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 궁정에서 사용하였던 자기는 청대의 어요창에서 오로지 궁정의 수요를 위하여 제작한 각종 관요자기였다.
당대唐代이후, 오로지 궁정을 위하여 자기를 제작하는 관요자기가 존재하였다. 당대의 형요백자邢窯白瓷와 월요청자越窯靑瓷는 현재까지 발견된 최초의 공품자기貢品瓷器이다. 당나라 이조李肇의 <국사보國史補>에는 “내구內丘의 백자그릇과 단계端溪의 자석연紫石硯은 천하에서 귀천에 관계없이 통용되고 있다.(內丘白瓷盂,端溪紫石硯,天下無貴賤通用之.) ” 라고 기록되어 있다 . 저명한 당말唐末의 시인 피일휴皮日休도 “ 형지방 사람과 월지방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만들 줄 알았다네. 달의 혼령이 떨어진 듯 둥글고, 구름의 혼백 이 일어나는 듯 가볍다네. (邢人與越人, 皆能造瓷器. 圓似月魂墜,輕如雲魄起.)” 라고 칭송하였다.
송대宋代에는 궁정을 위하여 자기를 제작하는 가마가 다섯 개로 증가하여 여요汝窯, 관요官窯(요지의 명칭), 가요哥窯, 정요定窯, 균요鈞窯 등이 있어 ‘오대명요五大名窯'라고 불리웠다. 특히 북송말기의 도성인 변경(卞京-현재 하남성 개봉開封)에 설치되어 오로지 궁정을 위하여 어용자기를 제작한 ‘관요官窯'는, 이전에 민요民窯에서 상등上等의 제품을 선별하여 공품으로 바치던 관례를 변화시켜 관요자기의 선구가 되었다. 이로부터 자기의 제작에 ‘관요官窯-관부용의 자기)' 와 ‘민요(民窯-민간용의 자기)' 라는 구분이 나타나게 되었다.
원대元代에 강서성 경덕진은 전국의 도자생산중심지가 되었으며, 저명한 추부백자樞府白瓷는 바로 원대의 추밀원樞密院에서 궁정을 위하여 주문제작한 관요자기였다.
명대明代에는 홍무洪武2년부터 경덕진의 주산珠山에 어기창을 설치하고 황실을 위하여 관요자기를 제작하였다.
청대淸代는 명대의 제도를 답습하여 순치順治11년(1654년)에 어기창御器廠을 어요창御窯廠이라 개명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제작을 감독 (督造)' 하여 , 청대 관요자기의 생산을 시작하였다. 청대 남포藍浦의 <경덕진도록景德鎭圖錄>에 "본조에서 어요창을 건립하여 도자기를 제작한 것은 순치 11년에 시작되었다. 용항(龍缸)을 제작하려고 …… .요수도饒守道의 동현충董顯忠과 왕천권王天眷 및 왕영王瑛 등이 제작을 감독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순치16년 난판欄板을 제작하려고 …… 요수도의 장사명張思明과 하부이사관下部理事官 갈파葛巴 및 공부랑중工部郞中 왕일조王日藻 등이 제작을 감 독하였으나 역시 완성하지 못하였다. 순치17년, 순무巡撫 장조린張朝璘이 중지하도록 상소하였다.(國朝建廠造陶, 始于順治十一年, 奉造龍缸,……饒守道董顯忠, 王天眷, 王瑛等督造未成. 十六年奉造欄板,……經饒守道張思明, 下部理事官?巴, 工部郞中王日藻等督造亦末成. 十七年,巡撫張朝璘疏請停止.) ”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순치관요는 여러 차례 실패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완제품을 생산하지 못하였으나, 명대에 중앙관리가 어기창을 감독하던 전통을 변화시켜 지방관리가 제작을 감독하고, 관요자기의 제작에 소요되는 각종 비용도 지방(구강관九江關)의 관세로 지불하기 시작하였다. 순치관요의 시험제작은 강희, 옹정, 건륭 삼대에 대량으로 관요자기를 제작하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강희황제의 즉위초기에는 어요창의 회복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강희9년(1670년) 2월에 이르러서야 조상의 능과 순치황제의 능에 제사하기 위하여 대량으로 제기가 필요하게 되어, 경덕진에 공품용의 자기를 제작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 자기는 결코 관요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가장 우수한 민요를 선발하고 거기에 주문제작한 제품으로, 이른바 ‘관탑민소(官搭民燒-관부에서 주문하여 민간에서 제작)' 한 자기였다. 얼마 후에 남방의 오삼계吳三桂 등이 ‘삼번三蕃의 난' 을 일으켜 ‘가마가 모두 파괴되어' ‘제작할 방법이 없는' 지경이 되었으므로, 어요창의 회복은 다시 한번 연기되었다.
청대 어요의 정식제작은 강희19년(1675년)으로, 이 당시에는 황제가 친히 내부內府에 조서를 내려 장응선臧應先 등을 경덕진의 어요창에 파견하여 어기御器의 제작을 감독시켰다. 역사적으로 이시기의 자기를 ‘장요臧窯' 라고 칭한다. <경덕진도록>에는 장요의 성과를 “태토가 기름져 제품이 윤기가 나고 얇으며, 여러 빛깔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고, 사피록蛇皮綠, 선어황膳魚黃, 길취吉翠, 황반점黃斑點 등의 네 종류가 더욱 아름다웠다. 요황(요黃-Jiaohuang), 요록(요綠), 취홍吹紅, 취청吹靑도 아름다웠다.” 라고 기록하였다. 장요의 기형과 문양장식에 관하여 <강서통지江西通志>에 “도자기로는 항缸, 분盆, 우盂, 반盤, 준樽, 로爐, 병甁, 관罐, 접시, 완碗, 충, 잔盞 등의 종류가 있으며, 문양으로는 쌍룡雙龍, 조수鳥獸, 어수魚水, 화초花草 등이 있다. 그리거나 조각하거나 암화暗花를 사용하거나 영롱玲瓏기법이 모두 사용되어, 온갖 기교가 모두 겸비되어 있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장요는 강희19년부터 27년까지 8년간 제작되었다. 그 후에는 문헌에 일단의 공백기가 출현하며, 강희44년(1705년)에 비로소 강서순무江西巡撫 낭정극郞廷極이 제작을 감독한 '낭요郞窯 ' 자기가 기록되어 있다. 낭요는 장요의 기초위에서 발전하였다.
당시의 강서안찰사江西按察使 유정기劉廷璣는 <재원잡지在圓雜誌>에서 낭요에 관하여 “고대의 기물을 극히 흡사하게 모방하여 진품과 다름이 없었다. 성화成化와 선덕宣德시기의 기물을 모방한 제품은 유약과 빛깔과 귤피문橘皮紋 및 종안棕眼 그리고 관지款識에 이르기까지 극히 유사하여 구 별하기 매우 어려웠다.”라고 기록하였다. 낭요에서 가장 성공적인 제품은 명대明代의 가정嘉靖시기에 실전되었던 고온의 동홍유자기銅紅釉瓷器를 재현한 것으로서, 홍색이 농염하여 ‘낭요홍郎窯紅'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강희후기에 관요에서는 또 오채五彩의 기초 위에서 법랑채와 분채자기를 창조하여, 청대 유상채자기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다져놓았다.
옹정황제는 관요자기의 생산을 극히 중시하였으며, 심지어 관요자기의 조형과 도안에 대하여 친히 하문下問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친왕怡親王, 연희요年希堯, 당영唐英 등이 보좌에 힘써 어요창은 점차로 전성기로 접어들었다. 옹정초기 궁중에서 제작된 법랑채는 특별히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옹정2년(1724년) 황제는 몇 점의 법랑채자기를 전공戰功이 탁월한 대신이었던 연갱요年羹堯(연희요의 동생)에게 하사하였다. 옹정4년, 연희요는 명을 받들어 회안관세관리관淮安關稅管理官으로 부임하여 경덕진의 어요창 감독을 겸하였으므로, 역사적으로는 이시기의 자기를 ‘연요年窯' 라고 부른다 .
옹정 연요의 성과는 각종 단색유單色釉의 제작에 성공적으로 나타나 있다. 옹정13년(1735)에 새겨진 <도성기사비陶成紀事碑>의 기록에 따르면 유색釉色은 57종에 달할 정도로 다양하여, 송대와 명대의 유색을 모방한 제품을 제외하고도 납색황臘色黃과 노균유爐鈞釉 등처럼 새로 창조한 유색이 매우 많았다. 연희요가 근무하는 회안관淮安關과 경덕진 사이의 거리가 비교적 멀어 감독하기 곤란하였으므로, 옹정6년(1728)의 8월에 또 내무부랑중內務府郞中 당영唐英을 경덕진의 어요창에 파견하여 상주하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당영은 강희36년에 궁궐의 양심전養心殿 조판처造辦處에 근무하였으므로, 궁중 조판처의 각종 업무를 숙지하고 있었다. 어요창에 상주한 뒤에 그는 연구에 매진하였으므로, 연요가 획득한 거대한 성취에는 당영의 노력이 적지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옹정 13년 연희요가 그만두고, 당영이 어요창의 감독으로 승진하였다 . 내부內府에서 또 관리를 어요창에 파견하여 제작을 감독하였으며, 역사적으로 이것을 “당요唐窯” 라고 하였다 .
건륭시기에는 황제의 애호와 궁정의 수요가 증가하여 관요자기가 크게 발전하였으며, 신품종과 새로운 제작기법이 수없이 생겨났다. 채색자기를 제외하고 각종 단색유자기는 강희와 옹정시기의 기초 위에서 대량으로 계속 제작 되었으며, 또한 원가를 아끼지 않고 각종 신기한 품종의 제작을 추구ㅎㄴ 결과, 상생자像生瓷, 방칠기倣漆器, 방동기倣銅器, 방금기倣金器, 각종 양식의 비연호鼻烟壺, 대구帶鉤, 영관翎管, 상타보병象馱寶甁, 불상佛像, 칠진七珍, 팔보八寶, 전심병轉心甁(이중으로 만들어져 속에 있는 병이 회전하는 병), 전경병轉頸甁(목이 회전하는 병), 영롱자玲瓏瓷 등이 제작되어, 전성기 관요제작기술이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경덕진도록>에는 당영이 창조한 방고자기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 “당영은 흙과 불의 성질을 깊이 체득하였으며, 재료를 신중하게 선정하여, 제작된 기물이 정교하고 완전하였다. 또 명요의 자기를 모방한 기물은 아름답지 않은 제품이 없었으며, 각종 유명한 유색도 교묘하게 만들지 못한 것이 없었고, 각종 기법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양자洋紫, 법청法淸, 말은抹銀, 채수흑彩水墨, 양오금洋烏金과 같은 유색을 만들어내었다. 법랑채琺琅彩, 양채오금洋彩烏金, 묵지백화墨地白花, 묵지묘금黑地描金, 천람天藍, 요변窯變 등의 유색을 가진 기물도 제작하였다. 흙은 백토를 사용하였으며, 기물의 두께가 적당하였다. 어요창은 여기에서 집대성되었다고 할 것이다.”
건륭 4년(1739), 당영은 구강의 관세를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여 구강관의 근처인 경덕진으로 부임하였으므로, 경덕진의 관리가 비교적 편리해졌으며 어요창의 제작비용도 구강관의 세금으로 지불하였다. 건륭 6년, 궁에서 또 내무부 7 품 학고로격學庫老格을 어요창에 파견하여 그곳에 상주하면서 제작을 감독시켰다. 건륭 21년(1756), 당영이 구강관은 떠났다. 이후에 어요창의 감독관은 또 여러 차례 교체되었으나, 후임 감독관이 부패하여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건륭 51년(1786) 내무부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경덕진어요창 소재지인 부량浮梁의 지현知縣이 어요창을 감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지방의 한 현령이 관할하는 단위로 변화되어, 어요창은 쇠퇴하는 형세로 접어들게 되었다 .
건륭황제는 비록 1795년 그의 아들에게 양위를 하여 연호가 가경嘉慶으로 변경되었으나, 여전히 태상황제太上皇帝로 존중되었다. 자금성에서는 여전히 건륭연호가 사용되었으며, 국가의 대사도 태상황제의 뜻을 따랐다. 관요자기의 생산은 당연히 여전히 건륭이 애호하는 작업이었다. 매년 태상황제의 “만수성전(萬壽聖典-생신축하행사)”에는 관례대로 대량의 궁정용자기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자기는 관지를 ‘가경嘉慶'이라고 한 점을 제외하고 조형과 장식면에서 모두 건륭관요와 유사하였다. 그러므로 습관적으로 건륭말기와 가경초기의 관요자기를 ‘건가기乾嘉器' 라고 부른다.
가경 4년(1799)에 건륭제가 세상을 떠났다. 가경황제는 국상을 이용하여, 건륭말기의 향락에 빠지고 부패한 사회분위기를 일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한편으로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부의 지출을 감소시켰다. 어요창의 제작비용도 이에 따라 비교적 큰 폭으로 삭감되었다. 가경 15년(1510)에는 또 관요의 제작을 중지시키고, “장래에 반盤 , 완碗 , 충 , 접시가 필요할 때가 되면 다시 관례에 따라 제작하라.” 는 명을 내렸다. 이로부터 어요창의 자기제작은 “명이 있으면 제작하여 바치고, 명이 없으면 제작을 중지하는(有命則貢, 無命則止) ” 불규칙한 생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광초기道光初期 관요자기의 조형과 유색 및 문양 등은 여러면에서 가경후기의 양식을 모방하였으므로 , ‘가도기嘉道器'라고 불린다. 도광 10년(1840)에 아편전쟁이 발발하여 청정부는 관요자기의 생산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도광 17년 5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무부에서 “이후에는 매년 구강관에서 자기를 제작하며, 탁기琢器(준樽, 병甁, 호壺, 관罐)는 예전대로 제작하고, 원기圓器 (반盤, 완碗, 충, 접시)는 제작수량을 줄인다. 필요한 자금은 은으로 하며, 이천량을 넘지 않도록 한다.” 라고 상소하였다. 이리하여 관요자기는 옹정과 건륭시기에 원가를 아끼지 않고 최고의 제품으로 제작하였던 상황에서, 도광시기에는 제작비용의 제한되는 상황으로 변화되었으므로, 제품의 품질이 필연적으로 크게 떨어졌다. 도광시기의 관요자기는 제왕의 연호를 써넣은 기물 이외에도 대량으로 재당명齋堂名의 관지를 가진 자기를 제작하였다. 예를 들면, ‘신덕당제愼德堂制' 라는 관지의 자기는 원명원圓明圓에 있는 도광황제의 행궁行宮의 이름이었다.
함풍초기咸豊初期 어요창에서 두 차례 기물을 제작하였다. 첫번째는 함풍원년 황제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필요로 하였던 준尊, 보, 궤, 두豆, 등燈 등으로 천청유天靑釉와 황유黃釉로 만든 제기였다. 두번째는 함풍2년에서 4년(1852-1854)에 제작한 단색유자기로서 방균요倣鈞窯, 방관요倣官窯, 방가요倣哥窯, 제홍祭紅, 다엽말유茶葉末釉 등 과 청화 및 유상채자기이며, 모두 2100여 건을 제작하였다. 함풍4년이후, 경덕진이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에게 점령되어 어요창의 생산이 중지되었다.
동치同治황제도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그의 어머니인 자희태후慈禧太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동치7년(1868) 황제의 결혼식에 어요창에서 이를 위하여 대량으로 찬구餐具와 일용기물을 제작하였다. 찬구로는 해완海碗, 대완大碗, 중완中碗, 탕완湯碗, 배완杯碗, 황주완黃酒碗, 주배酒杯, 갱시羹匙, 대반大盤, 중반中盤, 소반小盤, 접시 등이 있었다. 일용자기로 개완蓋碗, 차항茶缸, 사두渣斗, 분합粉盒, 연지합연지합, 쇄두항刷頭缸, 화분花盆, 수선분水仙盆 등이 있었다. 이러한 기물의 장식은 모두 황지분채黃地粉彩이거나 홍지분채紅地粉彩로 만수무강萬壽無疆, ‘희喜'자, ‘수壽'자, 만수만복萬壽萬福, 백접문百蝶紋, 희작매문喜鵲梅紋 등을 금채金彩로 묘사하였다. ‘체화전제體和殿制'라는 자기도 동치시기의 관요자기이다. 체화전은 자희태후가 식사하는 장소였다.
광서光緖 원년(1875)에서 2년까지, 어요창에서 궁중의 각 전각과 동서의 능을 위하여 대량으로 청화와 분채 및 각종 색유자기를 제작하였다. 이 밖에 자희태후의 50세와 60세 및 70세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 모두 대량으로 ‘대아재大雅齋'라는 관지의 각종 색지色地의 분채자기를 제작하였다.
선통宣統관요는 시간이 비록 매우 짧지만, 제품의 품질은 광서자기에 손색이 없으며, 그 수량의 희소성으로 더욱 귀하게 취급된다. 조형과 문양장식은 모두 광서관요자기와 흡사하였다.
청대관요자기의 생산은 세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쳤다 . 제일단계 : 순치11년(1654)에서 강희19년(1680)까지는 관요의 회복기이다. 제이단계 : 강희19년에서 건륭60년(1795)까지는 관요의 전성기였다. 제삼단계 : 건륭60년에서 선통3년(1911)까지는 관요의 쇠퇴기이다.
<청대 관요자기의 분류> 청대관요자기의 풍부한 조형은 역사상 어느 시기의 관요자기도 따라올 수가 없었다. 용도에 따라 청대관요자기는 예의제사기禮儀祭祀器, 진설자(陳設瓷-진열용자기), 일용생활자기, 문방용구의 네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1) 예의제사기 주로 궁정의 제사와 혼례와 생신축하 및 종교활동에 사용되었다. 명대부터 궁정에서는 원구圓丘는 청색, 방구方丘는 황색, 일단日壇은 적색, 월단月壇은 백색처럼 사방 교외의 능에 사용하는 제기를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청대에는 일부 황유黃釉자기를 황제와 태후 및 황후의 전용자기로 규정하였으며, 그 나머지 제사용자기는 기본적으로 명대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주요 기형으로는 두豆 , 보, 궤, 작爵, 노爐, 뢰, 오공五供, 칠진七珍, 팔보八寶, 관음觀音, 달마達摩 등이 있었다.
2) 진열용자기 진설자는 황궁의 각 대전과 침궁과 서재 및 기거하는 실내의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주로 각종 양식의 병甁, 준尊, 화낭花囊, 화분花盆, 수선분水仙盆, 화고, 화삽花揷, 병풍屛風, 벽병壁甁, 괘병掛甁, 수돈繡墩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병의 양식이 최고로 다양하여 건륭4년(1739) 내무부에서 당영에게 보낸 각종 양식의 병의 도안에 쌍이병雙耳甁, 장취병長嘴甁, 쌍관병雙管甁, 호로병葫蘆甁, 산두병蒜頭甁, 관음병觀音甁, 장원병長元甁, 삼급병三級甁, 담병擔甁 등이 있었다. 당영의 기록에 이미 제작한 양식으로 나타난 기물은 쌍관과릉병雙管瓜稜甁, 지추병紙錘甁, 쌍관육방병雙管六方甁, 삼현병三弦甁, 사희병四喜甁, 관음병觀音甁, 쌍관화병雙管花甁, 쌍원병雙圓甁, 소매병小梅甁, 대매병大梅甁, 천구병天球甁, 관이병貫耳甁, 감로병甘露甁, 대교병大轎甁, 소교병小轎甁, 전심병轉心甁 등이 있었다.
3) 일용생활용기 범위가 비교적 광범위하여, 일용 찬구와 완구 및 복식용구 등을 포괄한다. 예를 들면 호壺, 관罐, 완碗, 반盤, 배杯, 접시, 잔탁盞托, 젓가락, 반작飯勺, 갱시羹匙, 초적醋滴, 향합香盒, 향훈香熏, 사두渣斗, 조로, 촛대, 관가冠架, 여의如意, 대구帶鉤, 영관翎管, 반지搬指, 비연호鼻烟壺 등이 있다. <국조궁사國朝宮史>의 기록에 따르면, 청대의 궁정에서 일용자기의 사용은 비교적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후궁이 사용하는 쟁반과 완 및 접시의 장식은 각각 상이하였다. 황태후와 황후용에는 기물의 안팍에 모두 황유를 칠했으며, 황귀비용은 외부에는 황유를 내부에는 백유를 칠하였으며, 귀비貴妃는 황지녹룡자기(黃地綠龍瓷器-황색바탕에 녹색의 용이 그려진 자기)를, 빈嬪은 남지황룡자기(藍地黃龍瓷器-남색바탕에 황룡이 그려진 자기)를, 귀인貴人은 녹지자룡자기(綠地紫龍瓷器-녹색바탕에 자색의 용이 그려진 자기)를, 상재常在는 오채홍룡자기(五彩紅龍瓷器-오채로 홍색의 용이 그려진 자기)를 사용하였다.
4) 문방용구 황제가 비문批文을 내리거나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용기로서 수승水丞, 수우水盂, 필세筆洗, 필첨, 필가筆架, 필간筆杆, 필통筆筒, 벼루, 묵상墨床, 진지鎭紙, 사직司直, 인새印璽, 인합印盒, 비각, 서등書燈, 화축畵軸 등이 포함된다. 총괄하면 청대의 궁정자기는 이미 깊이 황실의 일상생활의 각 방면으로 깊이 침투하여 광범위하게 금, 은, 동, 주석, 옥, 나무, 대나무, 칠 등과 같은 각종 재질로 만들었던 기물을 대체하여, 황제의 생활에 필수적인 기물의 하나가 되었다.
<청대 관요자기의 장식> 청대궁정자기의 장식도 매우 풍부하며, 색유色釉장식과 채회彩繪장식의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색유장식으로는 각종 단색유와 금제품의 모방자기, 동제품의 모방자기, 칠기의 모방자기 등과 같은 공예품이 있었다. 채회자기에는 유하채와 유상채 및 투채가 포함되어 있었다. 청대에는 단색유의 품종이 가장 많았으며 금제품과 동제품과 칠기제품을 모방한 공예품이 있었다. 채회자기로는 화유黃釉, 남유藍釉, 오금유烏金釉, 강두홍, 제홍祭紅, 천람天藍, 쇄람灑藍, 공작람孔雀藍, 녹유綠釉, 자유紫釉, 장유醬釉, 백유白釉, 오금유烏金釉, 두청유豆靑釉, 방여유倣汝釉, 방관유倣官釉, 방가유倣哥釉, 방정유倣定釉, 방균유倣鈞釉, 방용천유倣龍泉釉, 다엽말茶葉末, 노균유爐鈞釉 등이 있었다. 당영이 편찬한 <도성기사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어요창에서 제작한 자기의 유색은 57종에 달하였다.
채회장식은 조기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청화자기 위주였으며, 아울러 독특한 ‘청화오채'를 발명하였다. 이른바 청화오채는 강희시기의 어요창에서 발명한 것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수묵화의 ‘묵분오색'이라는 원리를 이용하여 청화를 농담의 차이에 따라 색가를 나누어 청화로 묘사된 산수화면이 농담과 원근이 어우러진 입체적인 효과를 갖는 것을 말한다. 옹정이후에는 법랑채와 분채가 유상채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법랑채琺琅彩는 청대 강희, 옹정, 건륭시기에 궁정에서 수입한 법랑을 이용하여 경덕진에서 제작한 상등품의 백자에 그림을 그려 저온에서 이차소성한 자기이다. 색감이 선명하고 화려하여 황실의 위엄을 당당하게 드러내었다. 분채粉彩는 강희말기에 오채五彩의 기초위에서 발전한 것으로 옹정과 건륭시기에 유행한 유상채장식이다. 분채는 법랑채의 기법을 차감하여 먼저 백색의 유리백琉璃白으로 백자의 유면에 칠하여 바탕면을 만든 다음에 그 위에 유탁제乳濁劑가 함유된 각종 채색안료로 문양을 그렸다. 문양의 입체감이 매우 강하며 색채가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건륭이후의 관요자기에서는 각종 색지色地의 분채자기가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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