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15분 천지.
비도 멎고, 바람도 자고, 구름은 비켜가고 가슴엔 격정의 회오리가 일렁인다.
승리의 환호 속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는 선수
그 감정의 오르가즘이 이런 것일까?
장백의 멧부리 불기둥 치솟아 곰삭이며 흘러 온 세월.
그 격정 잠재워 고요함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적시는 천지.
"아름다운 영산의 가슴이여,
차일봉 봉우리돌아,
백운봉의 구름을 몰고,
녹명봉 올라 모가지 긴 짐승의 슬픈 울음 들릴 때,
깊고 푸른 당신의 가슴 팎에 중년의 절규를 잠재우고 싶나이다."
또 다시 보리라는 기원 드리며, 천지를 돌아 나와 차일봉 너덜 길을 오른다.
이제 막 눈을 걷고 봄을 맞은 차일봉의 돌너덜.
장마 통에 배부른 돌담처럼, 조금만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져 우리들을 덮쳐 버릴 것 만 같다.
조심조심 마음조이며 30여분 조심스레이 너덜 길을 벗어나
능선에 올라서니 고생 끝의 행복이랄까?
끝없이 펼쳐진 야생화의 천국,
간간이 녹지 않은 잔설이 더 깊은 봄을 기다리고,
함초롬히 봄비 머금은 앙증스런 갖가지의 야생화가 온 능선위에 흐드러졌다.
노오란 만병초
이름을 불러 줄 수 없는 슬픈 보라. 네 이름은 뭐니?
잔설 녹아내리는 작은 물길, 천년 묶은 산삼 맛에 비길 것인가?
그냥가면 서운하리 물 한 모금 마셔보고,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모여 앉아 기념사진도 찍고,
다시 몰려든 비바람에 옷매무새를 고치며 또 다른 세계로 향한다.
앞 뒤를 분간키 어려운 컴컴한 능선,
간간이 마주치는 중국인 등산객들.
어설픈 중국어 한마디로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말이야 어눌고 서툴지만, 산을 좋아하는 마음은 눈빛으로 가슴으로
더 진하게 느껴지고.....
안개비 자욱한 평원에서 잠시 휴식을 갖는다.
빗속에 마셔보는 쇠 주 한 잔,
안주래야 모자 끝에 흘러내리는 빗물이고, 배낭속에서 터져버린 자두이지만,
얼얼하게 곧은 손끝으로 마셔보는 쇠주 한 잔의 짜릿함은 뉘 알까?
마지막 후미, 조따꺼(현지서 배운 중국말 한마디) 님이 힘들어 하신다.
나도 춥고, 배고프고 힘든다. 손이 시려워 셧터의 감각조차도 없다.
비바람은 거칠 줄 모르고, 앞을 가로막는 운무도 발목을 붙든다.
좌우로 가려진 안개속의 세상은 어떤 것 일까?
잿빛하늘을 뚫고 오른 세상처럼,
아름답고 평화론 천국의 세상이 있을까?
상상속에 천지를 그리고 야생화의 평원을 그리며,
무명의 봉우리 몇 개를 오르고 돌아, 백운봉을 우회한다.
내 가슴의 생채기처럼 골되어 흐르는 작은 물길 하 나.
지도를 펼쳐보니 반쯤 온 것 같다.
계획대로 비가 잠시 그치는 틈새를 노려 백운봉 아래서 점심을 먹는다.
집에서 가져간 김치와, 장조림, 매실장아찌.
그리고 식당에서 챙겨온 식은 밥 한 덩이.
범벅이 되어버린 도시락의 찬에는 손이가지 않는다.
역시 우리 입맛엔 김치에 비길것이 없다.
먼저 도착한 선두는 식사를 끝내고 배낭을 메고 섰고,
후미의 식사가 마음을 조리는데,
참고 있든 애궂은 빗줄기가 마지막 순간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토하고 만다.
한 자락 추억도 남기지 못한채......
빗물에 말아진 식은 밥, 몇 술. 후미를 챙기느라 때를 놓친 옆지기가 안스럽다.
굉한 눈, 몸무게 60을 힘겨워하는 체중계의 바늘이 오늘은 58에나 머물래나.
14시30분.
백운봉 언저리를 내려서니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치고.
얄미운 햇살이 야생화의 평원위에 쏟아진다.
아름다운 또 하나의 천국, 푸르른 하늘과 시원한 물줄기,
하얀 뭉게구름사이로 비에 씻긴 말간 햇살.
우의를 벗어 던지고, 초원의 밝은 햇살을 받는다.
검푸른 수림사이로 다가오는 평화스런 이도백하.
어제의 악몽은 오늘의 축복을 위한 고통이었을까?
야생화의 평원을 지나 곳곳이 두터운 겨울의 흔적을 보며 오른 능선.
녹명봉아래서 또 한번의 감탄이 천지의 물결위로 파랑 되어 일렁인다.
마주보는 북한 땅.
손이 나온 왼쪽 구석은 천문봉.
두 번째의 축복.
수많은 무명의 봉우리들.
마주보는 북한 땅, 장군봉과 비로봉.
두 번째의 천지를 가슴에 안고 몰려드는 비구름을 피해 청석봉으로 향한다.
먹구름 속에서 울어대는 천둥.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백두의 하늘.
무서운 천둥아래서도 무더기로 피어난 야생화 가솔송이.
천지를 안고 도는 우리들의 가슴에 애련한 추억의 탑이 쌓아진다.
15:35
청석봉 봉우리에서 구름속에 수줍은 3번째의 천지를 보고,
누군가가 쌓아올린 작은 돌탑에 내 작은 기원도 하나 올려놓으며
마지막 목적지 5호경계비로 향한다.
마지막 발걸음은 여유로울 것 같다.
하늘이 열리고 햇살이 엷다. 살랑이는 바람이 몸의 습기를 걷어가고,
발걸음도 가볍다.
어느 봉우리를 돌아내려도 천지를 보듬어 앉은 장백의 멧부리는
초원의 바다, 야생화의 천국이다.
발끝에 밟히는 것은 모두가 꽃이니,
미끌어지는 발걸음을 어디다 놓아야 할까?
17시30분.
비탈진 산허리를 내려서다 말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서니,
마지막 종착역 5호경계비다.
마지막으로 담아보는 그리움의 심해 천지,
오른쪽은 더 이 상 발길을 옮길 수 없는 그리움의 먼 나라 .
장군봉을 지척에 두고 천지 앞에 선 나.
내 애끓는 중년의 넋두리가 끝나고,
희긋희긋 초로의 잔설내릴 때, 추억의 발길은
못다한 대간길 더듬어 북녘의 장군봉에,
다시 설 수 었을까?
아직은 갈 수 없는 동토의 땅.
소리없는 메아리로, 들리지 않는 아우성으로
내가 부르는 노래, 추억과, 사랑과, 그리움의 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담아보는 추억 한 점.
경계비앞에서 바라보는 천지.
그리움만큼 긴 계단을 걸어 내려 백두의 대장정은 10시간의 끝을 맺는다.
돌아가는 발걸음 뒤로, 이국땅의 뜨거운 햇살은 등을 다독이고,
이름모를 야생화는 우리들의 여린가슴을 다독인다.
첫댓글 아니?? 백두산 까지..........그럼 완전한 백두대간종주 했자나......ㅎ
그람 우린 또 땜빵해야 되남요...? 부럽당
시기를 잘마추어 잘다녀 오셨네요 다음에는 진부령에서 장군봉까지 한발 두발 착착 걸음마를....... 나도 그때는 엄마 손바닦에 언처 꼬내꼬내 해보겠지. 참 너무 에리다 운재 커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