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대가들 (20)
로욜라의 이냐시오 (1)
‘영성수련의 스승’ …예수회 창설
16세기 중엽, 심각할 정도로 세속화되어 있었으며 마르틴 루터의 저항과 개혁운동으로 큰 위기에 처해있던 교회에, 이냐시오와 그가 창설한 「예수회」는 새로운 영적 활기를 불어넣으며 쇄신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후 그의 영성은 교회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가 신비체험을 통해 얻은 영적 통찰력을 기록한 「영성 수련」은 근 500년 동안 지역과 신분 및 생활상태에 구애됨 없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쇄신에 크게 기여하여 왔다.
하느님께서 교회의 쇄신과 영적 성장을 위하여 활용하실 도구로 그를 어떠한 과정으로 부르셨으며 어떠한 카리스마를 허락하셨는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준비시키셨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생애
이냐시오는 카스틸야 왕국의 바스크 지방 로욜라 성에서 1491년 벨트란 데 로욜라와 마리나 사엔스 사이에서 열 세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 세례명은 「이니고」였으나 뒷날 파리에서 지낼 때 「이냐시오」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초대교회 교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 대한 그의 각별한 공경심과 애정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이냐시오는 1507년부터 스페인 왕실의 재상 후안 벨라스케스가 죽자 이냐시오는 나바라의 태수 안토니오 데만리케 공작을 새 주인으로 섬겼다.
1521년에 그는 나바라의 수도 팜플로나가 프랑스의 에피파로스의 군대의 공격을 받게되자 그는 선봉에 서서 용감히 대항하여 싸웠다.
그 싸움에서 이냐시오는 양쪽 다리에 심한 부상을 당했다.
그가 부상을 당하자 팜플로나 성을 방어하던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스 군인들에게 항복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이냐시오에게 두 주간의 치료를 받게 한 후 로욜라 성으로 돌려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몇 차례의 재수술로 인해 혹독한 고통을 겪었으며 힘든 회복기를 보내야 했다.
한편 수개월의 회복기간은 그에게 인생여정을 바꾸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도록 하였다.
병상에 누워있던 그는 지루한 시간을 메우려고 평소에 즐겨 읽던 기사 무협 소설을 찾았지만 쉽게 구할 수 없었고 대신 몇 권의 종교 서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엔 작센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자코보 데 보라진이 쓴 「성인들의 꽃」이라는 성인들의 행적집이 있었는데 그는 그 두툼한 책자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있음을 발견하였다.
지금까지 그의 이상이었으며 그의 삶을 이끌어왔던 영예롭고 영웅적인 기사로서의 모험에 대한 매력이 사그라지면서 그에 대해 침울한 기분과 함께 무미 건조함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책을 통해 알게된 성인들의 생애를 생각해 보고 그들의 삶을 모방하는 상상을 할 때엔 그렇게 즐거워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의 그러한 발견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수행해야 할 이냐시오적 영성의 시발점인 「영성 식별」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 안에서 체험하면서 발견하게 된 느낌 즉 「황량」과 「위로」는 앞으로 그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식별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성인들이 이루었던 그 놀라운 행업을 자신도 이루고자 속세의 야심과 욕망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1552년 2월 말 이냐시오는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로욜라 성을 떠나 카탈로니아에 있는 모세라트 성모 성지로 갔고 그 근처 만레사에서 몇 달 속죄를 위한 고행의 기간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그에게 어려웠던 것은 극심하게 자신을 짓눌러대는 내면의 깊은 절망감이었다.
속죄의 삶을 살던 그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에 사로잡혀 자살의 유혹까지 받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신앙의 신비(삼위일체, 창조, 그리스도의 인성 등)에 관한 깊은 체험을 했다.
이 영적 체험은 만레사 가까이에 있는 카르도네르 강변의 한 동굴에서 일어났던 「조명(照明)의 사건」을 통해서였다.
그는 이 때 영적인 삶, 신앙과 신학에 대해 깊은 깨달음을 받았는데 그의 온 생애의 직관을 전부 합쳐도 여기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체험은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 전연 새 사람이 되게 했다.
그는 이 때 자신이 새로운 지성을 받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 후 그의 기도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려는 내면적 역동성을 지녔다.
그는 그리스도의 기사로서 그분의 협력자가 되도록 불렸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신비로운 은총의 체험들을 그의 책 「영성 수련」에 기록하였다.
1523년 그는 로마와 베니스를 거쳐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귀국하면서 「영혼」을 돕기 위하여 정규 교육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524년 바르셀로나에서 초급 라틴어 공부부터 시작하면서 1534년 파리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얻기까지 장기간의 면학 생활을 하였다.
파리 체류 기간은 그의 면학에 있어서나 예수회의 장래에 있어서 매우 의미 깊은 시기였다.
후에 수도회를 함께 발족시킬 하비에르의 프란치스코 등 동료들을 만난 것도 파리에서였던 것이다.
그들의 영성생활의 결속, 공감적 지향, 특히 1534년 8월 15일 몽마르트 소성당에서 행산 서원 등은 예수회 창립의 서곡이었으며 그 길을 닦은 것이다.
1537년 6월 24일 세례자 요한 축일에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사제 성품을 받았다.
그들은 비첸자 근처에서 함께 며칠 지내면서 그들의 그룹을 「예수회」(Societas, Jesu)라 명칭하기로 합의했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누구도 스승으로 삼거나 섬기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그분이 이 세상에 사셨던 모범을 따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걱정을 함께 나누면서 자신들이 온전히 소모되길 원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자진들을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임을 깨달았다. 협의를 끝낸 후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로마로 떠났다.
1537년 11월 이냐시오가 로마에 인접한 카시아의 라스토르타 소 성당에서 기도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만레사에서 겪었던 것과 유사한 신비적 조명의 은총을 받았다.
그의 영혼과 마음을 하느님께서 아드님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이제는 더이상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믿음의 은총을 받았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1539년 봄 수도회 창설 문제에 관해 여러 날 오랜 시간 기도와 협의를 거쳐 4월 15일 수도회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5월 3일엔 구체적인 회칙이 수도회 명을 「예수회」라 하기로 하고 그들 중 한 사람을 장상으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5월 3일엔 구체적인 회칙이 11개의 장으로 요약되어 발표되었다. 같은 해 6월 말 이냐시오는 예수회 회헌 첫 번째 초안을 작성하여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구두 승인을 받았다.
1541년 3월 4일부터 로마에 있던 모든 회원들이 회헌의 본문을 만드는 세부 작업을 시작하면서 우선 총장을 종신제로 선출하는데 합의한 후 만장일치로 이냐시오를 총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수락을 사양했으나 회원들의 집요한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548년 7월 31일에 이냐시오는 교황청의 허가를 얻어 그 유명한 「영성 수련」이란 책자를 출간했다.
1550년 7월 21일에 교황 율리오 3세에 의해 수도회는 최종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회헌은 1558년 제1차 총회 때에 승인되었다.
이냐시오는 1556년 7월 31일 65세의 나이로 임종했다.
그 때 이미 수도회엔 1천명에 가까운 회원들이 있었으며 13개의 관구로 나뉘어 110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609년 이냐시오는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복자가 되었고 1622년 3월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박재만 신부(천주교 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첫댓글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공부하고 갑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