’을 의미하는 라틴어 트리니타스(Trinitas) 에서 유래했다. 성(Holy) 삼위(Trinity)는 성부(the Father)와 성자(the Son)와 성령(the Holy Spirit)이다. 성부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고(from the Father), 성자를 통하여 다스리시고(through the Son), 이 모든 것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in the Holy Spirit). 성 삼위는 하나이나 구별되어 인격적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이 가톨릭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다.
나에게 있어 성부는 엄격하고, 성자는 자상하며, 성령은 따뜻했다. 이런 삼위일체의 뜻과 신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와인이 있으니, 바로 ‘The Holy Trinity’ 라는 호주 와인이다. 남호주의 바로싸 밸리(Barossa Valley) 라고 하는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호주를 대표하는 생산자 그랜트 버지(Grant Burge)는 호주 남부 애들레이드 시 근처의 바로싸 밸리에 포도밭이 있다. 이 회사는 자기 농장의 영내에 작은 경당을 가지고 있는데, 작은 규모의 가족 경당이다. 건물이 돌로 되어 있어서 꽤 인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경당 이름이 ‘삼위일체’였다. 이 와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경당 이름에서 따왔나 생각했다.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 The Holy Trinity 와인. |
그러나 레이블에서 포도 품종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무릎을 탁 쳤다. 한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 아니라, 세 종류의 품종을 섞어서 만든 와인이었다. 이런 와인을 블렌딩 와인이라고 하는데, 그르나슈 품종과 쉬라즈 품종 그리고 무르베드르 품종을 배합했다. 즉, 세 가지 품종을 섞어서 한 와인을 만든 것이었다.
각 품종은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다. 그르나슈 품종은 온화함을 주니, 성령과 같다. 쉬라즈 품종은 향기를 주니, 성자와 같다. 무르베드르 품종은 힘과 골격을 느끼게 해 주니, 성부와 같다. 그래서 이름을 ‘삼위일체’(The Holy Trinity)로 지은 것이라고 해석해 본다.
삼위일체 와인은 깊은 암적색을 띠니, 삼위일체의 심원한 신비의 깊이를 느끼게 해 준다. 향에서는 진한 과일향과 향신료, 복합적인 나무 향이 풍겨 나온다. 맛에서는 검붉은 과실과 스모키한 다크 초콜릿의 감미로운 터치가 힘찬 알코올과 더불어 스파이시한 풍미를 준다. 본격적인 겨울의 길목에 접어드는 이 시기, 따뜻한 남반구 호주에서 온 감미롭고도 힘차고 온화한 와인을 마시며, 가족과 함께 삼위일체의 신비를 되새겨보자. <스테파노, 손진호와인연구소>
성부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성화와 ‘The Holy Trinity’ 와인.
▲ 감미로운 천국의 향을 풍기는 아포스톨레 |
이토록 빨리 한 해가 가다니~! 벌써 성탄이다. 대림을 지내며 고대해 온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 땅에 도래하는 새로운 희망을 알린다. 그런데 손을 호호 불며 구유를 경배하면서 나는 ‘성탄이 왜 이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이는 마치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오는 것처럼, 구시대의 잔재가 추운 겨울을 넘기지 못하게 하여, 새 희망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결국, 칼 같은 추위가 낡은 것들을 가차 없이 도려내는 엄동설한에 한 해의 끝과 또 다른 한 해의 시작이 있는 것이다. 경제도 좋지 않고, 크리스마스 캐럴도 울려 퍼지지 않는 거리지만 새날은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 추울 때면, 마시는 와인이 있다.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유럽의 대도시들은 ‘크리스마스 마켓’이라는 시장을 연다. 보통 유서 깊은 대성당이 있는 도시의 시청 앞이나 성당 앞 광장에서다. 구유와 성탄 나무를 꾸밀 장식품과 성탄절을 전후해 먹을 음식을 판매하는 장터다. 추운 날씨에 장을 본 사람들이 어김없이 찾는 곳은 바로 ‘뱅쇼’(Vin Chaud) 또는 ‘글루바인’(Gluehwein) 이라고 부르는 따뜻한 와인을 파는 곳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작은 부스에서는 갖은 향신료와 과일을 넣은 와인이 끓고 있다. 계피나 정향, 아니스와 같은 향신료는 혈액 순환을 좋게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성분이다. 여기에 더하는 오렌지나 레몬은 향을 좋게 하고 비타민C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 결국 이 둘을 넣어 와인을 끓이면 알코올이 증발해 낮은 도수의 따끈한 ‘쌍화차’가 만들어진다. 입맛에 따라 설탕을 넣어 먹으면 맛도 있다. 누구나 각자 집에서 끓여 먹을 수 있다. 와인이 굳이 고급일 필요는 전혀 없다. 1만 원짜리 저렴한 와인을 사자. 냄비에 넣고, 오렌지 1개, 레몬 1개를 껍질째 썰어 넣는다. 여기에 앞서 설명한 향신료를 넣고, 30분 정도 약 50℃로 뭉근히 끓인다. 흑설탕을 100g 정도 넣어 주면 누구나 좋아하는 와인 쌍화차가 만들어진다.
날씨가 추운 지역에서는 와인을 끓여 먹는 풍습이 있다면, 따뜻한 남부 지중해 지역에서는 성탄절에 잘 숙성된 스위트 와인을 마신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헤레스(Jerez, 영어명 셰리 Sherry)라는 지역에서는 400년 전부터 특별한 와인을 생산해 오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와인을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데, 일부러 와인을 꽉 채우지 않아 공간을 남겨둔다. 이렇게 하면 와인이 천천히 산화가 돼 호두나 헤이즐넛 같은 견과류의 오묘한 향이 배게 된다. 맛은 드라이한데, 향은 구수한 와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당도가 높은 감미로운 품종으로 만든 다른 와인의 원액을 20% 정도 넣는다. 이렇게 하면 와인이 적당히 달콤해진다. 여기에 고농도 순수 브랜디를 넣으면, 알코올 도수가 올라가 20도에 육박한다. 이 와인을 십년 이상 오랫동안 미국산 오크통에서 숙성하면, 호두나 헤이즐넛과 같은 구수한 너트류의 향과 곶감이나 말린 대추와 같은 풍미가 더해진다.
이 계통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은 ‘곤잘레스 바야스’라고 하는 셰리 생산회사가 만드는 30년 숙성시킨 ‘아포스톨레’ 라는 와인이다. 30년 가까이 숙성시키면 진했던 붉은 색상은 어느덧 갈색으로 변해 연한 호박색 기운이 감돈다. 향은 달콤한 과일향과 향신료, 복합적인 숙성향이 풍긴다. 캐러멜과 바닐라 향이 은은히 풍기는 감미로운 천국의 향이다. 유럽의 가톨릭 가정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이 고급 셰리를 아기의 입술에 찍어 맛보여 준다. 태어나면서부터 숙성된 삶에 대한 매력을 맛보여 주는 것일까? 물론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는 이 와인이 미처 발명되기 전이니, 하늘에서 못내 아쉬워하실지도 모른다.
<스테파노, 손진호와인연구소>
오늘은 사탄(Satan) 이야기를 해보자. 사탄은 그리스도교에서 나온 개념으로서, 하느님 다음으로 힘이 센 능력을 가졌다고 인정되는 악마다. 본래, 하늘에서는 루시퍼(Lucifer)라고 불렸다. ‘어울리지 않게도’ 빛의 전달자라는 멋진 뜻을 지녔다. 그는 세라핌(Seraphim)으로서, 대천사(archangel)보다 높은 품계를 가졌다. 천사의 으뜸으로서, 하느님 다음으로 그보다 높은 존재는 없었다고 한다. 루시퍼는 하늘에서 법을 집행하는 검사 역할을 했다.
그는 점점 힘이 세져 교만하고 거만해졌고, 하느님의 힘을 질투하게 됐다. 그러던 중, 인간이 창조되고 하느님이 미물인 인간을 몹시 예뻐하자, 인간을 질투하게 됐다. 결국 루시퍼는 자기를 따르는 군단을 모아 하느님께 대항하는 첫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대천사 미카엘에게 패해 지옥에 던져졌다. 신약에서는 광야에서 단식하며 고행하던 예수를 시험에 들게 하기도 했다. 묵시록에 의하면, 세상 마지막 날에 사탄은 힘을 되찾아 하늘의 군대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키게 되나, 하느님께 패해 영원한 불구덩이에 내던져지게 된다.
필자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폼페이를 방문하였는데, 이곳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한 구절을 들었다. 이는 사탄에 관한 ‘와인적 해석’이 된다. 하느님께서 하늘의 군대인 천사들을 만드셨는데, 그 중 ‘삐딱한 천사’ 하나가 돌연변이로 나타났다. 사탄이라고 정의되는 루시퍼 천사다. 하느님은 그를 아꼈으나, 그는 엉뚱한 마음을 먹고 신을 배반하고 지상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다가 하늘에서 쫓겨났다. 이 루시퍼가 천국에서 쫓겨날 때, 천국의 일부를 떼어 훔쳐서 땅으로 내던졌는데, 그것이 지금의 나폴리 만을 형성했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나폴리가 아름답다는 비유적 해석인 듯하다. 땅으로 쫓겨 난 루시퍼는 베수비오 산 자락에 내려가 폼페이 사람들을 타락시켰다. 그들의 타락을 보다 못한 하느님은 불덩이를 내려 그곳의 모든 것을 쓸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은 인간과 도시들이 죽고 불타는 것을 보고 슬피 여겨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이 베수비오 산기슭에 떨어졌고, 거기서 포도나무가 자랐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나폴리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의 눈물(Lacryma Christi del Vesuvio)이라는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오늘 소개할 와인은 서기 79년에 대 폭발을 한 베수비오 화산의 화산토 토양에서 자란 명품 와인이다. 화산토는 토질이 척박하고 배수가 잘되며, 고유한 광물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기에, 매우 복합적이고 깊이가 있는 와인을 생산한다. 알리아니코 라는 캄파니아 지역의 토착 품종으로 생산했다. 베세보(Vesevo) 와인 농장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뛰어난 와인을 생산한다. 잉크 같은 흑적색은 화산 폭발의 마그마와 암흑을 떠올리며, 스모키한 향과 흙내음은 2000년 전 폼페이를 삼킨 화산재를 연상시킨다. 루시퍼의 농간에 놀아난 불쌍한 인간들을 처벌하였으나, 결국 눈물을 흘리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이 진한 와인을 마셔 보자.
순례의 마음으로 떠나는 길에는 흘린 땀과 눈물만큼 새 기운이 솟는다. 순례길 중에 최고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이다. 산티아고는 도시 이름인데 정식 명칭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이다.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에 있다.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인 성 야고보(스페인어로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야고보 사도는 이곳에 가톨릭을 전파했다. 전승에 의하면 9세기 초, 이 도시 근방 초원에 밝은 별이 비췄고 그 빛은 성 야고보의 유체(遺體)가 있는 장소를 가리켰다고 한다. 이에 국왕 알폰소 2세는 이곳에 성당을 건설하도록 명했고, 대성당은 1211년 봉헌됐다. 성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으며, 많은 순례객이 대성당을 방문했다. 1189년 알렉산더 3세 교황이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성스러운 도시로 선포하면서, 유럽 3대 순례지의 하나가 됐다. 1987년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가 출간된 이후 더욱 유명세를 탔다.
순례길은 모두 9개 길이 있다. 그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프랑스 바스크 지방에서 출발하는 순례길은 무려 800㎞에 이른다. 서울-부산을 왕복하는 거리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해마다 이 길을 따라 순례를 떠난다. 피레네 산맥에서 가리비 껍질을 배낭에 달고 지팡이를 짚고 수백 년 된 참된 신앙의 순례길인 산티아고 길을 따라 길고 긴 험한 길을 몇 달씩 걷는다. 그곳에 가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잃은 무엇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평생 찾아 헤매던 소중한 무엇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안고서 길을 나선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어도, 발바닥이 부르터 물집으로 범벅되고, 관절이 부풀어 오르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발걸음을 옮긴다. 처음 가는 낯선 길이지만, 가는 길에는 지팡이와 가리비 껍질 표시가 길을 안내한다. 이 지팡이와 가리비 문양은 천 년 동안 산티아고 순례자의 상징이었다.
와인 중에서도 레이블에 이 가리비가 달려 있는 지팡이를 짚고 길을 가는 순례객의 모습을 담은 와인들이 있다. 오늘 소개할 와인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나폴레옹 시기부터 순례객을 위한 수도원 소속 병원으로 출발해 지금은 양조장으로 발전한 포도원 와인이다. 레이블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한 수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머리에 둥근 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성 야고보를 형상화한 듯하다. 하얀색 정갈한 바탕에 순례자의 이미지만 금색으로 반짝여 매우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 와인을 마시고 레이블을 보는 순간에는 누구라도 순례를 떠나고 싶으리라.
이 와인은 독일 모젤 자르 지방에서 생산된 리슬링 포도로 만들었다. 샤르츠호프베르거(Scharzhofberger)는 자르 지역 최고의 명성을 가진 포도밭 이름이다. 페어아이니크테 호스피치엔(Vereinigte Hospitien) 농장에서는 늦가을까지 수확을 늦춰 당도 높은 포도를 선별한다. 진한 농축미에 달콤하고 감미로운 향이 가득한 이 와인은 꿀물과 같이 맛있다. 말린 무화과와 아카시아 꿀, 바나나와 망고, 파인애플과 복숭아의 농익은 단 향이 인상적이다. 특급 밭에서 생성된 농축된 미네랄 느낌이 조화를 잘 이룬 달콤한 와인을 마시는 순간 힐링이 된다.
800㎞의 고된 여정을 마치고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들어서는 순례객의 기쁨이 이렇게 달콤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을 이름 모를 순례자를 위로하며 이 와인 한 잔을 들이켠다.
<스테파노, 손진호와인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