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이 주목한 시집|고진하
신작시
날마다 시흥詩興이 솟으니 외 1편
느시렁느시렁 걷는 돌방죽 옆
마른 억새 덤불에 핀 흰 서리꽃
정지된 식물의 시간을
햇살이 튕겨대는 눈부신 상고대가 장관이네
엊그제 내린 폭설이 녹아 물이 불어난
개여울은 다급한 음색으로 흐르며
내 느낌의 모천을 소환하듯이
색동의 봄을 부르는 것 같았어
아직도 내게 설렘이 남아 있었던가
벌써 몇 주째 단주의 날들이지만
날마다 시흥이 솟으니
이 과잉의 시정詩情이
지혜의 궁전 문을 활짝 열어주려나
산책로 끝에 얼음 풀린 연못
백로들 날아들며 빙글빙글 돌길래
새의 천성*을 가진 나도
그 무리에 쓱 끼어들어 보았는데
괜히 겨드랑이가 가려워 춤꾼처럼
까치발 들고 스텝 밟다 돌아왔네
춤이라고 해봐야 막춤이지만
어쩌다 쾌연한 성격으로 변한 난
번우煩憂로 복대기는 일 있어도
천변만화하는 구름의 소요거니 퉁치고
얼레 달 뜬 밤이면
저 빛의 실 다 풀리기를 기다려
자족의 그믐 속으로 잠긴다네
늦가을 날 뿌리 캐어
얼어 죽지 않도록 묻어 둔 다알리아가
생각나는 야심한 밤
동면에 들어간 다알리아 뿌리는
선정禪定은커녕
여직 속정俗情에 끄달리는 나를 비웃지 않을까
내일 다시 영하로 내려간다기에
아궁이에 장작개비 몇 개 더 밀어넣고 불멍(!)을 하다
사랑에 들어 늦은 잠 청하는데
길냥이들 부뚜막 긁는 소리, 에고 숙면에 들긴 틀렸구나
눈부신 상고대부터
다알리아 뿌리까지 긁고 또 긁어대는…
*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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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덤
깊은 헛간 구석으로 들어가
죽은 고양이 새끼를 킁킁 후각으로 겨우 찾아
뒤란 앵두나무 아래 묻어주었는데
바람이 불어
버슨분홍 앵두꽃 후두두둑 떨어져
슬퍼할 새도 없이
금세 꽃무덤을 지었네
저 불룩한 꽃무덤에서
돌담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꽃잎 밟고 다니던
음유시인 하나 태어난다면
천연덕스레
종말을 노래하는 시절
지구별 조율사처럼
꽃무덤에서 고양이든 사람이든
음유시인 하나 태어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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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펀이 주목한 시집|고진하
시인의 말
새 시집을 출간한 후 시와 예술을 사랑하는 벗님들에게 정성껏 서명을 하여 보내면서 므흣하다. 시를 창작하는 일이 내가 일궈낸 성취라기보다는 하늘이 베풀어준 선물이라면, 이 선물은 이웃과 나누는 것이 마땅하리. 한 달 전 누구를 만난 것도 아득하고 보름 전 일도 개맹이 풀려 잘 기억나지 않는데, 첫 시집을 낼 때의 그 마음을 간수하고 있으니 이 또한 나보다 크신 분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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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강원 영월 출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역임.
*시집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거룩한 낭비』, 『수탉』,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꽃 먹는 소』, 『명랑의 둘레』 『야생의 위로』,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 등 다수.
*산문집 『시 읽어주는 예수』,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야생초 밥상』, 『조금 불편하지만 제법 행복합니다』, 『야생초 마음』 등 다수.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박인환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