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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可山의 문학과 삶을 만나면서
이 명 재:중앙대 명예교수,평론가
아호를 ‘可山’으로 쓴 이효석(李孝石, 1907. 2. 23.~1942. 5. 25)은 아까운 36 연세 동안을 평생 일제 강점기 상황 속에서 살아온 불우한 지식인이다. 그러기에 칼튼 헤이스의 구분에 따르면, 그는 정치적 민족주의운동보다는 문화적 민족주의운동을 편 영문학자 겸 작가이다. 비록 15년 안팎의 문단 활동기간 중에도 그는 주옥같은 소설, 수필, 평론에 걸쳐서 총 22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효석의 작품활동 가운데 우리는 지금까지 대체로 소설 중심의 작가로만 평가해 왔지만 앞으로는 소설작가 못지않게 많은 애독자를 지닌 수필가로서도 접근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효석의 본고장인 기념문학관 앞의 오늘 이 자리에서는 가산 이효석의 작가적인 프로필에 이어서 명작 소설과 수필도 감상해 보려 한다.
그리고 아울러 가산의 삶과 문학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왕년의 민요 가수와의 교우와 에피소드도 곁들여 대형 작가의 풍모를 살피려 한다. 이미 본 작가는 갔어도 이효석 작가의 고향 정취와 따스한 정서는 문학 작품으로 남아서 이렇게 새롭게 우리와 만나 마음을 열고 대화하며 옛정을 되살린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의사 히포크라테스에 이어서 시인 롱 펠로우의 말이 떠오른다. 역시 문학은 정년이 없는 문우들과 더불어 명작을 재음미하며 옛 작가를 기릴 수 있어 좋다. 그러기에 논어에서도 선비들은 “글로써 벗들이 모이고( 以文會友), 벗들로써 좋은 일을 한다(以友輔仁)”고 했던가 싶다. 우리는 이 고장의 맑은 정기 속에서 메밀 맛과 낙엽 태우기로 코로나 역병을 이겨내고 유익한 시간으로 지내길 바란다.
작가적인 삶의 발자취
가산 이효석은 1907년 2월에 평창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서 자라며 소학교를 마치고는 상경하여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은 수재이다. 명문인 경성제일고보 재학 중에는 톨스토이, 트르게네프, 체홉 등의 러시아문학을 탐독했다. 그리고 경성대학 예과 시절인 1925년에는 유진오 등과 학우들과의 교유지인 《淸凉》, 문예동인지 《文友》에 습작품을 발표했다. 대학에서는 영미문학을 익히며 1927년 경성 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일제의 통치 상황 속에서는 영미문학을 선택해서 전공하는 것이 식민주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터널이기도 했음이 참고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28년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朝鮮之光》에 발표하여 작가로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같은 대학의 법문학부 1년 선배인 유진오와 함께 프로문학에 동조하는 동반자 작가로도 활동하였다. 두만강 하구를 건너서 공산국인 러시아로 향하는 기선에도 갑판 위의 호화스러운 상층과 갑판 밑의 보통실 밑 기관실 바닥의 밀항자는 물론, 화부의 열악한 계급 현상을 풍자한 「露領近海」 (1930)와 같은 계열의 「북극사신」 (1930), 「상륙」 (1931)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다가 1931년 음악을 전공한 이경원과 결혼한 후 처가가 있는 鏡城 농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33년에는 ‘9인회’에 가담하여 변모를 꾀한다. 김기림 정지용 이상 김유정 이태준 유치진 조용만 박태원 박팔양 등과 더불어 탈계급적인 모더니즘과 순수문학을 지향하다 스스로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세계를 추구했다.
1934년부터 평양의 숭실전문대학의 교수로 자리 잡은 이후에는 자연적인 배경에다 동물의 경우를 들어 인간의 낭만적이고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성공시켰다. 그동안 여러모로 시도한 문예 실험상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서 이뤄낸 결과이다. 이를테면, 작가 스스로 구인회에서 물러날 무렵에 발표한 이효석 전기를 마감하고 흔히 후기소설의 막을 열었다고 평가하는 「豚」 (1933)을 비롯해서 여러 작품이 줄을 잇는다. 「山」 (1936), 「들」 (1936), 「石榴」 (1936), 「메밀꽃 필 무렵」 (1936) 등의 단편과 장편인 『花粉』 (1939)이 이에 해당된다.
강원도가 낳은 작가, 명작의 백미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읽기
가산의 소설 가운데 白眉로 평가받는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朝光》 1936년 10월호) 일부분을 감상해 본다. 작품의 중간 대목으로서 달밤의 정경과 다음 열릴 오일장 방향으로 찾아가는 장돌뱅이 일행들의 대화가 일품이다. 영미문학 전공에다 서울과 평양에서 많이 활동한 그가 토속적인 인물들을 바로 자신의 고향인 평창이나 봉평 장터에 등장시킨 작가의 의도가 가상하다. 한국의 전통 정서나 지명까지도 바꾸려는 일제 강점기에 행복한 포토필리아 공간인 향토의식과 더욱이 그 가난하고 서민적인 사람들 마음에다 서정적인 자연의 정취를 빼어난 필치로써 민족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모국어로 선명하게 그려낸 글솜씨 또한 뛰어난 대표작이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발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시원스럽게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려 갔었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나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부지.”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외면보다 내면적인 낙엽 태우기
- 수필 「落葉을 태우면서」 새로 읽기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교과서에 실려서 최근까지 널리 읽혀온 작품이다. 그만큼 새 고전일 만큼 많이 사랑받는 글이기 때문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덧 날고 쏟아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은 참으로 이 세상 사람보다도 많은 모양이다. (중략)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가제(갓) 볶아낸 커피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올린다. -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 서두 중에서.
바야흐로 살아있는 생활 문학인 수필의 전성시대다. 전 세기의 중엽만 해도 우리 문단에서는 수필을 장르에서도 소원하게 여겨 왔지만 이효석은 이미 1930년대에 알뜰한 명수필을 써냈다. 바쁜 일상에 긴 소설 읽기도, 번거로운 머리에 난해한 시 작품보다도 이제는 이렇게 다채롭고 짧고 산글이 제격이다.
위의 단편 가운데 짙은 동물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이 수필 작품에서는 낙엽과 함께 물씬한 가을의 계절감을 떠 올린다. 더구나 낙엽이 타는 구수한 냄새에다 알싸한 커피 맛도 일품이다. 으레 낙엽이라면 그 이파리의 색깔이나 상실의 느낌 아니면 그루몽의 시에서처럼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정도의 평면성을 탈피한 것이다. 상식적인 시청각보다는 후각적으로나 미각적으로 변용된 의식 세계의 경지를 보여준다. 흔히 동물적 이미지가 짙은 소설들과는 대조적으로 수필에는 식물적 상상력이 활용되고 있다. 역시 가산의 수필 작품인 「녹음의 향기」, 「수선화」, 「청포도의 사상」이라는 작품의 이름들부터도 순하고 향긋하게 다가든다.
한국 민요를 사랑한 가산의 행보
새삼스럽지만, 우리 현대문학사를 살피다 보면 험준한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문인들의 행태에 많은 시선을 쏟게 된다. 엄혹한 식민 통치에 대응한 삶의 자세나 발표를 위해서 당국의 이중검열을 의식한 작품에서의 순응의 정도와 저항적인 은유나 고발 내지 풍자의 밀도감과 강도뿐만이 아니다. 생활을 위한 취업과 처세의 방향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시대의 삶은 가시나무 숲길을 헤쳐가기 같은 지성인들의 고뇌를 상기해보게 된다. 가산의 경우, 취업이 어렵던 당시에 총독부 산하의 첫 직장을 며칠만에 그만두고 처가가 있는 함경도 지방 학교로 옮겨간 사실들도 이런 문제들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일본 문화를 벗어나기 위해서 외국문학 전공을 택하고 민족정체성 지키기 의식으로 모국어인 한글로써 시골의 옛 정취를 취한 소설을 쓰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효석 작가가 1930년대 당시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선풍을 일으킨 민요가수 왕수복과의 교우와 인생적인 삶도 중요한 접근대상이라고 본다. 적어도 우리 민요는 한겨레의 기층문화층인 서민들의 애환을 대중적으로 표출한 노래로서 식민시대 백성을 묶는 공감대의 중추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왕수복의 본조 아리랑은 물론 재래의 민요에다 서양 악곡을 가미한 신민요 가수로 유명해서 당시 방송이나 레코드판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것이다. 「울지 말아요」, 「고도의 정한」 등. 본디 평남에서 태어난 왕수복(王壽福, 1917~2003)은 평양 권번이 세운 기생학교 제1기생으로서 10대 초부터 노래와 악기 연주, 미술, 무용 등을 익힌 민요가수로서 무용가 최승희에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다. 당시 10대였던 그녀는 경성방송국 외로 레코드 음반만 1만 장 이상 팔린 인기를 누렸다고 알려진다. 왕년의 윤심덕보다는 10년 후 세대이고 목포의 이난영과는 같은 또래였다.
그런데 당시 평양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펴던 30대 중반의 가산은 음악을 전공한 가족까지도 20대 중반의 왕수복과 친숙하게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스포츠 열기와 함께 식민지 백성을 달래는 대중음악계의 샛별이던 왕수복은 가산의 건강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정황이 짙다. 가산 가족과 유진오가 함께 영화를 감상하던 중 자리를 비웠다가 며칠 후에야 귀가했다는 즐거운 에피소드만이 아니다. 가산의 경성고보 수년 뒤인데다 경성제대 영문학과의 직계 후배인 조용만 작가의 다음과 같은 증언도 그 관계를 유추하는 데 참고가 된다.
…이렇게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던 중 1940년에 부인 이경원 여사가 별세하고 둘째 아들도 사망하여서 이 돌연히 닥쳐온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아효석은 만주와 중국 등지로 방랑하였다.
1942년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5월에 평양 도립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결핵성 뇌막염이 되어서 언어 불능에 빠졌고 혼수상태에 들어서 전연 회생할 가망이 없었다. 이 때문에 부득이 병원에서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5월 25일에 별세하였다. 부친이 강원도 고향에서 달려와서, 부친과 여가수 왕수복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36세의 젊으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스물두 살 때에 너무 일찍 문단에 나타나서 연약한 몸을 돌보지 않고 전 정력을 불태워서 작품을 쓴 뒤에 서른여섯에 별세한 것인데, 작품을 쓴 기간은 15년밖에 되지 않는다. - 「작가 스케치/이효석」, 『우리시대의 한국문학』, 1, 계몽사, 1991.
하지만 1990년대 말엽 봄철이었던가, 강원도 여행을 겸해서 가산문학비 성묘를 마치고 관광버스를 향해 오던 길이었다. 일행인 대학원생들과의 문답에서 조용만교수는
단호하게 말씀한 것이다. -“그분 사망 원인을 무슨 결핵성 뇌막념인가, 뇌출혈이란 옹색한 병명은 권위를 위한 억지 치장이야. 이 선배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로맨티스트인데 말야! 순수한 사랑이면 오히려 영광된 일이지, 무슨 괴이한 병명을 붙이는 건지 몰라.” 당신께서 해설한 내용과도 배치된 이야기라서 우리는 오히려 환히 웃으며 박수를 쳐서 동조를 표했다.
그렇게 可山이 작고한 다음에 왕수복 자신도 광복 후에는 수년 동안 은퇴해 있다가 월북한 다음에야 평양에서 재기하여 활동하였다. 1950년 전쟁 전에 문화선전성의 지시를 따라 구소련일대의 공연을 다녀온 바도 있다. 정율 부상의 인솔로 알마타와 타슈켄트를 거쳐서 모스크바 등지의 고려인들을 상대로 공연해서 절찬을 받은 그녀의 아담하고 훤칠한 모습을 지닌 사진을 필자가 가지고 있다.
마무리 하기
이런 사실을 미루어보면, 가산 이효석은 한국 전통을 기리면서도 서구적인 멋을 겸비한 열정적 로맨티스트로서의 대가적인 풍모를 지녔다. 메밀꽃 흐드러진 고향 정취와 객주집의 막걸리 맛을 즐기면서도 서양식 복장 차림에 원두커피를 볶아서 마시는 양면의 멋을 지닌 인텔리이다. 그렇게 궁핍하고 엄혹한 식민통치 밑에서 지성인의 고뇌와 울분을 삭히며 독자들과 대화하면서 푸는 작가의 삶이 그지없이 값져 보인다.
더욱이 새삼스럽게 생각되는 바 있다. 우리 신문학사를 통틀어 아까운 문단의 샛별들이 너무 일찍 스러져서 안타까움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 상 27세 (1910~1937년), 김우진 29세 (1897~ 1926), 김유정 29세(1908~1937년) 등. 하지만 비교적 짧게 살다 간 작가들 나름대로 활동기간에 비하면 생각보다 많은 주옥편을 남기고 간 터라 더 빛난다 싶다. 거기에 견주면, 가산의 경우는 불행 중 다행으로 질량 면에서 그 연세나 작품이 더 하여 아쉬운 중에도 많이 위안이 된다. 이처럼 불우했던 식민세대에 견주어 분단시대의 우리는 한 차원 거듭난 문학을 지향해야 할 것 같다.
평론가, 중앙대 명예교수, mj103303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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