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외된 우리들의 자화상
『투명인간』, 성석제, 창비, 2014.
나는 알았다. 그 또한 투명인간이라는 것을. 나는 모른다. 그가 왜, 어떻게, 언제부터 투명인간이 되었는지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위풍당당> 등을 저술한 작가 성석제는 3년 가까이 공을 들여 장편소설 <투명인간>을 완성했다. 다중화자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구도는 각각 인물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하는 장점을 가진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소설은 위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소설을 읽고 위안을 받을지는 독자의 몫에 달렸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60- 80년대 굴곡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3세대에 걸쳐 일어나는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만수의 할아버지는 큰 부잣집 삼대독자로 태어났으나 독립운동단체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가문은 몰락하고 인적이 드문 개운리로 들어와 터를 잡는다. 몰락한 양반자제 후손의 이야기다. 3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난 만수는 어리숙하고 머리가 크고 늦된 아이였다. 한 집안의 명민한 장남 백수를 성공시키기 위해 다섯 남매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지금은 희미해졌지만 예전엔 딸들은 더욱더 오빠들의 뒷바라지를 했었다.
할아버지는 ‘염치’를 최고의 삶의 가치로 두었으며 동물과 다른 인간은 염치를 아는 동물임을 강조하며 염치를 숭상하라고 가르친다.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이며 양심으로 해석되는 염치는 어쩌면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다.
만수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가족에게 있었다. 정체성, 뿌리를 가족에게 두고 있으며 자신보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인물이다. 똑똑한 백수, 자신의 길을 가는 석수가 있듯이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만수같은 인물도 있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만수를 두고 답답하다, 불편하다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만수를 통해 소외받고 존재감 없는 소수들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p364) 만수같은 인물들이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세지를 작가는 주고 있다. 0.01% 정도의 확률로 투명인간이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하루에 스무시간 가까이 일하며 잠은 십년 동안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자본 날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고, 제대로 된 밥상을 마주하는 경우는 일년에 몇차례가 될까 말까하다(p327)는 만수의 일상이 과연 개인적인 문제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개인은 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사회에 대한 비판 없이 개인의 희생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투명인간으로 살아가는 소설 속 만수는 위안이 되겠지만 현실에선 어떤 것으로 위안 받을지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서평 3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