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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들 바람이 되어...진주삼선암
 
 
 
카페 게시글
전통소리..춤..자료 스크랩 도살풀이 춤의 명무 박일자
연꽃바람 추천 0 조회 390 08.11.16 23:3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전통무용의 맥을 잇는 예술혼 박일자

 

무대 위의 무용수는 일순 호흡이 멈춘다. 하얀 치맛자락이 허리를 휘감고 내려오고 머리위에서 기다랗다 흰 천이 하늘거린다. 격정적이다가 멈추고, 보는 이를 희롱하다가 멈추고 정숙한 여인이었다가 또 한 마리 나비가 되고 학이 된다. 긴 호흡과 긴장이 연속되다가 어르고 풀더니 어느새 여인의 깊은 슬픔에 보는 이들 마저 사로잡고 마는 도살풀이춤은 우주만물의 흐름이 되고 여인은 그 생의 질곡 한가운데서 처연하도록 아름답다. 도살풀이춤의 명무(名舞)박일자의 춤사위는 손끝하나 발끝하나에서 예술로 아름다움으로 승화한다.

 

 

도살풀이춤

 

도살풀이춤은 도당살이풀이를 줄인말로서 예인무의 하나로 행해지고 있는 살풀이춤의 원조형이다. 이 춤의 본뜻은 흉살과 재난을 소명시켜 안심입명, 나아가 행복을 맞이한다는 종교적 소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살풀이춤은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삶의 깊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긴 수건에 의한 공간사의 유선이 훨씬 다양하며, 선이 그려지는 형태는 하나의 회화와 같다.

 

일반 살풀이는 사람들의 한풀이라면 2M가 넘는 수건을 들고 추는 도살풀이춤은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표현하며 흉상과 재앙을 없애고 행복을 기원하는 춤으로 춤꾼들의 마지막 춤이며 살풀이의 어머니격인 춤이다. 행사 식전행사로 많이 추는 춤인 도살풀이춤의 무복은 무색으로 화려하지는 않으나 더욱 정갈하고 깨끗해 보인다.

 

이 춤은 각기 정-동, 동-중-정의 신비스로우며 자연스러운 춤사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목젖놀이, 발차는 사위, 용사위, 낙엽사위 등은 도살풀이춤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동작들이다. 도살풀이춤은 경기 무속춤중 가장 어렵고 기교를 필요로 하는 유일한 독무로 독특한 선, 다양한 춤사위들의 예술성이 높이 평가된다.

 

도살풀이 명무(名舞)가 되기까지.

 

 

1960년 태인동에서 태어난 박일자씨는 예술적인 끼가 충만한 소녀로 중·고등까지 고전무용을 배우다 아버지의 반대로 배움을 접어야만 했다. 6~70년대 수산업을 했던 그녀의 아버지(고 박두영)가 사업 때문에 기생들과 더불어 살았던 시대로 여자가 재주가 많으면 끼를 펼칠 공간이 기방밖에 없었으므로 아버지의 반대는 당연했다.

 

그러나 재능은 타고 난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아버지는 사업가이자 북과 장구의 대가로 태인동 용지큰줄다리기 때면 북을 도맡아 쳤고, 둘째오빠는 성악을 전공했다. 사법고시를 보라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악을 전공한 오빠로 인해 더욱 엄해지신 아버지 때문에 좋아했던 무용과 국악을 접어야 했던 박일자씨에게는 서예로 국선에 입선한 언니와 한국무용을 전수받은 어머니까지 예술의 끼가 넘치는 집안 내력이 각인되어있었다.

 

그저 단아한 모습으로 살림과 부모봉양을 우선했던 어머니가 효부상을 받을 정도로 유교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던 박일자씨는 환갑잔치 때 예사롭지 않는 춤사위를 펼친 어머니를 보고 더욱 놀랐다고 한다.

 

무용과 국악에 대한 그녀의 갈증은 결혼 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면서 그제야 그토록 원하던 배움의 길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아이들 키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그녀가 본격적인 무용 수업에 나선 것은 아이들이 성장하고 여가 시간이 조금씩 주어진 후 부터였고 뒤늦게 꽃피운 예술의 혼은 그녀의 목마름을 적시듯이 각종 국악경연대회에서 수상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주부의 신분으로 무용을 계속 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런 박일자씨가 명무(名舞)의 반열에 오기까지는 남편의 외조가 있어서 가능했다. 중매로 만난 남편 이상혁(건설업 55세)씨는 그녀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인생의 반려자이다.

 

남편의 외조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그녀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여현주 선생과의 만남은그녀 예술성에 혼이 더해져 강열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5년 광양시국악협회 무용부문 강사로 활동할 때 국악협회에 무용 강사로 온 경남 창원의 여현주 선생은 경남문화예술위원장이며 도살풀이의 명무 고 김숙자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애제자였다.

 

 여선생이 광양을 찾았을 때 맨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일자씨다. 그녀는 박일자씨를 보자마자 ‘신체적인 조건이나 재능 모두를 갖춘 도살풀이의 적격자’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3년 동안 광양과 창원을 오가며 여현주 선생에게 도살풀이를 전수 받았고 각종 국악대회에서 최고상을 휩쓸었다.

 

최우수상에 빛나는 프로필

 

 

수많은 대회에서의 수상은 국악의 불모지인 광양에 근 수 십년 만에 국악계 명인이 탄생했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광양이라는 지역적인 한계에 부딪치는 전통문화의 전승은 문화와 교육도시를 만들겠다는 광양시도 이렇다 할 행정적인 지원도 없고 거대해진 산업과 상업화에 밀려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든 상태이다.

 

“우리지역이 전통문화나 국악 등의 제반여건이 낙후되어있어서 예술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 행정적인 관심과 더불어 전통문화와 무용을 전승해줄 수 있는 환경이 갖춰주면 좋겠다. 어르신들의 고정관념으로는 전통무용을 아직까지도 천박한 기방문화나 무속으로 치부하고 있는데 우리의 전통문화를 살리고 계승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바로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명무 박일자씨의 프로필은 수줍은 그녀를 다시 돌아보게 할 만큼 화려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 허름한 곳이 바로 광양시국악연구실이 있다. 연구생들이 박일자 명무에게 교방 입춤을 전수받고 있다.)

 

(사)영남전통예술진흥회에서서 주최한 2008년 제12회 창원야철전국국악대전에서 대회 최고상인 종합대상인 국회의장상을 받은 그녀는 지난 4월 13일에는 제46회 진해군항제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지난 5월 5일 남도국악제 최우수상으로 전국 국악계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이제 명실 공히 전국 최상의 실력자임을 세상에 알렸다.

 

8년 전부터 본격적인 국악강사로 나서고 있으며 순천의 새싹 어린이집 국악강사, 순천문화원의 춤사랑 무용단원과 김알영 춤사랑 무용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창작무용을 발표하고 광양시 (사)국악협회 무용부문 강사로 활동 중이지만 아직까지도 광양시에서의 문화적 지원이 전무한 상태라고 한다. 수많은 대회에서 상을 받고 국회의장 상까지 수상한 박일자씨가 광양시 문화제로도 등록되지 못한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게다가 우리지역 중심 문화센터인 여성문화센터의 전통무용 강좌마저 타 지역 사람이 와서 가르치는 실정이다 보니 광양시의 문화행정에 의구심마저 든다.

 

(광양시평생교육원에서 강습을 해주고 있는 박일자 명무가 교방입춤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

 

광양시는 포스코와 더불어 광양시에 국악난장, 우리문화지킴이 라는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일시적인 축제나 이벤트에 치부되고 있다. 우리 고장의 전통문화, 국악 연구실이 열악한 환경과 시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눅눅한 냄새가 나는 지하에서 연구생들이 무용을 배우고 있는 현실을 바라볼 때 국악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낀다.

 

전통문화란 우리의 혼이며 민족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신명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우리 조상의 숨결이며 5천년을 이어온 우리 민족의 삶인 것이다.

 

*******김숙자류 도살풀이**************

고 김숙자씨를 인간문화재 반열에 오르게 한 도살풀이춤이란 경기도당굿 12거리 중 마지막 절차에 해당하며 거리에서 굿 의식을 다한 뒤 홀가분한 상태에서 마음껏 즐기며 추는 뒷풀이격 춤에서 비롯한다. 김숙자류 도살풀이는 다른 사람과 달리 춤판 자체가 흰옷에 2미터 가랑 되는 천을 들고 추는 특색 있는 춤이다.

우리 춤과 소리에 금지령이 내렸던 일제 강점기 시절 토굴에 숨어서 아버지와 더불어 춤을 추다가 순사에게 끌려가 옥살이를 했던 14살의 고 김숙자는 1990년 10월 중요무형문화재 제 97호로 살풀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은 민속무용의 대가이다. 이듬해 1991년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고 말았지만 각종 국가 행사공연과 일본, 대만, 독일 등으로 활발한 해외 공연 활동을 하며 후학과 한국무속예술보존회에도 힘써온 김숙자씨는 박일자씨에게 이르기까지 도살풀이춤의 대가였으며 목표이자 뛰어넘어야 할 정진의 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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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2.23 14:49

    첫댓글 좋은 모습 스크랩 합니다. 우리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데 아쉬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20미터 되는 흰 수건은 과장된 표현이고 그 사위 김숙자 선생님의 춤이 수십년 지난 해에
    사진전에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춤사위 였음도 알립니다. 지기님 건강하시고 복많이 받으십시요

  • 14.06.20 12:31

    박일자선생은 지금은 광양국악협회 지부장으로도 활동하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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