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세기 2장 8-9절 /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장 15-17절 /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1-6절 /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동방의 한 곳에 있게 하신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는데,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두신 사람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 것이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금하셨는데, 사단은 이를 악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사단은 먼저 하와에게 접근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도록 권하며, 그렇게 하여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도록 미혹하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아는 분별에 있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막으시는 것이라는 의심을 심어주었습니다.
하와는 이러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지 않고 탐욕에 이끌리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이하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죽음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으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형벌에 있게 된 것을 보면서 대체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나무의 열매, 곧 생명과만 먹었다면 영원히 살 수 있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영생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온 인류가 죽게 된 것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해를 잘못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음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 열매는 먹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만 먹음에 있다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더라면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해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영원히 살 수 있었으나 그 열매를 먹지 않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죽게 되었으며, 그런 아담과 하와를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영생하는 열매로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었는데,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도 따 먹었으면 영생하겠습니까? 아니면 죽음에 있겠습니까? 죽음에 있다고 대답하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도 영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는 영생 실과이겠습니까? 이걸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어서 영생하지 못하고 죽음에 있게 된 것이겠는지요.
‘생명나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9, 16-17)라고 하신 것에서의 ‘생명나무’는 ‘영생하는 나무’ 또는 ‘영생하게 하는 나무’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두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생명’과 ‘나무’입니다. 이때 ‘생명’이라는 단어는 ‘살다’는 뜻에서 유래하여 ‘살아 있는’, ‘생존하여 있는’을 뜻하는 것이 ‘생기’, ‘활력’, ‘번영’ 등으로도 쓰이는데, ‘나무’와 함께 쓰여 ‘생명나무’로 말해지고 있는 것으로, 문자적인 뜻은 ‘살아 있는 나무’, ‘생존하게(생존에 있게) 하는 나무’입니다. 이는 우리가 음식을 섭취하여 생존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생명을 지속해 나갈 수 있도록 먹을 수 있게 해주시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에덴동산에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에서의 먹기에 좋은 나무와 구별을 갖는 것은, 칼빈이 말한 대로 “이 나무는 아담과 하와가 그 과실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토록 해주는 성례전적(聖禮曲的) 의미를 지닌 나무”인 것에서입니다. 우리들이 여러 떡들을 음식으로 섭취함에 있으나, 그렇게 섭취하고 있는 떡을 또한 성찬식에서 제공되는 ‘떡’을 먹음에서 그것을 먹을 때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마 26:26; 막 12:22) 하신 것에 있은 것과 다름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었을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불행하게도 죽음에 있게 되었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사람을 영생하는 생명에 있게 하는 것은 생명나무의 열매가 아닙니다. 생명은 창세기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보게 되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됩니다. 그러한 것이지, 생명나무는 그 자체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증하는 담보’ 와 같습니다. 그러한데 3:22-24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라고 하시면서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는 것은 왜 그런 것인가요. 여기서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라고 하신 말씀은 생명나무의 열매가 영생하게 하는 열매라고 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신 죽음의 형벌에 놓여 있게 됨으로써 타락 이전에 죽음이란 것을 알지 못했던 사람과 하나님 간의 정상 관계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파괴됨으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생명의 지속에 있어 왔던 생명력이 제공되는 일이 더 이상 있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함으로 인하여 인간의 육체적 생존을 가능케 하는 생명력을 영원히 제공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럼으로써 타락 이전에는 애초부터 죽음이란 것을 알지 못했던 사람과 하나님 간의 관계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파괴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이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진 이제부터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선언하신 그 ‘죽음’을 당함에 있음을 아담과 하와에게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죽음의 씨가 죄와 더불어 그의 본성에 들어온 사람이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어보내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금령법을 따르지 않은 범죄한 사람이 처한 상황의 실제를 다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에서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전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조치하여 아담으로 하여금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하심은 인류에게 구원의 소망을 완전히 끊어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구원자를 바라보게 하려는 매우 깊고 선하신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해서 20-21절에서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이름을 부름에 있게 하여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에 대한 이해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써 그들을 향해 가지신 하나님의 깊은 자비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사람이 죽음에 있게 된 것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음에 있게 된 것은 임의로 먹을 수 있게 하신 각종 나무의 열매와 함께 생명나무의 열매 또한 먹음에 있어왔어도 – 설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에 있지 않았어도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시며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미혹을 따라 탐하는 욕심에 이끌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먹음에 있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음에 있게 된 것이며, 이것을 사도 바울은 ‘죄값’이라고 그 정의를 내려주었으며(롬 6:23), 육신의 생각은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롬 8:6).
이렇게 육신의 생각을 따라서 탐욕에 이끌림에 있게 된 것이 첫 사람 아담과 그 후손으로 오는 모든 인류의 본능이요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의로 먹을 수 있게 하신 온갖 먹을거리를 받았음에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조차 탐욕을 발동하는 것이 육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죽음에 있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죽음에 있게 한 죄를 처리해 주시는 구속을 수행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음에 있는 것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끊어버림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닌 영의 생각대로 사는 것이기에,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살림을 받음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림을 받음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자기를 위하는 탐욕스런 욕심의 자신을 죽이고 영이신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뜻을 따르는 새사람이요 속사람의 생명으로 삽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그 생각을 떠오르게 하고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일을 매주일 교회로 모일 때마다 말씀을 통해서 주시고 성찬을 가질 때마다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게 없으면 우리는 단지 만나를 먹고 반석의 물을 마시는 것으로 기뻐함에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것은 떡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믿음으로 살게 하여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영생하는 양식에 의해서 살게 해 주십니다(마 4:4). 그런 사람이 무엇에 힘쓰겠습니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인가요?(마 6:25). 아닙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에 있습니다(마 6:33). (*)
2024.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