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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87년
최소한의 경호인원만 데리고 낙양성을 출발한 고조영과 이해고, 사비우는 수로를 이용해 북으로 올라가 창주滄州에서 내렸다. 거기서부터 하간현으로 가기 위해서다.
배에서 하선할 때 이해고가 조영의 곁에 다가와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조영 형, 우리가 노골적으로 이런 곳을 찾아다니면 태후마마께서 의심하지 않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태후마마께서 중국에 살고 있는 고려백성들과 거란, 말갈인들을 주로 다독이고 그들을 위무하라고 이르셨습니다. 먼저 고려, 거란, 말갈인 마을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당연합니다.”
“군사들을 데려오지 말고 우리끼리 왔더라면 한결 마음이 편했을 것 같습니다.”
“일곱 명의 군사들을 우리가 임의로 선발해 데려왔지만, 그 중 한둘은 무 태후의 귀와 눈일 겁니다. 각별히 조심해야죠.”
사비우가 끼어들었다.
“좋은 말씀이오. 그런 건 잊고 재미난 구경이나 좀 합시다.”
고조영이 제의했다. 이해고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듯 유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창주에서 유명한 것이 무엇인지 조영 형은 아시오?”
“글쎄요. 이 근방에 옛날의 고려 성터가 좀 있다는 건 알지만···.”
그가 말끝을 흐렸다.
“창주는 예로부터 무술의 고장입니다.”
“오, 그래요? 어떤 무술이 유명합니까?”
“유명한 팔극무학八極武學이 창주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팔극무학이라면 우리 고려인들이 연마하던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창주와 하간현 일대에 이 무학이 두루 퍼져 있습니다.”
“그것 참 흥미롭군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내가삼학內家三學이라 불리는 형의形意, 팔괘八卦, 태극太極이 모두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옛 조선 땅에서 발흥했습니다.”
“저도 조부로부터 좀 듣긴 했지만, 해고 형은 역시 ‘신창神槍’이라는 별명답게 무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군요.”
이해고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과찬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하늘을 쳐다보던 이해고가 제안했다.
“팔극무학의 본산지라는 창주와 하간현을 돌아보고, 이어서 심주深州와 유주를 돌며 팔괘, 태극무학을 살펴보면 어떻소?”
“해고 형은 무학 얘기가 나오니까 얼굴이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검술이나 권술을 구경하러 쏘다니면 우리는 무엇으로 황태후께 보고한단 말이오?”
조영이 웃으며 물었다.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 머리 좀 식히는 게 무어가 대수겠소? 황태후 폐하도 그런 것쯤은 이해하실 거요.”
이해고의 말에 사비우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해고의 눈동자에 생기가 감돌았다. 그가 덧붙여 제의한다.
“창주의 유명한 무술가들을 좀 만나봅시다.”
고조영이 내키지 않은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고 형은 무술에 특출하시니, 거기에 큰 흥미가 당기는가 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그게 우리의 본업무가 되고 진짜 본 업무는 뒷전으로 밀려날까 걱정이오.”
“창주에 이노사李老師라는 분이 계시다는데, 그 분이 창술의 달인이라고 합니다. 그 분만 좀 만나보고 갑시다.”
이해고가 사정하는 바람에 고조영과 사비우는 창주 성내로 들어가서 이 노사라는 분을 찾았다. 그를 찾아가는 길에 우연히 시장을 지나게 된다.
그 때 마침 시장의 한쪽 귀퉁이에서는 무예를 팔며 장사하는 자들이 한참 열을 내고 있었다. 이해고가 흥미를 보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창날을 인후에 대고 힘주어 밀기, 소위 은창자후銀槍刺喉, 손바닥으로 차돌을 깨뜨리기, 경신술 등등 다양한 재주를 보여주었다. 그 중 이목을 끄는 것은, 어떤 검술가가 사방에서 뿌리는 물을 검으로 모두 막아내는 장면이었다.
“조영 형, 물을 막아내는 저 검법이 사실이라고 믿소?”
“사실이 아니면요?”
“물론 사실이겠죠. 하지만···.”
그가 말을 중단했다.
조영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실은 나도 삼극팔괘검법으로 흩뿌려지는 물을 막아낼 수 있소.’
이노사의 집은 창주성내의 동북쪽에 있었다. 그의 집이 대단히 넓어보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의젓한 복장을 한 고조영의 무리가 이노사의 집에 들이닥치자 하인이 대문을 나와 물었다.
“이노사님을 잠깐 찾아뵈러 왔습니다. 혹시 지금 집안에 계시는가요?”
“저의 나리께서는 대단히 바쁘셔서 외인들을 접견하기가 쉽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집안에서 손님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고조영이 이해고를 돌아보며 그냥 돌아가자는 눈빛을 보냈다. 이해고가 하인에게 말한다.
“이노사님을 사모해 멀리에서 찾아왔으니,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들어오셔서 객실에서 기다리십시오.”
하인은 그들의 옷차림이 범상해 보이지 않고, 수행원들까지 거느리고 있는지라, 그들의 나이가 젊었지만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
고조영은 시종하는 군사들을 바깥에서 기다리게 하고, 이해고와 사비우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말을 하인에게 맡기고 객실로 가니, 여러 사람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세 사람은 먼저 온 손님들에게 간단한 목례를 표한 후, 조용히 앉아서 면담을 기다렸다.
고조영은 이해고의 등살에 밀려 이곳까지 들어왔으나, 이게 도대체 무슨 부질없는 짓인가 생각하니,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잠시 후, 하인이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저희 나리께서 멀리서 온 젊은 손님들을 속히 뵙고 싶어 하십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이해고가 희색을 발하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이 하인을 따라 접견실에 당도하니, 환갑이 좀 넘어 보이는 한 노인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서며 세 사람을 맞았는데, 조영이 얼핏 보니, 그의 안광이 번개처럼 번득거리고 얼굴에는 위엄이 깃들어 있는 게, 대단한 내공의 소유자 같았다.
“어서 오시오. 젊은 고관들.”
이노사가 그들의 신분을 꿰뚫어보며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노사님의 명성이 저 아래 쪽 동도서경에서도 우레처럼 발하고 있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이 노인을 찾아주셨소?”
“평소 노사님의 무술을 흠모해 공무로 나온 김에 꼭 찾아뵙고 인사나 여쭙고 싶었습니다.”
이해고가 대답한다.
“어느 관직에 계시오?”
“동도의 황궁에서 숙위를 보고 있는 말단 무사입니다.”
이해고는 일부러 자신들의 신분을 낮추어 말했지만,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이해고는 이어서 말했다.
“저는 이李가이고, 이 사람은 고高가, 옆의 거한은 사四가입니다.”
이해고는 고조영과 사비우를 지적하며 이 노사에게 소개했는데, 신분의 노출을 꺼렸기 때문에 이름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세 분은 무슨 무예를 익혔소?”
“저는 창술을, 이 미끈하게 생긴 친구는 검술을, 이쪽은 언월도를 익혔습니다.”
이 노사가 세 사람의 낯을 자세히 훑어보면서 말했다.
“내가 한 번 세 사람의 무술을 구경해도 좋겠소?”
고조영이 사양하려 할 때 이해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노사께서 저희들을 지도해 주신다면, 더 없는 영광입니다.”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즉시 연무장으로 갑시다.”
그들이 후원으로 나가니 널따란 연무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고조영은 내키지 않았으나, 하는 수 없이 이해고와 사비우가 병기술을 보인 후 검법을 약간 시연했다.
장내에는 이 노사 외에도 그의 제자들인 듯한 젊은 남녀 몇 사람이 그들의 무기술 시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노사가 이해고의 창법과 고조영의 검법, 사비우의 도법을 유심히 관찰한 후 말했다.
“창을 쓰는, 이씨 성의 젊은이는 내 제자하고 한 수 겨뤄보는 게 어떻소?”
“영광입니다.”
이해고가 선뜻 대답하며 창을 들고 나섰다. 이 노사가, 곁에서 지켜보던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머릿짓을 하자 그가 창을 들고 이해고와 마주 섰다.
두 사람이 대결에 들어가자 이해고는 상대의 창술을 탐색하며 좀처럼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는 이 노사의 창술을 그의 제자에게서 간파해내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사오십 합이 지난 후, 이해고는 애써 그를 물리치는 척하며 창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소인은 노사님의 고제高弟를 당하기 어렵습니다. 이만 중단하고 싶습니다.”
예리한 눈초리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이 노사가, 이해고의 말끝에 갑자기 얼굴에 노기를 띠며 말했다.
“젊은 분이 노인을 속이고 있소.”
한 마디 내뱉은 후 부언했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이해고와 고조영 등이 무안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 다시 접견실로 들어갔다.
“솔직히 말해주시오. 이공李公은 혹시 신창 이해고라는 젊은이가 아니오?”
이해고는 이 노사의 예리한 안광에 속으로 적이 놀랐다.
“신창이라는 말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저의 이름은 해고입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결례가 되는 법이오.”
이 노사는 이해고를 빤히 쳐다보다가 느닷없이 물었다.
“적과 마주서서 창을 쓸 때, 가장 중요한 심법心法이 무엇이오?”
“네?”
이해고가 그의 애매모호한 질문에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이공의 창술에는 용맹이 있고 지략이 있고 출중한 내력이 깃들어 있소. 하지만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소.”
“···?”
“적을 깔보는 태도가 은연중에 배어 있소. 그건 금기 중 금기며, 패망의 지름길이오.”
이해고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모든 병법과 병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심법은 용맹도 지략도 내공도 아니고 겸손이오.”
이 노사의 말은, 이해고보다 고조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조영은 그 때 마치 머리가 열리고 하늘의 계시가 임하는 것 같았다. 이 노사가 한 마디 더 붙였다.
“겸손하면 이기고, 교만하면 지게 되지. 젊은이들은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오.”
그는 말을 끝내고 고조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마도 고조영에게 하는 말 같았다. 고조영, 이해고, 사비우 등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 노사가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촉한다.
“어서 가보시오.”
충격을 받은 세 사람은 인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이 노사의 집에서 물러나왔다. 이 노사의 말은 고조영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깊은 각인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말은 훗날 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쭐하던 이해고의 마음이 푹 가라앉았다. 그들은 낯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서둘러 여관을 찾아 들어가 창주성에서 일박한 후 이튿날 창주의 관아와 고려인들을 찾아보고 사흘 째 되는 날 하간현으로 향했다.
하간현성을 경유해 조영은 그들과 함께 북쪽의 고려성으로 향했다. 고려성의 자취는 처참했다. 성은 불에 타고 성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세월의 무상함과 나라의 흥망성쇠를 실감케 했다.
고려성은 그의 부친 고중상이 피눈물을 흘리며 한밤에 도피해야 했던 고려의 남쪽 보루였다. 그 전에 어린 조영은 어머니 등에 업혀 조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영주 계성, 조영 모친의 친정이었다.
영주에서 십여 년 더부살이를 할 때 마침 무 태후의 집권이 시작되고, 유주 영주 지방 고려인들의 맹주였던 조영의 조부 고승은 무 태후로부터 땅을 하사받아 고가장을 세우게 된다.
말로만 듣던 유아 시절을 그려보며 조영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고려성의 기나긴 성벽은 모두 무너지고 관아 쪽의 성벽과 견고한 옹성, 치, 망루 등만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고구려가 망한 후,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당한 것 같았다.
그들이 여기저기를 들러 영주 계성에 올라왔을 때는 찌는 듯한 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영은 일단 계성 북문 밖의 본가로 달렸다. 예나 지금이나 집은 변함이 없었다. 안팎으로 둘러싼 수림에는 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조부를 만나 절하고, 지난 번 손만영의 생신연 때 오갔던 대화를 포함해 그간의 경과를 간략히 아뢰었다.
“태후마마께서 너희들을 순무대사로 보냈다면, 그건 대단히 과분한 은총이고 또 너희 나이에 걸맞지 않은 중책이다. 성심껏 수행하되, 너희들을 미워하는 자들이 조정 안팎에 다수 있을 터이니, 각별히 몸 조심해라.”
“네, 할아버지. 근데 영주의 고려말갈인들이나 거란인들은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요?”
“큰 어려움은 없다마는, 영주도독 조문홰 대인이 매우 탐욕적이고 우리 이민족의 관리들에게 모욕감을 주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송막도독 이진영 어르신은 잘 계신가요?”
“아무렴. 하지만, 조문홰가 이진영 대인을 좀 괴롭히고 있는 것 같구나.”
“···?”
“영주도독 조문홰가 송막도독 이진영을 자기 부하 대하듯 해서 이진영이 매우 불편해하고 있단다.”
“조문홰가 이 대인을 그렇게 대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글쎄 말이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아마,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겠지.”
“요구라면요?”
“조문홰가 여기 변방의 영주에서 벗어나 조정으로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겠느냐?”
젊은이들이 잠자코 듣고 있다. 고승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면 조정에서 다리 놓아줄 사람들과 무 태후에게 바칠 뇌물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 돈은 어디서 나오겠느냐?”
“아, 조문홰가 이진영 대인이나 이민족 관리들을 쥐어짜고 있는 거로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실은 그가 우리 일의 성사를 빌미삼아 내게도 은근히 뇌물을 요구하는 형편이다. 내가 적당히 상대해주고 있지.”
“우리 일”이란 작년에 행했던 피의 맹세를 의미한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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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5. 3. 28.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