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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폴에서 요하네스버그 경유 케이프타운에 도착하니 늦저녁입니다..
살짝은 부담스러운 픽업으로 숙소 도착~~
정리하고 취침하니 날짜 변경선이 훌쩍..
그래도 마실로 아침을 엽니다..
숙소가 있는 장소는 중심가~~
중심가에서 Victoria wharf 까지 조깅..
케이프 타운 중심가는 여타의 아프리카 도시와 달리 깔끔하게 정비된 분위기..
인종차별 정책의 시행으로 한동안 국제사회의 외면을 받았던 남아공..
아프리카 대륙 남단부를 차지하는 나라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인의 이주 이후 백인이 유입되며 1815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 정책을 비판하는 영국 정부로부터 독자적인 노선을 천명하며 독립해 1961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선언했다.
정식명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이다. 북쪽으로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와 동쪽으로 모잠비크, 스와질란드와 접해 있고 영토 내에 독립국 레소토가 있다.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동쪽으로는 인도양과 접한다. 인종차별정책으로 말미암아 1974년 국제연합(UN)에서 축출되기도 하여 한동안 국제적 고립 상황에 처하였으나,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 집권 이후 인종차별정책을 철폐하였다. 그 후 영국 연방에 재가맹하였고 UN 총회 의석도 회복했으며 미국과 유럽공동체(EC)의 경제제재도 풀렸다. 행정구역은 9개 주(provinces)로 이루어져 있다.
*아파르트 헤이트..
원래는 분리·격리를 뜻하는 아프리칸스어(語)이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약 16%의 백인이 84%의 비백인(非白人)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차별해 왔다.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한 이 인종차별은 17세기 중엽 백인의 이주와 더불어 점차 제도로 확립되었는데, 1948년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나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의 단독정부 수립 후 더욱 확충·강화되어 아파르트헤이트로 불리게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반투 홈랜드(Bantu Homeland) 정책으로 대표되듯 인종격리정책에 의한 인종별 분리의 발전을 추진하는 한편, 다인종사회적 현장 속에서 반투 정청법(政廳法, 1951)·유권자분리대표법(1956) 등에 의하여 유색 인종의 참정권을 부정하고, 산업조정법(1956)·패스포드법(1952)·원주민법 수정법(1952)·이인종 혼인금지법(1949)·집단지역법(1950) 등에 의하여 경제적·사회적으로 백인의 특권 유지·강화를 기도한 것이다.
국민당 정권은 국제적 비난 속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강화해 왔는데, 1975년 이후 포르투갈 식민지 해체로 고립상황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차별을 완화하면서 인종격리제도의 완성을 서두르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홈랜드에 독립을 부여하는 정책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그 목적하는 바는 절대다수인 아프리카인을 분리함으로써 형식상 소수백인적 상황에서 탈각(脫却)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당연하게 이를 비난하고 나섰고, 국내에서도 1976년 6월의 소웨토(요하네스버그 주변의 흑인집단거주지역) 폭동 이후 아프리카인을 중심으로 하는 유색인종의 투쟁이 강화·확대되었다.
반투 홈랜드(BantuHomeland)
1959년에 성립한 반투 자치촉진법에 의거 1,800만의 아프리카인을 종족별로 10개 지정지에 격리·수용하고 명목상 자치권을 부여하나 실제로는 백인의 원격조정하에 이를 두려고 한 정책이다.
홈랜드에는 전국 면적의 13%에 해당하는 박토(薄土)만이 배분되어 자치구로서의 생존가능성이 보장될 수 없으므로 많은 아프리카인은 객지를 떠도는 날품팔이가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백인 경제는 종전대로 저렴한 아프리카인의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후 소수백인지배에 대한 내외의 압력이 제고되기 시작한 1974년 가을부터 남아프리카 정부는 홈랜드에 독립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1976년 트란스케이, 1977년 포프타츠와나, 1979년 벤다에 각각 독립이 주어졌다.
트란스케이(Transkei)
트란스케이는 반투 홈랜드 정책에 의해 1976년 10월에 독립이 부여된 최초의 아프리카인 홈랜드이다. 면적 4만 1620㎢. 코사족(族)을 중심으로 하는 175만의 인구 중 36만이 백인지역을 떠도는 날품팔이이며, 그 소득이 국가수입의 70%를 차지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의존도는 극히 높다. 유엔 총회는 이 독립을 무효화하는 한편, 전가맹국에 대하여 트란스케이와 접촉을 금지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트란케이는 199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편입되었다.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흑인인권운동가이다. 종신형을 받고 27년여 간을 복역하면서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저서로는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등이 있다.
출생과 학창시절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출생하였다. 템부(thembu)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족장에서 물러나자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성장하였다. 부족이 섭정에게 의탁되어 통치되었으며 만델라는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클라크버리(Clarkbury) 중등학교를 다녔다. 1940년 포트헤어대학 재학 중 친구가 백인에게 모욕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처음으로 인종차별적 대우의 부당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학생대표위원회으로 활동하다 학교측과 언쟁으로 갈등을 일으켰고 교장에게 불복종하여 학교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집안에서 정해준 여성과 약혼하기를 강요받자 집을 나와 요하네스버그로 갔다. 한때 금광에서 일하였지만 집에서 달아난 흑인임을 알려지자 곧 그만두게 되었다. 친척의 도움으로 요하네스버그 부동산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하게 되었으며 장차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다.
흑인인권운동 전개
법학은 만델라에게 유일한 지적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마침내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Wit Watersrand)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게 된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산하 청년연맹을 창설하였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동료였던 월터 시술루의 여동생을 만나 결혼하였다. 1951년 동료인 월터 시술루와 함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벌였던 비폭력운동을 전개하였으며1952년 비백인(非白人)으로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에 법률상담소를 열었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정책을 뜻하는 아프리칸스어)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하였다. 1950년대 들어 남아프리카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적 정책이 점차 엄격해졌는데 공공장소와 대중교통, 교육시설, 거주지 등 일상의 대부분에서 흑인과 백인을 강제로 분리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에 만델라는 아프리카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을 축출하는 포고령이 내려졌는데 1952년 만델라는 아프리카 국민회의 소속이었지만 공산주의와 교류가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재판을 받고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이후 만델라는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무렵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였다.
무장투쟁과 27년간의 복역
1955년 흑인 거주지인 요하네스버그 소웨토(Soweto)구역에서 남아프리카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유헌장》이 선포되었고 만델라는 《자유헌장》 발표에 관련되어 두번째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의 죄목은 국가반역죄였는데 1961년 최종 무죄로 판결받고 석방되었다. 1957년 만델라가 속한 아프리카 국민회의외 또다른 방계 단체인 범아프리카회의(Pan Africanist Congress. PAC)가 출범하였는데 이들은 강경한 투쟁을 표방했다. 1960년 3월 요하네스버그 남쪽에 있는 샤프빌(Sharpeville) 마을에서 대규모집회가 열였고 경찰은 총기를 난사했다. 69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하였는데 만델라는 이를 흑인학살사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한다. 1961년 6월 비밀회의에서 '국민의 창(Umkhonto we Sizwe)'이라는 비밀군대를 조직하였다. 만델라는 정부군에 맞써 싸우기 위해 게릴라전술을 습득하였고 에티오피아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962년 아프리카를 전역을 여행하며 무장투쟁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였고 아프리카의 여러나라에서 '국민의 창'에 동참해 줄 것을 연설했다. 1962년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와 국민의 창 회동을 가졌다가 은신처로 돌아가는 길에 체포되었으며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64년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에스퀴티니섬 로벤 아일랜드 감옥에서 27년을 복역했다. 1979년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상(賞),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rar) 국제상을 받았으며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노벨평화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대통령 선출
1990년 2월 2일 남아프리카 대통령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범아프리카회의(PAC) 등 흑인 정치 및 인권단체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그동안 내려진 금지조치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해방을 위해 투쟁한 지도자 약 375명을 석방하였다. 27년 간을 감옥에서 복역한 만델라는 1990년 2월 11일 석방되었으며 열렬한 군중의 함성속에 그는 주먹을 쥐고 팔을 들어올렸다. 출소 후 프랑스, 영국, 미국, 쿠바 등을 여행하며 세계 지도자를 만났다. 특히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만델라를 지지했던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1991년 7월 아프리카 국민회의(ANC) 의장으로 선출되었지만 남아프리카의 현실은 여전히 백인정부와 반목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백인정책에 반대하는 흑인들의 시위는 이어졌고 경찰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만델라는 흑인 극단주의자들에게서 온건하다는 비난과 줄루족 등 흑인 종족간의 갈등으로 복잡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백인정부와 협상을 지속했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종식되어야 마땅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파국을 막기위해 클레르크의 백인정부와 줄루족 등과 협상을 벌여 민주적인 선거를 관철시켰다. 이러한 공로로 1993년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참여 자유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다인종(36개의 분파가 존재) 의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마침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종결되었고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켰다.
저서로 자유를 위한 투쟁 의지를 밝힌 《투쟁은 나의 인생 The Struggle is My Life》(1961)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Long Walk to Freedom》(1995)이 있다. 1995년 7월과 2001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의 우의와 경제협력 방안을 협의하였다.
여행을 하면서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자는 생각에 옮겨 보았습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하면 아파르트헤이트와 넬슨 만델라만을 생각하지만 1993년 아파르트 헤이트를 철회하고 백인정부의 폐지라는 결단을 단행한 클레르크의 용기도 존중해야하는데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듯하여 상기시켜봅니다..
*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아프리칸스어: Frederik Willem de Klerk, 1936년 3월 18일~2021년 11월 1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으로,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부통령을 지냈다. 백인 소수자 통치 시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마지막 국가 원수로서 데 클레르크와 데 클레르크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 제도를 없애고 보통선거를 도입했다. 이념상으로는 보수적이며 경제적 자유주의자였던 데 클레르크는 1989년부터 1997년까지 국민당을 이끌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영향력 있는 아프리카너 가정에서 태어난 데 클레르크는 법조계에서 경력을 쌓기 전에 포체프스트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긴밀한 관계에 있던 국민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피터르 빌럼 보타가 이끄는 백인 소수 정부에 들어가 연속으로 장관직을 지냈다. 데 클레르크는 장관으로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거주하는 백인에게 특권을 부여한 인종 분리 체제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고 시행했다. 1989년 보타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데 클레르크가 그를 대신해 처음에는 국민당 대표로, 그 다음에는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관찰자들은 그가 보타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했지만, 드 클레르크는 이 정책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인종 적대감과 폭력 증가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인종 내전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폭력 사태 속에서 남아공 국가안보군은 만연한 인권 유린을 저질렀고 코사족과 줄루족 간 폭력을 조장했다. 데 클레르크는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행진을 허용했고, 이전에 금지된 다양한 반 아파르트헤이트 정당을 합법화했으며,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투옥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가를 석방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남아프리카 공화국 핵무기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데 클레르크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완전히 없애고, 보통선거로 전환을 확립하려고 만델라와 협상했다. 1993년에 데 클레르크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끼친 해로운 영향과 관련해 공개 사과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자체는 사과하지 않았다.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가 아프리카 국민회의 (ANC)를 승리로 이끈 1994년 비인종 선거를 감독했다. 이 선거에서 데 클레르크가 이끈 국민당이 2위를 차지했다.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의 아프리카국민회의가 주도하는 연립정부인 국민통일 정부에서 부통령이 되었다. 데 클레르크는 부통령일 당시, 정부의 자유주의 지향 경제 정책을 지지했지만, 정치 범죄와 관련한 완전한 사면을 원해 과거의 인권 침해를 조사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진실화해위원회와 대립했다. 이 일로 만델라와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훗날에는 관계가 개선되었다. 1996년 5월 국민당이 새 헌법에 반대하자 드 클레르크는 연정에서 탈퇴했다. 당은 다음 해에 해산되고 신국민당으로 재편되었다. 데 클레르크는 1997년, 정계에서 은퇴한 후 국제 무대에서 강의에 전념했다.
데 클레르크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포함하여 많은 상을 받았고,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보통선거를 도입한 공로로 널리 찬사를 받았다. 반대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가들은 그가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한 정당한 사과만하고 남아공 국가안보군의 인권 유린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한편, 일부 극우 또는 백인 우월주의 성향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들은 데 클레르크가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한 것을 자신들을 배신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넬슨만델라와 함께 존중받아 마땅한 백인 정치인이었습니다..
사족이 너무 길었나요?
만델라가 투옥했던 케이프타운 앞의 섬은 현재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징으로 많은 관광객은 찾고 있으나 다른 국가의 역사에 관심이 없는 우리 관광객들은 관심없는 장소입니다!
대부분 케이프타운은 테이블 마운틴, 희망봉 정도를 돌아보는 수준이죠~~
우리도 짧은 체류 기간에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칼레돈온천을 포함한 케이프타운 인근을 추가하는 여행입니다..
여행의 시작으로 아침 돌아보았던 Victoria wharf 풍경 남기면서 여행기 시작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