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수동 '의문의 사건'
증언자 : 이은하(남)
생년월일 : 1932. 11. 28(당시 나이 48세)
직 업 : 농지개량조합 총무계장(현재 회사원)
조사일시 : 1988. 11
지난 1980년 5월은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사실 자체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한 우리 가정의 철저한 파괴로 인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공직자의 신분이었기에 나는 지난 8년간 모든 것을 덮어둘 수밖에 없었다.
나의 고향은 고흥이인데 현재 그곳에는 친척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은 서구 봉선동(아파트 24평)에 장모님, 아내, 아들, 딸, 자부, 손자 등 7식구가 살고 있다. 직업은 영산강농지개량조합 총무계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농조에는 경찰 공무원을 그만두고서 1971년부터 계속 근무하고 있다.
나의 전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 없으나 경찰에 근무했던 이야기만 대충하겠다. 나는 1950년도 중반경에 경찰전문학교 본과 간부후보생 출신으로 경위계급장을 달고 전남도내 일선 지서에 근무하였다. 경찰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그 당시에 경찰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형님의 권유에서였다.
형님께서는 왜정시대 경찰 출신이다. 형님은 왜정 때 총독부에서 민족적 색채가 강하다고 하여 부장승진시험에 합격하고서도 5년 동안이나 발령을 받지 못한 상태로 해방을 맞이하셨다고 한다. 왜정 때 청렴결백하여 해방 후에도 지역주민의 추천에 의해 다시 경찰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형님은 45년 동안(왜정 때 근무기간을 포함하여)의 공직생활을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이유는 친야 성격의 경찰국장이 형님의 승진을 상신했기 때문이다. 승진 상신으로 형님도 본의 아니게 친야 세력이라고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고 한다. 친야 카드가 부착되면 3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옷을 벗는 것이 그 당시 경찰의 사정이었다.
그런 카드가 부착되면 근무지를 외딴 곳으로만 발령내어 당사자 스스로 그만두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형님은 이러한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스스로 자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경찰재직시에는 청렴결백하였고, 지역주민들에게 원성을 들어본 적 없이 공평무사한 신조로 근무했다고 생각된다. 아마 내 성격이 고지식하고 완고한 편이며, 원칙에 입각해서 일을 처리하는 성향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형님이 사표를 제출하신 뒤 3개월만에 나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형님이 친야 세력이었기 때문에 면직당했다는 사실이 나의 카드에도 기록되어 부착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타도로 전근하여 몇 개월만 있으면 다시 원상복귀하여 준다고 했으나, 그것은 잠시 동안만 나의 심정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처사였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모멸감이 치밀었지만, 대세가 이미 결정되었기에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도 15여 년 동안 몸담았던 경찰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경찰에 대한 혐오감만이 나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때의 일은 더 이상 기억조차 하기 싫다.
사표를 제출한 뒤 7-8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 주로 병원생활을 하였는데 경찰 재직시 격무에 지친 후유증과 강제퇴직된 마음의 병 때문이었다. 먹고살려고 여러 가지 일에 매달려보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복직의 기회도 있었지만 다시 경찰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1971년도에 영산강농지개량조합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했다고 하겠다. 전남도내를 전전하며 근무하다가 1977년도에 광주로 거주지를 옮겼다. 직장이 나주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에서 통근이 가능했던 것이다. 1980년도 5월까지 별 탈 없이 농조에 근무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도 정치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공직에 있다 보니까 저절로 사회문제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다.
일요일인 5월 18일은 집에서 지냈다. 19일부터 직장에 출근하려 했으나 시외버스가 두절되었다. 그래서 걸어서 남평까지 가게 되었다. 광주에서 남평까지만 걸어가면 남평에서 출근차량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광주에서는 5월 20일 이후부터 거의 모든 직장이 휴무했던 것 같다. 나주에 있었던 농조는 광주와는 무관하게 모든 직원들이 출근을 계속하였다.
5월 20일-21일도 광주에 거주하는 직원들과 함께 남평까지 걸어가서 직장에서 대기시켜 놓은 차량으로 출근하였다. 남평까지의 행로는 산수동 오거리에서 계림파출소를 거쳐 중앙로를 통해서 백운동 로터리 그리고 남평으로 가는 길이다. 당시 나는 계발과장, 총무과장 등과 함께 광주에서 나주까지 통근하였다. 나는 당시에 총무계장으로서 근무기강면에서 솔선수범해야 했기에 지각만 한두 번 했을 뿐 결근은 한 번도 않았을 정도로 근무에 충실했다. 5·18일부터 21일 사이에 특 별히 기억나는 일은 없다.
5월 22일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하기 위해 직장동료들과 7시경 백운동 로터리에서 합류하여 남평방면으로 걸어갔다(보통 7시경에 동료들과 백운동 로터리에서 만나 같이 출근했다). 송암공단 부근에 도착했을 때 소속 불명의 장교 4-5명이 검문검색을 하였다. 그 이전에는 아마 사병들이 검색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날따라 장교들이 검문검색을 하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광주에서 계엄군이 철수했기 때문에 검문소가 강화된 것 같다). 검문을 마치고 공단 앞을 지나가는데 대형버스, 중형버스, 트럭, 봉고차 등 10여 대가 총에 맞아 벌집이 된 채 노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날 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공단 앞 3백여 미터 구간의 도로가 피로 물들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사살된 시체들이 도로 양측에 널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통곡할 일이었다. 삼엄한 공수대원의 총부리와 많은 주검들을 뒤로 한 채 남평으로 향했다.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그 울분을 참을 수 없다. 막상 직장에 출근하였으나 일할 의욕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전 근무만 하고 계발과장과 함께 퇴근하였다. 계발과장이 사용하던 공용 오토바이로 광산대촌을 경유하여 광주에 들어왔다. 계림동에 거주하였던 계발과장과 헤어진 다음에 산수동 나의 거주지로 향했다.
오후 3시경이었을까. 집 어귀인 다나약국(그 당시) 옆 골목에 5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서 광주사태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지나가다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하는가 궁금하여 동참했다.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약 50대 가량의 신사가 말하기를, 지금 도청에서 광주사태수습대책위가 만들어져 광주는 다시 평온을 찾게 될 것이니 여러분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수습과정에서 군인들의 발포로 인한 사망한 수는 불과 40-50명밖에 되지 않는데 일부 불순분자들의 선동으로 2백명이 죽었다, 3백명이 죽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있으니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자니 분통이 터져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여보세요."
하면서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렇게 시민들을 기만하지 말고 정직하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시오. 무엇에 근거해서 희생된 숫자가 40-50명에 불과하단 말이오. 내가 본 것만 하여도 대강 2백여 명이 넘을 것이오."
나는 이날 아침에 송암공단 부근에서 보았던 사실을 그대로 주민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주민들은 반신반의하면서 '그럴 수가 있느냐', '때려 죽일 놈들' 등을 말하면서 웅성거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수습위원이라 자칭 하던 자가 그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가버렸다.
그런데 10여 분 후에 군인차량이 사납게 우리 쪽으로 달려와 멈추는 것이었다. 차가 멈추자 10여 명의 군복차림의 사람들이 뛰어내리면서,
"어떤 놈이냐?"
"그놈이 어디 있냐?"
다짜고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그중에서 아까 수습위원이라 했던 자가 대뜸 나를 가리키면서,
"저놈이다."
"잡아 죽여라."
하는 것이었다. 그 말과 동시에 그놈들의 개머리판과 총대가 나를 향해 왔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내 몸 위로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녀석들의 군화발이 나를 짓이기고 있었다.
그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트럭 적재함 위였다. 현장에서 나를 두들겨팬 뒤에 트럭에다 싣고 어딘가에 버려두었던 것이다. 누운 채로 좌우를 둘러보니 앞쪽에 낯익은 건물이 보였다. 바로 도청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나를 태워 도청 앞에 내다버렸던 것이다. 내가 정신이 들자 누군가가 부축했다. 산수3동 9통장 조씨였다. 말문이 열리지 않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를 묻는 표정을 지었다. 조통장은 나의 신분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동승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군인복장 차림의 사람들에게 맞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근처에 있는 우리 집에 알렸고, 우리 집 아이가(당시 고2) 조통장에게 찾아가 구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통장이 나와 함께 동승하게 된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에 계림동, 풍향동 등지의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산수동 사건'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습위원이라고 자칭했던 자는 정보원으로서 나를 불순분자로 여겨 일어난 사건이었다(21일 저녁, 계엄군은 시외곽으로 철수함.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도청 앞에 버려두고 간 것만으로는 군정보요원의 행위라 추정하기 어려움. 의문을 갖게 하는 사건이다-조사자 주). 그때 군인복장 차림의 10여 명의 분명한 인상착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때 그들이 도 청 앞에 차를 세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사실에서 군인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도청에서 집에 돌아오자 집안은 난리가 났다. 나를 본 아내가 그 자리에서 졸도를 해버린 것이다. 나의 얼굴은 으깨져 피가 낭자했으며, 전신이 흙으로 뒤범벅된 상태였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그 충격으로 아내는 지금까지도 몸져 누웠다. 겨우 아들의 부축을 받아 적십자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당시 부상은 전신에 극심한 타박상을 입어 몸이 부어오른 상태였고, 출혈과 응혈이 낭자하여 몸을 가누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치아는 모조리 부러져버렸고 코뼈가 나가 버렸다. 완전히 몸이 분해되어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일 동안만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 부상이 심했지만 집안 사정상 통원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퇴원하였다. 아내가 그 충격으로 인해서 거동을 못한 채 병석에 눕게 되어 나마저 병원에 입원한다면 집안을 이끌어나갈 사람이 없었다. 그 후로 3개월 동안을 내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에서 치료를 계속했다. 병세가 조금 호전되자 병원출입을 끊고 사사로 한약 등을 달여 먹는 등 1년 이상 집에서 치료했다.
그 당시 아내와 나의 치료비 때문에 산수동 집을 팔게 되었다. 1천 3백만 원 정도에 집을 팔아서 5백만 원인가 6백만 원 정도의 독채전세를 얻었다. 장모님을 모셨기 때문에 넉넉한 방이 필요했기에 독채를 얻었다.
당시 기관이나 경찰서 등에서 조사나왔던 적은 없었다. 다만 사태가 수습된 뒤 당국에서 보낸 것이라 하며 동장이 위로금을 전달해 준 적은 있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10여만 원의 소액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통장을 통해 정부양곡이 배급되었다. 이사간 후에는 그것마저도 끊어졌는데 내가 다친 후 3개월 정도는 양곡배급을 받았다. 그 밖에 다른 보상은 전혀 없었다.
8년 동안이나 나의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던 이유는 그 당시에 당했던 사실이 창피하다고 느꼈고(아마 치욕스럽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이로 인해 아내가 지금도 반신불수의 상태로 누워 있으며, 특히 공직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가 올까 두려워서였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사실을 이야기해 주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뚜렷하게 활동을 하였다면 떳떳하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우연히 봉변을 당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5·18 부상자로 신고하게 된 것은 매스컴을 통해서였다. 공직자 신분이었기에 처음에 망설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 혼자 숨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나도 신고하여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고하였다. 114 안내전화를 통해서 YWCA 6층에 있는 5·18 민중항쟁부상자동지회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사무실이 있는 6층에 도착하면서부터 깜짝 놀랐다. 6층 벽들이 수많은 유인물로 덮여 있는 것이었다. 지난번 학원민주화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조선대학교를 연상케 했다. 살벌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직까지도 보수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너무 물질적·정신적 어려움에 시달리다 보니까 성격이 변하여 조용히 은둔하며 살아갈 생각만 하는 것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현재 건강상태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지장은 없고, 다만 치아 모두를 상했기 때문에 틀니 신세를 지고 있다.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그리고 현기증과 두통이 주기적으로 엄습하여 가끔 업무에 지장이 있다. 그때 코를 다쳤기 때문에 지금은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없는 병신 아닌 병신이 되어 버렸다.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되어 보상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한다. 부상자회는 나가지 않지만 가끔 주위의 회원들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대부분 어렵게 생활하고 있어 보상문제가 신속히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당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어떠한 보상을 해준다 하더라도 분이 안 풀릴 것 같다. 전두환이 그놈의 코를 뚫고 꿰어 금남로에서 끌고 다니다가 화형을 시킨다 해도 이 맺힌 한이 풀어질 리가 없다. 나뿐만 아니라 광주시민 전체의 생각도 똑같을 것이다. 아직도 반신불수가 되어 병석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조사.정리 박현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