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 다종단의 출현과 그 역할
법 현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국장)
1. 다종단시대의 도래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벌써 1628년이 된다. 2천6백여년 전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까지는 약 천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발생 후 천년의 세월을 보내고 들어온 불교가 약 1천7백여년을 이 땅에 있으면서 수 없이 많은 종파가 생겼다가 스러졌으며, 오늘날에도 또한 수없이 많은 종파가 생기고, 스러지며 또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정신세계를 이끌어 가는 종교는 크게 불교, 기독교, 가톨릭의 종교인데 가톨릭은 개신교화된 성공회를 제외하면 하나의 교파이므로 예외로 하고, 기독교는 250여개의 교파, 불교는 100여개의 종파가 활동주1)하고 있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단 문제를 매듭지으며 발생한 기독교 교파와는 달리 별다른 이단 문제가 없는 불교계에서 왜 이같이 많은 종파가 생기게 되었는가? 이렇게 많은 종파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고 활동하는가? 이렇게 많은 종파가 어떠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타 종파 및 타 종교와 함께 활동하는가? 이러한 모든 의문은 21세기 정보화시대라는 현대사회속의 불교의 참 모습을 찾아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이 분야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없다.
불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타종단뿐 아니라 타종교와도 이해와 협력을 가장 확실히 할 수 있는 종교이다. 그것은 중세기뿐 아니라 언제나 20∼21세기의 화약고 역할을 해 왔으며, 현대까지도 처절한 전쟁도 불사하는 기독교, 이슬람교 등에 비해 불교라는 이름을 걸고 전쟁한 역사가 없는 평화의 종교라는 세계 역사가의 평가가 그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무당을 믿더라도 예수를 믿는 것보다 낫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종의 절에 나가려면 차라리 예배당에 나가는 것이 낫다’거나 ‘백명의 신도가 한 명의 대처승보다 못하고, 백명의 대처승이 한 명의 독신승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독설을 종단 지도자의 설법을 통해 들을 수 있으며, ‘우리 종단 본사주지나 분원장보다 못한 자가 종정, 원장하고 있으니-----’, ‘아 종두하던 사람이 대표라고 나왔으니 기가 찰밖에-----’등등의 사실에 근거하든
아니든 타 종단에 대한 상당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종단 지도자의 이러한 타 종단에 대한 견해는 바로 소속 승려 및 신도들의 입을 통해 해당 종단의 대표자에게도 전달되기 마련이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평화회의(World Parliament of Religion)에 6천여명의 전 세계 종교인·학자들이 모여 종교의 배타적 편견과 독단주의를 극복하고 종교간에 대화와 이해를 통해 세계 평화를 이룩하자는 결의를 이끌어 낸 데서부터 출발한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이 세계 종교인 및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그 실천의 바탕이 되는 이론에 보탬이 되는 각 종교의 교리·사상을 찾을 때 불교의 그것이 가장 접근하고 있다는 연구주2)가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불교의 사상과 전통 속에는 진리 탐구에 관한 자유,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존중, 배타적인 주장에 대한 비판, 열려있는 진리관 등 종교다원주의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결론을 얻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타종교를 향해서도 대화와 타협, 용서와 인정의 손길을 베풀어야할 불교 지도자들이 같은 불교내에서마저 자칫 배타적인 사고를 지닐 수 있다는데 우려의 마음을 가지며 100여개라는 종단수에서 알 수 있듯이 다종단시대(多宗團時代)를 살고 있는 21세기의 출발점에서 이 문제를 고민해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선행연구는 전혀 없다. 다만, 신종교, 신흥종교의 시각에서 연구한 논문들과 한국청년승가회에서 1986년에 행한 한국불교종단 조직실태보고서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시작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종단(파)발생의 원인
모든 종단의 발생은 불교의 교리를 바라보는 시각, 지도자에 대한 시각,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수행의 방법 등에 관한 이견에서 비롯된다.
사실 불교내 이견발생의 시원은 부처님 당시 부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데바닷다에서부터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계율지상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한 채 중도적인 부처님의 주장을 비판했으며 끝내는 부처님의 교단을 떠나 새로운 교단을 형성했다. 이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철저한 지계(持戒)를 주장하던 데바닷다가 중도적 수행과 지계를 강조하는 부처님의 곁을 떠난 것은 불멸 100년경 첫 교단 발생의 사건이 되는 〈밧지풋타가〉(跋 子)의 10사(事)주장에 대한 상좌(上座)들의 대응과 대비되는 미묘한 맛이 있다. 세력의 우열은 주로 그 숫자에 비례하지만 그 세력의 지속 여부는 그 집단의 응집력에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볼 때 계율에 대한 시각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에는 부처님의 멸도를 접한 늦깍이 승려인 발난타(Upananda)비구가 슬픔에 젖기보다는 오히려 시원해하고 홀가분해 했다는 데서 이견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부처님이 너무 세세한 것까지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간섭이라는 시각이어서 흥미롭고, 요즘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늦깍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다음에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그 해에 왕사성 칠엽굴에서 행해진 제1결집과 관련한 이견인데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하 가섭이 주동이 되어 행한 제1결집에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아서 일찍 멸도한 목건련과 사리불은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면 살아있었다면 참석했을 것인가? 아니면 불참했을 것인가? 기록에 의하면 결집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은 사리불의 제자인 교범바제(Gav pati) 비구는 ‘아기코끼리는 어미코끼리를 따라가는 법’이라며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아기코끼리는 자신이고, 어미코끼리는 사리불이므로 사리불의 생전 교육에 의하면 결집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도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친아들인 라훌라도 결집이 진행되는 동안 숲속에서 정(定)에 들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아 불참했음을 알 수 있다. 결집에 참여한 아난다 또한 처음에는 가섭이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참가를 불허한 것으로 보아 이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견이 있는 이들은 결집에 참여하지 않고, 굴 밖에서는 따로 결집이 있었으니 이를 파사카(婆師迦)가 주도한 굴외결집이라 한다.
본격적인 종파발생은 보수적 성향의 장로(長老)비구들이 불멸 후 100년경 〈밧지풋타가〉(跋 子)가 제기한 계율에 관한 10가지 의견(十事)에 대해 부처님법에 위배된다는 해석을 내리고, 제1결집의 동기가 된 발난타사건에서 처럼 이 기회에 정법 선양의 깃발을 걸고 부처님 말씀을 결집해야한다며 〈바이샤알리〉(毘舍離)에서 3장(三藏)을 결집하게 된다. 그 1년후 1만명의 비구가 모여 이에 대응하는 별도의 대 결집(大結集)을 하게 되는데 이 대 결집과 앞서의 굴외결집이 대중부(大衆部)의 뿌리가 된다. 대 결집을 행한 진보적 성향의 대중들은 독자적인 교단을 선포하여 대중부라고 한 것이다. 물론 대중부라는 명칭은 장로(長老)들에 의해 주도되는 상좌부(上座部)에 비해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양해를 구한 것은 계율에 관해서도 신축적인 적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사상이라며 오히려 그 정신적 정통을 주장한다.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뉜 교단은 이후 약 100년간은 그 상태로 있다가 100년뒤 대중부가 18개의 부파로 분열하고, 그 100년 뒤에는 상좌부가 두 개로 나뉘어 본격적인 부파시대를 열게 된다. 처음 상좌·대중의 두 부파로 나뉜 것은 근본분열, 나중 상좌2, 대중18의 20부파로 나뉜 것은 지말분열이라 한다.
부파의 발생은 교단이 나뉘어 통일성을 상실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다양성과 수행방법 및 결과에 대한 단계 상승의 효과를 얻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오늘날과 견주어 보는데 참고가 될 것은 첫째, 상좌부계통의 불교는 인도 남방의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에 지금까지 남아 있고, 대중부계통은 훗날 혁신적인 발전을 이룩한 대승불교에 편입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부파 발생의 동기가 계율 등 교단 생활의 방법에 관한 이견에 있다는 점이다.
부파불교시대를 거쳐 대승불교가 흥기하는데 우선 대승의 추진세력은 보살가나·법사라고 하는 특별한 활동을 하는 불교도라는 점이 눈에 뛴다. 그들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을 중심으로 생활하며 부처님과 신도들의 중간 교량 역할을 하며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상좌부계통의 승려랄 수 있는 성문승(聲聞乘)을 능가하는 보살승(菩薩乘)으로 나온다. 이들은 보살사상(菩薩思想)·행원사상(行願思想)·공사상(空思想)·이타주의(利他主義)에 입각한 출·재가(出在家)주의를 표방한다. 출·재가 공동주의는 사상과 수행의 난이도를 쉽게 해서 정토사상·회통의 화엄·법화사상 등과 함께 밀교의 출현을 이끌게 된다.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인도에서 소개된 경론이 일정한 체계와 순서에 따라 들어오지 않고 무분별하게 수입됨에 따라 혼란을 야기하게 되어 이를 일관성있게 정리할 필요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어느 경(經) 또는 논(論)에 근거를 두고 다른 경론을 거기에 포함시켜 교설을 정리하고 그들간의 관계를 명백히 하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이는 물론 한국과 일본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경전을 부처님의 생애에 배대해서 그것들이 설해진 형식·방법·순서·의미·내용 등에 의해 분류하고 부처님의 의도를 명확히 하려 했다.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한다. '남삼북칠(南三北七)의 10사(十事)교판'이라 불리는 이 판석은 우리에게 돈(頓), 점(漸), 부정(不定)의 3교나 천태종의 5시(時) 8교(敎) 등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불교의 종파발생은 바로 이 교상판석에 의한 것이다. 물론, 이는 교종(敎宗)의 경우이고 선종(禪宗)의 경우는 보리달마에서 혜능으로 이어지는 정맥이 각 선사들의 지도방법 및 주석처의 산명 또는 사명에 따라 일종의 종파가 형성되게 된다.
한국의 경우 초창기에 율종(律宗), 화엄종(華嚴宗), 신인종(神印宗) 등은 중국에서 배운 바를 펴기 위한 목적에서 바로 창종하거나 독자적으로 깨달은 바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선종(禪宗)은 중국 당나라에 가서 당시 조사들의 심인(心印)을 받아와 각자의 인연 터에 도량을 세우고 교화의 방법을 개시해 일가를 이루므로써 형성된 독자적 수행 가풍을 드러내는 주석처 사찰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선문(禪門)이 이룩됐다.
이는 중국의 선종이 지도자 이름을 따서 명칭을 지은 것과 구별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해서 교종의 다섯, 선종의 아홉 문파가 형성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정확한 종파명을 쓴 것은 아니지만 그 형체로 보아 종파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天)의 천태종(天台宗)과 선종이 각자 후원 세력의 힘과 함께 발전하다가 후원 세력의 부침과 그 궤를 같이 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울러, 태고보우(太古普愚)국사가 제종을 통합하여 조계종(曹溪宗)이 되었으므로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전통을 수립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말부터 유교와 함께 대두한 배불론(排佛論)에 의해 여러 번의 어려움을 당하였다. 태종에 의해 11종이 조계, 천태, 화엄, 자은(慈恩), 중신(中神), 총남(摠南), 시흥(始興)의 7종이 되었다가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고 자신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었던 세종 때 조계ㆍ천태ㆍ총남의 셋을 합해 선종으로, 화엄ㆍ자은ㆍ중신ㆍ시흥을 합해 교종이라 해서 어느 나라에도 없던 선ㆍ교 양종이라 했다. 종파의 명칭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주체가 불교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원칙이 있을 수 없었다. 이후 서산대사에 이르러 선교 양종은 완전히 조계종(曹溪宗)으로 통합되어 교는 선에 들어가는 기초로서만 자리했다. 일제 시대에는 전국 승려들의 총의에 의해 불교의 통일 기관인 원종(圓宗) 종무원을 서울에 두었으나 곧 폐지되고, 임제종(臨濟宗) 등을 거쳐 1938년 조선불교조계종(朝鮮佛敎曹溪宗)으로 통합되어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전 일본의 영향속에 들어갔던 원종과 임제종의 갈등과 그 극복, 그리고 승려의 결혼을 둘러싼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의 해결방법의 차이 그리고 조계종의 종명(宗名)속에서 뭉뚱거려진 선과 교에 관한 승려들의 인식 차이는 해방 후 종단간 분교 및 종단 발생과 종단내 분규의 원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주지하듯이 이회광(李晦光) 등의 조동종과의 통합운동은 박한영(朴漢泳)ㆍ한용운 등이 임제종을 설립해 대항하므로써 무산되고, 이 흐름은 다시 사찰령을 통해 제지됐으나 양측의 흐름이 다른 방향의 움직임을 불러오게 된다. 원종 세력은 31본산 주지회의의 실질적 주동 세력이고, 임제종 세력은 그들을 움직이기 어려운 혁신적 젊은 사상가요, 수좌들이었다. 한용운은 모든 승려들이 결혼해야 한다는 지나친 주장을 하고, 백용성은 절대 안된다는 상반된 주장을 하였는데 둘 다 교단내에서 그 당위성을 토론하지 못하고 말았다. 한용운은 중추원 의장 김윤식에게, 백용성은 총독에게 건의문을 내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승려의 결혼 문제는 일찍이 인도, 중국,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길이며, 그 자체를 동 시대인이 판가름하기가 어려운 문제다. 불탑 수호자들에 의해 주도된 대승불교의 경전인 화엄경에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인도의 좋은 예이며, 원효의 결혼을 두고 불교계에서 애매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런 것이며, 한용운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하 33인의 기미 만세운동 주도자중 유일하게 지조를 지킨 것으로 유명한 만해는 누구의 영향으로 결혼했다고 보아야 할까?
외도(外道)들로부터 놀고 먹어서 비생산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부처님이 지혜의 밭을 간다고 한 데서 느낄 수 있는 정서를 우리는 선수행(禪修行)과 교리공부(敎理工夫)에서 느낄 수 있고,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에서 느낀다. 한용운, 박한영 등 선과 교 모두에 밝은 이들에게는 선이 곧 교요, 교가 곧 선일 수 있으나 한쪽에 경도된 사람에게 상대방이 하는 수행ㆍ공부는 바르지 못한 행위로 비칠 수 있다. 이ㆍ사판의 경우에서도 이판의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사판의 대중과 중생을 위한 봉사ㆍ보살행의 이념이 제공되고, 사판의 보살행과 뒷받침을 받아 바른 수행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상보적 관점(相補的觀點)이다. 그러나 상대적 관점(相對的觀點)에서 보면 재물과 명예만 아는 우둔한 중생이 사판이요, 하라는 중생교화 활동은 손놓은 채 공상하고 놀기만 하는 이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시각이 한국불교 분규(조계종 정화, 태고종 법란)의 이면에 깔려 있는 정서이다.
경허(鏡虛) 이후의 선수행의 전통을 확립하려는 이판의 수좌들과 태고(太古)ㆍ서산(西山)ㆍ만해(卍海)로 이어지는 통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상반된 사판의 승려들의 움직임은 그들의 해방 후 사회적 위상 확인과 함께 바로 불거졌다. 일제의 지원과 자신들의 노력을 합한 힘에 의해 교학과 사회학의 물결을 체험한 이들은 해방 후 사찰의 주지, 회사의 사장, 국회의원, 장관 등의 상당한 지위와 함께 재산도 가질 수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은 이들은 화려한 강학(講學)이나 사회적 활동보다는 나를 찾는 참선정진(參禪精進)에 몰입한 이가 많았다. 물론, 그들 중에는 올곧은 수행자와 겸허한 소임자들도 많았으나 수행자연하는 이와 명예 및 세속적 이득에 밝은 이도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 탓하는 자찬훼타의 계를 범하며 소일하기 일쑤였다. 진정한 수행자들은 최소한의 수행공간을 요구했고, 겸허한 소임자들은 흔쾌히 약속하며 뒷바라지에 골몰했다. 그러나 수행자연하는 이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세속에 밝은 소임자들은 아까워하며, 왜 하필 내절이냐는 님비현상에 휘둘렸다. 그러한 갈등 구조가 본격화한 것은 6ㆍ25 전쟁에서 국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린 이승만 정권의 여덟차례에 걸친 소위 '불교정화유시'에 기인한다. 요즘은 남북교류와 세계화 조류에 힘입어 사라지고 있지만 한국인에게 2대 악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 일제를 겪은 이들에겐 '일본의 잔재 또는 앞잡이'라는 말이며, 6ㆍ25를 겪은 이들에겐 '공산당'이라는 소리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 2대 악감정을 모두 다 활용했다. 일제하에 부일했던 이들은 조사하는 국회내 반민특위(反民特委)에는 '공산당'을, 민족정기와 민주정치를 부르짖는 불교계엔 '일본 잔재'를 쓴 것이다. 두 번 다 국민과 식자들의 저항에 직면했지만 후자의 경우엔 결국 스스로 무너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불교태고종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는 1954년 유시에 의한 불교교단 분규는 「외부의 힘을 입고 하는 정화운동은 원만한 결실을 거둘 수 없다」고 한 조계종 성철스님의 말마따나 아직도 계속 승니의 분한문제, 세속적 권력과 방법의 향유문제로 고생하고 있는 조계종과 제 위치를 찾기 위해 골몰하는 태고종 및 그 사이에서 분주한 마음을 가지는 여타 종단의 모습에서 그 보(報)를 찾을 수 있다.
1962년 혁명정부에 의해 입법된 불교재산관리법(현재는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대체)에 의해 받기 시작한 불교단체등록은 1972년 1사1종의 대표적 종단인 보문종(普門宗)의 등록까지 11년간 18개의 불교종단을 등록받고, 불교재산관리법 폐지와 전통사찰보존법으로의 대체 이후 현재 불교계 연합기구인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소속 26개 종단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입하지 않은 70여개의 종단까지 합쳐 100여개표1)로 늘어났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한 이들 종단의 형성 과정에 관한 연구는 이 경우, 이강오, 김방경 등의 학자에 의해 진행되어 대부분 알려졌으나, 1988년 종단설립 자율화 이후의 연구는 아직 미진하다.
한국불교 제 종단을 지역별로 보면 서울이 36개로 가장 많고, 다음이 부산 10개와 경기 10, 충북 5, 경남 4, 대구 4, 전남 4의 비율이다. 소의경전은 《법화경》, 《정토삼부경》, 《미륵삼부경》, 《금강경》, 《화엄경》 등인데 경전이 신앙과 직결된다고 보기 어렵다.
이들 중 종단협의회에 가입한 종단을 사상별로 보면 조계ㆍ태고의 두 전통주3) 종단을 제외하면 밀교계, 법화계, 화엄계, 미륵계, 정토계 종단, 약사신앙계열, 그리고 천태종과 보문종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계통 불명의 종단도 다수 있으나 논외로 한다. 이들 종단들은 불교재산관리법 시절의 18개 종단 시절에는 싱앙형태상 위에서 구분한대로 밀교와 현교, 교종과 선종의 큰 구분하에 일곱 개의 작은 계열로 나눌 수 있었으나 전통사찰보존법으로의 대체 이후 우후죽순의 다종파시대가 열리면서 그 구분이 모호한 종단이 날로 늘고 있다. 그래서 뜻있는 이들은 불교 종단의 난립을 걱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대체한 후 종단이 우후죽순격으로 많이 늘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962년도에 제정한 불교재산관립법이 그 법에서 천명한 취지와는 달리 불교재산을 효육적으로 국가에서 관리, 통제, 활용, 분할통치하기 위해 만든 법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대한불교조계종(종정 이효봉)의 도장이 찍히면 등록을 받고, 대한불교조계종(종정 국묵담)의 도장이 찍히면 등록을 거부하므로써 이 법을 통해서 조계종에게 태고종에 비해 정(正)과 사(邪)의 구분과도 같은 우월적 지위주4)를 주면서 정부기관에는 전폭적인지지 및 지시 수용을 요구하여 일제때부터 저항의식을 가져온 불교계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의 수단주5)으로 활용했다.
또한 국토이용계획법, 공원관리법 등의 각종 법규를 통해 수백년간 이어져 내려온 선조사의 터전을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무단 활용하고 있다. 같은 이름인 대한불교조계종의 국묵담 대표직인엔 등록을 받지 않고 그 외의 어떤 이름을 써도 등록을 받아주므로써 나름의 역사와 신행형태를 뚜렷이 하고 있던 일부종단을 제외하고, 종단명 및 소의 경전과 다른 신앙 형태를 지닌 종단을 양산한 것은 분할 통치의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통제의 인식을 벗겨주면서 종단 설립을 자율화 하자 너도 나도 종단을 설립해 100여개에 이르는 종단이 난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이 모두가 21세기 한국불교의 한 모습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3. 불교계 종단의 현황
종단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새종교연구원 이경우 교수가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100여개의 종단이 활동하고 있지만, 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것도 있다. 2000년 11월 현재 불교계의 유일한 대표 연합기구인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한 26개 종단을 중심으로 사회적 활동현황표2)을 살펴보고자 한다.
26개 종단의 협력기구인 종단협의회는 1967년 발족한 한국불교연합회의 정신을 이어 1969 한국불교총연합회(13개 종단 및 불교단체), 1973 대한불교총연합회(14개 종단 및 단체), 1979 한국불교종단협의회(7개 종단), 1980 전한국불교회, 1980 한국불교종단연합회, 1981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82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재창립)로 이어져 2000년 현재 산하에 남북통일 준비 및 교류추진기구인 북녘동포돕기 불교추진위원회, 불교합창단연합회, 자비의 전화, 지하철에 법음을 펴는 풍경소리, 사회복지정보지원센타, 부산사암연합회, 대구경북종단협의회 등의 산하단체가 있다.
조계종은 1962년에 종단등록을 했지만 선위주의 통불교 전통종단으로서 가지산문을 연 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보조지눌국사, 태고보우국사를 중창조로 모시고 있으며, 등록시부터 지금까지 보조와 태고법맥에 관한 이견이 상존한다. 종정 밑에 원로회의가 있고, 행정기관으로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의 3원이 있고, 입법기관으로 중앙종회가 있으며, 사법기관으로 호계원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동국대학교(대학원)와 중앙승가대학교가 일반대학이며, 88개의 선원, 16개의 강원(승가대학)이 있으며, 17개 종립 중고등학교, 1개의 종립 초등학교, 25개의 복지관 및 시설, 12개의 청소년 시설, 30개의 어린이집, 6개의 특수시설(무료급식소, 보현의 집 등)을 갖춘 사회복지재단과 출판사를 갖추고 있으며, 다수의 교양대학과 생명나눔실천회, 재가연대 등의 사회활동단체가 있다.
태고종은 1970년에 종단등록을 했지만 선교 양종의 전통종단으로서 종조는 태고보우국사를 모시고 가지산문을 연 도의국사를 연원으로 하고 있다. 종정 밑에 승정회의가 있고, 행정기관인 총무원, 입법기관인 종회, 사법기관인 사정원의 3원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총무원 산하에 포교원, 연수원, 종승연구원 등의 기구가 있고, 1개의 강원(승가대학), 1개의 미인가 대학, 5개의 유치원, 7개의 어린이집, 1개의 상조회, 1개의 상담전화, 1개의 신문사 및 잡지사를 갖추고 있으며, 사회봉사활동 단체가 1개 있다.
천태종은 관음정진을 주로 하는 종단이며 1966년에 종단등록을 해 종조는 천태지자대사, 중창조는 박상월스님이다. 종정 밑에 원로원이 있고 총무원과 종의회 및 감사원과 자문기관인 참의원 제도를 두고 있다. 1개의 미인가 대학, 15개의 유치원, 1개의 사회복지법인, 1개의 복지관, 1개의 신문사 및 잡지사를 두고 있다.
진각종은 1947년 회당 손규상 스승이 창교해 명랭법사를 종조로 모시고 관심보살과 6자주를 염송하는 참회원, 밀교금강 중심인 불교재가보살정도회를 거쳐 1953년에 진각종으로 개칭했다. 교주는 비로자나불이고 금강정경, 대일경, 대승장엄보왕경을 소의로 한다.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는 밀교종단으로 행정기구인 통리원, 입법기관인 종의회, 그리고 교육원과 사감원의 4원 체제이다. 1개의 종립대학, 1개의 미인가 대학, 4개의 종립 중고등학교, 1개의 복지재단, 4개의 복지관, 1개의 신문사, 1개의 출판사, 8개의 어린이집이 있고, 특이하게 해외에 직업훈련원이 2개소 있다.
관음종은 이홍선스님이 창건한 불입종에서 분종한 종단으로 법화경을 지송하고 종조는 대각국사 의천이며 1957년 현정회, 1965년 불입종, 1988 관음종의 변천 역사를 지니고 총무원ㆍ교육원ㆍ포교원ㆍ중앙종회의 4부 기관으로 되어 있고, 1개의 복지원, 1개의 어린이집과 1개의 장학회가 있다.
총화종은 1966년 불교분규과정에서 백양사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분쟁을 종식시키고 비구ㆍ대처를 화동시키기 위해 대한불교화동(和同)위원회를 만들면서 비롯되어 1969년 대한불교 총화회를 창립, 서산대사를 종조로 하고 1978년 총화종으로 개칭하였다. 소의경전은 반야경에서 화엄경으로 다시 반야경으로 하였으며 종조도 원효, 서산, 태고로 변하였다. 원로원, 총무원, 종회, 교육원, 포교원, 문화원, 호계원, 감찰원 등의 기구를 갖추고 있다.
일승종은 1945년 대승불교현정회를 모체로 1968년 최혜정(崔惠正)스님이 창건했으며, 총무원, 원로원, 중앙종회의 기구가 있다.
보문종은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으로 석가모니의 양모인 대애도비구니를 종조로 신라의 법류(法流)비구니를 중흥조로 하여 화엄, 법화경을 소의로 1972년에 창종했다. 원로원, 총무원, 종회, 호계원을 두고 있으나 교육 등 여러 면에서 조계종과 행동을 같이 한다. 3개의 유치원과 1개의 사회복지법인시설, 3개의 어린이집이 있다.
원융종은 1982년에 창종했으며 원로원, 승정원, 중앙종의회, 총무원, 법계고시위원회, 문화원, 포교원, 중앙비구니회 등의 기구가 있고, 1개의 교양대학, 1개의 어린이집이 있다.
총지종은 1972년에 창종한 밀교종단으로 통리원, 법장원과 중앙교육원, 중앙종의회 등의 기구가 있고, 1개의 중학교, 1개의 사회복지법인, 1개의 노인복지센타, 1개의 기로원(노인 정진, 수양원), 1개의 수련원이 있다.
원효종은 1963년에 창종했으며, 화엄경ㆍ미타경ㆍ금강경을 소의로 하고 원로원, 총무원, 중앙종회, 규정원, 교육원, 종학연구원 등의 기구가 있고, 2개의 사회복지시설, 2개의 한의원, 1개의 신문을 가지고 있다.
대한불교법화종은 1956년 초대 종정 김혜일(金慧日)스님이 창건한 종단으로 1960년 대한불교법화종 유지재단을 설립하고 1969년 관등록하였으며 법화경을 소의로 하고 원로원, 총무원, 포교원과 문교ㆍ상벌ㆍ법제ㆍ고시ㆍ감사의 다섯 위원회가 있다.
법상종은 강증산의 수제자인 김형렬이 창립했으나 사후 최선애와 대종교의 김정학이 1969년 금산사에 대한불교법상종포교원을 설립하므로써 창종되었으며, 미륵3부경을 소의경전으로 미륵불을 본존으로 모신다. 총무원, 중앙종회, 사정원, 교육원, 연구원, 참선원, 포교원 등의 기구가 있다.
진언종은 1954년 대한불교참회당교도회유지재단을 등록하고 1969년 대한불교진언종으로 변경등록하였으며,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대일경, 금강정경, 소실지경, 소바호동자경, 보리심경, 석마하연론을 소의로 하는 밀교종단으로 종리원, 중앙종회, 감사원, 호법원 등의 기구가 있으며 1개의 교학부를 두고 있다.
용화종은 1963년 서한춘스님이 설립한 종단으로 시원은 현장법사에 종조는 진표율사를 모시며 교주는 미륵불이다. 행정기관인 총무원을 두고 있으며, 특별한 종단사업은 펼치지 않고 총무원장 입적후 지도체제를 정비중이다.
법륜종은 1989년 태고종의 종단행정에 이견을 가진 충청지역의 이대영 스님등이 창종하여, 소의경전ㆍ종조는 태고종과 같이 금강경, 화엄경, 태고보우국사이다. 총무원, 원로원, 사정원, 중앙종회 등의 기구가 있으며, 2개의 유치원과 1개의 어린이집이 있다.
본원종은 1989년에 설립된 종단으로 정토삼부경을 소의경전으로,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모시고 있으며, 총무원, 감찰원, 교육원, 포교원, 문화원, 중앙종회의 기구를 두고 있다.
일붕선교종은 92년도에 조계종 승려이던 일붕 서경보스님이 창종한 종단으로 금강경, 육조단경, 전등법어를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으며,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 중앙종회, 원로회의, 고시위원회, 사정원 등의 기구가 있다. 일붕스님의 입적으로 총무원측과 재단측의 분규가 진행중이다.
조동종은 1989년도에 설립하여 90년에 종단협의회에 가입한 종단으로 종조는 동산 양개화상이며 금강경을 소의로 하고 묵조선의 선풍을 따르고 있다. 승정원, 총무원, 중앙감찰원, 중앙종의회, 중앙선원, 중앙호법원, 중앙교육원, 중앙율원, 국제문화원 등의 기구가 있으며, 총림행자연수원, 원효한방병원, 묵조관, 보리원 등의 기구가 있다.
염불종은 93년도에 종단협의회에 가입한 종단으로 조계종 법주사에서 출가한 이청봉스님이 창설해 총무원, 교육원, 중앙종회 등을 두고 있다.
대승종은 1988년 설립한 대승종 박도암스님과 미륵선종 손혜인스님, 아미타종 김원화스님이 합종하여 만들었으며 92년에 종단협의회에 가입하였고,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며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 감찰원, 종회 등의 기구가 있다. 한편, 손혜인스님은 조계종 소속의 삼화불교대학도 가지고 있다.
삼론종은 1989년에 설립하고 90년에 종단협의회에 가입하였으며 반야경, 화엄경 및 중론, 백론, 십이문론을 소의로 한다. 승정원, 총무원, 종회, 사정원, 재정원, 포교원, 교육원, 호법원, 수선원, 문화원 등의 기구와 함께 1개의 유치원, 1개의 연수원, 1개의 신문사를 두고 있다. 브라질의 사웅파울루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중 종정이 열반했다.
열반종은 태고종의 묵담스님 계열의 스님이 1973년에 창종하여 92년에 종단협의회에 가입하였으며, 고구려 보덕화상을 종조로 대반열반경을 소의로 하고 있고 총무원, 종회, 교육원, 포교원의 기구를 두고, 한국불교삼장대학과 연수원에서 종도를 연수하며, 특이하게 총무원장이 유발로 언론기관에서 활동하며 현대적 조직감각과 홍보활동으로 내실을 다지고 있다.
미타종은 1944년 대한정토불교 봉암사를 시발로 활동하다 1984년에 미타종으로 창종하고 90년에 종단협의회에 가입하였으며 아미타불을 교주로, 정토삼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고, 중앙본부, 총무원, 중앙종회, 감찰원, 교육원, 포교원, 법계고시위원회, 해외별원, 전국신도회, 전국비구니회 등의 기구와 함께 장애자보호시설인 무상원을 두고 있으며, 1개의 신문과 교양대학, 출판사도 있고, 세계불교문화교류연맹을 창설하여 운용하고 있다.
여래종은 1967년에 창종하였으며 90년에 종단협의회에 가입한 종단으로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대각국사 의천을 종조로 모시고 있다. 원로원, 종회, 총무원, 호법원, 포교원, 규정원, 종찰원, 전교사, 여래구도단 등의 기구가 있고, 1개의 유치원, 1개의 교양대학, 1개의 합창단, 1개의 봉사단이 있다.
대각종은 96년도에 창종하여 2000년도에 종단협의회에 가입하였으며, 총무원, 원로원, 승정원, 사정원, 포교원, 문화원, 예술원, 감찰원, 종의회 등의 기구가 있고, 2개의 유치원과 1개의 어린이집, 1개의 교양대학이 있다.
한국불교법화종은 일본 법화계에서 득도, 활동하던 김혜선(金慧宣)스님이 중심이 되어 창립했다. 1939년 법화종포교원이 모체가 되어 1960년 전후로 불입종, 일승종, 대한법화종이 갈라져나가고 1969년 한국불교법화종을 창종했으며, 소의경전은 법화경, 본존은 10계 만다라(十界曼多羅)이다. 지금은 김광태 원장이 대표를 맡고 있으며, WFB의 한국지부회장을 맡고 있다. 종단협의회에서 제적됐다.
이외에 활동력이 있는 종단으로 꼽히는 데는 한국불교법화본종, 대한불교불입종, 영산법화종, 화엄종, 천화불교, 불승종, 정토종 등이다. 이중 화엄종, 천화불교, 정토종을 제외하면 모두 법화계이다.
4. 종단간 연합활동
종단간 연합활동으로는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통해 한강연등대법회, 국난극복기원법회 등 대 국가, 대 사회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불추위를 통한 대북 지원사업과 함께 99년도에는 북한돕기 및 포교활동을 종단 각자 무계획적으로 하지 말고 창구는 종단협의회로 단일화하고 그 정보를 공유하되 각자의 활동도 병행하기로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99년 1회, 2000년 1회의 물자지원 및 남북불교 통일토론회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국제교류로는 2000년 10월 23일∼25일까지 신세기 세계평화 기원법회 및 학술심포지움이 가미된 한중일불교우호교류위원회를 성공리에 개최하고, 인간성ㆍ도덕성 상실의 시대를 불교정신으로 불자가 극복하기 위해 5계중 불살생ㆍ불투도ㆍ불망어 실천운동을 적극 전개하자는 취지의 공동성명서도 채택하였다. 또, 한일불교우호교류위원회의를 일본 동경에서 개최하였고, 2000년 9월에는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 포교사(승려, 법사)와 파견예정 포교사에게 한국문화와 불교의 정수를 체험케 하는 프로그램을, 2000년 11월 3일∼7일에는 세계 19개국 50여 수행자(승려, 정사, 교무)에게 한국문화, 민속, 불교의 정수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국비를 얻어 시행하여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심어주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또한 전 종단이 참여하는 초파일연등축제는 서울시민의 대표적 축제와 역사문화마당으로 자리매김했다. 1995년 한중일불교우호교류위원회 북경대회에서의 군소종단 예우문제로 이견이 생긴 종단 원장들의 친목회인 대한불교종단진흥회를 결성해 화합분위기 조성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제는 막판 해소작업에 들어갔다.
5. 종단별 활동
조계종은 여러 번에 걸친 종단내 분규를 통해 위상이 낮아졌지만 그간 종도들의 통일노력을 개인, 평불협 등 단체의 역량과 불추위 등 범불교 연합기구에만 맡겼던 것을 구심점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민족공동체추진본부를 결성해서 가동하고 있다. 이 단체의 활동에 불이 붙으면 금강산, 신계사, 장안사 복원 등 문화재 복원사업과 남북한간 실질적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또, 21세기의 대안이라고 이야기되는 선수행(禪修行)의 대중화ㆍ체계화를 위해 여러 차례의 간화선토론(看話禪討論) 및 무차선대회(無遮禪大會) 등을 개최해 전 국민뿐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으며, 숭산스님ㆍ청화스님 등이 전세계 정신혁명을 원하는 수행자들의 지도자가 되어 2000년 겨울 동안거에 벽안의 수행자들만 200여명이 한국선원에서 안거에 들고 있다.
환경문제 또한 불교와 조계종의 지대한 관심 화두로 떠올라 지리산살리기, 낙동강살리기 운동에 적극 매진하여 좋은 반향을 얻고 있다.
묘지에 의한 국토 잠식문제 또한 심각한 지경에 와있는데, 교리적으로 화장과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납골당을 추진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18개의 납골당 중 태고종 3개를 제외하고 모두 조계종 시설이다.
태고종은 전통문화예술인 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의 보호전승과 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 보호 전승을 통해 전통불교의 모습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으나, 조계종과의 마찰과정에서 공유사찰을 모두 빼앗기고 사설사암들이 95%를 차지하는 현실이 총무원의 중앙 통제력을 약화시켜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천태종은 중앙집권조직으로 인사ㆍ재정권의 효율적인 운용을 통해 통제력을 발휘하고 단순ㆍ정연한 기도의식으로 영험을 본 불자들이 많이 집결하여 각종 불사 및 일본ㆍ중국 등 해외 교류에 큰 성과를 보고 있다. 태생적 취약점인 종명과 수행방법의 일치 및 교리적 접근의 자발성을 이룩하기 위해 한중일 천태성지를 연결하는 일과 종립대학 설립에 꿈을 두고 있으며, 그간 남북 교류에 미온적이었으나 김정일의 의천주석사찰인 영통사 복원 의사타진으로 새로운 의지를 다지고 있다.
진각종은 특유의 유발ㆍ양복 제도를 잘 활용하여 사회적 친화력을 갖되, 유발재가승이 갖는 이미지적 단점을 뛰어넘기 위해 개인적 수련 및 각종 희사제도를 활용해 구심력을 높이고, 종도들을 밀도있는 교육 및 수련을 통해 질을 높이는 한편 위덕대학을 설립하여 종도들로 교수 및 직원을 채용할 정도로 놀라운 가동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사회적 경험과 친분이 두터운 인사를 통해 대북 교류협력과 사회복지 활동을 불교계 전체 수준에서도 한 단계 상승시켜 '진각종을 배우라'는 권유어가 나올 정도가 되고 있다.
총지종은 후발 주자로서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결집력으로 종단협의회ㆍ불교텔레비전ㆍ지하철포교ㆍ북한돕기 등에서 종력을 응집시켜 타종단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종단협 산하의 소비자 보호기구와 사회복지촉진기구를 유치하여 종단협 전문위원회중 거의 유일하게 홀동하는 기구가 되고 있다. 한편, 유명 체육선수들의 뜻있는 활동도 지원하여 사회와의 연계 모델링이 되고 있다.
6. 다종단 시대 불교의 역할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종단 발생의 원인이 계율의 수지에 관한 것이든, 근본사상을 이해하는 틀이 다른 경전에 의거하기 때문이든, 사회의 제반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다른 것이든, 묵조(默照)와 간화(看話) 또는 간화의 방법과 가풍 등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각 종파가 나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늘날의 학자나 뜻있는 불자는 옛날의 종파 발생의 원인은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불교의 그것은 정말로 불교적 의미보다는 세속적 의미밖에는 없다는 비판적 견해를 밝히기로 한다. 그것은 한국불교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조계ㆍ태고의 분종과정이나 18개 종단의 등록과정 또는 불교재산관리법 폐지 후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생겨나는 모습을 보고 불교의 앞날을 걱정해서 하는 소리다. 종무행정 체계 및 종단운영 구도에 관한 이견 및 세력 대결을 통해 밀려난 이들이 종단을 세운 경우도 부지기수이고, 그러다보니 교주, 종조, 소의경전 및 종지종풍에서 딱히 분종해야 할 이유나 의미를 제대로 밝힐 수 없는 경우 또한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100여개의 종단이 있다는 그것만은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 속에서 진심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종단생성의 정당성을 살펴보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각 종단마다 활동하고, 어떻게 연합해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종단과 불교, 그리고 국가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찾아내는 일이다. 각자의 이념과 구성원들의 성향을 따라 형성ㆍ발전 과정을 달리해온 종단들에 대해서 그 독자적 역할이나 연합적 활동에 의해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다만, 원론적인 차원에서 그 가능성을 살펴보고 각자 종단 또는 그 연합체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두자는 것이다.
알다시피 조계종은 불교계 역량의 70%내지 80%를 가지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떤 때는 스스로의 힘에 눌려 분규를 일삼다가 세인의 지탄을 받기도 한다. 불교의 발전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1997년도에 조사하여 1998년도에 발표한 중앙승가대 불교사회과학연구소의 경제와 종단발전에 관한 현대불교인의 의식조사 연구주6) 결과에 따르면 수행자의 수행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듯 전국의 선원과 자기 처소에서 열심히 수행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고 있는 것은 조계종이 지닌 장점이다.
또한, 여러 가지 미비점이 있음에도 두 차례의 무차선대회, 그리고 간화선 토론회 등을 통해 수행자, 불자, 세계 종교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이 점은 조계종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육성하되, 타 종단 승려와 외국인 수행자 및 재가자들에게 수행의 기회를 주는 것과 일반인 및 방문객들에게도 단 몇 시간, 몇 일 동안이라도 수행의 향기를 맡게 해주는 다양한 방법들이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인 활동 중 환경문제는 조계종이 그 역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환경보호의 혜택 또한 조계종이 가장 많이 볼 수 있고, 그 이론적 대안이나 실천적 방안을 마련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감안해 행사 위주의 운동이 아닌 실질적, 체험적, 생활적 운동이 되도록 하는 한편 타 종단과의 유기적 연계체제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북한과의 교류 및 통일 기여문제는 민족공동체추진본부의 기능을 하루빨리 활성화시키되 태고종이 지닌 전통문화, 천태, 진각종 등이 지닌 종파적 연계성과 장점을 최대한 흡수하여 화쟁(和爭)의 표본을 보여야 한다. 복원 후 사찰의 관리권을 가지고 조심스런 이견을 내고 있는데 이는 종파적 개념이 아닌 민족을 바라보고 하는 대승적 차원에서 시행해야 한다.
달라이라마 방한문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은 이미 기독교, 천주교, 시민단체도 참여하고 있는 문제이므로 조계종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종단협의회를
통해 불교계 종단의 의견을 수렴해 정부와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복지 참여는 종단협의회와 같이 운영하는 사회복지정보센터의 기능을 보다 활성화해서 각 종단과 함께 사회복지 활성화를 통한 불교의 보살도 실천으로서의 사회참여도를 높여야 한다.
해외교류는 특히 한중일불교우호교류위원회, 한일불교교류위원회와 함께 몽골, 티벳, 대만,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베트남, 인도,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등 관련 국가와 개별 또는 그룹별 교류기구를 신설 또는 강화하고 세계적 불교기구인 W.F.B를 종단협의회로 귀속시켜 세계속에 한국불교의 대표성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타의 각종 활동에서도 불교계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조계종에서 열린 마음으로 타 종단을 감싸 안고 같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태고종은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영산재, 단청 등의 문화재와 함께 복장, 가사점안 불사 등 전통의식문화를 보다 쉽고, 보다 유형적ㆍ시스템적으로 체계화해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상설화하는 방법을 마련하고 북한불교 및 세계불교에도 그의 전수를 고려해야 한다. 또, 승려의 60% 이상이 가정을 가지고 있는 친사회적 종단으로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전통불교의 수행과 문화는 지켜나가되, 여타의 것은 과감히 개선하고 현실화해서 불교의 현대화ㆍ생활화에 기여해야 한다.
천태종은 엄청난 응집력을 바탕으로 급성장한 종세를 보다 탄탄히 하고, 자체적인 이론ㆍ교리를 보강하기 위해 종립대학을 설립해 자체 종도들로부터 종단의 구심력을 형성하는 한편, 타 종단과의 연계나 북한 불교와의 교류에도 보다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 말없이 행동해온 것을 보다 체계적이고 사회적인 방법론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진각종은 지금과 같은 궤도와 속도를 유지하되 현교와의 차별성이 곧 이질화 경향을 통한 교류 및 대화 불통의 사유로도 작용하므로 티베트 등 외국의 밀교나 삼국시대의 밀교와도 같이 불상을 모시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럼으로써 위덕대를 졸업한 고급인력이 군 포교활동에도 같이 참여할 수 있고, 현교의 불자들 및 일반인에게도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한교류 및 외국 포교와 직업훈련지도 등에 관한 경험을 불교계 타 종단과 공유하는 노력을 전개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진각종에 이로운 결과를 얻을 것이다.
관음종은 현재 총무원장이 종단협의회 사무총장직을 겸임하고 있으므로 타 종단간의 교량역할을 할 수 있고, 종단내 종도들의 교화역량 강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므로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사회복지 실천 및 수행풍토 조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총지종은 지금의 상태처럼 활동을 계속해 나가되 진각종과도 같이 불상을 모시는 문제를 심각히 고민하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 사회문제나 북한문제, 환경문제 등 불교계 공통사안에 대해 대응하고, 각종 위원회 및 기구를 통해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이제 연합 및 연계활동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각 종단 총무원장 친목단체의 수준으로 출발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는 명실공히 한국불교계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하는 단체로 자리 매김했다. 따라서, 각 종단에서 이 단체를 어떻게 활용하고 키워가느냐가 불교발전의 여부를 재는 가늠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종단협의회에는 정관상 여러 산하단체와 각 위원회가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산하단체는 각자 알아서 하는 활동이고 위원회는 명칭만 갖추고 있을 뿐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총지종에서 맡아하는 소비자보호위원회 및 사회복지위원회뿐이다. 각종 위원회를 설치할 때는 그 당위성에서 했으나 인원 및 재원 배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각 종단에 1∼2개의 위원회를 맡겼으나 가장 신진 종단인 총지종이 맡은 것만 초발심의 신심으로 그러나 그것도 힘겹게 꾸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살피건데 각 위원회는 사회ㆍ국가적으로 불교계가 단합해서 대응할 필요가 있으면서도 전체가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데 매우 필요한 기구이다. 따라서, 각 위원회의 실질적 소관 책무는 어느 종단에서 맡되 각 위원들을 타 종단 구성원과 관련 전문 학자 및 전무가로 구성해서 종단적으로 예산을 배정해 활동하면 자기 종단의 위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도 충분히 해결하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남북불교 교류의 문제이다. 현재 조계종에서 2000년 6월에 설립한 민족공동체추진본부와 북녘동포돕기불교추진위원회, 그리고 법타스님이 운영하고 있는 평화통일불교운동협의회, 태고종의 남북불교교류협력추진위원회, 진각종의 국제불교연구소 등의 기구가 각 종단별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일부에서는 치적주의나 공명심에서 북한에 끌려가는 행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북한에는 조선불교도연맹 밖에 없지만 해야 할 일은 남한의 그것과 같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종단의 단체들은 저마다의 역량을 가지고 교류를 추진하되 범 불교적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종단협의회라는 대표기구를 통해서 추진하고, 개별적으로 하더라도 사전ㆍ사후에 정보를 공유하는 채널을 가짐으로써 조화를 도모하면 된다고 본다.
환경문제는 어느 종단이든 예외없이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보다 적극적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국립공원문제, 전통사찰 경내지 문제, 각종 공사와 관련한 사찰 재산침해 및 문화재 보존의 문제는 자칫 해당 종단, 해당 사찰의 문제만으로 치부될 위험이 있다.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해결해야겠지만 조직적인 결합과 함께 조계종에서 시행하고 있는 재적사찰 갖기 운동 및 신도증 갖기 운동을 범 불교적으로 같이 하되 소속종단, 소속사찰을 명기하여 소속감을 고취하고, 공원 내 사찰출입 편의제공 등 공통된 편리성을 제공함으로써 의식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불교와의 교류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ㆍ한중일의 관계처럼 각종 교류기구를 상설화ㆍ공식화하되, 세계불교 교류기구인 '세계불교도우의회(W.F.B)'를 반드시 종단협의회로 귀속시켜 한국불교의 대표성과 대외적 위상을 높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2000년 11월에 실시한 제1회 외국인수행자 한국문화체험 같은 행사를 보다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한국불교와 문화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가슴 뿌듯하게 살아가도록 하며, 자국에 가서 알리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복지 참여의 문제이다. 종단협의회와 조계종은 1999년도에 보건복지부의 예산지원을 받아 사회복지정보센터를 개설했다. 각종 사회복지에 관한 외부의 정보를 불교계에 제공하고, 불교계 자체의 복지정보를 각 종단 및 원하는 단체에서 공유하도록 하여 각 종단이 복지마인드를 갖추는데 기여하고 있다. 앞으로는 정보센터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면밀히 분석해 각종 복지분야에 각 종단에 편중을 피하고 고르게 참여할 수 있도록 지도하며 복지프로그램의 개발 및 전수에 활용하여 복지정토건설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불교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사회복지를 해야지 그냥 따라가거나 어떠한 유위법의 결과를 바라보고 한다면 아무리 활성화되어도 좋은 것이 아니다.
각 종단에서 별도로 추진해야 할 일이지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분야가 인재의 양성에 관한 노력이다. 종단 구성원의 핵심인 승려(스승)와 재가 신도들에 대한 부단한 교육노력이 요구된다. 승려(스승) 및 재가 신도가 되는 과정에서부터 각자의 분야에 종사 및 매진하여 회향할 때까지 단계적이면서 불교적인 사상에 입각한 재생산 구조의 확립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렇게 상설기구인 종단협의회를 활용하는 연합활동과 함께 각 사회단체 및 타 종교단체와의 연계활동 또한 범 불교적 관점에서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주1) 2000년 9월 문화관광부 집계에는 기독교 161, 불교 80개로 나와 있으 나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교(종)파는 훨씬 많다.
주2) 김용표,(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불교의 입장)《불교평론 통권2호》
주3) 이강오는 그의 《한국신흥종교총감》에서 1970년에 종단등록을 한 태 고종도 신흥종단으로 보지만 1962년에 종단등록을 한 조계종을 신흥종 단으로 보지 않는 것처럼 전통종단으로 보아야 옳다.
주4) 1954년부터 1961년까지는 행정적인 지원, 1962년부터는 조계종에 사법 적인 지원을 하면서도 태고종은 1970년도까지 불법단체의 낙인을 찍었 다.
주5) 주지가 취임을 총무원장에게 허가받지 못하고 관할 관공서장에게 받았 던 것 및 재산처분승인권을 관공서에 준 것 등이 그 근거다.
주6) 이 연구는 제목에서 불교인의 의식조사라 했지만 조계종 승려와 신도 의 의식조사이고, 전체불교를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조계종을 향한 것 이지만 현재 이 모순된 의식구조가 혼재되어 있으므로 그냥 이해해도 좋다고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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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과학연구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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