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총기 넘치면 短命運,박정희는 觀相보다
목소리 좋아 대통령 됐다”
이야기 命理學 ―② 身·言·書·判과 사람의 운명
身·言·書·判. 오랜 세월 동안 동양사회에서 인물을 평가할 때 적용하던 기준이다. 그중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지막 기준인 判이다. 身·言·書를 보는 이유도 최종적으로 판단력을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판단력에는 두가지가 있다. 바로 理判과 事判이다. 대체적으로 주어진 데이터를 분석, 종합해 내리는 합리적 판단이 事判이고 직관적이고 영적 차원에서 내리는 판단이 理判이다. 사주명리학이란 바로 理判의 세계를 다루는 학문인 것이다. 무턱대고 운명을 먼저 알려고 하는 것은 명리학을 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뒤 마음을 가다듬어 하늘의 뜻을 묻는 ‘先事判 後理判’의 자세가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편집자 주>
신·언·서·판(身·言·書·判). 오랜 세월 동안 동양사회에서 인물을 평가할 때 적용하던 기준이다. 신(身)이란 관상(觀相)을 일컫는다. 남자의 관상을 볼 때 포인트는 눈이다. 정기(精氣)는 눈에서 표출된다고 본다. 그러나 지나치게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면 총기는 있지만 장수(長壽)하지 못한다고 본다. 도교 내단학(內丹學)에서 말하는 인체의 3가지 보물(三寶)은 하단전(下丹田)의 에너지인 정(精)과, 중(中)단전의 에너지인 기(氣), 그리고 상(上)단전의 에너지인 신(神)이다.
눈빛에서 나오는 총기는 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가공하지 않은 자연상태의 원유가 정이라고 한다면, 원유를 어느 정도 가공해 나온 석유가 기이고, 상당히 가공해 나온 휘발유가 바로 신에 해당한다. 휘발유는 상당히 가공된 것이어서 귀하고 비싼 기름이다. 그러므로 평소에도 신이 항상 빛난다는 것은 비싼 휘발유인 신이 지나치게 과소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은 기에서 나오는 것이고, 기는 다시 정에서 생산되는 것이므로, 신을 많이 소비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하단전의 정과 중단전의 기도 이에 비례해 빨리 고갈되게 마련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스위치를 꺼놓아야지 항상 스위치를 켜놓고 있으면 배터리가 빨리 방전되는 이치다. 그러므로 관상가들은 눈빛이 지나치게 반짝거리면 빨리 죽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눈에 총기가 가득한 천재들이 대체적으로 장수하지 못하고 빨리 죽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려 아랫배를 관조하라는 말은 눈의 총기를 밖으로 품어내지 말고 내면으로 감추라는 말이다.
자기 몸을 감추는 둔갑술이란 바로 눈빛을 감추는 일이다. 인도의 성자(聖者) 라마나 마하리쉬의 눈빛을 보라! 지극히 고요하고 편안하면서도 보는 사람을 감동시켜 버리는 눈빛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눈빛도 수준급이다. 사람을 폭발시켜 버리는 테러리스트답지 않게 고요하고 편안한 눈빛이다.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눈빛으로 보인다. 기도를 많이 한 것 같다.
관상을 볼 때 또 하나의 포인트가 찰색(察色)이다. 얼굴의 색깔을 보는 일이다. 얼굴 생김새와 윤곽은 선천적으로 타고나지만, 얼굴색은 그때그때 상황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찰색을 일명 ‘기찰’(氣察)이라고도 부른다. 사람의 장기 운세는 관형(觀形)을 가지고 판단하지만, 눈앞에 직면한 단기적인 운세의 판단은 찰색을 보고 예감한다. 예를 들어 이마에서 빛이 나면 관운이나 승진운이 있다고 판단하고, 양쪽 눈 중간의 콧대 부분이 시커멓게 보이면 조만간 죽을 수도 있다고 본다.
관상의 대가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찰색의 핵심은 관상을 볼 때는 반드시 한낮인 정오에 나무그늘 밑에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정오는 태양이 중천에 떠서 자연광이 가장 밝은 시점이다. 그러나 너무 밝아 얼굴의 미세한 명암을 볼 수 없다. 나무그늘 밑은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이므로 음양이 균형잡힌 지점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조도(照度)다. 저녁때 카페 불빛 아래서는 찰색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결국 조도가 가장 균형을 갖추는 시점에 보라는 말이다.
사주를 보려면 생년월일시를 만세력(萬歲曆)에서 찾아 십간십이지의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지만, 관상은 상대방의 얼굴을 한눈에 판단할 수 있으므로 사주에 비해 신속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관상을 돈오(頓悟:한순간의 깨달음)에 비유하고 사주는 점수(漸修:점진적으로 닦음)에 비유하곤 한다.중세에 서양 귀족들이 사람을 만나러 출장갈 때 반드시 대동하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명은 이발사이고 다른 한명은 관상가였다고 한다. 정치나 사업이나 결국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상대를 겪어보기 전에 신속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상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없다.
관상을 제대로 마스터하려면 의학까지 공부해야만 하고 최소한 1만명 정도의 임상실험을 거쳐야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고 한다. 내공(內功)의 힘은 이론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임상실험의 횟수에 비례한다. 경험의 두께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관상의 대가는 하루아침에 배출될 수 없다. 20~30년의 누적된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관상의 고수들이 많이 있었지만, 관상 보는 일이 사회적으로 천한 직종으로 여겨지다 보니 소질 있는 젊은 사람들이 이 업종(?)에 입문하기를 꺼려해 현재는 후계세대가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전설적인 ‘觀相 大家’ 백운학 이야기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관상의 대가를 꼽으라면 단연 백운학(白雲鶴)이다. 1970~80년대까지 서울에는 백운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관상가가 상당수 활동했을 만큼 백운학은 관상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원조 백운학은 요즘 사람이 아니라 구한말 대원군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역문관 유충엽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백운학은 경북 청도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젊었을 때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있던 일허선사(一虛禪師)를 만나 관상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신상전편(神相全篇)을 사사(師事)받았다. 백운학은 일찍이 관상에 소질을 보였던 모양이다. 일허선사는 백운학에게 “너는 애꾸가 되어야 한다. 한쪽 눈이 없는 애꾸가 되어야 사람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충고하였다. 일허선사의 가르침에 따라 백운학은 멀쩡했던 한쪽 눈을 담뱃불로 지져 진짜 애꾸로 만들었다. 그러한 대가를 치르면서 백운학은 관상의 깊은 경지로 들어갔던 것 같다.
청도에서 관상수업을 마친 백운학은 어느날 한양으로 올라온다. 당시 대원군이 살던 운현방(현재 운현궁이 있는 자리)을 찾아가 마당에서 팽이를 치고 있던 13세 소년 명복(命福) 도련님에게 “상감마마 절 받으십시오”하고 땅바닥에서 큰절을 올린다. 열세살 먹은 어린아이에게 임금이라면서 큰절을 올렸다는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하도 황당해 애꾸눈 백운학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는다.
백운학이 말하기를 “제가 한양에 와서 보니 이곳 운현방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음을 보았습니다. 저기서 팽이를 치고 있는 명복 도련님은 제왕(帝王)의 상을 갖춘 분이라서 큰절을 올린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백운학은 대원군에게 복채를 요구했다. 대원군이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고 묻자 “제왕의 상을 보았는데 3만냥은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달라는 것이 아니고 4년 후에 주시면 됩니다” 했다.
3만냥이면 엄청난 거액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원군은 돈이 없던 시절이라 복채를 곧바로 줄 수는 없었고, 약속어음 비슷한 증서를 백운학에게 써 주었다고 한다. 과연 그로부터 4년후 명복 도련님은 고종으로 즉위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백운학은 복채를 받기 위해 대원군이 써준 어음을 들고 운현방으로 찾아갔다. 대원군을 찾아갈 때 백운학은 당나귀 4마리를 끌고 갔다고 한다. 당나귀 4마리는 3만냥의 엽전을 싣기 위한 용도였음은 물론이다.
3만냥의 복채 외에도 백운학은 대원군에게 벼슬을 요구하였다. 벼슬도 못하고 죽으면 신위(神位)에 ‘현고학생’(顯考學生)이라고 써야 하니 학생(學生)을 면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백운학은 복채로 3만냥과 함께 청도 현감이라는 벼슬까지 받았다고 하니 배포 한번 대단했던 셈이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백운학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이후 조선팔도에는 수많은 가짜 백운학이 탄생하게 된다.
여기저기 백운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관상가가 하도 많아 1990년대 중반 정보기관에서 전국의 백운학이 과연 몇명인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조사된 숫자가 2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광주에서는 3명의 백운학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웃지 못할 사실은 그 3명의 백운학이 모두 같은 빌딩에서 영업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로 자기가 진짜 백운학이라고 주장하였음은 물론이다.
관상과 사주는 頓悟漸修의 상호 보완적 관계
필자도 사주를 연구하다 보니 그 사람의 태어난 시가 불확실할 때는 관상을 참고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관상과 사주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다. 필자는 관상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재야의 숨어 있는 관상의 대가들을 수소문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전혀 뜻밖에도 재야(在野)가 아닌 대학교수 가운데 관상에 깊은 조예를 가진 인물을 알게 되었다. 원광대 서예과 김수천 교수의 소개로 만나게 된, 1997년 당시 성균관대 미대 교수로 있던 이열모(70) 교수가 바로 그 분이다.
지금은 정년퇴직하고 서울 팔판동의 한 미술관 관장으로 있다. 당시 이열모 교수를 만나 관상에 얽힌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이교수로부터 들은 관상담(觀相談) 가운데 유명한 일화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안응모씨의 승진을 알아맞춘 이야기다. 안응모씨는 말단 경찰 공무원으로 시작해 장관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친구였던 안응모씨가 승진할 때마다 이교수는 관상을 보고 그 사실을 미리 알아맞췄는데, 3번 예언에서 3번 모두 적중하였다.
“자네 언제쯤 승진할 것 같네”하면 어김없이 그 시기쯤 안응모씨가 승진하곤 했던 것이다. 이교수가 관상을 잘 본다는 소문이 나자 그의 화실로 사람들이 몰려와 관상을 봐달라고 사정하는 통에 화실을 여러번 옮겨야만 하는 고통도 겪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유학시절에도 친분 있는 교포들이 관상을 보러 오기도 하였다. 아무튼 박대통령만 제외하고 이후락 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을 비롯한 정·관계 모모한 인사들이 중간에 사람을 넣어 이교수에게 자신들의 관상평(觀相評)을 부탁하곤 하였다. 직업적인 술객(術客)이 아니고 동양화를 전공한 현직 대학교수였던 만큼 더욱 신뢰감이 갔던 것일까!
이교수가 처음 관상을 배우게 된 인연도 재미 있다. 그는 서울대 동양화과에 다니다 6·25를 만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한 사람이 많아 조그만 여인숙 방 하나를 어떤 영감님과 함께 사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영감님이 관상의 대가 김재학씨였다. 같은 여인숙 방에서 피난살이하던 대학생 이열모의 관상을 보고 “너는 난리통에도 절대 죽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언제 대학교수가 되고 이후 이러저러하게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과적으로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이 양반이 했던 예언은 거의 적중했다는 것이 이교수의 술회다. 김재학씨를 통해 이교수는 관상의 세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데다 서울대 미대 재학시절 부처상을 소묘하면서 ‘부처님의 얼굴을 왜 이렇게 조성하였을까. 32상 80종호는 무엇인가. 가장 이상적인 성자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길을 가거나 버스를 타면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곤 하였다.
6·25 이후 어느날 대학생 이열모는 우연히 서울 소격동쪽을 지나가다 우연히 어느 관상 보는 집에 들르게 되었다. 관상과 인연이 있어서였는지 거기에는 부산 여인숙에서 만났던 김재학씨가 관상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때부터 시간날 때마다 이교수는 김재학 선생에게 놀러 갔고, 유망한 제자가 들를 때마다 김재학씨는 관상의 핵심을 전수해 주었다. 하지만 김재학 선생은 이열모에게 “자네는 관상에 타고난 소질이 있어서 조금만 더 공부하면 이 분야의 대가가 될 수 있지만, 관상쟁이라는 것이 천대받는 직업이니 대학교수를 하라”고 충고하였다.
이열모 교수는 한동안 관상의 적중도에 심취했으나 40대 후반 들어서면서 다른 사람의 앞날을 미리 안다는 일이 무섭게 느껴질 뿐더러 동시에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관상 보는 것을 중단하였다. 다만 대학에서 수업을 받은 학생들이 4학년 졸업할 무렵에는 진로 선택에 관련된 조언만큼은 해주었다. 1997년 이열모 교수를 만나 관상 이야기를 나누면서 필자는 이교수에게 ‘한국의 관상학’에 대한 책을 하나 써 주시면 어떻겠느냐고 엉뚱한(?) 부탁을 드린 적이 있다. 사실 이 분야는 한국의 이면문화사(裏面文化史)요, 생활사에 해당하기도 한다. 미술 평론에 관한 책이야 선생이 아니라도 쓸 사람이 많지만, 관상에 대한 내용은 이열모 교수 같은 분이 책을 써 놓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다.