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리운 추억들이 있다
인생 60을 바라보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남겨 장차 태어날 우리 손주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
친구들이 몇 년 전부터 사위나 며느리를 맞기 시작해서 벌써 손주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도 있다
봄이 찾아 오니 지인들 자녀의 혼사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 때마다 나는 아이들은 늦게 출산한게 조금은 후회스럽기도 하다
나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라면 아마 바로 아래 여동생 출산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믿을 지 모르지만 아래 여동생은 나보다 3살 아래인데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은 작은 아기를
할머니와 어머니가 함께(누군지는 잘 모름, 추측)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에 씻기는 모습이다
그 전과 그 후는 전혀 기억이 없고 다만 목욕을 시키고 있는 장면을 지금 그림으로 그리라고 해도 바로
그릴 수가 있다
조그만 세숫대야 같은 곳에 물을 조금 담아 한 분은 어깨와 머리를 잡고 있고, 다른 한 분이 씻기고 있는
장면이다
앞으로 순서에 관계없이 생각나는 기억과 추억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할머니는 내가 10살 때 돌아가셨는데 아침에 일어나시지 못하고 계속 잠만 주무시면서 신음을 하고 계셨는데
학교에 다녀 오니 고향 할머니들과 친척분들이 많이 와 계셨고, 할머니는 연신 가래 썩인 숨을 쉬고 계셨다
나중에 숨을 헐떡이며 몸을 뒤척이자 나는 무서워서 밖에 나와 있었는데 할머니는 잠시 후 잠잠해 지셨다
그 때 옆에 계시던 할머니들이 "형님 가시는기요?" 하면서 흐느끼시는 장면과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할머니를
부둥켜 안고 오열하시는 모습이 선하다. 당시 연세는 78세셨다
판돌이 형의 할머니인 대산할머니가 제일 슬퍼하시는 것 같았다
매번 5일장이 설 때면 대산 할머니가 자주 집에 들르셔서 우리 할머니와 함께 곰방대를 들고 뻐꿈뻐꿈 담배를
잡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당시에 할머니들이 즐겨 입던 옷은 고동색 쉐타였는데, 시장에서 파는 것도 있었고, 손기술이 좋은
아주머니들은 털실을 구입해서 직접 뜨게질을 해서 선물로 드리곤 했는데, 우리 할머니는 신동 장터에서
어머니가 구입해 주신 것으로 이음 선들이 일정했는데,손으로 짠 옷은 이음선이 약간씩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여 금방 구분을 할 수가 있었다.
동네에 나가보면 고동색 쉐타를 입으신 분은 거의 나이가 60대 이상 노인들이며, 50대 정도에서 입던 쉐타는
색깔이 회색같기도 하고 은색 같기도 했는데 그 옷을 할머니들이 입는 분도 종종 계셨는데 아무튼 멀리서
보면 모든 분이 고동색 아니면 회색 계통의 쉐타를 입었다
60이 넘으신 할머니들은 대부분이 담배를 피우셨는데 조금 잘사는 듯이 보이는 분은 작은 담뱃갑에 20개씩
들어있는 담배를 피우셨고, 나머지는 대부분 곰방대에 연초를 다져넣어 피우셨다
곰방대는 이동할 때도 뒷짐을 지거나 한 쪽 팔에 들고 다시시면서 중심을 잡거나 물건을 가리킬 때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할머니들은 커다란 한복 바지춤에 연초담배를 넣는 담배봉지(집)을 넣어 다니셨다
옹기를 만드는 웃점마을에 한 아저씨는 항상 신문지를 작게 잘라서 호주머니에 여러장씩 넣어 다니다가
담배생각이 나면 연초를 넣은 담뱃주머니를 꺼내어 손가락 만한 굵기로 담배를 돌돌 말아서 제일 끝에는
침으로 붙여서 피우곤 했는데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또 측은하기도 했다.
그 아저씨는 키도 작았지만 머리 숱이 적어서 일하거나 다닐 때도 얼굴 닦는 흰 수건을 머리에 감싸고 다녔다
이 참에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에 나온 담배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담배도 심부름을 자주 하거나 시장터에서 담배가게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당시 제품들을 이해하겠지만
시골에 사는 친구들은 잘 모를 수도 있다
아버지는 담배를 많이 피우셨는데 니코틴을 제거하는 필터가 있는 것은 싱거워서 못 피우신다며 선물로 받은
필터 담배도 가게에 가셔서 필터가 없는 값싼 담배로 바꿔오라고 하셨다
당시에 외제 담배를 양담배라고 하여 소지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어서 몰래 미군부대 주변에서 구했다며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만 월남전에 파병 간 군인들이 보낸 것은 공공연하게 피울 수가 있었다
어릴 때이지만 값싼 담배를 피우시는 아버지가 불쌍해 보였다.
앞 집에 사시는 재규 아버지는 한의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우리 마을에서 제일 현금 회전이 잘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환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그분은 담배를 피우더라도 꼭 한 개피를 반 만 피운 뒤에
나머지는 나중에 피웠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다가 손으로 앞부분을 눌러서 끈 다음에 꽁초를
호주머니에 넣거나 담배갑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꺼내서 피우곤 했는데, 재규 아버지는 수술용 가위로
담배를 깔끔히 잘라서 탁자위에 뒀다가 환자 치료를 마치면 다시 그것을 입에 물고 불을 붙이셨는데 그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도 조그마한 가위를 하나 가지고 다니며 잘라뒀다가 다시
피우시면 담배 찌꺼기도 덜 생기고 냄새도 적게 날 것 같은데 그렇게 해보시라고 했더니, 조그만 녀석이 쓸데
없는 걱정한다고 나무라셨다.
모든 어른들 옆에 지나가면 담배냄새가 찌들어 할배 냄새가 물씬 풍겼다
담배를 피우는 집에는 안방에 가면 거의 냄새가 같았다. 그리고 젖먹이가 누워 있거나 말거나 어두컴컴한
방에서 손님과 가세하여 담배를 박박 피워댔다
당시에 담배종류는 대강 이렇다
곰방대 용으로 풍년초가 있었는데 크기는 라면봉지 반 정도 되며 누런색 종이봉투에 통통하게 들어 있었는데
우리 할머니는 그것을 두 봉지씩 사오셨다가 거의 한 달 내내 피우셨는데, 손님이 오시면 당신 걸 내놓으시곤
하셨다. 가격은 1봉지에 20원으로 기억이 된다
고향인 심천동에 가실 때나 마을 구경을 가실 때는 담뱃주머니라고 해서 가죽같은 것으로 깊은 주머니를 만들어서
풍년초 담뱃가루를 넣고는 3번 정도로 나누어 접으면 자연스럽게 건조도 막아주고, 새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그걸 치마속 꼬장주라고 하는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셨다.
필터가 없는 개피 담배는 새마을이 한 갑에 10원인데 연두빛 무늬가 약간 있었고, 20원짜리는 백조라는 담배
였는데 아버지 표현으로는 담배질이 제일 좋은것 같다고 하셨다
15원짜리 담배는 금잔디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금잔디는 맛이 없다고 한 번도 피우지 않으셨다
필터가 있는 담배로는 10개피가 들어 있는 희망이라는 담배가 있었는데 각이 지고 담배 길이가 조금 짧았던
기억이 나는데 주로 담배를 적게 피우거나 깨끗한 양복을 입은 분들이나 할머니 중에서 가끔 피우는 것을 봤다
25원짜리는 파고다로 파고다공원 9층탑이 인쇄되어 있었고, 30원짜리는 금관으로 약간 붉은색 무늬였다
40원짜리는 청자라는 담배였는데 색깔이 짙은 고동색으로 기억이 된다. 담배가 독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제일 비싼 담배는 45원 짜리 신탄진이었는데 색깔이 연한 은색이었는데 좀 고급스러웠는데 고향에서는 신탄진을
피우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신탄진에 담배공장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듯 하다
고향에 색시들을 고용한 술집이 두군데 있었는데 왜관옥과 신풍관이란 곳인데 두 군데 다 초등학교 동창 집이었다
그곳에 일하는 색시들은 늘 고급 담배를 물고 있는 것 같았다
색시들은 두 달 정도를 일하다가 다른 여자로 바뀌었는데, 한복을 거추장스럽게 입고 다녔으며 담배를 항상 물고
있었다. 색시들이 바뀌면 그날 부터 한 달 정도는 손님이 늘 넘쳐났다. 그리고 밤마나 술판이 벌어지고 술상을
젓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그 여자들은 술자리가 끝날 때 쯤에는 손님들과 일일이 인사하며 다음에 또 오라고 인사를 했다
그 여자들이 남자들을 부를 때는 나이가 좀 지긋한 사람에게는 선생님이라 하고 나머지는 오빠라고 불렀는데
모든 사람에게 다 반말로 했다
시골에 오는 여자들은 대부분 서른 살이 넘어 보였는데 화장을 짙게 하여 인형처럼 보이는 여자도 있었다
이상이 60년대에 유행하던 담배들이었다
그 뒤로 70년대에 나온 담배로는 개나리, 한산도, 거북선, 선(태양), 은하수, 한강 등이 있었는데 그 때 기억은
별로 없다
동네마다 담배가게가 몇 군데 있었는데, 도시에는 담배가게를 허가받기 위해 추첨을 할 정도로 경쟁이 심했으며
담배가게 위치가 좋은 곳은 지금의 로또 가게처럼 프레미엄이 붙어 있었다
시골 담배가게에는 지금과 같이 하늘색 판에 둥근 원 속에 붉은 글씨로 담배라고 적힌 철판 광고판이 멀리서도
보이도록 옆으로 꺽여서 붙어 있었고, 그 앞에가면 진열장이 여닫이 창으로 되어 그곳을 통해 돈을 주고 담배를
받는 형태로 진열장에는 종류별로 20갑 정도씩 쌓아놓았다.
대구시에서 제일 장사가 잘 된다는 담배가게는 중앙통 양치상 양복점과 정안당 안경점 사이에 있는 조그만 점포인데
벽쪽에 진열장만 붙어 있고 안에 있는 사람 얼굴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곳은 향촌동이란 술집 골목 입구라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그곳에서 담배를 사갔다
담배가게도 규정이 있어서 시내는 200 터 이내에는 다른 점포 허가가 나질 않아서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자갈마당 쪽으로 가는 길에 전매청 연초공장이 있었는데, 늘 담배 찌는 냄새가 났으며, 매일 아침에 담배공장에
근무하는 아주머니들이 수 백명 출근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위에는 흰색 카라가 된 하늘색 작업복을 입었고 바지는 아무런 색이나 입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