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평 어둠 속.
시간을 확인할 순 없지만 그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다. 물론 난처한 상황에 내가 처해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풍경은 더이상 보이지 않고, 간헐적으로 차량의 엔진소음이나 일순의 바람소리가 야습처럼 실내로 밀려들 뿐이다. 수세기 전부터 전해 내려온 옛날 얘기처럼 늦은 가을비가 내리지만, 나뭇잎이나 지면을 두들기는 빗방울은 전혀 식별할 수 없다. 어둠이 내리기 전부터 시작된 비, 어쩌면 어둠이 내린 뒤의 어느 순간 멎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있을 거라는 육감은 좀체 스러지지 않는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보았던 것, 어둠이 내린 뒤에는 변화의 가능성과 전혀 무관해지는 것일까.
빗살완자창.
어둠이 내리기 전에 보았던 卍자 모양이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그게 거기 있음으로 해서 확인되는 게 아니라, 기억과 육감이 거기 있을 거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짐작을 하자면 창밖의 은행나무, 가파르게 흘러내린 뒤쪽의 산허리도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다. 있으면서 소리없이 밤비에 젖고 있을지도 모를 일 -- 모를 일이라서 짐작은 더이상 확대되지 않는다. 규모감과 무관한 짐작으로 고작 확보할 수 있는 건 언제나 보았던 공간, 혹은 이미 보았던 공간일 뿐이다.
짐작하는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했던 사람, 아그리파의 석고상이 놓였던 자리를 나를 짐작한다. 원로원 의사당에서 시이저를 암살하고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 부루투스의 석고상이 놓였던 자리를 또한 짐작한다. 스타킹과 거들의 대명사가 된 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의 석고상이 놓였던 자리도 물론 짐작한다. 실내를 반으로 가름한 책장, 이젤과 캔버스, 물감으로 얼룩진 탁자, 소형 냉장고, 낡고 오래된 대형 녹음기 등등이 놓였던 자리까지 짐작한다. 해지기 전에 보았던 모든 것들 -- 기억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어둠이 내리기 전과 어둠이 내린 후, 단지 짐작만으로 변화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확신에 대해서는 뭔가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견고한 어둠 속, 짐작이나 기억이 아니라 분명한 확신이 필요해서 오히려 숨을 죽이고 있는 건지도 혹은 모를 일 아닌가. 어디에 무엇이 있을 거라는 짐작이 아니라,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 -- 요컨대 의미의 질감 같은 것.
어둠 속에서, 너의 오랜 침묵을 나는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늦은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는 육감에 덧붙여지는 묵중한 의무감.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십 센티나 이십 센티쯤 옆에 앉아 있을 너, 의미의 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너를 단지 짐작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이 내리기 전과 어둠이 내린 뒤 -- 있었다, 그리고 있을 것이다, 하는 식. 아틀리에의 이곳저곳에 배치된 정물과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짐작되는 너.
수세기 전부터 전해 내려온 옛날 얘기처럼 늦은 가을비가 내리는 밤, 수세기 전부터 전해 내려온 옛날 얘기처럼 너와 나는 똑같은 문제로 똑같은 침묵의 늪에 빠져 있다. 똑같은 문제가 아니라고, 어쩌면 너는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리라. 다른 식의 표현을 구함으로써 너와 내가 손잡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출구.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의 마음은 어둠만큼이나 너에게 견고하다. 짐작할 수 있는 너를 불편해 하지도, 의미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너를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혹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는 일.
진부한 생각은 간단하지만, 간단한 생각이 모두 진부한 건 아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으면 너에게 닿고, 너에게 닿으면 어떤 식으로든 현실감이 되살아날 것이다. 확신, 그거야말로 현실감의 핵이 아닌가. 그리고 확신의 질감, 그거야말로 관계의 핵이 아닌가. 모든 게 명쾌한 것 같지만, 사실 명쾌한 건 아무것도 없다. 행동으로 뚫어야 할 출구, 행동으로 구해야 할 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어둠, 마음의 출구, 마음의 확신을 어찌 손을 뻗는 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으랴.
자정 무렵, 출입구의 셔터가 내려지는 소리를 들으며 얼핏 나는 너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생각했었다. 오빠, 이젠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라고 네가 말한 직후였다. 자정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아파트 단지의 상가 건물, 그 이층의 아틀리에에 너와 나는 고스란히 갇히게 된 것이다. 갇히며 반사적으로 내가 떠올린 섹스, 그게 과연 정상적인 것이었을까.
그것은 본능도 아니고 또한 욕망도 아니었다. 오히려 불길한 예감, 혹은 은근한 두려움에 가까운 무엇, 말하자면 반사적인 제어 욕구 같은 것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아니되리라는 자기 다짐 같은 것. 어둠도 아니고, 욕망도 아니고, 본능도 아니고, 그 순간 나의 뇌리를 스쳐간 건 전적으로 망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서른 살이 되던 삼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남겨진 사람들로 하여금 확신과 무관한 존재가 되게 만든 네 오빠를 나는 생각한 것이었다.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 떠도는 자살자.
그를 배제하고 나는 너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이 정신적인 불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도, 그래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걸 네가 아무리 불만스러워 해도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 영혼에 아로새겨진 그의 무늬, 그걸 지워버리지 못하는 한 나는 영원히 너에 대한 확신의 질감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가 여전히 내 속에 살아 있는데, 어떻게 다시 한번 그를 죽이고 내가 너에게 손을 뻗을 수 있단 말인가.
"내 전화 받고 무슨 생각했어?"
커다란 동굴 속에서처럼 너는 묻는다. 불 꺼지고 셔터 내려진 상가 건물, 동굴과 다를 게 무어랴. 말이 습기에 젖고 이내 어둠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오랜만이라는 생각...... 그리고 미안하다는 생각."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는 대답한다. 근 일 년만에, 그것도 네 오빠가 자살한 날 전화가 걸려왔다는 걸 처음부터 나는 불편하게 생각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네 오빠의 죽음에 대한 나의 망각을 아쉬워한 건지, 아니면 너에 대한 무관심을 아쉬워한 건지를 나는 지금도 모르고 있다. 두 가지 모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미안해. 전화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살갗이 옷에 스치는 소리가 부드럽게 어둠 속으로 떠오른다.
"설명이 변명 같아질까봐 말을 못하겠어. 다만, 미안하다는 말이 네 몫이 아니라 내 몫이라는 것만 이해해 줘."
네 오빠가 자살한 날까지 잊고 사는 나를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을 차마 나는 묻지 못한다. 다른 서른셋, 그것이 무슨 변명의 빌미라도 되는 양 무미건조한 일상이 묵연하게 뇌리를 스쳐간다. 너를 보지 않았던 일 년, 그리고 네 오빠의 기일(忌日)도 잊고 지낸 일년, 나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바빠?"
"아니."
서른셋, 등단한 지 삼년밖에 안된 무명 소설가가 바쁠 건덕지가 무어랴. 남아 도는 시간이 오히려 마음만 분주하게 만드는 일상의 늪에서 나는 허우적거렸을 뿐이다. 허우적거리며 소설, 그것이 무엇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소설도 정의를 구현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끝끝내 마음 굽히지 않으며 네 오빠와 싸우던 그때는 이미 옛날 -- 이기(利己)의 바다에서 익사하게 될 거라던 네 오빠의 악담을 되새기며 오래오래 허공을 올려다보곤 했을 뿐이다. 네 오빠, 내 인생의 옆구리에 매달려 지금도 여전히 비수를 꽂고 있다는 걸 넌 알까.
"바쁘지 않아도 시간이 잘 가?"
"잘 가는 게 아니고 잊고 사는 거야. 가거나 말거나......."
"시간이 뭔지를 아는 사람의 눈에는 해가 뜨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대."
"그럼?"
"언제나 환한 대낮."
"무척 지루하겠군."
"몰라...... 그게 신성한 시간이래."
말을 하고 나서, 신성한 시간을 영원히 맞이하지 못할 사람처럼 너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움푹, 그 한숨의 여파에 내 옆구리가 패어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환한 대낮이라는 말이 눅눅한 어둠 속으로 잦아들 때, 그때 문득 생각난 것처럼 너는 다시 입을 연다.
"몇 시간 동안 시계만 들여다봐. 그럼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고 끝없이 제자리를 맴도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지워버릴 수 없는 상처처럼 끊임없이 같은 상태를 되풀이하는......."
"글쎄, 뭔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강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말을 하고 나서 아차, 하는 생각을 나는 한다. 어떤 상태, 그것에서 내가 벗어나 있다는 걸 암시한 게 아닐까. 하지만 더이상 너는 입을 열지 않는다. 시간에 관한 얘기가 결국 네 오빠를 되살리게 했다는 점에서, 너의 비유는 어둠 속에서도 탄력과 부력을 동시에 얻는다. 시간, 지워버릴 수 없는 상처처럼 끊임없이 같은 상태를 되풀이하는 것. 그리하여 너와 나에게, 네 오빠는 시간인 동시에 상처가 된다.
"요즘도 그림 잘 돼?"
시간인 동시에 상처가 된 네 오빠를 생각하며 나는 묻는다. 작년에 만났을 때, 신들린 듯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너는 하지 않았던가.
"식었어. 아주 싸늘하게...... 팽팽하게 늘어나 있던 줄이 어느날 갑자기 탱, 하는 소릴 내며 끊어진 거 같애. 그리고 이젠 예전처럼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지도 않아. 그려야 하는 건지, 그리지 말아야 하는 건지...... 그런 것도 잘 모르겠어. 자꾸 겁이 나."
너의 말을 듣고 나서 아, 하는 표정으로 나는 허공을 올려다본다. 네가 말하는 그 상태, 그게 바로 내가 말하고 싶어하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상태로 지난 일 년을 지냈다면 너, 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전혀 다른 식으로 나는 입을 연다.
"부딪쳐야 할 것에 부딪친 거야. 피해갈 수 없는 것, 어쩌면 처음부터 도외시했던 것......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다행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어. 나도 비슷하니까."
"오빠는 왜?"
이상하다는 어조로 너는 묻는다. 시간과 상처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뭔가에 제동이 걸려 있는데 해답이 안 나와. 원인을 알면서도 극복의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거야."
"소설이 안 써져?"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써지지도 않고 쓰고 싶지도 않아. 그냥......."
"......."
"안돼."
"정말 비슷하구나...... 동지처럼."
"동지?"
동지라는 말에 대한 느낌, 그것이 순간적으로 검은 보자기로 돌변한다. 그리고 그 검은 보자기의 이미지 안에서 네 오빠의 환영이 다시 한번 꿈틀댄다. 해서 동지라는 너의 표현이 틀렸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검은 보자기의 네 귀퉁이 중에 너와 내가 두 귀퉁이를 맞잡고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부여하고 싶지도, 부정하고 싶지도 않은 것일까.
"동지가 아니라 둥지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림과 소설...... 그런 걸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묻고 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오빠가 자살한 직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며 면목동으로 들어와 아틀리에를 만들던 너,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소설가가 된 나. 그때부터 이미 너의 오빠는 네가 그리는 그림과 내가 쓰는 소설을 지배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니 그 죽음의 둥지 속에서 너와 나는 은거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작년까진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나도 대답하기 힘들어."
면목동, 용마산이 올려다보이는 건물 이층을 빌어 아틀리에를 만들던 시절의 네가 전혀 아닌 듯한 대답-- 이유를 밝히지 않은 오빠의 자살을 그림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싶다던 너는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비껴 서 있는 자는 반드시 학살당할 거라던 네 오빠를 생각하며 소설로 빚을 청산하겠다던 나의 책무감은 또한 어디로 갔는가.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고...... 그런 것으로 한 사람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열정이 잘못된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 아냐. 하지만 왠지 모르게 정말 중요한 것을 무시하거나 간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말을 하고 나서 아주 천천히 나는 무릎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 본다. 예술.......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 거?"
"아니 그런 게 아냐. 죽은 사람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생각한 거야."
나의 말에 너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의 삶 -- 그게 '현실'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걸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때문일까.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 너의 말이 이상스레 마음에 걸린다. 긍정해야 할 것을 긍정하지 못한 때문인지도 모르리라. 남겨진 사람들의 삶이 현실이듯,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예술도 또한 현실이니까.
"지난 삼 년 동안...... 어쩌면 나는 그림을 그린 게 아닌지도 몰라. 그림이 아니라 망각과 싸우겠다는 원색의 감정...... 그런 걸 무한정 캔버스 위에다 쏟아부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피를 기억하지 못하고 희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무차별한 증오의 감정...... 시대가 변했다고, 모든 게 변했다고...... 그렇게 정신없이 날뛰는 인간들이 너무너무 싫었던 거야."
너의 말을 듣고 나서 이해해, 하는 말을 나는 입 밖으로 꺼낸다. 네가 증오의 힘으로 버텨온 삼 년, 강박의 상태로 나 또한 버텼으니 다를 게 무어랴. 죽은 자의 유언에 그렇게 해 달라고 명기된 것도 아니고, 그것이 남겨진 자들의 도리라고 사회규범에 명시된 것도 아닌데, 어째서 너와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까. 서른이 되고 서른셋이 될 때까지 너와 나는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아니 견뎌온 것이다. 하나는 그림으로 하나는 소설로, 머리를 처박고 속절없이 견디다 문득 뭔가에 부딪친 것이다.
아틀리에, 비 내리는 면목동.
14평의 어둠을 나는 여전히 짐작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더 넓은 세상까지도 역시 그런 범주로 받아들인다. 이 불가해한 세계에 대해 나는 무엇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가. 해결할 길 없는 한 인간의 자살은 그리하여 완강한 현실의 벽이 된다. 삶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너와 내가 지난 삼 년 동안 머리 처박아온 그림과 소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금 그 벽은 얼마나 덤덤하고 또한 무표정한가.
짚어보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벽. 갇힌 자의 울분으로 네 오빠의 자살을 극렬하게 부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부정이 아니라면 남겨진 자들의 현실을 긍정하고 싶다고 말해도 괜찮으리라. 한 시대의 어둠 앞에서 좌절하고 자신의 목숨에 스스로 단절을 꾀한 네 오빠에게 너와 나의 인생을 제수(祭需)로 바치는 건 어쨌거나 부당하다는 생각 -- 밤이라서인가.
아무리 밤이라 해도 순간적인 부정욕구가 현실의 벽을 허물지 못한다는 걸 나는 안다. 그리고 그런 부정욕구가 너에 대한 욕망으로 전복되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안다. 오랜 세월 전부터 이미 모든 게 고착돼 있었다는 것. 네 오빠가 시위의 선봉에 설 때도, 제적을 당할 때도, 팔 개월 동안 복역을 할 때도, 그리고 모든 걸 상실한 인간처럼 실의의 나날을 보낼 때도 내 속의 부정 욕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에도 그것이 면면히 지속되고 있었다는 걸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오빠......."
촉촉하게 물기가 밴 듯한 너의 목소리, 산뜻하게 떠오르지도 못한 채 이내 어둠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뭔가를 놓쳐버렸다는 아쉬움을 느끼며, 그리하여 너의 부름에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스스스스, 어둠의 공간으로 은밀하게 흘러다니는 소리 -- 여전히 세상이 비에 젖고 있다는 짐작이 되살아날 뿐이다. 사이, 혼잣말을 하듯 너는 다시 입을 연다.
"나...... 몇 살인지 알아?"
말을 하고 나서 길게, 그것이 버릇인 양 너는 한숨을 내쉰다.
"서른."
"오늘 오빠에게 왜 전화했는지 알아?"
"짐작해."
"아니 짐작 못할 거야. 나......"
그때 오토바이 엔진음이 느닷없이 어둠의 시공을 가른다. 가르는 게 아니라 예리하게 뚫고, 꿰뚫고, 그것도 모자라 쾌속으로 짓이기는 소리. 흠칫 놀라며 말을 끊었다가, 그것이 스러지고 난 뒤에 너는 다시 입을 연다.
"전화...... 외로워서 했어. 비도 오고...... 아냐, 보고 싶어서 했어."
스스로 주워담지 않으려는 듯, 말을 뱉고 나서 너는 재빨리 입을 다문다. 그리하여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의 공간에 '외로움'과 '보고싶음'이라는 말의 여운이 남는다. 어둠의 공간에 또다른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점점 커지는 게 뚜렷하게 느껴진다. 죽은 오빠의 가슴에 끌로, 배신의 언어를 아로새기려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짐작 대신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집중적인 예감이 살아난다. 비켜갈 수 없는 길, 아니 비켜오기만 한 길로 드디어 접어든 것 같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너를 분명하게 의식하게 만든다. 죽은 네 오빠와의 연결고리가 일시에 잘려 나가고, 네 오빠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대화가 너와 나의 문제로 한정된 것이다. 문제가 아니라면 관계, 관계가 아니라면 과거 -- 그것 중의 어느 하나로 팽팽하게 국한된 것이다.
"오빠한테 전화하기 전에 무척 망설였어.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데 아마 몇 달은 걸렸을 거야. 이제와서 내가 이런 얘기 입에 담으면 오빠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얼마 전부터 뭔가가 거추장스럽게 여겨져서 미칠 것 같았어. 전화를 한 건...... 이젠 우리의 얘기를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야."
"죽은 오빠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는 뜻인가?"
"아니, 그 죽음 때문에 가려진 길을 다시 복원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복원......."
고등학생이었던 너, 붉게 물든 얼굴로 내게 편지를 건네주던 너, 네 오빠와 함께 술에 취해 들어갈 때마다 라면을 끓여주던 너, 느닷없는 나의 포옹에 달달달달 이빨을 맞부딪던 너, 그리고 첫 키스를 하고 난 뒤부터 더이상 나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던 너...... 그런 연애의 시간을 이제 다시 복원하자는 것인가.
그것이 설령 연애의 감정이었다 해도, 처음부터 너와 나의 관계가 철저하게 너의 오빠와 연결돼 있었다는 걸 나는 부정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네 오빠가 학내 시위를 주동하던 무렵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네 오빠와 나와의 소원해진 관계로 인해 너와 나의 관계가 철저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걸 너도 또한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자살, 고스란히 화석이 되어버린 기억의 시간 -- 죽음의 그늘에서 서른이 되고 서른셋이 된 사람들에게서 무엇이 과연 복원될 수 있을까.
"내 속의 악마들을 이제 더이상 이길 힘이 없어. 화창한 날이면 입술에다 루주 짙게 바르고...... 거리로 나가 창부처럼 천박한 웃음을 흘리며 걷고 싶기도 하고...... 어떤 땐 몇 잔 술에 취해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 몸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 끔찍스런 속물이 될지라도 그런 흐름에 온몸을 실어보고 싶은 거야. 그런 맘...... 이해할 수 있겠어, 오빠?"
너의 말을 들으며 가라앉아가는 인간, 시들어가는 인간, 굳어가는 인간, 흔들리지 않는 인간을 생각해 본다. 마음에 깊은 병 들어 세상의 흐름에서 고스란히 밀려난 심성의 소유자, 속물스런 삶을 너무나도 간절히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너와 나의 증상은 흡사한 게 아니라 동일하다. 머리와 가슴을 가르고 거기에다 세제와 표백제를 쏟아부어 말끔히 씻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 어디 한두 번뿐이었으랴.
"마음의 불구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참 많이 했어. 너처럼 충동적인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충동마저도 없어. 너에 대해...... 한때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었는데...... 지금은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어. 시간의 거적대기 위에 누워 병든 마음이 몸으로 옮겨 가기를 대책없이 기다리는 형국이야."
날마다 밀려드는 몽환의 시간, 그리고 생동과 전혀 무관한 흐름을 떠올리며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어금니 악다물고 때론 희망을, 때론 열정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의 청춘에 이미 검버섯 번진 지 오래-- 너의 심경 변화가 어둠 속에서도 이를 데 없이 화사하게 느껴질 뿐이다.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예쁜 꽃뱀들이 우글거리는 벌판에 서 있는 꿈을 자주 꿔. 오빠하고 나...... 아니 그림이나 소설 같은 것에서 길을 찾아낼 수 없다면 다른 길을 찾아내면 되잖아. 그것에 몰입하고 그것에서 뭔가를 얻어내려 한 우리의 동기가 잘못됐다고 모든 걸 하루아침에 포기해야 하는 거야?"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해? 그럴 만했다면 처음부터 그랬을 거야."
"아냐...... 너무 지쳤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오빠가 힘들게 견뎌왔다는 거 나 알아. 오빠들의 문제에 나를 연관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나를 피해왔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빠가 얻은 게 뭐야?"
"그럼 어쩌자는 거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울컥,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오르며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동시에 뇌리를 스쳐간다. 죽은 자들과 남겨진 자들의 땅을 적시는 핏빛 노을 위에서도 인간의 축제는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발상 -- 조금도 낯설지 않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하지 못하고 / 시로 시를 사랑 못한다면', 이 땅 위에서 더이상 무엇이 새로울 수 있는가.
"아주 담담한 심정으로 허물을 벗는 거야."
바람소리 때문인가, 너의 말이 어둠 속에서 물구비처럼 넘실거린다. 해서 그것들이 스러지기 전, 마지막 여운을 잡기 위해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 벗는 거야.
"허물...... 이라구?"
"그런 생각을 했어. 죽음은 죽음, 소설은 소설, 그림은 그림, 우리는 우리...... 그렇게 모든 걸 구분해 버리는 거야. 알몸으로...... 세상 밖으로...... 숨을 죽이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흥분을 자제하는 듯한 목소리로 너는 말한다.
"될 거라고 생각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일도 이젠 지겨워."
"인간의 의식은 그린벨트가 아니라 난지도 같은 거야. 어떻게 그런......"
"자신이 없는 거야?"
"모르겠어."
"그럼 써지지 않는 소설 붙들고 있으면 언젠가 뭐가 돼도 될 거 같애?"
"아니 그런 게 아냐. 소설은...... 오랫동안 내가 시대와 결부시켜 생각해오던 그런 것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무엇이야. 그걸 깨우치는데 근 십년이 걸린 거야. 그건 변명의 장치도 아니고, 보상의 장치도 아니고, 또한 구호의 장치도 아냐. 그건 그냥 그것일 뿐이야. 모든 것들과 결부돼 있지만 어느 것 한 가지를 위해 길을 열어주는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다구. 그리고 그런 깨달음마저도 지금은 너무 구차스럽게 여겨질 정도야."
"그런 면에서 나하고 다를 게 아무것도 없잖아. 내 얘긴......"
"그러니까 이제라도 잘못 선택한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택하자, 그건가?"
"왜, 그런 거면 안돼?"
문득 언성을 높이는 너, 에돌아가는 대화에 짜증을 느낀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일정한 거리에 열려 있던 길이 느닷없이 수직으로 일어서고, 그것을 기점으로 어둠은 네쪽과 내쪽으로 뚜렷하게 가름된다. 가지도 않고 가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갈 수 없는 길이 되어버린 길. 반분된 어둠이 기류가 되고, 각자의 기류 속으로 너와 나는 스스로를 유폐시켜버린다. 묵중한 침묵의 기류 속에서 아그리파의 석고상이 반분되고, 비너스의 석고상이 반분되고, 부루투스의 석고상이 반분된다. 책장이 반분되고, 이젤이 반분되고, 캔버스가 반분되고, 탁자가 반분되고, 냉장고가 반분되고, 대형녹음기가 반분된다.
아틀리에, 비 내리는 면목동.
반분된 어둠 속에서 나에 의한 너를 생각해본다. 하지만, 너에 의한 나는 어디에도 없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너에 의한 내가 아니라 네 오빠에 의한 내가 있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나에 의한 너, 그리고 네 오빠에 의한 나 --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온전해지지 못하는 관계의 모순으로 인해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하지만 너, 내가 미처 마음의 정리를 끝내기도 전에 서늘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다.
"오빠, 내가 오빠와 동세대라는 생각 한번이라도 해 본 적 있어?"
"......."
"그럼 지금도 여전히 나는 고등학생이고 오빠는 대학생이야? 그런 거야?"
"......."
"어째서 단 한번도 나와 연관된 문제에는 정면으로 나서지 않는 거지?"
"......."
"죽은 친구의 동생이라서, 그래서 사랑의 감정으로 확대되는 걸 원치 않는 거야?"
"......."
"대답 안해도 좋아. 어차피 사랑이 구걸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 처음부터 오빤 그런 사람일 뿐이었어. 아무것에도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무엇을 위해서도 자신을 던지고 싶어하지 않고...... 그랬던 거야.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이외에 무엇을 오빠가 가지고 있지? 나를 고의적으로 피했던 것도 죽은 오빠에 대한 열등감이었단 거 다 알고 있어.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한 게 아니라 내 오빠한테 주눅이 들었던 거야. 아닌가? 시대를 생각하면서 소설을 쓰겠다고? 죽은 오빠와 소설을 결부시키려 했던 것도 얄팍한 자기 기만이었던 거 아냐? 그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스스로 면죄부를 만들려한 거 아니냐구?"
"......."
대답 대신, 잠 못 이루던 밤에 쓰던 편지를 생각한다. 나 세상에 태어나 만나고 헤어진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네 오빠와 나 사이의 실패한 우정을 제하고, 너에게 가장 무거운 마음의 빚을 졌노라 어설프게 고백하다 찢고 또다시 쓰곤 하던 편지 --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의 힘에 대하여, 그 힘에 의해 일그러지는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나약한 나의 초상에 대하여, 이해의 차원 밖으로 자꾸 멀어져 가는 너에 대하여, 복원하기 힘들어진 전체적인 상태에 대하여, 답답하고 암울한 세상에 대하여, 내가 배워온 모든 교과서에 대하여, 울혈이 심해져가는 청춘에 대하여,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자연과 인간 혹은 수평과 수직에 대하여, 벗어나기 힘들어지는 흐름에 대하여, 날이 갈수록 막막해지는 전도에 대하여, 호흡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상에 대하여,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창출해 내는 인생에 대하여...... 가슴 답답해질 때마다 나는 너에게 쓰고 또 찢곤 했던 것이다.
불온한 파국의 기운.
너의 움직임이 빈번해지고, 그 횟수에 비례해 나의 불안감은 고조된다. 부딪침, 깨어짐, 일그러짐, 넘어짐 같은 것들에 나는 대범하지 못하다. 어둠에 갇혀 어둠의 일부가 되는 일에 길들여진 자,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불상사와 연관짓는다는 걸 너는 아는가. 청승맞은 눈물을 예감하진 않지만, 너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나에겐 고스란히 도발의 기운으로 감지된다. 하여 긴장된 눈빛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지만 너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있을 거라는 짐작뿐, 확신의 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너는 아는가.
그걸 즐기듯, 아니 나의 불안감을 이미 눈치챈 듯 너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짐작은 불안감을 자극하고, 어둠은 더욱 기세등등해진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고 마음은 더욱 다급해진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묵묵부답, 오직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존재감을 짐작케 할 뿐이다. 간신히 유지돼 오던 안정감이 허물어지고 순식간에 최악의 상황이 연출된다.
"거기...... 있어?"
어둠이 내리기 전에 보았던 너의 자리를 향해 기어이 나는 입을 열고 만다. 불안감에 시달리느니 패배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나의 물음에 너는 대답하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도심의 인파가 뇌리를 스쳐가지만 적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소멸해 버린 듯 깊고 무거운 어둠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빗소리, 바람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일체가 찰라처럼 스러지고, 내가 아니라 나라고 짐작되는 존재의 불안감이 어둠의 공간감을 극도로 부풀린다. 숨을 크게 내쉬면 펑, 하는 소리를 내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라가버릴 것 같다.
"어디 있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절박한 목소리로 나는 다시 묻는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나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손바닥에 배어난 땀을 바지에 닦고 나서 어쩔 수 없다, 하는 생각을 나는 한다. 손을 뻗쳐 너를 만져보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된 것이다. 만져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순간이 된 것이다. 확신, 그거야말로 현실감의 핵이 아닌가. 그리고 확신의 질감, 그거야말로 관계의 핵이 아닌가.
너에게 손을 뻗는 일.
다시 한번 바지에 손을 닦고 나서 흐읍, 소리가 날 정도로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런 뒤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네가 있던 자리를 헤아린다. 하지만 헤아림을 앞지르는 육감, 그것이 내 속의 어느 곳에선가 느닷없이 살아올라 네 몸의 어느 한 부분을 지레 연상해 버린다. 허리, 둔부, 허벅지, 아니면 가슴? -- 떨리는 가슴으로 어둠을 더듬으며, 신체의 일부가 닿을 만한 거리에서 나는 손을 멈춘다. 그리고 좌우를 짚으며 조심조심 손을 내린다.
느껴지지 않는 확신의 질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 주변으로 재빨리 손을 옮겨 본다. 이곳저곳, 손길이 닿는 대로 더듬어 보지만 그 부근의 어느 곳에서도 나는 현실감의 핵을 견져내지 못한다. 황망스럽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곳곳을 더듬어 보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너의 몸은 끝끝내 만져지지 않는다. 어디로 사라진 건가. 자리에 선 채 나는 움직임을 멈춘다. 만져지지 않는 너의 몸에 대한 예감 -- 그것이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대책없는 발기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른다.
무엇인가를 열고, 어디로인가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지속된다. 그리고 허물을 벗는 거야...... 라던 너의 말이 묵연하게 뇌리를 스쳐간다. 죽음은 죽음, 소설은 소설, 그림은 그림, 우리는 우리...... 그런 말이 실제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독기운처럼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출구가 없는 게 아니라 그걸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마지막 한 가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잊지 말았어야 할 오직 한 가지, 그것이 짜릿한 전류처럼 중추를 스쳐간다. 세상에 아직 그런 말이, 혹은 가능성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사랑.
네가 어둠 속에서 시종 에돌아 말하고 싶어했던 게 바로 그것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 모든 것이 현실의 벽으로 일어설지라도 여전히 가능성의 텃밭으로 그런 게 세상에 남아 있었다는 게 차라리 신기하게 여겨진다. 여겨지고 되새겨지고, 그러다가 무엇인가가 확 열리는 듯한 느낌.
나도 모르게 사랑...... 하고 어둠 속에서 중얼거려 본다. 완강하고 견고하던 어둠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우리...... 하고 중얼거려 본다. 반분되어 있던 어둠에 새로운 공간감이 생겨나는 것 같다. 사르륵 사르륵, 아주 먼 곳에서 눈 쌓이는 듯한 소리가 간지럽게 귓전으로 밀려든다.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근원을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마음의 한켠에다 작은 등을 달고, 오랜 기다림도 새로운 기다림도 부드러운 인내의 조명권으로 이끌어들인다. 얼마나 오래, 내 마음의 문 밖에서 너는 헐벗고 있었던 것일까.
사르륵 사르륵, 하는 소리가 멎고 누군가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기척. 미세한 어둠의 파장이 멎고, 이윽고 사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내 마음의 문 밖에서 오래오래 떨고 있던 너, 닿을 듯이 내 가까이 와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죽음은 죽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너의 어깨에다 그것을 갖다 얹는다. 하지만 예감을 무색하게 만드는 감촉, 그 부드러움에 오히려 내가 먼저 놀란다.
아.
알몸으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너는 내게 다가온 것이다. 긴 밤의 어둠에 오래오래 물든 그 어깨 위에다 나는 다른 손을 마저 올려놓는다. 그러고 나서 잠시 손을 거두어들이고 차분하게 나의 몸에 걸쳐진 옷을 벗기 시작한다. 긴 시간 동안의 알 수 없는 분망과 초조와 불안이 소멸되고, 이런 평안과 고요가 어디에서 찾아온 것일까. 네 앞에 나도 또한 알몸으로 서고 나서야 비로소 어둠은 온전한 것으로 복원된다. 오래 길들여진 것에서 전혀 새로운 것으로 태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아틀리에, 비 내리는 면목동.
너의 부드러운 살결에 오래오래 입 맞추고 나서 나는 너를 침대로 이끈다. 수세기 전부터 전해 내려온 옛날 얘기처럼 늦은 가을비가 내리는 밤, 수세기 전부터 꼬여들던 악연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네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다가가는 밤. 짐작도, 육감도, 변화의 가능성도 더이상 너와 나의 결합에는 방해가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그것들로부터 전혀 다른 새로움이 느껴지는 시간 -- 아무것도 나는 해석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짐작되던 네가 확신의 실체가 되고,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사랑이 눈을 뜨게 되리라는 믿음. 고요한 바다 한가운데서 너의 몸은 꽃처럼 열리고, 그곳에서 나는 신생의 환영을 죽음의 그림자와 거뜬하게 맞바꾸어 버린다. 맹목과 맹신으로 모든 것과 맞바꿀 수 있는 게 사랑인가.
비로소 길이 열릴 때.
그렇다고 생각할 때, 느닷없이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타타타타, 타타타타...... 천지를 무차별하게 난타하는 듯한 그 소리에 놀라 나는 그대로 동작을 멈춘다. 확신, 믿음, 사랑, 그리고 신생의 환영-- 열리던 문이 닫히고, 닫힌 문 앞에서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린다. 맹목과 맹신에 대한 경고인가.
하지만 너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그것이 심야를 가로지르는 헬리콥터 소음이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 손을 뻗어 나의 위축을 어루만질 뿐이다. 그리고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다시 한번 열린 문으로 나를 이끌며 너는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오빠의 항로를 찾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