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구간(벌교-고흥-완도-해남)-다섯째 날(4월 28일 화요일. 맑음)
어젯 밤 잠을 푹 자고 터미널 앞 식당에서 아침도 든든히 먹었으니 오늘은 컨디션이 아주 좋다. 동쪽 해안보다 비교적 옛 모습이 남아있을 것 같은 완도의 서쪽 77번 국도를 택했다. 원장머리(석장리)의 해안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어느 화가가 있어 이리 아름다운 포구를 그릴 수 있으랴. 아침 햇살이 밝게 비치는 이런 해안을 볼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하다. 아내도 감탄한 눈치다.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해안보다 아름답다. 9:00, 정도리의 화흥항을 지난다. 이 화흥항에서는 보길도, 노화도, 소안도로 가는 배가 출발한다. 보길도로 가서 해남 땅끝으로 가는 배를 타면 더 이상 걷지 않고도 땅끝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걷기여행인데 너무 싱겁지 않은가? 몇 번 배를 타더니 꾀가 났나? 보길도는 전에도 두세 번 가보았으니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10:30, 평강의 집(사회복지법인/대신리/061-555-2214~5)의 간판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효도단기사관학교' 단기에 효도 잘 하는 사관을 길러내는 학교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나같은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사무실을 찾아들어가서 차정환 씨를 만났다. 나이가 불과 30대 줄반으로 보이는데 사무국장이란다. 평강의 집은 치매 혹은 기동이 부자유스러운 노인들의 요양시설이다. 멀쩡한 노인은 들어갈 수 없다. 수용인원은 불과 30명인데 곧 60명으로 늘릴 예정이란다. 월 비용이 35만 원이라니 놀랍다. 게다가 '자식같은 마음으로 어르신 섬김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있으니 장애노인 모시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다. 그런데 '효도단기사관학교'는 무언가? 계절마다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효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한단다. 비록 기독교 재단이지만 입소자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니 참 다행이다.
11:00, 청해포구 촬영장. 촬영장에는 평일인데도 구경 온 사람들로 붐빈다. 대부분 노인들인 것 같다. 멀리서 촬영장을 잠시 훔쳐보고 다시 걷는다. 완도에서는 골프영웅 최경주 선수와 신라시대 청해진에서 활약한 장보고가 영웅이다. 최경주는 세계인, 장보고는 미래인이란다. 최경주를 세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장보고가 왜 미래인일까? 신라시대의 아득한 옛날 사람인데... 5월 2~3일에 장보고 축제가 열린다는데 보지 못하고 떠나서 아쉽다. 11:40, 당인하리의 버스 정거장에서 차를 마시면서 잠시 쉬고 있으려니 동네 노인 두 분이 다가와 말을 건다. 해안선을 따라 걷는다는 얘길 듣더니 1시간 걷고 1시간 버스를 타면 좋을 것을 뭐하러 힘들게 걸어다니느냐고 웃는다. 76세의 나이에도 아주 정정하다. 공기 맑고 경치 좋은 곳에서 살아서 건강하신가보다고 했더니 날더러도 와서 살란다. 땅값이 평당 6만 원이라니 내 분수에 적당하다. 아내가 '바다만 바라보고 사나? 집은 짖는 순간부터 골치가 아플텐데...'라며 지레 걱정이다. 하긴 늘 벼르긴 해도 실행을 못하니 무슨 소용이랴.
1:00, 갯바람 공원을 지나 완도군에서 운영하는 공동묘지. 바다를 바라보는 묘지의 위치가 아주 좋다. 관리실에서 직원들이 라면을 먹고 있다. 시장하던 판에 침이 꼴깍 넘어간다. 날더러 같이 먹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마침 시장하던 차에 잘 되었다. 대뜸 나만 먹을 수 있느냐? 우리 마누라도 밖에 있다고 했더니 라면은 충분하니 걱정 말란다. 그러나 아내는 별로 생각이 없단다. 대신 내가 한 그릇 반을 먹었다. 배가 부르니 아주 기분이 좋다. 자신을 자칭 발랑 박 씨라고 소개한 유쾌한 50대 후반의 사내가 술 한 잔 하란다. 눈도 아직 났지 않은데다 술을 마시면 걷기가 힘들어서 사양했지만 막무가내다. 그래서 억지로 한 잔 했다. 묘지의 위치가 좋다고 했더니 완도에 사는 사람이라야 이용이 가능하단다. 공연히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투다.
2:30. 군외초교. 아마도 신동아 건설 김용선 회장의 모교인가보다. 김용선 회장이 기증한 교문 옆에 김 회장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군외농협 하나로 마트에 들려 간식꺼리를 준비하고 완도대교를 건넌다. 다리 저 편에 해남 북평면 동촌리 저수지 사면의 공룡그림이 보인다. 작년 여름 땅끝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걸을 때도 보았던 그림이다. 그러나 아직도 왜 저기에 공룡그림이 그려져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이제 해남이다. 오늘의 일정은 남창사거리까지다. 길가에 쭈구리고 앉아 해남행 버스를 기다린다. 시골의 버스는 빨라도 1시간 간격이니까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어쩐지 아내의 표정이 어둡다. 눈치가 없어서 미처 몰랐는데 아내의 발이 터지고 다리가 아파서 고통이 심하단다.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라 꾹 참고 있어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다행히 4시경 버스가 왔다. 두 사람의 버스 값이 5.600원이란다. 만원짜리를 냈더니 500원짜리 동전으로 거슬러 준다. 운전석 옆에 서서 동전을 세고 있었더니 운전수기 '어르신, 맞아요. 그냥 가서 앉으세요.'라고 한다. 내가 꾸물거리고 있는 꼴이 몹시 위험하게 보였나보다. 아이고, 쪽 팔려. 더구나 어르신이라니. 검연쩍어하는 날더러 이내가 나무란다. 제발 웬만큼 하란다. 그럼 거스름도 확인하지 말라고? 에라 모르겠다. 해남에 가서 일찌감치 쉬기나 하자.
※사파이어 모텔/해남 버스터미널 앞/061-537-4825
오늘 걸은 길 : 완도 최경주 공원-석장리-화흥항-청해포구-완도군 묘지-군외면-남창사거리. 26.2km
첫댓글 동전이 무거워 걷기에 지장을 줄터인데, 운전수 눈치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