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 그 황홀한 선(線)의 오브제
발레리노 출신의 박귀섭 사진전 <Human>
2021.11.29. 오후, 청담동 Olivia Park Gallery에서 전시되고 있는 박귀섭 사진전 <Human>을 보고왔다. 전시 끝나기 하루 전날이다.
“나무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자세히 보니 땅속 깊이 물을 찾아 갈망하듯 뻗은 가지는 모두 사람의 몸이다. 얽히고 설킨 뿌리에서 인간들의 복잡하고 고통스런 삶의 현장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 홀로 뛰어오르는 무용수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실루엣 역시 그 자체로도 역동감이 생생하다.”
몸의 언어를 수묵화 그리듯 사진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창조적(Creative)인 작품활동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했다.
무용수들의 몸짓들을 다양하게 그린 작품들은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을 포착한 사진들로 파격 그 자체였다.
‘몸짓의 흔적’에는 무용수들의 땀과 눈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박귀섭 작가는 원래 국립발레단 소속의 발레리노였다. 박 작가는 2006년에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2007년 뉴욕 인터내셔널 발레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잘 나가던 그가 2010년부터 뜻한 바 있어 사진영역에 뛰어 들었다.
발레란 몸짓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는 발레리노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동작들을 다시 사진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귀섭 사진작품의 놀라운 면은 '독창성'이다. 발레 무용수들의 몸놀림을 주된 오브제로 택한 것도 새롭지만,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시각과 접근방식, 사진에 대한 종래의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이다.
예를 들어, 마치 대나무 그림처럼 보이는 작품 'Shadow #2-7'을 보자. 전체 구도는 대나무 형태를 띄고 있지만 실제로는 발레 무용수들의 다양한 몸짓을 이어놓은 사진이다. 대나무 줄기도 무용수, 가지도 무용수, 잎도 무용수들이다.
오선지에 음악가가 작곡을 하듯 무용수들의 몸짓들을 악보로 옮겨놓기도 하고, 그들의 몸놀림들을 나뭇가지처럼 엮어 거대한 나무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 건물구조물같은 인간연결고리로 인간관계를 은유하기도 한다. 작가는 ‘나’라는 ‘나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미로와 같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 중 ‘Shadow #2’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의 러시아판 표지사진으로 선정되기도 하고, 오선지 위 음표 작품인 ‘Shadow#2-4’는 미국 유명 음반회사 음반 표지용으로 팔리기도 하는 등 이미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파도가 출렁이는 듯한 형상을 표현한 작품도 보인다. 누드의 등과 히프 곡선으로, 선(線)의 율동과 명암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명은 Shadow#2-1. 박귀섭 작가의 작품에는 분명한 제목이 없다. Shadow, Vision 등 일반적인 이름에 일련번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는 “이미지를 보는 사람들이 다른데, 느끼는 것도 모두 다르지않을까요? 특정한 제목이야말로 작가의 편협한 고정관념이지요 작품을 보는 이들은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 관점을 통해 작품은 얼마든지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전시장 중앙에는 거대한 작품 한 점이 병풍처럼 걸려 있다. 언뜻 보면 영락없는 수묵화다. 먹의 짙고 옅음을 이용하여 숲을 그린 동양화 한 점. 그런데 자세히 보면 수묵화가 아니라 수많은 무용수들의 다양한 몸짓을 체인처럼 이어 만든 인간숲이다. 그림이 아닌 사진으로 이와같은 작품을 빚어내다니 얼마나 창조적인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인간의 ‘몸짓’은 감정을 전달하고 소통을 이뤄내는 일종의 ‘언어’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이어주는 ‘매개자’라 할 수 있다. 유명 발레리노 출신으로서 누구보다도 '몸짓'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잘 아는 박귀섭 작가는 '빛으로 그리는 그림'인 사진에서도 이를 정제된 언어로 놀랍도록 황홀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박귀섭 작가는 이제 단순한 포토그래퍼가 아닌 비쥬얼 아티스트다.
그는 “비주얼이라고 하면 막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진, 영상, 디렉팅, 무대연출과 같은 도구를 통해 몸에 관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라고 자신을 소개한다.(글/임윤식)
*이곳에 올린 작품사진들의 저작권은 모두 박귀섭 작가에게 있으며, 작품의 무단전재나 복사를 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