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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삐뚤이 인면와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
도깨비는 더러 탐욕스런 속물(俗物)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도깨비굿’ 혹은 ‘도깨비탈’처럼 무서운 형상과 힘으로 못된 잡귀(雜鬼)를 쫓는 선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사람처럼 엉뚱한 장난을 좋아하고 흥을 즐기는 존재이므로 신바람 나는 일을 가리켜 ‘도깨비흥’이라고 비유해 말하기도 한다. 또한 ‘도깨비를 사귀었나’ ‘도깨비에 홀린 듯’이라는 말에서 보듯 비상한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도깨비를 아주 대단한 존재로 보지도 않았다. 재주가 있기는 하지만 좀 어리숙하고 모자란 구석도 많다고 생각했다. ‘달밤에 도깨비 춤추듯’ ‘도깨비 수키왓장 뒤지듯’이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 싱겁고 멋없거나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을 도깨비의 행동에 비유하곤 했다.
요컨대 우리 민족의 많은 설화(說話)나 이야기, 노래 속에 등장하는 도깨비의 특징을 정리하면 도깨비는 인간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지닌 두려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절대적 카리스마를 지닌 공포의 대상이기보다는 놀기를 좋아하고 어리숙한 점이 많은 등 사람과 몹시 흡사한 성정을 지닌 친근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나쁜 일에 분노하고 좋은 일에 감동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심성은 곧 도깨비를 창조한 민중의 심성 그대로였다.
도깨비의 어원(語源)은 ‘불(火)’이나 ‘씨앗’의 의미로 풍요를 상징하는 단어인 ‘돗’과 ‘장물아비’ ‘처용아비’ 등에서 보듯이 성인 남자를 지칭하는 ‘아비’를 합친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명칭도 다양해 도깨비 이외에도 돗가비, 독갑이, 도각귀, 귀것, 망량, 김서방, 영감, 물참봉, 허체, 허주 등 다양하게 불렸다.
지방 사투리 중에도 도깨비를 가리키는 말이 많다. 경북 월성에서는 ‘토째비’, 경남 거창에서는 ‘돛재비’, 제주도나 전남 신안 지역에서는 ‘도채비’ 등으로도 부른다. 제주도에서는 집안을 지켜 주거나 물고기를 몰아다 주는 도깨비영감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도깨비는 어느 한순간에 탄생한 것이 아니라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시각이 더해지며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뚜렷한 정서와 문화로 자리 잡아 왔음을 알 수 있다.
情感이 가득한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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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방울 눈을 한 귀면와. |
그러나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전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도깨비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아마도 도깨비는 전설이나 민담처럼 구전되어 내려오는 설화의 성격이 강해 지역적·시대적·계층적으로 서로 다른 수많은 개성 강한 도깨비를 만들어 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깨비의 정확한 연원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귀면문의 일종인 도철문()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하고,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 치우(蚩尤) 얼굴상을 걸어 두고 액을 막았다는 풍습에 주목해 도깨비 얼굴이 바로 치우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도깨비를 가장 이른 형태의 도깨비 형상으로 보는 등 그 의견이 다양하다.
문헌 속 도깨비를 살펴보자. 《삼국유사(三國遺事)》 도화녀비형랑(桃花女鼻荊郞)조에는 비형랑이 도깨비 무리를 시켜 하룻밤 사이에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아 훗날 그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도깨비를 ‘귀(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성현의 수필집인 《용재총화()》에는 도깨비를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어 흩어지고, 다시 합쳐지고, 쫓아가면 이내 사라지는 등 기묘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등의 기록을 통해 보아도 귀신이나 도깨비는 모두 ‘귀(鬼)’로 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재총화》에서는 도깨비불〔귀화·鬼火〕이 나타나 사람을 괴롭혔다는 이야기와 솥 안에 솥뚜껑을 집어넣는 변괴가 일어났다는 내용이 있고, 《용천담적기》에서는 돌을 던진다는 내용 등이 남아 있다. 우리 문화 속의 도깨비는 무섭고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지만 매우 어리석은 면도 있어 인간이 이를 이용해 크게 이득을 보는 내용의 설화도 많이 남아 있다.
도깨비 형태는 고구려 고분벽화나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 또는 공예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구체적인 형상은 지붕의 막새기와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수막새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을 우리는 귀면와(鬼面瓦), 용면와(龍面瓦)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귀면와는 삼국시대 유물에서부터 보이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귀면와는 도깨비의 기원이 악귀를 쫓는 ‘벽사의례(辟邪儀禮)’에서 시작되어 건축 부재에서도 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구려 원형 수막새기와에 벽사신(辟邪神)으로 사용되었던 도깨비 형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황금기라 할 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형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기와들은 집안에 잡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용도임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무섭기보다는 위엄이 가득하면서도 정감과 웃음이 넘치는 정겨운 얼굴이다.
도깨비의 이러한 웃음은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말처럼 웃는 집안에 많은 복이 깃들고 화목하게 된다는 믿음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도깨비는 공포와 위엄보다는 웃음으로 잡귀와 재앙을 쫓는 수호신인 것이다.
웃는 모습 또한 다양하다. 튀어나올 듯한 눈을 위로 치켜뜬 채 윗입술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입을 벌려 윗니와 아랫니로 혀를 물고 헤헤 웃고 있는 도깨비, 왕방울 같은 눈에 외뿔과 벌린 입만 크게 강조하고 있어 마치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는 도깨비, 입이 찢어지도록 크게 벌리고 ‘크크크~’ 하듯이 쾌활하게 웃는 도깨비, 화를 내려다 되레 웃어 버린 도깨비, 문치와 귀치, 낄낄대는 도깨비 등 사각 평면에 엄격한 좌우대칭으로 돋을새김한 멋들어진 공예품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귀면와들은 천진난만한 듯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힘과 위엄도 담겨있는데, 특히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들 가운데에는 경쾌한 웃음이 넘치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다. 가회민화박물관에 소장된 입삐뚤이 원형 인면 와당을 보면 주먹만한 코와 튀어나올 듯한 눈이 강조되었고 삐뚤어진 입 사이로 벌어진 윗니가 보이며 히죽이 웃고 있는 모습이다. 다양한 모습의 귀면을 보자면 미소(微笑), 폭소(爆笑), 대소(大笑), 냉소(冷笑), 눈웃음, 너털웃음, 헛웃음 등 왕방울 눈을 한 귀면와 속에 인간세상의 모든 웃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도깨비 와당
신라 귀면에 비하여 원형, 반원형의 인물 와당 형식의 변화를 가져온 고려시대 조각은 이전 시대에 비해 다소 억제된 웃음을 보이기 시작한다. 순진하고 낙천적인 웃음이라기보다는 아줌마의 절제된 은근한 웃음, 울다가 웃어 버린 듯한 얼굴에서 약간은 경직된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결코 헤픈 웃음은 아니다.
그러나 귀면와 본연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집 안에 들어오는 나쁜 신경을 협박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일 것이며 미소 짓는 인면와는 특유의 웃음을 통해 화(禍)를 복(福)으로 전환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얼굴만 강조되어 있는 부적과 같은 귀면 가운데 연꽃 대좌에 늠름한 자세로 서 있는 부여 규암면 외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 귀면은 얼굴 몸통에 양손이 길게 달려 있어 마치 몸을 감싸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영향은 일본 귀면와당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특히 백제 귀면과 동반 출토된 유물 가운데 용이 새겨진 전돌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행하던 용과는 또 다른 존재인 도깨비의 실체를 인식하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도깨비는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중국의 도깨비는 사람을 크게 놀래는 존재로 등장한다. 일본의 도깨비 ‘오니’는 탐욕스럽고 잔인무도한 성격을 지닌 ‘잡귀(雜鬼)’의 개념이 강하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한국의 도깨비는 잡귀라기보다는 인간에게 복(福)을 주는 친숙한 대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무서운 얼굴보다는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얼굴 등 대중적인 편안한 이미지를 가득 담고 있다. 전돌이나 와당에서 표현되는 도깨비 역시 눈을 부릅뜨고 악귀를 쫓고 있는 무서운 얼굴이지만, 그 험상궂은 표정 한구석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친숙하고 다정스런 정감이 배어 난다. 이것이 바로 다른 나라의 도깨비와는 다른 한국 도깨비만의 특징이다.
佛法의 수호자가 된 도깨비
국보 제10호 실상사(實相寺) 백장암 삼층석탑은 한국의 석탑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것으로 알려진 통일신라시대의 이형(異形) 석탑이다. 초층부 옥신 조각을 보면 탑의 남측 정면에 문비(門扉)를 중심으로 보살상과 사천왕(四天王), 도깨비 형상을 한 동자상이 있어 주목된다.
옥신의 동쪽 동자 도깨비상은 머리에 2개의 뿔이 솟아 있고 이마에는 외눈이 하나 더 있으며 목에 방울이 달려 있다. 오른발은 앞으로 살짝 들어 구부린 장난기 어린 모습이고 왼손에 도끼, 오른손에는 긴 불자를 들고 있다. 북쪽 동자 도깨비는 머리카락이 위로 솟았고, 입을 벌리고 웃고 서 있으며 한 손에는 무기를, 다른 한 손에는 깃발 달린 장대를 가볍게 쥐고 한 손가락을 펴 애교 있는 모습이다. 서쪽 동자 도깨비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늘어진 큰 주머니를 손으로 잡고 희죽이 웃고 서 있다.
불법(佛法) 수호신인 사천왕의 협시(夾侍) 격인 동자 도깨비는 유례가 없는 상으로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도깨비가 불법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일본 나라의 흥복사(興福寺)와, 교토 삼십삼간당(三十三間堂)에 있는 13세기 경의 목조 동자 도깨비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나태’ ‘나타(Nata)’ 등으로 불리는 도깨비는 원래 북방비사문천왕(北方毘沙門天王)의 태자였는데 세 개의 얼굴과 여덟 개의 팔을 가진 귀왕(鬼王)으로 매우 큰 힘을 가지고 있다가 점차 불교에 습합(習合)되어 불법을 수호하고 병귀나 역신(疫神)의 침입을 예방하는 문신(門神)으로 변하게 된다.
龍인가, 도깨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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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불단 도깨비는 점잖은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응시한다. |
사원의 중심인 대웅전 기단을 오르는 석계단 난간에는 주로 용이 조각되는데 부산 범어사와 해남 대흥사에는 듬직한 도깨비상들이 남아 있다. 범어사 석계단 입구의 혀가 보이도록 웃는 도깨비는 사자나 용처럼 큰 귀에 늘어진 갈기가 있고 위엄의 상징인 귀치가 잘 드러나 있다. 다섯 개의 발톱을 접고 엎드린 자세는 복종하는 개나 고양이처럼 친근감을 보이지만 여전히 강한 인상으로 잡귀를 물리칠 위엄을 보이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인 대흥사 도깨비는 입을 다물고 점잖은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을 응시하는 위엄 있는 자세다.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 부도전의 비 이수()에도 건장한 도깨비 조각이 있다. 비석의 지붕 격인 이수는 용이 되지 못해 승천할 수 없는, 뿔과 여의주가 없는 이무기를 말하는데, 이 비석에서는 용 대신 도깨비가 자리 잡고 있다.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나 있고 힘을 잔뜩 준 얼굴의 미간에는 굵은 삼(三)자형의 주름이 져 있으며, 날카로운 이빨이 세밀하게 표현되었지만 여전히 여유로움을 담고 있다. 용이 도깨비로 변화된 듯도 하고, 도깨비가 용으로 변화된 듯도 하다.
사찰 건물이나 불단을 장엄하는 도깨비들은 당대 최고의 공예가들이 제작한 것으로 아미타 극락세계의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불가(佛家)에 용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도깨비가 많이 등장하고, 용의 얼굴을 닮은 도깨비는 상상의 불법 수호신이 되었을 것이다. 불교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도깨비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불교와 토착문화가 서로 자연스럽게 섞이고 습합되는 과정에서 우리 문화의 특징으로 정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난기 가득한 개구쟁이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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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 건봉사 부도전의 도깨비. |
정자, 누각, 사당, 제각, 비각 등의 건물 창방 위 화반(花盤)에 꽃이 조각되는 경우도 많지만 대신 도깨비가 그려지거나 투각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가 기와에 도깨비가 새겨진 ‘귀면와당’의 전성시대였다면 조선시대 후기의 도깨비는 건축물의 화반 조각으로 많이 등장한다. 화반이란 목조건축의 부재 중 하나로 처마 밑 창방과 도리 사이에 들어가는 널조각이다. 사찰 건축은 장중하고 엄숙한 예배 공간으로 불가의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이므로 점잖게 표현될 만도 한데, 도깨비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개구쟁이 같고 넉넉한 여유를 담은 웃음 띤 얼굴로 등장한다.
이들 화반에 표현된 도깨비들은 지역에 따라, 건축물의 특성에 따라, 혹은 목수의 솜씨에 따라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모습으로 나타난다. 조선 후기 장승의 얼굴, 탈바가지, 민화 속의 호랑이 그림이 민중의 심성을 익살과 해학으로 표현하였던 것과 같이 다양한 도깨비의 형상에도 감출 수 없는 웃음과 익살이 숨어 있다.
조선시대 후기 건축물인 영암 덕진 영보전과 장암정, 하동 낙양루의 화반에 그려진 왕도깨비가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위엄보다는 장난기가 가득한 모습이다. 바탕 단청으로 청도깨비가 되어 버린 장암정 화반의 도깨비는 용면(龍面)과 인면(人面)이 결합된 독특한 스타일의 도깨비다.
고려시대에서는 사례를 찾기 힘드나 조선시대의 것에서는 양손이 표현된 도깨비 형상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연꽃을 입에 문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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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문 도깨비. 입에 용·넝쿨줄기 등을 물고 있는 경우도 있다. |
또한 도깨비들이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의 형태를 살펴보면 용, 잉어, 물고기, 넝쿨 줄기 등이다. 이중 넝쿨 줄기는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얼굴 전체가 넝쿨로 귀이하게 얽혀 눈, 코, 입으로 표현되는가 하면 넝쿨이 마치 서기(瑞氣)처럼 입에서 흘러나오기도 하고, 넝쿨을 물고 있는 입의 좌우로 넝쿨이 흘러나오는 형상 등 아주 다양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도깨비와 넝쿨 문양 간에 어떤 비밀스런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무언가 신령스러운 기운을 넝쿨을 통해 강조하고 표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을 뿐이다.
강화도 전등사에는 부처님이 앉아 있는 불단에 도깨비가 조각되어 있다. 이 도깨비는 입에 연봉오리를 물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데 연봉오리는 흡사 도깨비를 감싸듯이 큼직하게 조각되어 신비롭고 영적(靈的)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조선시대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이 “자연의 영기(靈氣)가 모여 도깨비를 만들었다”고 말한 것과도 의미가 통한다. 최근 강우방 교수의 논거에 따르면 고구려 고분이나 고려청자, 조선시대 문양 등에서 기(氣)가 형상화한 문양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주장 또한 앞서 화반에서 언급한 예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 중 상여(喪輿)도 주목해 볼 만하다. 상여는 죽은 이를 저승으로 운반하는 엄숙한 의례용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색상과 아름다운 장식으로 치장된다. 이것은 망자의 명복을 빌고, 산 사람에게는 슬픔을 덜어 주려는 마음이 표현된 결과이다. 저승길로 가는 꽃가마인 상여의 앞에 놓여 죽은 이에게 잡귀가 달라붙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방상씨나 용수판, 혼령을 지키는 목조각에서도 슬픔보다도 기쁜 마음으로 황천길을 떠나보내려는 산 자의 속 깊은 심성을 읽어 낼 수 있다.
그래도 저승길로 가는 엄숙한 곳인 만큼 경망스럽게 웃지 않으려고 위아래 입술을 굳게 다물어 웃음이 터지지 않도록 큼직한 물고기를 물고 있는 도깨비의 모습은 실로 해학이 넘친다. 상여뿐만 아니라 건축물 부재에 등장하는 많은 도깨비 중에서도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몇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용수판’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원래 용의 형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용과 그 속성이 가까운 것은 단연 물고기다.
또 다른 하나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발달한 어로신앙(漁撈信仰)에서 비롯된 것인데, 도깨비가 좋아하는 음식이 물고기이므로 제물로 바친다는 의미에서 입에 물고기를 조각했다고 보는 것이다.
정겨운 메신저
지금까지 도깨비의 어원을 비롯하여 우리 문화 속에 도깨비가 어떻게 표현되어 왔는지를 다양한 유물을 통해 살펴보았다.
한국의 도깨비는 동요와 속담, 설화와 민담 등 구전되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림이나 조각, 공예품 등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물론 일관되고 정형화한 도상이 아니므로 시대별, 유물별로 형태와 표현의 차이만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의 도깨비는 대체로 한국인의 넉넉한 심성과 웃음과 해학이 반영되어 익살스럽고 순한 형상으로 표현된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능적인 측면으로는 무덤을 지키는 호위신(護衛神)을 비롯,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 조각이나 건축, 공예품, 민간신앙 속에서 든든한 수호신의 역할을 해 내는 벽사의 기능을 가졌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인간에게 복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실로 도깨비는 시대를 뛰어넘어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전하는 정겨운 메신저이자 수호천사로 민중의 삶 속에 자리 잡아 온 것이다. 그 의미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207100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