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황제로서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여사는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를 믿고 영접한 다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을 가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데리고 골고다 언덕에 도착했는데,
과거에 이교도들이 십자가에 처형된 흔적을 없애 버리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을 돌과 흙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쪽 모퉁이에는 미의 여신인 비너스 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헬레나 여사는 수행원들에게 이 흙더미를 파보라고 명령했습니다.
열심히 흙더미를 파 본 결과 그 곳에서 3개의 십자가를 발견할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인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때마침 그곳에 함께 있었던 예루살렘 주교가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와서
그 십자가 하나하나에 손을 대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십자가는 손을 대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 십가가에 손을 대자 환자들이 몸을 와들와들 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세가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십 자가에 손을 대자, 순간적으로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주인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십자가는 회개한 강도의 것이었고,
두 번째 십자가는 예수님을 저주한 왼편 강도의 것이었으며,
세 번째 십자가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헬레나 여사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그 십자가를 부여안고,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리며,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여러분은 주님의 십자가를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나와는 미련한 것입니까 ?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입니까 ?
아니면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그 자체가
우리의 신앙과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서 "힘의 시대"라 말합니다.
힘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힘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는 무기의 힘이 있습니다.
현대식 무기, 핵무기의 힘은 실로 엄청납니다.
그러기에 국제 사회에서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각 나라는 엄청난 돈을 들여 군비를 증강하고, 첨단 무기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술이라는 힘도 있습니다.
지식의 힘도 있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기술이 앞섰고, 지식도 풍부합니다.
그런가 하면 경제라는 힘도 있습니다.
이 경제력도 대단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세계 무대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다 경제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제력보다 더 큰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덕이라는 힘입니다.
물론 힘을 갖기 위해서는 무력, 지식, 기술력,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도덕성이 없이는 이 모든 힘들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가 겪는 이 모든 혼란과 불황은 바로 도덕성이 없어서 생긴 것입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졌기에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
지도층 가운데 법과 질서를 제대로 지킨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
도덕성이 없으니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외채와 무역수지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외국 골프채 수입 1위, 양주 수입 증가율 1위의 우리 도덕성으로
총체적 위기 가운데 있는 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까 ?
한 나라 국민의 건전한 생활 지표인 도덕성이 무너지면
가정도, 사회도, 정부도, 국가도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도덕성 때문에 공산세계가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잃어버린 이 도덕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덕성이란 대단히 큰 힘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힘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능력은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야말로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
가장 큰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말씀이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곧 하나님의 힘입니다.
성경에도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
세상이 자기 지혜로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힘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오늘 본문에 십자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영어로 크로스(CROSS)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라틴어의 크룩스(CRUX)라는 말에서 유리된 것으로
'고문대, 형틀'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헬라어로 스타우로스(STAUROS)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불행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암시하듯 십자가는 사람들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죄수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기 전에 먼저 초죽음이 되도록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옷을 다 벗깁니다.
발가벗은 채로 십자가에 매어 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매달아 놓습니다.
생명이 질긴 사람은 1주일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통의 수치를 경험하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십자가 주변은 신음소리로 진동합니다.
때로는 피냄새를 맡은 독수리들이 와서 눈을 파먹기도 하고, 머리를 쪼아먹기도 합니다.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합니다.
이 형벌이 얼마나 잔인했든지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반란을 일으켰다든지,
중벌을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십자가 형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는
아예 십자가 형벌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 참혹한 십자가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에 달리실 죄인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친히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낮아지시고, 결국은 피 한방울, 물한 방울 남김이 없이
우리를 위해 다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가장 위대한 사랑의 힘이요,
구원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또한 오늘 본문에서도 뚜렷한 음성으로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어떤 힘과 능력이 있기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사도바울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이 십자가에 내걸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게 되었습니까 ?
세상의 모든 것을 왜 분토와 같이 버리게 되었습니까 ?
첫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은
모든 믿는 자들의 죄로 깨끗이 씻는 죄사함의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가장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 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3)
<그리스도께서 약하시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죽어 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절망가운데서도 소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자도 새 생명을 얻습니다.
미국의 노예 제도하에서의 흑인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짐승처럼 고통당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들은 136장 찬송을 불렀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십자가에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찬송하면서 그들은 고난의 현상을 이겨나갔습니다.
또한 잔악한 일제의 박해 하에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영문 밖의 길'이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구원을 확인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 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무시당함과, 수치의 십자가였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통해서 믿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구원을 가져오셨습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둘째로,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화해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불신과 원한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 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날 국경선에 안데스산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나라가 이 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오랫동안 치열한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경제는 피폐해지고,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쌍방이 휴전을 원하게 되자,
영국의 에드워드 왕이 중재에 나서 전쟁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두 나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표시로
안데스 산상에 커다란 예수님 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두 나라 사이의 화해의 표시로 십자가상의 예수님상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담을 허심으로 화목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올바른 관계, 진정한 평화, 샬롬이 이룩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축복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끝으로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고 주님을 좇는데 참 뜻이 있습니다.
요즘은 십자가로 여러가지 장식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멋을 내기 위한 장식용품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체부위에 악센트를 주기 위해서 달랑달랑 달고 다니는 액세서리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믿는 우리들이 반드시 지고 가야할 믿음의 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에 아무리 엄청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십자가에 참으로 귀한 뜻이 있다 하더라도,
십자가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최소한 나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능력과 의미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십가가는 자신을 부인하고서야 질 수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는 것입니다.
억지로,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과 질병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생의 갈등과 번민도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철저하게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내 자신이 죽고, 내 안에 계신 우리 주님이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가 축복만을 강조하다보니 십자가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축복만을 추구하다 보니 이제는 십자가가 거추장스러워졌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다 보니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죽음을 거리끼는 것이 됩니다. 비위가 상합니다.
또한,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다 보니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 지식으로 보면 십자가는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십자가는 곧 구원의 능력이요, 화해의 능력입니다.
나를 살리는 힘이요, 하나님과 세상과 하나되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각자 지워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인 레더퍼드 목사는 우리들이 져야할 십자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거우나 감미로운 것이다.
새에게 있어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날아가고,
배는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바다위로 간다.
믿음의 사람은 그 십자가가 짐이 되나,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해 전진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의 참뜻을 마음에 새기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 가운데 채우는
이 사순절 절기를 보내면서 십자가에서 구원의 능력과 화해의 능력을 체험하며
우리들도 십자가를 짐으로 천국으로 전진해 가는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 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 님의 지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