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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성모성월을 맞이하여 지난 5월 15일에서 16일까지 산서성 태원(太原.)의 성모성지를 순례하기위하여 본당에서 11명이 출발하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공항에 6시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2시간 정도 비행하여 10시경 태원 공항에 도착하니 태원 출신으로 한국에 유학하시어 사제 서품을 받으신 왕 신부님께서 이번 순례를 안내하시기 위하여 공항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여주셨다.
. 산성성의 면적은 우리나라 남한의 1.6 배이며 인구 3400 만 명이며 석탄과 철광석은 중국내에서 제일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기후는 고원 지내라 건조하고 강우량은 600mm~ 700mm 로 적으며 일조량이 많은 곳으로 황사도 많습니다. 태원 교구(산서성내) 본당과 공소가 109 곳이며 교구청 사제가 62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도착한 성당은 태원(太原) 서류림(西柳林) 성당으로 사도 안토니오를 주보로 하여 본당을 350년전에 설립되어 역사 깊은 성당으로 현재 지역 전 체 인구 5,000명에 천주교 신자가 4,000 명으로 미사참여자가 3,500 명으로 신자 90%이상 주일미사에 참여 한다고 합니다
이 성당의 역사를 살펴보면 350년 전에 본당이 설립된 후 1707년에 청나라 강희(康熙) 황제의 금교령(禁敎領)으로 성당 문을 닫았다가 130여년이 지난 1877년 금교령 이 풀려 종교 자유로운 신앙을 하다가 1900년 8월 의화단 사건으로 성당에 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26 명을 타살하고 성당을 불태우고 부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신 26명이 1946년 교황 비오12세에 의하여 복자, 2000년 요한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성소자가 신부 4명, 수녀 27명 수도자 10명등 그동안 40여명으 성소자를 .배출하였다고 합니다.
이 성당은 1966년 문혁(文革) 때에 성당건물이 많이 파괴되었으나 1984년에 신자들의 노력으로 시작하여 1992년에 건물은 면적2,000m² 종탑이 56m인 현재의 성당 건물이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성당 안은 유럽성당과 같이 아주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4,000여 명이 미사를 봉헌 할수 있도록 성당 내부도 넓고 깨끗 하였습니다.
이곳 성당 교우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 대문에 타이루로 주님을 찬송하는 내용으로 장식을 하는데 이것만 보아도 그들의 신앙이 자기들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당에 들어가니 할아버지 한분이 우리에게 다가와 현재 정부에서 자녀 일인만 두도록 되어있는데 자기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 생명을 죽일 수가 없어 9 명의 자녀를 두어 정부에 벌금도 많이 내었다고말씀 하시는 것을 들으며 그들의 신심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
우리 일행은 서유림 성당에서 왕 신부님의 출신지이며 본당인 육합(六合) 성당으로 향하였다. 육합 성당을 소개하면 이곳은 주민 100%가 천주교 신자로서 교우수가 7,000여명으로 미사 참여율이 90% ~ 95%에 달한다고 하니 이곳에서는 신앙생활이 바로 일상생활 되어 있는 곳입니다. 육합 시내에 들어서니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큰 길거리에 서있는 성상(聖象)이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중국 땅에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성상이 큰 길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큰 도로변 건물에도 전부 성화같은 것을 벽에 조각이 되어있어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 신부님 안내로 성당안에 들어가 성체조배를 하고 본당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주민이 전부 천주교 신자인데 최근 들어 개방화로 젊은 사람들이 외지에 직장 관계로 나가서 결혼을 하는 관계로 지금 현재는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약간 있다고 하며 정부에서 통제를하여도 주민이 전부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성당순례를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왕 신부님 생가를 방문하여 부모님들로 부터 접대를 받았다. 신부님 부모님은 40여 년 동안 새벽미사와 성체조배를 끊이지 않고 하였다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님이 얼마나 자상하신지 신부님이 거처하였던 방을 매일같이 아주 깨끗하게 정리정돈하여 자식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수가 있었다 이곳 순례를 마치고 ‘통얼꺼우’칠고산 성모성지로 향하였다
‘통얼꺼우’본당은 산시(山西) 교회 역사상 오래된 본당 중 하나이다. 타이유엔시 진유엔 서남 10km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뤼량’산, 동쪽으로는 ‘펀’강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진나라 때 유명한 인물 삼국지 저자‘루워관죵(羅貫仲)’의 고향- 칭쉬, 북쪽은 성급 명승고적- 진츠가 있다.
타오촌의 관할에 속해 있다. 타이유엔 교우들 사이에는 ‘통얼꺼우, 거리아오꺼우에는 주교신부가 끊이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전해 내려 온다. 1633년 벨기에인인 예수회소속의 Michael Trigault가 천주교를 타이유엔에 전하게 되는데 다시 통얼꺼우까지 전해지게 되어 지금까지 340여 년의 역사가 되었다.
천주교의 전교 후 마을의 남산과 북산 언덕에 보육원과 성당, 수도원 등을 지었는데 후에 교회의 발전에 따라 통얼꺼우는 점차 중외 천주교 서적에서 언제나 아름다운 명성의 마을로 불려졌다. 지금의 통얼꺼우는 이미 ‘칠고산 생태 여행지’로 정해져 있다. 은혜 입은 남산, 칠고의 뜻이 오래다.
칠고산의 원래 명칭은 ‘남산’이었다. 위에 ‘칠고당’을 건설한 후 ‘칠고산’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100년 전 가을이 되면 통얼꺼우의 농작물은 우박의 공격을 받는 재앙을 맞곤 했다. 그래서 매해 마을 사람들은 기근으로 살던 곳을 버리고 떠나야 했는데 당시의 신부가 교우들을 데리고 십자가를 들고 기도행진을 하여 십자가를 산 정상에 꽂고 재앙을 피할 수 있기를 기도 드렸다. 그 후 통얼꺼우의 농장물은 안전했는데 매년 가을 추수 때가 되면 통얼꺼우의 신부와 교우들은 십자가의 보호로 우박의 고통을 면하게 된 것에 감사하며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십자가와 성모님은 깊은 관련이 있다. 교우들은 매 번 십자가상의 예수님께 경배할 때 자연스럽게 십자가아래 우리와 같은 고통과 슬픔을 가지신 성모님을 생각하게 된다. 중세기 수도회 단체들이 성모마리아의 십자가 아래서의 애통함을 기리기 시작했는데 이후 성모의 일생과 각종 고통을 기념하게 되었다.
1721년 교황 베네딕토8세는 ‘동정마리아의 칠고 기념일’을 제정하였는데, 예수수난 주일 전 금요일에 지낸다. 성모님의 고통과 그리스도의 고통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1913년, 교황 비오 10세는 9월 15일로 옮겨 지내게 했다. 1970년부터 9월15일을 ‘고통의 성모마리아 기념일’로 명칭을 바꾸고 9월14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로 기념한다.
성모마리아의 보호에 감사드리기 위해 통얼꺼우의 신부와 교우들은 칠고산 위에 성모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성모님은 일곱 가지 고통이 있기 때문에 성모당을 칠 고당이라 부르며 남산은 칠 고산이라 하였다.
‘하늘에 오르는 문’을 지나면 광활한 광장이 펼쳐지는데 성모 대 성당만은 광장 서쪽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한다. 금빛 찬란한 고전적 건축물로 기풍이 웅대하다. 성전 앞 20미터쯤에 주 제단을 만들었는데 북경의 천단을 본떠 만들었다. 누런 기와와 붉은 벽, 오색의 대들보와 붉은 기둥, 천상의 궁궐과 같고 인간세계 속의 선경이다. 광장 양측에는 12사도의 조각상이 차례로 늘어서 있다. 모두 신비로운 자태가 서로 달라 살아 있는 듯하다. 조각상의 크기는 실물크기와 비슷하다. 백옥을 재료로 만들었으며 아래는 각 사도의 사적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지금의 주임신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성모 대성당, 중심 제단, 사도 조각상, 이 세 가지는 중국과 서양의 것이 잘 조화 되었으며 물과 젖처럼 잘 융합되어 산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서로 어울리는 것이 혼연일체가 된 듯하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면 중간의 성상이 장엄하고 순간 경외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성전 천장과 사방에는 각색의 벽화가 그림마다 연결되어 천주의 덕과 전능하심을 드러내며 성교회의 기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성전 앞 좌우 양측에는 연못에 분수가 있는데 때로는 옥 나무에 은 꽃이 핀 것 같고 구슬과 옥이 쏟아지는 듯 하고, 때로는 윤이 나며 고요한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비칠 때 맑은 물을 한 줌 뜨면 맑은 물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모든 시름을 잊게 해주고 기쁨이 마음에 가득 차, 영혼의 세례를 받은 것과 같다.
구불구불한 갈지(之)자 형태의 작은 길 구석마다 14처가 있는데 14처마다 청동으로 새긴 것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여 사람들에게 예수의 고통의 길을 하소연하는 듯하다. 모든 방문객은 마치 예수의 수난을 바로 뒤에서 따라가며 보는 것 같이 느낄 수 있다.
성모칠고 산 순례를 마치고 바로 아래에 있는 옛날 수도원이었는데 정부에서 빼앗아 군부대로 사용하다가 최근에 교회에 돌려주어 수녀님들 몇 분이 이곳을 사용하고 계셨다. 옛날 수도원 건물 모습은 그대로이고 부지도 상당히 넓었으나 관리가 허술하여 금방이라도 쓸어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옛날 수도원이었을 때에는 많은 수도자가 있어 기도와 하느님을 찬미하는 성가가 울려 퍼졌을 텐데 지금은 건물은 옛 그대로이나 모든 것이 황폐하여 쓸쓸함만 남기고 있다 성모 칠 고당을 관활 하는 성당에 들렸는데 이 성당 이태리 출신 아순타 복자가 선교 활동을 하던 본당으로 수녀님이 죽은 후 매장을 하였는데 칠년 후 이장하기 위하여 묘를 열었는데 놀랍게 살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 였다고 한다. 순례를 마치고 태원 교구청으로 향하였다 주교님께서 우리 일행들을 위하여 저녁 만찬을 준비하여 주교님과 같이 식사를 하고 주교좌 성당에 들려 주교님께서 우리 일행 전부에게 친필 싸인을하여 중국어 성경을 선물로 주어 너무나 고맙다. 이렇게 첫째날 순례를 마치쳤다.
16일에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빤 취엔산 성모당을 순례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중간에 교통사고가 있어 지체하다가 성모당 순례지에 도착하니 비바람이 불어 원래 6km 거리를 도보로 기도하며 순례하도록 되어 있으며 십자가의 길 14처의 성상이 길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으나, 우리는 차량을 이용하여 성모당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높은 산에(해발 1,760m) 위치하여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노력봉사와 헌금으로 현재 순례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성모당에 차량으로 도착하여 보니 많은 중국 신자들이 비가 오는 데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면서 도보로 올라오는 모습을 보니 그들의 신앙심이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순례길은 능선을 이용하여 길을 내었는데 양 옆으로는 깊은 계곡이 있고 산모습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를 하셨는데 그 광야를 생각하게 하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성모당에 들어가니 안에는 많은 순례객 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왕 신부님 주례로 미사를 봉헌하는데 순례객들이 우리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무릎을 꾾고 미사봉헌을 하는데 우리가 서있는 자세로 미사봉헌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던 같다. 성당 제대는 아주 아름답고 훌륭하게 꾸며져 있었다. 참고로 빤 취엔산 성모당에 대하여 간단하게 소개를 하고자 한다.
‘빤 취엔’산 성모당 소개
1. 루르드와 같은 좋은 위치
성모당은 ‘양취’현 동남쪽의 ‘호우춘샹’의 ‘빤취엔’산 위에 있다. 시 중심에서는 40km정도의 거리이다.
이 산은‘타이항’산맥의 일부인‘죠우’산의북측에 연결되었으며 해발1760m이다.
성당은 이 산의 뒷산에 지어졌으며, 산을 넘어가면 마치 루르드의 성당이 피레네 산맥의 북쪽에 위치하며 산을 넘으면 스페인의 국경인 것과 같다.
성모당의 사방은 푸른 소나무와 비취색 측백나무가 짙푸르게 들어차 있다. 매년 5월이 되면 황금색 복사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므로 호흡할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 지며 마치 천국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새벽이면 옅은 안개가 끼어 기묘한 느낌을 주는데 성모당의 주위를 감싸며 도는 것이 마치 자녀들이 어머니께 아침 문안을 드리는 것 같다. 저녁이 되면 찬란한 노을이 아름답게 펼쳐져 성모당의 꼭대기에서 빛나 마치 어머니가 옷깃을 펼쳐 자녀를 불러 모으는 듯 하다. 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2. 최초의 성모동굴
슬프고도 수치스러웠던 ‘예의지쟁’은 120여 년의 박해를 초래하게 되었다. 종교박해 중 교우들은 산으로 피난하여 자연 동굴을 하나 발견한다. 이것을 고치고, 가지고 왔던 성모상을 모시게 된다. 그들은 이 동굴에서 기도 하였는데 날이 가면서 성모성지로 형성되게 되었다. 그들은 성모를 공경하는 것으로 천주 예수에의 신앙을 유지 하였다. 또 사제가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양위’현의 리우(알렉산더)를 파견하여 비밀리에 광저우의 요아킴 신부를 모셔와 전교하게 된다. 1806년 가경10년 9월30일 양광총독 ‘나샨쳥’에게 잡히게 된다. 신부님은 3년의 투옥 생활 후 1809년 ‘타이유엔’으로 오게 된다. 1815년 ‘샨시아’교구의 주교로 서품 되었다. 사목한 27년간, 성덕이 탁월하여 널리서도 경모 하였다. 교우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기에 신부를 만나길 갈망하는 교우들을 위해 산으로 갔던 것이다.1843년9월21일 ‘치’현에서 선종하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신은 타이유엔시의 묘지에 모셔졌다. 기존의 동굴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노 교우의 말을 빌리자면 원래 동굴은 현재의 성모당 우측 언덕에 있었는데 지금은 몇 장의 기와 조각만이 그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십자가 13처 옆의 동굴은 1986년 ‘리우위원’신부의 도안에 따라 ‘홍꼬우’교우들이 자원하여 파낸 것이다. 계획을 복원하여 14처 끝을 성모동굴로 고침으로서 십자가길의 완전함과 연속성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였다.
3. 로마식의 건축스타일
성모당의 건축연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三晋名胜>에서는 “1770년에 건축하여 1895년에 대규모의 개축이 있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성모당 앞에는 성모정자가 있는데 그 안에는 성모상이 있다. 정자 앞에서 산 입구 까지 예수님이 겪으셨던 14처의 십자가 길이 있다. 매년 8월2일, 8월 15일, 9월8일 삼대 축일에 미사 참례 인원만도 수만에 이른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1897년 이탈리아인 프란치스코회의 Mgr Gregorius Grassi (1833.12.13-1900.7.9)주교의 허가가 있었고 로마식의 건축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건축가 루안푸 사람 ‘리요우깡’의 지휘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 주교는 재임기간 동안 60여 개의 성당을 건축했고 이 건축가가 지은 것도 많았다. 그가 선종한 후에는 성모당 뒤에 묻혔다. 주교는 1900년 7월 9일에 순교하였으며 1946년 복자 품을 받고 2000년 10월 1일에 성인 품에 올랐다. Eugenius Massi(1910-1916)주교가 타이유엔의 주교로 재임한 기간 성모당의 뒷 건물을 증축했다. 1914년 리친즈, 꾸워홍타이, 꾸워룬징등의 교우들은 봉헌금을 모아 언덕 위에 길을 닦고 기념비를 세웠다. 전설에 의하면 1783년 성당을 지었고 지금까지 226년의 역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근거는 없다. 19세기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지어졌다는 설은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1877년 광쉬3년에 시작하여 허베이에 큰 가뭄이 3년간 들었고 산시에서만 2백만, 타이유엔교우들도 굶어 죽은 사람이 4천여 명이 되기 때문이다.
4. 고귀한 이름과 품위
성모당의 명칭은 성프란치스코회의 모회인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아시시 근처의 소성당에서 왔다. 라틴어 뽀르지운꼴라portiuncula의 portio는 부분이라는 뜻으로 –uncula는 작다는 의미의 접미사로 합치게 되면 작은 부분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이름을 부르게 된 데는 또 다른 신기한 이야기가 있다. 원래 네 분의 수사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성모님 무덤에서 성물을 가지고 왔는데 교황 리베리우스는 그들에게 명하여 아시시 근처에 작은 성당을 짓도록 하고 그 작은 부분의 성물을 그 안에 두게 하였다. 그리고 큰 성모상을 모셔 제대 위에 두었다. 성당 축성 후 매일 천사가 성모상 주위를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 후 조배드리는 사람이 많아 소성당에 다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그 사방으로 큰 성당을 지어 올려 성모당이 그 안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천사들의 모후’성모 대성당 portiuncula라고 지었다.
그럼 산시의 이 성당은 왜 이 이름으로 짓게 되었을까?
원래 이탈리아의 이 소성당은 프란치스코 회의 창시자 오상의 성프란치스코가 자주 기도하고 묵상하던 곳이다. 성모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기적을 행하셨는데 프란치스코는 성모께 그 곳에 와서 기도하고 성체조배를 드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대사를 줄 것을 성자께 청하여 주기를 부탁 드렸다. 1216년 교황 호노리우스3세는 대사를 베풀었는데, 그 뒤 이 특별 대사가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모든 성당까지 미쳤다. 우리의 성모당은 바로 이렇게 고귀한 품위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대사는 8월1일 정오 12시부터 2일 9시까지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사도신경을 한번, 다시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각각 한 번씩 바쳐야 한다. 본성당의 주보 축일에도 그렇다.
5. 문화혁명 시기의 파괴
성당은 문화 혁명 중에 큰 고난을 겪게 되는데 성당꼭대기의 십자가부터 성당천장에 목재며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물건들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목재로 조각되었던 성모상은 목이 잘려 산골짜기에 버려졌다. 우리 교우들은 눈으로 보며 가슴으로 아파했다. 깊은 밤 인적이 없는 틈을 타 산골짜기를 뒤져 몰래 성모상을 업어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산속 동굴 벽을 파고 그 곳에 파손된 성모상을 넣어 흙으로 메웠다. 성당이 다시 열리고 리우위원 신부님이 조각가를 불러 수리하여 현재 성모동굴에 모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성모당은 비록 파괴되었지만 교우들의 성모님을 향한 마음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몰래 산을 타고 올라가 성모님을 경배하고 그들의 고통을 울며 호소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문화 혁명 기간 동안 교우들이 산에 가서 조배하는 것을 금지 하였지만 막을 수 없었으며 더욱 열렬해만 갔다. 낮에 못하면 밤에 산을 올라 성모조배는 멈추지 않았다.
6. 개혁개방후의 보수
개혁개방 후 모든 교우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여러 차례 정부에 상서를 올려 이곳을 개방하고 보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정부는 결국 민심을 알아보고 수리를 허가하였을 뿐 아니라 2만 위엔의 보수비를 지원해 주었다. 1986년 교구는 리지엔탕, 리위원 그리고 꾸워지펀 세분의 신부님을 파견하여 보수공정을 책임지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직 주교서품을 받지 않았던 리지엔탕 신부가 주로 산 위에 살며 감독하였다.
보수공정은 쉽지 않았다. 6km가 넘는 산길에다 좁고 구불구불하여 차도 들어갈 수 없었다. 용수등 모든 자재들을 6km 밖의 산 아래서 산까지 옮겨야 했으니 어찌 쉬웠겠는가! 교우들은 항상 보수공사의 어려움을 보면서 마음은 벌써 조급해 져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동조하여 노동봉사를 하고 길을 수리하고 자재를 날랐다. 각 마을의 교우들이 자진해서 동참한 것이다. 위로는 7,80세 할머니부터 아래로는 네다섯 살 아이까지 업고, 고르고,
지고, 안고 하여 노동에 참여하였다. 어떤 4살짜리 여자아이는 책가방으로 모래를 나르다 가방 끈이 다 끊겨 나가자 두 조막손으로 모래를 옮겼다. 이렇게 성모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효심을 나타낸 것이다.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보수 과정 중 적지 않은 기적도 나타났다. 교우 동셩리는 ‘또우루어라사’에서 ‘홍꼬우’까지 오는 동안 큰비를 만났는데, 길이 미끄러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리신부가 자재가 부족하여 공사가 멈추었으니 용감하게 올라와라. 비는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가 명령을 듣고 차를 움직이자 비가 그쳤다. 모래를 실은 차는 무사히 도착하여 공사가 진행되었다. 시멘트 면을 갈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한데 산 위에는 물이 없어 사람들도 빗물을 받아 마셨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성모님께 빌었더니 부슬비를 열흘이나 보내주셔서 사람이 할 일을 대신해 주었고 품질도 최고가 되었다.
길을 닦기 시작한지 25 일 만에 완공하고 보수 작업은 2년에 완성하였다. 타이유엔교구 각 성당의 교우들의 도움이 컸다. 성당보수에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 더 잘 정확하고 완전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7. 영광의 봉헌미사
1987년 8월 보수 공사가 완전히 끝이 나 8월 2일 전통의 뽀르지운꼴라축일 예식을 맞았다. 9월12일 타이유엔교구의 장신 주교와 보수를 맡았던 리지엔탕 등의 신부는 성대한 봉헌미사를 거행하였다. 참례한 교우가 3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20여 년간의 억압에 대한 격정을 가슴에 담고 성모님을 향에 뱉어 내고 흥분과 기쁨을 안았다. 성모님께<성모호칭기도문>을 노래했다. 노래는 50 여가지 존칭과 아름다운 이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 몇 만의 마음의 동경과 갈망, 찬송과 기도를!
8. 폭발적인 순례
만약 동굴에서부터의 성모경배를 계산하면 지금까지 216년의 역사가 있다. 타이유엔의 교우뿐만 아니라 다른 교구, 다른 성과 시의 교우들도 찾아와 은혜를 빌고 은혜에 감사했다. 이렇게 봉헌하는 교우는 매년 끝이 없으며 특히 성모의 몇 개 축일, 8월2일, 8월15일, 9월8일에, 5월 성모 성월에는 순례하는 교우가 더욱 폭발적이어서 그 수가 2,3만에 이른다. 오색찬란한 사람들의 물결이 마치 아름다운 용이 6km의 긴 녹색의 산허리를 꿈틀 되는 것 같다. 14처 십자가길 마다 노랫소리, 악기 소리, 기도소리가 산 전체를 울린다.
미사가 시작되면 북과 나팔이 울리고 각 성당의 관현악대, 들어 올려진 장엄한 성모님의 가마,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고 매우 열렬한 분위기지만 온화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질서정연하다.
성모당 에서는 길이건 성당 내에서건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고 훌쩍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론 희색이 만연하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이것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심정을 가지고 서로 다른 상황과 환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성체를 들어 올릴 때, 모든 천사가 경배하고 만민이 숨죽여 예수님의 성체를 우러러 보는 찰나에 흐느낌을 억누르는 소리가 비록 낮기는 하나 들려온다. 이때는 모두들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미사봉헌을 마치고 태원으로 들어가 왕신부 동창신부님께서 우리를 점심을 초대하셔서 그곳 식당에 갔더니 성당 회장님을 비롯한 봉사자들 여러분이 우리 일행을 맞아 주셨다. 이 식당에서 산서성의 별미를 아주 맛있게 얻어먹고 본당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운영하는 노인 요양원을 들려 그들에게 위로를 하고 나와 교구청 주교좌 성당에 들려 성체조배를하고 성당 내부를 순례하였다.
성당 안은 아주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많은 신자들이 앉아 기도를 하는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주교좌성당 순례를 마치고 우리일행은 마지막코스인 신학교와 수녀원을 순례를 하기 위하여 신학교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에 오월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많이 가물었었는데 우리의 성지순례중에 비가 오는 것은 우리를 반겨주시는 것같아 기분이 좋았다.
신학교와 수녀원 순례하고 바로 대련으로 출발하기위하여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에도 비가 많이 내려서 차량이 지체되기도 하였다. 공항에서 밤 10시 30분에 비행기로 출발하여 대련에도착하니 자정이 넘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중국에 많은 메시지와 중국 신자들의 성모신심이나 그들의 신앙생활이 보는 관점에서 다르겠지만 그들의 순수한 신앙심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동안 중국에는 신앙으로 인하여 많은 박해를 받기도 하였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앙을 굳게 지켜 이렇게 신앙을 보존하였다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사회에서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나 자신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들보다도 열심하지 않았다는 라는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많은 신자들과 현재도 열심한 신자생활을 하는 것을 보며 우리가 많은 것을 그들을 통하여 느끼고 저의 마음에 더욱 주님과 성모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갰다고 다짐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도록 번역하여 도와주신 이정은 데레사 자매님께 깊은 감사들이고 성모성지 순례기를 쓰도록 허락하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해춘 아오스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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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통얼꺼우 칠고산 성모성지와 빤 취엔산 성모당 순례기 잘 읽었습니다.
지난 350여년간 숱한 박해와 금교 속에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키고 있는 중국인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사부님, 건강은 완쾌 되셨지요? 로사 자매님은? 성지 순례, 연령회 봉사등 하느님의 은총, 듬뿍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