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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시대 - 고종 때의 민란들
왜 민란의 시대인가? 19세기는 중세봉건사회가 해체되고 근대사회로 이행해가는 변혁기였다. 봉건사회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각 계층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화되면서 갈등,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다. 특히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조선사회의 해체와 갈등이 더욱 급격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피지배층인 민중에 대한 수탈, 억압이 극심해지면서 민중들은 생존을 위한 자기 보호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제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이에 민중들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수탈을 벗어나고자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 민란, 곧 농민항쟁이다. 19세기 전반기는 민란 형태의 직접적인 봉기가 자주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62년 이후의 시기는 이른바 민란의 시대였다고 하겠다. 1862년의 전국적 농민항쟁을 경험한 뒤 농민들의 운동역량은 크게 고양되었다. 농민들은 다수의 힘으로 폭력적인 저항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이루는 데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축적된 항쟁경험들은 누군가의 지도에 이끌리지 않고서도 농민들 스스로 항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농민역량이 고양을 지배층은 "농민들이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면 무리를 지어 난리를 일으키고, 기강과 분수를 어기며 넘보는 일을 호쾌한 일로 여기고 있어 교화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여겼다.
고종 시대는 민란의 발생이 일상화된 시기였다. 1862년 농민항쟁이 폭발한 이후 대원군 집권기에는 상대적으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1880년대 이후 다시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하여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끊임없이 일어났다. 때문에 정부에서도 민란을 예사로운 일로 여기기조차 하였으며, 민인들도 민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통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은 "백성들이 모두 덕을 생각하고 의리를 두려워하니 반드시 부들이해서 (민란을) 일으켰을 것"으로 인식하는 지배층의 모습에서나, "감히 관리를 죽이거나 성지를 약탈하지는 않고 오직 깃대를 세우고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국왕의 회유가 있으면 곧바로 평정"되는 농민들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고종 시대에 이처럼 많은 민란이 일상화되고 만성화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부적, 외부적 모순의 중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62년 농민항쟁은 봉건사회의 구조적 변혁을 추구하였다. 농민들은 실제로 농지를 경작하는 농민이 토지를 소유할 것을 원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와 같은 농민의 요구를 수용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곧 지주제를 해체시킬 만한 능력을 지니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주제의 해체 대신 균등한 조세 부과를 통해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바로 삼정이정책의 시행이었다. 고종 또한 1862년의 농민항쟁에서 제기되었던 사회문제들을 처리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왕위에 올랐다. 나이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일련의 사회안정화 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는 호포법, 사창제 등의 조세개혁을 실시하여 대내적인 위기를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토호를 억제하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으나 농민들의 사회변혁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하였다. 곧 농민들의 사회변혁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채 최소한의 대응책밖에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종 즉위 한달 만에 황해도 풍천의 민란(1863년) 발생을 시작으로, 칠원(1868년), 통영(1869년) 등에서 잇따라 민란이 일어났다. 이와같은 항쟁들은 철종 때 발생하였던 민란들과 마찬가지로 반봉건을 지향하였다. 결국 고종 때에 계속적으로 발생한 민란은 이미 해체기에 있던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를 더욱 촉진하는 한편 동학농민전쟁의 원류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전까지 고종 때 발생한 민란은 대략 59회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는 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이며, 중앙에 보고조차 되지 않은 민란까지 합하면 100여 건에 달한다. 시기적으로는 유례없을 정도의 한재가 발생한 1888년을 시작으로 1893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는 외세의 침투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서구 열강의 조선 침투가 노골화되면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라는 전쟁을 수행하였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우는 등, 구미 열강과의 수호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조선정부의 국내외 정책에 수정이 가해졌다. 그러한 변화의 물결은 열강과의 수호조약 체결로 귀결되었다. 이제 조선 봉건사회는 반봉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외세의 침략이라는 또다른 모순이 추가된 것이다. 대외적인 위기상황 속에서 농민항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870년대에는 경상도 울산부(1875년) 외에는 이렇다 할 민란이 없었다. 그러나 황해도 장연현(1880년)의 민란은 소강상태에 있던 민란의 재연을 예상케 하는 움직임이었다.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민란 발생 양상은 1883년 이후 곳곳에서 재연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 지배층의 극심한 수탈, 착취는 농민들의 삶에 최소한의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이와 같은 농촌 경제의 파탄으로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더욱 팽배해갔다. 게다가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정치적 위기는 국가체제를 동요시키면서 농민저항의 움직임을 더욱 활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888년을 계기로 민란은 더욱 격화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민란은 해마다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며, 인접 지역으로 쉽게 확산되었다. 마침내 1890년대 초에는 민란 발생이 전국적으로 만연하고 일상화되었다. 특히 1893년에는 민란의 절정기라 할 정도로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 해에만 65건 이상의 민란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폭발적인 민란의 전개는 결국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민란형태의 농민항쟁은 조직적인 농민전쟁의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듯 민란이 폭증하게 된 근본 이유는 이 시기 조선왕조가 온갖 쌓인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국가권력은 민들을 보호해주지 못하였다. 더욱이 거듭된 자연재해와 온갖 세금 징수 명목의 증가로 농민층의 납세 능력은 한계점에 달하였다. 그러나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여 농민들이 도저히 감내할 수 없었다. 또 한편으로 외세 자본세력의 침투로 인해 농촌지역도 급속도로 식민지적 무역구조인 미면 교환체제로 편입되어갔다.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로 인해 곡물 가격은 상승하였으며, 농민들은 등골이 휘도록 일하고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리하여 민심은 매우 흉흉해졌다. 이 시기 이씨왕조가 망한다는 참언이나 (정감록)의 후천개벽설이 유행하면서 민심은 빠르게 이탈되고 있었다. 한편 고종조의 민란은 전국 팔도에서 골고루 발생하였다. 이는 철종 때의 임술민란이 주로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요컨대 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이들 지역 가운데 철종, 고종 때 모두 민란이 발생한 곳은 울산, 성주, 함흥, 황주 등지이고, 고종 때만 두 번 발생한 곳이 수원, 낭천 지역이다. 이 시기 농민항쟁의 특징은 도 단위로 일정한 지역, 일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사호 밀접한 연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1888년에는 함경도, 1889년에는 강원도, 1892-1893년에는 평안도 및 전라도 등 항쟁의 규모가 도 단위로 확대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1893년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일련의 민주항쟁은 지역적으로 볼 때, 1894년 농민군의 활동지역과 대부분 중첩되어 농민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지작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에서 발생한 민란의 지도자인 오지영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의 지도부가 되었다. 덕산에서 봉기를 주도한 나성, 이영탁 은 민란을 일으킨 후 도망하여 농민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같이 1893년의 민란의 주체는 곧바로 1894년 농민항쟁의 주체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대원군 집권기의 3대 민란
풍천민란
이 사건은 향촌사회의 권력을 놓고 향임층과 서리, 군교층의 대립이 수취제도 운영의 부정과 얽히면서 농민항쟁으로 발전한 것, 즉 향전이 농민항쟁으로 발전한 사례이다. 풍천의 조세 운영은 대부분 토지에 집중되고 있었다. 많은 조세가 모두 토지에 집중된 결과 토지소유자들을 중심으로 한 향임배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들은 조세운영권을 장악하고 있던 현직 유리(지방 관아의 이방 아전)와 상정색을 교체하고자 하였다. 향임들은 우선 향회를 열어 "고을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직 유리인 박인희와 상정색 이익주를 부민인 김낙기와 김용운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관철시키고 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동원하였다. 이때 농민들은 만약 기일을 어겨 나가지 않는 사람은 벌금을 징수하고, 나아가 집을 부순다고 하여 공동체적 강제에 의해 동원되고 있다. 이렇게 동원된 수백 명의 민인들은 1863년 12월 26일 관아로 들어가서 유리이 교체와 더불어 7개 항에 달하는 읍폐의 혁파와 원장전의 반환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항쟁은 평화적인 시위로 끝나지 않았다 사태가 처음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자, 통문을 돌려 농민군을 동원한 윤장언은 "슬프다! 저 우매하고 완고한 무리들이 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나에게 '통문을 발해 무리를 모았으나 우리들의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을 오히려 막는다'면서 무수히 난타를 가했다. 겨우 살아서 집에 돌아왔다"고 애통해하였다.
이제 농민들은 향임층의 통제를 벗어나 폭력적인 저항의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통문을 돌려 정소운도을 주도하였던 향임층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농민들을 동원하였으나, 농민들은 향임층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으로 나아갔다. 결국 향임층의 계획은 어긋나게 되었으며, 그들 또한 농민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농민들의 저항이 자신들에 대한 교체운동과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된 유리 박인화와 장교 안원봉 등은 사령들을 동원하여 모여 있는 농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였다. 이에 많은 농민들이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일단 관아에서 물러나와 해산하였다. 이때 동원된 민인들은 주로 "나이 어리고 어리석은 부류들"이었다. 읍내 공격을 주도하여 처벌된 황기장, 조여익, 조양록 등은 마땅한 생업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벌금을 걷거나 집을 부수겠다는 향임들의 말에 이끌려 난에 참여하였다. 곧 민란에 참여, 동원된 사람들 대부분이 최하층 빈민이었던 것이다. 벌금을 낼 정도의 여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벌금을 내고 불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득이한 경우 대부분 머슴이나 노비를 대신 참여시켰기 때문이다.
민란 발생 후 중앙정부에서는 풍천부사 신명은을 파직하는 한편, 의금부에 압송하여 곤장을 치고 금갑도로 유배보냈다. 또한 항쟁을 유발시킨 유리 박인희, 향임 윤장언 등은 엄형 2차 후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철종 때의 농민항쟁에 따른 처벌에 비해 아주 가혹한 조처였다. 결국 대원군 정권은 민란의 원인을 향촌사회 유력자층이 수령의 통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쟁에 가담한 농민층에 대해서는 철종 때보다도 훨씬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고 있었다. 철종 때에는 항쟁의 주도자는 효수되었으나, 풍천민란의 주모자로서 황기정 한 사람만 2차례 형장을 맞은 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되는 처분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 나머지 조여익, 조양록 등은 한 차례 형장을 맞은 후 석방되었다. 또한 수령과 책객(조선시대 고을 원의 비서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 및 유리가 횡령한 원징전은 모두 반환조처하고 책객 송지겸은 황해 감영에 압송하여 풍천민들이 보는 가운데 엄형 1차 한 후 원악도에 유배보냈다. 이와 같은 중앙정부의 조처로 풍천민란은 일단락되었다.
칠원민란
1868년 가을에 발생한 칠원민란은 현감 조현택의 부정, 탐학에 항거하여 일어났으나, 그 외의 항쟁 원인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밝혀져 있지 않다. 난의 주동자인 황상기, 이도여, 전홍이 등은 통문을 돌려 동리별로 농민들을 동원하고, 만약 참여하지 않으면 집을 부수는 등의 공동체적 의무를 강제하였다. 동원된 수천 명의 난민들은 우선 객사에 모여 통곡하고 등소를 올려 수령의 부정과 고을의 폐단을 혁파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등소에는 일반 농민들뿐만 아니라 아전들도 참여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농민항쟁에서 아전들이 농민들의 공격대상이 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현감 조현택은 난민들의 공격을 받아 고을 경계 밖으로 쫓겨났다. 난민들은 감옥을 파괴하여 죄수를 석방하였으며, 항쟁에 불참한 사람들의 집을 부쉈다.
주모자 황상기는 통문을 발하고 농민을 모아 관청을 습격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여러 차례 감영에 소장을 올리느라 가산을 탕진한 자"였다. 이는 1862년 진주민란의 지도자인 유계춘이 "읍에 정소하고 감영에 정소하는 것으로 생애를 보냈다"는 것과 함평민란의 지도자인 정한순이 "여러 차례 감영과 중앙에 정소하고 심지어 격쟁까지 행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부세의 공납제적 운영에 따라 발생하던 수많은 정소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농민들을 대신해 소송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곧 농민적 지식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정소운동 과정에서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황상기는 1862년 농민항쟁 당시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농민 반란세력의 일부로 보이는 함안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도여는 1862년 농민항쟁에 참여했던 자로서, 간신히 풀려나와 소상인으로 전전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사회 저변에 변혁을 지향하는 저항세력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농민적 지식계층이 농민항쟁을 적극적으로 주도함으로써 농민항쟁은 보다 조직화되고 이념화될 수 있는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 민란 발생 당시 무근동과 구산면에서는 한 사람도 가담하지 않았는데, 무근동은 주세붕의 후예가 대대로 사는 마을이었다.
농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통문을 돌리자, 그들은 엄중히 꾸짖으며 물리쳤을 뿐 아니라 동구 밖의 출입을 금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난민들이 현감을 내쫓은 후에 마을에 쳐들어와 집을 부수고 불태웠다. 그러나 민란 후에 중앙정부는 이 마을에 상을 내리고 무근동의 원로인 주희상을 참봉에 임명하였다. 난민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책은 풍천민란의 조처와는 달리 가혹하였다. 병인,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야기된 농민층의 동요를 우려한 중앙정부는 강력한 탄압책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황상기, 이도여, 전홍이, 윤달주 등 민란 주모자들은 모두 효수되었다. 그밖에 등소에 참가한 아전들과 다수의 민란 참여자들은 심한 형장을 맞은 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민란의 원인을 제공한 현감 조현택은 파직된 후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강진현에 유배되니, 이는 통상적인 조처였다. 중앙정부는 "이러한 변이 일어난 것은 토호들의 무단을 막지 못했기 때문"으로 파악하였다. 곧 향촌사회의 유력자층이 주도하여 일어난 항쟁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칠원민란은 토호들의 주도로 일어나지 않았다. 항쟁의 지도자는 농민적 지식인층이었던 것이다.
통영민란
1869년 여름에 경상도 고성현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그동안 고성민란으로 불린 이유이다. 그러나 민란의 발생이 고성현임에는 틀림없으나, 고성현민 전체가 항쟁에 가담한 것이 아닐, 통제영이 소재한 춘원면민들에 의해 일어난 항쟁이었다. 이 민란의 발단은 고성현 호적감색이 엉터리 호적작성이 문제가 되었다. 천민이 유학으로, 유학이 사천으로 뒤바뀌고, 부와 조 혹은 성과 이름이 뒤바뀌기도 하고, 노와 상전이 구분되지도 않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살아 있는 사람이 죽었다고 된 경우도 있었다. 이에 춘원면의 집강과 약정이 이를 시정하고자 했으나 고성현에서 군전 납부를 독촉하므로 잘못된 호적대장대로 징수를 강행하였다. 고성현의 행정집행기구라 할 수 있는 집강과 약정이 군전 징수를 강행하자, 춘원면민들은 향촌 자치기구로 보이는 민소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사정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우선 춘원면 69동에 통문을 발하여 제1차 민회를 개최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등장을 작성하여 통제사에 올렸다. 이에 통제사는 호적감색을 대령케 하고 식년의 호적대장과 대조하여 잘못된 호적을 고치도록 제결하였다. 통제사의 제결에 따라 호적 수정 작업에 착수하였지만, 한가위 명절로 인해 수정 작업을 마치지 못한 채 민인들이 해산하였다.
8월 16일 다시 통문을 돌려 제2차 민회를 열었다. 이때는 이미 무르익은 무력봉기를 준비하는 단계로 진행되고 있었다. 각 기구마다 한 명의 장정을 출정토록 하고 만약 참여하지 않으면 집을 부수고 징벌하겠다며 농민들을 동언하였다. 민회 장소인 어변정에는 수만 명의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유학 이남준이 엉터리로 호적을 작성한 호적감색 이정권을 질책하는 것을 계기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난민들에 의해 호적감색 이정권과 그 아들 이인규, 색리 김탁호가 살해되고 그 시체가 불태워졌다. 그 다음 날인 8월 17일 시체를 불태워버린 후에 난민들이 자연스레 해산함으로써 통영민란은 일단 끝났다. 통영민란은 처음에는 민소판행과 공원 등이 중심이 되어 통문 발송과 정소운동 등 합법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폭력적인 봉기의 형태로 전환하면서 이들은 주도권은 상실하였으며, 빈민층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통영민란에서 주목할 점은 걸인이나 소상인들이 폭넓게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걸인 김원동은 "비록 떠돌아 다니는 걸인이라도 장작 하나를 가져오지 않으면 쫓아낼 것이라고 하여 할 수 없이 장작을 가지고 시체를 불태우는 데 가서 던지고 왔다"고 하여, 협박에 못 이겨 부득이 참여한 것처럼 발뺌하고 있지만, 이들은 실제 항쟁 과정에서 폭력적인 항쟁을 주도하였다. 호적에 입적조차 안되어 집적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자들이 항쟁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는 것은 빈민층, 더욱이 향촌사회에서 유리한 계층이 반봉건 농민항쟁으로 결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통제영은 난의 실상을 조사하는 한편, 난의 수창자로 지목된 김봉구, 윤보출, 김명필 등 3명을 효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걸인 3명은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고성현감 심의직은 파직되었고 전 현감 윤석오도 호적 일을 잘못 처리하여 난을 일으키게 하였다는 죄로 의금부에 압송되었다. 통문을 발한 민소판행이나 공원 등은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그러나 정부는 통제영의 조치가 매우 소홀함을 지적하고 다시 순영에서 재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순영의 조사에 의해 민란의 주모자와 원인 제공장들이 형장을 맞은 후 유배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고성현과 통제영의 관할구역간의 대립도 민란 발생의 한 원인으로 파악하였다. 1900년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통제영이 폐지된 이후에 통제영 소속과 고성군 인민들이 서로 원수처럼 바라보며 물과 불도 같이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고성현과 통제영에서 관할하는 지역주민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870년 고성현을 고성부로 승격시켜 통제영의 직할 기관으로 편제하였다.
개항 이후 동학농민전쟁까지
개항 이후 동학농민전쟁 전까지 고종 때 발생한 민란은 대략 50여 회에 달한다. 이 시기 민란의 주요 목표는 반봉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세 자본주의 세력의 침투로 인해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울산민란
1870년대에 들어와 민란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는 대원군 정권의 반동정치 속에서 앞 시기의 민란들이 실패로 돌아가고 변혁적 국면이 침체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1870년대에 발생한 유일한 민란이 있다. 바로 1875년 4월 경상도 울산부에서 발생한 민란이 그것이다. 울산민란은 아전 김양서의 공금 횡령이 발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정이 들통날 것을 우려하여 과중한 세금(결세)을 거둬들여 공금을 채워넣으려고 하였다. 울산부민들은 과다한 세금 징수에 항의하여 남창과 동천에서 두 차례 집회를 갖고 감영에 소장을 올렸다. 그러나 초기의 평화적, 합법적 집회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격화되었다. 난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관아로 난입해 들어갔다. 그들은 관속들을 난타하고 부사를 고을 경계 밖으로 내쫓고자 하였다. 또한 감옥을 파괴하여 죄수들을 놓아주고 50여 호에 달하는 아전들의 집을 부수었다. 그후 난민들은 경상좌병사 정지용의 설득으로 해산하였다.
민란 발생 소식에 접한 중앙정부는 안핵사를 파견하여 실상을 조사토록 하였다. 안핵사의 보고에 따라 아전 김양서는 효수당했다. 울산부사 정기대와 전 부사 이희성은 아전에게 공금을 유용토록 방관한 책임을 물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민란 수장자로 지목된 박남표, 김연암, 이층감 등 3인은 효수되었다. 그 외에 다수의 민란 참가자와 아전, 장교배들은 혹독한 형장을 다섯 차례 맞은 후에 외딴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민란에 참가하지 않은 내성면, 상부면, 동면 세 면의 대표들에게는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와 같은 조처로 울산민란은 일단락되었다.
여주민란
1885년 2월 18일 발생한 여주민란의 원인은 1856년 이래 이방 윤보길 일파가 자행한 불법 행위에 있다. 직접적인 발단은 1884년 8월 의정부의 명으로 도결(각종 잡부금을 전세에 부과하여 징수하던 방법)을 혁파하고 환곡의 원금을 징수하는 과정에 있었다. 원래 도결은 사정에 부과되는 세금을 모두 전결에 얹어서 징수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징수 방법은 주로 화폐가 이용되었다. 이 도결은 19세기 전반 삼정 문란의 집약적 표현이기도 하며, 1862년 농민항쟁 때 주요 혁파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의 경우 중앙정부의 도결 혁파가 반대로 농민들의 강한 반대를 초래한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화폐로 대납하던 것을 현물로 납부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세금이 인상되었음은 물론, 세금을 내어야 하는 호구가 증가한 것이다. 이들은 도결 납부 때 납세의 부담이 없던 호구로서 주로 하층 빈농들이었다. 곧 개항 이후 곡물가의 상승과 실질 화폐 가치의 하락에 의한 급속한 인플레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세원이 미곡으로 되는 것은 농민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반면에 실제 가치가 높은 미곡으로의 세입은 중간차익을 노리는 세금 징수자와 중앙정부에 유리하였다.
둘째 조세제도의 운영과정에서 아전배들의 횡포가 극심하였다. 이들은 부호들과 결탁하여 납세액을 줄여준다든지, 세금이 면제된 전결이나 농사짓지 않는 땅에도 세금을 징수하였다. 더욱이 화폐로 대납할 때 쌀값을 높은 가격으로 책정하여 세금을 실질적으로 인상하는 편법을 자행하였다. 이는 결국 도결을 통한 안정적인 조세운영구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정선민란
1889년 1월에 발생한 정선민란은 군수가 외지인 및 향임배들과 결탁하여 평민들에 대해 탐학을 자행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는 다른 지역의 민란이 아전배들이나 토호들의 불법 탐학이 주요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정선군수는 죄 없는 상인들을 붙잡아들여 벌금을 매겨 착취하기도 하고, 불효, 불경죄로 향촌민들을 얽어들이는 등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그러나 정선민란의 또 다른 원인은 채광에 따른 문제였다. 개항 이후 사금을 비롯한 광물의 일본 수출과 수공업의 발전으로 광산물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도 광무국을 설치하여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채광을 장려하였다. 광무국에서 채광 승인서를 받은 사람은 금맥을 찾기 위해 장소를 가리지 않고 파헤쳤다. 심지어는 남의 전답이나 묘지까지 파헤치는 등의 횡포를 부려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따라서 한번 광산이 개발되면 그 지역의 많은 전토가 황폐화되어 농민들의 소유권 행사가 침해당하였다. 더욱이 광산 개발로 농사짓지 못하는 전토에 대한 세금 징수가 행해져 농민들에 대한 피해가 가중되었다. 이렇게 거둬들인 세금은 물론 수령과 아전배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더욱이 광산 개발에 따른 급속한 인구팽창은 소규모의 안정된 사회를 운영하던 향촌사회에 많은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치안 부재에 빠른 도적의 횡행으로 광부와 지역 주민간의 충돌이 자주 발생하였다. 수령들은 이를 빌미로 광부들을 탄압하고 토색질을 자행하여 광부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때로는 광부들이 수탈을 견디다 못하여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88년에 일어난 초원민란이 대표적이다. 정선민란은 결국 광산개발에 따른 폐단으로 지역주민들이 봉기한 것이다.
함창민란
1890년 8월 3일 현감과 이방, 향임배들이 불법 탐학을 일삼는 데 항의하여 함창민들이 봉기하였다. 함창현감은 부호들을 무고한 혐의로 치죄하고는 석방시켜주는 조건으로 5-6만 냥에 달하는 거금을 수탈하였다. 또한 이방 김규목은 관수미 첨가를 통해 중간 수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란의 직접적 원인은 관청 근처에 있는 관남지의 준설에서 비롯되었다. 8월 2일에 시작된 준설에는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각 면의 민정, 젊은이들을 모두 징발하여 수천 명의 민정이 동원되었다. 민란의 주모자들은 부역에 동원된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그 동안의 폐단을 바로잡자는 여론을 일으키고 실천에 옮겼다.
8월 2일 저녁 양범리에 있는 이장운의 유정점막에 관남지 준설역을 마치고 돌아가던 농민들이 모였다. 이곳에서의 논의에 따라 각 면과 동에 통문이 발송되었다. 8월 3일 아침 농민 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유정점 앞의 냇가에서 민회가 개최되었다. 민회에 모인 농민들은 "등소는 등소이고 향중에서 일을 보는 자들의 집을 우선 부수자"고 결정하였다. 직접 수탈을 자행한 아전과 향임배들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이처럼 민회를 통해 결집된 농민들의 의사가 존중되고 있는 것이 이 항쟁의 특징이기도 하다. 당시 항쟁을 주도한 남노선, 이장화는 모두 사족 출신으로, 이들은 읍폐를 감영에 등소하여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민회가 열리고 농민들이 폭력행사 주장에 따라 사태는 그들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몽둥이로 무장을 한 후 아전, 향임배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부수고 불태웠다. 봉기 농민들의 모습은 "적병을 향해 나아가는 병사"처럼 조직적이었고 격렬하였다. 봉기 불참자에 대하여는 벌금과 벌책으로 위협하였다. 일종의 공동체적 강제가 동원되어 참여 농민들은 더욱 늘었다. 봉기 농민들은 이방 김규목의 집을 불태우고 관아 앞에 있던 관남지로 모여들었다. 남노선, 이장화는 이때까지도 등소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었다.
이들이 소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 흥분한 농민들은 관아로 난입해 들어갔다. 농민들은 수령을 때리고 옷을 찢었으며 수령 임명장을 빼앗은 다음 고을 경계 밖으로 축출하였다. 농민들을 만류하던 남노선과 이장화의 지시는 먹혀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타당하기까지 하였다. 8월 4일에도 봉기 농민들의 이, 향가와 지주들에 대한 습격, 파괴, 방화가 잇달았다. 5일 임시 겸관 문경현감이 도착하여 농민들에 대한 회유와 민란 주모자 색출에 들어갔다. 그러나 농민들이 각각 자신이 수창자라고 주장하여 주모자 색출은 여의치 않았다. 이때 봉기 농민들은 사건의 본말을 정소하고 세금 과다 징수 폐단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 관군의 숫적 열세와 농민들의 심상치 않은 재봉기 움직임에 의해 함창민란 관련자 색출, 체포 작업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9일 민란 주모자 남노선, 이장화 등 7명이 체포되고, 19일 조사관 이정재가 관련자 총 22명을 체포, 구금함으로써 함창민란은 일단락되었다.
제주민란
중국 및 일본 어민의 우리 연안에 대한 불법어업은 개항 직후부터 빈번하게 나타났다. 특히 제주 지역에 대한 일본 어민들의 행패는 극심하였다. 1891년 3월에 발생한 제주민란은 일본 어민들의 행패에 대한 항쟁이었다. 일본 어민들은 발달된 어업기계를 이용하여 연안의 고기를 모두 잡아 제주도 어민들의 생업을 어렵게 하였다. 심지어는 일본 어민들은 조업 중이던 제주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를 빼앗고 그들을 묶어 물 속에 던지며 육지에 올라와 총칼로 주민들을 살해하고 노략질까지 자행하였다. 이러한 일본 어민들의 횡포에 대하여 정부는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여러 차례 일본 공사에게 일본 어민들의 불법행위를 항의하는데 그쳤다. 결국 제주 어민들의 항쟁은 일본 어민의 침탈을 막아주지 못하는 봉건정부의 무능력에 대한 항의 표시였던 것이다. 이 난을 통해 제주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봉건정부에 대한 불만과 아울러 반외세의 저항의식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제주도민의 반봉건, 반외세의 저항의식은 1898년과 1901년이 제주민란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함흥민란
1892년 2월 24일 주남사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봉기한 함흥민란은 감사, 아전배, 향임배들의 가렴주구에 의해 발생하였다. 관원과 아전들은 하나의 수탈집단을 형성하여 순영의 존문채 명목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 징수하였다. 더욱이 쌀이나 곡물을 시중에 내다 팔면 곧바로 존문채를 비롯한 각종 잡세를 거둬들였으므로, 시중에 땔나무와 쌀이 반입되지 않는 등 상업활동이 마비될 정도였다. 더욱이 야간순찰을 하면서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집을 발견하면 붙잡아다 벌금을 징수하여 착복한 것이 3400냥에 달했다. 제사나 아기 분만을 위한 경우일지라도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
회령민란
1892년 9월 20일 회령부민들이 각사에 통문을 돌려 민회를 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회령부사 홍시형은 부민들의 움직임을 진압할 목적으로 장교 이한회를 운두사에 파견하여 민회 참석자들을 일일이 조사해 오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한회는 소기이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아무도 민회 참석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한회는 향도소임 2명을 붙잡아다 매질하여 12명의 이름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날 운두사민 100여 명이 이한회의 집에 몰려들어 몽둥이와 낫 등으로 위세를 과시하며 위협하였다. 그러나 이한회가 이름을 적은 명단을 찢고 선처를 약속하여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으며 주민들은 흩어졌다. 이들이 흩어진 틈을 타서 이한회가 읍내로 도망가자, 운두사민들은 관에 소장을 올리기로 하였다. 곧 이한회의 강압, 이중적 태도가 민란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운두사민 300여 명이 읍으로 출발하였으나, 통문이 전해지면서 수천 명에 이르는 농민들이 읍에 모여들었다. 민들의 처음 의도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이었다. 그러나 겁을 먹은 회령부사가 피신하고 아전과 향임배들이 관아로 숨어들자, 부민들의 움직임은 점차 과격해졌다. 이들은 관아로 쳐들어가 관청 일부를 파괴하고 폐단을 일삼은 아전과 향임배들의 집을 부수었다.
분풀이를 한 후 곧바로 해산하는 다른 민란관느 달리 회령민들은 사태를 예의 주시하며 주도면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9월 29일 회령민란의 소식이 전해지자, 온성부사가 조사관으로 임명되었다. 회령부민들은 연명으로 상소하여 민폐를 바로잡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여기에서 향교와 향임의 직책을 억지로 파는 폐단, 향리들의 공전 가렴주구, 중앙저우로의 공물 진상 폐단 등이 거론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회령민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회령민들의 조직적 투쟁은 부사를 비롯하여 그들의 주된 공격목표였던 향교의 책임자들, 향임, 향리배들을 처벌받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민란은 앞서 전개된 다른 민란과는 달리 한층 게획적이고 조직적인 전개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민들의 의시이 한층 성숙되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청풍민란
1893년 청풍민란은 주로 삼정 운영 과정에서 세금의 불법 인상과 과다 징수 등 수취제도의 문란 때문에 일어났다. 특히 잡역, 잡세의 징수 기구인 민고의 폐단과 고리대 성격을 가진 관청의 식리전은 지방관이나 아전배들의 자의적인 수탈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고가 설치되어 운영되던 군현의 농민들은 막중한 세금 부담에 허덕이고 있었다. "각 고을에는 관고나 민고가 있는데...... 설치된 이래 용도가 절제가 없고 거둬들이는 명목이 없어 백성들의 큰 고통이 되고 있다. ...... 가전 하던 것이 지금은 몇 냥에 이르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것이며, 고을이 어찌 폐허가 되지 않겠는가" 할 정도로 관고와 민고의 폐단은 심각하였다.
황주민란
1893년 황주민란은 진전과 궁장토의 폐단이 원인이 되어 발생했다. 황주이 전폐는 다른 지역보다 특히 심하였다. 황주에는 수진궁과 순화궁의 막대한 장토가 있었고, 1890년 경에는 2000여 결이나 추가되고 있었다. 또한 이에 편승하여 기존의 민전이 궁결에 편입되기도 하고 궁결이 사유지화되는 양상도 빚어졌다. 문제는 이들 궁장토에 대해서는 잡역이 면제되는 데 있었다. 궁장토에 대한 면제액은 곧바로 민전을 가진 농민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래서 한 농민이 10명 분의 세금을 납부하는 등 토지 수확량으로는 도저히 과중한 세금을 충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궁장토를 경작하는 농민들 또한 도장배들의 과다한 소작료 징수로 인하여 생계조차 힘들 정도였다. 더욱이 1889년 큰 장마가 들어 농사를 짓지 못한 땅이 모두 980여 결에 달하였으나, 이들 땅에 대해서도 세금이 부과되었다. 결국 이러한 세 부담은 농민들의 생계유지를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농민들은 이제 생활기반인 농촌을 떠나거나 이와 같은 수취구조에 대해 저항을 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고부민란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군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 민란은 동학농민전쟁의 전초였다. 이 난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불법 자행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다. 당시 고부는 비옥한 농토와 서해안의 풍부한 해산물까지 유통되는 매우 번성한 공르이었다. 조병갑은 이곳에 부임해오자마자 온갖 불법과 탐학을 일삼았다. 핍박을 참다 못한 군민들이 두 차례에 걸쳐 관아에 몰려가 등소를 올려 폐단을 바로잡기를 호소하였지만, 붙잡혀 매맞고 쫓겨났을 뿐이었다. 군민들은 합법적, 평화적 시위는 폐단을 바로잡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등소 운동의 장두였던 전봉준을 중심으로 무력봉기를 준비하였다. 이 사이에 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보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재취임 공작을 벌여 1894년 1월 9일 다시 고부군수로 재부임하였다.
1월 10일 저녁, 사전 연락에 의해 말목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관아로 달려갔다. 그러나 조병갑은 이미 피신한 뒤였다. 이들은 관아를 점령한 후 옥에 갇혀 있는 자들을 풀어주었고, 무기고에서 꺼낸 무기로 무장하였다. 그리고 과다징수한 세금을 농민들에게 환급하고 민폐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만석보를 허물어뜨렸다. 고부민란의 소식이 전해지자, 중앙정부는 조병갑을 직위 해제하여 서울로 압송하고, 그 후임으로 박원명을 임명하였다. 2월 말쯤 신임 군수 박원명이 고부에 부임했다. 그는 조병갑의 잘못을 인정하고 군민들의 뜻을 받아들여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와 같은 유화책에 따라 봉기에 참가했던 농민들이 하나둘 해산하기 시작했다. 민란 지도부 또한 다른 곳으로 옮겨가 고부민란은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이 해산한 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오지 않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에 도착하였다. 그는 봉기 참가자와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고을을 발칵 뒤집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동학교도로 몰아 붙잡아들이고 집을 불태우고 부녀자를 살육하는 등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다. 결국 이용태의 횡포는 동학교도들의 봉기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반봉건, 반외세 항쟁 제주민란 - 방성철과 이재수의 난, 방성칠의 난
제주민란과 남학당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실패 이후에도 농민항쟁은 계속되었다. 그 항쟁은 종래의 자연발생적, 지역분산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고, 혹은 농민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학당, 활빈당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농민항쟁의 주된 원인은 봉건적 토지소유 문제와 국가의 농민층에 대한 조세수탈, 그리고 이에 기생한 관료들의 부정부패 등이었다. 요컨대 농민항쟁의 우선적인 목표는 반봉건의 문제였다. 시흥(1898년), 용인(1899년), 경흥(1900년), 임실, 은진, 영산 의령, 창녕(1903년) 등지에서는 과다 세금(결세) 징수와 흉년 때의 무자비한 납세 독촉 등이 원인이 되어 민란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환곡문제를 둘러싸고 제주(1896년), 함흥, 울진(1902년), 간성(1903년) 등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중 1898년과 1901년의 제주도 농민항쟁은 대표적인 민란이었다. 1898년의 제주민란은 이른바 '방성칠의 난'이라고 불린다. 방성칠은 본래 전라남도 동북군(현 화순군 동북면) 사람으로 남학교도였다. 그는 1894년 제주도로 건너가 화전민으로 정착해 살다가 1898년 민란을 주도하게 되었다.
남학은 동학과 거의 비슷한 시기인 1860년대에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유포되었던 신흥종교였다. 이 종교는 동학과 마찬가지로 유, 불, 선 3교와 민간신앙까지를 포괄하였으며, 후천세계와 무량낙원의 개벽을 기치로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이들이 믿은 후천세계는 낮과 밤의 차이나 춥고 더움의 구별이 없으며, 빈부와 귀천의 차별이 없는 '이상향'이었다. 사람들은 800세까지 장수하며, 죄와 고통이 없는 이른바 지상천국이다. 특히 남존여비 의식이 팽배한 당시에 남녀평등이라는 파격적인 기치를 내걸었다. 그런데 후천세계로 가는 과정에는 3재와 8난이 있으며, 인간의 선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람들이 후천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남학의 무극대도를 닦아야만 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남학의 기본 교리로 일상사에서 겸허한 태도와 수양을 중시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남학교도들도 용담 대불리에서 봉기하였다. 그러나 남학교도들의 봉기는 농민군과 계획되거나 지원을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들이 믿는 후천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일어난 독자적인 봉기였던 것이다. 이들은 누런 저고리를 입고 오방기 아래 집결하여 "남문 열고 바라 치니 계명산천 밝아온다..."는 노래를 부르면서 기세당당하게 대벌리까지 진출하였다. 봉기의 주도세력은 주로 교단의 하급 간부들과 일반 신도들이었다. 그러나 교단 지도부의 행태는 상당히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들은 난세를 당해서는 오직 도덕을 닦고 안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도들의 집단행동을 극력 저지하였다. 결국 지도부의 방해로 봉기는 좌절되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후 신흥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1895년 봄 교주 김광화를 포함한 남학 지도부 8명은 전주 서문 밖에서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되었다. 박해를 피해 제주도로 이주한 남학교도 일부는 당시 화전 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대정군 광청리의 산간지대에 주로 정착하였다. 이들은 종교의식을 해하는 한편 주위 농민들에게 남학의 교리를 전파하는 등 포교활동도 조심스럽게 행하였다. 당시 사회적인 불안과 더불이 민심의 이반 등으로 이들은 정착지를 중심으로 교세를 점차 확대할 수 있었다.
등소에서 무력 항쟁으로
1898년 2월 7일 방성칠을 지도자로 한 광청리 일대 화전민 수백 명이 제주성 내의 관아로 몰려와 소장을 제출하였다. 소장의 주요 내용은 일찍부터 이곳의 농민들에게 불만의 대상인 화전세, 목장세, 및 호포의 과다징수와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제주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렸으며, 도민들은 제주목사가 억누르기 어려울 정도로 술렁대고 있었다. 당황한 제주목사 이병휘는 일단 소장을 받아들여 폐단 시정을 약속하는 등, 평화적인 시위로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토착 양반들의 집단거주 지역인 조천에서 비밀리에 장정 60여 명을 모아 부족한 관군의 무력을 보충하는 한편, 격앙된 도민들의 움직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장두인 방성칠을 잡아들이고자 하였다. 제주목사는 철저하게 위장된 술수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였다. 이 소식에 접한 방성칠과 화전민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이들은 보다 적극적인 대응책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제 등소라는 평화적인 방법보다는 물리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게 이르렀다.
남하교도의 간부인 방성칠, 강벽곡, 정산미 3인이 지도자가 되어 육지에서 이주해온 화전민 남학교도 수백 명으로 친군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1898년 제주농민항쟁의 주체는 토착민보다는 남학당을 중심이었다. 이들은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려 집집마다 장정 1명씩 내보낼 것을 독려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인 난민들은 모두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몽둥이로 무장하는 등, 일전을 불사하는 대오를 정비하였다. 특히 남학당 출신의 친군은 모두 누런 색의 전립을 쓰고 남자를 써서 몸에 붙여 토착민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였다. 친군은 명령체계가 잘 짜여진 정예군이었다. 이들의 대오는 질서정연하고 조직적이었다.
2월 26일 친군 선도하에 난민들은 3대로 나뉘어 제주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28일 제주성 밖에 도착한 난민들은 진을 치고 공격채비를 갖추었다. 이날은 동궁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성 안에서는 목사와 3군수가 모여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방성칠은 중간착취를 일삼은 향리들을 성 밖으로 내보낸다면 더 이상 사태를 확산시키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시 관군으로 수많은 이들을 제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런데도 목사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끝내 회답하지 않았다. 3월 1일 남학당 친군을 선두로 난민들은 성 안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목사와 대정군수 채구석을 구타하고 성 밖으로 내쫓았다. 혼란의 와중에서 목사를 지키던 이방은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난민들이 죄를 묻고자 했던 향리들은 이미 달아나서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3월 2일 민란 지도부는 관청 앞에 방문을 내걸어 민란의 성공을 알렸다. 그 내용은 "제주, 대정, 정의 3군수를 내쫓고, 환곡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것이었다.
독립국가 건설을 구상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방성칠은 단순한 조세 거부가 아니라 정치적 병혁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제 제주민란은 농민항쟁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상향을 향한 독립국가 건설을 시도하는 단계로 진행된 것이다. 그는 우선 새로운 왕조의 도래를 (정감록)과 같은 예언서들을 인용하여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정당설을 제시하였다. 제주도가 임금이 솟아날 방성분야라는 천문지리설과 자신의 성씨가 일치된다는 것, 그리하여 바로 이때가 진인이 해도에서 나타난다는 정감록설이 실현될 때라는 것이다. 나아가 제주도에서 독립국가를 건설한다 하더라도 외세에 시달리고 있는 정부가 군대를 파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와 같은 방성칠의 독립국가 건설 구상은 봉건적 수탈과 개항 이후 일본 어민의 침투에 시달려온 농, 어민들의 욕구를 구체화시킨 것이었다. 물론 이 구상은 근대지향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의 주장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감록류의 예언서에 바탕을 둔 매우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으며, 제주도에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하려는 데에 그치는 소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는 정도령이 해도에서 솟아나 군사를 이끌고 육지로 건너가 조선왕조를 멸망시키고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연다는 구상보다도 훨씬 제한적이었다. 더욱이 이와 같은 계획은 먼저 민란 지도부 수준에서만 논의되었을 뿐 공식적으로 천명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목표 아래 민란 지도부는 우선 각 포구에 명령을 내려 배의 출입을 막아 육지와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제주도민의 민란 지도부에 대한 지지는 열성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민란 지도부도 재구성되었다. 새로운 민란 지도부는 남학당의 방성칠, 강벽곡, 정산마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김낙영, 최형순 등으로 이루어졌다. 민란 참여자에 대한 전열 재정비와 무장도 이루어졌다. 남학당만으로 구성된 어남군은 민란군의 핵심부대였다. 이들은 무기고에서 꺼낸 총검으로 무장하고 성 안을 장악하였다. 각 마을에서 차출된 장정들 가운데 2천 명을 선발하여 좌, 우 대장 김낙영, 최형순 휘하에 각각 천 명씩 배치하였다. 이들은 성 밖을 지키고 각 마을을 돌면서 무력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내, 외진의 편제와 역할분담이 이루어지는 한편, 훈련도 병행하였다.
3월 4일 민란 지도부는 제주도에 유배중이던 정병조, 황병욱을 지도부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5일 새벽에 성을 빠져나와 조천으로 도망하였다. 뒤이어 제주성 내에 있던 유배중인 사람들과 토착 양반 일부도 성을 빠져나와 조천으로 도망하였다. 그들은 조천의 토착 양반인 김씨 문중과 연합하여 6일 아침에 민란 대항군인 창의군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창의군은 조천진 무기고에서 꺼낸 창 80자루로 무장하였다. 그러나 대항군으로 선발된 농민들과 포수들은 김씨 문중의 위세 때문에 억지로 모였을 뿐이다. 6일 낮, 대항군 형성 소식이 전해지자, 민란 지도부는 조천에 대한 선제공격을 단행하였다. 억지로 모여 있던 대항군 대부분이 공격도 받기 전에 도망가벼려, 민란군은 별다른 싸움 없이 조천을 함락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양반가 7-8채가 불탔으며, 김씨 문중의 김희선 등이 죽음을 다하였다. 이렇게 조천 공격이 성공리에 이루어짐으로써 민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민란의 종말
조천 공격을 성공리에 수행한 민란 지도부는 이제 전열을 재정비하는 등 관군의 공격과 일본군의 내습 가능성에 대비하였다. 허물어진 성벽을 수리하고, 성벽 위에 돌 수만 개를 날라다 놓는 등 방어와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한편 성 안에 있던 유배자들은 전직 교리 이용호를 중심으로 토착 양반 세력들과 합세하여 다시 대항군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용호는 최형순, 김낙영과 비밀리에 만나 민란 지도부의 내부사정을 파악한 다음, 지도부 교란책을 제시하였다. 이용호가 내놓은 방안은 최형순, 김낙영이 방성칠에게 일본 복속을 제의하여 그들 세 명이 배를 타고 일본을 향해 가는 척하다가 도중에 방성칠을 죽인 다음, 대항군을 일으켜 구심점을 잃은 민란군을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최형순과 김낙영은 계획을 실천에 옮겨나갔다. 중앙 정부군이나 일본군이 공격할 경우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민란 지도부는 최형순, 김낙영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3월 12일 방성칠은 제주도민들에게 중앙정부에 사정을 알리려 상경한다는 거짓말을 하고는 배를 타기 위해 산저포로 갔다. 그러나 민중들 사이에는 일본 복속설이 유포되었다. 이는 대항군이 교란책동으로 이용한 계략이었다. 더욱이 일본 배를 타고 떠나는 방성칠의 행동에 민중들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결국 민란 지도부의 이율배반적인 행위는 실질적인 지지기반인 민중들의 불신감을 초래하였다. 배를 타기 위해 포구에 간 방성칠 일행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승선하지 못하였다. 13일에는 배를 탔으나 거센 바람으로 배가 나아가지 못하여 되돌아와야만 했다.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김낙영과 최형순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더욱이 방성칠도 초조한 기색인 그들에게 점차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결국 김낙영과 최형순은 말을 타고 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들이 성 안에 들어오자 대항군은 성문을 닫아걸고 창의를 선포하고 성 안을 장악하였다. 민란 지도부와 어남군 대부분이 방성칠을 환송하기 위해 포구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성 장악은 손쉽게 이루어졌다. 상황의 급격한 변화는 민란군의 사기를 땅에 떨어지게 하였다. 더욱이 일반 농민들조차 민란군에게 더 이상의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방성칠과 민란군은 성을 포기하고 성에서 서쪽 40리 밖에 있는 귀리로 퇴각하였다. 성을 장악한 대항군은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징발하여 민란 토벌군을 구성하였다. 민란 토벌군은 전열을 갖춘 다음 귀리로 쳐들어갔다. 토벌군 5백 명은 관군 복장을 갖춰 민란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들의 작전은 성공하였다. 민란군은 정부군이 내려온 것으로 착각하여 별다른 저항없이 패주하였다. 민가로 숨어들었던 방성칠은 창과 칼에 찔려 죽었다. 강벽곡 등 민란 지도부 7명도 잇따라 죽임을 당했다. 또한 민란군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과 보복이 단행되는 등 아비규환의 살육이 자행되었다. 이로써 1898년 2월 7일 등소운동으로 시작된 제주민란은 30여 일 만에 일단락되었다.
1898년 제주민란, 즉 방성칠의 난은 실패로 끝났다. 민란의 주요 세력은 남학당이라는 종교 집단이었다. 민란 초기 일반 농민들의 지지는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항쟁이 계속되면서 남학당 중심의 민란 지도부와 일반 농민간의 결속력은 약화되었다. 더욱이 민란 지도부는 민중들을 신뢰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민중들을 운동의 주체에서 소외시켰다. 실질적인 지지기반인 민중에 대한 불신은 곧바로 민중들의 신뢰를 잃게 되었으며, 민란 실패의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이재수의 난
민란의 발생과 천주교
1898년의 방성칠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제주도 농민들은 이 민란을 통해 조직화된 운동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경험의 폭을 넓혔다. 동시에 운동의 실패과정에서 민란 지도부의 한계와 토착 지배층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등 모순된 현실을 점차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측면은 3년 뒤에 발생하는 1901년의 제주도민란으로 이어졌다. 1901년 발생한 제주민란은 이재수의 란이라고도 한다. 이재수는 제주민이 2차 봉기 때에 서진장으로 비타협 무장투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본래 대정현의 관노 출신이었다. 갑오개혁으로 노비제가 혁파된 이후 관아의 급사 노릇을 하다가 제주민란 당시 향장(좌수) 오대현의 하인으로 있었다. 당시 21세의 청년으로 제주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항쟁을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제주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역사적인 영웅으로 칭송, 구전되고 있다. 더욱이 대정 일대의 촌로들 사이에서 신나게 이재수의 영웅담을 토해내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1901년의 제주민란은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이에 따른 폐단, 정부의 조세 수탈에 의해 발생하였다.
천주교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과 1896년 교민조약 등을 통해 선교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모진 박해의 시련이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1900년을 전후하여 특권 세력화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국왕이 지방 관리들에게 "신부를 나처럼 대하라"는 엄명을 내렸으므로 신부의 위세는 거리낌이 없었다. 천주교는 조선의 고유한 가치체계나 토착종교 등을 교리에 위배된다 하여 전면 부정하였다. 제주도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1899년 5월부터였다. 1901년 봄까지 2년간의 포교로 242명의 영세자와 6-7백 명의 예비신자를 배출하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전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비율이었다. 그러나 입교자의 태반은 사이비 교도였다. 그들은 종교적 신앙심에 의해 입교하지 않았다. "관리와 동등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어서" "죄를 지어도 성당에 들어가면 못 잡아가기 때문에" 등등 천주교가 갖고 있는 특권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입교자 대부분은 토착 양반세력과 제주도에 귀양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1898년 농민항쟁 당시 농민군을 토벌하던 집단이었다. 결국 양적 팽창에 주력한 선교활동이 필연적으로 드러낸 문제점이라고 하겠다. 천주교도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챙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심지어 사람을 붙잡아다 머리를 말꼬리에 붙들어 매서 끌고 다니는 등의 사형까지 자행하였다. 이 와중에 천주교를 박해하는 정의군 효돈 마을의 명망있는 유생을 성당으로 끌고가 고문을 하다 치사케 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지방관은 살인범을 구금하기는커녕 수사조차 진행하지 못하였다. 제주도는 천주교도들에 의해 무법천지가 되었으며, 통치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신부는 천주교인들의 불법행위에 대해 방관하거나 보호하는 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치외법권을 남용하여 지방행정에까지 간섭하는 등, 제주도민의 반천주교 의식을 자극하였다. 특히 천주교인과 제주도의 경제적 전권을 장악한 봉세관의 결탁은 제주도민의 생존권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다. 대한제국의 정부는 수취제도의 근대적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지방 재정을 전부 중앙 재정에 편입시켜 일원화하였다. 그 결과 지대와 지세의 인상으로 농민에 대한 수탈만 가중되었다. 더욱이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정부는 전에 없던 각종 잡세를 부과하였다.
잡세는 왕실재정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내장원에서 징수하였는데, 제주도에서 1899년 봉세관 강봉헌이 파견되었다. 그는 전권을 행사하면서 세금징수가 가능한 거의 모든 토지와 산물을 조사하여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는 철저하게 제주농민의 생존권을 도외시한 채 국가와 왕실재정 확충만을 위해 종사하였다. 이에 따라 봉세관은 제주도민들에게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변보호와 업무수행을 위해 천주교도인들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인들은 프랑스 인 신부와 봉세관이라는 두 개의 절대권력을 바탕으로 법적,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결국 침탈적인 봉세관과 천주교인, 귀양인 세력과 그에 대항하는 지방세력과 일반 민중의 적대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등소에서 무력충돌로
1901년 4월 9일, 강우백을 중심으로 한 대정군민들이 군수에게 소장을 올려 봉세관 및 천주교도에 의한 수탈과 폐단의 시정을 호소하였다. 12일에는 정의군에서 이와 동일한 집단행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제주민들의 움직임은 봉세관과 이를 매개로 한 천주교인들의 경제적 수탈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자구책이었다. 분산적인 농민들의 움직임과 달리 4월 초에는 위로부터의 저항형태인 대정상무사가 조직되었다. 중심인물은 대정군수 채구석과 향장 오대현 등이었다. 이들은 자위조직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반천주교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상무사이 주요 목적은 천주교인들의 폐단을 방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4월 29일, 반천주교운동을 해오던 상무사원 송희수에 대한 천주교인들의 구타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써 민심이 동요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팽배하는 등 불안이 가중되었다. 5월 6일에는 천주교인들과 상무사원들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때 천주교인인 전 이방 김옥돌이 향장 오대현이 기생첩을 간음한 사건이 일어났다. 대정군수는 두 사람을 태형에 처한 후 김옥돌은 수감하고 오대현은 석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천주교인인 진사 김명현이 50여 명의 천주교인을 이끌고 와서 옥문을 부수고 김옥돌을 빼낸 후 상무사원들을 잡아갔다. 그러나 뒤쫓아온 상무사원들과 천주교인들 간에 충돌이 빚어져 천주교인 2명이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제주민란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상무사는 향촌조직을 통해 대정군민들을 집결시키고 인접 지역에도 통문을 돌려 민회를 개최하였다. 민회에서는 봉세관의 세폐와 천주교인들의 교폐를 성토한 후 제주성으로 가서 목사와 봉세관에게 등소하여 이들 폐단의 시정을 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서래민 장두 오대현, 동래민 장두 강우백을 선두로 하여 제주민들은 두 길로 나누어 제주성으로 향하였다. 봉세관과 천주교도인들의 폐단에 시달리던 다른 제주도민들이 적극 호응하여 민중의 세력은 급격히 늘어났다. 민중의 위세에 놀란 봉세관 강봉헌은 서울로 피신하였다. 12일 민들이 한림동에 도착하자, 제주목사 김창수는 일체의 폐단과 교폐를 정부에 보고하여 혁파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토록 종용하였다. 제주민들은 일단 5월 16일 등소절치를 밟은 후 제주목사의 약속을 문서화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해산키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1901년 제주민란의 제 1차 봉기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인 등소운동이었다. 제주민들이 온건한 노선을 취한 것은 1898년의 방성칠란이 무력투쟁을 전개하다가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안이었다. 이는 수탈적 조세수취 구조의 변혁에 주안점을 둔 반봉건운동이었다. 그러나 신부와 천주교인들은 이를 폭도들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교도에 대한 성전을 선포하였다. 천주교측은 교인 천여 명을 소집하여 제주목의 무기고에서 꺼낸 총기 등으로 무장하였다. 5얼 14일 800여 명의 교인이 한림동 민회소에 가서 농민들에게 발포하고, 장두 오대현을 비롯한 6인을 체포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대정현으로 쳐들어가 인명을 살상하고 무기고를 열어 중무장하였다. 천주교측은 장두 오대현만 체포하면 민중이 해산할 것으로 오판하였다. 그러나 민회의 실상을 무시한 천주교측의 강경대응은 오히려 제주민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제 등소를 통한 온건노선은 무력투쟁에 의지한 강경노선으로 급선회되었다.
반봉건, 반외세 항쟁으로
무장한 천주교측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된 민인들은 새로이 항쟁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들은 대정현에서 동진, 서진의 두 진으로 구성된 민군을 결성하였다. 지도체계도 개편되었다. 화전민 강우백과 관노 출신인 이재수가 동, 서진 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조총 300자루와 죽창으로 무장하는 한편, 3군에 통문을 돌려 봉기를 촉구하였다. 이에 제주도민 전체가 분연히 호응하면서 항쟁은 제주도 전역의 무장투쟁으로 확대되었다. 5월 17일 농민군은 신부가 지휘하고 있는 제주성으로 진격하여 성 밖의 황사평에 집결하였다. 이때 집결한 농민군은 수만 명에 달하였다. 제주성 내의 천주교측은 성문을 굳게 닫는 한편, 대포를 성벽 위에 설치하는 등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17, 18일에는 천주교측의 선제공격으로 농민군 18명이 살해되었다.
농민군 또한 일본인에게 양총 50자루를 구하여 전력을 증강하였다. 이로부터 서로 공방전을 전개한느 가운데 신부는 20일 유배중이던 장윤선을 목포로 파견하여 프랑스 군함의 급파를 요청하였다. 농민군은 20일에는 동, 서, 남, 북진, 24일에는 동, 서, 남진, 27일에는 동, 서진으로 진을 나누어 제주성에 대한 철저한 봉쇄작전을 수행하였다. 제주성 내로의 식량과 땔감 판매도 금지되었다. 한편으로 성내에 통문을 돌려 농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이때 제주목사와 대정군수는 5월 18일과 21일 두 차례에 걸쳐 중재를 시도하지만, 난민들은 세폐와 교폐의 근절 및 민인들을 살상한 천주교도들의 처단을 요구하며 화해 요청을 거부하였다. 결국 그들은 위기 촉발의 상황을 인식하고 성 밖으로 피난하였다. 천주교측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프랑스 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23일에는 장두 오대현 등 12명을 풀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강화를 중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오대현은 동진대장으로 농민군의 선봉에 섰다. 25일에는 제주성 내의 민인들까지 봉기하였다. 이들은 28일 옥문을 때려부수고 성내의 천주교도들과 충돌을 전개하였다.
결국 안팎으로 공격당한 천주교도측은 패배하고 농민군의 무혈입성이 이루어졌다. 입성한 농민군은 서진대장 이재수의 주도하에 천주교도를 색출하여 250여 명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장군이 덕에 힘입어 천주교인들을 모두 죽이니, 이로부터 3군의 민인이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제주도민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다. 한편 정부군 파견 소식이 전해지자 이재수는 3군민에게 통문을 보내 15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를 모두 징발하여 방어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방성칠란 당시 진압세력이었던 재지 양반과 유배중인 양반들, 관리들을 색출하여 처단하고 지방관아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도와 양반 세력의 처단문제는 갈등과 대립을 초래하였다. 동진대장인 오대현은 이재수의 강경노선에 반발하였다. 이는 출신 성분의 차이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이재수가 관노 출신이었던 반면, 오대현은 고을의 좌수로서 양반, 향임 등의 토호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 결과 두 진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우는 내분 상황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두 진의 내분은 진압군 파견 후에도 계속되어 봉기군의 통일된 대응전략이 마련되지 못하였다.
민란의 실패
5월 31일 270명의 프랑스 해군과 신임 제주목사 이재호를 태운 두 척의 프랑스 군함이 제주도에 입항하였다. 6월 2일에는 정부군인 강화도 진위대 100명과 궁내부 고문관인 미국인 산도가 급파되고 일본 군함까지 출동하였다. 이제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 군함의 제독은 6월 1일 신임 제주목사로 하여금 전 대정군수 채구석을 포함한 난민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도록 위협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 군인들이 직접 토벌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미국인 고문관 산도도 무력진압을 희망하였지만, 정부의 정책에 의해 프랑스 군함의 철수를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정부군과 신임 제주목사는 난민들에게 선 해산, 후 민폐 혁파라는 조건으로 자진 해산을 종용하였다. 6월 2일에는 동진 대장 오대현과 제주목사 정부군 대장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이를 단지 사태수습을 위한 임기응변의 미봉책으로 간주하였다. 게다가 제주민들의 1차 봉기 때 도망갔던 봉세관 강봉헌이 대정군수로 부임하여 제주도민들을 자극하였다. 농민들은 통문을 돌려 "어찌 산포 4-500명이 농민군 수백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하며 제주도민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더욱이 6월 9일 재차 입항한 프랑스 군함의 무력시위는 제주도민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운동 지도부의 노선은 통일되지 못하였다. 정부군의 파견으로 내부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동진은 중앙정부와 협상을 전개하는 한편, 합법적인 등소를 통해 운동목표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서진은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모두 처단하는 강경노선을 취하였다. 6월 7일까지 살해된 천주교도는 600여 명에 달하였다. 난민들은 민폐 혁파와 천주교도들의 처단 및 도민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확실한 보장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난민들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협상이 지지부진함에 따라 6월 10일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부군 200명과 13명의 순검이 급파되었다. 정부군 대장 윤철규는 서진대장 이재수와 면담하고는 서진의 요구사항을 수용할 것을 약속하고, 대신에 농민군측에게 다음날 제주성 내로 들어올 것을 요구하였다. 6월 11일 약속대로 봉세관 강봉헌과 폐단을 일삼은 천주교인들을 체포하였다. 농민군 또한 약속대로 제주성 내로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군은 약속과는 달리 농민군 지도자 40여 명을 즉시 체포한 뒤 무력으로 농민군을 강제해산시켰다.
그후 제주민들은 집단시위를 통해 농민군 지도자들의 석방과 제주도에서의 공개재판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주민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7월 18일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을 비롯한 40여 명의 민란 지도부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결국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세 사람은 영사재판에 의해 10월 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른 민란 관련자들은 징역이나 곤장형에 처해지거나 무죄 석방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의 끈질긴 피해보상 요구로 배상금 6315원이 제주도민 전체에게 부과되었다. 1904년 6월 도민 1인당 15전 6리씩 갹출, 배상함으로써 제주민란의 사후 처리도 종결되었다. 한편 프랑스측 요구에 의해 피살된 천주교도들의 묘지도 황사평으로 설정되었다. 지금 현재 이재수의 묘지는 찾을 수 없다.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묻혀 있던 서대문 밖은 일제시대 택지개발로 일본인들의 고급주택으로 변하였다.
1901년의 제주항쟁은 기본적으로 내부의 봉건적 모순을 계기로 제기되었으나 천주교 문제와 관련되어 확대되었다. 제주민들의 1차봉기는 봉세관에 의한 봉건적 수탈구조를 타파하려는 반봉건 농민운동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들의 오판으로 인해 항쟁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민들은 천주교 세력을 하나의 침탈적인 외세로 간주하여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군은 천주교인들을 "법국의 년놈"이라 하여 프랑스 인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한편으로 천주교인들이 평소에 프랑스 인으로 자처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5월 28일의 무혈입성 수 "양인을 토멸하고 제주성을 회복하였다"는 기치가 내세워지기도 하였다. 한달간이나 계속된 민중항쟁을 통해 제주민들은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하기도 하였다. 6월 17일 세폐 혁파에 대한 17조항이 관철되었다. 또한 7월 2일에는 12조로 된 교민화의약정이 체결되어 교폐 문제에 대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1년 제주민란의 가장 큰 의의는 세폐와 교폐의 혁파라는 두 가지 목표를 놓고 전 제주도민이 참가한 농민항쟁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층민중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반봉건, 반외세의 민중항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1년의 제주민란은 1905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반제국주의적 농민항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글 유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