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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고록에서 동복 유격장의 유래와 유격대 조교들이 다는 유격마크의 유래가 소개되어 있어 이렇게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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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의 여름, 본인은 미특수전학교 교육을마치고 돌아와 보병학교 교수부 유격과 교관으로 보직되었다.
미국의「Ranger」과정을 이수하고 돌아 온 12기 선배로 존경하는 장기오 소령이 과장으로 와서 보병학교유격과정의 중흥적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유격(遊擊―Guerrilla Warfare)과정이었던 것을 새로이 특공(特攻―미국은Ranger, 유럽은 Kommando) 과정으로 전환하는 역사적인 과업이었다.
구성된 교관멤버를보면, 장기오 과장 아래로 13기의 유 선배님과 동기 박병관(고인), 이승주, 장기하, 신우식 그리고 나였다.
1962년의 여름, 우리는 공병 불도저 한 대와 우리 손에 쥐어진 삽 그리고 2개의 천막을 가지고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신 '동복 유격교육장'으로이동하였다. 이때부터 오늘날의 대한 민국 육군 올빼미 훈련의 고향인 '동복 유격대 시대'가 역사적 개막되었던 것이다
교육에들어가기 앞서 1개월간, 장기오 과장으로부터 자체 교관교육을 이수하는 한편 현장정찰을 비롯한 교육계획 작성 등을 서둘러 완료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동복유격과정 제 1기를 수료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전술학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교육 분담은 교관 각자의 소질과 지원에 따라 과정별 주임교관제로 하였다. 본 특공과정의 소개와 특공전술원칙 그리고 부대행정분야는 군인정신투철하고 원칙에 강했던 박병관 동기(고인)가, 기본 체력단련과 '죽음의 하강코스'를 포함하는 자신력 배양과정은 육사에서도 체육부장생도였던 장기하 동기가 위험하고도 힘든 산악극복과정(예 : 레펠링, 로프클라이밍, 산악행군 등)은 왕년의 육사 럭비대표선수였던 신우식 동기가, 그리고 각종 로프이동과정(소위 줄타기)은 유선배님이, 뱀과 생닭등을 잡아먹는걸로 알려진 생존 과정에는 수도사단에서 침투간첩을 생포한 무훈장교인 이승주동기가 맡았으며, 장·단거리 정찰과정은 내가 주로 맡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위를 거쳐 '동복 올빼미훈련은 1962년 여름부터 개시되었던 것인다. 그동안의 얘기를 다 하려면 이 문집을 다 채워도 모자랄 것 같아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몇가지만 더듬어 보려고 한다.
신과정 제 1기(육사 18기)가 졸업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영광의 수료증과 동시에 '올빼미자격 휘장'을 수여했다. 그때는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가 감개무량하였다. 우리는 그 휘장을 만들기 위해 며칠간의 밤낮을 지새워 연구하고 고안하였고, '올빼미' 이름 또한 완전히 의미를 다 내포하지는 못했어도 한국적 의미의 유격과 미국 레인저의 의미를 두루 포함하는 것으로 회심의 작명이었다.
Ranger라는 용어는 미국역사가 자랑하는 '미국 특공부대'의 고유 명사이다. 우리도 나름대로의 영구적인 전통적 용어 창제가 절실하였다. 그래서 여러 참고서를 보면서 고안한 결과 '올빼미'로 결정했던 것이다. 올빼미란, 1)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일원에 분포되어 있으며 평지에서 산지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서식한다. 2) 단독으로 생활하며, 낮에는 나무가지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으나 야행성의 사나운 날짐승으로서, 소리없이 날고, 청각이 발달되어 있으며, 두 눈을 밤에 쌍안경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3) 날카로운 발톱으로 들쥐를 포획하여 부리로 찢어 먹는 등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 및 갑각류와 곤충 등을 포식하는 등 용감하고도 기민하며, 인내 깊은 야행성 날짐승인 것이다. 그러기에 '올빼미'는 그때부터 오늘까지도 변함없이 한국군의 사랑을 받고있으며, 이순간에도 전국방방곡곡에있는 유격훈련장에서 '올빼미!'라는 고함소리는 메아리치고 있으리라.
올빼미 휘장도 그때 같이 고안해 만들었는데 수평선으로 긴 네모안에 칼, 로프가 그 둘레를 감싸고, 가운데 맨 위에는 별을 배치하였다. 가운데 네모꼴의 바탕색은 암청색으로 암흑의 밤 또는 불의(不義)를 의미하고, 그 안에 새겨진 칼은 용기와 정의를 의미하였다. 둘레의 로프는 산악극복과 단결을 의미하고 가운데 별은 북극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희망을 상징하였다.
그런데 이 휘장은 원래 제작을 의뢰할 때 일련번호르 넣도록 주문 하였으나 당시는 기술이 모자라 여의치 못하였다. 그리고 이 휘장은 4주간의 정규 교육훈력과정을 이수한 자에게 자격을 인정하는 의미로 수여하였는데, 좋은 거라면 무엇이던 탐하는 우리네 성격 탓으로 각급 부대에서 일주일 교육만(대체로 기초 체력단련 정도) 수료해도 패용하게 함으로써 휘장수여의 원 의미가 희석되었다.
대한민국 전 군인이 무단히 패용하게 됨으로써 그 기풍이 손상되기에 이르자 휘장 자체를 없애버렸는데 이것이야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다 태워 버린 꼴이 되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제도가 부활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는 가운데 여름학기를 마치고 가을 학기를 맞이하였는데, 그동안 상당한 지원과 관심을 베풀어 준 이세호 교장은 수시로 교육장 을 방문하여 강도 높은 훈련에 만족 하고는 참모총장을 초대하였다.
시범 때는 당시 김종오 참모총장과 미 군사고문단장이 참석하였다. 그날 시범의 하이라이트는 기본훈련과정 중의 자신력 시범과 산악훈련 중 레펠과정(로프하강)이었다.
자신력 시험과정은 언제나 체력 모범자세인 장기하 동기가 몇 사람의 조교를 운용하면서 본인이 직접 시범하였다. 동복호수 위에 길이 약 100미터, 하강 경사 40도, 출발점은 100미터 언덕 위에 있었다. '교관 올빼미! 행복합니까, 출발!'을 신호로 도르래를 위로 붙들고 몸을 늘씬한 자세로 쭉 뻗으면서 70여 미터 내려오다가 양발을 ㄴ자보다 더 위로 올리는 순간 장딴지와 덩덩이 부분이 물에 닿으면서 수상스키 상태로 20여 미터 내려오고 그리고 그 자리에 몸을 일으켜 사뿐히 섬으로써 그야말로 자신에 찬 어느 곡예사의 연기 그대로였다. 모든 참관자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었는데 특히 고문단장은 요란한 제스처를 하면서 휘바람을 몇번이나 불기도 했다.
이어서 신우식 동기가 주연하는 산악레펠과 환자후송 시범이 있었는데, 그곳은 제비골 제비바위라 하여 동복사람들이 신성하고 언젠가는 하늘을 나르는 사람들이 올 것으로 알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날 따라서 멀리서 보기에도 더욱 신비스러우면서도 미끈하게 내려 깎인 큰 바위에 옛말대로 나르는 사람이 올 것같이 보였다. 시범은 높고 긴 바위에서 일반레펠, 급속하강, 부상자 후송 등을, 그리고 밑이 크게 패여 나간 작으나 험한 바위에서는 한번으로 뛰어 내리기가 실시되었다.
참관인들은 시종일관 긴장된 가운데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특히 환자를 들것에 싣고 두 사람이 후송 하강하는 시범 등을 보일 때는 총장과 고문관은 몇 번씩이나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열렬하게 휘파람, 박수, '잘한다!'를 연호하여 그때마다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과연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시범이 있는 지 얼마 뒤 육군의 새로운 교육방침이 하달되었다. 즉, OBC 과정과 사관학교 및 후보생 교육과정에 전원 의무적으로 4주간의 '올빼미 교육'을 실시할 것과 전방의 독립 연대급 이상 부대는 '올빼미 훈련장'을 설치하고 전 군인에게 매년 일주 이상의 '올빼미 훈련'을 실시하라고 했다.
이때부터 전 육군에서는 '올빼미 훈련'이란 것이 '강력한 훈련의 상징'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교관들은 정말 보람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훈련의 강도가 오히려 약화될 것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없었다.
'정찰과정'에 대한 것이다. '올빼미'란 용어 자체가 바로 이 정찰과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2주간의 기본훈련과정―체력단련, 자신력 시험과정, 산악훈련 그리고 정찰원칙―을 끝내면 올빼미의 진짜(?) 훈련이 시작된다.
최초 우리 수상은, 가상 적국의 후방지역 해안 또는 산악에 잠수함 또는 공중으로 침투, 원거리로 급속 이동, 목표물을 습격하고 지체없이 도피 및 도망으로 적지를 탈출하거나 우호지역 게릴라와 접선하는작전시나리오로서 <광주-동복-벌교-광양>의 범위 내에서 훈련하는 것이었다.
정찰이란 올빼미의 생태 그대로 주로 야간에 이루어 졌다. 구름낀 어느날 밤―이럴 때는 바로 앞사람에게 손은 닿아도 보이지는 않는다. 야지 이동 중 잠깐 시골 신작로에 올라서 가는데 그래도 앞을 살피기 어려워 연신 자세를 낮추어 가로수 꼭지의 형상을 보아가며 방향을 잡아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갑자기 '사람 살려!' 한다. 비로소 비상 후래시를 켜고 가보니 길 가운데 차바퀴 웅덩이에 넘어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요즈음도 전방에는 이런 경우가 흔하리라.
또 하루는 광주에서 화순으로 넘어가는 「너릿재」에서 매복후 습격 그리고 탈출하는 정찰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아침에 동복 기지를 출발하여 무등산 동편에 있는 「북면」지역에서 1차 '비밀집결지 활동'을 실시한 뒤 일몰을 기하여 무등산을 넘기 위해 다시 출발하였다. 밤 2시 이전에 「무등산」정상(1187 고지)을 넘었는데 무등산의 동쪽면은 양을 방목할 수 있는 평탄한 고원지가 있는 등 의외로 등반에 큰 위험이나 곤란은 없었다. 그런데 무등산의 서쪽 면은 급경사 인데다 화산에 흔한 구멍뚫린 현무암투성이로 표면이돼있어서 더구나야간이동에는 위험하였다.
당시 광주시내 전기 불빛에 의한 간접조명은 희미하여 겨우 바로 앞 사람의 등판만이 보일 뿐 발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급행으로 마구 달려 내려가다 보니 현무암 사이사이로 발이 빠져 삐어서 절뚝거리기도 하고 돌멩이 위에 엉덩방아는 보통이고 나무뿌리에 주저 않는 통에 그곳을 찔리기 또한 여러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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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2시경에 너릿재에 도착, 재편성을 위해 이동할 때는 그 넓은 길에 실오라기 길 가듯 졸면서 아니 자면서, 비틀거리면서 낭떠러지에 뒹굴기도 하면서 자리를 찾아갔다. 그것으로 훈련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후가 더 곤란한 것이었다. 즉, 매복·습격임무를 달성한 뒤 부대로 복귀해 가는 길이 더욱 어려웠다. 온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새벽에 화순 고개를 넘어 다시 「이서」방향으로 험하고도 깊은 첩첩 산골 길을 찾아 걷는다는 것은 참으로 인내심을 요구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룻밤백리길'은 생전 처음 본다고 했다. 부대에 돌아온 대원들은 식사시간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에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우리 교관들은 그 후에도 이런 과정을 몇 번이고 되풀리하였지.…….
어디 그 뿐이던가. 한 겨울 눈이 펑펑 내리는 밤에 학생들의 계획에 따라 묵묵히 밤새 걷다 보면―1분이라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서면 발은 금방 얼어붙는다―.
'춘희'도 생각나고 '전쟁과 평화'도 생각 나고 또 '무기여 잘 있거라'도 절실히 생각났었지. 그럴 때는 물론 내 목과 얼굴을 감싸고 있는 아내가 만들어 준 두툼한 그 목도리가 나를 따뜻하게 해줄 뿐이었지. 그리고 동복 생각에서 또 빠뜨릴 수 없는 건 어쩌다 나가 먹는 시내 밥집에서 감질나게 얹어 주는 '동복꼬막' 맛과 그리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우리 박동기의 재미있는 순애보 실화가 있지…….
끝으로 교육훈련 초기 겨울에 위험한 '로프 두 줄타기'를 안전장치 없이 실습하다가 아깝게도 젊은 나이로 조국에 몸바쳐 호국영령이 되신 그 분께 삼가 편히 잠드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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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최초에 <생사불문, 오로지 강력한 대한민국 특공훈련이 있을뿐!>이라는 청년 교관의 의지로 시작하였는데, <생사불문 훈련>이란 것이 영구불변의 진리가 아니란 것을 그때사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모든 기억이 그 옛날의 한낱 추억으로 간주 되는 건가. 그후 17기의 김중위와 18기의 황중위가 미국Ranger 과정을 정식으로 이후하여 이곳 교관으로 오고, 이어서 최초로 <우리 올빼미 훈련>을 이수했던 18기 후배들이 교관으로 부임해 옴으로써 우리 동기들은 기쁘고 보람된 마음으로 동복을 떠나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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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좋은 자료네요 // 수고 믾으셨습니다. / 항상 한켠에 궁금한것으로 남아 있었는데 -- 모든일이란 발벗고 고생한 사람이 (보통 미친사람 이라 일컷는) 있어야 하죠 -- 경의를 표합니다.
와우~ 멋지네요
우와~~~~ 이 대단한 자료들 전부 어디서 가지고 오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